[25대구강의]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16 - 물음표
25,07,07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 할례를 받은 후에야 !!
오늘은 교재 148페이지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에 보면 출애굽기 12장 48절의 말씀이 나오는데, 즉 "너희와 함께 거하는 타국인이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거든 그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은 후에야 가까이하여" 라고, 그렇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출 12:48) 너희와 함께 거하는 타국인이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거든 그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은 후에야 가까이하여 지킬지니 곧 그는 본토인과 같이 될 것이나 할례받지 못한 자는 먹지 못할 것이니라
그러면 할례를 받지 않고 유월절을 지키면 어떻게 될까요? 유월절의 효력이 그 사람한테는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 '유월절 양과 우리' 라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있는 할례와 유월절 양의 만남' 이라는 것이죠.
그러니 어린양의 죽음이 효과가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는 것인데, 우리 자신이 아니고, 우리 안에 무엇에 흔적이 들어가는데, 그것이 바로 '할례' 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 할례는 뭐냐 하면, 율법에서 나온다는 말이죠.
그 율법의 흔적이 우리 안에 들어있을 때, 즉 "율법의 흔적이 여기에 들어있다", 또는 "여기에 장착이 되어있다. 숨어있다" 라고, 그렇게 율법이 들어왔을 때 비로소 어린양은 이 율법을 겨냥해서 만남이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린양의 죽음도 율법, 즉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 안에 있는 자들도 할례를 행해야 하는데, 할례가 없는 것은 무효라는 말이죠. 할례도 율법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무엇과 무엇의 만남이죠? 율법과의 만남, 율법은 누가 준 겁니까?
하나님, 이쪽의 율법은 누가 준 겁니까? 하나님인데, 그러면 결국 하나님의 인간구원이라는 것은, 인간은 배제되고 누구와 누구의 만남이라는 겁니까? 하나님과 하나님의 만남인데, 하나님 안에서 자기 약속을 스스로 성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죠.
별로 어려운 것이 없지요? 여기서 뭐가 배제가 됩니까? 우리의 존재가 배제가 된다는 겁니다. 한번 적어볼게요. "우리 존재가 배제된다" 라는 것인데, 이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하면, '희생'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 희생, 그것이 궁금하다 !!
유월절 어린양이 희생물인데, 펄펄 살아있던 양이 죽었는데, 그러니 희생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 인간이 희생한다는 것은, 남을 위해서 죽도록 봉사하고 자기는 죽는, 그렇게 남은 잘 되고 하는 것이 희생일까요?
그게 아닌데, 우리 안에 무엇을 집어넣으면 됩니까? 할례를 집어넣으면,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희생이라는 겁니다. 할례를 집어넣는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 세상에서 말하는 희생, 즉 남을 살리는 것과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부모가 자기 몸을 헌신해서 자식을 다섯이나 키우는 것, 일반 가정에서도 그런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는데, 물론 요즘은 그렇게 자식을 낳은 가정은 없지만 말이죠. 짐승의 세계에서도 자기 새끼를 키울 때 얼마나 희생적인지 모른다는 겁니다. 새들도 둥지에서 자기 새끼를 보호하는데, 그러면 새들이 구원을 받습니까?
자기 새끼를 자기가 희생해서 키우겠다는 것, 그것은 자기 자식이 자기 연속성을 보장해주기 때문에, 즉 "나는 죽어도 자식이 살면 나는 그 자식 안에 계속 영원히 불멸하는 존재가 된다" 라는 것인데, 그런 정신이 인간 속에 들어있는 본능적인 희생정신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니 자기 자식에게 희생했다고 해서 자꾸만 하나님을 들먹이고, 또한 바르게 살았다고 우기지 말라는 겁니다. 그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희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죠.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이 자기 것과 만난다는 겁니다. 거기에서 누구는 만나지 않습니까? 우리 인간의 뜻과는 만나지 않는데, 하나님이 스스로 하신다는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된다는 겁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율법이 들어오면, 그것을 뭐라고 했습니까?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희생이라는 것이죠. 우리가 희생이라는 말을 너무 흔하게 쓰는데, 여기서 이 일상용어를 한번 바꿔 보겠습니다.
희생은 자기 은퇴인데, 즉 자기로부터 자기가 은퇴되는 것, 그게 바로 희생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 장로님은 자기로서 언제 은퇴를 합니까? 그것은 자신을 잊어버릴 때인데, 간단하다는 말이죠. 죽을 때 은퇴를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죽을 때 어떻게 은퇴를 하느냐 하면, 그동안 '나' 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 '나' 라는 것이 뭐가 되냐 하면, 우리가 다 그러한데 말이죠. 저기 저기 경상에 가면 명복공원에 화장터가 있는데, 거기에 가면 우리 인간은 흙이 된다는 겁니다.
* 강제 은퇴 !!
제가 한 두 번을 간 게 아닌데, 이것이 뭐냐 하면, 바로 강제 은퇴라는 말이죠. 그렇게 흙으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게 되면, '나'와 흙은 드디어 분리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나'는 그동안 무엇이었는고 하니, 그것은 100퍼센트 가짜였다는 것이죠.
이 '나' 라는 게, 그냥 흙으로 살면 되는데 거기에다가 '나'를 집어넣어 버렸다는 겁니다. '나'를 받쳐주는 게 흙이었는데, 이것은 강제 소환이 되는 것이란 말이죠. 그렇게 강제 소환이 될 때, 우리는 그냥 흙일뿐이라는 겁니다. 나중에 요양병원에 가시거든, 눈만 꽉 감으시기 바랍니다. 그럴 힘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죠.
그렇게 눈만 꽉 감으면 뭐가 없어지냐 하면, '나' 라는 것이 사라지는데, 그러니 마지막으로 눈을 감는 순간, 그동안 나 자기한테 "이것은 확실하다" 라고 느꼈던 이 '나' 라는 게 완전히 가짜였음이 들통난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내가 나를 키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키웠다" 라는 것인데, 그런데 우리는 뭐라고 우겼느냐 하면, "내가 나를 키웠다" 라고 여겼다는 말이죠. '나' 라는 것은 없고, 하나님이 흙을 그 존재를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키워왔는데, 그런 그 도중에 '나' 라는 것이 끼어들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강제소환을 하시면서 무엇을 떼어냅니까? '나' 라는 것 자체가 가짜이기 때문에 이것을 분리시키고, 즉 그 '나' 라는 허상은 그만 날려보내고, 흙이니까 무엇으로 정체가 드러납니까? 흙으로 돌아가게 하는 그 순간이 온다는 겁니다.
지금 우리교회에도 아슬아슬하신 분이 좀 있는데, 5명이나 된다는 말이죠. 그분들이 특별히 잘못한 게 있습니까? 아니 사람이 죽는 무엇이 잘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게 시간을 따라서 순서에 맞춰서 소환되니까, 자기 본색들을 다들 드러낸다는 것이죠. 어떤 경우에는 한꺼번에 드러날 수도 있고 말이죠.
그게 대체로 나이별로 순서를 맞춰서 대기표를 뽑고 기다리고 있는데, 그러다가 요양병원을 거쳐서 명복공원에 가서 드디어 자기의 본모습을 드러낸다는 겁니다. 아니 자기 본모습을 드러내는데, 그게 그렇게 섭섭하고 아쉽고 슬프고 안타깝고 절망할 일입니까? 그동안 '나'로 인하여 흙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속임수를 쓴 세월이 들통이 났으면 기뻐해야 할 일이 아니냐는 말이죠.
"하나님을 계속해서 속이려고 하니까 더는 못 속이겠네. 하나님이 내가 흙인 것을 완전히 발각시키네. 하나님, 고맙습니다" 라고 하면서, 오히려 마지막 순간에 고맙다는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동안 '나' 라는 가짜가, 진짜는 흙이라는 말이죠. 가짜가 흙을 감추면서 살아온 그 세월, 그러니 이게 얼마나 힘든 인생이냐는 겁니다. 가짜가 진짜 행세를 하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죠.
* 악마로부터 온 '나' !!
그러면 그 '나'는 어디서 나왔을까요? 그 '나'는 악마로부터 왔는데, 이 악마라는 말은 에베소서 2장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이 세상의 어두움의 권세가 '나'를 만들었다고 한다는 겁니다. 어두움의 권세가 흙을 감추기 위해서, 언제 죽어도 상관없는데, 그런데 "나는 죽으면 안 된다" 라고 버티게 만들었다는 말이죠.
(엡 2: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그런데 하나님께선 고맙게도 어린양과 만나게 해주셨는데, 어린양은 분명히 누가 보기에도 양으로 보인다는 말이죠. 이렇게 생각하시면 쉬운데, "너는 양이고 나는 사람이고" 라고 할 때의 그 양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양 뒤에 뭐가 숨겨져 있는지를 찾아내면 되는데, 보기에는 양인데 그 뒤에 숨겨진 게 있다는 말이죠.
제가 강의를 시작하면서 이것을 뭐라고 이야기했습니까? 훅 지나갔는데, '율법' 이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유월절의 효과를 보려면 우리 안에 뭐가 삽입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까? 그것이 바로 할례인데, 그 할례가 율법에서 나왔다는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은 이 어린양의 뒤에 숨겨져 있는 율법과, 그리고 우리 인간 안에 숨겨져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뭐라고 했습니까? 그게 바로 할례인데, 즉 율법과 율법, 그렇게 율법끼리만 만난다는 겁니다. 우리하고는 상대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 하나님 VS 하나님 !!
하나님은 하나님하고 상대를 하시는데, 그게 여기 교재 148페이지부터 나온다는 겁니다. 여기 교재 151페이지에 보면, "문설주에 피를 바른다고 구원이 될 수 있습니까?" 라고 하는데, 그게 가능합니까? 안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유월절에 양을 잡아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을 받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가 가축시장에 가서 양을 사서,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면 됩니까? 그러면 마귀가 떠나갑니까? 그렇게 양의 피를 바르면 구원을 받습니까? 그것이 안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구약은 어떻게 했습니까? 유월절에 양을 잡아서 피를 내어서 문설주에 발랐다는 겁니다.
지금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냐 하면, 이스라엘부터 시작을 해보자는 말이죠. 어린양 뒤에 뭐가 있다는 것인데,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안에 어떻게 하셨습니까? "어린양 뒤에 뭐가 있는데, 또 너 안에 뭐가 있다" 라는 겁니다.
이것은 무엇과 무엇의 만남입니까? "율법과 율법의 만남으로 너희는 구분된다" 라고 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할례를 행하고, 그리고 유월절에 양을 잡아서 피를 내고 문설주에 바르고 양고기를 먹고 했다는 것이죠. 그러면 그 이스라엘은 어떻게 됩니까?
* 죄를 짓는 순간에 죽으면, 그 사람은?
제가 문제를 하나 낼 테니까 여러분이 맞춰 보세요. 어떤 목사님이 설교를 하는 가운데 나온 문제인데, 즉 "죄를 짓는 순간에 그 사람이 죽는다고 하면, 그러면 과연 그 사람은 천국에 갈까요? 지옥에 갈까요?" 라는 겁니다.
지금 제가 그 목사님을 대신해서 여러분에게 따지고 있는데, 여러분이 답변을 해보세요. 우리는 이 답변을 통해서, 우리가 평소에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었는지가 들통이 난다는 말이죠.
보통 뭐라고 합니까? 죄를 짓고 난 뒤에 돌아서서 "아, 내가 큰 죄를 지었구나" 라고 하면서, "하나님, 이 큰 죄를 용서받을 것은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그 십자가로 저를 용서하시면, 저는 방금 죄를 지었지만 예수님의 피로 용서함을 받아서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라고 나오는데, 순서가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이 죄를 짓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살아서 "내가 죄를 지었구나. 잘못했구나" 라고 하는, 이런 것 자체가 없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죄를 짓는 순간에 죽어버렸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때 그 사람은 천국에 갈까요? 지옥에 갈까요? 회개할 타이밍을 놓쳐버렸다는 것이죠.
지금 제가 문제를 내는 취지를 잘 알겠죠? 여러분이 답변을 해보세요. 그 사람은 과연 천국에 갈까요? 지옥에 갈까요? 여기에 무슨 근거가 있습니까? 회개할 기회조차도 없었다는 겁니다. 만약에 근거가 있다면, 그 근거가 무엇이냐는 말이죠.
그 사람이 죄를 짓기 일주일 전에 회개한 것이 효과를 보는 겁니까? 그렇지 않으면 3년 전에 기도원에서 은혜를 받은 것 때문에, 3년 후에 죄를 짓다가 죽어도 죄 용서를 받느냐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유아세례의 효과입니까?
(누군가가 답변하기를) "예수님을 믿음으로 성령이 내 안에 오고, 그래서 내 안에는 거듭남이 있고, 그러면 예수님이 내 안에 거주하시는데, 그러면 용서를 받을 수 있지 않습니까?"
강의시간에 질문을 던지면 제가 편한데, 왜냐하면 여러분이 이야기해주기 때문에, 저에게는 약간은 쉬는 시간처럼 느껴진다는 말이죠. 아무튼 지금 이 문제는 어떠한고 하니, 사실은 문제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죄를 짓는 순간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해당 사항이 없다는 것이죠.
그런 순간은 없는데, 죄 짓는 순간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죽은 자로서 태어나기 때문에, 인간은 죄를 지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죄가 인간을 가지고 놀기 때문에, 즉 죄를 짓는 순간이 없고 태어날 때부터 죄가 지배하고 있다는 겁니다.
* 죄가 아닌 순간이 없어 !!
그래서 밥을 먹는 순간, 바닷가에 수영을 하는 순간, 어느 순간도 죄가 아닌 순간이 없었다는 말이죠. 따라서 그 사람이 죄를 짓는 순간이라고 여기는 것은, 이게 인간은 처음부터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게 죄인이 죄를 짓는 순간이란 말을 하는 그 순간은 뭐냐 하면, "죄인이지만 의인이 될 때도 있었고, 또한 죄인일 될 때도 있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죄를 짓지 않으면 지으면 의인이고, 죄를 짓는 순간 죄인이었다" 라고 하는, 이런 인식 자체가 무엇인고 하면, 그게 천국을 반대하는 생각이라는 말이죠. 이것을 뭐라고 하냐 하면 이게 '선악구조' 라는 겁니다.
이 선악구조는 성경을 100독을 해도 계속해서 살아있는 말이죠. 꼭 무좀 같은데, 무좀은 한 번 걸리면 고쳐지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20년 동안 무좀을 고치지 못했다고 하는데, 얼마나 지독한지 모른다는 것이죠.
* '나' VS '우리' !!
그러면 이 선악구조를 한꺼번에 확 날리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이것은 누가 하실 수 있는고 하면, 물론 우리는 못하고 하나님만이 하시는데, 그게 뭐냐 하면, '나' 라는 것 자체가, 이게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가짜 인식이라는 것을 발견해야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나' 라는 것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선악 체제와 결부해서 등장한 게 '나' 라는 개념이라는 말이죠.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고 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당부를 했는데, 선악을 아는 지식은 따먹지 말라고 말이죠.
이것을 구체적으로 말하면, 선악을 아는 것을 따먹는 순간 없는 가짜인 '나'가 발생해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따먹기 이전에는 '나' 라는 인식이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없었다는 말이죠.
'나' 대신에 뭐가 있었느냐 하면 '우리'가 있었다는 겁니다. 이 '우리'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따로 어떤 입자나 개별자처럼 '나'를 '우리'에서 분리할 필요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다는 말이죠.
여러분, 주기도문을 알죠? "하늘에 계신" 라고 시작하는데, 그 다음에 무엇이 나옵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같이 살게 되었다는 생각을 해야 하는데, 그런데 "예수님 때문에 내가 살게 되었다" 라고 해버리면 무엇이 탈락입니까? '우리' 라는 개념이 사라지고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나옵니까? "예수님은 나한테 무슨 이익을 줄 겁니까?"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게 기본 베이스로 깔려버리면, 아무리 구원을 해주고 천국에 보내주어도, 천국에 가서 어떤 의식이 남아 있을까요?
그러면 "나, 천국에 왔다" 라고 하게 되는데, 즉 '나' 라는 의식이 있다는 말이죠. 하지만 이렇게 되면 자기가 천국에 오기 위해서 엄청나게 애를 썼기 때문에, 면류관을 과연 내놓을까요? 오히려 단단히 고무줄로 자기와 묶어버린다는 겁니다.
"이것은 내 상급이야. 내 거야" 라고, 즉 자기 소유 의식을 가지고 천국에서 살아가게 되는데, 그런 천국은 없다는 말이죠. 물론 그런 자는 넣어주지도 않겠지만, 그렇게 자기가 살아있는 천국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지독한 무좀과 같은 '나'를 무엇으로 바꾸느냐 하면, '우리'로 바꾸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나'는 어떻게 되는고 하니, '나'를 희생시켜 '우리' 라는 그 '우리' 속에 편입을 시켜 버린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그 '우리' 속에 주님은 함께 계시는데, 즉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을 부르는 곳에 내가 함께 있겠다" 라는 것이죠. 그렇게 주님이 함께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가 된다는 겁니다.
(마 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무슨 말인고 하니까, 이렇게 두 세 사람이 있는데, 여기에 예수님이 함께 있으면, 이것은 뭐가 되느냐 하면 '우리'가 된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네 사람이 함께 있을 때는 어떻게 됩니까? 이 '우리' 라는 개념은 역시 깨어지지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14만 4천명이 있으면 '우리' 라는 개념은 깨어집니까? 역시 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러면 반대로 해서, 두 사람이 있는데 예수님이 있다고 하면, '우리' 라는 개념은 깨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 혼자 있는데 예수님이 있다고 하면, 역시 '우리' 라는 개념은 깨어지지 않는다는 말이죠.
* 단위성 !!
이것을 제가 지난 오후시간에 설교를 하면서 '단위성' 라고 했는데, 즉 "cm, kg, 리터"와 같다는 겁니다. 이런 단위의 경우에는, 그 앞에 숫자가 천이 붙든 만이 붙든, 그런 것은 하나님께 일체 보지를 않는다는 것이죠.
이 단위가 예수님과 함께 본질로서 연결이 되어있는 단위라고 하면, 자기가 10년을 살든 100년을 살든, 이 '우리' 라는 개념은 처음 애초부터 어떻다는 겁니까? 이 단위성은 깨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라고 하셨는데, 마태복음 제일 마지막 장인 28장에 보면 그 말씀이 나온다는 겁니다.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런데 처소를 마련하게 되면 주님께서 오신다고 하셨는데, 주님이 베드로에게 왜 오시느냐는 말이죠. 제자들에게 왜 올까요? 예수님이 아버지께 받은 사명이 무엇인고 하니, '너' 구원이 아니고 '우리' 라는 겁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우리'를 조직하신다는 말이죠.
'나' 구원은 아닌데, 그것은 교회에 속은 겁니다. '나' 구원 자체가 없다는 말이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나'가 '우리'를 방해한다는 생각이 없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교회가 말씀 중심이 되지 못하고 교회 존재 중심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 여보, 이제 우리는 살았다 ??
'교회' 라는 조직체가 중심이 되어서, 목사가 "여러분만 구원을 받으면 됩니까? 남편, 자식을 모두 다 우리 교회에 불러서 구원을 받아야지요" 라고 하면서 자꾸만 전도집회를 열고 하니까, 사람들이 이런 개념에 빠져서 어떻게 합니까?
자기 남편이니까 이것이 어디에 복속이 됩니까? '나'에게 복속이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여보, 이제 우리는 살았다. 당신도 구원받고, 나도 구원받고" 라고 하게 되는데, 하지만 그것은 가족 단위별 개별체라는 겁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 뒤에 보면,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라고 하시는데, 즉 "너 자신을 미워하지 않으면 나를 따를 수 없다" 라는 겁니다.
(마 10: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마 10: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마 10: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마태복음 12장 끝에 보면 무슨 내용이 나오는고 하니, 누군가가 "예수님, 저 뒤에 예수님의 가족이 와 있는데요?" 라고 하니, 예수님은 "누가 내 가족인데?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라야 나의 가족이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즉 "율법이 개입되고 말씀이 개입된 자들이야말로 나의 어미고 나의 동생들이다" 라는 겁니다.
(마 12:46)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마 12:47) 한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 하니
(마 12:48)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마 12:49)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마 12: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이것을 문자로 해석하면 "이상하네. 예수님의 어머니는 마리아인데, 그러니 말이 안 되잖아. 어떻게 예수님은 자기 설교를 듣고 있는 사람들을 자기 가족이라고 하느냐?" 라고 나오게 되는데, 여기서 논리적인 도약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 주님의 개입 !!
이것은 '나'부터 출발을 하니까, 성경을 백날 봐도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예수님의 뜻은 '우리'를 만드는 것이 있는데. 그런데 그 '우리'에 무엇이 방해가 됩니까? '나' 라는 개별자, 입자, 이런 하나의 개체가 방해가 되니까, 주님께서는 이것을 제거하신다는 겁니다.
그렇게 제거하는 것을 제가 아까 '희생' 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가 봅시다. 명복공원에서 강제은퇴를 당하는 것이 희생인데, 그러니 "나를 나에게서 떼어내는 것이 희생이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게 과연 인간의 힘으로 될까요?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의 개입이 있는데, 왜 주님이 개입을 하십니까? 이 주님의 개입은 율법의 완성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율법의 완성이 개입하니까, 결국 '우리' 안에는 뭐냐 하면, 즉 인간 안에, '나' 안에 무엇이 주입되느냐 하면, 율법의 완성이 주입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나' 안에 예수님이 이루었던 율법의 완성이 개입되게 되면, 하나님의 희생물이 '내' 안에 있는 율법의 완성과 만남으로서, 이 '나' 라는 것이 '우리'로 변하면서, 거기에 딸려서 천국에 같이 입성하게 된다는 말이죠. 이게 바로 천국에 가는 원리라는 겁니다.
* 그들은 왜 구원을 받지 못했을까?
여기서 교재 151페이지에 있는 문제를 한번 풀어봅시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양을 잡고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모두 했는데, 그런데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말이죠. 왜 구원을 받지 못했을까요? 유월절을 지키라고 해서 지켰고, 할례를 행하라고 해서 행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들은 왜 구원을 받지 못했느냐는 것이죠.
거기에 대해서는 제가 아직까지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데, 지금 이야기를 해드리겠습니다. 희생양, 즉 어린양이라는 겁니다. 어린양 플러스 요것, 그 다음에 인간이 있는데, 그 인간 안에 들어있는, 즉 인간 플러스 이것, 이것(?)의 이 물음표가 바로 '할례' 라는 말이죠.
* 할례의 구체화 !!
이 할례가 멈추지 않고 어디로 발달을 하는데, 또는 구체화라고 해도 되고, 아무튼 이 할례가 발달을 하고 발전을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어린양의 그 무엇도 같이 발달을 하고 발전을 하고 구체화가 되고, 결국은 완성이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희생양과 인간, 즉 죄에 있는 육신에 결합되신 분이 누구입니까? 죄 있는 육신으로 오신 분이 누구입니까?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오실 때, 요한복음 1장에서 세례요한이 뭐라고 합니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죠.
(요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그러면 희생 안에 있는 이 물음표, 그 무엇과 할례 속에 있는 무엇이 누구에게서 완전히 완성이 되고 만납니까? 예수님에게서 완성이 되고 만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 구약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희생양을 드리고 유월절을 지키고 할례를 행하는 것은, 그 자체로 구분이 됩니까? 안 됩니까? 그게 안 된다는 말이죠.
이것을 어느 지파에서 했는고 하니까, 바로 구약 때 레위지파에서 했다는 겁니다. 그렇게 레위지파에서 했는데, 벌써 구약 때부터 이 레위지파의 한계가 드러났다는 말이죠. 그게 교재 151페이지에 나오는데, 거기에 보면 히브리서 7장 11절의 말씀이 나온다는 겁니다.
(히 7:11)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
* 레위지파 VS 유다지파 !!
이 레위지파의 제사가 온전하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온전하지 못하다는 겁니까? 온전하지 못하다는 말이죠. 이게 흥미롭고도 약간 어려운데,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레위지파를 통해서 하지 말고 다윗지파를 통해서 하시면, 굳이 레위지파가 유다지파로 교체되는, 그런 번거로움이 필요가 없었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제사를 누구한테 책임지라고 했습니까? 레위지파에게 해놓고는, 아니 레위지파한테 했으면 끝까지 가야될 텐데, 그런데 이 중간에 율법의 발전을 통해서 레위지파가 유다지파로 바뀌게 된다는 말이죠.
여기 히브리서 7장 11절의 말씀을 보면, 레위지파의 제사 직분이 나오는데, 즉 "그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겠느냐?"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면, 12지파 가운데 레위지파부터 시작한 일을 레위지파로 끝내야 되는데, 그런데 그렇지 않고 도중에 유다지파로 바뀐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바뀐 이유가 뭐냐 하면, 레위지파의 경우에는, 인간이 무엇을, 즉 제사를 드린다는 겁니다. 그런데 유다지파는 인간이 제사를 드리지 않는다는 것이죠.
* 다윗의 후손 !!
유다지파는 그 유다지파에서 나온 다윗의 자손, 다른 자손들은 소용이 없고,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분이 단번에 들어가심으로서 그만 게임을 끝내버렸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레위지파의 후손이 끝내지 않고, 왜 유다지파의 다윗의 후손이 끝을 내는 겁니까?
다윗은 시편 51편에서 뭐라고 합니까? 그것은 다윗이 죄인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처음에는 간음죄, 그 다음에 살인죄인데, 기존의 선악체계에서 간음죄는 죽어야 되고, 물론 살인죄도 죽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다윗과 계약을 맺으면서, "너는 죽어야 된다" 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죄를 지어서 죽어야 된다는 것이 아니고, 그런 차원이 아니라는 말이죠. 다윗은 자기가 처음부터 죄 가운데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여태껏 몰랐다는 겁니다.
* 다윗을 통해서 !!
그런데 자기가 간음죄와 살인죄를 저지르면서, "아하, 이게 내가 죄를 짓는 것이 아니구나" 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죠. 즉 "내가 죄를 지을 때도 있고 죄를 짓지 않을 때도 있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모친이 나를 죄 덩어리로 태어나게 했다" 라는 것인데, 그것을 최초로 다윗이 알았다는 겁니다.
(시 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십자가를 집어넣는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바로 "내가 몰랐던 진짜 나의 모습은, 죽어 마땅하구나"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됨으로서 우리는 흙으로 돌아가도 마땅한 그 이유를 알게 되는데, 그런 자가 바로 진정으로 성령을 받은 자라는 겁니다. 그러니 성령을 받은 자에게서 감사가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죠.
선악체제를 박살내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는데, 선악체제에서 우리는 의인이 되고 싶지, 죄인이 되기는 싫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선악체제가 아닌, 하나님의 율법의 완성이 오게 되면, 그게 끝까지 간다는 말이죠.
* 구원은, 예수님 소관 !!
다시 말해서, "내가 왜 내가 왜 흙이 되어야 하는가?" 라고 하는, 그 이유를 미리 미리 아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나의 구원이 내 소관이 아니고 예수님의 소관이구나" 라고 하면서, 소관 부서가 넘어간다는 겁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습니까?" 라고, 그렇게 자기가 담당하고 있던 소관 부서가 말이죠.
자기는 죄인인데, 그러니 죄인이 구원받고자 어떤 아이디어도, 그것은 죄가 된다는 겁니다. 엉터리라는 것이죠. 그래서 주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예수님이 대신 죄인이 되시는데, 그렇게 예수님에게로 소관 부서가 넘어가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예수님의 주관 하에 자기와 미지의 것에서 분리가 일어난다는 겁니다.
* 나는 다윗을 통해서 죄인이 되었다 !!
여기에 물음표로 표시를 했는데, 일단 이 물음표 속에 무엇이 들어가는지를 한번 봅시다. 물음표 속에서 '나'와 '그들'은 딱 붙어 있는데, 이 '나' 라는 것이 물음표에서 막혀 있다는 말이죠. 자기는 끝까지 이 '나' 라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이 '나'는 무언가와 결합이 되어있었다는 겁니다.
그 결합된 것이 물음표인데, 이 물음표 속에 무엇이 있는고 하니, 아까는 무엇이 있다고 했습니까? 그게 흙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또 하나를 해봅시다. 다윗을 통해서 '나'는 무엇이 되어있었는고 하니, 그것이 바로 죄인데, 즉 죄인이 되어있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다윗에 의해서 '나'는 뭐가 되어있습니까? "나는 하나님의 언약에 속했다" 라고 하게 되는데, 또한 마지막으로 '나'는 무엇이 결합이 되어있습니까? 그것이 곧 '우리' 라는 것인데, 예수님과 더불어 사는 것, 그렇게 '우리'로 함께 있는 것이 바로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는, 그것을 두고 '천국'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천국을 누가 방해했어요? 자기의 개인적인 탐욕, 그 욕망이 방해를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욕심을 없애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욕심은 우리의 힘으로는 멈출 수가 없다는 말이죠. 우리 안에 들어온 영적인 것은, 육이 영적인 것을 나가라고 밀어낸다고 나가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게 분리가 안 되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분리를 시키는고 하니까, 그 이야기가 성경 전체에 다 들어 있다는 말이죠. 성경 전체에 있는 그 내용을 하기 전에, 먼저 자기와 분리되는 게 얼마나 아픈지를 하나의 사례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 휴대폰과의 분리 !!
여러분이 휴대폰과 잠시 헤어져 있어보세요. 휴대폰을 다들 가지고 있지요? 휴대폰이 없다고 한번 생각을 해보세요. 휴대폰이 없이 살 수 있습니까? 물론 살아갈 수는 있다는 겁니다. 그 다음 질문입니다. 자기 힘으로 이 휴대폰을 던질 수 있습니까? 없는데, 자기 힘으로 이게 안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남이 휴대폰을 분리시켜주면 되는데, 그러면 하나님의 뜻으로 받을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가 만약에 무엇인가를 떼어내면,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그리움이 남게 생기다는 말이죠. 그렇게 그리움이 남아있으면, 그게 제대로 떨어졌다고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 자식과의 분리 !!
이번에는 휴대폰보다 더 센 것을 해보겠는데, 여러분은 자기 자식과 헤어질 수 있습니까? 없는데, 그런데 자식이 하나님에 의해서 강제로 없어졌을 때, 그러면 무엇이 무엇이 남습니까? 그리움이 남는다는 말이죠. 그렇게 그리움이 남아있는 이상, 자식은 땅에 묻는 게 아니고 자기 가슴에 묻는데, 그렇게 자식을 계속해서 살아있다는 겁니다.
제가 처음부터 이 이야기를 했는데, 그게 뭐냐 하면, '나' 라는 자아의 구성요소에 자기가 사랑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타인이 있어서, 그 타인이 같이 구성요소를 이룬다고, 바로 그 이야기를 했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게 아브라함에게는 누가 되겠습니까? 이스마엘이 아니고, 아브라함에게는 누구일까요? 이삭이라는 겁니다. 야곱에 있어서 사랑하는 자가 누구였습니까? 요셉이라는 말이죠. 그 요셉도 야곱에게 죽었고, 또한 그에 앞서서 이삭도 아브라함에게 죽었다는 겁니다. 누가 강제로 떼어냈습니까? 하나님이 강제로 그렇게 하셨다는 말이죠.
* 할례, '너는 네 자식이 아니야' !!
그러면 하나님이 왜 떼어냈을까요? 그것이 교재 149페이지에 나온다는 겁니다. 거기에 보면 "하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을 하시는데, '너, 할례를 행했잖아. 그러니 이제 너는 자식이 없잖아' 라고 하십니다" 라고 되었다는 말이죠. 이것은 출애굽기 13장 1절(?)에 나오는 말씀이라는 겁니다.
(출 13: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출 13:2)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
이렇게 할례를 행했다는 것은, "더 이상 너의 자식은 너의 소유가 아니다" 라고 하는 율법의 개입이 들어간 것인데, 즉 할례를 받은 자는 더 이상 자기 자식이 아니고 할례를 행하라고 하는 하나님의 자식으로 전환이 되었다는 이야기라는 말이죠.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그러면 여기서 신명기 21장 18절에서 21절을 보겠습니다.
(신 21:18)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 아비의 말이나 그 어미의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부모가 징책하여도 듣지 아니하거든
(신 21:19) 부모가 그를 잡아가지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신 21:20)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거든
(신 21:21)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의 중에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자식이 말을 듣지 않으면 몰래 죽이는 것이 아니고, 공개적으로 돌로 쳐죽이는 것인데, "이 누구 자식은 어느 집 자식이야? 맞아 죽어도 싸" 라고 하면서 공개적으로 돌로 쳐서 죽인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악을 제하면 온 이스라엘 듣고 두려워한다고 되어있다는 말이죠.
* 돌로 쳐서 죽여라 !!
그러면 여기서 문제가 나갑니다. 옆집에 매일같이 술을 퍼먹고 방탕하게 살아가는 자식이 있는데, 그 부모가 다른 사람에게 부탁을 한다는 겁니다. 자기 자식을 돌로 쳐서 죽여 달라고 말이죠. 그렇게 할 때 그들은 돌을 던지겠습니까? 던지지 않겠습니까? 둘 중에 하나인데, 전혀 복잡하지 않다는 겁니다.
돌을 던지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 다음 번은 자기 자식이 그 순서라는 말이죠. "내 자식을 죽였지. 어디 네 자식은 잘하는지 한번 보자"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민수기 15장에 보면, 안식일에 나무를 한 사람이 있는데, 그런 자도 돌로 쳐죽이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민 15:32)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 거할 때에 안식일에 어떤 사람이 나무하는 것을 발견한지라
(민 15:33) 그 나무하는 자를 발견한 자들이 그를 모세와 아론과 온 회중의 앞으로 끌어왔으나
(민 15:34) 어떻게 처치할는지 지시하심을 받지 못한 고로 가두었더니
(민 15:3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 사람을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진 밖에서 돌로 그를 칠지니라
(민 15:36) 온 회중이 곧 그를 진 밖으로 끌어내어 돌로 그를 쳐 죽여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하니라
그렇게 돌로 쳐서 죽일 때, 만약에 자기가 제일 미워하는 사람이 안식일에 나무를 했다고 하면, 그것을 빌미 삼아 때려죽일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안식일에 나무를 했다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과연 돌을 들고 쳐죽일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죽이지 못한다는 말이죠. 이게 뭐냐 하면, 자기 안에 그리움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그리움이 쌓여서 '나' 라는 것이 된다는 말이죠.
이 '나' 라는 게 그렇게 지독한데, 무좀균과도 같다는 겁니다. 없어지지를 않는데, 그래서 우리 인간은 이 '나'에서 헤어 나오지를 못한다는 말이죠. 도저히 헤어질 수가 없는데, 지금 제가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 긁어내는 율법 !!
"나는 내게서 배제가 안 된다" 라는 것인데, 그럴 때 무엇이 주어집니까? 율법이 들어와서 긁어낸다는 말이죠. 그렇게 자기의 모든 것을 끌어낼 때, "너는 죄다" 라는 명목으로 긁어낸다는 겁니다. 즉 "너는 교만이다. 자만이다. 너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지 않고, 너는 네가 가진 것을 사랑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여러 가지의 구실을 대면서 우리 속에서 '나'를 끌어내는데, 그렇게 강제로 끌어내는 것이 율법의 기능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여기 신명기 21장에 나오는, "이 자식을 죽여라" 라는 게 실제로 이루어질 가능성은 적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그 다음에는 자기 자식이 이제 죽을 판이니까 말이죠.
* 하나님의 방식 !!
그러니 인간의 힘으로 이 율법을 지킬 수가 없는데, 그 어떤 율법도 지키지 못한다는 겁니다. 너무 극단적이고 인정사정도 없다는 말이죠. 사람의 정이라는 것은 용납해주지 않는데, 그러면 하나의 방식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되게 하시는고 하니, 그게 여호수아 7장 1절에 나온다는 말이죠.
(수 7:1)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친 물건을 인하여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바친 물건을 취하였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
이제 오늘강의의 핵심부분에 들어섰는데, 문제의 핵심을 도표로 간단하게 말씀해드리겠습니다. 아까 언급한 물음표가 똑같다는 겁니다. "아간 + 물음표", 그리고 "가룟유다 + 물음표" 라는 것인데, 그러면 이 물음표에 무엇이 들어있을까요? "가롯유다 + 물음표" 라는 것은 요한복음 6장 70절에 나온다는 말이죠.
(요 6:7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라고 하셨는데, 우리가 보기에 가룟유다는 인간이지만, 그러나 그 뒤에 무엇이 있느냐 하면, 그것이 바로 사탄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사탄과 가룟유다가 결합이 되어있다는 말이죠.
* 아간은 무엇과 연결이 되어있는가?
그렇다면 아간은 무엇과 연결이 되어있을까요? 지금 우리가 여기서 이 문제를 다루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아까 했는데, 우리 힘으로 우리는 자아에서 벗어날, 자아를 배제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겁니다. 우리에게 그런 능력은 전혀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다음에 어떻게 되든 간에 어떻게 나옵니까? "나를 구성할 때, 좋아하고 또 나를 좋아하는 그분들과 연합되어서 내가 구성되기 때문에, 내가 나를 떼어낸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미치지 않고서는 그것을 왜 떼어내느냐는 말이죠.
하지만 떼어내지 못하면 지옥에 가는데, 그러나 지옥에 가든 천국에 가든 그것은 나중 문제라는 겁니다. 즉 "죽을 때 화장터가 있는 명복공원에 가든 말든 그것은 그때의 문제이고, 지금 나는 나와 나 사이를 도저히 떼어낼 수가 없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우리는 명확하게 정리하는데, 즉 "나는 나와 헤어질 의사가 없다" 라는 겁니다. "성경에서 그것을 죄라고 하든 뭐라고 하든 나는 듣기 싫고, 어쨌든 나는 나와 헤어질 수 없다"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죠.
* 주님의 일방적인 조치 !!
그렇게 자기와 헤어질 수 없다고 단호하게 확정해버린 우리 자신, 그것을 주께서 구원하려면 주님의 어떤 일방적 조치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일방적인 조치가 말이죠. 그런데 그 조치는 하나님의 말씀에 준해서 이루어진다는 말이죠.
그러면 여기서 여호수아 7장 1절에서 25절을 보겠습니다.
(수 7:1)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친 물건을 인하여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바친 물건을 취하였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 …
(수 7:24)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세라의 아들 아간을 잡고 그 은과 외투와 금덩이와 그 아들들과 딸들과 소들과 나귀들과 양들과 장막과 무릇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고 아골 골짜기로 가서
(수 7:25) 여호수아가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를 괴롭게 하였느뇨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를 괴롭게 하시리라 하니 온 이스라엘이 그를 돌로 치고 그것들도 돌로 치고 불사르고
(수 7:26) 그 위에 돌 무더기를 크게 쌓았더니 오늘날까지 있더라 여호와께서 그 극렬한 분노를 그치시니 그러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날까지 아골 골짜기라 부르더라
* 폭력에 가담한 이스라엘 !!
여기에 보니 돌로 치는 사태가 일어났는데, 누가 누구를 칩니까? 온 이스라엘이 누구에게 돌을 던집니까? 아간에게 돌을 던졌고, 아간은 돌무더기 속에서 자기 시신이 사라지고 있다는 겁니다. 세상적으로 말하면 폭력이 행사되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폭력에 가담한 자는 누구입니까? 온 이스라엘이라는 것이죠.
결국 인간이 '나'로부터 벗어나지를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나는 나에게 폭력을 행사하기 싫다" 라는 것인데, 그렇지요? 즉 최종적으로 자기가 귀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 여호수아서 7장에 보니까, 아간에 대해서는 주저 없이 돌을 던졌다는 말이죠.
만약에 그 현장에 여러분이 있었으면, 여러분도 돌을 던졌을 겁니다. 자기 자식이 술을 먹는다고 해서 던지라고 했을 때, 물론 그런 경우에 사람들이 던졌다는 게 성경에 나오지는 않지만 말이죠. 그런데 아간을 죽일 때는 같이 합세해서 돌을 던져서 죽였다는 겁니다.
왜 죽였을까요? 아간의 경우에, 아간이 나쁜 짓을 했다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압수수색을 해서 알아냈습니까? 그게 아닌데, 누군가가 개입을 했다는 말이죠. 그러면 누가 알아냈습니까? 제비뽑기를 통해서 알아내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제비뽑기를 누가 주도했지요? 하나님이라는 말이죠. 이스라엘 전체에서 유다지파로, 그리고 그 유다지파에서 세라족속, 그리고 삽디의 손자인 아간으로 좁혀졌다는 겁니다. 그렇게 계속해서 뽑기를 했는데, 그것을 하나님이 주도했다는 것이죠.
(수 7:16) 이에 여호수아가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그 지파대로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유다 지파가 뽑혔고
(수 7:17) 유다 족속을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세라 족속이 뽑혔고 세라 족속의 각 남자를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삽디가 뽑혔고
(수 7:18) 삽디의 가족 각 남자를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이요 삽디의 손자요 갈미의 아들인 아간이 뽑혔더라
* 율법의 성취는, 인간의 뜻이 배제된 상태에서 !!
그러면 여기서 인간의 뜻이 배제가 됩니까? 되지 않습니까? 완전히 인간의 뜻은 배제가 되었다는 겁니다. 이게 중요한데, 즉 "나의 뜻은 완전히 배제된 상태에서 율법이 성취된다는 원리가 통한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여러분, 신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야, 돌을 던져" 라고 하면, 우리는 던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나님, 그 사람은 그 사람이고 나는 나입니다. 만약에 내가 그 사람에게 돌을 던져 놓고, 그 다음에 나에게 후환이 돌아오면 어떻게 합니까?" 라고 한다는 말이죠. 즉 "야, 우리 조카를 죽일 때 너도 가담했잖아? 나도 그렇게 하겠다" 라고 나오면 곤란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나' 라는 것이 배제된 상태에서, 하나님이 지목한 것에 대해서 율법을 적용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나'와 '율법' 사이에서, 여기서 율법은 어느 쪽입니까? 율법은 하나님 쪽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 쪽에서 율법을 실시했을 때, 즉 하나님 쪽에서 율법으로 주었을 때, 그럴 경우에 자기가 살아야 있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자기가 살아있어야 율법이 살아있는데, 보통은 그러하다는 겁니다.
* 배제된 '나' !!
예를 들어서, 교회에 나올 때 자기가 걸어서 나옵니까? 율법이 걸어서 나옵니까? 지금 제가 묻는 것을 잘 생각해보세요. 어디까지나 '나' 라는 것은 살아있는데, 그러니 이 '나' 라는 것은 배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런데 어떤 결과가 나오는데, 그 결과가 여기 여호수아서 7장의 경우에는, 전쟁을 하는데 몇 명이 죽었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3,000명 아이 성으로 올라갔는데, 아이 성 사람들에게 36명이 그만 죽고 말았다는 겁니다.
처음에 3,000명이 올라갈 때, 이스라엘은 그야말로 자신만만했다는 것이죠. '아이' 라는 것은 '작다' 라는 의미인데, 그래서 "이런 작은 아이 성 정도는 우리가 이길 수 있다" 라고 생각하고 올라갔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누구의 의견입니까? 인간들, 즉 개별자, 입자들의 의견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가 나왔는데, 아이 성으로 올라가서 이기기는커녕, 36명이나 죽고 도망치듯이 나왔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3,000명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원인에 대해서 자기에서 원인을 규명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 결과에 대해서 자신들의 모든 지혜가 완전히 배제되었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제가 지금 하는 말이 무슨 뜻인고 하니, 어떤 주어진 결과에 대해서, 예를 들어서, 제가 이렇게 책장을 넘기고 하는데, 이게 보통 뭐냐 하면, 제가 손에 힘을 주어서 책장을 넘겼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주께서 책장을 넘겼다" 라고 생각해버리면, 그러면 '나' 라는 것은 배제가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확장을 시켜보자는 것이죠.
여러분이 안경을 쓰는데, 이게 평소에 안경을 쓰고 싶어서 환장을 해서 쓰는 게 아니라는 말이죠. 자기 눈이 나빠서 쓰는데, 이것은 자기 의견이 어떻게 됩니까? 개입한 것이 아니라 배제가 된 것인데, 자기 눈이 나빠지기를 소원하는 사람은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배제가 되었다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하시는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 우리는 "하나님, 가만히 있어 보세요. 이것은 내가 압니다. 나에게서 이런 이런 결과가 나왔습니다. 내가 똑똑하거든요" 라고 하는데, 하지만 이런 모든 것이 자기 뜻대로 되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지 않았을 때, 우리는 강제로 어떻게 되느냐 하면, 자기가 속한 자기의 모든 일에 자기가 배제되면서, 그러면 원인규명이 안 되고, 그 결과에 대해서도 파악이 안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일은 생겨났다는 겁니다.
* 나의 일상은 '우연' !!
어떤 사람이 오래 살고 싶은데, 그런데 음주운전을 하는 차에 치어서 죽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일에 대해서, "나는 음주운전을 하는 차에 치어서 죽고 싶어" 라고 하는 인간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완전히 '나' 라는 것이 배제된 상태에서, 그야말로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났다는 말이죠. 그렇게 전혀 예상 밖의 일이니, 이것은 '우연' 이라는 겁니다. 우연, 그렇게 보시면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나'의 일상을 우연으로 전환시키면 어떻습니까? 우연, 즉 예상 밖의 일에 점철된 것, 그렇게 연결되고 연결된 것으로 전환시키면, 거기에 누가 개입이 되어있어요? 하나님의 말씀 완성이 거기에 개입이 되어있다는 겁니다. '나' 라는 것이 배제된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것을 가르친 것이죠.
그래서 "야, 이번 아이 성은 어때? - 여호수아 장로님, 그 아이성은 기도할 것도 없어요. 우리가 큰 여리고 성을 이겼으니까, 이번에는 우리의 의지로, 우리 단결력으로도 저 정도는 물리칠 수 있습니다" 라고, 그렇게 되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한껏 '나' 라는 것이 배제되지 않은 상태를 의도적으로 일으켰다는 말이죠.
어떤 분이 성경말씀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말씀을 제대로 보지 않는다고 하면, 그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편안함, 즉 "이제는 내가 할 수 있다" 라는 식으로, 인생을 편안하게 살아갈 자신감이 생길 때, 그럴 때 우리는 말씀을 제대로 보지 않는데, 보더라도 건성으로 대하게 된다는 겁니다.
* 그런데 어떤 사태가 발생하면 !!
그런 분에게는 말씀이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닌데, 그런데 갑자기 여기에 사태가 벌어진다는 말이죠. 사사기가 그러한데, 사사기에서 그러한 사태가 일어났을 때, 사람들이 허겁지겁 수습을 합니까? 하지 않습니까? 나름 수습을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수습을 해도 사태가 전혀 호전되지 않을 때, 그러면 마지막으로 어떻게 호소를 합니까? 새벽 제단을 쌓고 기도를 하는데, 아주 간절히 기도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자기 뜻대로 응답이 되지 않을 때, 사태가 호전되지 않을 때, 그러면 그때는 어떻게 합니까? 자기 포기가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제는 기도도 하지 않을 거야" 라고 나오는데, 그 순간이 바로, 자기로부터 자기가 배제되는 순간이라는 겁니다. 즉 '나' 라는 것은 완전히 이 사태에서 죽은 자로 간주가 된다는 말이죠.
* 자아의 죽음 !!
그렇게 '나' 라는 것이 죽은 경우가 아니라면, 감히 돌을 들고 아간을 때려죽일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아간이 죽음에 '나' 라고 하는 자아의 죽음이 합치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이죠.
이 아간 속에 무엇이 들어있냐 하면, 아간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도발이고 저항이 들어있다는 겁니다. 아간 속에 들어있는 이 도발과 저항 때문에, 그래서 아간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예물을 어떻게 했습니까? 그만 자기 것으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이죠.
바로 이 아간이 갖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반대 정서, 거기에 합류되지 아니하면 아간에게 돌을 던질 수가 없다는 겁니다. 즉 자기가 때려죽이는 그 인간과 '나' 라는 것이 같은 종류의 인간인 것을 인지하지 아니하면, 아간에게 돌을 던질 수 없다는 말이죠.
우리 인간은 죄를 느끼지 않으면 어떻게 나옵니까? 자기를 아주 점잖은 사람으로, 우수한 사람으로 계속해서 남겨두고자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남으려면 폭력적이 될 수가 없다는 말이죠. 즉 "당신들은 돌을 던지세요. 나는 빠질게요"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이재명을 찍을 거야. 윤석열을 찍을 거야" 라고 했을 때, 여기서 점잖은 사람은 뭐라고 나옵니까? "나는 기권을 할게" 라고 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자기는 점잖은 사람이고 의로운 사람이라는 겁니다.
* 아간은 희생물 !!
결국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시는고 하니, 아까 했던 것을 다시 복습을 해봅시다. 아까 플러스 안에, 이 물음표 속에 무엇이 있다고 했는고 하니까, 방금 뭐라고 했지요? 하나님에 대한 도발과 저항이 있다고 했는데 말이죠.
이 말을 다음과 같이 바꾸면 되는데, 즉 "아간 안에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즉 "나한테 대들면 맞는다" 라는 것인데, 아간 속에 도발과 저항이 들어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 아간이 뭐냐 하면, 아간은 희생물이라는 겁니다.
무슨 희생물인고 하니, 이스라엘의 전체 죄와 일치된 죄가 무엇인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아간을 하나를 희생물로 사용하셨다는 말이죠. 희생물로서 아간만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도 다 걸려드는데, 아간이 그 대표로 걸려들었다는 겁니다.
무려 36명이나 죽고 아이 성을 점령하지 못해서 우왕좌왕할 때, 아간이 하나님께 개별자로서, 즉 아간은 전체를 생각 못하고 자신의 경제적 이득을 취득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바칠 외투와 금을 훔쳤다는 말이죠.
* 훔친 것을 돌려드리면?
그 돈이 얼마나 됩니까? 여호수아서 7장 22절에 21절에 보면 나오는데,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200세겔과 금덩이 하나라는 겁니다. 이것을 돈으로 계산을 해보면, 홈쇼핑에 외투가 나오는데, 아무리 비싸도 200만원을 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 다음에 은 200세겔은 300만원 정도로 치고, 그런데 금덩이 하나는 돈이 제법 되지 싶다는 겁니다. 요즘 금 한 돈에 50만원을 넘어간다고 하는데, 그래도 모두 합치면 2천만원은 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돈을 물어내면 되지 않느냐는 겁니다.
(수 7:21)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중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취하였나이다 보소서 이제 그 물건들을 내 장막 가운데 땅 속에 감추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나이다
(수 7:22) 이에 여호수아가 사자를 보내매 그의 장막에 달려가 본즉 물건이 그의 장막 안에 감취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는지라
그래서 "여기에 2천만원이 있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끝까지 속이지는 못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죄 값을 달게 받겠습니다" 라고 하면 되지 않느냐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갚으면 자기 머리에 돌이 떨어질 리도 없는데, 원상 복귀가 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어떤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습니까?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이스라엘 전체에서 이 아이 성 정도는 어떻다는 겁니까? "우리가 굳이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 없이, 우리가 그동안 겪었던 노하우를 가지고 우리끼리 이길 수 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다" 라고 하는, 이런 반(反)율법적인 것이 백성들 속에 들어있었다는 말이죠.
하나님의 것이 작동해야 되는데, 그런데 하나님의 것이 작동한 게 아니고, "내가 이 정도니까 이 정도는 할 수 있다" 라는 자아의 것이 작동했다는 겁니다. 자아를 용납하면 안 되는데, 그런데 자기의 것을 용납하는 이 죄 문제는 그대로 있다는 겁니다. 해결되지가 않는데, 하지만 우리 인간은 이 암 세포를 어떻게 어떻게 뽑아낼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2천만원을 돌려준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닌데, 또한 아간이 죽는다고 해도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아간을 죽이는데 있어서, 나머지 모든 이스라엘이 합세해서 죽여야 한다는 말이죠. 그래야 비로소 문제가 해결이 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죽는 자나 돌을 던지는 자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모두 다 어떻다는 겁니까? 아간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똑같다는 말이죠. 이것을 두고 "아간 뒤에는 율법이 들어있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아간 뒤에 율법의 원칙이 들어있었다는 겁니다.
* 자아에서 자아를 어떻게 떼어내는가?
이것은 알다시피 구약인데, 그러면 신약은 과연 어떻게 될까요? 신약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자아에서 자아를 어떻게 떼어내는가?" 라는 것인데, 지금 그것을 설명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떼어내면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지옥에 간다는 말이죠. 천국에서는 '나' 라는 게 성립하지 않는데, '우리'가 성립되는데 있어서 '나'를 포함한 '우리'는 없다는 겁니다. '나'를 떼어냈을 때 비로소 '우리'가 성립한다는 것이죠.
* 달란트 비유 !!
그러면 이 문제를 신약에서는 어떻게 해결하는고 하니, 그게 여러분이 잘 아시는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 라는 겁니다. 어떤 종은 열 달란트, 어떤 사람은 다섯 달란트, 어떤 사람은 한 달란트를 받았다는 말이죠. 오늘날에는 이 달란트를 재능으로 번역하는데, 여기서 '탤런트' 라는 단어가 나왔다는 것이죠.
(마 25: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마 25:15)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마 25: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마 25:17) 두 달란트를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마 25: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마 25: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새
이 달란트가 뭐냐 하면, 이것을 누가 준 것입니까? 직원들이 스스로 개발한 것인가요? 누가 주었어요? 주인이 주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 달란트는 무엇이 연결이 되어있는고 하니까, 주인의 취지, 즉 주인의 의도와 연결된 것, 그것이 달란트라는 겁니다.
제가 아까 이야기를 했는데, 구약 때 어린양이 등장할 경우에는 무엇을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까? 할례를 받아야 하는데, 이 할례는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율법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어린양의 희생도 역시 율법과 율법의 만남이라는 겁니다.
주인이 되시는 분이 달란트, 즉 재능을 주었다고 하면, 그러면 이것은 그 재능의 능력이라는 말이죠. 이 재능의 능력이 뭐냐 하면, "나로부터 나를 떼어내는 주인의 능력이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게 주인의 능력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주인의 재능인데, 자기 재능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열 달란트, 다섯 달란트, 한 달란트라고 했을 때, 이 달란트라고 하는 재능이 중요한 것이지, 받은 개수가 몇 개인지, 그 달란트의 개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이 달란트는 하나님의 능력인데, 그러면 이 종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재능, 즉 '나'로부터 '나'를 떼어내는 재능에 대해서, 그것을 옹호하고 돋보이게 해야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은 무엇을 생각합니까?
* '나'를 먼저 생각한 무익한 종 !!
성경에 나와있는 대로 이야기를 하면,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이 말하기를, "주인님, 나는 주인님이 무서운 줄 알고, 나를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서, 무서운 주인님에서 벌을 받지 않기 위해서, 나는 한 달란트를 땅에 숨겼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한 달란트를 가지고 사업을 하다가 그만 날리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주인님이 얼마나 화를 내겠느냐는 겁니다. 따라서 아주 조심조심을 해서 주인님의 것은 주인님에게 돌려드려야 한다는 것인데, 그래서 자기는 안전하게 땅속에다가 묻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여기서 주인님이 무섭다고 하는 것은, '나'. 즉 자아가 주인님으로 인하여 다치고 싶지 않다는 것인데, 즉 자아가 그대로 살아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과연 한 달란트를 받은 자가 어떻게 될까요? 30절에 보면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서 내어 쫓아라 슬피 울며 이럴 감이 있으리라" 라고 되어있다는 말이죠.
(마 25: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여러분, 한 달란트를 주인에게 그대로 돌려주었으면 주인의 입장에서 손해를 본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주인은 "너는 그만 퇴직해라. 우리 회사를 그만둬" 라고 하는 정도의 조치가 아니고, 아예 사람의 마지막 운명까지 끝장을 내버린다는 말이죠.
왜 그럴까요? 그것은 주인이 달란트를 준 의도를 전혀 모르고,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은 자기 입장에서만 해석해버렸다는 겁니다. 즉 "나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이 주인은 나한테 어떤 도움이 되겠느냐?" 라는 입장에서, 즉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주인과의 관계를 설정했다는 것이죠.
하지만 이렇게 되어버리면 무슨 가치가 그만 확 죽어버립니까? 이런 경우에는 "너에서 너를 떼어내고야 말겠다" 라고 하는, 그런 주인의 의도가 완전히 박살이 나고 나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 우리는 주인님의 종입니다 !!
그런데 열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은 둘 다 공통적으로 뭐라고 합니까? "이것은 주인님의 것이니까, 우리는 주인님이 일을 할 뿐입니다" 라고 하는데, 이것은 철저히 주인님에게 예속되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 예속은 무엇을 형성하는고 하니, '우리'를 형성한다는 겁니다.
"나는 이렇다" 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이미 우리는 내가 나로부터 배제되고 주님 뜻에 예속되어있다" 라는 것인데,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나는 주인님의 종이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주인과 종이라는 관계가 변함이 없이 유지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실 때 그렇게 하신다는 겁니다.
* 결론 부분 !!
이제 결론 부분을 한번 생각해봅시다. 여기에서는 다니엘서를 보겠는데, 다니엘서 4장 16절을 누가 크게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단 4:16) 또 그 마음은 변하여 인생의 마음 같지 아니하고 짐승의 마음을 받아 일곱 때를 지나리라
느부갓네살이 바벨론의 왕인데, 그런데 왕위가 떨어지고 어디로 갔습니까? 짐승들이 사는 들로 추방이 되었다는 말이죠. 그래서 7년 동안, 사실 이게 여기 7년인지는 정확하지는 않는데, 아무튼 일곱 때의 기간동안 들에서 소처럼 풀을 뜯어먹고 살았다는 겁니다.
구약 다음에 신약이 나오는데, 아까 율법이 발전한다고 했는데 말이죠. 점점 율법이 자기의 본모습을 드러낸다는 겁니다. 그 중간쯤에, 즉 신약에 가까이 왔을 때, 이 다니엘서 4장 16절에 나오는 느부갓네살 왕이 나온다는 말이죠.
느부갓네살은 왕인데, 그러면 왕 플러스 무엇이 있습니까? 그게 바로 물음표인데. 오늘 강의제목을 '물음표'로 하고 싶은데 말이죠. 즉 "왕 + 물음표" 라는 것인데, 이 물음표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아까 4장 16절에는 무엇이 있었죠?
왕이라는 그 대의명분 뒤에, 그 안에 무엇이 결합되어 있습니까? 보이지 않는, 그 본래 모습이 짐승이라는 겁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왕을 왕에서부터 배제를 시키고 무엇이 되게 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짐승이 되게 하셨다는 말이죠.
* 아간과 가룟유다 !!
신약의 경우에는 누가 대기하고 있냐 하면, 그게 가룟유다라는 겁니다. 가룟유다의 경우에는, 아까 살펴본 요한복음 6장 70절에 의하면, 그는 가룟유다는 플러스 무엇이 되는고 하니, 그게 사탄이라는 말이죠. 악마가 되어있다는 겁니다.
(요 6:7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그것이 신약이고, 그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오면서, 제가 지금 느부갓네살 왕을 소개하고 있다는 말이죠. 느부갓네살, 이 인간이라는 이름 뒤에, 자아라는 이름 뒤에 붙어있는 그 무엇, 바로 그 무엇을 찾아내는 몫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말씀이 이것을 들추어낸다는 것이죠.
제가 강의 초반에 이미 이야기를 했는데, 이 안에 무엇이 들어갑니까? 아까 화장터가 있는 명복공원을 이야기했는데, 여기에 무엇이 들어갑니까? 우리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흙인데, 우리는 그렇게 살았다는 말이죠.
제가 분명히 말했는데,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것들은 가짜고, 흙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진짜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대로 우리를 양보 없이 그렇게 밀어붙이고 있다는 말이죠. 죽는 순간에 눈을 감으면서, "나로 살았던 것은 다 허구였구나"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죠.
죽는 순간에 "나는 이렇게 했다. 나는 자식을 4명이나 잘 키웠다. 나는 목사였다. 나는 장로였다" 라고 하는, 지금 자기가 죽는 순간에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겁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죽이는데, 그냥 죽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죽이신다는 말이죠.
이사야서 2장 22절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너의 모든 것은 호흡에 있나니, 내가 호흡을 거두고 가면 너는 흙으로 돌아간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단지 숨쉬는 흙일뿐인데, 그 숨이 끊어지면 흙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는데, 즉 "너 자신을 의지하지 말라. 그것은 가짜다" 라는 겁니다.
(사 2:22)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여기서 '우리' 라는 것을 계속해서 살펴봅시다. 가룟유다 뒤에는 악마가 있는데, 악마가 말이죠. 이렇게 되면 율법은 다 완성이 된 것인데, 예수님께서 가룟유다를 선택하시고 십자가를 지시는데, 그러니 그 십자가를 지는 일에 누가 개입을 한 것입니까? 가룟유다가 개입을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아간의 이야기처럼, 아간은 모든 이스라엘 전체를 죄를 들추어내기 위한 '희생물' 이라고 했는데, 그런 샘플로서의 희생물이 되어서 이스라엘 전체가 왜 아이 성을 정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패배했는지, 그것을 아간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은 구약이고, 신약은 모든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고 어두움의 권세자에 지배된 상태라고 한다는 말이죠. 모든 인간은 "플러스(+) 물음표" 라는 것인데, 그러면 이 물음표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모를 때 누가 등장합니까?
예수님의 12제자가 예수님을 왜 배신을 했는지, 그것을 모를 때 가룟유다가 대표해서 무엇을 보여줍니까? 즉 "인간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다" 라는 것을 샘플로 보여주는 희생물이 바로 가룟유다라는 겁니다.
* 느부갓네살 + 물음표 !!
이제 다니엘서를 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느부갓네살이 왕이었는데, 왕이니까 계속해서 자기는 왕이라는 말이죠. 이 느부갓네살이 꿈을 꾸는데, 꿈은 "플러스 물음표" 라는 겁니다. 그렇게 물음표니까 의문점이고, 모른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 느부갓네살은 자기가 왕인데, 정작 자기를 모른다는 겁니다. 남들 앞에서는 왕으로 행사를 하는데, 그런데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른다는 것이죠. 설교시간에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I am what I am" 이라고 말이죠.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면서 "나는 나야" 라고 하는데, 심지어 명복공원에 가면서도 "나는 나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땅은 큰아들이 하고 집은 둘째가 해라" 라고 하는데, 죽어가면서도 끝까지 자기를 붙들고 있는 모습이라는 말이죠. 숨을 거둘 때까지 자기가 흙이라는 것을 인정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런데 느부갓네살의 경우에는, 꿈이 물음표로 들어온다는 겁니다. 꿈을 꾸었는데, 해결할 자가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여기에 누가 개입을 합니까? 꿈 해석자가 등장하는데, 그가 누구입니까? 다니엘인데, 그는 선지자라는 겁니다. 그런데 다니엘을 호칭할 때, 다니엘서에서 뭐라고 합니까? '인자(人子)' 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 인자라는 호칭이 신약에서도 나오는데, 예수님이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라고 제자들에게 물으신 적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자 세례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등의 대답이 나왔다는 말이죠.
그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호칭할 때 사람의 아들, 즉 인자로 인정했다는 말이죠. 그것은 "유일한 사람은 나밖에 없다" 라는 뜻이라는 것이죠.
(마 16:13)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마 16:14)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마 16:15)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아무튼 인자가 등장하는데, 그렇다면 느부갓네살의 자아는 자기로부터 어떻게 됩니까? 이미 배제된 것인데, 왜냐하면 일어난 예상치 못한 사태에 대해서, 자기의 모든 선악적인 지식이 소용이 없게 되어버렸다는 겁니다. 도대체 자기가 왜 사는지도 모르겠고, 아무것도 보이는 게 없다는 말이죠. 다만 "나는 모르겠다" 라고 하는 사태만 일어났을 뿐이라는 겁니다.
* 다니엘(인자)의 개입 !!
그러면 여기서 어떤 해답이 필요한데, 여기에 다니엘이 개입했다는 말이죠. 이것을 신약에 가서 보편적으로 뭐라고 하는고 하니, 사람들은 '말씀'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5장 39절에 보면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모든 말씀은 누구 와 통하게 되어있다고 합니까? 모든 말씀은 예수님을 증거한다는 말이죠.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니까 "나는 여기에 있는데, 뭔가 모르겠다" 라고 하게 되면, 그것은 예수님이 개입한 것으로 보시면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개입해서 '나'를 없애고, 예수님이 '우리'에 합류시키기 위해서, 그래서 우리에게 무엇을 주셨다는 겁니까? 이 성경말씀을 주신 것인데, 그러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는 말이죠.
우리도 역시 자기가 누군지 전혀 모르고, 남들처럼 맨날 "나는 나다" 라고 하고 있는데, 예수님이 어린양으로 개입해서 "나는 나다" 라고 외치는 그 '나', 그것이 곧 죄라는 사실을 알려줄 때, 그러면 우리는 모든 비밀을 다 알아버린 것이 된다는 겁니다.
* 짐승이 된 느부갓네살 !!
이제 다니엘이 인자가 되어서 꿈을 해석해야 하는데, 이제 여기서 마지막 문제가 나갑니다. 다니엘이 꿈을 해석했는데, 그래서 느부갓네살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1) 아주 겸손해졌다. 2) 꿈대로 그만 짐승이 되었다" 라는 것 중에서, 여기에서 몇 번입니까?
우리 생각에는 "다니엘, 너는 참으로 똑똑하구나. 이제 내가 알았으니까 하나님께서 내가 짐승이 되는 것은 면하게 해주겠지?" 라고 해서, 느부갓네살이 짐승이 되지 않도록 해주면 참 좋을 텐데,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다니엘은 "왕은 짐승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것은 내가 알았다고 해서, 내 뜻대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냥 말씀대로 흙이 될 뿐입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나서 실제로 느부갓네살 왕은 짐승이 되었다는 겁니다.
* '나' VS '나' !!
오늘날 우리도 역시 흙이 되면서, 또한 그렇게 분리되지 않는 '나', 그리고 주님이 만든 '나', 즉 주님 안에 있는 천국에 가는 그 '나', 그 '나'로는 도저히 건널 수가 없었는데, 그런데 중간에 예수님이 개입해서 흙이 될 수밖에 없는 '나'를 어떻게 하십니까?
그 '나'는 떨어지고, 이미 말씀에 의해서 예수님이 '나' 자리에 들어와서, 이제는 '나'와 이 '육신'이 예수님의 것이 되어서, 예수님이 우리와 더불어 살게 되는데, 이게 주의 말씀의 모든 업적의 완성이라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버지, 내가 어떻게 나와 분리될 수가 있겠습니까? 그동안 모든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했는데, 강제조치를 당하기 전에 주께서 말씀으로 우리 자신이 가짜라는 것을 일깨워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늘 말씀 속에서 주님이 나를 대신해서 살고있음을 느끼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25,08,02 오후 1시에 마침.
I am what I a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