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대머리야

아빠와 함께 2026. 3. 5. 08:58

대머리야

2026년 3월 4일                     본문 말씀: 열왕기하 2:23-25

2:23 엘리사가 거기서 벧엘로 올라가더니 길에 행할 때에 젊은 아이들이 성에서 나와서 저를 조롱하여 가로되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는지라
2:24 엘리사가 돌이켜 저희를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콤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에 사십이 명을 찢었더라
2:25 엘리사가 거기서부터 갈멜 산으로 가고 거기서 사마리아로 돌아왔더라

엘리사가 사명을 품고 가는 길에 아이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선지자를 조롱했습니다. 아이들이 아무나 조롱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선지자임을 안 상태에서 조롱했습니다. 아이들이 선지자를 조롱하는데 있어 어떤 깊이 있는 의식을 갖고 한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그 시대 정신을 조성하는 어른들의 영향 아래에 있습니다.

선지자는 가차없이 자신을 조롱하는 아이들에게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했습니다. 그러자 난데없이 수풀에서 암콤이 두 마리가 나타나 아이 42명을 그 현장에서 잔인하게 찢어죽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폭력성을 나타낸 겁니다. 선지자가 직접 몽둥이 들고 아이들을 패죽인 것이 아닙니다.

인정사정 모르는 암컷 곰 두 마리가 나타났다는 것은 선지자가 보여주는 예언에는 지상에 대한 하나님의 폭력 의지가 같이 있다는 뜻입니다. 어른들을 죽인 것이 아니라 철없이 아이들을 죽였다는 것은 앞으로의 엘리사의 일들은 나타난 인간세계의 각가지 모습을 드러내게 하는 근원성과 결부되어 있음을 말해줍니다.

엘리사의 첫 번째 표적이었던 소금 표적도 ‘물의 근원’과 관련 있는 겁니다. 엘리사가 엘리야의 후계자로서 엘리야의 남은 사명을 계속 이어갑니다. 엘리야가 지상에 나타난 직접적인 현상을 지적하는 것이라면 엘리사는 그런 현상이 일어나게 된 이유와 원인의 깊이를 찾아가는 일을 하게 됩니다.

엘리야의 일들이 지상에서 곧바로 눈에 보이는 일에 대해서 지적한다면 엘리사의 일은 그런 사건들을 더 깊은 곳에 원인을 갖고 있는 ‘증상’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직접 어른 세계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어른의 거울이라고 할 수 있는 아이들에게 가차없이 저주하게 됩니다. 아이들은 어른들로부터 본대로 쏟아내게 되어 있습니다.

엘리야의 복장은 지상에 있는 자들 누가 봐도 특이성이 있습니다. “왕이 저희에게 이르되 올라와서 너희를 만나 이 말을 너희에게 고한 그 사람의 모양이 어떠하더냐 저희가 대답하되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더이다 왕이 가로되 그는 디셉 사람 엘리야로다”(왕하 2:7-8)

반면에 엘리사의 모양새는 노골적인 아이들에 의해서 알려집니다. ‘대머리’입니다. ‘불모의 두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이 결핍에 대해서 주저하지 않고 조롱합니다. ‘솔직한 조롱’입니다. 그런데 이 불모의 증상은 지상에서 일어나는 하나님 저주의 원인의 결과입니다.

엘리사의 이 출처와 관련있습니다. 우선 엘리야는 지표면적으로 세상을 보고 있습니다. 아합과 이세벨의 우상 정책으로 북이스라엘 전체가 여호와를 찾는 이가 없다고 단정내립니다.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오십 인이로다”(왕상 18:22)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반박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왕상 19:18) 이렇듯 견해가 차이가 나는 이유에 대해서 신약의 로마서에서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롬 11:4-6)

은혜가 아니면 그 누구도 남은 자가 없다는 겁니다. 이 ‘은혜’의 내막에 대해서 엘리사는 그 근원성을 자신의 죽음으로 보여줍니다. “엘리사가 죽으매 장사하였더니 해가 바뀌매 모압 적당이 지경을 범한지라 마침 사람을 장사하는 자들이 그 적당을 보고 그 시체를 엘리사의 묘실에 들이던지매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곧 회생하여 일어섰더라”(왕하 13:20-21)

엘리사는 죽고 난 뒤에서도 일합니다. 여기서 왜 예언이 폭력성을 필히 동반하느냐 이유가 밝혀집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이 죽어 마땅하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인간들은 자꾸만 인간들을 두둔해주려고 합니다. 그것은 본인의 위신과 명예욕에서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5:7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같은 인간들 눈에는 인간들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이 장차 자신의 위신과 체면과 생존과 권력에 유리한 조건이 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이처럼 인간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아는 겁니다. 그것은 인간 세계의 바닥, 근원을 인식하는 자세입니다. 마태복음 16:4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시다” 예수님께서 규정하신 이 세상은 일괄적으로 말해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남은 자 될 자격이 없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 사람들은 잘 동의하지 않은 채 무심코 살아갑니다.
고린도전서 15:45에 보면,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엘리야는 ‘산 영’의 기능을 유감없이 드러내며 승천했습니다. 하지만 엘리사가 보여주는 기능은 ‘살려주는 영’입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밑에만 영생이 있고 부활이 있습니다.

가차없는 저주와 심판 안에서만 생명이 있는 겁니다.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의 밑바닥을 아는 이가 없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9장에서 중풍병자가 예수님으로부터 병고침받겠다고 왔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의도를 거부하고 일방적으로 다음과 같이 선언해버리십니다.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마 9:2)

그 어느 인간도 자신의 근원이 죄인 것을 알지 못합니다. 죄사함을 받고 난 뒤에 비로소 자신에게서는 죄 외에 아무 것도 나오지 않음을 압니다. 계속해서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 9:13) 엘리사의 저주로 인하여 난데없이 나타난 암콤에 몸이 찢겨서 죽은 아이들의 부모의 심정을 생각해 봅시다.

과연 우리가 늘 십자가 안에서 생활하는지 돌아봅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앞에 그 어떤 예의 바른 꼼수도 통하지 않음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5강-열왕기하 2장 23-25절(대머리야) 260225-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열왕기하 2장 23절에서 25절까지입니다.

열왕기하 2:23-25

“엘리사가 거기서 벧엘로 올라가더니 길에 행할 때에 젊은 아이들이 성에서 나와서 저를 조롱하여 가로되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는지라 엘리사가 돌이켜 저희를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콤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에 사십 이명을 찢었더라 엘리사가 거기서부터 갈멜산으로 가고 거기서 사마리아로 돌아왔더라.”

엘리사의 모습이 여기서 공개됩니다. 엘리사의 특징은 대머리였던 겁니다. 그리고 그 시대의 아이들은 그저 보이는 대로 이야기하는 존재죠. 그 아이들이 보이는 대로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 시대의 어른들을 대변해 주고 있는 겁니다. 아이들은 그 시대의 자식들이고, 아이들은 그 시대를 왜곡됨이 없이 그대로 보여주는 거울이거든요.

옛날에 저도 그랬습니다. 어른들이 이야기하게 되면 거기에 딱 앉아서 말은 안 꺼내지만 다 들어요. 들은 그것이 우리 안에 자아를 형성하는 요소가 되고 정보가 됩니다. 세상을 어떤 식으로 봐야 하느냐를 그 어른들의 말 속에서 배우게 되는 거죠.

이 아이들이 동네에 대머리만 나타나면 그냥 무작정 “대머리야!”라고 놀린 게 아니에요. 선지자의 존재에 대해서 무시하고 얕잡아보고 있었던 당시의 경향을 어른들, 기성세대로부터 이미 다 익히고 배운 거예요.

선지자라 하면 보통 대단한 권위를 갖고 있잖아요. 어른들이 선지자를 조롱하고 싶어도 그 선지자의 권위, 선지자가 하나님과 통한다는 그것이 무서워서 입 다물고 있었겠지만 아이들한테는 그게 없어요. 그냥 보이는 대로, 평소에 어른들에게 듣던 대로 그대로 이야기합니다. ‘대머리야’ 하고 조롱하죠.

그런데 애들은 일종의 촉법소년이거든요.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애들이에요. 어른들이 선지자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애들이 대변하듯이 노골적으로 한 겁니다. 철딱서니 없는 애들의 행동에 대해서는 일시적으로 허세 부리는 걸로 봐서 당장에 처벌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점점 커가면서 시건 나면 ‘내가 그때 참 철없는 행동을 했구나. 어른들이 많이 봐줬어. 그래서 무사히 지나갈 수 있었구나.’ 할 것으로 보고 장래의 어떤 꿈이나 희망마저 꺾지는 않는 것이 기존의 인간 세계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엘리사가 노골적으로 어떤 행동을 해요. 엘리사를 조롱한 아이들에게 어떤 행동을 하느냐? “엘리사가 돌이켜 저희를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콤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에 사십 이명을 찢었더라”(왕하 2:24).

사나운 암컷 곰 둘이 나와서 아이들을 죽였는데 몇 명 죽였냐 하면, 42명을 죽였어요. 미국이 이란의 여자 초등학교를 폭격해서 160여 명이 죽었다고 지금 나오고 있는데요, 엘리사 말 한마디에 42명의 아이가 죽었어요. 그들이 엘리사에게 돌을 던졌습니까, 칼을 던졌습니까, 무슨 공격을 했습니까? 엘리사가 목숨의 위협을 느꼈던가요?

아니에요. 하나님의 이름을 조롱했던가요? 그것도 아니에요. 대머리 보고 대머리라고 이야기했을 뿐입니다. 물론 조롱기가 있었죠. 평소에 어른들이 하는 것을 봐온 것인데 애들은 조절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있는 그대로 ‘대머리야’ 했는데 걔들은 어른이 되기 전에 인생이 마감되었습니다.

그것도 사법 당국에 의해서 체포돼서 옥에 갇히고 변호사 쓰고 그런 게 아니고, 아주 무참하게, 인정사정 볼 것도 없이 곰이 나와서 죽여버렸습니까? 툭 건드렸습니까? 냄새나 맡고 그냥 보내줬습니까? 42명을 찢어 죽었어요.

이거는 뭐냐? 선지자의 그 존재는 폭력성으로 둘러쳐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엘리사 개인적인 성격이 못돼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폭력성이 선지자를 둘둘 감고 있었다는 거죠. ‘아이들이 철이 없어 그러니 잘 달래면 된다. 잘 나무라면 앞으로 그런 짓 안 할 것이다’라는 어떤 유예 같은 게 없고 즉각적인 폭력성으로 하나님이 되갚아줬습니다.

그게 엘리사의 말씀 전하는 그 현장, 그 사건의 일부로 포함이 돼요. 아이들은 기성세대를 대변하지만, 선지자는 하늘에 계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의사, 뜻을 지상에 대변해 주는 사람이잖아요. 하나님의 그 뜻과 지상에 있는 인간들의 뜻과의 만남은 폭력의 충돌로 마주하게 돼 있어요. “아이들에게는 꿈이 있어요.” 하는데 “꿈 같은 소리하고 있네.” 꿈이고 뭐고 다 날아가고, 거기서 걔들의 장래는 그걸로 마감되고 끝났습니다.

엘리사의 존재로 인하여 폭력이 유발되게 하는 이유가 뭐냐? 이 대목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생각할 거예요. ‘참 선지자 성격 급하다. 철없는 애들 좀 달래지. 애들이 잘못인가, 어른들이 잘못이지. 잘 달랬으면 그 애들의 목숨은 건졌을 건데. 선지자가 잘못되어도 많이 잘못됐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대변해 주는 자비로운 성품이 있어야지, 이렇게 성질난다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주해 버려? 애들이 뭐 안다고 그렇게 죽이는가? 조금만 참지.’ 여러 가지 견해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 선지자가 해야 할 일은, 엘리야 선지자가 했던 일의 연장이면서도 더 깊이 있게, 하나님의 뜻을 더 풍부하게 전하고 나타냅니다. 엘리야와 엘리사의 선지자 기능의 차이점은 이겁니다. 엘리야는 지표면, 그러니까 그 시대에서 일어난 눈에 보이는 일에 관한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지표면에서 일어나는 그 일의 밑바닥, ‘왜 인간들은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바알을 섬기고, 선지자에게 전적인 호응이 없고, 지상의 왕들 권력에 주눅 들어 꼼짝 못 하는가?’ 그 원인, 그 이유를 찾아가는 역할은 엘리야가 아니라 그 후계자인 엘리사가 해가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 열왕기하 2장 21절을 봤지요? “엘리사가 물 근원으로 나아가서 소금을 그 가운데 던지며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 좇아 다시는 죽음이나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짐이 없을찌니라 하셨느니라.”

‘소금 표적’에 대해서 했는데 물이 썩어서 생산물을 내지를 못했어요. 식물에 소금 치면 죽잖아요. 그런데 엘리사는 물이 나오는 그 근원에 소금을 던져요. 이걸 봐서 엘리사하고 엘리야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엘리야는 지표면에 나타난 결과에 대해서 하나님의 예언을 전했던 사람이라면, 엘리사는 그 결과를 가지고,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가뭄 들어야 마땅한 그 이유를 찾아가는 역할과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어른들이 엘리야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했다면 엘리사는 어른이 아니고 어린애들이 와서 ‘대머리야’라고 모독하고 조롱했어요. 거기에 대해서 엘리사는 단호하게 대처했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마찬가지예요. 예수님은 마태복음 16장 4절에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했거든요. 예수님은 세상 지표면을 악하고 음란한 것으로 봤는데 그 위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이 세상이 전부 다 예외 없이 그만큼 악하고 음란하냐?’ 그 점에 대해서는 동의가 안 돼요.

예수님은 all, 전체를 보는데 인간은 각자 자기 주변에 있는 일, 자기의 생계와 생존, 자기 위신과 명예, 코 앞에, 눈앞에 있는 것만 챙기면서 좀 잘해주면 ‘세상 참 살 만하다. 참 좋다’ 이러고 끝나는 거예요. 그냥 포괄적으로, 일괄적으로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는 것에 대해서 인간은 흔쾌히 동의가 안 되는 거예요. 그만큼 우리가 깊이가 얕은 거예요.

엘리야를 거쳐서 엘리사가 그 깊이를 더해줍니다. 그래서 엘리야와 엘리사의 그 차이점부터 먼저 봐야 합니다. 열왕기상 18장 22절에 보면 엘리야가 이렇게 이야기해요. 엘리야는 지표면 밑으로까지는 내려가지 않습니다. 그 원인까지는 내려가지 않아요. 그 당시에 보이는 그 시대 상황에 대해서만 지적하고 있습니다.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 오십인이로다.”

엘리야가 ‘나만 홀로 남았다’고 합니다. ‘나도 믿고 있지만 선지자 아니라도 또 믿는 사람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게 아니고, ‘선지자 중에서 나만 남았다’는 말은, ‘백성 가운데 믿음이 있는 사람은 아예 있을 수가 없다’는 뜻으로 이야기한 거예요. 백성들을 가르치는 선지자 중에서도 믿음 있는 사람이 없다면 백성들은 말할 것도 없다는 뜻이죠. 백성들이야 선지자가 가르치고 시키는 대로 하니까요.

그런데 열왕기상 19장 1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부정합니다.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라고 했어요. 남은 7천 명이 있다는 겁니다. 왜 엘리야는 ‘나만 남았다’고 했는가? 그 말이 과연 틀린 말인가?

엘리야 입장에서는 틀린 말 아니에요. 진짜 자기만 남았어요. 그러면 엘리야는 그 7천 명을 왜 못 봤는가? 신약 로마서 11장에서 그걸 설명을 해줍니다. 3절에 보면 엘리야가 말하기를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그 당시에 권력자가 선지자들을 착착 죽여 나갔어요. 그 말은, 이제 하나님의 뜻을 전할 선지자가 없다는 말이고, 선지자가 없다는 말은 백성 중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 사람은 없다는 말이고, 남은 것은 엘리야 본인만 남았으니까 이 시대에 신앙인은 자기밖에 없다는 논리적인 결론에 도달한 거예요.

‘마지막 남은 자기 목숨도 아합과 이세벨이 지금 찾고 있습니다’라고 했을 때 로마서 11장 4절에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라고 하고, 5절에 설명을 합니다.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다’는 말은, ‘인간이 보는 대로는 파악되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은혜에 의해서 남은 자가 있었다’라는 것을 엘리야의 사태를 통해서 설명해 주고 있는 겁니다. 이것을 고린도후서 5장 7절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여기서 대조를 시켜요. 보는 것과 믿는 것은 그 결론이 다르다는 거예요. 보는 것으로 사는 것은 믿음으로 사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만큼 보는 것이 믿음을 방해하고 있는 겁니다. 믿음으로 하게 되면 은혜로 남은 자가 있을 거예요. 그러나 그걸 찾아서 보려고 하면 없을 겁니다.

그런데 없더라도 없다고 생각하면 안 되고,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이 세상에 남은 자가 있다는 거예요. 보지 않고도 은혜로 남은 자가 있다는 그 레벨, 요 레벨은 엘리야 몫이 아니고 그다음 후계자 엘리사의 몫입니다. 그래서 엘리사가 엘리야와 차이 나는 그 본연의 기능을 위해서 눈에 보이는 현상 말고 근원을 향하여, 그 원천을 향하여 찾아가는 그 여정, 그 선지자의 여정에서 나타나는 것이 뭐냐?

‘대머리야’라고 놀리는 어린아이들이 나타났고, 그 어린아이들을 그냥 불쌍히 여기는 것이 아니고 가차 없이 저주해서 암컷 곰들이 나타나서 42명을 죽였을 때 엘리사가 이야기하는 것은 ‘은혜라는 것, 긍휼이라는 것은 반드시 폭력성을 동반하게 돼 있다’라는 겁니다. 저주 속에 은혜가 들어 있다는 것, 하나님의 심판 속에 구원이 있어요.

그러면 우리가 이걸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왜 대머리냐? 원래 DNA가 대머리 DNA라서 그렇다? 이것은 엘리야와 비교하기 위해서 대머리가 된 거예요. 열왕기하 1장 8절에 보면, 엘리야의 특징은 지표적입니다. 지상적인 표현을 하는 거예요. “저희가 대답하되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더이다 왕이 가로되 그는 디셉 사람 엘리야로다.”

엘리야의 모양이 어떠한가? 털이 많은 사람이라는 거예요. 그에 대비해서 엘리사의 모양은 뭐냐? 대머리다. 대머리는 불모의 두상이거든요. 머리털이 풍성하지를 않아요.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서 제가 예를 들겠습니다. 국립박물관에 가면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의 좌불상들이 있어요. 제가 국립 중앙박물관에 한 세 번쯤 갔는가, 더 갔는가도 몰라요.

공부할 게 있기 때문에 갔는데요, 저 안에 뭐가 들었는가 궁금해했었어요. 옛날 역사학자들은 그 좌불상을 쪼개봤어요. 지금은 안 쪼개도 투시할 수 있지만 옛날에는 정수리부터 쪼개서 들어가요. 그 안에 사리도 들어 있고, 불경도 들어 있고 그래요. 우리 보기에는 텅텅 빈 것처럼 보여도 안에 뭔가 들어 있어요. 불상 안에 불교의 정수, 불교의 본질이 들어있다고요.

대머리로 보이는 그 선지자, “대머리야!”라고 그 외부를 건드렸는데 안에서 뭐가 나왔다? 폭력이 나왔어요. 가차 없는 폭력, 죽음이 나왔습니다. 이것은 엘리사 기능의 역할을 말해주는 겁니다. 엘리야처럼 이 땅에 주의 일을 하다가 드디어 지표면에서 하늘 위로 승천함으로써 선지자의 모든 기능이 마감되는 것이 아니고, 엘리사의 기능은 위가 아니라 아래로 내려가요.

아래로 내려가면 뭐가 기다리는가? 엘리야처럼 폼나게 불수레 타고 올라가는 게 아니고 그냥 죽어요. 열왕기하 13장 20절에 보면 엘리사가 죽습니다. “엘리사가 죽으매 장사하였더니 해가 바뀌매 모압 적당이 지경을 범한지라.” 엘리사가 죽으니 장사 지냈다. 이 대목만 보면 보통 사람이 죽어서 장사 지낸 것과 똑같아요.

그러나 엘리사의 기능이 죽음으로 끝나는 게 아니에요. 엘리사의 기능은, 죽음 그 밑에 생명이 있어요. 심판 안에 구원이 있고, 사랑이 있고, 은혜가 있어요. 열왕기하 13장 21절에 “마침 사람을 장사하는 자들이 그 적당을 보고 그 시체를 엘리사의 묘실에 들이던지매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곧 회생하여 일어 섰더라.”

엘리사 장사는 이미 끝났어요. 그런데 해가 바뀌고 또 어떤 사람들이 장사 지내려고 하는데 모압의 도둑들이 막 들이닥치니까 얼마 전에 죽은 엘리사의 무덤에 시체를 합장해 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엘리사는 아무것도 안 했어요. 왜? 죽었으니까요. 그냥 누워 있었다고요.

그냥 누워 있는데 그 죽은 엘리사가 일을 하네요. 죽은 엘리사 시체에 어떤 사람의 시체가 접촉되니까 죽었던 그 사람이 회생해서 도로 일어섰어요. 엘리야는 승천해서 폼나게 위로 올라갔어요. 엘리사는 전혀 폼도 안 나고 일반적인 죽음 같이 보입니다.

하지만 진짜 이 세상이 악하고, 음란하고, 저주받아야 하고, 심판받고, 멸망 받아야 마땅하고, 애들이라도 사나운 암컷 곰 만나서 잔인하게 찢겨야 할 그 이유, 하나님의 폭력성 앞에서는 7천 명 아니라 남은 자는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죽은 엘리사를 통해서 보여줍니다.

지표면에서는 엘리야 말고 또 다른 7천 명이 있었어요. 그런데 엘리사가 이끌고 인도하는 세계, 지표면의 그 원인을 알려주는 그 밑의 세계, 밑의 세계에서는 누구도 죽어 마땅한 세계지 ‘나는 안 죽고 살아 남아야 하겠다’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곰에게 찢겨 죽은 42명의 어린아이까지 포함해서 그렇습니다.

이것을 뭐라고 하냐면, 이걸 ‘증상’이라고 합니다. 증상이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현재 일어나고 있는 모든 병의 원인과 관련되어 있는 그것이 증상이죠. 열난다, 콧물 난다는 그 자체가 감기는 아니죠. 그런데 열나고 콧물 나면 감기 들렸다고 이야기하죠. 감기 들렸다는 그 현상은 뭐로 아느냐? 증상을 보고 알죠.

이 세상이 악하고 음란한 세계라는 것을 뭘 보고 아느냐? 죽은 엘리사와 합장했을 때만 산다는 그것이 하나의 증상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엘리야에서 멈추지 않고 이어지는 그 기능이 최종적으로는 후계자 엘리사를 통해서 마감되는 거예요.

여기서 좀 복잡한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엘리사가 엘리야의 기능을 마감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엘리야의 기능 바깥으로 나가지는 않아요. 말라기 4장에 보면 그 내용이 나옵니다. 5절에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왜 ‘엘리사’를 보낸다 하지 않고 ‘엘리야’를 보낸다고 하느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여기 엘리사 없어요. ‘엘리사’라는 것은 엘리야라는 그 선지자 안에 일종의 부교역자로 들어가 있는 거예요. 보조로 들어가는 겁니다. 보조로 엘리야 기능을 계속하는 것이 엘리사였고, 결국 그 대표는 엘리야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마지막 때 왜 엘리야가 선지자의 대표가 되느냐? 어렵지만 여러분이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엘리야가 언제 때 선지자냐? 이스라엘 국가가 둘로 깨어졌을 때 나타난 선지자예요. 나라가 둘로 깨지면 그 둘 다가 이미 이스라엘이 아니에요. 이미 깨져서 파손된 것, 도자기 파손되면 도자기라 할 수가 없잖아요, 못 팔아먹잖아요. 이미 나라가 깨졌으면 그 나라는 쓸모없는 나라예요.

이미 깨어져 두 조각난 도자기를 이스라엘로 봅시다. 그렇게 깨어졌기 때문에 비로소 나타나는 틈 사이에서 이스라엘의 본질을 선지자 엘리야와 엘리사를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흥부전에서 놀부가 박을 탈 때와 흥부가 박을 탈 때가 다르죠. 참 흥부가 기가 막히죠. 한쪽은 이상한 것들 나오고 한쪽은 보화가 나오잖아요.

이스라엘은 깨져야 그 안에 무슨 본질이 나온다고요. 엘리야와 엘리사는 그 본질을 증상, 사건이라는 증상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거예요. 콧물 나면 감기 들었다고 하듯이. 그게 뭐냐 하면, 저주를 받지 아니하면 구원이 없어요. 참, 눈에 보이는 교회 출석이 문제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믿음이 아니에요. 보이는 것은 흉내 내기예요. 이스라엘 나라가 왜 깨졌는가? 흉내내기 하다가 깨진 거예요. 왜? 보이는 것은 인간이니까 자꾸 인간을 두둔했던 겁니다.

사무엘 상 15장에 보면, 사울 왕이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자꾸 인간을 두둔해요. 사무엘상 15장 9절에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키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낮은 것은 진멸하니라.”

사무엘은 진멸하라고 했어요. 하나님은 진멸하라 했는데 막상 승리하고 보니까 사울 보기에 탐나는 게 한두 가지 아니었던 거예요.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봐서 그냥 남기자’ 해서 진면 안 하려고 했어요. 특히 그중에서 누구를 남겼느냐 하면, 사울 왕 자기의 위신을 더 높이기 위해서 아말렉의 최고 지도자인 아각 왕을 살려준 거예요.

예를 들어서 만약 한국 정부가 북한의 김정은을 사로잡았다면 죽이겠습니까, 안 죽이겠습니까? 안 죽이죠. 이게 소위 가진 자의 여유, 자비로움. 그런데 트럼프는 이란의 최고 지도자 하메네이를 죽였습니까, 안 죽였습니까? 8년이나 준비해서 한 타이밍에 폭탄 퍼부어서 죽였잖아요.

지금 인간은 자기 위신에 정신이 팔려서 ‘살려주면 내 말 잘 듣겠지’ 이런 식으로 인간끼리 서로서로 협조하는 양상으로 나가요. 이 지표면에서, 하나님의 저주나 하나님의 매서운 심판 그런 것은 없어요. 그냥 자기 위신뿐이에요. 사무엘상 15장 17절에 “사무엘이 가로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사울 왕은, 본인이 아무것도 아닌 그 시절을, 왜 그 자리를 떠나 버렸습니까? 그때는 “고맙습니다. 다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라고 해놓고는 지금은 왜 자기의 위신과 명예부터 그렇게 챙깁니까? 그래서 사무엘이 명령해서 아각을 끌고 왔는데 여기서 코미디 같은 이야기가 있어요.

사무엘상 15장 32절에 “사무엘이 가로되 너희는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내게로 이끌어 오라 하였더니 아각이 즐거이 오며 가로되 진실로 사망의 괴로움이 지났도다 하니라.”

지금 아각이 착각하고 있어요. ‘아, 이제는 나를 풀어줄 모양이다. 휴~, 살았다.’ 이러고 있다는 말이죠. 그렇게 하니까 33절에 “사무엘이 가로되 네 칼이 여인들로 무자케 한것 같이 여인 중 네 어미가 무자하리라 하고 그가 길갈에서 여호와 앞에서 아각을 찍어 쪼개니라.”

그래서 아각이 아작났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단호함이에요. 좋은 게 좋다고요? 그저 아직 아이니까 봐주자고요? 암컷 곰이 애들 찢어 죽일 때 ‘애니까 봐주자.’ 이런 게 있습니까? 하나님의 지시를 받은 암곰은 애냐 어른이냐를 묻지 않고 다 죽이는데 그 이유가 있습니다.

엘리사의 기능을 따라 지표 그 밑에 가보니까, 모든 인간에게 죽음이 찾아온다는 것은, 하나님의 무자비한 심판이고, 저주고 징벌이었다는 거예요. 남은 자 될 자격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엘리야 뒤에 있는 엘리사가 우리에게 알려준 거예요. 결국 이 말 한마디로 할 수 있어요. “인간 세계의 그 바닥은 하나님의 폭력이 있는 곳이다.”

이스라엘 국가가 생겼을 때 선지자는 누구냐? 모세였어요. 국가가 생겼다가 깨지고 난 뒤의 선지자는 엘리야입니다. 모세와 엘리야 두 대표적 선지자가 변화산에서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의논하고 이야기했어요. “우리가 전한 예언이 언제 완성됩니까?”

예수님께서 ‘내가 죽어야 완성된다’는 그 이야기. 하나님이 택한 백성, 남은 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난 뒤에, 죽음 이후에 생겨나는 거예요. 십자가 죽음 이후입니다. 그 역할을 이제 엘리야와 엘리사가 하게 되는데, 엘리사도 엘리야처럼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들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이제 바닥으로 내려가거든요. 모세부터 먼저 보게 되면, 출애굽기 15장 4-5절에 보면, 애굽 군대가 홍해 바다에 아예 못 들어온 게 아니고 들어왔어요. 바다인데 그 바닥을 드러냈고, 그 바닥에 애굽 군인들까지 하나님이 초청한 셈이 돼버렸죠. 이스라엘은 무사히 빠져나왔고 거기서 애굽 군대는 완전히 몰살당했습니다. “그가 바로의 병거와 그 군대를 바다에 던지시니 그 택한 장관이 홍해에 잠겼고 큰 물이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돌처럼 깊음에 내렸도다.”

홍해 바다의 그 바닥, 하나님의 언약이 있는 쪽과 언약이 없는 쪽이 그 바닥에 가야만 구분되고 갈라지고 나뉘는 거예요. 성경 말씀 고린도전서 15장 45절만 딱 생각한다면, 전체가 어떤 그림인지 한눈에 다 들어올 겁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여기에서 산 영을 대표하는 사람이 엘리야예요. 왜? 살아있는 채로 불수레 타고 하늘로 올라갔으니까. 살아있는 자가 하나님의 기능대로 했을 때 살려준다. 그러면 두 번째, 살려준다는 말은 뭔 뜻이냐? 살려준다는 말은, 일단 죽지 아니하면 살려준다는 게 성립이 안 되거든요. ‘산 영’은 지표면에서 그냥 승천해서 올라가면 되겠지만, 엘리야의 기능이 그게 다가 아니에요.

엘리야의 기능의 전부는 엘리사가 보여주는 겁니다. 어떤 누구도 산 채로는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위인은 없다는 그 이유가 엘리사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엘리사는 죽었어요. 죽었는데 그 ‘죽은 자’가 ‘죽은 자’를 살려줬어요. 자기 무덤에 던져졌던 그 시체가 살아났다고요. 그게 ‘살려주는 영’의 기능이에요. 이 기능을 위해서 누가 등장하느냐?

이 말씀을 하고 마치겠습니다. 엘리야가 신약에 등장합니다. 그게 마태복음 3장 4절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3장 4절에 보면, 세례 요한이 나오는데 세례 요한의 복장을 보세요. “이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라고 되어 있어요. 엘리야 기능이에요. 엘리야가 털이 많았다고요. 그런데 이 엘리야 기능은, 아까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그 물, 지표면의 물속으로 들어가요. 그게 물세례예요.

세례 요한의 세례는 물세례예요. 물의 바닥으로 들어갑니다. 그게 이 땅에 있는 자에게는 일종의 증상으로 보여주는, 징후로 보여주는 심판과 저주거든요. 들어갔다가 나오죠. 물에서는 들어갔다 나올 수 있지만 누가복음 12장 49절은, 한 번 던져지면 다시는 못 나오는 게 있음을 말해줍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예수님은 불을 던지러 왔어요. 이 불 속에 들어와서 살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없지요. 없어요! 그 불 속에, 예수님이 그 불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예수님 십자가의 세례를 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저주, 마지막 저주가 불심판이잖아요. 그 불심판,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그 아버지의 저주를 받는 거예요.

그러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되는가? 마가복음 13장 2절에, 주님께서 십자가 지면서 “너희들은 내가 죽으러 간다고 생각하냐? 너희들은 죽는다고 생각 못 하지?” 하는 겁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 ‘이 세상은 저주로 황폐해진다!’ 이게 하나님의 폭력성입니다, 폭력성. 어떤 누구도 빠져나올 수 없어요.

그러면 마지막 남은 문제, 그러면 도대체 남은 자는 어떻게 생산되는가? 어디에도 이제 7천 명 없어요. 은혜로 남은 자가 있다고 하는데 그 은혜는 어떤 식으로 오느냐?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 고치는 이야기가 마태복음 9장 1절에서 8절까지 나오는데 길지요.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중풍 병자가 예수님께 병 고치러 올 때, 중풍 병자는 지표면이에요, 지표면. 자기의 몸 아픈 것만 생각하고 오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아픈 사람에게, 그 중풍 병자의 친구조차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을 그 중풍 병자에게 제공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네가 중풍병이 고민거리가 아니라, 근원적으로 바닥 치는 너의 진짜 고민거리를 네가 모르고 있다.” 그게 뭐냐? “내가 네 죄를 사한다는 것. 너는 지금 병 고치러 왔지? 내가 온 것은 병 고치러 온 게 아니고 근원적으로 네 죄를 아는, 내가 필요한 사람의 죄를 사하러 왔다”는 거예요.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 9:2).

이걸, 교회 다니는 사람들도 이걸 몰라요. 아쉬운 게 있으면 기도해서 하나님께 은혜받겠다고 오는 겁니다. 그래서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 죄와 근원적인 문제…, 아까 그 순진했던 아이들 42명 죽는 거 봤죠? 여러분들이 그 아이의 부모라고 해보세요. 그래도 예수 믿을래요? 그래도 ‘주님 감사합니다’ 소리 나옵니까? ‘차라리 나를 죽이지, 그 애가 뭐가 죄인이라서 죽입니까? 예배 시간에 딴짓 한 건 있지만 그거 가지고 죽이십니까?’

그 정도로 우리는 두둔해요, 인간들 편에 서서. 그게 습관화돼 있다고요. 이 세상 지표면에 속해서, 거기에 푹 젖어서 근원적으로 예수님과 예수님이 일으킨 그 일 그 자리에 다시는 나오지를 못해요. 우리는 살려달라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거, 그것은 살려주는 게 아니에요. 저주받아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 살려지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마태복음 9장 13절에 보면, 여러분 잘 아시죠?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내가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예수님의 모든 일과 말씀은 잘난 척하는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어서, 그 만들어진 죄인을 주께서 사하심으로써 ‘내가 이 죄사함에 내세울 것이 일체 없고, 그저 황공 무지로소이다’라는 말 외에는 할 말이 없게 하는 거예요. 여기가 손톱이 까져 아프다, 이 세상에 인생이 힘들다, 어렵다, 외롭다, 슬프다, 불행하다…, 입에서 그런 게 나온다는 것은 아직 암콤을 못 만나봐서 그래요. 찢어져 봐야…….

그 암컷 곰을 못 만난 것은 우리가 정직한, 솔직한 조롱을 못 받아서 그렇죠. ‘대머리야, 대머리야~’ 바로 이 방향성이 근원으로 내려가는, 약대 털옷이라는 지표면이 아니고 그 밑으로, 대머리라는 조롱을 받으면서, 이 세상이 주는 조롱을 받으면서, 그걸 품에 안으면서 엘리사는 결국 마지막 죽고 난 뒤까지, 그의 사명은 멈추지 않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생명, 예수님이 주신 생명은 예수님과 함께 죽을 때나 비로소 그 안에 생명과 부활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어디까지 내려가야 됩니까? 정말 적당하게, 적당하게 믿고 적당하게 착하고, 순수하고 순종하면 되는 줄 알았더니만 그러한 꼼수가 십자가의 피 앞에서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는 기쁨으로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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