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멸 중
2026년 3월 11일 본문 말씀: 열왕기하 3:4-8
3:4 모압 왕 메사는 양을 치는 자라 새끼 양 십만의 털과 수양 십만의 털을 이스라엘 왕에게 바치더니
3:5 아합이 죽은 후에 모압 왕이 이스라엘 왕을 배반한지라
3:6 그 때에 여호람 왕이 사마리아에서 나가서 온 이스라엘을 점고하고
3:7 또 가서 유다 왕 여호사밧에게 보내어 이르되 모압 왕이 나를 배반하였으니 당신은 나와 함께 가서 모압을 치시겠느뇨 저가 가로되 내가 올라가리이다 나는 당신과 일반이요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일반이요 내 말들도 당신의 말들과 일반이니이다
3:8 여호람이 가로되 우리가 어느 길로 올라가리이까 저가 대답하되 에돔 광야 길로니이다
전쟁이란 인간 대 인간이 하는 것을 세상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여기에 각자 명분,의, 정의로움을 내세우면서 일어납니다. 그렇게 벌려놓고 승리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자기쪽에서 일한다고 자부심을 갖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서 인간 본인의 명분으로 가져갈 일은 전혀 없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은 복과 저주를 드러내기 위해 모두들 동원되고 분류된 자들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상대할 때는 단일 원칙이 이미 마련되어 있습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 12:3)
이 원칙을 위하여 이스라엘 모압을 거쳐서 가나안 원주민들을 만나고 그들과 전쟁한 겁니다. 특히 모압 민족 같은 경우에는 막대한 자금을 동원해 자민족의 선지자인 발람 선지자를 통해서 애굽에서 출발해 온 이스라엘을 저주토록 했습니다. 하지만 발람 선지자는 도리어 다음과 같이 복을 선언합니다.
“발람이 노래를 지어 가로되 발락이 나를 아람에서, 모압 왕이 동편 산에서 데려다가 이르기를 와서 나를 위하여 야곱을 저주하라, 와서 이스라엘을 꾸짖으라 하도다 하나님이 저주치 않으신 자를 내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 어찌 꾸짖을꼬…내가 축복의 명을 받았으니 그가 하신 축복을 내가 돌이킬 수 없도다”(민 23:7-8,20)
이 모압은 다윗 시절에는 철저하게 이스라엘에게 예속됩니다. “다윗이 또 모압을 쳐서 저희로 땅에 엎드리게 하고 줄로 재어 그 두 줄 길이의 사람은 죽이고 한 줄 길이의 사람은 살리니 모압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어 조공을 바치니라”(삼하 8:2) 저주의 상태란 바로 이런 복을 위한 관계로 엮여져 있게 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인류는 복 아니면 저주에 속하고, 저주에 속한 자들은 복의 가치를 위한 봉사하기 위한 존재자로서 필히 저주받아야만 합니다. 이랬던 그들이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이 언약의 원리를 잃고 우상으로 돌아서자 복-저주 관계도 자연스럽게 성립될 수 없게 되었고 따라서 모압도 더는 이스라엘에게 조공을 바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언약으로 돌아와야 될 이스라엘이 언약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화려한 영광의 시절을 인위적으로 되찾겠다고 전쟁을 벌립니다. 조공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말은 국고 손실이 생기게 되었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이스라엘과 유다와 에돔의 연대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하여 국력 신장의 덕을 보겠다는 명분으로 전쟁을 개시한 겁니다.
이스라엘이 잘되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에게도 좋은 일이라고 여긴 겁니다. 그런데 연합군을 만들어 모압으로 진군을 시작한 일주일이나 어디가도 물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전쟁이고 뭐고 목말라 전군이 다 죽을 판입니다. 선지자의 도움을 요청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선지자의 개입은 곧 하나님의 개입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선지자의 관여는 전쟁의 판이 바뀌는 겁니다. 사람 대 사람의 전쟁에서 사람 대 하나님의 전쟁의 양상이 되는 겁니다. 엘리사 선지자를 소개하는 심복이 엘리야 계열임을 알려줍니다. 엘리야가 벌린 전쟁은 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의 전쟁이었습니다. ‘물 있음’이 실은 마땅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3년 간 비가 전면적으로 오지 않더라도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로서는 할 말이 없습니다. 복과 저주의 관계를 보여주어야 될 이스라엘의 본질을 이스라엘이 중요하게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바로 이 엘리야 계열의 엘리사가 모압 전쟁에 관여하게 되었습니다. 엘리사는 예언을 하게 되는 다윗처럼 음악을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취하여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신은 그에게서 떠나더라”(삼상 16:23) 그런데 예언이란 인간들이 상식처럼 생각하는 식으로 미래를 내다보는 것이 아닙니다. 즉 인간들이 예언을 참조해서 옳을 길을 선택할 그 어떤 여지를 제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있어 미래의 시간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항상 마지막입니다. 그런데 주어진 예언에 의해서 현실이라는 것이 새롭게 만들어지는 겁니다. 인간이 골라잡을 운명같은 것이 인간 앞에 펼쳐지는 것이 아닙니다. 엘리사의 예언에 의해서 ‘없던 물’이 새로 생깁니다. 바람이 불지도 않았고 비가 오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물이 생긴 겁니다.(왕하 3:17)
그런데 이 예언되어서 없는 데서 생긴 물은 인간과 인간들 간의 전쟁에서 낯선 성격을 들추어냅니다. 그것은 바로 ‘물을 피로 오해’하는 물로 작용하게 됩니다. 이 오해로 인하여 모압이 예언대로 철저하게 패배하게 됩니다. 과연 모압이 이스라엘+유다+에돔의 연합군에 패배했을까요?
아닙니다. 3개국 연합군은 모압에 대한 승리를 앞두고 뭔가 소기의 목적 달성에 실패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애초부터 모압왕 하고는 전쟁을 치를 가치가 없는 대상이라는 점을 알게 되어 버린 겁니다. 즉 모압왕에 대한 승리가 자신들의 명분 승리로 이어지지 않음을 발견한 겁니다.
왜냐하면 모압왕이 차기 왕이 될 자신의 장자를 자기 손으로 신 앞에서 번제를 드리면서 사전에 제거하는 극단적인 자기 파멸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즉 모압왕이 보여준 신은 인간이 도저히 탈출할 수 없는 막다른 지경에서 인간이 근원적으로 품고 있는 성질이 어떻게 평소에 자신이 섬기는 신과 연결되는지를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연합군 왕들의 입장에서 볼 때, 모압왕의 마지막 태도는 나가도 너무 극단적으로 막나가는 모습에 이들은 경악했습니다. 즉 모든 인간들은 이 모압왕의 극단적인 자기 파멸이 언제든지 터져나올 수 있는 공통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같은 인간으로서 수치를 느낀 겁니다.
인간은 자기 성격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탈출이 불가합니다. 자기 성질을 구겨넣은 것이 자기가 상상한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참된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이 세상에서 탈출을 할 수 없음을 이 땅에서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계하시니라”(막 3:11-12)
예수님의 오심은 결코 귀신을 구원함이 아닙니다. 이미 이 세상을 탈출하신 예수님의 시선과 안목이 성령으로 찾아오신 자들만이 이 시대의 엘리야, 엘리사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전체가 귀신 아래서 자멸 중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6강-열왕기하 3장 4-8절(자멸 중) 260311-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열왕기하 3장 4절에서 8절까지입니다.
열왕기하 3:4-8
“모압 왕 메사는 양을 치는 자라 새끼 양 십만의 털과 수양 십만의 털을 이스라엘 왕에게 바치더니 아합이 죽은 후에 모압 왕이 이스라엘 왕을 배반한지라 그 때에 여호람왕이 사마리아에서 나가서 온 이스라엘을 점고하고 또 가서 유다 왕 여호사밧에게 보내어 이르되 모압 왕이 나를 배반하였으니 당신은 나와 함께 가서 모압을 치시겠느뇨 저가 가로되 내가 올라가리이다 나는 당신과 일반이요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일반이요 내 말들도 당신의 말들과 일반이니이다 여호람이 가로되 우리가 어느 길로 올라가리이까 저가 대답하되 에돔 광야 길로니이다.”
‘모압’이라는 나라가 여기에 등장합니다. 이 모압이라는 나라는, 여호수아가 그 약속의 땅을 정복하고 접수해 나갈 때 이스라엘에 대해서 감히 나서서 저주를 퍼부었던 나라입니다. 모압 땅을 지나서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여호수아가 다 점령하게 됩니다. 그렇게 점령하고 난 뒤에 다윗 때 그 모압 왕을 하나님께서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사무엘하 8장 2절에 보면, “다윗이 또 모압을 쳐서 저희로 땅에 엎드리게 하고 줄로 재어 그 두 줄 길이의 사람은 죽이고 한 줄 길이의 사람은 살리니 모압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어 조공을 바치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모압이라는 이 나라는 하나님의 언약이 없어요. 언약이 없으니까 일반적인 민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한 상태가 되면 일반적인 민족인 그 모압은 ‘이스라엘이 복 받았다’라는 것을 확정해 주기 위해서 필히 저주를 받아야 할 나라입니다.
기존에 약속의 땅에 살고 있던 10 족속도 마찬가지예요. 이스라엘의 축복을 확인해 주는 것은 ‘너희들은 복 받아라’ 하는 식으로 복이 되는 게 아니고, 저주받아야 할 나라와 같이 발생해서 저주받아야 할 나라가 복 받은 이스라엘에 전적으로 엎드리고 조공을 바칠 때 ‘하나님이 함께하는 나라의 복은 이런 것이다’라고 확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방 모든 나라는 ‘너는 너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사는 나라’가 아니라, ‘이스라엘에 계시는 하나님이 한쪽은 복을 주고 한쪽은 저주를 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과물들로서 그들은 필히 있어야 해요. 창세기 12장에 ‘아브라함을 인정하는 자는 복을 받고, 아브라함을 인정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라는 그 원칙에 세상의 모든 민족, 인류는 그 구조, 원리가 그대로 드러나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다 동원됩니다. 하나도 빠짐없이요.
그러니까 이 점을 여러분들이 아신다면 ‘내 인생이 어떻고, 네 인생이 어떻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복을 주려는 인생은 이렇고, 하나님이 저주한 인생은 이렇다. 그리고 이 세상 그 누구도, 하나님의 복과 저주의 구분에서 빠지는 자는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겁니다. 한 인생도 없어요. 남의 인생 너무 부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차라리 이렇게 물으세요. “너 하나님께 저주받았어, 복 받았어?” 이렇게 물으세요. “너는 네 종교 가지고 있고, 나는 종교도 없다.” 이 말을 수긍하지 마세요. 종교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어느 종교를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결정될 문제가 아니고, “너는 복 받아야 해”라는 그 결정, “너는 반드시 저주받아야 해”라는 그 결정, 그리고 저주받는 너희들은 반드시 성도의 복 받음을 위해서 활용당해야 할 운명을 지니고, 그 운명에서 그들은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모압왕과 그 나라는 이스라엘에게 철저하게 무릎 꿇려서 조공을 바쳐야 할 처지에 있었습니다. 이게 언제까지냐?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으로 실시될 그때는 그랬어요. 솔로몬 때도 역시 조공을 바쳤는데 솔로몬왕 때 모압이 드디어 이스라엘의 수하에서 벗어납니다.
그 이유는, 솔로몬왕 말기에 우상을 섬김으로써 주변에 있는 나라들이 하나둘씩 독립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저주라는 것은, 복의 복 다움을 위해서 반드시 엮여서 통치를 받고 지배를 받는 데서 저주가 드러나는데, 하나님의 복을 이스라엘 자체가 차버릴 때, 복을 주시는 여호와보다도 언약이 없는 우상을 섬길 때 굳이 모압이나 암몬이나 블레셋 같은 주변의 나라들이 다윗이나 솔로몬에게 조공을 바칠 하등의 이유가 없지요.
그러니까 솔로몬 말기부터 이스라엘이 오해하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다’라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다’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하나님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의 언약을 위한 하나님뿐이에요. 나를 위한 하나님은 없습니다. 언약이 언약을 겨냥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이에요.
오늘 열왕기하 3장 전체를 다 하겠습니다. 읽기는 이렇게 4절에서 8절까지만 읽었지만, 3장 전체 내용을 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모압이 “이제부턴 조공 안 바친다. 내가 더 이상 너희들 시다바리 아니다” 해서 조공이 안 들어오니까 국력이 위태롭잖아요. 이스라엘 나라가 둘로 쪼개진 상태에서 북이스라엘의 여호람 왕이 남쪽 여호사밧 왕에게 슬그머니 슬그머니 제안합니다.
국고가 차야 하는데 외부에서 조공이 안 들어오니까 국가 수입이 줄잖아요. 그래서 “원래 우리가 같은 하나님 여호와 믿는 이스라엘의 12지파 아닌가?”라고 합니다. 에돔이라는 나라는 야곱의 형인 에서의 후손이거든요. “여호와와 관련된 우리 세 나라 왕이 생각을 함께하자. 저 모압이 감히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에 조공 바치기를 거부하고 독립해 나갔는데 손 좀 보자. 그냥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 우리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땅이니 조공 받는 것이 당연하고 마땅한데 저리 나오니 혼내줘야 한다. 함께 전쟁하자.”
그래서 전쟁하게 됐어요. 자기들 딴엔 어떤 명분 같은 게 있다고 세 나라가 연합을 한 겁니다. 여호와와 관련된 나라 북이스라엘, 남유다, 그리고 야곱의 형제 국가인 에돔, 이 세 나라가 합해서 애초부터 이스라엘 적이었던 모압을 공격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도와줘서 승리한다’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드디어 쳐들어갔습니다.
일주일 동안 갔는데 열왕기하 3장 9절에 보면 물이 없어요. “이스라엘 왕이 유다 왕과 에돔 왕으로 더불어 행하더니 길을 둘러 행한지 칠일에 군사와 따라가는 생축을 먹일 물이 없는지라.” 물이 없으니까 이 전쟁하기도 전에 세 나라 연합군이 목말라서 전멸할 판입니다. 그래서 10절에 보면, “이스라엘 왕이 가로되 슬프다 여호와께서 이 세 왕을 불러 모아 모압의 손에 붙이려 하시는도다.”
‘물도 없이 전쟁해 봐야 적들에게 우리는 다 죽었다.’ 그렇게 걱정을 하니까 11절에 “여호사밧이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께 물을만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여기 없느냐 이스라엘 왕의 신복 중에 한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전에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던 사밧의 아들 엘리사가 여기 있나이다.”
이스라엘 신복 중 한 사람이 엘리아를 기억했어요. 여기서부터 전쟁의 양상이 이상하게 흘러갑니다. 전쟁은 잠시 멈췄어요. 물이 없으니까요. 일주일 동안 물이 없었다는 것은 전쟁하기도 전에 패배한 것과 마찬가지죠. 물이 있어야 전쟁하잖아요.
그러니까 세 왕의 지금 생각이 이런 거예요. ‘전쟁하는 명분은 확실하게 좋은데, 지금 단지 병참, 물이 없다. 명분은 하나님 보시기에 분명히 괜찮을 것이다. 따라서 선지자한테 물어보면 이 전쟁을 치르는 데 지장이 없게 될 것이다.’ 이렇게 안일하게 생각한 겁니다.
그때 이스라엘의 신복이 엘리야를 언급한 거예요. 엘리야는 이미 죽었어요. 하늘로 올라갔죠. 현존하는 인물이 아닙니다. 엘리야를 거론한다, 또는 엘리야 쪽에서 개입한다는 것은 전쟁의 양상이 기존 인간 대 인간의 전쟁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전쟁했을 때는 어떤 의미가 새롭게 나오는지’가 기대되는 전쟁으로 양상이 바뀝니다.
엘리야가 누구하고 전쟁했습니까? 엘리야는 소위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는 자들과 전쟁했어요. 어떤 식으로 엘리야가 전쟁했습니까? 이스라엘에 비가 오질 않았어요. 생존하는데 가장 기본인 물이 있어야 하는데 지하수조차 말라버렸어요.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엘리야가 기도하니까 비 오지 않은 거예요. 엘리야가 기도 하니까 다시 비가 왔고요.
그러니까 하나님과 인간의 전쟁에서 비가 오고 안 오고의 문제는, 하나님은 엘리야의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그냥 하나님이 아니고 엘리야와 통하는 하나님에 의해서 북이스라엘은 패배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패배한 뒤에 갑자기 3년 6개월 만에 비가 내려서 “살았다!” 이렇게 되었거든요.
이스라엘 신복이 그걸 알고 있어요. 세 왕은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어요. ‘우리가 전쟁하는데 선지자가 도와줬으면 좋겠다.’ 지금 그렇게 생각하는데 엘리야 시대에 미가야 선지자가 있었잖아요. 미가야 선지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우리 전쟁인데 하나님이 도와주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전쟁의 의미에 너희들이 끼어들어서, 과연 너희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자세로 살아가는가가 들추어지는 전쟁을 하게 된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지금 이 세 왕은 어떤 생각을 하느냐 하면, ‘이 전쟁은 인간 대 인간의 전쟁이다. 이스라엘, 유다, 그리고 에돔의 인간과 저쪽 모압이라는 인간과의 싸움에서 하나님이 좀 도와주세요’ 하고 선지자를 부릅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이미 없고 이스라엘의 신복이 하는 말이 “엘리야와 동일한 계열의 선지자가 있다.” 엘리야의 제자 사밧의 아들 엘리사는 살아있다는 거예요.
엘리야 계통의 선지자가 있다는 말은, ‘엘리야는 이미 떠났어도 엘리야에게 줬던 하나님의 전쟁원칙은 엘리사로 계속 이어져 쉬지 않고 작용하게 된다’라는 뜻이겠죠. 자, 엘리사가 이 전쟁에 관여함으로써 전쟁의 판이 바뀝니다. 전쟁의 판이 어떻게 바뀌었는가?
사람 대 사람의 전쟁에서 사람 전체와 그리고 엘리야의 하나님과의 전쟁에 맞닥뜨리게 되는 겁니다. 그럴 때 “인간들아, 너희들은 무엇을 놓쳤기에 너희들이 명분이 있다고 여기는 전쟁에서 일주일이나 물이 없느냐?” 너희들이 명분 있다고 여기는 그 전쟁에서 물이 없다는 것은 ‘너희들이 무엇에 지금 무지하다’라는 거예요.
‘너희들은 정의로운 전쟁을 하고 있다고 여긴다. 전에 이스라엘이 모압에게 조공을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축복받은 나라다웠기에 다시 축복받은 나라로 원상회복하기 위해서 노력한다는데, 복 받은 나라 이스라엘은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런 나라가 아니다’라는 거예요. 명분을 내세울 만한 자격조차도 안 된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너희들은 전쟁할 자격도 없다는 거예요. 전쟁할 자격도 없다.
그래서 엘리사를 불렀어요. “물을 다오.” 그 세 왕은 그냥 물만 달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물 주세요. 우리에게 물이 필요합니다” 했을 때 엘리사는 물을 당장 주지 않고 거문고 탈 자를 찾아요. 15절에 “이제 내게로 거문고 탈 자를 불러 오소서 하니라 거문고 타는 자가 거문고를 탈 때에 여호와께서 엘리사를 감동하시니.”
사무엘상 16장 22-23절에 보면, “이새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청컨대 다윗으로 내 앞에 모셔 서게 하라 그가 내게 은총을 얻었느니라 하니라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취하여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신은 그에게서 떠나더라.”
여호와의 신이 임하는 징후가 있습니다. ‘너희들이 보기에 다윗 내가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인간처럼 보이지? 너희들은 너희들의 힘으로 살아가지? 나는 그렇지 않아. 하나님의 신이 함께 있어’라는 것을 보일 때 비파나 거문고나 음악을 동원하는 겁니다. 이것은 사무엘상 16장뿐만 아니라 사무엘상 10장 5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후에 네가 하나님의 산에 이르리니 그곳에는 블레셋 사람의 영문이 있느니라 네가 그리로 가서 그 성읍으로 들어갈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산당에서부터 비파와 소고와 저와 수금을 앞세우고 예언하며 내려오는 것을 만날 것이요.”
역시 하나님의 신이 임한 선지자의 무리가 그들의 노래를 통해서 ‘하나님의 신이 우리와 함께 한다’라는 것으로 분위기를 바뀌게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신이 함께 하게 되면, 여기서 예언의 말씀이 나와요.
오늘 본문 열왕기하 3장 15절 다시 보면 “이제 내게로 거문고 탈 자를 불러 오소서 하니라 거문고 타는 자가 거문고를 탈 때에 여호와께서 엘리사를 감동하시니.” 거문고를 타니까 엘리사가 감동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나오는데 그 말씀이 뭐냐? 예언으로 나와요. 16절에 “저가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이 골짜기에 개천을 많이 파라 하셨나이다.”
예언이 나온다는 말은, “현실이 앞으로 어떻게 되겠습니까?”라는 게 예언이 아닙니다. ‘앞으로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는 것은 부채 도사가 하는 거예요. 그것은 점쟁이들이나 하는 거예요. 그것은 무당들이 하는 짓입니다. 예언은 그게 아닙니다.
예언은 현실을 새로 만들어내는 게 예언이에요. ‘앞으로 내 일이 어떻게 됩니까?’라는 말, ‘뭔가 내 앞에 무슨 일이 있을 건데 그 일을 미리 알고 싶다’ 할 때 점치는 거잖아요. 예언은 그게 아니고, 내 앞길에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없다고요. 없는데 예언의 말이 오게 되면, 예언의 말이 내 앞길에 타일을 까는 것처럼, 새로운 길을 열어가는 것처럼 그렇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 이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와요. 13-14절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이 말씀을 딱 듣고 ‘아, 영생, 천국은 좁은 길로 가는 거구나. 좁은 길은 어디에 있지?’ 이러는데 좁은 길은 없습니다. ‘나는 넓은 길보다 좁은 길을 선택해야지.’ 선택한다는 말은 미리 넓은 길 좁은 길이 따로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나 내가 어떤 것을 선택하는데, 인간의 앞길은 넓으니까 좁은 길이고 아무것도 없어요.
‘좁은 길로 가라’는 그 말씀으로 인하여 좁은 길이 생기고, ‘넓은 길로 가면 멸망’이라는 그 예언의 말씀에 의해서 지옥 가는 길로 사람들이 가는 그 현실이 새롭게 만들어지는 거예요. 이제 예언과 앞일을 점치는 것을 구분하시겠습니까? 이렇게 설명해도 모르면 할 수 없어요.
선택할 일이 앞에 없다니까요. 선택할 게 없어요. 오늘로 내 인생 끝나고, 내일 염려는 내일 하라는데 우리가 무슨 선택을 해요? “내일 잘할게요.” 내일은 없다니까요! “모레 잘할게요.” 모레가 없어요. 내일이고 모레고… 그것은 주님 소관이지 ‘정신 바짝 차려서 오늘보다 내일은 잘해야지! 아, 내일은 장을 담가야겠다.’ 이런 ‘내일’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니까요. ‘내일’은 성립이 안 돼요. 하여간 나의 미래 자체가 없어요.
왜냐? 우리는 예언의 말씀에 삼킴을 당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치 누구같이? 엘리사처럼. 기타 한번 칠까요? 엘리사에게 말씀이 임하니까 없는 데서 어떻게 이런 일이 만들어지는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저가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이 골짜기에 개천을 많이 파라 하셨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너희가 바람도 보지 못하고 비도 보지 못하되 이 골짜기에 물이 가득하여 너희와 너희 육축과 짐승이 마시리라 하셨나이다”(왕하 3:16-17).
그러니까 태풍 매미가 오고 이래서 비가 오는 게 아니고, 바람도 안 불고 아무것도 없는데, 비 올 낌새가 없는데, 골짜기를 팠을 뿐인데 물이 가득하다. 이게 뭐냐? 물로써 전쟁을 치렀던, 가뭄과 비가 옴으로써 하나님 자신을 이스라엘에 새롭게 드러냈던 엘리야의 그 계시 방식을 엘리사가 그대로 이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전쟁하는 데 물이 없다. ‘물’이죠. 그런데 엘리사의 예언대로 골짜기를 파니까 거기서 물이 생겼다. 그러면 하나님의 예언은 뭐냐? 두 개가 있는데 첫 번째는 뭐냐? 없는 데서 있는 것, 없는 데서 새로 생긴 것은 예언이 없는 데서 말씀이, 예언이 새로 생겼다는 거예요.
그러면 예언의 역할이 뭐냐? 그것이 두 번째입니다. 물이 생기고 난 뒤에 모압 사람이 뭐라고 하는가? 20절에 보면 물이 그득했잖아요. “아침에 미쳐 소제 드릴 때에 물이 에돔 편에서부터 흘러와서 그 땅에 가득하였더라.”
그리고 21-23절에, “모압 모든 사람이 왕들이 올라와서 자기를 치려 한다 함을 듣고 갑옷 입을만한 자로부터 그 이상이 다 모여 그 경계에 섰더라 아침에 모압 사람이 일찌기 일어나서 해가 물에 비취므로 맞은편 물이 붉어 피와 같음을 보고 가로되 이는 피라 필연 저 왕들이 싸워 서로 죽인 것이로다 모압 사람들아 이제 노략하러 가자.”
아침에 모압 사람이 일찍 일어나서 보니 해가 물을 비추는데 그 물 색깔이 피 색깔이었어요. ‘아, 이것은 여호람과 여호사밧 그리고 에돔 왕이 저희끼리 대판 싸운 것이다. 칼과 창으로 서로 찔러서 그 피가 물에 섞여 흐른다. 이때 우리가 공격하면 이긴다.’
그래서 세 왕이 모압에게 다가가는 게 아니고, 모압 왕이 세 왕의 연합군 쪽으로 다가와서 전쟁하다 그들은 어떻게 됐는가? 열왕기하 3장 24-25절에, “이스라엘 진에 이르니 이스라엘 사람이 일어나 모압 사람을 쳐서 그 앞에서 도망하게 하고 그 지경에 들어가며 모압 사람을 치고 그 성읍을 쳐서 헐고 각기 돌을 던져 모든 좋은 밭에 가득하게 하고 모든 샘을 메우고 모든 좋은 나무를 베고 길하레셋의 돌들은 남기고 물맷군이 두루 다니며 치니라.”
그들은 완전히 황폐하게 되었어요. 19절에서 이미 엘리사가 예언했어요. “당신들이 모든 견고한 성과 모든 아름다운 성을 치고 모든 좋은 나무를 베고 모든 샘을 메우고 돌로 모든 좋은 밭을 헐리이다.” 그래서 예언 그대로 된 거예요.
그러니까 물이 뭐냐? 없는 데서 생겼다는 것. 두 번째는 뭐냐? 모압왕은 속은 거예요. 이게 그냥 물인데 피인 줄 알고 속아서 쳐들어왔다가 패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전쟁이 여기서 끝나느냐? 아닙니다. 선지자가 개입한 전쟁은 인간 대 인간의 전쟁을 해서 한쪽이 이기고 한쪽이 지는 전쟁이 아닙니다.
판이 바뀌었어요. 인간 대 하나님의 전쟁, 인간이 어떤 점에서 무지하고, 어떤 점에서 착각하고 있는지를 선지자의 입을 통해서, 예언의 말씀을 통해서 ‘너희들은 과연 정의로운 명분 있는 전쟁할 자격이 있느냐?’를 그들에게 되돌려줘요.
이 엘리사가 초청받았을 때 한마디 합니다. 13-14절에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의 부친의 선지자들과 당신의 모친의 선지자들에게로 가소서 이스라엘 왕이 저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여호와께서 이 세 왕을 불러 모아 모압의 손에 붙이려 하시나이다 엘리사가 가로되 내가 섬기는 만군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만일 유다 왕 여호사밧의 낯을 봄이 아니면 당신을 향하지도 아니하고 보지도 아니하였으리이다.”
‘내가 북이스라엘 너희들을 보고는 이 전쟁에 관여하지 않는다. 다만 남쪽 유다 나라 여호사밧을 생각해서 개입한다’라는 이야기를 했어요. 다시 말해서 ‘이 전쟁에서 북이스라엘과 에돔은 내 알 바 아니다. 그러나 유다 나라 여호사밧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예언을 할 것이다’라고 한 겁니다.
이 말은 뭐냐? 이 전쟁의 모든 의미는 북이스라엘도 아니고 에돔도 아니고, 성전이 있는 유다 나라를 향하여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취지에서 엘리사가 관여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뭐라 했든 간에 우리가 이겼으면 됐잖아.’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승리의 기쁨을 차지하려고 하는데 26-27절에 반전이 나옵니다. 예상치도 못한 특이함으로 전쟁이 끝나요. “모압 왕이 전세가 극렬하여 당하기 어려움을 보고 칼 찬 군사 칠백을 거느리고 충돌하여 지나서 에돔 왕에게로 가고자 하되 능히 못하고 이에 자기 위를 이어 왕이 될 맏아들을 취하여 성 위에서 번제를 드린지라 이스라엘에게 크게 통분함이 임하매 저희가 떠나 각기 고국으로 돌아갔더라.”
이 전쟁의 끝에 승자가 없어요. 갑자기 전쟁이 중지되고 말았어요. 칼싸움으로 끝내야 할 전쟁이 칼싸움이 아니고 궁지에 몰린 적이 막다른 골목에서 하는 어떤 행위가 있었어요. 그 행위가 뭐냐 하면, 자기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거예요. 자기 신에게 제사를 드릴 수가 있죠.
왕이 죽고 난 다음 차기 왕이 될 자가 누구냐? 그게 장자예요. 모압왕이 왕의 자리를 이어서 왕이 될 그 아들을 취해서 성 위에서 번제를 드립니다. 성 위에서 제물로 사람을 잡아버립니다, 사람을! 이웃 아니고, 못난 사람도 아니고 차기 왕이 돼야 할 자기 아들을 짐승 태우듯이 태워버리는 제사를 드립니다.
이때 이스라엘은 그 광경을 보고 너무나 충격을 받아서 ‘야, 우리 전쟁 그만하자’ 하고 각자 자기 집으로 갔다는 거예요.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조금만 더 하면 승리가 눈앞에 있어요. 모압은 점령했고 왕만 잡으면 되는데 왕은 잡지도 못했어요. 연합군은 왜 그냥 돌아갔는가?
우리가 모압 왕과 전쟁한다는 자체, 싸움 자체가 애초에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 모압 왕은 우리하고 싸울 수 있는 위인이 못 된다는 것을 알고 실망스러워서 자기 집으로 돌아간 겁니다. 엘리사가 관여된 이 전쟁의 끝이 이렇게 전쟁하다가 마는 것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전쟁은 마무리되지 못한 것처럼 되었어요. 군사들은 각자 자기 집으로 돌아갔고, 모압왕도 살아남았어요.
그동안 무슨 짓을 했어요? 명분이 어떻고, 조공도 얻어내지도 못했어요. 그냥 시마이하고 끝났어요. 왜 그런가? 엘리사의 내부에 있는 하나님과, 유다와 이스라엘, 에돔의 내부의 그 하나님이 다른 하나님이에요. 이름은 ‘여호와’로 동일한데 다른 하나님입니다.
유다와 이스라엘과 에돔 내부에 있는 그 하나님의 속살, 진짜 본질은 누가 대신 보여줬느냐? 차기 왕인 자기 아들을 바쳐서 신에게 살려달라고 비는 그 모압왕…, 그 신이 ‘그모스’ 신이에요. 사람을 죽여서 바치는 것은 암몬의 신 몰렉도 마찬가지고요. 암몬은 모압 위쪽에 자리하는 나라예요, 그래서 우상 숭배하는 그 이방 나라 신의 진면목을 전쟁의 끝장에서 그대로 보여줬어요.
그렇게 보여준 모습은 엘리사가 ‘여호와 하나님’으로 알고 있는 하나님의 본질과 달라도 너무 다른 거예요. 여기서 모압왕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가짜 하나님입니다. 어떤 가짜냐? 자기의 성질을 못 이겨서 믿는 신, 자기의 성질을 압축해서 구성한 신입니다. 자기 아들을 바쳤다는 것은, 탈출할 수 없는 세계, 환경, 프레임, 그 장에서, 인간이 극도로 자기 처지가 심각할 때 그 신에게 마지막 드릴 것은 뭐냐? 자멸이에요, 자멸.
자기 다음의 왕이죠, 나는 죽어도 너는 왕이 되어 살아 있다는 그 관계가 현재 왕과 차기 왕의 관계에요. 그런데 그 차기 왕을 누구 손으로 제거했다? 궁지에 몰린 본인 스스로 그 아들, 차기 왕으로 등극할 그 아들을 죽였다는 말은, 왕 스스로 살아 있으면서 막다른 골목, 막다른 길에 왔을 때 자기 성격, 성질을 붙들고 자폭하는 그 모습이 바로 인간들이 상상하는 하나님의 진수라는 겁니다.
가룟 유다죠, 가룟 유다. 자기 성질을 못 이겨서 믿는 신. 보통 어릴 때부터 교회도 안 다니고 절에나 어쩌다 가고 한 사람, ‘나는 종교도 없다’라고 하다가 나이 들어서 갑자기 어려운 일 있을 때, 또 사업이 어려울 때 ‘하나님, 한 번만 도와주세요’ 하면서 교회 찾아가고 그러잖아요. 그것은 자기 성격을, 성질을 구겨 넣어서 만든 가짜 신이에요.
막다른 길에서, 자기 인생이 막장에 다다를 때 ‘정말 이것은 죽음 직전이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 할 때도 자신이 갖고 있는, 그럼에도 죽지 않는 게 뭐냐 하면 자기 성질, 성격이잖아요. 자기 성격을 마지막 폭탄처럼, 폭죽처럼 터뜨려서 집어넣고 던져 넣는 신, 이 신, 이게 바로 보편적인 인간이면 누구나 소지하고 있는 하나님이에요. 모압왕의 자해 소동.
모든 인간이 다 이렇다고 하는 것은 그 막다른, 뚫을 수 없는, 그래서 인간은 탈출하지 못하는 세계에서 애초부터 살아왔던 거예요. 탈출하지 못하는 세계에 살면서 그들은 눈에 보이는 같은 인간들끼리 명분과 자기 존재 이유와, 나름대로 자기의 우수함을 과시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평생토록 싸우고 또 싸우는 겁니다.
미국하고 이란, 러시아하고 우크라이나, 이스라엘과 가자, 남한과 북한…. “나의 명분, 명분 세워야 하겠다. 내 존재의 명분, 이건 포기 못 해”라는 그 고집, 그 고집이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다 들어 있었던 거예요. 그게 들어 있지 않는 사람은 엘리야하고 엘리사밖에 없어요, 그 당시에.
없는 데서 물이 생겼던 거예요, 없는 데서. 그 물을 보고, 없는 데서 생긴, 엘리사에 의하여 생긴 그 물을 보고 모압왕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물의 첫 번째 특징은, 없는 데서 생겼다. 두 번째는, 속았죠! 인간은 본인한테 속고 있는 거예요. 본인의 성격에 속고 있는 겁니다. 본인의 극단적인 성격이 만들어낸 하나님을, 본인이 숭상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우상인 거예요. 진짜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에서 주어진 예언의 말씀을 통해서만 주어지는 거예요. 언약을 통해서 주어지는 겁니다. ‘물이 있다, 물 없다’가 신약 성경의 전쟁에서는 뭐냐? 첫 번째로 ‘율법이 있다, 없다’가 돼요. 율법은 없는 데서 생겼잖아요. 두 번째, 모든 인간은 율법을 보면서, ‘지키면 천국 가겠지, 지키면 구원받겠지’하는데, 그것은 율법에 속은 거예요.
율법이 더한 것은 로마서 5장 20절에, “죄를 더하게 함이라.” 죄를 더하게 함이라! 이걸 모르는 거예요.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런데 ‘내가 뭐가 죄인인데? 내가 뭐가 잘못됐는데? 나는 하나님 믿는데.’ 그런데 그 하나님은 자존심의 하나님이라니까요. 자기 의(義)의 하나님이에요.
모압왕이 차기 왕이 될 자신의 아들을, 그 세 왕이 보는 데서 산채로 불태웠다는 것은 내막이 이렇습니다. ‘이번 전쟁의 성격은 인간이 어디까지 막 나갈 수 있는가, 의 전쟁인데, 저 모압왕은 나가도 너무 나갔다’는 겁니다. ‘에이, 죽기 살기다. 미사일 드론 전부 다 퍼부어 버려라. 국민이고 뭐고 이웃 나라 미군기지 쿠웨이트, 아랍 에미리트에 쏟아부어라. 기뢰(機雷)도 해저에 다 깔아라. 석유는 1리터도 통과 못 하게 해라. 이제 너도 죽고 나도 죽고….’ 이게 이란의 자해 소동이에요.
여러분, 뉴스 보고 있죠? 이란의 자해 소동. 하메네이 후계자로 모즈타바를 뽑았다는데 이름만 나오지 나타나지를 않아요. 이름은 있는데 사람은 없어요. 엘리사가 보기에 ‘똑같은 인간이, 동일한 본질을 가진 인간이, 인간끼리 싸워?’ 이것은 마귀가 원했던 겁니다, 마귀가.
모든 인간은 지금 자멸 중이에요, 모든 보편적인 인간들은. 여기서 하나님의 신,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만 이 판이, 이 판이 곧 지옥의 실상인 것을 압니다. 악마가 다 시켜서 그런 거예요. 마가복음 3장 11-1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계하시니라.”
누가복음 4장 41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 질러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저희의 말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줄 앎이러라.”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귀신을 구원함이 아니고, 인간 중에 자기 백성을 건져려 함이거든요.
그런데 귀신이 먼저 알아버린 거예요. “귀신아, 너 구원하려고 내보내는 게 아니다.” 이 말이죠. 인간은 이 귀신한테 속아 넘어간 거예요. 속았어요. 모압왕이 그 물, 엘리사가 만든 그 물에 속아 넘어가듯이 속아버렸어요. 속아서는 ‘이것은 우리 인간들과 인간들의 관계다. 하나님은 도움만 주고,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해결한다.’ 알아서 하는 게 아니고 전부 다 각기 귀신들이 다 들어 있는 거예요.
여러분, 국화빵 알아요? 국화빵이나 붕어빵의 공통점이 뭔지 알아요? 모두 다 동일한 팥앙꼬가 들어있다는 거예요. 물론 생크림 들어 있는 것도 있겠지만요. 각자 전부 다 귀신이 들어서, 귀신끼리 서로가 전쟁해 봐야 소용없어요. 전부 다 동질이에요, 동질. 공통점이 뭐냐? 자멸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삼성 주식 사고 자멸하고, 어떤 사람은 ‘주식이 뭔데?’ 이러면서 자멸하고 있고, 어떤 사람은 농사지으면서 자멸하고, 어떤 사람은 교사 하면서 자멸하고 있고….
자멸에서 예외인 사람은 어떤 종류밖에 없느냐? 이미 예수님과 동일한 안목을 가지고 보는 사람. 예수님과 동일한 안목으로 보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 있잖아요, 예수님의 죽으심이 인간이 돌파할 수 없는 세계를 벗어 나는 유일한 길, 그 십자가의 죽음이 유일한 길이었고, 너희 대신 죽었다는 그 십자가의 안목으로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 미리 본 사람만 이 시대의 엘리야, 이 시대의 엘리사같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시대가 불로서 파멸될 대상이고 그 안에 모든 저주받은 인간들은 스스로 악마에 의해서 속아가면서 자멸중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 세상은 왜 멸망하는가? 복 있는 사람을 더욱더 복되게 하기 위해서, 그들은 저주받아야 될 기능에 충실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얼마나 감사한지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십자가를 알고 하나님의 영을 받았다는 것이 얼마나 고맙고 놀랍고 감사한 일인지요. 막혀버린 세상을 벗어난 안목, 탈출 불가한 세상을 탈출해서 주와 함께 이 세상을 다시 보는 그 시선, 그 시선을 가지고 우리도 세상에서 복음을 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수요설교(260311) 요약 열왕기하 3장 4-8절(자멸 중)
수요 설교에서 두 가지 관점이 있을 수 있어요. 전쟁을 한다고 하면, 우리의 관심사는 인간 대 인간에서‘누가 이길까? 누가 질까?’에 관심이 있잖아요. 그런데 거기에서 선지자의 존재를 무시하면 안돼요. 선지자가 인간들이 하는 전쟁에 개입한다는 것은 판이 바뀌는 겁니다.
전쟁을 통해서 생산되는 의미가, 하나님이 이 땅에 언약을 남기고자 하는 데에 같이 섞여서 더 추가적으로 추진력을 갖게 돼요. 그래서 엘리사가 말하기를 ‘내가 이 전쟁에 관여하고 싶지 않은데, 유다 나라의 여호사밧을 보고 관여한다.(왕하3:14)‘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북쪽 이스라엘도 아니고, 에돔도 아니고 유다예요. 유다에게는 다윗의 등불이 아직 유효하기 때문에, 그 다윗의 등불, 다윗의 언약을 위해서 수반되는 새로운 현실들이 어떻게 무럭무럭, 뭉게뭉게 이루어져야 되는가? 그 중에 하나가 이 전쟁이 되는 거죠. 전쟁할 때 인간들의 철딱서니 없음은 기존의 판, 철없는 기존의 판에서 전쟁의 의도가 등장합니다.
그게 전쟁의 명분인데, 그들의 전쟁 명분은 뭐냐? 옛날에 모압이 마땅히 여호와가 계시는 이 나라에 조공을 바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힘 있는 나라로 만들겠다는 하나님의 일관된 취지에 모압은 종으로 부려질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겼는데, 그런 그들이 독립했을 때, 이스라엘 남쪽이나 북쪽은 문제가 자신들에게 있다는 생각은 조금도 못하고 ‘이것들 우리가 손 좀 봐야겠구만.‘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모압이 빠져나오는 것은 복과 저주라는 하나님의 장치에 있어서 복이 복답게 드러나는 조건 하에 저주가 저주를 받고 종이 돼야 되는데, 옛날에 저주는 종이 되는 거예요. 야곱과 에서의 관계도 그렇고, 이삭과 이스마엘도 그렇고, 종이 되는 겁니다. 노아의 자손인 함과 가나안이 셈과 야벳에게 종이 되듯이, 섬겨야 되듯이 주종관계가 되듯이 그렇게 되는 겁니다.
‘먼저 난 자가 나중 난 자를 섬기리라(창25:23, 롬 9:11-13)’ 하듯이 야곱과 에서도 마찬가지고요. 하나님은 복과 저주의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을 두 부류로 나누어서 활용하고 있는데, 인간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거주한다는 이유 때문에 마땅히 하나님이 이 나라를 강건하게 지켜준다고 착각한 거예요,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전쟁을 하는데, 이 전쟁이 원활치가 않아요. 이거는 뭐 전쟁하기도 전에 모든 군사들이 갈증 나서 목말라 죽을 판이에요. 왜냐 하면, 원래 전쟁하기 전에 미리 탐사를 하잖아요. 샘이 어디에 있고, 우물이 어디에 있는지 AI가 다 탐사를 해서 물이 있다고 했다고요. 그런데 AI도 소용없어요. 물이 하나도 안 나와요. 일주일동안 물이 안 나와요.
물이 안 나오니까 무슨 생각이 드느냐 하면, ‘우리에게 문제가 있다, 이때는 물이 없을 때 물 나오게 했던 선지자가 그립다,’ 그 선지자가 누구냐 하면 바로 엘리야였고, 그 엘리야는 지금 없으니까 엘리야 계열의 선지자가 있다. 그가 바로 엘리사다. 그래서 엘리사를 초빙한 거예요.
엘리사는 유다 보고 참여한다 해서 거문고 켜는 사람을 보조로 해서 음악 들으면서 ‘없는 현실을 새롭게 만들어 나가는 하나님의 방식이 뭡니까? 하나님, 어떤 식으로 현실을 이끌어나갑니까?’ 라고 했고, 거기에 나오는 것이 바로 물을 파는데, 비가 오는 것도 아니고, 태풍 부는 것도 아니고, 그냥 물이 없는데, 땅 파니까 물이 생겼어요.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물 있음은 마땅한 것이 아니고, 원래 너희들을 보면, 없어야 마땅한데, 하나님이 새로운 현실, 언약을 진행시킨다는 새로운 취지에 합당해서 없는 데서 생긴 게 물이죠. 그래서 그들은 물 생기면, 물 먹고 군사들이 힘을 얻어서 이제는 ‘모압 까짓 거 이길 수 있다,’ 이렇게 나서는 거예요, 인간은.
그렇게 되면 자기의 명분이 살아버려요. ‘저 모압을 치는 우리는 정의롭고, 침을 당하는 모압은 우리에게 공격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인정해줬다,’ 이런 논리로 기존의 판을 그냥 유지하는 셈이 되어 버려요. 판을 엎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전쟁했던 명분 자체가 엉터리였다는 것을 알려줄 필요가 있었던 거예요. 그것 때문에 선지자가 개입하는 겁니다.
‘
‘전쟁하는데 물이 있다, 물 먹었다, 그러면 힘내서 전쟁한다.’이거 아니에요. 물의 기능에 적들, 모압은 속아 넘어갔죠. 속이려고 속인 게 아니고, 저희들이 스스로 속은 거죠. 스스로 속는 거예요. 물인데, 피라고 생각한 거예요. 해 뜰 때, 피라고 생각한 거예요. ‘보니까, 저들 연합군의 전선은 완전히 무너졌다. 이 때 쳐들어가자.’
쳐들어가서 저들이 예언대로 다 망해버렸는데, 여기서 뭐냐 하면, 없는 데서 있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그들이 없는 데서 있었다는 생각을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어느 쪽에서 오해를 하느냐 하면, 선지자가 관여하기 전에 전쟁을 치르겠다고 작심했던 그 판이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 자진해서 스스로 속아 넘어간 판이 되는 거예요.
그 전쟁에서 승리하면 누가 영광 받겠습니까? 겉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하지만, 자기 존재의 정당화가 되잖아요. ‘역시 우리는 전쟁할 자격이 있었어. 하나님이 인정했기 때문에 도와준 거야. 선지자가 왜 도와줬겠어? 우리가 잘 한 짓을 했기 때문에 도와줬겠지.’이렇게 나오죠. 그걸 엎어버려야 되죠.
그들도 물이 그렇게 속인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죠. 그렇게 속고 전쟁해서 거의 다 승리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자기 승리에 도취되어서 나가는데, 마지막 대목에서 그들이 전쟁의 마무리를 안 짓고 전쟁을 끝내버렸어요. 마무리를 짓지 않고..
그건 뭐냐 하면, 이스라엘과 유다와 에돔이 모압을 칠 자격이 과연 있느냐 하는 문제예요. 둘 다 동질이에요, 똑같아요. 그 나물에 그 밥이에요. 그만그만해요. 하나님은 어느 한 쪽의 편을 들어주지 않아요. 하나님의 내부가 선지자의 내부로 들어왔죠.
그러나 인간의 내부는 그들이 인간 대 인간으로 전쟁하는 상대와 똑 같은 문제예요. 만약에 엘리사가 전쟁을 했다면, 자기 아들을 잡든, 조카를 잡든 관계없이 쳐들어갔을 거예요. 그러나 ‘인간인데 어떻게 저럴 수 있나?’하는 그 동질감을 느끼게 만들어버렸어요.
모압 왕이 차기 왕인 자기 아들을 자기 손으로 죽임으로써 스스로 ‘우리 왕국은 이번 전쟁 끝나면 우리 왕국도, 나도 없다고 각오하고 마지막으로 신에게 내 아들을 바친다, 이 정도로 정성을 들이고, 이 정도로 헌신하는데 나의 신이여..’, 그모스 신이죠, 또는 몰렉이라고 하고, 다 바알 계통의 신들이에요.
인간의 정성을 끌어 모아서 신의 감동을 유도해내는 그런 종교, 한국 교회하고 똑 같죠. ‘이 정도로 하는데 진짜 안 해주면 섭하다, 정말.’이런 거 있잖아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신에게 그렇게까지는 안해요. 사랑하는, 자기보다 더 귀한,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를 대신할, 나는 죽어도 나대신 살아있어야 될 그 아들마저 자기를 통해 회수해서 죽여 버렸다는 말은 내가 이거 오늘 죽는다는 뜻이에요.
내 그림자를 회수해서 내 그림자마저 이제는 나타나지 않고 소멸시킬 정도로 나는 몰빵했다는 말입니다. 그럴 때, 그걸 보고 있던 여호사밧과 여호람과 에돔 왕도 ‘같은 인간으로서 나도 이해하는데, 저 정도는 아니다, 저건 너무 심했다, 야, 상관하지말자. 우리가 상종할 가치도 없는 인간하고 전쟁하니까 우리 명예나 세우고, 체면 지키고, 저런 막 가는 인간하고 우리는 상대하지 말자. 아이고, 뭐 조공 안 바치면 우리끼리 살지, 뭐.’ 하고 각자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는 게 끝이에요. 이게 끝입니다.
그러니까 전쟁을 한다는 것은 숨겨진 몰랐던 자기 본모습을 상대를 통해서 발견하는 계기가 되면서, 전쟁에 승리한다고 하나님이 의롭다고 칭찬하는 대상이 되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언약은, 우리도 매일 전쟁하잖아요. 삶 자체가 전쟁 아닙니까? 하나님 통해서 우리가 공격하는, 욕하는 그 인간이나 우리나 같은 동질의 인간으로서 주님 보시기에 다 같이 한심스러운 존재라는 것을, 각자 집으로 가서 대기하고 있으면 돼요. 십자가가 임하면 ‘아, 이래서 내가 죄인이구나.’ 깨닫게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