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그릇
2026년 3월 18일 본문 말씀: 열왕기하 4: 1-7
(4:1) 선지자의 생도의 아내 중에 한 여인이 엘리사에게 부르짖어 가로되 당신의 종 나의 남편이 이미 죽었는데 당신의 종이 여호와를 경외한 줄은 당신이 아시는 바니이다 이제 채주가 이르러 나의 두 아이를 취하여 그 종을 삼고자 하나이다
(4:2) 엘리사가 저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내게 고하라 저가 가로되 계집종의 집에 한 병 기름 외에는 아무 것도 없나이다
(4:3) 가로되 너는 밖에 나가서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라 빈 그릇을 빌되 조금 빌지 말고
(4:4) 너는 네 두 아들과 함께 들어가서 문을 닫고 그 모든 그릇에 기름을 부어서 차는 대로 옮겨 놓으라
(4:5) 여인이 물러가서 그 두 아들과 함께 문을 닫은 후에 저희는 그릇을 그에게로 가져 오고 그는 부었더니
(4:6) 그릇에 다 찬지라 여인이 아들에게 이르되 또 그릇을 내게로 가져오라 아들이 가로되 다른 그릇이 없나이다 하니 기름이 곧 그쳤더라
(4:7) 그 여인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서 고한대 저가 가로되 너는 가서 기름을 팔아 빚을 갚고 남은 것으로 너와 네 두 아들이 생활하라 하였더라
풍비박산이 나버린 어떤 가정, 남편이 죽고 난 뒤에 여인은 자체적으로 가정 형편을 회복하려고 얼마나 노력을 했겠습니까. 그러나 결국은 두 아들마저 채권자의 손에 넘겨서 자신에게 아무 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아무 것도 없으면 그냥 없는 채로 남편 따라 죽으면 되지 않을까요?
여인은 선지자에게 희망을 겁니다. 왜냐하면 선지자는 하나님과의 연결되어 있는 존재로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희망을 품지 아니하면 선지자도 찾지 않고 그냥 홀로 세상을 하직했을 겁니다. 즉 이 여인은 곱게 죽을 생각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에게 따지고 싶어서 선지자를 찾았던 겁니다.
게다가 전에 죽었던 남편의 직업이 선지생도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공부하던 자였던 겁니다. 따라서 여인은 나름대로 자신의 가정이 하나님과 관련 있다고 자부했습니다. 하지만 남편 죽고 난 뒤 냉정한 채권자의 손에 같이 살던 두 아들마저 빚으로 인하여 넘겨주어야 할 때에 이런 사태에서 자기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엘리사 선지자를 찾습니다. 자신이 빚져서 막다른 궁지에 몰렸다는 것을 일부러 선지자에게 말합니다. 무엇이 있느냐고 선지자가 물을 때, 여인은 자기에게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을 다음과 같이 표현입니다. “한 병 기름 외에는 아무 것도 없나이다 ”(왕하 4:2) 즉 ‘이제는 없습니다’는 말입니다.
여인이 선지자를 집으로 불러들인 것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고 절망적이라는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선지자는 사람과 상대하지 않는 존재입니다. 하나님만을 상대하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누구를 만나서 선지자가 보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곧 현실 그 자체가 되어 전개됨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이는 인간들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하고는 아무런 상관없습니다. 사람이 어려움을 처하게 되면 나름대로 처방책을 염두에 두고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이것을 비켜갑니다.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소원이 급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곧 있으면 이 여인은 집을 떠날 두 아들과 더불어 마지막 기름을 소비해야 할 순간이 옵니다. 그렇게 되면 이 여인에게 남아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런 사정에서 선지자는 뭘 할 수 있는지 여인은 선지자에게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 입장에서 이 여인의 집안에 남편이 있고 없고와 상관없이 한결같이 율법대로 적용되고 있었던 겁니다.
레위기 25:25에 보면,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개인적 가정 입장에서 가난한 지경이 되면 비극처럼 간주되겠지만, 그런 상황마저 레위기 25:25와 결부되기 위해 일어나야만 하는 일입니다.
즉 인간 위주의 입장에서는 “하나님, 이래서는 아니되잖아요?”라고 했다가, “아, 그래야 했군요”라고 감탄해야 됩니다. 이렇게 되려면 자기 위주의 명분이 하나님 위주의 명분으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선지자의 방문은 곧 하나님께서 밀어붙이시는 일이 일관성 있게 덮쳐진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레위기 25:28에 보면, “그러나 자기가 무를 힘이 없으면 그 판 것이 희년이 이르기까지 산자의 손에 있다가 희년에 미쳐 돌아올지니 그가 곧 그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에 ‘희년’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희년은 ‘안식년’의 취지가 최종적으로 완성된 상태를 말합니다.
‘안식년’이라는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너는 육 년 동안 그 밭에 파종하며 육 년 동안 그 포도원을 다스려 그 열매를 거둘 것이나 제칠년에는 땅으로 쉬어 안식하게 할지니 여호와께 대한 안식이라 너는 그 밭에 파종하거나 포도원을 다스리지 말며 너의 곡물의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고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나무의 맺은 열매를 거두지 말라 이는 땅의 안식년임이니라”(레 25:3-5)
여기에 참으로 신기한 일이 일어납니다. 1년 동안이나 땅을 그냥 묵혀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땅에서 소산물이 풍성히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노동과 무관하게 약속의 백성들에게 거저 은혜를 주시는 겁니다.
바로 이 희년을 겨냥하면서 가난이 찾아들고 그 다음에 빚지고 그 다음에 누가 대신 빚 갚아주고 그리고 본래의 은혜의 자리로 돌아오는 겁니다. 이러한 희년의 원리가 신약에 와서 어떤 결과를 남겼을까요? 고린도전서 6:20에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우리 모든 인간은 죄에 대해서 갚을 수 없는 채무를 지고 있다는 겁니다. 이는 우리 인간에게 짊어져 있는 저주의 무게를 우리가 감당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열왕기하 4장에서 여인은 살아 생전에 기름병이 가득 찬 기적을 실제로 경험했지만 신약에서 ‘나는 살아 있다’는 자리에게는 이 탕감을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서 6:7에 ‘죽은 자만이 의롭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즉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 담당하신 채무의 양이 어디까지 커버가 될까요? 그것은 바로 그 어떤 저주 안에서 생명을 얻는 기적을 얻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엘리사는 다음과 같이 당부합니다.
‘문을 닫고’(열하 4:5,6) 이는 기존의 채권자와 관계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 다른 공간을 허락하셨습니다. 율법의 완성이 품은 은혜가 예상밖에 엄청나게 주어지는 기적을 말입니다. 이를 위한 여인은 이웃들은 ‘빈 그릇’을 빌려야 합니다. 채워있는 그릇은 아니됩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해 줄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빈 곳에 여인은 자신의 마지막을 다 부어넣어야 합니다. 있음의 자리에게 없음의 자리로 옮길 때, 예상 밖의 새로움이 율법에 준해서 죄와 저주의 무게를 탕감해 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율법 완성에서 사랑과 영생이 한없이 제공되어지는 새로운 공간으로 이전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항상 빈 그릇임을 도리어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7강-열왕기하 4장 1-7절(빈그릇) 260318-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열왕기하 4장 1절에서 7절까지입니다.
열왕기하 4:1-7
“선지자의 생도의 아내 중에 한 여인이 엘리사에게 부르짖어 가로되 당신의 종 나의 남편이 이미 죽었는데 당신의 종이 여호와를 경외한 줄은 당신이 아시는 바니이다 이제 채주가 이르러 나의 두 아이를 취하여 그 종을 삼고자 하나이다 엘리사가 저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내게 고하라 저가 가로되 계집종의 집에 한 병 기름 외에는 아무것도 없나이다 가로되 너는 밖에 나가서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라 빈 그릇을 빌되 조금 빌지 말고 너는 네 두 아들과 함께 들어가서 문을 닫고 그 모든 그릇에 기름을 부어서 차는 대로 옮겨 놓으라 여인이 물러가서 그 두 아들과 함께 문을 닫은 후에 저희는 그릇을 그에게로 가져오고 그는 부었더니 그릇에 다 찬지라 여인이 아들에게 이르되 또 그릇을 내게로 가져오라 아들이 가로되 다른 그릇이 없나이다 하니 기름이 곧 그쳤더라 그 여인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서 고한대 저가 가로되 너는 가서 기름을 팔아 빚을 갚고 남은 것으로 너와 네 두 아들이 생활하라 하였더라.”
어떤 선지 생도인 남편이 죽었습니다. 홀로 남은 여인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이 남편 죽고 난 뒤에 같이 따라 죽지를 않았어요. ‘남편 죽었으니까 나도 죽자’ 이러지를 않았다는 말이죠. 왜 남편 따라 같이 죽지 않았는가? 그것은, 하나님에게 따지고 싶었던 겁니다.
‘내 남편을 왜 죽였느냐?’ 하는 거지요. 그전에 생계비 조달을 남편이 했는데, 남편이 죽고 난 뒤에 생활비가 없자 두 아들을 담보로 해서 업자한테 돈을 빌려서 생계를 유지했어요. 그런데 그 업자가 돈 갚으라고 하는데 갚을 길이 없어요.
그 채권자가 ‘담보로 잡혀 있는 당신의 두 아들은 당신 자식 아닙니다. 내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나의 노예로 삼았으니 멀쩡한 그 두 아들을 돈 받고 팔아서 본전과 이자 다 합쳐서 도로 찾든지, 안 그러면 우리 집에서 키우든지 할 것이니 당신에게 어머니의 자격은 일체 없습니다. 이제 두 아들을 데려가겠습니다.’ 이렇게 되었다 이 말이죠.
이 사달이 어디서 비롯되었는가? 그 집 남편이 죽은 거예요. 남편이 죽어버리니 그 여인은 두 아들을 지키는 데 모든 권한을 박탈당했어요. 자기 아들들이 채권자의 종이 되어 팔려 가면 누구한테 또 인수되어 다시 종으로 팔릴지, 거기에 대해서 그 두 아들의 엄마에게서 모든 권한이 없어졌습니다.
남편 죽었지요. 이제 두 아들마저 자기 곁에서 사라질 판이지요. 인간들은 이런 것을 뭐라고 하냐 하면, ‘내가 있으나 마나 한 존재, 살았다 하나 실제로는 죽은 바와 다를 거 없다’라고 합니다. 분명히 내 몸은 살아 있지만 내 소유가 아무것도 없으니까 자기는 살아있는 채로 이미 죽음을 경험할 수밖에 없지요. 남편은 이미 죽었으니까 나 몰라라고요.
남편은 이미 죽어버렸고, 두 아들을 채권자가 데려가면 자기 곁을 떠나서 어디로 갈지도 모르고, 이제 집도 땅도 없는 그 여인 할 수 있는 건 그냥 굶어 죽고, 그러면 되잖아요. 뭐 문제 있어요? 문제 해결이 그게 자연스럽지 않습니까? 남편 죽고 생활비 없어서 두 아들 담보로 그동안 밥벌이 했어요. 집이니 뭐니 다 담보 잡혔겠죠.
그런데 채권자가 여지없이 사정 두지 않고 “우리 계약서대로 합시다” 하고 두 아들을 데려갔을 때 남아 있는 자기 자신으로서는 살았다고 하지만 사실은 죽은 목숨이죠. 그러면 되잖아요. 그게 뭐 문제 있습니까? 사태가 이런 식으로 됐으면 ‘그래, 나는 여기서 죽으면 되겠구나’라고 사태를 흔쾌히 받아들일 위인들이 없어요. 그런 위인들이 없다고요.
모든 것이 박탈당할 때가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본마음을 드러내는 순간입니다. 이 여인이 누구를 찾아왔는가? 엘리사를 찾아왔어요. 찾아와서 자기 사정을 이야기합니다. 선지자를 찾아와서 자기 사정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내 사정에 대해서 책임져라.’ 그 말이에요. 원상복구 해놓으라는 겁니다.
자기가 남편을 안 죽였으니까요. 남편 죽고 난 뒤에 계속해서 어떤 절망 속에 빠져있으니까요. 본인이 남편 죽인 게 아니잖아요. 남편을 누가 죽였어요? 하나님이 죽였잖아요. 하나님이 죽였으니까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선지자를 보고 ‘내 남편이 죽어서 일어난 이 일련의 절망적인 사태에 대해서 선지자 네가 하나님 대신해서 해결하라.’ 결국 이런 뜻입니다.
‘우리 집안이 파산하고 작살이 난 것은 나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 이것은 내 잘못으로 생긴 일이 아니다.’ 이렇게 선지자를 닦달 내면서 어떤 사태 해결을 요청하는 그 상황 속에 있습니다. 열왕기하 4장의 이 대목, 선지 생도인 남편이 갑자기 죽고 가난하게 되어서 두 아들까지 종으로 팔려 가게 된 이런 상황에 직면한 이 대목을 읽고 ‘이 여인이 참 못됐다. 이 여인은 지금 잘못 생각하고 있다. 이런 사태가 되면 본인도 그냥 죽으면 되지 왜 애꿎은 선지자를 찾는가?’라는 생각을 가질 사람은 제가 보기에는 거의 없어요.
대신 무슨 생각을 하느냐 하면, ‘참 안 됐다. 나라도 선지자 불렀을 거야.’ 혹은 ‘나 같으면 열심히 기도했을 거야. 하나님보고 도와달라고.’ 여러분, 하나님이 도와달라고 한다는 것,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시는지 제대로 알게 되면 감히 도와달라는 그런 기도는 할 수가 없습니다, 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우리 집안에, 내 일생에 어떤 사태를 일으켜도 우리는 도리어 이렇게 돼요. “하나님, 참 잘하셨습니다. 마땅히 하실 일을 하셨습니다. 남편은 죽고 두 아들이 팔려 가고, 나는 그걸 목격하는 이 사태에 대해서 정말 고맙게 여깁니다.” 이래야 해요. 그런데 그런 상황 속에서 그런 자세나 태도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지요. 그런 사람을 거의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신약 성경에서는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그러니까 인간은 죄에 갇혔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죄에 갇혔다. 그러니까 인간들이 자기가 멀쩡할 때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다 하다가 어려움을 당하면 하나님한테 한 수 가르치려는 거예요. ‘하나님, 이래서는 안 됩니다. 일을 그렇게 처리하면 안 되지요.’ 하나님을 도리어 나무라고, 하나님을 훈계하려고 하고, 하나님을 비난하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본색입니다. 그게 인간의 본모습이에요.
그러나 그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진짜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사람의 모습은 이렇습니다. ‘아, 그래야 했군요. 그래야만 했었군요. 정말 하나님 일 제가 예상도 못 했습니다. 나한테 남편 죽고 두 아들이 팔려 간 이 일은 필히 일어나야 할 일이었군요. 왜 사전에 왜 나는 그걸 몰랐을까? 하나님을 오해한 것에 대해서 제가 회개합니다.’
이렇게 나와야 해요. 완전히 태도가 다르죠. 하나님께서 이 여인에게 남편 죽고 아들 둘이 팔려 가는 상황을 딱 주신 것은, 이 글을 보고 있고 이 상황을 상상하고 있는 모든 인간, 이걸 자기한테 감정 이입하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내가 이 땅에서 존재할 명분 자체에서 벗어날 경우’를 지금 알려주는 거예요.
남은 죽더라도 나는 살아야 하고, 다른 가정은 깨져도 내 가정은 깨지면 안 되고, 다른 사람은 불행해도 나는 행복해야 하고, 남은 비극이라도 나는 늘 웃음이 넘쳐나는 가정이어야 한다는 그 명분, 우리 쪽에서 그런 명분이 나올 수 있는 근거가 있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런 근거가 있어요? 행복해야 하고, 천국 가야 되고, 나는 늘 웃어야 하고, 늘 만족해야 하고, 절대로 나한테 힘든 상황이 오지 않아야 한다는 그런 명분, 그런 명분을 우리 속에서 끄집어낼 수 있습니까? 없지요. 없으면 우리는 지금 환상 속에 있는 거예요. 뭔가 속고 있는 거예요.
이 과부가 졸지에 과부 됐죠. 남편 죽었으니까요. 남편 사별하고 과부 된 여인이 선지자를 초청할 때, 선지자가 와서 내 상황이 호전되기를 기대하면서 초청했을 거 아니겠습니까? ‘이 슬픔은 나 혼자 안고 간다.’ 이럴 것 같았으면 선지자를 초청할 이유가 없어요.
‘이 문제에 대해서 선지자의 도움을 얻겠다.’ 선지자가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면 어떻게 도움을 받겠다는 그것을 의도적으로 노리면서 선지자를 초청한 거예요. 그런데 선지자가 누굽니까? 선지자가 사람을 상대하는 자들이 아니에요. 선지자는 하나님만 상대하는 분입니다. 야속하게도.
그래서 선지자는 이렇게 하면 돼요. “하나님, 오늘 내가 저 집에 파견되는데 하나님이 저를 통해서 또 무슨 말씀을 주시고 무슨 일을 하실 겁니까?” 이런 태도예요. 여기에 지금 하나님이 듣고 계신다고 치면. 선지자는 그냥 아무 지시 없이 가는 게 아니에요.
선지 생도의 가정에 이런 사달이 났고, 그런 경우를 발생시키면서 거기에 엘리사 선지자를 참여시키는 때는 하나님 나름대로 기대하고, 실시하려는 뜻이 있습니다. 지금 이 과부는 혼자 길길이 뛰고 있지만 그것은 자기 환상 속에 있는 거고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오늘 설교의 전체 내용을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선지자를 보내신 이유는 자기 위주의 삶에서 율법 체계 위주, 율법 체계로 움직이는 이 세상 안으로 그 여인을 이전시키고 이동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만든 거예요.
선지 생도 죽었죠. 율법에 대한 탐구, 율법에 대해서 남에게 교육시키는 일을 선지 생도가 학교에서 배우잖아요. 하나님 말씀을 가르칠 남편이 죽었으니까 말씀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없지요. 그 남편은 죽었는데 남편이 생각했던 그 율법 체계는 여전히 그 남편 없는 그 가정을 지배하고 있는 겁니다.
그게 뭐냐? 남편이 없어 가난하게 된 자에게 하나님이 내리시는 율법이 있어요. 그게 레위기 25장 23-25절에 있습니다.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찌니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 대신 값을 치르고 다시 원상복구, 토지를 다시 가져오면 된다는 말입니다.
26-28절까지 계속 보겠습니다. “만일 그것을 무를 사람이 없고 자기가 부요하게 되어 무를 힘이 있거든 그 판 해를 계수하여 그 남은 값을 산 자에게 주고 그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그러나 자기가 무를 힘이 없으면…”
즉 그런 일가친척도 없는 경우, 이 과부같이 아들이 종으로 팔릴 수밖에 없는 그런 입장이라면, “…그 판것이 희년이 이르기까지 산 자의 손에 있다가 희년에 미쳐 돌아올찌니 그가 곧 그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게 레위기 25장 23-28절에 나온 말씀이에요. 이 율법을 누가 줬습니까? 하나님이 주셨죠. ‘이 과부의 가정이 완전히 파산하고 거덜 났다.’ 그걸 누가 했습니까? 하나님이 하셨죠. 하나님이 레위기 25장의 말씀을 딱 주면서 ‘어떤 가정이 가난하게 되어서 집이고 땅이고 가재도구고 다 팔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거든 채권자가 그 집에 가서 아들이고 뭐고 돈 될 만한 건 다 가지고 나오라.’ 그런데 다만 언제까지 그 담보물을 갖고 있느냐 하면, 희년이 올 때까지만 그렇게 하라는 거예요, 희년이 올 때까지만입니다.
여기서 율법의 구조가 어떻게 구성돼 있는지, 복잡하지만 제가 간단하게 레위기 25장 1절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땅은 누구 땅이냐 하면, 하나님의 땅이에요. 하나님의 땅인데 이 땅이 굉장히 신기해요. 그 땅에서 1년, 2년, 3년, 4년, 5년, 6년 동안은 인간이 노동해야 땅이 곡물을 생산해 내요.
그것은 신기하지 않아요. 일반 이방 민족도 다 그렇게 하니까요. 어떤 점이 신기하냐 하면, 일곱 번째 해의 땅은 농사짓지도 않고 손도 안 대고 가만두었는데 거기서 곡식이 자라나는 희한한 일이 벌어져요. 그걸 안식년이라고 합니다. 안식일이 있듯이 1년, 2년, 3년, 4년, 5년, 6년, 그리고 그다음 해에는 네가 농사짓지 말고 땅에 맡기라는 겁니다.
땅 주인이 누구냐 하면, 하나님이잖아요. 땅이 저절로 농사짓도록 해서, 하나님이 지은 농사의 결과로 말미암아 ‘그 땅에 살아가는 너희는 특별한 종족이기 때문에, 택한 민족이기 때문에 노동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산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노동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산다.’
다른 말로 하면 ‘가장이 노동하지 않더라도, 가장이 있으나 마나 노력하지 않더라도 하나님 덕을 보면서 온 가족이 넉넉하게 산다.’ 이것을 통해서 어떤 인간도 이 땅이 내 소유의 땅이라고 주장할 수 없고, 영원토록 그 땅 주인은 하나님이 땅의 주인이며 임시로 이스라엘 백성은 임대차 계약자로서 농사짓고 있는 거예요.
문장이 길었지만 이해되지요? 하나님이 “땅 주인은 나다.” 그러면 “땅 주인은 하나님이니까 하나님 덕으로 산다.” 이러면 간단한데 왜 그렇게 복잡합니까? ‘땅 주인은 하나님이니까 농사지어서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하면 된다.’ 하는데 그게 주제가 아니고요, ‘땅 주인은 하나님인데, 그리고 우리는 농사도 짓지 아니했는데 이상하게 그 땅에서 생산물이 나왔다. 우리가 일하지도 않는데 거저 주시는 생산물로 살아가는 그것으로 하나님의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하나의 증거 판 위에 우리가 지금 놓여 있다.’ 그게 바로 약속을 증거하는 약속의 민족이라는 거예요. 이게 원칙이에요.
몇 년이라고요? 그날이 7년 만에 돌아와요. 안식년이 돌아옵니다. 그런데 7년 곱하기 7년, 7년을 되풀이하다가 최종적으로 하나님이 일하심의 대가가 최종적으로 우리에게 어떤 대가로서 주어지느냐를 완전하게 아는 그 해가 ‘7×7+1’ 50년 만에 돌아오는 그때를 희년, 기쁨의 해라 해서 이사야 61장 2절에서는 ‘은혜의 해’라고 하는 거예요.
누가복음 4장에서 예수님이 이사야를 펴면서 “그 기쁨의 해, 내가 여기 있는 그 시간이 바로 나다”라고 하는 거예요. 내가 뭘 하는 때가 그때가 아니고, 희년 자체가 시간이라는 개념을 떠나서 시간이 특정 인물, 메시아라는 인물로 변신되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6-19).
구약에서 농사지을 때는 ‘농사짓지 않더라도 먹을 걸 줬다. 아, 고맙습니다.’ 그렇게 되는데 그 희년의 최종적인 것, 공짜로 양식 준다, 양식 준다, 양식 준다…의 그 마지막 최종적인 모습, ‘도대체 무엇을 은혜로 주십니까?’라는 그러한 질문을 여러분들이 마땅히 가져야 해요.
거기에 대해서 로마서 6장 7절에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하심을 얻었음이니라.” 죽은 자가 의롭다는 거예요. 죽은 자가 의롭다. 제가 왜 웃느냐 하면요…, 구약 때는 살아 있는 나, 노동해야 밥 먹고 산다고 생각하는 살아 있는 내가 7년째 돌아오는 해는 노동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그냥 농산물을 주니까 ‘신난다. 고맙습니다. 살아 있는 내가 하나님께 고맙다고 할 수 있도록 해 주셔서, 찬양할 수 있어서 고맙습니다’ 하는 시대, 그게 농사짓는 구약 시대였어요.
그런데 최종적인 기쁨의 해는 뭐냐? “고맙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내가 일단 살아나야 되잖아요. 그 ‘살아남’을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는 인정해 주지 않는 거예요. 죽은 자가 의롭다. 무슨 말입니까? “죽음으로 들어오라. 그러면 거저 주시는 의가 죽음 안에 안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게 기쁜 소식이에요. 그렇다면 성경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그동안 교회 다니면서 해석한 것은 무엇이 문제였고 무엇이 다 엉터리였습니까? 살아 있는 내가 하나님에게 어떤 도움을 받을까, 라고 한 생각 자체가 이게 최종적인 것이 아니다 이 말이죠. 최종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하고, 말씀 성취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그 오해가 어디서 나왔는가? ‘나는 무조건 살아서 낙을 봐야 한다. 행복이 무엇인지, 기쁨이 무엇인지를 느끼고 싶어. 나는 살아서 내가 이렇게 하나님마저 알게 된 성과를 얻고 싶어’라는 인식 자체가 신약 성경에 의하면, 죄를 채권자로 만드는, 너는 죄한테 채무를 지고 있는 상태라는 거예요.
어렵죠. 인간은 빚을 졌다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서 ‘빚을 쳐서 아들이 팔렸다’라고 그 선지 생도의 아내는 울부짖고 있지만 정작 오늘날 우리는 이 죄와 죽음에 대해서 우리가 빚지고 있다는 사실을 몰라요. 그 채무 누가 갚아줄 건데요?
“내가 살다가, 살다가, 살다가, 죽는다. 뭐 살다 죽겠지.”
“아니야. 너는 빚쟁이한테 쫓기면서 결국은 심판과 저주가 너를 옴팍 뒤집어 씌울 것이다.”
지금 이 이야기를 하나님은 우리 보고 하고 계시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6장 19-20절에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했어요.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다’는 말은 어떤 상황을 말하냐 하면, 우리가 빚을 지고 있는데 그 빚에 대해서 우리가 갚을 길이 전혀 없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죄에 팔렸다, 죄에 팔린 거예요. 죄는 저주죠. 저주에 팔린 거예요. 하나님의 심판이 우리보다 더 센 거예요. 갚을 능력은 없고, 우리 보고 갚으라고 독촉하는 저쪽이 나보다 더 센 거예요. 갚을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 우리가 놓였다는 사실을 인간치고 누가 알아요? 이건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그걸 이야기해 주는 사람도 없어요. ‘내가 왜 채권자야? 왜 그 저주가 나의 채권자가 되고 왜 나는 채무자야?’ 내가 그 빚을 갚아야 한다는데 어떻게 그 죄와 나 사이에 어떤 채권 채무가 성립되는지 그 자체를 우리는 인정을 못 해요.
왜냐하면 우리는 죄를 지을 때만 죄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죄를 짓더라도 착한 일을 해서 그걸 상쇄시키면 그 죄에 대해서, 벌에 대해서 갚았다는 그런 생각이 있어요. 선악과를 따먹지 말아야 하는데 그걸 따먹어서 그런 착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아니고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선악과를 따먹은 자체가 이미 너는 갚을 길이 없는 채무자가 된 거’예요.
죄에 대해서 우리가 채무, 빚을 지고 있는 이유가 뭐냐? 우리는 땅에서 살기 때문에 그래요. 땅이 없으면 가족도 없어요. 그게 레위기 25장 10절에 나옵니다. “제 오십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갈찌며.”
가족의 기반은 토지입니다. 창세기 3장 23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토지가 어떤 토지냐? 저주받은 토지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율법을 줌으로써 그 율법을 대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데서 오는 그 채무감이, 빚이 점점 더 늘어나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은 뭐라고 버티느냐? 내가 살아야 될 명분, 내가 이 땅에서 행복해야 할 권리, 화목한 가정, ‘남편이 있고, 자식 둘과 넉넉하게 살아갈 그런 권리가 마땅히 나한테 있다’라고 자부하는 거예요. 그런 나, 행복해야 하는 나, 평소에 생각했던 그 나가 용납이 되는 나라고 우리는 그렇게 자부하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성경 전체로 봐서는 내가 용납하는 나는 천국에서, 약속의 세계에서는 안 받아줍니다. 안 받아줘요. 그러면 어떤 사람을 받아주는가? 자기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권리, 복 받을 권리, 웃어야 할 권리가 일체 나한테 없다는 거, 그걸 알아야 돼요.
왜 없는가? 일단 빚을 갚아야 하는데 빚만 가득한데, 죄만 가득하고 저주만 가득한데 그걸 다 청산하고 “나 빚 갚았어요. 나 하나님 앞에 당당합니다. 나 구원해 주세요.” 할 수 있는 위인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갚을 길이 없어요. 그래서 신약 성경에서 나타난 그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이걸 생각해야 해요.
주님이 지신 채무의 양이 어디까지 커버하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해요. 주님께서 우리한테 물어보지 않고 일방적으로 십자가 졌잖아요. 그 십자가 지셔서 다 갚았다고 할 때 도대체 그 갚았던 양, 그래서 나온 그 은혜의 양이 어느 선까지 다 커버하느냐 이 말이죠.
고린도전서 6장 20절에서 ‘내가 값으로 산 것이 되어서 더 이상 너한테는 죄가 없다’라고 이야기했을 때 이것은 뭐냐 하면, 우리로 하여금 주께서 다 빚을 청산했던 그 새로운 세계, 공간에다가 우리를 데려가겠다는 거예요. 우리를 데려가는 겁니다.
오늘 본문 열왕기하 4장 4절에, 선지자가 와서 했던 그 절차에 의하면 ‘문을 닫아야’ 돼요. “너는 네 두 아들과 함께 들어가서 문을 닫고.” 그다음 5절 한번 보세요. “여인이 물러가서 그 두 아들과 함께 문을 닫은 후에 저희는 그릇을 그에게로 가져오고 그는 부었더니.”
두 아들과 함께 문을 닫은 후에 가져오라 하잖아요. ‘닫은 후에’입니다. 문을 닫으라는 말은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일이 벌어지는 것은, 지금 네 두 아들을 담보로 데려가겠다는 그 채권자 있잖아요, 그 채권자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다.’ 그 말이죠. 지금 이 여인의 잘못은 뭐냐? ‘그 채권자가 나의 두 아들을 종으로 팔기 위해서 데려갑니다’라고 한 거예요. 지금 이 여인은 바깥에 있는 자기 아들을 잡아가는 채권자와 자기가 연결돼 있고, 연루돼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선지자를 통해서 도움을 얻고자 할 때 바깥에 있는 인간, 네 아들을 데려가는 그 채권자와 현재 너에게 일어난 일은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에 그 관계를 끊어버려야 된다는 거예요. 단절시켜야 해요! 지금 너에게 주어지는 것은 레위기 25장의 말씀인데, 이 말씀을 그대로 실현하겠다는 것, 그 율법 체제, 율법 구조를 너한테, 한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너에게 직접 집어넣는 거예요.
그 율법 구조가 뭐였습니까? 레위기 25장이 뭐였습니까? 돈이 없을 때는 일가친척이 와서 그 값을 대신 갚아준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레25:25). 그 율법은 그냥 주님께서 말로만 던지고 실효성이 없는 거예요? 현실적이 아닌 겁니까?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개입할 때는 그 율법을 가지고 현실화시키겠다는 거예요.
그것을 현실화시키기 위해서 인간들이 어디에 매여 있는가를 보여줘요. ‘우리 남편만 안 죽었으면 행복할 텐데. 그리고 나한테 일가친척이 있었으면 이 값을 대신 갚을 수 있을 건데’하고요. 그리고 내가 ‘아이고, 아이고…’ 할 때, 채권자가 자비를 베풀어서 ‘사정이 딱하니 돈 안 갚아도 된다고 하는 이런 착한 사채업자가 있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하면서, 자꾸 내가 생각하고 있는 해결책을 이 여인은 끊어낼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해결하게 되면요, 자신은 율법에 의해서 ‘빚진 자가 계속 빚진 자’로 그냥 남아요. 이것은 평소에 자기가 알던 그 동네에서 그냥 머물러 가지고, 소박하게나마 그냥 행복하게 살 생각만 하고 있다, 이 말이죠. 그렇게 되면 이 여인은 자기 위주의 세계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율법 세계로 이동하지를 못하게 돼요.
하나님께서는 이 여인의 집을 사달 내고, 자기 위주의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이 여인에게 이 율법을 가지고 어떤 일을 벌려서, 그 일의 결과로서 ‘너는 상상도 못 한, 이 세상의 어떤 인간한테도 폐쇄적이고(문 닫힌 곳), 문 닫은 후의 특수한 공간에서 선지자의 말씀이 개입되고 하나님 말씀이 개입된 공간에서, 네 앞에 벌어진 어떤 놀라운 일을 네가 직접 경험한다면, 너는 그 모든 채무를 다 청산한 하나님 율법의 은혜성 속에 놓여 있을 것이다.’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계신 거예요.
그러면 조건은 뭐냐? 자기 사정이 지금 완전히 빚으로 이뤄졌잖아요. 빚밖에 없죠. 자기 게 없잖아요. 자기 게 없음을, 계속해서 자기 게 없음을 확인해야 한다는 거예요. 어떻게 확인하는데? 이웃집에 가서 빈 그릇을 다 가져와요, 빈 그릇입니다. 그러니까 이웃집에서 “참기름 좀 주세요. 여기에 기름 좀 담아주세요.” 하지 말고, 이웃집에 제시하는 것은 빈 그릇을 달라는 거예요. 그러면 이웃 동네 사람들이 그릇을 줄 때 빈 그릇을 주는 거예요.
그 이웃 사람들이 내민 그 그릇 속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는 거예요. 인간에게서 오는 어떤 도움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나를 빼내 줄 수가 없습니다. 어떤 이웃도요! ‘그들은 좀 행복하게 사나?’ 하는데 그 행복도 다 헛방이에요. 비어 있는 거예요. 이 과부가 비어 있는 것처럼 이 세상의 모든 것도 비어 있는 거예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비어 있는 것을 가져올 때 그 비어 있는 그릇을 보면서 여인은 뭘 생각해야 하느냐? ‘우리 집에는 남편도 없고, 돈도 없고, 이 빈 그릇과 마찬가지다.’ 동렬이도 없고 종범이도 없고, 류현진도 은퇴하고 누구하고 야구할 건데 이제? 내가 고백할 수 있는 것은 뭐냐? ‘내가 어찌 할 수 있는 어떤 것도 내게 아무것도 없습니다’라는 고백.
요한복음 5장에 베데스다 못이 나와요. 그 뜻은 ‘은혜, 자비의 못’이에요. 그 자비의 못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 뭐냐? 38년 동안 앓는 병자. 저 자비의 못에서 은혜가 나온다고 38년 동안을 기다렸어요. 그런데 항상 몸이 아프니까 새치기당해서 다른 사람 병이 나아요.
그러니까 대학에 재수 삼수라 하잖아요. 이 사람은 38수 했어요. 38년 동안 은혜를 구하겠다고 눈 퍼렇게 뜨고 물이 요동칠 때 ‘야, 천사 떴다.’ 하지만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아닙니까? 물에 들어가는 첫 번째 사람의 병만 고쳐주니까 소용이 없었어요. 그 신기한 연못 앞에서 그 병자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38년 된 병자는 약효가 있는 그 신기한 연못이 자기 유일한 희망이고 행복을 제공한다고 생각했어요. 그 현장에서 38년 병자가 예수님을 그전에 생각하거나, 상상하거나, 만난 적이 없습니다. 38년 된 병자와 예수님 사이가 문 닫힌 공간이 돼요. 일체 내가 알았던 세상적인 도움이 모두 차단된 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완전히 그냥 해결책이 전혀 없는 거예요.
해결책이 없는, 텅텅 빈, 그래서 내 죄를 내가 갚을 길이 전혀 없어요. 죄는 있는 것 같은데 이 하나님이 받을 만한 깨끗한, 내 죄가 다 탕감된 그런 상태에 대해서는 우리가 예상도 못 했습니다. 상상도 못 했습니다. ‘살아 있으면서 죄 없는 상태로 살고 싶다.’ 그런 것이나 기대했죠.
그런데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의 은혜가 도달될 때 ‘내가 너한테 찾아간 나의 십자가 죽음 안으로 들어오게 되면 거기서 너는 의인이 된다는 사실이 그 죽음 안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내가 죄인 되었다가 의인 되는 그것을 사전에 내가 예상했다?”
“아니요.”
“기대했다?”
“아니요.”
“나는 그럴 줄 알았다?”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자기가 하고자 하는 그 율법, 그 율법의 완성이 찾아옴으로써 그 효과가 우리에게 주어진 거예요.
제가 가족과 지난 금요일에 식사했는데요, 돼지고기 누른 것 압니까? 경상도 사람들은 아시죠? 돼지고기를 납작하게 압축해서 네모나게 먹기 좋도록 칼로 썰어놓은 거예요. 그걸 딱 보게 되면 여러 부위가 알록달록 무늬로 층층이 돼 있어요. 얇지만 그 폭만큼 무늬가 있다고요.
율법, 레위 지파라는 율법, 십일조라는 율법…, 신명기 같은 경우에서 십일조가 일단 레위인한테 가요. 레위인의 특징은 땅이 없어요. 레위인은 땅이 없는 대신 땅에서 나오는 십일조가 몽땅 레위지파한테 갑니다. 십일조가 평소에는 레위지파에게 가는데 3년마다 드리는 십일조는 레위지파가 받는 혜택이 땅 없는 사람, 빚이 많은 사람에게도 주어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레위지파는 어디에 가 있느냐 하면, 거저 은혜 주시는 하나님과 직통으로 통하는 그 계열에 레위지파가 있다는 그 말이죠. 이게 뭐냐?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는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돼지고기를 눌러놓은 그것처럼 압축돼 있는 거예요. 그러면 율법이 완성되어서, 그게 사랑이 되어서, 밀폐된 공간으로 ‘너만 알아라’ 하고 우리에게 찾아오신 거예요. 그 사랑으로 해서 모든 죄는 다 탕감된 겁니다.
그러면 끝으로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도대체 우리는 평소에 무슨 생각 하면서 삽니까? 오늘 본문에서 선지자 찾아올 때의 이 여인처럼 생각하지 않습니까? ‘내 인생 왜 이렇게 되었나? 우리 집안은 왜 이 꼴이냐? 내 몸은 왜 이렇게 아프고…’ 온갖 것을 생각하잖아요.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죄의 값까지 다 탕감해 주는 것, 주께서 십자가로 말미암아 최종적인 것까지 다 커버해서 죽은 우리에게 생명을 줬는데 그건 감사할 줄 모르고 하나님 불러다가 청문회 할 일 있습니까?
‘하나님, 내 인생 왜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이렇게 노골적으로 못 하지만 결국 우회하게 되면 매사 하나님한테 따지는 식으로, 항의하는 식으로 살아가는 이 모습, 이게 오늘 본문에서 선지 생도의 과부 된 여인의 모습입니다. 이 가정에 그 기름을 주는데 엘리사가 일부러 물어요.
“어디 기름 좀 찼나?”
“기름 많이 찼습니다.”
“계속하지.”
“그런데 더 이상 빈 그릇이 없습니다.”
“됐다. 그만! 거기까지”
비어 있는 것, 비어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주께서는 은혜를 주시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은혜를 주시는 이유는, 내가 아무것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께서 나를 그릇으로 사용했다는 그런 생각까지만 주께서 은혜를 주셔요. ‘나 은혜받았으니까 이제 나는 내 마음대로 살아야지.’ 이러면 안 돼요. 그냥 은혜받았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는 것을 기쁨으로 누리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 주제도 파악 못 했습니다. 원망하지 않는 척하면서 매사에 우리의 행위와 생각이 결국은 하나님께 따지는 식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그런 태도로 인생을 살았습니다. 율법이 뭔지, 십자가가 뭔지 건성으로 깨달았고 외면했습니다. 이제는 주님께서 어디까지 다 커버했는지, 죽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것까지 이미 해결했다는 것을 늘 감사하고 늘 생각하면서 고맙게 여기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