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소금 표적

아빠와 함께 2026. 2. 26. 16:32

소금 표적

2026년 2월 25일                         본문 말씀: 열왕기하 2:19-22

2:19 그 성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고하되 우리 주께서 보시는 바와 같이 이 성읍의 터는 아름다우나 물이 좋지 못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
2:20 엘리사가 가로되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내게로 가져오라 하매 곧 가져온지라
2:21 엘리사가 물 근원으로 나아가서 소금을 그 가운데 던지며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 좇아 다시는 죽음이나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짐이 없을지니라 하셨느니라 하니
2:22 그 물이 엘리사의 말과 같이 고쳐져서 오늘날에 이르렀더라

이스라엘 민족이 들어갔던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환경의 지속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다운 면모를 보일 때에서 성립합니다. 즉 약속의 땅에 살려면 약속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약속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약속이 주도권을 쥐고 있고 거기에 종속된 자’를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그 약속의 땅이 윤택하지 못하고 척박하게 되었습니다. 주민들의 말에 의할 것 같으면 물이 좋지 못하다는 겁니다. 이처럼 주민은 작물 수확이 시원찮은 것은 모든 것은 자연환경 탓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자신들에게 문제 있다는 생각을 조금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이 근원, 곧 샘이 나오는 그곳에다 엘리사는 무슨 조치를 합니다. 그것은 물질입니다. 소금을 그곳에 뿌립니다. 소금과 물의 근원의 만남은 주민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근원을 겨냥하는 계시적 의미가 있습니다. 엘리사는 방금 요단강을 건너왔습니다. 그냥 헤엄쳐서 건너온 것이 아닙니다.

엘리야의 연속적 선지 기능으로 물을 건너온 겁니다. 물을 건너왔다는 것은 판을 바꾸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을 버린 북이스라엘의 실정을 염두에 두고서 엘리야 선지자의 기능의 연장선에서 엘리사가 관여하고 있습니다. 소산물을 내지 못하는 척박한 땅에 대해서 다시 소산물을 낼 수 있는 땅으로 전환되는 것은 ‘율법 완성의 혜택’이 방금 투입되었다는 뜻입니다.

기존의 율법을 버린 판이 아니라 율법 혜택을 거저 얻게 된 새로운 판을 주민들이 선지자를 통해서 경험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소금일까요? 율법 제사법의 제물의 특징에 소금이라는 물질이 관여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의 특징은, 인간들이 살기 위해서 요리하는 식사용과 대비되어야 합니다.

제물 가운데 식물성 곡물로 드리는 제물이 있습니다. 소제입니다. 이 소제는 의도적으로 인간들이 먹기 좋도록, 그리고 탐이 나도록 하는 레시피는 거부됩니다. “ 소제물의 남은 것은 아론과 그 자손에게 돌릴찌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 중에 지극히 거룩한 것이니라 무릇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소제물에는 모두 누룩을 넣지 말지니 너희가 누룩이나 꿀을 여호와께 화제로 드려 사르지 못할지니라

처음 익은 것으로는 그것을 여호와께 드릴지나 향기로운 냄새를 위하여는 단에 올리지 말지며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너는 첫 이삭의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거든 첫 이삭을 볶아 찧은 것으로 너의 소제를 삼되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위에 유향을 더할지니 이는 소제니라 제사장은 찧은 곡식 얼마와 기름의 얼마와 모든 유향을 기념물로 불사를지니 이는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니라”(레 2:11-16)

즉 누룩이나 꿀 대신 소금을 넣어야 한다는 겁니다. 특히 향 안에는 소금이 들어갑니다. “그것으로 향을 만들되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출 30:35) 소금이 들어간다는 것은 평범한 물질에 하나님의 언약 내용을 담는 특이성을 발하는 겁니다. 물질에다가 율법 완성의 취지를 담는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언약과 관련된 물질은 곧 인간의 생존 의지를 공략하게 됩니다. 즉 과연 너희 인간들이 살아있는 생물이라고 할 수 있느냐를 묻고 지적하는 겁니다. 창세기 2:7에 보면, “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근본은 물질입니다. 곧 형질화를 통해서 인간의 근원과 언약이 만나게 하십니다. 창세기 2장에서 흙으로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그 뒤이 마귀를 만나서 자칭 신처럼 여긴 인간의 초월성을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담기고 율법이 담겨야 될 인간이 악마가 심어준 초월성을 지니면 생존에 나섭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만들어져 걸어온 여정에서 물을 계속 만나게 됩니다. 하나는 홍해요 또 하나는 요단강입니다. 이러한 ‘판 바꿈’은 처음 이스라엘이 탄생한 애굽 나라의 사정과는 완전히 차이닌 민족이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을 위해 애굽 나라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는 됩니다.

이 와중에서 바로왕의 마음 자세는 완악하고 강퍅했습니다. “ 그러나 바로가 이 때에도 마음을 완강케 하여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였더라”(출 8:33/10:15) 이게 바로 인간이 드러나는 신화성이요 초월성입니다. 곧 마귀가 심어준 환상입니다. 자신은 어디까지는 살아있는 생물이지 결코 무생물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나 신약의 세례 요한은 인간을 달리 봅니다. 자기가 뭘 하는지 조사하려 온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보고 이렇게 외칩니다.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 3:9) 인간들이 지닌 마귀적 초월성과 자기 신화(神話)성은 신약에서 예수님은 ‘누룩’으로 표현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은 인간의 그 꿈을 파괴하고 파멸시키고 파탄에 이르게 하므로서 모든 것은 율법 완성 차원에서 제공된 거저 주신 혜택임을 알게 하십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런 율법의 지적을 알지 못하고 자기 초월에 삶의 의미를 겁니다. 율법의 제사법에서의 제물을 하나님 식사용입니다.

피는 내고 기름은 따로 골라내고 나머지는 다 제단 위에서 태웁니다. 그 냄새를 하나님께서 기쁘게 흠향하시는 겁니다. 바로 이러한 제물의 물질성을 인격화되어 오신 분이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이십니다. (요 1:14) 거기에 비해 인간은 거저 아무런 내용도 없는 껍질 같은 겁니다.

이런 인간들이 신을 향하여 자꾸만 기적을 요구합니다. 기적이란 자신이 깨어지지 않고 자신이 대단함을 키워줄 소망 달성 같은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기적이 아니하 표적입니다. 이 표적 안에는 이웃 사랑과 하나님과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일체 자신의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요소를 율법에서는 소금이라고 표현한 겁니다. 

“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골 4:6) 자신의 형질성을 유지할 때, 삶의 무게는 가볍고 모든 것이 고요와 평화와 안정과 화목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그저 은혜를 입고 있다면 슬픔이나 비극이나 불행을 고려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4강-열왕기하 2장 19-22절(소금표적) 260225-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열왕기하 2장 19절에서 22절까지입니다.

“그 성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고하되 우리 주께서 보시는 바와 같이 이 성읍의 터는 아름다우나 물이 좋지 못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 엘리사가 가로되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내게로 가져오라 하매 곧 가져온지라 엘리사가 물 근원으로 나아가서 소금을 그 가운데 던지며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 좇아 다시는 죽음이나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짐이 없을찌니라 하셨느니라 하니 그 물이 엘리사의 말과 같이 고쳐져서 오늘날에 이르렀더라.”

지난 시간에, 엘리사가 엘리야하고 헤어지고 난 뒤에 그냥 돌아온 것이 아니고요, 요단강물을 갈라지게 해서 건너왔습니다. 오늘 본문도 물 이야기입니다. 물을 건너왔다는 것은 판이 바뀌었다는 거예요. 요단강 건너가기 전에는 엘리야의 승천의 효과를 전혀 보지 못했던 땅이었어요. 그런데 엘리사가 요단강을 건너서 엘리야 선지자의 승천을 목격했지요.

엘리야 선지자가 이 땅에 존재했었다는 것은 요단강 건너올 때의 하나님의 혜택이 엘리야가 있었을 그때에도 유지되고 있었다는 뜻이 되는 겁니다. 엘리야가 승천했고, 그 바통을 이은 엘리사가 어떤 혜택을 가져오게 되는데 그게 뭐냐? 처음 이스라엘이 요단강 건너오고 난 뒤에 젖과 꿀이 흐를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혜택을 이제는 엘리사가 짊어지고 백성들에게 다가오고 있는 거예요.

판이 바뀐 거죠. 판이 바뀌었다는 그 증거가 나옵니다. 젖과 꿀이 흘러야 할 그 땅에서 제대로 식물이 자라지를 못하고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했어요. 그곳 주민들은 말하기를 “물이 좋지 못해서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물에 뭔가가 담겨야 하고 물에 뭔가 섞여야 한다는 겁니다.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약속한 그것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 건너서 약속의 땅에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그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그 이유, 혜택, 그 은혜의 선물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는 것을 제대로 아는 백성들로 바뀌어야 해요.

왜냐하면 젖과 꿀이 흐르던 그 땅에 살던 원주민들은 자기들이 농사 잘 지어서 풍족한 줄로 알고 있었으니까 그 백성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이유를 아는 새로운 백성들인 이스라엘에 의해서 심판받고 추방되어야 마땅한 겁니다. 그럴 때 그 땅은 단순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고 약속의 땅이 되는 겁니다.

그 땅에 사는 사람들 모두를 약속이 지배하는, 곧 약속이 주도권을 쥐는 세계가 약속의 땅이고 그게 바로 천국입니다. 사람들은 ‘천국 가면 살기 좋다’ 그것부터 먼저 생각하는데, 천국은 살기 좋은 세계가 아니고 약속이 있어서 좋은 세계, 그게 천국입니다. 약속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이루지를 못해요. 인간이 약속을 이뤄낼 수가 없습니다.

약속을 이루는 분이 따로 계셔요. 하나님이 약속을 이뤄놓고, 그 하나님이 홀로 이루신 그 축복과 영생의 혜택을 자기 백성에게 일방적으로 주니까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천국 백성이 되는 겁니다. 따지고 보면 전혀 어렵지 않아요. 따져보면 그 논리가 어렵지 않아요. 그 논리가 어렵지 않다면 믿는 것도 어렵지 않아야 해요.

믿는 그것도 어렵지 않아야 하는데 믿는 그것이 ‘어렵다, 안 어렵다’를 어떻게 판정하느냐? ‘주님의 혜택으로 우리가 공짜로 하나님의 영생과 천국의 영생을 누리는구나’라는 것을 기쁨으로 어렵지 않게 받아줬다면 더는 우리에게 슬픔이라는 것이 성립하지 말아야 하지요. ‘비극, 불행, 그게 뭐예요?’ 그렇게 되어야 한다니까요?

지금 저 혼자 웃는 거지요? ‘슬픔이 뭐예요? 비극이 뭔데? 불행이 뭔데?’ 어차피 우리는 혜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거든요. 네가 뭘 가졌고, 나는 뭘 가졌다는 그 소유를 가지고 대조하거나 비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는 성공하고 나는 실패했다는 그 네 것 내 것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에요.

원래 우리에게는 우리 것 자체가 없어야 해요. 그런데 엘리야와 엘리사가 있었던 그 시대에 사람들은 그러한 말씀을 놓쳤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렸어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어야 할 텐데 오늘 본문에 보면 그 땅이 황폐해졌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백성들은 윤택하게 살아야 하고 넉넉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 그대로 작동하는 경우에 생기는 결과거든요.

그런데 지금 ‘땅이 황폐해서 백성들이 힘들어하고 있다. 농사를 지어도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땅 문제 이전에 너희들 인간이 문제에요. 뭔가 잃어버렸고, 놓쳐버렸고, 누락 된 것이 있어요. 혜택을 잊어버렸습니다.

그 혜택이라는 것은 제가 아까 이야기했지만, 말씀을 인간이 지켜서 그 지킨 것으로 혜택 보는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만 지키신 그 말씀의 혜택을 부여받을 때 그들은 감사가 터져 나오고 기쁨이 터져 나오면서 모든 것이 고마움과 고마움의 연속적인 하루하루가 될 거예요.

2월 22일 고마움, 2월 23일 고마움, 24일, 오늘 25일도 고맙고, 앞으로도 줄곧 고맙고요. “고맙소~ 고맙소! 앞으로도 계속 고맙소.” 그래야 하죠. 그것이 그냥 일방적 혜택으로 주어진 것임을 아는 것인데 자기가 노력해서 된 것으로 안다면, ‘지금까지는 얼추 잘 지냈는데 내일 무슨 일 터지면 나 어떻게 하지?’ 이러고 있다고요. ‘3월 1일에 갑자기 일 터지면 나는 불행해질 건데?’ 이런 식으로 미리 당겨서 걱정부터 늘어지게 하는 거예요.

지금 행복하다는 그것도 자기가 자기 단도리를 잘해서 행복한 줄로 알고, 모든 공로를 자기한테 두고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간당간당 아슬아슬하게 노령연금이라도 받고 살아왔는데 만약에 나라에서 돈 없다고 안 주면 나 우짜노?’ 이렇게 돼버린다는 말이지요. 최저생계비조차 없으면 나 못사는데, 그런 거요.

그래서 엘리사가 스승 엘리야가 보여줬던 것, 요단강 물의 취지와 의미, 처음 요단강 건너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왔던 그 마음가짐을 같이 지니는 백성으로 전환 시키는 그 작업을 엘리야에 이어서 엘리사가 하게 되는 겁니다. 지금 황폐해져서 열매도 제대로 맺지 못하게 된 그런 토지에 어떤 조치를 하면 되는가?

백성들이 이야기했어요. “물이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 물에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바꾸는 데 필요한 어떤 물질 같은 것을 엘리사가 집어넣습니다. 그게 바로 ‘소금’이에요. 소금이 몸에 좋은 것 여러분이 다 아시잖아요. 그렇다고 한들 소금 넣었다고 그 땅이 갑자기 좋아지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잖아요. 죽염이 좋으니 아무리 해도 소금이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엘리사가 소금을 집어넣으니까 갑자기 물이 달아졌어요. 물의 근원, 샘의 근원에 소금을 집어넣었다는 것은, 지금 물에 집어넣은 그 소금이 그냥 소금이 아니고 인간의 근원, 하나님의 혜택의 근원을 찾아가는 소금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소금이라는 것은 하나의 물질이에요, 그저 물질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방적인 혜택과 연관성을 지을 수 있는 물질이 소금이라는 것은 바로 레위기에 나옵니다.

레위기는 하나님의 율법이잖아요. 하나님의 율법대로 살면 네가 복을 받는다고 했지만 사람들은 벌써 율법에 관심도 없고 자기 짓는 농사가 풍년 들기 원하고, 자기 생존이나 신경 쓰고 있으니까 말씀을 버린 거예요. 말씀을 버리니까 젖과 꿀이고 뭐고 다 날라간 거예요.

레위기 2장에 소제가 나옵니다. 보통 제사드릴 때 동물성, 짐승을 잡아요. 짐승을 하나님 쪽으로 드려서 하나님의 식사용으로 드리는 그것이 제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식사용에 동물성도 있지만 식물성 제물도 있어요. 그 식물성 제물이 소제(素祭, Grain Offering)라는 겁니다. 식물에서 나오는 재료의 제물이죠.

식물에서 나오는 재료로써 하나님이 받으셔야 하잖아요. 그래서 그 특징이 있는데요. 인간들이 곡물을 갈아서 빵을 만드는 것은 하나님 식사용이 아니에요. 자기 식사용이지요. 빵 먹어야 사니까요. 땅에서 농사지어서 추수해서 곡물 거둬서 그 곡물 간 것을 반죽해서 빵으로 만들고 기름에 튀기거나 해서 먹지요. 이왕 빵 만드는데 먹기에 좋고 맛있게 이스트를 집어넣습니다. 그것을 성경에서 ‘누룩’이라 합니다.

레위기 2장 11-16절까지를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11절에 “무릇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소제물에는 모두 누룩을 넣지 말찌니 너희가 누룩이나 꿀을 여호와께 화제로 드려 사르지 못할찌니라.” 그 당시에 빵에 꿀을 집어넣는 것은 설탕 대신이겠지요. 성심당 빵 얼마나 설탕 많이 들어갔겠지요. 또 누룩을 넣으면 빵이 말랑말랑 부드럽고 먹기에 좋지요. 다 인간 식사용을 위한 거예요.

그런데 제물은 인간 식사용이 아니고 하나님식사용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먹기 좋고 기분 좋다고 해서 하나님도 같이 맛있게 먹는 하나님은 아니라는 거예요. 소고기 맛있지요. 염소 고기도 맛있을 거예요. 별로 저는 좋아하지 않지만요. 양고기도 맛있을 거예요.

하지만 양고기, 염소 고기, 소고기 다 하나님께 드리되 인간들이 받는 그것처럼은 하나님이 즐겨 받지 않는다는 그 차이성을 제물 바칠 때 표시를 내서 드러내야 해요. 그게 뭐냐? 기름 빼고 피도 빼는데 그 기름과 피를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나머지는 불에 홀라당 태워버리는 거예요. 태울 때 나오는 그 연기를 하나님은 “맛 좋다” 하고 마시는 거예요.

기름 태울 때 나오는 연기가 뭉쳐지면 그게 인물, 인격화돼요. 어떤 특정인물이 되는데 그 인물을 ‘기름 부은 자’라고 합니다. 자기 백성의 죄를 위해서 제물의 기름이 타듯이 제사법에 의해서 기름이 타듯이 자기 몸을 태워 죽여서 하나님이 기쁘게 받는, 유일하게 흠향하시는 최종적 제사의 완성, 그것은 기름 부은 자만이 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은 못하는 겁니다. 그분이 바로 메시아, 기름 부은 자,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예요.

인간들이 좋다고 먹고 마시고 하는 그것, 하나님께서 오히려 역으로 갑니다. “너희들 맛있냐?” “맛있습니다.” “달아?” “달고 맛있습니다.” “나 안 받는다.” 왜? 이미 너희들 입맛에 맛있고 단 것, 먹을만한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다고 하면 그런 인간은 하나님께서 받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메시아, 기름 부은 자의 희생이 거기에 섞일 수가 없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예수 그리스도의 기름 태우심이 함께 있지 아니하면, 그 기름부음이 함께 있지 아니하면 천국에서 받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너희는 인간 나라에 가서 살아라. 거기서나 맛있게 먹고 살아라. 나는 천국에 너 같은 인간은 안 받는다.” 내쫓아 버리지요.

설교 다시 할게요.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홀로 하신 그 일의 완성의 혜택을 입는, 은혜를 입는, 선물을 받는 자만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거예요. 인간이 한 것 말고 하나님이 하신 것이 어떻게 인간에게, 자기 백성에게 전달되는지를 엘리사를 통해서 지금 설명하고자 하는 겁니다.


젖과 꿀이 흘러야 할 그 땅이 엉망이 된 것은 그들이 이미 율법을 버린 거예요. 율법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인간을 안 받아요. 율법을 버렸다는 말은 뭐냐?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그런 것을 다 버렸다는 그 말이죠. 밥 먹고 사는 것도 급한데요, 지금 이웃 사랑이니 하나님 사랑이니, 그런데 신경이 안 쓰이잖아요.

지금 백성들이 엘리사한테 이야기하는 것이 뭡니까? ‘농사짓는 데 열매가 안 맺혀서 큰일 났다’는 그 이야기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 안 해서 큰일 났어요. 우리가 이웃 사랑을 안 해서 정말 골치 아파요.’ 그런 이야기 붙들고 엘리사에게 요청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 인간이 어디 있어요? 우선 자기가 배불러야 행복을 느끼는 게 인간인데요.

그러면 엘리야가 엘리사가 요단강을 건너오기 전하고 후하고 차이가 나야 하는데 요단강 건너오기 전이나 후나 똑같이 돼버린 거예요. 그래서 요단강을 다시 건너는 거예요. 판을 바꾸는 겁니다. 처음에 출애굽 해서 요단강 건널 때 그 판, 그 판을 바꾸는 거예요.

판 바꾸는 것 아시죠? 삽겹살이나 돼지갈비 식당에서 “이모, 불판 갈아주소!”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을 이모라고 하는데 그 족보가 어떻게 되는지 나는 모르겠어요. 불판을 갈아요, 불판을. 너희들 위주의 그 ‘판’은 하나님이 안 받아요. 불판을 가는데 어떻게 하는가?

레위기 2장 11절에서 누룩이나 꿀을 넣지 말라고 했고요, 뭘 넣어야 하는가? 2장 13절에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찌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찌니라.” 소금은 평범한 거죠. 아주 평범한 거예요. 평범한데 거기에 이질성이 들어 있어요.

인간이 누락시킨 것, 잃어버린 것, 자기 백성이 놓친 것이 있습니다. ‘말씀을 순종해라.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라’고 백날 해도 듣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율법과 말씀의 완성형을 뭐로 묘사하느냐? 그 특이성을 물질로, ‘소금’이라든지 또는 ‘누룩’으로서 표현한 거예요.

‘누룩’이라는 것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인간 식사용이에요. 자기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고, 흐뭇하게 만들고, 배부르게 만들고, 기쁘게 만들기 위해서 자기 뱃속에 집어넣는 빵에다가 꿀과 누룩을 집어넣는 거예요.

‘자기가 좋다면 하나님도 좋아하실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마라. 반대로 가라. 네가 좋다는 것, 네가 뭔가 해서 내 행함으로 이득을 얻었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을 잊었다는 것이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그런 것은 다 잊어버리고 나만 흐뭇하고 나만 편하면 됐다는 뜻이라고 규정하겠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누룩 말고 소금을 넣으라고 한 거예요. 그다음에는 유황을 더하라 했어요. 레위기 2장 15절에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위에 유향을 더할찌니 이는 소제니라.” 출애굽기 30장 34-35절에 보면 그 유황에 뭐가 들어가는가? 소금이 들어가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자향의 향품을 취하고 그 향품을 유향에 섞되 각기 동일한 중수로 하고 그것으로 향을 만들되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

‘소금’이라는 것이 물질이거든요. 이스라엘 나라가 둘로 쪼개져서 남쪽의 나라 이름이 유대인데 그 유댜의 르호보암왕의 아들 이름이 ‘아비야’에요. 그 아비야 왕이 북쪽 나라와 전쟁하면서 대진하고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역대하 13장 5절에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것이 아니냐.”

이 말은 뭐냐? “북쪽 나라 너희들은 하나님의 성전이 없다.” 하나님이 원하는 제사가 없는 거예요. ‘반면에 우리 유다는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다. 그 성전에서 하나님의 소금 언약의 규정에 맞추어서 제사가 드린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느 쪽을 이기게 한다고 생각하느냐? 머리 있거든 생각해 봐라.’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소금 언약’이라 하는 이것은, 하나님께서 영원히 받으실 만한 제사 안에 어떤 물질적인 요소를 집어넣어서 그 이질성을 표현하는 겁니다. 인간 세계에서는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에서나 통하는 그 특이성을 ‘소금’이라는 평범한 물질을 가지고 묘사해 주고 표현해 주는 거예요.

그러면 그것을 사람들은 ‘어? 소금 넣으니까 물이 달아졌네. 야, 놀라운 기적이다’라고 하는데 이것은 기적이 아니에요. 여러분, ‘기적’과 ‘표적’의 다릅니다. 기적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게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뭘 보태서 내가 원하는 것을 추가로 제공할 때 “와~ 기적”이라 하잖아요. 로또 당첨될 때 그게 기적이잖아요.

기적은 뭐가 문제냐? 내 자아가 꿈쩍도 안 했어요. 추가로 ‘내 소원이나 소망이 이루어졌다’ 하는 기쁨이 있지 내 자체의 문제점, 허점, 오류, 죄악성, 나의 근원적 문제성, 이런 것은 하나도 건드리거나 파괴하지를 못해요. 표적은 뭐냐? 표적은 나를 파멸하고, 파괴하고, 파탄에 이르게 하는 능력을 갖고 있는 그것을 표적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에 7개의 표적이 나오는데 예수님의 처음 표적이 가나 혼인 잔치에서 나오거든요. 처음 표적은 뭐냐? 물이 포도주 되는 거예요. 물이 포도주 되니까 사람들은 이것을 뭐로 오해했느냐 하면, “기적이다!” 전 세계 포도 농사 다 버려 놨어요. 바닷물만 있어도 포도주를 생산하게 되었어요.

물이 포도주 되니까 동해 바닷물이 포도주가 될 수도 있어요. 서해 바닷물도 그렇고요.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떴어도 고뿌 없으면 못 마십니다.” ‘컵’이 아닙니다. ‘고뿌’가 없으면 못 마신다고 했던 코미디언 서영춘이 했던 노래가 있어요.

사람들은 자기가 멀쩡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멀쩡하니까 신을 대할 때 ‘멀쩡한 나는 손대지 마시고요, 내가 원하고 필요하고 아쉬워하는 것 채워주세요’ 그렇게 되는 거예요. 기적을 달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멀쩡한 나를 파탄 내고, 파멸하고, 파괴시킵니다. 이게 성도만이 누리는 희열이고, 고마움이고, 감격입니다. 세상의 모든 걱정과 근심은 본인이 파탄에 이르지 않고 파괴되지 않아서 생긴 결과예요. 자기만 부서지면 모든 게 행복이고 모든 게 고마움이에요. 이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창세기 2장 7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라고 되어 있잖아요. 너무나 간단한 거예요.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만들었어요. 사람의 원형질, 형질화는 흙이에요. 사람이 없는 게 아니고 흙입니다. 흙이 있어요. 그 흙은 물질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사람이 되고 난 뒤에 마귀가 들어와서 그다음부터 인간은 자기가 뭐라도 된 양 초월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마귀가 인간에게 ‘네가 신처럼 되리라’ 한 게 뭐냐? 인간은 한시도 쉬지 않고 대단한 환상을 꿔요. 자꾸 환상을 만들어 냅니다. 그 꿈이 인간을 버려놨어요. 흙인 주제에 자기가 대단한 사람인 줄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맨날 하나님한테 기도하기를, 기적이 오기를 원해요. 물이 포도주 되니까 그 포도주를 먹은 사람들이 “주여, 죄인입니다.” 이렇게 먹은 사람이 없어요. “이 포도주가 그야말로 나의 죄를 깨닫게 했습니다.” 이렇게 먹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했어요. “이 포도주 어느 나라에서 왔나? 전에 먹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훨씬 맛있다. 정말 최상의 포도주다.”

자신의 허점을, 자기가 무너져야 함을, 자기가 죄인인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포도주가 맛있대요, 포도주가! 암 4기였다가 병이 나으니까 하나님께서 기적으로 병 낳게 했다는 거예요. 그것은 기적이죠. 표적은 뭡니까? ‘진작 진작 죽었어야 하는 데 왜 살려주십니까?’

내가 진작 흙이 돼야 했어요. 하나의 형질화, 하나의 흙덩어리, 흙이 돼야 해요. 인간에게 육신이 있기 때문에 인간이라고 하는데 육신은 인간 차지가 아닙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보면 말씀이 육신을 차지해요. 말씀이 육신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이 갖고 있는 육신은 뭐냐? 그것은 그냥 껍질이에요.

여러분, 양파 껍질 있죠? 양파의 제일 겉에 있는 껍질, 햇빛에 말라서 오렌지색으로 누렇게 된 것, 양파즙 짜는 것 말고 제일 바깥의 겉껍질 있잖아요. 바람이 휘리릭 날리는 것, 인간은 그냥 껍질이에요. 인간의 육신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껍데기에 불과한 거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인간의 육신이라는 것은 바람 훅 불면 날아가는 거예요. 양파 껍질 벗기면 쑥 날아가잖아요.

그게 인간입니다. 왜? 실내용이 없으니까요. 그 내용을 누가 채우느냐? 내용은 하나님이 채워야 그게 인간이 되는 겁니다. 뭐로 채우는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으로 채우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는 겁니다.

지금 엘리사는 여행하고 있어요. 무슨 여행? 표적의 여행을 합니다, 표적의 여행. 그 첫 번째 표적이 뭐냐? 소금입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표적은 뭐냐? 물이 포도주 되는 거예요. 그때까지 사람들은 그것을 기적으로만 알았지 표적인줄 몰랐어요.

예수님의 두 번째 표적이 뭐냐? 왕의 신하가 고침받아요. 왕의 신하고 고침받는다는 것은, 거기에 슬픔이 있고 그 슬픔이 기쁨이 된다는 거예요. 세 번째 표적이 뭐야? 38년 된 병자가 고침을 받는 거지요. 38년 병자, 슬프잖아요. 그런데 고쳤잖아요.

네 번째 표적,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 눈 뜨는 것. 다섯 번째 표적이 오병이어. 여섯 번째 표적이, 물 위를 걷는 것. 마지막 일곱 번째가 아주 결정타입니다. 아주 근원적이에요. 죽은 나사로를 나흘 만에 살려내는 거예요. 표적은 뭐냐? “너는 육이다. 육은 이미 죽어 있다.” 그 말이죠.

육인 주제에 더 살려고 달라달라, 하는 것은 그것은 표적을 구함이 아니고 기적을 구함이죠. 기적을 구함은, 자기 자신이 파괴되어야 마땅하고 파멸돼야 마땅함을 인정하지 않는 데서 나온 마음가짐이에요. 그것은 뭐냐? 아직도 환상 속에 있어요. 자기가 뭔가 된 양 여기고 있어요.

홍해도 그렇죠. 물 건너왔잖아요. 요단강도 물 건너왔잖아요. 물 건널 때마다 판을 바꾸는 겁니다. 어디서 물 건너왔는가? 바로 출애굽이에요. 출애굽 때에 10가지 재앙이 있었는데 10가지 재앙의 특징이 뭐냐? 애굽의 10가지 재앙, 그게 하나님의 표적이었습니다.

“너희들은 피, 개구리, 이, 파리, 악질, 독종, 우박, 메뚜기, 흑암, 장자의 죽음까지 그렇게 된다고 할지라도 어쩔 수 없이 그 재앙을 받아 마땅한 존재들이다” 그 말입니다. 그게 10가지 재앙이었어요. 마지막 재앙은 맏이가 죽는 거예요. 그런데 이 바로 왕은 그런 재앙을 받고서도 완악하고 강퍅해졌어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인간의 껍질 안에 들어 있지 않아야 할 완악하고 강퍅한 악마의 마음과 그 심보가 담겨 있음이, 여호와의 재앙이 내리니까 들킨 거예요, 들통난 겁니다. 원래 인간이 ‘흙’인데, 하나님의 흙입니다. 심지어 마태복음 3장에 보면 세례 요한이 말하기를, 거기는 흙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더 딱딱한 걸로 표현했어요.

그 딱딱한 게 뭐냐, ‘돌’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오니까, “너희가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너희들이 회개하러 와서 너희들이 구원받을 것 같으면, 차라리 이 돌멩이가 아브라함 자손이 될 거다”(마 3:9). 돌멩이, 돌멩이, ‘돌’이에요. 꼭 누구의 호 같은데요, 돌, 돌이에요.

이 예수님의 표적에 대해서, 이 누룩에 대해서 제자들도 잘 몰랐어요. 왜? 자기 자신이 물질화돼야 한다는 생각을 못 하고, ‘자기 자신은 인간이고 나는 사람인데, 나는 생물이고 내가 보는 저것들이 물질이고 무생물이다’라고 하는 거예요. 본인이 무생물이라는 생각을 못 하고, 나는 어디까지나 살아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 대목이 마태복음 16장 5-12절에 나옵니다. 약간 긴데요. 제가 한번 후딱 읽어보겠습니다.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째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우리가 떡을 가져 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마 16:5-6).

참, 지금 기가 차고 한심스러울 지경 아닙니까? 우리가 십자가 이후에 성경 마태복음 16장을 보면서, ‘제자들 정말, 도대체 그동안 뭘 배웠어? 그렇게 진도가 안 나가나?’ 뭐 이런 생각들 하겠지만, 그 현장에 우리가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누룩 이야기했잖아요. 그러면 누룩은 어디에 들어 있는 겁니까? 떡 안에 들어 있는 거예요. ‘누룩을 주의하라’는 말을 제자들은 ‘떡 잘 챙겨라’는 말로 이해했던 겁니다.

왜? 누룩은 물질이니까요. 주님이 인간 자체를 물질로 본다는 생각을 제자들은 감히 생각을 못 한 거예요. 자기는 살아있는 생명체니까, 누룩은 무생물이니까. 자기가 무생물이란 생각을 못 한 거예요. 그래서 “예수께서 아시고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느냐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마 16:8-9).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고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주님이 이야기했잖아요. 이 대목에서 주님께서 고개를 싹 돌려서 우리를 보면서 “이 대목을 보면서도 아직도 너희들도 깨닫지 못하느냐?!” 동일한 책망을 우리 보고 하는 것 같습니다.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이던 것을 기억지 못하느냐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마16:9-11).

떡, 누룩에 관한 이야기를 누가 끄집어냈냐면, 예수님이 먼저 끄집어냈어요. 그러니까 그 누룩이라는 소리를 듣는 제자들은 ‘누룩’이라는 것은 ‘떡’과 관련된 속성이고 요소니까 그저 떡으로 생각한 겁니다. 왜? 예수님이 먼저 ‘누룩’을 언급했으니깐요. 그런데 이제 와서 예수님이 딴 이야기를 하십니다.

“어찌 떡에 관한 이야기냐. 누룩은 무엇과 관련돼 있는 것이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잘못된 교훈, 잘못된 사고방식, 잘못된 정신 상태와 관련돼 있다”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 관점에서, 레위기에 나오는 누룩, 소금, 모조리 전부 다 우리 자신의 형질화, 우리 자신이 ‘흙’이라는 형질화 된 안목을 가지고 구약성경을 다시 봐야 해요.

우리가 ‘나는 인간이다. 인간인데 어떻게 살까?’ 하지 말고, ‘그냥 껍질이고 흙이고 무생물이고 돌멩이다’라고 했을 때 다음과 같은 질문이 됩니다. “돌 같은 나, 흙덩어리인데 주여, 제가 어떻게 천국 백성, 영생을 얻는 천국 백성 되겠습니까?” 그런 질문을 하면서 성경을 보시라는 거예요, 그런 질문을 하면서! 그러면 주께서 “내가 너한테 소금을 줄게.”

이게 소금에 관한 이야기일까요? “소금요? 집에 소금은 좀 있는데요.” 지금 그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누룩 이야기할 때 ‘누룩’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소금 이야기할 때 ‘소금’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에요. 교회 조금이라도 다닌 사람이라면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이 이야기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잡지도 그런 잡지가 있어요. ‘빛과 소금’이라는 잡지.

마태복음 5장 13절에 보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너희는 소금이다. 이 소금의 의미가 뭐냐? 마태복음 5장은 소금의 의미가 잘 안 나타나요. 소금의 의미가 잘 나타나는 것은, 골로새서 4장 6절입니다. “너의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이게 뭔 뜻이냐 하면, ‘이웃을 사랑하라는 그 율법은 내 것을 가지고 사랑하는 게 아니다. 너도 흙이고 나도 흙이고, 너도 돌멩이고 나도 돌멩이고, 너도 무생물이고 나도 무생물인데, 무생물 된 우리를 천국 백성, 영생을 얻는 진짜 백성 되게 하는 것은, 소금 같은 동일한 언약, 주님의 소금 언약에 의해서, 네 것도 내 것도 아닌 주님의 같은 공로, 같은 혜택을 입고 있음을 공유할 때, 이웃 사랑은 저절로 되고 그 이웃 사랑이 되는 사람만이 하나님 사랑으로 간주돼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친 백성이 된다’는 겁니다.

이게 제사의 완성이에요. 레위기 제사의 완성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끼리 어떻게 사랑합니까? ‘서로 쪼다’라고 보면 되잖아요. 서로 쪼다.

“너 뭐야?”
“나, 물이다. 그리고 너도 물이다.”
“그런데 어떻게 천국 백성이 되는가?”
“주님의 표적이지.”

주께서 날마다 말씀으로 우리를 파괴하고, 우리의 그 환상을 파멸시키고 파탄시키는 그 은혜, 우리가 그 은혜를 받으면 우리는 바로 창세기 2장 7절로 돌아가요.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그러면 우리는 제일 기본 바탕의 자리가 되지요. 가장 근본의 자리, 기원의 자리에, 기초의 자리에 서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무게 중심이 하나도 없어요.

제일 낮은 자리에서 모든 것이 고요요, 모든 것이 평화요, 모든 것이 안정됨이요, 모든 것이 화목됨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화목 제물, 십자가의 화목 제물의 그 고마움을 풍성하게, 날마다 늘 받아 누리는 그런 표적의 연속, 표적의 혜택을 받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에게 문제 있는 것도 모르고 왜 세상 살기가 빡빡한지, 얼마나 우회로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하고 있는지, 참 말할 수 없습니다. 되지도 않는 존재, 자기 주제도 파악 못 하는 존재, 주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가 마땅히 파괴되어야 할 존재인 것을 새삼 기뻐하는 감사가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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