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의 중합체
2026년 2월 1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3:20-21
13:20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13:21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죄란 하나님의 일하시는 구조를 모르는 겁니다. 사람이 구조를 모르면 자기, 곧 자기의 행함에 매달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바깥 구조가 우리 안의 내부로 응축되어 담긴다면 우리는 철저하게 구조의 종으로 완성된 구조를 증인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내 인생 내가 살기’는 금지됩니다.
왜냐하면 ‘언약의 피’는 그냥 피가 아니라 ‘계약성사를 위한 피’이기 때문입니다. 이 계약에 아버지와 아들만 관여됩니다. 창세 전에 그 두 분이 계약한 대로 세상을 움직여 나갈 뿐입니다. 그 시기가 ‘창세 전’이기에 아담을 비롯해서 그 누구도 이 계약에 참여된 자는 인간 중에서 없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Everybody가 아닙니다. Nobody입니다. 인간은 애초부터 수동적 존재일 뿐입니다. 당한다면 당할 뿐입니다. 자체적으로 뿜어대는 능력도 실은 악마의 능력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악마는 이미 하나님의 중앙 장치에 관여된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에덴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운명에 관계되므로 서 중앙에서 나오는 영원적 의미를 부여받는 운명이 되었습니다. 영원한 저주 운명 존재입니다.
따라서 태어나면서 경험한 짧은 식견으로 가진 인간으로서 영원한 지식에 참여한 바 있는 악마를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악마로부터 철저하게 짓눌러 구조 안에 갇힌 인간 세계에서 예수님께서는 들어오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또한 자력으로 이 저주 공간을 탈출할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의 힘이 없이는 예수님이라도 이 세상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계약은 아들로 하여금 저주 환경 안에서 자진해서 들어오심으로 서 아버지와의 맺은 언약의 위력과 효과가 전 우주의 운명을 아우른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모든 계약들은ㄴ ‘단독 자손’으로서 예수님에서 겨냥합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 3:16) 즉 예수님의 언약의 피는 오로지 아들이신 예수님 자신만 건져내시는 피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인간이 이 계약에서 참여한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 개인에게만 국한 되어야 될 구원이 새로운 피조물에게도 돌아갈 수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일단 계약의 능력이 ‘없는 데서 있게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철저하게 이미 있다고 자부하는 자는 배제시킵니다. 이것이 바로 ‘세례 방식’입니다.
마태복음 3장에서 세례 요한은 세 종류의 세례를 언급합니다. 물 세례, 불 세례, 그리고 성령 세례입니다. 이 중에서 물 세례와 불 세례는 결국 모든 인간이 당해야만 하는 세례이며 이는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의 언약의 피의 효과입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 3:11-12)
세례 요한은 도시와 대조되는 곳으로 사람들이 오라고 했습니다. 도시는 인간 대 인간의 만남으로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광야는 사람은 없고 오로지 하나님과 관계하는 공간입니다. 그곳으로 세례 요한 요단강으로 데려가서 사람들은 물이 빠트려 죽게 합니다. 그리고 물에서 살게 합니다.
물에 나온 자들은 자신이 이미 물에 익사했음을 인지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불에 잠기는 것은 모든 인간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이 현장에서 성령 세례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물 세례 받으시고 나올 때, 하늘이 열리면서 성령께서 내려와 예수님의 머리 위에 앉혀졌습니다. 여기서 세례 요한은 성령 세례를 받지 못한 존재임이 대비적으로 나타납니다. 성령 세례는 결국 예수님을 저주의 죽음으로 몰아세우시고 그리고 거기서 당당하게 부활코록 해주셨습니다. 이로서 우주의 모든 운명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하여 그 스케줄이 최종 확정지어졌습니다. 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통해서 새로운 환경, 새로운 구조가 발생되었습니다.
이 발생된 새로운 환경을 오늘날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면 다음 네 가지 단계로 나열할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죽었지만 부활하지는 않았다.
둘째, 예수님은 개인적으로 부활했지만 이 우주 삼라만상과 인간 세계를 다 홀로 만들어시는 것은 아니다.
셋째, 비록 현 현실 세계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도적으로 관할하시지만 나에게는 개인적으로 찾아온 적이 없다.
넷째,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성령으로 나에게 찾아왔지만 나를 전적으로 죄인이며 지옥가야 마땅한 죄인이라고 규정하지는 않았다.
방금 언급한 모든 것이 불신자들입니다. 성도가 아닌 일반인에 해당됩니다. 정말 언약의 피가 효과를 내게 되면 새로운 피조물이 성도의 내부 구조는 예수님 내면의 구조로 재편됩니다. 그것이 바로 두 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옛사람이 악마로부터 심하게 선악적으로 압력받는 방이요 다른 방은 하나님의 피의 사죄함을 거저받는 방입니다.
로마서 9: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과 에베소서 1:6의 말씀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육신으로 여전히 이 세상에 걸치고 살기에 늘 악마로부터 시달리게 됩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긍휼의 방이 열립니다. 불만층이 감사층으로 내부 이전이 가능한 구조입니다. 이 모든 것이 언약의 활성화 때문입니다. 이 구조에 대해서 고린도전 10:13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여기서 인간, 즉 옛 사람이 감당 못할 시험이 찾아들게 하므로서 ‘거저 주신 언약의 피’의 효력을 드러내는 허다한 사람(다수의 성도)들을 증인으로 활용하시는 겁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히 12:1)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그 어떤 경우라도 감사함과 고마움으로 찬양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04강-히브리서 13장 20-21절(언약중합체) 260201-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13장 20-21절입니다.
히브리서 13:20-21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오늘 본문에 ‘언약의 피’가 나옵니다. 십자가 피는 여러분 다 아시죠. 그런데 그 피가 어떤 피냐 하면, ‘언약의 피’, ‘계약의 피’라는 거예요. 이 계약에서 사람은 빠집니다. 사람은 여기 끼어들 수가 없어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만, 두 분 단독으로만 이루어진 그 계약, 언약입니다.
그 ‘언약의 피’로 뭘 했느냐? 자기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집어넣고 죽게 하시고, 저주받게 하시고, 그 저주에서 부활의 영광으로 이끌어 내게 한 그 효과, 효력이 그 피에 있다는 거예요. 언약의 피에 의해서 죽음 가운데서 이끌어냈다는 겁니다.
초반부터 아주 충격적인 이야기가 그겁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예수님만 구원했다는 거예요. 다른 사람은 일체 구원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언약 당사자가 예수님이기 때문에요. 예수님만 건졌어요. 인간들은 닭 쫓던 개 신세 된 거예요.
율법 지키려고 교회 나와서 열심히 했는데 그만 붕 떴어요. 인간은 언약에 개입되지 않았어요.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계약의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구원에서 배제되는 겁니다. 이것은 마땅한 거죠. 그 논리가 마땅한 거예요. 다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계약 당사자에게만 적용되고 다른 사람은 구원에 적용이 안 됩니다. 그래서 구원될 자가 누구냐? 예수님뿐이에요. 창세 전에 아버지와 아들이 계약을 맺어서 예수님만 구원하기로 결정이 났기 때문에 다른 인간들은 교회 40년, 50년 다녀도 소용없는 겁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계약의 피’에 참여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의 피로 구원 해달라고 하는데 그것은 헛된 야망입니다. 그동안 헛수고한 거죠. 예수님만 건지는 피고, 그것은 예수님만이 계약 당사자로 관여했기 때문에만 성립이 되는 겁니다. 이 우주의 팔자, 그 운명 전체가 이 계약에 의해서 절단납니다. 우주의 운명은 예수님과 아버지의 계약에 의해서 다 끝나 버려요.
그렇기에 천지로 창조됐던 이 자연 세계는 창조자 되시는 아버지, 창조자 되시는 아들, 그 두 분의 창조자의 협의에 의해서 절단내기로 확정됐습니다. 그렇게 끝내기로 확정하고,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아들에 의해 계약이 성사된 것을 축하하고 기념하는 차원에서 새로운 하늘과 새 땅을 만들고 거기에 걸맞는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백성, 이스라엘에게 약속한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의논한 것에 대해 역시 인간은 끼어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의 피’에 모든 인간의 접근을 배제시킵니다. 그리고 ‘언약의 피’ 안에는 함축된, 응축된 구조가 있어요. 그 구조를 확 펼치는 거예요. 10초 만에 펴지는 텐트 있잖아요. 한꺼번에 확 펼쳐지는 텐트처럼 언약을 활짝 펼치는 거예요.
텐트를 펼치면 텐트 안에 있는 구조가 멈추는 곳까지만 펼쳐지듯이, 언약 안의 내용을 펼치면 언약 안에서 세상의 모든 것이 새롭게 형성되어 있습니다. 아들로 이루어진 ‘언약의 피’의 내용물을 펼치게 되는데 이게 바로 언약의 피의 활성화라, 언약의 피를 활성화 되게 하는 겁니다.
활성화되는 그 방식은, ‘언약의 피’의 내용, 완성된 그 효과가 말씀에 다 들어가 있어요. 말씀이라고 받아보면 그 안에 ‘다 끝났다’가 들어있어요. ‘언약으로 다 완료되어 있다. 이 말씀은 다 완료되어 있다’가 들어있습니다.
예를 들면 십계명 제일 마지막에 ‘탐내지 말라’고 되어 있잖아요. 모세는 그것을 몰랐어요. 탐내지 말라고 했으니까 탐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죠. 모세는 아마 낌새는 알았을 겁니다. 백성들이 몰랐죠. 그 탐내지 말라는 말씀을 인간에게 넘기지 않고, 본인이 다 가져가서 십자가 언약의 피로 다 이루었던 분의 완성 내용을 십계명으로 미리 주는 거예요.
갈라디아서 3장 16절에 보면 그 내용이 이렇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제가 간단하게 설명드리면, 단독 자손에서 다수로 퍼지는 작업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만 구원했거든요. 어떤 누구도 구원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 16절에 보면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여러 가지 미리 던져두었던 약속들, 그걸 받아 챙길 여러 사람이 있다는 게 아니라 오직 한 분에게만 집중되어서 그 약속이 완료되는 그것을 겨냥해서 미리 아브라함에게 준 겁니다. 그러면 인간들 입장에서 고민이 뭐냐? ‘예수님에게만 국한되어 다 이루어졌던 그것이 다수로 퍼져나가느냐는 그 방법이 뭔지?’가 굉장히 궁금해지는 거예요.
인간의 행함은 안 됩니다. 인간의 믿음도 안 돼요. 하여튼 인간 쪽에서 나오는 것은 되지 않는 이유가, 인간은 단독자가 아니기 때문이에요. “나는 구원받고 너는 구원받지 마.” 또 “넌 구원 받고 나는 구원 안 받아도 돼.” 이렇게 다른 인간들과 더불어서 비교할 수 있는 것은 다 삭제시킵니다.
인간들은 똑같은 입장이에요. ‘너는 잘났고 나는 못났고’의 입장이 안 되고, 오직 단독자 예수님으로 끝난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혼자 아버지와 계약을 끝냈는데 사람들끼리 “예수님은 내 편이야.” “아니야 내 편이야.”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러한 자격이 인간에게 일체 없습니다. 성경은 꾸준히 질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구약 성경은 질주하고 있어요. 구약의 이스라엘 다 망했습니다. 왜 망했느냐? 단독자가 아니기 때문에 망한 거예요.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인데, 이 하나가 어떻게 다수의 구원으로 이어지느냐? 그것을 예수님도 이야기했고, 사도들이 설명하는 방법이 ‘세례’라는 거예요. 마태복음 3장에 세례 요한이 나옵니다. 세례 요한이 거기서 세 가지 종류의 세례를 이야기했어요.
하나는 물세례, 또 하나는 불세례, 또 하나는 성령 세례입니다. 물세례와 불세례는 인간에게 해당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계약에 참여 못하고 배제되어야 하는 이유와 관련되어 있어요. 그것은 아담 자체가 뱀과 결탁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여기서 배제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저한테 그렇게 질문을 해요. “왜 에덴동산에, 낙원에 마귀를 집어넣었습니까? 에덴동산의 품격이 떨어지잖아요. 사탄이 나쁜 줄 알면서도 고상하기 짝이 없고 완전무결 깨끗해야 할 낙원에 집어넣고 사람을 미혹하도록 조치한 이유가 뭡니까?”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마귀는요, 영적 존재의 우두머리잖아요. 그래서 어디와 관련되어 있느냐 하면, 중앙과 관련되어 있어요. center 센터, 중심부와 관련되어야 마귀가 하는 말이 영원성에 합류할 수가 있어요.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인생 살면서 체험이 짧잖아요. 경험하는 것, 또 지식이라고 해봐야 짧잖아요. 영원성을 담보하는 것, 중앙을 경유한 존재가 아니면 영원성이 부여될 수가 없어요.
영원한 자리에 선악과 생명나무 두 개가 있어요. 그 나무는 둘 다 영원성을 품고 있습니다. 영원한 원칙이에요. ‘영원히 선악과를 알지 않으면 네가 사는데, 만약에 따먹으면 몇천 년을 살아도 너는 죽는다는 것’과 그리고 ‘생명나무는 영원히 죽지 않고 생명을 누릴 것’이라는 것, 이 영원성에 누가 관여하느냐? 마귀가 그 영원성에 끼어들어요.
끼어들면 마귀는 영원히 지옥 불에서 못 빠져나오게 되는 겁니다. 적어도 마귀 정도 되면 인간의 소소한 체험, 짧은 인생을 사는 그 체험의 수준을 능가해야 돼요. 그래야 인간을 장악할 수가 있습니다. 개코도 모르는 인간들이 지식 좀 안다고, 과학 안다고, 철학 안다고 하는 거? 마귀 보기엔 웃기지도 않아요. “네가 영원을 알아? 네가 나이가 몇 살이라고, 이제 98이 뭘 안다고?” 이런 식이에요.
참고로 성도는요, 수명이 없습니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기 때문에 “몇 살입니까?” 하는 자체가 이제 성도에게는 무의미해요. 구약은 모형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데 신약이 되어 성령이 오게 되면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 되기 때문에 몇 년을 살았냐, 몇 년을 더 적게 살았느냐는 하는 것은 우리 성도에게 해당 사항이 없습니다.
질적으로 영원성을 담보하게 되어 있어요. 사탄이 천사잖아요. 그런데 그 천사 이상으로 우리 성도가 천사입니다. 성도가 천사도 판단할 수 있어야 돼요. 고린도전서 6장 3절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한다고요. 천사가 아는 건 성도가 알게 되어 있어요. 뭘? 영원함을.
인생 살면서 느꼈던 그 체험 말고, 짧은 것 말고, 교훈 그런 거 말고, 상식 말고, 영원한 거요, 영워한 것! 세례 요한은 구약에 속하거든요. 신약과 구약 중간에 속하는데 그는, 인간이 어디까지 영원성에 접근할 수 있느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물과 그리고 불에 대해 언급했어요.
세례 요한이 도시에 살고 있는 인간들을 향하여, 자기는 도시의 반대편인 광야에 갑니다, 광야에 가서는 ‘도시에 살지 말고 이리로 나오라’고 했어요. 인간과 인간이 상대해서 건설한 문명 말고, 아무것도 없는, 하나님과 마주 보는 이 광야로 오라고 불러요.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해석했어요.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마 11:8). 잘 사는 것? 검찰 개혁 이런 것? 관세? 우크라이나 전쟁? 석유 파동 그런 것? 이란 사태? 이런 거 말입니까? 그런 것 알려고 도시에 박혀 있느냐는 말입니다. “유튜브 보고, 쇼츠, 그 짧은 동영상들 보고 있느냐? 나와! 하나님 말씀 들어야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선지자를 통해 말씀이 주어집니다. 말씀이 주어지면 인간은 어디서 멈출지를 발견합니다. 인간이 멈출 자리는 바로 물입니다. “이리 와! 나랑 같이 물속에 들어가자.” 같이 합류, 결합, 이걸 ‘세례’라고 해요. “물속에 나랑 같이 들어가서 죽자. 자, 죽었다!” 그다음에 어푸, 하고 끄집어내겠죠. “죽었는데 너는 살았어. 이제 이미 물속에서 수장되었음을 유지한 채 살아라. 세상에 있는 것들은 다 하찮은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게 다가 아니에요. 인간들이 겪어야 될 게 또 있어요. 그게 불세례에요. 영원한 지옥 불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은 너희들이 그냥 어푸푸, 하고 끝날 문제지?” 영원성이죠, 사탄과 이미 결탁되어 있는 겁니다. 곧 중앙을 거쳐 선악과에 대해서 어떤 언급을 한다는 자체는 이미 사탄이 영원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뜻이고 그 영원성, 영원하지 않은 인간을 자기편으로 끌어당겨서 인간으로 하여금 악마와 더불어 지옥 갈 수밖에 없는 저주 속에서 살도록 만드는 그 조치를 악마가 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악마로 하여금 선악과 있는 데에 찾아와서 인간을 유혹해서 인간을 ‘정녕 죽으리라’, 그렇게 영원히 죽도록 내팽개치는가? 구약 자체가 언약의 다가 아니에요. 구약 자체는 거기에 인간이 가담되어 있거든요. 나중에 인간 빼고 아버지와 아들만 맺어진 언약이 따로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걸 위하여 모형으로, 인간을 ‘모형’이라고 해요, 로마서 5장 14절, 인간은 모형으로서, 하나의 인형으로서, 다루어지는 마네킹, 하나의 로봇으로 주께서 사용하신 거예요.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시는가? 쉽게 말해 이렇습니다. 원두가 있어야 커피를 뽑을 게 아니겠습니까? 물과 불은 인간의 운명이에요. 변치 않는 운명입니다. 모든 인간은 끝났습니다, 여기서 원두에 해당하는 예수님께서는 유일하게 단독자로서 성령 세례를 받았어요. 물세례를 받는 그 현장에서 성령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성령 세례받는 데서 세례 요한은 빠져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그 훌륭한 세례 요한, 성령 안 받았습니다. 그냥 예수님의 성령 세례를 목격했죠. 세례 요한도 구약에 발을 걸치고 있으니까, 다만 모형이니까요. ‘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물세례와 불세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인데 이것은 인간에게 해당하는 영원한 확정된 운명이죠.
인간이 요청할 수 없는데, 이것은 메시아가 인간의 요청을 들어줘서 구원한 게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언약, 즉 메시아가 고유의 꽃봉오리를 터트리듯이 예수님이, 언약 자체가 갖고 있는 - 부채를 이렇게 펴면 쫙 펴지잖아요 - 언약이라는 내용이 품고 있는 내용을 펼치다 보니까 그 안에 예수님이 이뤘던 언약의 피의 효력과 효과를 받을 자 다수가 등장하는 내용이 들어있었던 거예요.
그게 바로 ‘성령 세례’라는 겁니다. 세례라는 것은 연합, 합류를 두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예수님은 단독자고 그 외에는 없는데 성령을 통해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리는 작업을 예수님만 할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못합니다. 어떤 목사도 못해요.
지난 금요일 어떤 사람이 저한테 전화를 했어요. ‘동생이 이근호 목사 설교에 빠져서 아주 형으로서 걱정이 된다’는 식으로 전화가 왔어요. 내 설교를 한 편 들어봤다는 거예요. 어떤 분이 ‘주께서 죄를 알게 해주셔서 갑사합니다’하고 기도를 했는데 자기가 보기엔 너무 가식적이라서 그 마음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남이 기도하는데 자기가 왜 중간에 끼어들어요? 전화하다가 제가 화가 나서 끊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목사님은 목자 아닙니까? 목자라면 목사님 좋아하는 내 동생의 운명에 대해 책임을 져야하는데 제대로 설교 안 하면 나중에 주님이 목사님 불러서 책망할 건데 당신이 책임질 거냐?” 막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데 거기서 화가 난 거예요.
그래서 제가 고함을 질렀어요. ‘내가 평생 한 게 죄밖에 없는데 죄밖에 없는 나에게 무슨 책임을 묻느냐’는 말이죠. 죄밖에 지은 게 없는데 무슨 책임을 물어요? 사람을 구하고 말고는 목사 책임이 아니에요. 그것은 주님께 속한 거예요, 주님께! 목사는 말씀으로 봉사하는 겁니다.
이 이야기를 안 하려고 하다가 그 이야기를 듣고 할 수밖에 없는데, 어떤 목사가 자기 아들이 같은 교회 부목사로 있는데 이제 개척하려고 나간다 하니 40억 달라는 말을 하는 거예요. 목사의 임무는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그냥 말씀으로 봉사할 뿐이지 교회를 만드는 게 목사의 임무가 아니에요.
목사 입에서 새로운 말씀이 안 나오면 목사를 그만둬야 해요. 자기 아들이 목사면 거기서 주께서 주신 말씀이 나오면 말씀만 원해야지 교회를 원하면 그것은 목사가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터져 나오는 말씀을 전할 뿐이고, 새로운 거 없으면 그만두면 되고요, 구원하는 것은 주님의 단독 행위에요.
목사가 뭘 한다고! 뭘 책임져요? “교회 할래, 말씀 들을래?” 말씀을 들어야 돼요. 40억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것은 교회 좋아하는 사람이나 주고 자기는 말씀만 전하면 돼요, 빈털터리로. 하여튼 아들이 문제에요, 아들이!
‘성령 세례’는 달라고 해서 주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펼치는 거예요. 자동적으로 펼치게 돼요. 펼치면 여기서 구조가 생기는데, 그 구조가 예수님이 이 지상에 올 때의 구조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에 올 때 하나님께서 “넌 내 아들이니까 너 대충 일하고 나면 내가 건져줄게.” 이렇게 하지 않았어요.
예수님이 이 저주받은 세계에 왔을 때 예수님 힘으로 이 악마의 저주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자기 아들까지라도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아버지가 준 성령이 아니면 죽은 예수님이 안 살아나요. 그 정도로 이 세상이, 저주와 악마의 힘이 그 정도로 셉니다. 교회 몇십 년 다닌다고 구원받고 그런 거 없어요. 예수 믿는다고 구원받는 이런 거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질 때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우리를 함께 저주로 버렸단 말이죠. 아버지가 예수를 버렸어요. 버린다는 말은, 예수님이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그런 수모를 당해야 돼요. 사람은 일절 구원될 수가 없습니다. 아담에 속한 어떤 위인도 구원되면 안 돼요.
주께서는 예수님을 그 저주에서 살려냄으로써 기존의 아담 말고 새로운 아담이 이미 계약서 안에 내용이 들어 있어요. ‘이제부터는 새로운 아담이다.’ 새로운 아담이기 때문에 새로운 창조를 시작함으로써 구원이 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런 거예요.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이야기하거나 우리 자신을 바라볼 때 그 단계를 제가 한 번 적어봤어요. 1단계, 2단계, 3단계, 4단계로 했는데 일단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라는 그런 논의는 하지 마세요. 그것은 하나님을 가지고 장난치는 거니까 아무 의미 없는 거예요.
성경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죽었느냐, 부활했느냐’ 그 문제에요. 예수님이 죽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다 동의해요. 왜? 예수님이 옛날 사람이니까. 이순신 장군이 죽었다. 그걸 부인하는 사람이 누가 있어요? 다 인정해요. 세종대왕이 착한 분이지만 죽은 분인 걸 다 인정합니다.
세상 사람들, 곧 불신자가 뭐냐? 예수님이 죽었다는 것은 다 동의를 해요. 그런데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한 건 동의를 못 해요.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한 것에 동의한다면 뭘 동의해야 하느냐 하면, 요한복음 5장 28절과 29절에 동의해야 해요.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나중에 사람이 죽고 난 뒤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음성을 다시 듣게 돼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예수가 죽은 것은 내가 인정하는데 부활한 것은 때려죽여도 동의 못 하겠다. 나 전에 살던 사람들 다 죽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다. 끝!’
이게 1단계입니다. 불신자 1단계. 1단계가 끝인데 2단계가 왜 필요 하냐? 오늘 본문에 ‘언약의 피’가 나오잖아요. 그 ‘언약의 피’의 내용에 접근하기 위해서 이 세상이라는 것을 주께서 계속 유지시켜줍니다. ‘예수님은 죽었다.’ 그것에는 다 동의하는 세상에서 ‘죽음에서 부활했다’라는 내용뿐만이 아니고 ‘주님이 부활해서 뭐 할 거냐’에 이르기까지 성경이, 이렇게 두껍게 구약과 신약이 있는 거예요.
지금 신구약 성경 전체를 1단계부터 4단계로 말씀드리는 거예요. 성경 전체의 두꺼운 내용 때문에 1단계부터, 2단계, 3단계, 4단계를 언급해 드리는 겁니다. 2단계가 뭐냐? ‘예수님이 부활은 했는데 이 세상에서 아무 일도 안 하고 있다.’ 이게 2단계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해서 지금도 세상을 운영하시고, 해와 달과 별들의 운행, 사람들의 교통사고부터 해서 전쟁까지 모든 일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관여하고 개입해서 일어났다.’
이게 맞는가? 아니면 ‘예수가 부활은 했지만 일은 인간들이 하지 주님은 못한다.’ 이 2단계에서 자빠지고 엎어지고 난리도 아니죠. ‘주님은 그냥 부활했다는 것뿐이다.’ 예를 들어 ‘지난 식목일에 나무 심은 것은 우리가 심은 거지 주님은 개입하지 않았다.’ 이런 거요. ‘이번 선거는 인간이 투표한 거지 하나님이 개입한 게 아니다. 하나님이 개입하면 어떻게 그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느냐?’ 이렇게 이상하게 생각하는 거요. 그것은 역시 불신자예요. 교회 나오는데 불신자예요.
3단계, 여러분이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은 어디서 자빠졌는지? 3단계,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세상만사를 전부 운영했는데 나한테는 찾아온 적이 없다’라는 것, 이게 앞뒤가 안 맞는 거예요. 세상의 모든 일을 했는데 나한테는 찾아온 적이 없다는 것.
‘몇 년 전에 운전면허 시험 칠 때 내가 용써서 딴 거지, 주님이 개입한 적이 없다’는 거예요. ‘면접 볼 때 내가 사전에 준비 잘해서 취업했지, 주님이 개입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군대 보직 좋은 데 빠진 것 주님이 개입한 적 없고, 내가 그냥 잘 찍어서 그렇다’는 이런 것, 이거 3단계입니다. 아, 3단계에서 자빠지면 안 되는데요. 역시 불신자입니다.
그러면 3단계에서 끝내자, 하는데 안 끝납니다. 4단계가 있습니다. ‘나한테 성령께서 찾아왔는데 뭐로 찾아왔느냐’는 거예요. 나에게 찾아올 때 “넌 지옥 가야 돼. 넌 뭘 해도 죄인이야.” 이걸로 찾아왔습니까? 아니면 “네가 교회 생활 바르게 하고, 목사 말씀 잘 듣고, 헌금 잘하고, 전도하고, 선교하고, 봉사 잘하면 하늘나라 상이 많다. 넌 훌륭한 사람이다.”
이런 식으로 찾아왔는지, 아니면 “네가 뭘 하든지, 교회에서 봉사하든 뭘 하든지 너에게서 나오는 것은 지옥 갈 이유밖에 안 나온다.” 하는 식으로 십자가 앞장세워서 찾아왔는지, 네가 한번 보라는 거에요. 이것이 4단계입니다. 여기서 못 넘어서고 자빠지면 불신자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일체 구원에 대해서 인간의 행함이 개입되면 안 되기 때문에. 뭐 봉사했네, 헌금했니, 꽃꽂이 했느니, 애를 잘 키웠니, 이런 것이 일체 개입되면 안돼요. 이게 4단계입니다.
안 들으련다, 하는 사람 있을까 싶어 다시 합니다. 1단계는, ‘예수님이 죽은 건 맞는데 부활한 적이 없다.’ 여기에 자빠지는 사람. 2단계는, ‘예수님이 부활한 것은 맞는데 이 세상은 인간들의 노력과 열심과 지혜에 의해서 이렇게 문명이 되었다’라는 겁니다. ‘주님께서 정말 살아있다면 내가 보이스피싱 걸리게 그냥 두지 않았다’는 거예요.
‘내가 전세 사기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주님이 없기에 그런 것이다.’ 또 ‘이태원에서 내 아이가 까불다가 인파에 깔려 죽은 그것은 주님이 없기 때문이고, 세월호가 빠진 것도 주님이 없어서 생긴 것이니 그때부터 나는 예수 안 믿는다.’ 이런 식으로 2단계에서 자빠지는 거예요.
3단계는 ‘주께서 세상을 그렇게 운영하는 것은 맞지만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했다’는 것, ‘주께서 사적으로, 성령으로 나에게 찾아온 적은 없다’는 겁니다. 이게 3단계입니다. 4단계는, 성령이 찾아와서 룰루랄라, 방언했는데 “네가 방언하든 뭘 하든 간에, 믿음과 소망과 사랑 뭘 하든 간에 그것마저 죄라는 것, 네가 무조건 지옥 갈 인간이라는 것, 너는 일체 계약에 관여한 적이 없다”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식으로 찾아왔느냐는 말입니다. 여기서 자빠지면 안 되는데요.
방금 1단계부터 4단계로 이야기했지만 이걸 한 문장으로 한꺼번에 설명한 게 성경에 나옵니다. 그게 에베소서 1장 4-7절이에요.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선택’ 나왔죠? ‘예정’ 나왔죠? ‘예수 그리스도 안’이라는 단어 나왔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단독 행위입니다.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그 일을 위해서 6절에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그다음에 나오는 단어,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거저’입니다. “거저 주시는바”에요. ‘거저’ 주시는 겁니다. 찾아와서 ‘거저’ 주시는 거예요.
그런데 마귀는 교회를 만들어서 ‘행해야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행해야! 기도해야 구원받고, 방언해야 구원받고, 뭘 행해야 구원받고, 믿어야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우리가 ‘거저’라는 바탕 자체를 인간의 행함으로 낙서하고 있어요. 마귀가 낙서하고 있습니다. 전부다 주님의 행적으로, 주님행적의 무늬로 장식해야 하는 데 거기에 내 행위를 섞어놔요.
그렇게 섞어놓으니까 “기도했는데 왜 이 모양 이 꼴입니까? 헌금했는데 십일조 했는데 내 사업은 왜 망했습니까?” 이렇게 나와요. 그다음에 에베소서 4장 7절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다음에 나오는 단어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이 말은 뭐냐? “네 속에 피만 활성화 되느냐?”라고 우리에게 묻는 거예요. “네 속에 거저 주시는 피, 언약의 피, 네가 개입되지 않은 피, 아버지와 아들만 개입해서 다 이루어버린 그 피에 네가 합류했느냐? 마치 세례 요한이 물속에 풍덩 잠긴 것처럼 네가 그 핏속에 풍덩 잠겼느냐?”를 묻는 거예요.
바로 이것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형성된 그 구조, 그 구조로 새로운 피조물을 만드는데 그래서 그 새롭게 만든 피조물이 구조에요. 구조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저는 그걸 ‘중합체’라고 이야기하는데 서로 대조되는, 서로 대립되고 대조되는 두 성질을 두 개의 방으로 만들어 낸 구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람이 되셔서 예수님에 의해서 형성된 그 구조가 예수님의 언약의 효과로 인해서, 성령을 통해서 그대로 우리 구조로 들어오는 거예요.
쉽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었습니다. 긍휼은 로마서 9장에 나와요. 16절에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하나님의 긍휼, 사랑, 은혜 같은 말입니다. 이렇게 긍휼을 받았단 말이죠. 우리의 몸은 이제 긍휼로 꽉 차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 언약의 피를 작동하려면 언약의 피의 완성에 참여했던 예수님의 구조와 동일한 구조로 바뀌어야 하기 때문에 그 옆에 다른 방이 있어야 돼요.
그 다른 방이 뭐냐? 옛사람, 행위의 방이 또 마련되어 있어야 돼요. 행위의 방이 있고, 그다음에 긍휼의 방이 생겼는데 이게 성령을 받은 사람에게만 생기는 구조고, 마귀에 속한 사람들, 지옥 가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대립적인 구조가 없어요.
쳄버 chamber, 방이 두 개가 있어요. 한쪽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요. 그런데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영원성으로 정리 정돈된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 악마가 선악적인 행함을 가지고 우리에게 치고 들어와요. ‘너 인생 잘 살았어, 잘 못 살았어? 실수했어, 안 했어? 잘못했잖아. 말씀에 대해서 네가 잘못했잖아. 너 벌 받아야지’ 이런 식으로 치고 들어옵니다.
우리의 행함에 대해서 ‘우리가 뭘 행해야 하느냐’에 대해서 계속 집중하고, 몰입하고, 집착하게 만드는 것이 들어오게 되면 그 은혜의 쳄버가 행함의 방으로 바뀌어요. 그러면 우리는 절망이에요. 절망적입니다. 그런데 방의 구조가 2개가 되어서 행함의 방으로 들어가면 어느 방으로의 전환이 가능하냐 하면, 또 다른 방이 생겨서 긍휼, 거저 주심으로 가득 차 있는 방의 시선, 관점으로 내부에서 옮기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러한 구조를 우리 성도라는 이름으로 만들어 놨어요. 불만층이 감사의 층으로 내부 이전이 가능한 구조, 이게 언약 완성의 효과입니다. 그리고 우리 육신이 이 땅에서 70이고, 80이고, 90살 살다가 죽을 때까지, 요양병원에서 막 눈 감을 때까지 이 내부 투쟁은 멈출 기색이 안 보여요. ‘그래, 은혜받았어. 나 이제 복음 알아.’ 그런데 우리 몸이 처해 있는 이 상황은 ‘그렇지만 하나님…’ 꼭 ‘그렇지만…’ 이렇게 시작해요.
또는 젊은 애들 표현으로 ‘글치만…’이지요. “그렇지만 제가 왜 이렇게 불행합니까?” 그러면 긍휼층에서 행함층에 묻지요. “도대체 네가 원하는 게 뭐냐?” “저 행복하고 싶습니다.”
“긍휼층에서 말합니다.” “행복하지 마. 너는 말씀을 원해야 해.” 말씀을 원해야 하는데 행복을 원하고 있어요. 행복을 원하는 이유는, 본인이 불행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면 주님이 또 물어요. “네가 생각하는 불행이란 어떤 경우를 불행이라고 말하지?” 우리는 할 말이 없습니다. 불행이 뭔 줄도 모르면서 불행할까 봐 두려워하는 것, 그것은 사탄으로 하여금 계속 공격받고 있는 몸인데, 그 몸은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서 손수 체험했던 몸이에요.
주께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는 이유가, 인간의 죄악 된 몸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기도할 수 있고 그 기도의 응답도 가능하다고 히브리서 2장에 나옵니다.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 2:18).
방금 제가 얘기한 두 개의 구조 차원은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 나옵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인간이 옛사람이죠. 옛사람은 그냥 사람이에요. 인간이기 때문에 보통 아담에서 태어난 인간이 마귀의 시험을 감당할 수가 없어요. 인간은 어떤 사태가 일어나게 되면 선행으로써, 하나님께 충성과 봉사로써, 말씀에 충실함으로써 그 난관을, 불행을 이겨보려고 하는 것, 그게 마귀의 늪에 빠진 거거든요.
마귀의 늪에 빠졌다는 것은, 인간이 자기의 모든 행함을 총동원해서 남들 앞에 신앙이 있는 척을, 티를 내는 그런 요령을 부리는 거예요. 신앙을 내 힘으로 견지하고 유지하려는 시도, 마귀는 신났죠. ‘와, 너 믿음 좋구나. 그런 시련을 이기는 것 보니 믿음 좋구나.’ 이런 식으로 막 막 놀려요.
그런데 고린도전서 10장 13절의 말씀은, ‘시험을 감당할 다른 방으로의 이전은 네가 할 몫이 아니고 초과적으로 내가 너에게 그렇게 해준다’는 거예요.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피팅 Fitting 서비스라고 해요. 맞춤 서비스입니다. 성경 표현대로 하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모든 것이 ‘예스’가 된다.
이것은 끝나봐야 알아요. 끝나봐야 안다고요. ‘주님, 이러다가 저 신앙 진짜 자빠집니다. 나 진짜 좀 도와줘야 해요. 안 도와주면 나 진짜 바이바이, 굿 굿바이…’ 여기서 춤을 추지는 않겠습니다. 그렇게 나올 때 그 절망, ‘하나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그 절망.
주께서 뭐라 하겠습니까? “야~, 참 너도 어지간하다. 끝까지 너를 포기 못 하네. 너는 계약 당사자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계약 밖에 있으면서도 너는 아직도 너 자신부터 출발하네.” 그렇게 하십니다. 어떤 상황이 오든 피팅하는 거예요. 옷 피팅하듯이 딱 맞도록 하는데, 그렇게 맞도록 하는 게 뭐냐?
“네 속에 방이 하나만 있는 게 두 개가 있어.” 거저 주시던 방으로 나오게 되면 모든 것을 감사하고 고마워하고 웃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뒤돌아보면 고마움밖에 없어요. 제가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상견례에 가서 어떤 사돈 될 사람하고 이야기할 때 사돈한테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고 칩시다.
“사돈! 사돈의 자식 보니까 사돈집에는 마귀의 피가 흐르고 있군요. 자식 교육 시킨 것 보니 마귀의 피가 흐르고 있어요.” 상견례 자리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왔을 때 “그쪽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가 중요해요. “그렇지요! 하하하하하하하하하!” 이렇게 웃으면 돼요. 웃으면 둘 다 성도예요.
‘이런 사돈 처음 봤습니다.’ 하고 껴안고 이 고마워해야 돼요. 이게 맞는 말이거든요.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마귀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끝까지 자기 행복 위주에요. 자기가 얼마나 잘났는지 선악적으로 계산하고 자기 이득 챙기고요. 그리고 자기 힘으로 그 난관을 극복해 보려고 애쓰고요.
그런 점에서 인간은 천 명이 있다면 그 천 명 전부 다 두려워하는 촛불 같아요. 두려움에 마구 흔들려요. 잘 돼도 무슨 일 터질까 봐 또 두려워해요. 두려움에 흔들리는 촛불 같아요. 어떤 KBS 아나운서가 숙직하다가 늦잠 잤어요. 아침 뉴스 할 시간이 되어서 급하게 양복 입고 넥타이 맸지요. 그런데 아래쪽은 잠옷 바람으로 나왔습니다.
인간은 뭐냐? 인간의 아래쪽 하반신이 소멸돼요. 죽습니다. 사라져요. 아까 말한 전화했다는 그분이 “목사님의 설교 들어보니까 죽음을 중심으로 설교하는데 허무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나와요. 그게 왜 허무합니까? 감사가 돼야죠. 얼마나 지독하게 마귀적이면 그게 허무로 느껴집니까, 고마움 느껴지지 않고?
아직도 자기 자신한테 미련이 있는 거예요. 방이 하나밖에 없는 거예요. 내 행함으로 어떻게 천국에 갈 것인가, 어떻게 영원한 행복을 내 힘으로 따낼 것인가, 기존 교회가 그런 동네예요.
뭘 잘했다고 천국을 가요? 뭘 잘했다고! 여러분, 병 나은 것에 감사하죠. 여러분, 제대로 합시다. 병 나은 것에 감사하면, 병이 들게 하신 것도 감사하세요.
열심히 사는 것이 하루하루 고맙거든, 오늘 죽더라도 감사하세요. 그래야 앞뒤가 맞아요. 너무 이기주의로 놀지는 마시고요. 어쨌든 그래야 아귀가 맞잖아요. 모든 일은 주께서, 부활하신 주님이 알아서 자기 언약의 피를 증거하라고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 일을 한 분 예수님만 했어요. 오직 예수님만 했는데 성경에서는 “허다한”이라고 해서 그 숫자가 늘어납니다.
히브리서 12장 1장에 보면 “이러므로 우리가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라고 나오잖아요. 허다한데 그 허다한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증인들이에요. ‘언약의 피’의 증인들이라고요. 예수님의 구조, 하늘과 땅의 구조가 내부로 들어가서 예수님의 구조가 확장돼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그 안에 행함의 구조도 있지만 긍휼의 방도 따로 있어요. 복음 들었다고 좋아하다가 세상에 나가면 또 왕짜증 나요. 진짜 못 살겠다고. 방이 두 개가 있어서 긍휼에 감사하려면 거쳐야만 돼요. 나의 행함이 얼마나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동네인지, 그 사실을 절감해야 거저 주시는 구원이 피가 얼마나 고마운지, ‘지옥 가도 천 번을 가야 되는데 이 천국이 웬 말이냐? 예수님의 언약 확장, 자기 전개 덕분입니다’라는 고백이 나와야 된다고요!
진짜 주님은요, 우리를 살게 하는 사람이에요. 주님께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보냈고, 그 사람이 죽음으로써 사랑으로 변했어요. 이제는 우리 차례예요. 우리가 사람이잖아요. 나올 수 없는 사랑을, 무조건적인 사랑을 우리로서 나오게 하시는 겁니다.
바라보는 것도 사랑
기다리는 것도 사랑
그리움에 가슴이 저린 것도
내겐 사랑입니다
계절이 오듯이 그래
매일 숨 쉬듯이 그래
이유 없이 시작한 이 마음은
그래 사랑입니다
나를 살게 하는 사랑
아무 이유 없는 사랑
거기에 있어요 멀어지지마요
내가 아파할게요
금잔디가 불렀던 <나를 살게 하는 사랑>입니다. everybody? 아닙니다. nobody, 아무도 갈 수 없어요. 아무도 갈 수 없는데, 달라고 한다고, 달음박질한다고, 원한다고 해서 주어지지 않는 긍휼, 긍휼의 방이 따로 마련돼 있기에 우리가 감당 못 할 시험, 인간이기 때문에 감당 못 할 시험을 감당케 함으로써 “너는 이제 인간이 아니야. 천사도 판단할 수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야. 너는 나와 함께 있어. 너는 세례받았어. 성령으로 세례받았어.”
새 언약을 증거하기 위해서 그 허다한 증인들 속에, 그리고 또 이 2026년도에도 증인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오늘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 겁니다. 교회 나오지 마시고요. 말씀을 들으려고 하세요. 교회 나오는 식으로 교회 안 나오지 말고요, ‘교회 나와 줬잖아’하지 말고요, 밥은 안 먹어도 되는데 말씀은 들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산다’는데 이 말씀도 우리가 행할 수 없고, 그저 세상에서 행복만 원하고 있는 철딱서니 없는 우리에게 주께서 성령으로 찾아오셔서 ‘그게 바로 죄’라고 이야기할 때, 죄인을 부르러 와서 의인 되게 하시는 주님의 작업을 우리 안에서 계속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