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세 종류의 기도

아빠와 함께 2026. 1. 25. 18:00

세 종류의 기도

2026년 1월 25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3:18-19

13:18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13:19 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를 위하여 너희 기도함을 더욱 원하노라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친 기도에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라는 내용이 나옵니다.(마 6:13) 그만큼 인간이 태어난 이 세상은 위험한 곳이라는 뜻입니다. 왜 위험할까요? 그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과는 완전히 반대가 되는 이질적인 내용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출생 자체가 하나님의 뜻과 반대가 되는 지옥 같은 곳입니다. 당연히 인간은 자력으로 이곳 정서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기도해야겠지요. 자신이 해낼 수 있는 것이라면 굳이 기도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기도란 자기 자신의 결정을 의존하지 않겠다는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들의 간절함에는 ‘나는 악마의 시험에 빠져 있음’이라는 전제가 들어있지 않습니다. 자신의 결정이나 노력이나 판단에 의해서 스스로 자기를 위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기대감이 가득합니다. 누구에게 매달리게 될 때에, 매달리는 나 자신에 문제점이 있음을 고려하지 않는 법입니다.

이게 인간에게 근원적으로 문제점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참된 기도를 해내지를 못합니다. 참된 기도는 주님만이 하시고 인간들이 하는 기도는 가짜 기도입니다. 인간들은, 기도하는 방식으로 기도를 안 하려고 합니다. 열심히 본인이 해낼 수 있는 기도를 하므로서 참된 기도를 대신하려고 합니다.

참된 기도의 목표는 빌립보서 2:7-8에 나옵니다.“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시는 과업은, 하나님이시면서 하나님됨을 포기하시고 죄인이 되셔서 죄값을 치르는 겁니다.

이러한 과업은 성부, 성령, 성자 하나님께서 다 나타나시는 그 장소에서 드러났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막 1:9-11)

이 현장에 ‘비둘기’라는 짐승의 이미지로 같이 나타납니다. 성령님께서 비둘기 같이 예수님에게 임하신 이유는, 예수님의 행하시는 일이, 곧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에 평화와 화목의 근거 장만과 관련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시는 취소함이 없이 영원히 이어지는 사랑을 표현하면 비둘기가 등장합니다.(아 1:15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이게 바로 모든 저주의 심판이 마무리하고 그 이후 평정된 새로운 시대를 말합니다. 여기에 들어가는 자들은 기존의 옛사람들이 아닙니다. ‘새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옛사람이 하는 기도와 새사람이 하는 기도가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옛사람이 하는 기도는 자신의 영광을 그대로 사후까지 이어가려는 기도입니다.

이런 시도는 예수님에 의해서 다음과 같이 차단당했음을 알려주십니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 5:44) 사람들이 예수님을 못 믿는 이유는 자신의 영광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에는 성부, 성자, 성령께서만 일하시지 피조물들은 낄 자리가 없습니다.

불신자들이 열심히 기도하는 방식으로 이처럼 자기 영광에 이익을 얹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불신자들의 가까 기도는 무슨 내용으로 기도할지를 본인들이 미리 안다는 게 바로 문제입니다. 진짜 기도는 자신을 포기하는 기도이기에 그동안 마음 속에 품어온 모든 것을 폐기해 달라고 하는 기도합니다.

이 폐기를 통해서 자기 영광도 같이 배설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하는 기도는 주님만이 해낼 수 있는 진짜 기도를 거쳐야 합니다. 예수님의 기도 성도로 인하여 하나님과 성도 사이에 화목 관계가 됩니다. 바로 이러한 관계는 악마가 인간을 시험들게 하면서 집어넣는 관계와 전혀 다릅니다.

악마는 인간들로 하여금 인간이 해낼 수 있는 것들을 끌어모으게 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수립되는 개념들로 세상을 짜여지게 하는 겁니다. 반면에 하늘나라는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 사이에 맺어진 관계로서만 짜여진 세계입니다. 따라서 악마의 전략은 인간 대 인간의 관계로서 하나님과 예수님 관계와 개념을 대체하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시험든 상태’란 인간들 본인의 일을 하는데 있습니다. ‘나의 일이니 내가 나서야지 누가 나서냐?’라고 반문해 볼 사항이지요. 그런데 인간에게 있어 인간의 일이란 애초부터 없습니다. 모든 것은 주님의 스케줄대로 움직이는 주님의 일입니다.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가 함께 나타난 변화산의 정경은 결코 제자들의 야무진 기도 덕분이 아닙니다.

그냥 제자들은 우연한 존재에 불과하고 결코 주도적이지 않는 존재입니다. 베드로는 너무나도 예상밖의 일에 감격하여 초막 셋을 지어드리겠다고 생각한 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린 현장에서 두 명의 강도도 같이 달리게 됩니다. 구원되지 못하는 강도는 끝까지 자기 일을 합니다.

즉 자신을 십자가 처형에서 벗어나게 해주면 예수 당신을 믿겠다는 제안을 합니다. 반면에 구원받은 강도는 이미 화목의 기도 속으로 들어와 있습니다. 여태껏 자신이 살아온 것은 결코 자신의 일이 아니라 모두 주님 자신의 십자가 앞으로 강도 본인을 이끌어 오신 조치임을  알고 하나님 나라에 임할 때, 자신을 생각해 달라는 겁니다.

첫 번째 기도는 인간이 하는 가짜 기도라면 두 번째 참된 기도는 주님만이 해내시는 기도입니다. 세 번째 기도는, 하나님께서는 오로지 주님의 기도만 받으시고 그 효과로서 일체 자기 일이 없음을 발견한 자들을 통해 나타난 감사와 고마움의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 7:25)

시편 50편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들보다 제물이 모자라 내가 배고파는 아쉬운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환란 날에 나를 불러러 내가 너를 구원하겠다”는 겁니다. (시 50:12-15) 성도의 구원이나 기도는 개인의 여망이 아닙니다. 개인은 예수님으로부터 출발하고 그 혜택을 입은 여럿 사람들, 곧 ‘우리’에 해당되는 자들의 구원으로 결과가 나타납니다.

이 세상이 왜 지옥인지 힘써 압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인간 개인적 가치가 하늘에게 0에 불과함을 도리어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03강-히브리서 13장 18-19절(세 종류의 기도) 260125-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13장 18-19절입니다.

히브리서 13:18-19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를 위하여 너희 기도함을 더욱 원하노라.”

여기 ‘기도’라는 말이 나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기도해야 할 이유가 있어요. 인간 자체가 어떤 선택지가 따로 없습니다. 사람은 이 세상을 어떻게 사느냐? 마지못해 삽니다. 그냥 떠밀려서 태어났고 떠밀려서 살면서 떠밀려서 지옥 아니면 천국, 천국 아니면 지옥, 두 출구 중 한 곳에 그냥 떠밀리듯이 가게 되어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참 사는 게 힘들다고 하는데 솔직히 말해서 사는 게 힘든 게 아니고 죽는 게 힘들죠. 주님께서 기도를 해달라는 것은, 빨리 죽을 수 있도록 기도 해달라는 이야기입니다. 어차피 선택지 없는, 마지못해 사는 인생 어물쩍거릴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라고 할 때 기도 내용을 파악하는 데 있어 예수님의 기도가 항상 출발점이 되어야 해요. ‘주기도문’이라고 이야기하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그 기도 내용이 마태복음 6장에 나오는데 의미심장한 대목이 나와요.

13절에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옵소서, 이 말을 함축해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이 땅에 살며 지옥에 대해 힘써 알자.’ 왜 이 세상이 지옥과 연결된 프롤로그냐? 지옥의 하나의 서론 격에 해당되는 것이 우리의 이 세상입니다.

왜냐하면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고 하는 것은 시험하는 자가 우리가 태어난 이 세상을 장악하고 있고, 장악하고 있는 시험자가 계속해서 자기가 가야 될 지옥으로 자기 사람을 데려가려고 애쓰고 있는 입장에서 일반 사람들은 이 세상이 지옥이라는 것도 모르고, 그리고 이 세상이 마귀가 통치하는 곳이라는 것도 모르기 때문에 주님의 기도 안에는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라는 시험에 대한 감각을 일깨우는 내용이 들어가 있어요.

시험하는 자가 존재하고 있고, 그 시험의 내용이 분명하게 이 세상에 펼쳐지고 있다는 것, 그걸 일깨울 수 있는 “그걸 깨달으며 살도록 여러분들이 기도해 주세요”라고 하는 거예요. 어차피 살지는 못해요. 어차피 이 세상은 우리가 사는 곳이 아니에요. 그래서 ‘어떻게 살 것이냐’가 아니라, ‘어떻게 죽을 것이냐’가 과제인데, ‘시험에 들지 않은 상태에서 이 세상을 빠져나가는 것’이 관건이라 이 말입니다.

예수님의 기도 가운데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고 하는데 여기서 마귀의 전략이죠, 마귀의 책략과 전략에 대해서 성도라면 그걸 눈치채고 알아차려야 돼요. 사탄의 전략이 뭐냐? 사탄의 전략은 이렇습니다. 인간 대 인간이 서로 통하는 모든 관계와 개념을 가지고 사람과 사람을 이렇게 엮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 그 개념이 따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 나라’에요. 예수님의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 연결되어 있는 그 관계, 인식, 개념 그걸로 예수님과 아버지는 연결되어 있는 반면에, 인간 세계는 시험에 들어 있기 때문에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는 전혀 모르고, 그저 인간 대 인간의 관계로만 엮이면 얼추 사는 것처럼 산다, 이렇게 유지시켜주는 것, 그게 사탄의 전략입니다.

“네가 알고 있는 식대로 세상 살면 돼.”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가지고 “시험 들지 말라.” 이렇게 했다고요. 시험, “유혹에 빠지지 마.” ‘유혹이 뭐지? 나 유혹에 빠진 적 없는데? 난 정상적인데. 정상적인 교육을 받고 남들이 사는 거에 비해 얼추 비슷하게 살아가는데 이게 무슨 하자가 있고 무슨 문제가 있느냐?’

그런데 성경은, 주께서 그런 우리를 보고 “시험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 이렇게 했다고요. ‘시험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했다는 것은, 이미 시험 든 상태에 있다는 뜻이고, 기도하라는 것은 네 힘으로 해결이 안 된다는 뜻이거든요? 우리 힘으로 해결될 것 같으면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까?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분께 의존하는 게 믿음 아닙니까. 널 의존하지 말라는 거예요. 네가 네 문제를 해결 못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한 말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제발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네가 하지 말라’는 거예요. 네가 할 수 있는 일은요, 그것은 나의 일인 동시에 사람의 일이고, 사람의 일인 동시에 시험에 빠진 일이에요. 성도라면, 적어도 여러분들이 성도라면 ‘내가 뭘 못하는지’를 발견해야 돼요.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찾아야 돼요, 내가 할 수 없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 찾지 말고, 또 실컷 해놓고 ‘하나님, 성과가 뭐 별거 없네요.’ 이렇게 불평하지 말고요, 그것은 시험 든 거예요.

사람이 뭘 하게 되면 그냥 하는 게 아닙니다. ‘이 일을 함으로써 나에게 돌아오는 이익과 손실은 뭔가?’ 늘 이렇게 계산하게 되어 있습니다. 계산을 왜 하는가? 계산을 함으로써 내가 선택하고 실시한 나의 가치가 나에게 소환되기 때문에, 나에게 돌아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8절에 여러분이 잘 아는, 익히 들어봤던 내용이 나와요.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우리 주님은 ‘알파요, 오메가’라고 되어 있습니다. ‘알파요 오메가’라는 말은 시작하는 것도 주님이고, 끝내는 것도 주님이라는 말이거든요.

그 말에 대해서 ‘응 그렇구나’라고 그냥 생각하지 말고요, 오늘 제가 말씀드린 대로 인간은 시험에 빠진 상태거든요. 우리가 나쁘다는 게 아니라, 우리 환경 자체가 마귀가 통제하고 마귀가 집어넣어준 모든 개념들, 인식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니까 그 자체가 주님이 보시기엔 시험에 풍덩 빠져 있는 게 돼요.

그중에서 천국으로 빠질 사람들은 따로 있는데, 시험에 들지 않아야 될 사람만 천국으로 빠지는 거예요. 이미 마귀가 우리보다 세니까, 우리가 극복할 수는 없으니까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 이 말은 ‘나한테 맡겨.’ 이런 뜻이에요. ‘너의 모든 일을 네가 하지 말고 나한테 맡기라’는 거예요.

그런데 시험에 빠진 보통 일반인들은 뭐냐? 어떤 일을 자기가 해놓고 ‘이 일을 하게 되면 나에게 얼마나 많은 성과가 주어질 것인가?’ 그걸 따지니까 그걸 계산하는 자체가 시험에 빠진 것이고 계산하겠다는 건 무슨 뜻이냐 하면, 자기한테 어떤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보통 교회 가면 새벽 기도하거든요. 금요 철야로 모이고, 수요일에도 기도하러 모이고요, 기도원에서도 많이들 모여서 기도 하는데, 제가 보기엔 그래요. 왜 사람들은 자꾸 기도함으로써 기도 안 하려고 애를 쓰는지 모르겠어요. 내가 할 수 있는 기도를 함으로써 진짜 주님이 원하는 기도를 안 하려고 요령을 부리는 거예요. 통박을 굴리는 겁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기도, 그것은 백 프로 가짜 기도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기도를 왜 그렇게 열심히 하느냐? 성경에서 말하는, 주님이 원하는 기도를 안 하려고 발을 빼기 위해서, 농땡이 치기 위해서 대신 자기가 할 수 있는 기도를 해버려요. 내가 할 수 있는 기도에 대해 마태복음 6장에 나와 있습니다.

6장 7-8절에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지금 이방인이라고 하는 것은 불신자를 말하고, 시험에 흠뻑 빠진 마귀의 앞잡이를 이야기하죠. 지옥 갈 자들이죠. 지옥 갈 자들이 열심히 기도를 해요. 기도하는데, 그것은 자기가 할 수 있는 기도기 때문에, 자기가 한 기도에 대해서 기도를 하기 전과 후에 나에게 어떤 이득과 손실이 있는지 계산하는 식으로 기도에 들어갑니다.

추운데 새벽 기도 나와서 기도할 때와 새벽 기도 안 할 때, 집구석에 앉아 이불 뒤집어쓰고 놀 때와, 그 효과가 어느 쪽이 더 있느냐를 계산한다는 그 자체가 시험에 빠진 거예요. ‘시험에 빠졌다’는 말을 다시 한번 설명할게요. 시험에 빠졌다는 말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어떤 이야기, 어떤 약속을 주고받았는지, 어떤 내용을 주고받았는지를 전혀 모른 채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그 성과가 그걸 했던 나에게 괜찮게 돌아오는 그 개념의 관계, 그 개념의 관계만 알고 거기서 열심히 살아보려고 애쓰는 것, 몽땅 다 시험에 빠진 거예요. 유혹에 빠진 겁니다.

정말 여러분들이 성도라면 내가 무엇을 구해야 할지를 몰라야 돼요. 알 필요가 없습니다. 왜 내 일에 내가 신경을 쓰죠? 말 자체가 이상하다. 나의 일에 내가 왜 신경을 써요. 그냥 규정상 너는 시험에 빠졌다고 하면 오케이, 하고 끝날 문제인데 시험에 빠졌다는 것은 거부하고, 뭔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의 뜻을 위해서 바르게 살아보겠다?’

그건 자기 일이 아닙니까? 그게 주의 일이에요? 주의 일은 우리가 몰라요. 지금 모르고 있는데 햇빛과 공기와 은혜를 주시는 거예요. 이렇게 하면 복 받는다, 여기에 대해서는 우리가 알 필요가 없는 겁니다. 어차피 시험받는 형편에서 그걸 알아서 뭐 할 거예요?

성경의 기도에 대해서 이렇게 정리하면 쉬워요. ‘옛사람이 기도하는 것과 새사람이 기도하는 것이 차이가 난다.’ 이렇게 보시면 아주 쉽습니다. “옛사람과 새사람의 차이가 뭐냐?” 이제 이렇게 물으실 거잖아요. 그러면 이렇게 답변하면 되죠. ‘새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이 주신 사랑이 중도에 나의 어떤 행위로도 취소되지 않는다’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새사람이에요.

요한복음 6장 39절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오케이! 하고 받아들이면 돼요. “YES, 고~맙습니다!” 하고 받아들이면 될 문제에요. 그러면 옛사람은 뭐냐? ‘내가 나대지 않으면 내 인생은 깜깜하다.’ 이게 옛사람이에요. ‘내가 나대고 서대지 아니하면 내 인생은 조진다.’ 이게 옛사람이에요.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데 누가 나를 사랑하랴? 나라도 날 챙겨야지.’ 이게 옛사람입니다.

새사람은 나의 모든 것이 주님의 사랑의 손에 다 넘어갔습니다. 그때 성경에서는, 여러 가지 복잡하지만 단출하게 정리해서 말씀드리면 모든 게 다 넘어간 그 상태, 이럴 때 등장하는 동물, 새가 있습니다. 그게 비둘기입니다.

마가복음 1장 9절에 보면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쌔 하늘이 갈라짐과…”

하늘이 찢어져요. 갇혔는데 강제 조치로 찢어지는 거예요. 하나님 계신 곳과 인간 세계는 철처하게 딱 막혀 있어요. 인간 세계는 닫혀 있고, 갇혀 있는 겁니다. 두꺼운 삼겹살처럼, 이건 어떤 걸로도 안 뚫려요. 그런데 예수님의 경우에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서 하늘과 땅의 그 장벽이 찢어지고 예수님께 초점이 모아집니다.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세례 요한이 그걸 봤어요. 여기서 ‘비둘기같이 내려왔다.’ 비둘기가 내려온 게 아니에요. 성령께서 비둘기같이 내려왔다는 이 말은, ‘모든 것이 평화로운, 모든 심판이 종결되고 난 뒤 더 이상 심판이 없는 평화로운 시대가 도래했다, 예수님 안에서는 드디어 개시되었다.’라는 뜻이에요.

네가 이 땅에서 무슨 짓거리를 했는지 일체 따지고 묻는 그런 심판의 시대는 이미 없어졌고 그 심판에서 이미 건너간 거예요. 평화의 시대로 건너갔다는 뜻에서 비둘기가 등장한 겁니다. 비둘기같이 평화로운 모양새로 이렇게 성령이 오신 거예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실 일이 끝나게 되면 어떤 일로 마감이 되느냐 하면, ‘일체 모든 것을 문제 삼지 않는다는 새 시대를 예수님 안에 품고 예수님께서 그 업무를, 그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서 주께서 오셨다는 것’ 거기에 대해 성령께서 예수님 보고 “내가 도와줄게. 너의 과업이 끝나는 순간 모든 것이 하나님과 평화로운 상태가 되는 그 세계가 과업의 완성인데 그 일까지 이 성령이 예수 너를 도와줄게.”라는 식으로 성령이 비둘기같이 합류해서 찾아오신 거예요. 이게 새 시대입니다.

여러분, 새 시대는 새로운 피조물만 들어갈 수 있어요. 새사람 아니면 새 시대에 못 들어갑니다. 그러면 새 시대가 있다는 말은 전제가 뭐냐? 옛시대가 있었다는 뜻이에요. 옛 시대는 바로 불로써 심판하는 시대에요. 율법을 통해서 인간에게 저주와 심판을 냉혹하게 가하는 시대, 모든 인간의 행함에 대해서 꼬치꼬치 묻고 또 물어서 그 죄에 대해 하나님께서 일체 봐주는 거 없이 행한 대로 갚는 세대, 그게 옛 시대입니다.

옛 시대의 상황과 그리고 그 옛 시대의 상황을 마무리 짓는 순간의 새 시대의 상황을 같이 품고 있는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이 비둘기가 주는 의미가 구약의 아가서에서 사랑의 상태에 있을 때는 이렇게 돼요. 아가 1장 15절에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너와 나 사이에 비둘기 같은 관계가 놓여있다. 그게 사랑의 관계다.’ 그것은 도중에 취소되지 않는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는 거예요.

악마는 이걸 가리는 거예요.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 성령이 왔거든요. 그러니까 성부, 성자, 성령, 예수님이 세례받을 때 세 분이 다 등장했어요. 이것은 사람이 낄 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하나님 세 분이 하실 일인 것이 요단강 세례 받을 때 다 나타났어요.

그러면 새 시대가 온다는 말은, 사람이 끼어들어서 만들 새 시대는 없습니다. 사람이 끼어들면 그 일은 인간이 자기 일에 끼어드는 거예요. 아버지가 어른들 노는데 철딱서니 없는 아이가 주제넘게 끼어들면 어른들이 가만두지 않죠. “이 버르장머리 없는 것, 너 안 빠져?”

이걸 간단하게 하면 “시험 들지 말라. 네가 뭔데 네 인생을 네가 살아?” 이거거든요. 옛사람은 이게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고요, 새사람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요. 그동안 여러분 인생이 왜 그렇게 힘들었습니까? 아직 졸업을 못해서 그래요. 인생 졸업을 못해서 왜 이렇게 힘들게 삽니까?

자꾸 악마가 우리를 시험 들게 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 시험은 다른 게 아닙니다. 지금 세 번째 이야기하는데 늦게 오신 분이 있어서 다시 말씀드리면, 악마의 전략이라는 것은 모든 인간이 알지를 못하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었던 그 평화의 약속으로 연결된 관계가 있는데 그 관계를 인간 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으로 바꿔치기 하는 것이 바로 악마의 전략입니다.

그 악마의 전략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똑바로 살아 너. 똑바로 안 살면 너 지옥 가.” 이게 악마의 전략이에요. 우리는 그 소리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아이고, 나 이거 행동 조심해야겠다. 까딱하면 내가 망하는 수가 있겠네.’ 망하는 수가 있다는 거예요.

기도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기도할 때 시험에 든 기도는 뭐냐? ‘내가 기도를 해서 그 효과, 응답이 없으면 내 인생 망한다, 따라서 안 망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기도니까 열심히 빡세게 기도하자.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겠지.’ 이게 지금 마귀한테 사주받아서, 내가 거기에 호응해서 하는 기도에요.

지금 제가 기도하라는 말인지 하지 말라는 말인지, 여러분들이 헷갈릴 수가 있는데 그렇다면 제가 여러분께 문제를 하나 내겠습니다. 오늘따라 분위기가 아주 차분한데요,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문제 냅니다. 답변은 여러분이 알아서 하시고요.

누가복음 9장 33절의 변화산 이야기입니다.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누가복음 9장 29-30절에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변화산에 갔을 때 나타났던 그런 상황이, 그들이 아주 악착같이 기도해서 응답받아서 이런 하늘나라가 왔습니까? 아니에요. 왜냐하면 누가복음 9장 27절에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라고 하시고 주님께서 세 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갔고, 이미 죽었던 모세 엘리야와 예수님이 같이 이야기 하는 것을 제자들이 목격하게 된 겁니다.

이러한 스케줄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기도해서 응답으로 주어진 게 아니에요. 주님의 일방적인 스케줄이에요. 기도 빡세게 해서 이런 걸 노려서 얻은 것이 아니라 이 말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낄 자리가 못 돼요.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지금 그분들이 다 하신 거예요, 그분들이!

세상 살면서 하도 여러 군데서 “똑바로 살아라. 너 하는 행동이 네 미래를 결정하는 거야.” 이런 소리 들으니까 어느새 우리가 거기 물들어서, 마귀의 시험에 들어서 ‘그래. 내 인생 내가 관리해야 되지. 내가 열심히 하면 나에게 이익이 오고, 소홀히 하면 나에게 손실이 온다. 왜? 나는 고귀하니까.’ 이런 식으로 세상의 마귀로부터 자연스럽게 교육을 받은 거예요. 그 교육, 교회에 와서 앉아 있더라도 그 마귀의 시험은 쉽게 떠날 생각을 안 하고 있어요.

제가 버스 타고 가면서 이런 내용의 광고를 봤어요. ‘해동보살, 갓 신 내림’, 그러니까 신내림 받은지 얼마 안 됐단 말이죠, ‘갓 신내림’ 해놓고 ‘미래에 예지력이 있음’, 이렇게 되어 있어요. 찾아오라는 그 말이죠. 그걸 보고 생각했어요. 신내림 받은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 사람에게 찾아가서 “나의 올해 운세가 어떻게 됩니까?” 묻는 거 자체요, 이게 뭐냐는 거예요.

왜 점쟁이한테 그걸 묻고, 무당에게 왜 묻는가? 거기에 대한 해답을 저는 요한복음 5장 44절에서 찾을 수가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5장 44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사람이 점을 본다든지, 사주를 본다든지, 뭐 타로점을 본다든지, 인간이 새벽에 교회 나와서 기도 열심히 한다, 이 모든 것이 동일한 의식에서 나오는데 그게 뭐냐? 이 세상에서 자기 영광을 그대로 유지하겠다, 앞으로 인생을 살고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자기 영광을 포기하지 못하는 심보를 대변해 주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요한복음 5장 44절에 의하면 ‘네 영광을 유지하는 한 너희는 결코 나 예수를 믿을 수가 없다’ 이 말입니다. 믿을 수가 없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다른 말로 하면 ‘내 영광도 포기 못 한 채 예수님을 믿겠다는 것은 예수님을 점쟁이랑 똑같이 취급하는 거’예요. 예수님 믿어서 덕 보자는 거예요. 나에게 이익이 올 거라는 거예요.

기도의 목표는 이미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에 보면 기도의 목표가 나와 있습니다. 워낙 성경을 안보니 알겠느냐 싶지만요, 거기에 기도의 목표가 나와 있습니다. 제가 알려드리겠습니다. 빌립보서 2장 7-8절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게 예수님의 기도의 목표였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하는 평화로운 하늘나라를 이루는 데 있어서 주님께서 이 지상이라는 환경 속에서 일궈야 할 과업이 뭐냐? 그게 주님의 기도거든요. 주님의 기도가 뭐냐?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어디까지? 죽기까지, 십자가에 죽으심까지가 이 땅에서의 주의 기도의 목표였고 성령께서 그 기도를 옆에서 도와줬어요. 이게 진짜 기도입니다.

이게 진짜 기도니까 어느 인간도 이 진짜 기도를 할 수가 없잖아요. 못하니까 인간들은 자기가 할 수 있는 기도를 하면서 이 진짜 기도를 대체하려고, 바꾸려고 시도하는 거예요. 진짜 기도는 안 하고 가짜 기도 한 그것을 가지고 “진짜 기도한 걸로 퉁 칩시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진짜 기도는 자기 영광을 포기하는 거예요. 자기를 비우는 거예요. 이 세상 빨리 졸업하는 겁니다. 빨리 제대하는 거예요. 죽는 것이 힘들기 때문에 죽는 것을 흔쾌히 수용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게 진짜 기도에요. 그렇지 않으면 점쟁이한테 찾아가는 거랑 똑같은 거예요.

‘올해 내 운세가 어떤가? 올해가 말띠인데 7월에 귀인을 만난다.’ 그 소리나 교회에서 “여러분이 기도하게 되면 응답받습니다.” 그 소리나 둘 다 점쟁이에요. 목사란 이름의 점쟁이, 그쪽은 노골적인 점쟁이, 목사는 십일조 챙기고 점쟁이는 푼돈이나 챙기고요, 둘이 똑같은 거예요.

주께서는 “시험에 들지 말라.”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다른 말로 하면 ‘이 세상이 왜 본격적으로 지옥인지 이제는 힘써 지옥을 알자. 이 지옥이 뭔지를?’ 한번 들어가면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하는 영원한 저주의 세상, 그것을 주께서는 친절하게도 미리 우리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해서 체험케 하잖아요.

삶의 체험, 지옥 체험, ‘아, 모든 인간은 자기 영광에 미쳤구나.’ 그 자기 영광을 얻기 위해서는 대인 관계,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 수립된 개념과 의식과 거기에 동반된 상식으로 그것만 챙기면 난 얼추 사람 같은 사람으로 살 수 있다.’ 그것으로 마귀로부터 완전히 세뇌당하고 있어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거기서 벗어날 수가 없잖아요.”
“벗어날 수가 없으니까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무슨 기도를 하라는 말입니까?”
“진짜 기도요. 가짜기도 말고, 가짜 기도로 때우지 말고 진짜 기도요.”
“진짜 기도는 어떻게 합니까?”
“뭘 기도할지 모르는 기도”
“그러면 그 기도를 어떻게 시작합니까?”

주께서 상황 따라서 성령께서 기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주십니다. 그런 상황을 줄 때 그걸 알아야 돼요. 새로운 새 시대, 성령으로 화목케 하는 이 새 시대에서 우리의 가치는 하늘나라 전당포에서 담보가 안 됩니다. 목숨 바쳐서 기도하지 마세요. 왜? 우리의 목숨값은 제로에요. 롤렉스 시계라도 있어야 돈을 빌리지 갖다 내봐야 꽝인데 꽝을 담보로 받는 장사치가 어디 있습니까? 없어요.

우리의 목숨은요, 쓰레기기 때문에 “목숨 바쳐서 하겠습니다.” “목숨 바치지 마. 그냥 있어.” 바치나 안 바치나 똑같이 쓰레기인 건 마찬가지인데 뭘 바쳐요? 여러분, 지금 피곤하셔도 이것은 꼭 아셔야 돼요. 첫째, 가짜 기도가 있어요. 왜? 이 세상은 시험당하는 상태고 지옥이니까. 아까 이방인의 기도 알죠? 많이 기도해야 응답이 커진다는 것.

두 번째는 진짜 기도인데, 진짜 기도는 아무도 못 합니다. 진짜 기도는 아무도 못 해요. 예수님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세 번째 기도는 뭐냐? 세 번째 기도는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로마서 3장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인간의 평준화입니다. 악의 평준화. 인간의 영광은 안 받습니다. 값어치가 제로에요. 그런데 로마서 3장 24-25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여기에 ‘화목 제물’이라고 되어 있어요. 아까 비둘기라고 이야기했죠. 일체 모든 걸 묻지 않는 거예요. 그냥 용납하고 그냥 받아주는 것, 그게 화목 제물이에요. 그러면 화목 제물을 받은 상태가 새사람이 되는 것인데 새사람 됐을 때 나오는 기도가 세 번째 기도입니다.

그 기도는 오직 주님의 기도만 받으시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기도에요. 우리의 기도는 일체 받지 않고 오직 주님의 기도만 받아서, 그 결과물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기도에요. 히브리서 7장 25절에 보면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기도는 예수님만 하고요, 예수님만 기도하는 효과를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기도문으로 기도도 누가 하느냐? 예수님만 할 수 있어요. 다른 사람은 못해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주님이 이미 이 기도를 해놓고 그 기도에 대한 효과로서 우리 안에서 주기도문이 나올 수 있도록 주께서 힘을 주시면, 우리는 뭘 기도할지 몰랐는데 그때 그 기도가 나오는 거예요. 뭐로? 그냥 문자대로? 아니에요. 고마움과 감사함을 겸해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주여, 모든 일에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이게 바로 세 번째 기도에요. 일체 우리의 모든 행위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는 데서 나오는 고마움, 감사함. 이 1번과 3번 기도의 효과에 의해서 절묘하게 둘이 대비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게 누가복음 23장에서 십자가 위에 달려 있던 두 강도인데요.

한쪽 강도는 뭐냐? 죽을 때까지 예수님에 대해서 따집니다. “당신이 나를 이 십자가에서 내려가게 해주면 당신을 믿어줄게.” 이렇게 나왔어요. 그런데 구원받은 강도는요, 이것은 정말 누가 들어도 희한한 이야기를 합니다. “지금껏 내가 강도질한 것은, 주님께서 자기에게로 나를 호출하고 소환시키기 위해서 이끌어 온 인생입니다.”

그걸 전제로 해서 “예수님! 아시죠? 주님 나라 임할 때 저 저 안 빠뜨리는 거 아시죠?”라는 이런 기도를 한 거예요, 세상에! “내가 지금 강도질해서 사형당하는 것은 주님의 일이지 내 일이 아닌 것을 고백합니다.” 이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세 번째 기도예요.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주님께서 흔쾌히 거기에 응답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문제가,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나서 1번 기도 밖에 못 해요. 1번 기도, 늘 자기 챙기고, 내 인생만 챙기고, 내 인생 챙기기 위해서 내게 필요한 사람만 만나고요. 오늘 아침에 9시 반쯤에 교회 와서 전등 켜고, 난로도 켜고 그렇게 하는데 이쪽 전기는 들어오는데 저쪽의 전기는 다 나가서 난로를 켤 수가 없었어요.

다 꺼져버렸습니다. 누굴 기다렸겠습니까? 전기 볼 줄 아는 집사님만 기다리는 거죠. 후딱 전화했더니 후딱 와주셨어요. 그래서 난로를 켤 수 있었어요. 여러분, 교회 막 도착했을 때 많이 추우셨죠? 난로를 뒤늦게 켜서 그래요. 이렇듯이 우리는 살면서 자기에게 필요한 사람만 찾아요. 그게 우리가 보편적 악에서 태어나서 그래요. 자기 자신을 위해서 남이 필요한 겁니다. 자기밖에 챙길 줄 모르는 그런 인간으로 태어난 거예요.

그렇게 태어난 인간의 기도가 1번 기도예요. 가짜 기도입니다. 열심으로 기도해요. 남들 기도하는 것 컨닝까지 해가면서, 기도 대결까지 해가면서 기도한다고요. 1번이 어떻게 3번으로 바뀌는가?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세 가지의 예를 들겠습니다. 첫 번째는 수학적으로 예를 들겠습니다. 수학적으로 1, 2, 3, 4, 5, 6, 7, 8, 9, 여기까지는 숫자입니다. 그런데 10, 10은 숫자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다른 것은 1, 이렇게 기호 하나로 표현해요. 2도 그런 식으로 단 하나의 숫자로써 표현이 돼요.

그런데 10은 하나가 아닙니다. 1과 0, 숫자 두 개가 필요해요. 10은 숫자가 아니고 묶음이기 때문에 그래요. 1, 2, 3, 4, 5, 6, 7, 8, 9, 해놓고 그걸 묶어버려요. 10으로 묶고, 11, 12, 13, 14, 이렇게 해서 10단위로 묶어버리면 100이 돼요. 100단위를 묶어버리면 1,000이 되고, 또 10,000이 되는 겁니다.

묶는다는 것은 개인에서 벗어나서 어떤 조직의 일원이 되는 거예요.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가 아닙니다. ‘나의 아버지’라 하는 것은 예수님만이 할 수 있어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예요. 묶음이 될 때는 개인을 포기해야 돼요. 사적인 욕망 같은 것, 영광 같은 것은 하늘나라에서 안 받겠다는 선언입니다.

따라서 1, 2, 3, 4, 5, 6, 7, 8, 9 묶으면 그 묶음의 첫 번째니까 1과 0이 되었지만 결국 이것은 뭐냐? 0이에요 0, 없어요, 이것은 빈 공터가 되는 거예요. 지금 인간이 왜 예수님을 못 믿느냐 하면, 내가 제로(0)가 아니기 때문에 못 믿는 거예요. 자꾸 자기 자신이 있으니까, 내가 있으니까 내 가치, 내 영광, 내 잘남, 내 과거, 내 기억, 나의 의, 특히 나의 의!

자꾸 개인적으로 하니까 “목사님, 나 구원받겠습니까? 저는 선택되었습니까?” 맨날 “나 천국에 가겠습니까, 못 가겠습니까?” 이렇게 다 개인적이에요. 우리에서부터 출발한 단체는 없어요. 성령께서 비둘기 같이 오심으로써 성령 받은 예수님이 유일한 개인이고, 그 예수님의 개인이 확장되면 성령 받은 단체가 되고, 그 단체가 하늘나라 백성이 되는 거예요.

따라서 주께서 ‘시험 들지 말라’ 하는 것은 ‘네 사적인 욕망과 욕구와 희망과 기대에 네가 빠져들지 말라. 그런 것은 너의 가치인데 하늘나라에서는 안 받는다.’ 일체 너라고 출발한 것, 너부터 출발한 것은 일체 안 받고, 예수님부터 출발한 것은 다 받아요.

왜? 예수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줬기 때문에. 예수님 자신인 제물, 자신의 피를 우리에게 줬기 때문에 조사할 때 하늘나라 조사관이 예수님의 사랑이 있는지 없는지 그것만 보는 거예요. 사랑이 있으면 어떤 것도 다 용납이 되고 사랑 없으면 모든 것을 안 받습니다. 받지를 않아요. 이게 바로 하늘나라입니다. 목사를 점쟁이로 만들지 마세요.

따라서 그 가짜 기도에서 주님의 평화의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주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고 우리가 하는 모든 것, 우리가 가짜로 태어났고 인간 자체가 쓰레기 때문에 이것은 당연한 거거든요. 주님께서는 우리의 그 모든 일에 대해서 마귀의 시험까지 동원해서 우리의 뜻을 좌절시킵니다. 무산시킨다고요. 우리의 모든 기대와 희망과 뜻을 무산시킵니다.

그게 바로 예상 못 한 어떤 변화 같은 건데요, 아까 변화산의 경우에 베드로가 놀란 것은, 우연한 존재가 갖는 그 평안함입니다. ‘이게 뭐야? 모세, 엘리아, 왜 당신이 여기 있지?’ 깜짝 놀랐어요. 본인이 예상도 못 했는데 주어진 그 편안함, 평화, 그게 천국의 평화입니다.

그걸 통해서 다시 한번 거꾸로 우리 자신을 비춰 보면 평생동안 지금까지 나의 일은 애초부터 있었던 적이 없어요. 전부 다 주의 일이었어요. 다 주의 일인데, 고민할 가치도 없고 고민할 자격도 없는 게 우리는 쓸데없이 시험 들어서 고민했던 거예요.

“목사님, 살기 힘듭니다.”
“누가 살래? 그냥 돌아가세요, 그냥 돌아가세요.”
“자식 때문에…”
“자식은 알아서 살라고 하고 본인이나 그냥 죽으세요.”
“죽는 것도 잘 안 죽네요.”
“그것은 주님의 스케줄이 또 있을 모양입니다.”

욥기 35장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네 번째 욥의 친구, 엘리후가 이런 말을 해요. 6-8절입니다. “네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네 죄악이 관영한들 하나님께 무슨 관계가 있겠으며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네 악은 너와 같은 사람이나 해할 따름이요 네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뿐이니라.”

여기 ‘관계’라는 말 나오죠. 마귀가 우리에게 선악과 먹여 놓고 그 선악 가지고 얼마나 우리를 정신적으로 학대하는지요. “너 요번 일 잘 안된 것이 나쁜 짓 해서 그렇잖아.” 또 “네가 이번에 잘 된 것이 착한 일 해서 그렇다.” 선악적으로 계속해서 압력을 가하는 거예요.

그런데 욥의 네 번째 친구 엘리후가 하는 말이 ‘우리가 죄지은들, 혹은 우리가 착한 일을 한들, 욥 네가 의로운 들, 그것이 하나님의 스케줄하고 무슨 관계있느냐?’ 그 말입니다. 하나님의 일은요 하나님만 하시고요, 하나님은 인간의 일을 일체 안 받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기도만 받아요. 자기가 하는 바만 받습니다.

시편 50편에 나오는 이야기는 더 충격적입니다. 기절초풍할 이야기에요. 시편 50편에 7-15절까지 보면 내용이 이래요. “내 백성아 들을찌어다 내가 말하리라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증거하리라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 내가 너의 제물을 인하여는 너를 책망치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수염소를 취치 아니하리니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너희가 나한테 제물 바친다고 소나 양과 염소 가져오는데 가져오지 마. 산에 있는 것들 안 가져와도 이미 다 내 거야. 안 가져와도 원래 내 건데 네가 받으소서, 한다 해도 해도 안 받는다, 안 받아! 그냥 가만둬도 다 내 거야. 너의 재물 가지고 내가 탓 안 할게. 왜 이거나 가져왔느냐고 탓 안 할게.’

11절에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12절에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하나님이 “‘나 배고프다. 왜 나한테 밥을 안 갖다줘?’ 내가 이런 이야기 안 할게” 이런 뜻이에요. “‘야, 너희가 내 밥 안 갖다줘서 배고프다.’라는 이런 이야기 안 할게. 내가 너한테 부탁 안 할게.”

다만 너희가 해야 하는 것은 뭐냐? 거기에 대해서, 내가 일체 우리에게 받지 않은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을 가지라는 겁니다. 시편 50편 15절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그 이야기에요.

대가 바라는 것은 없어요. 방금 본 시편 50편과 같은 취지는 아니지만 비슷한 내용의 노래 가사가 있습니다.

The winner takes it all
(이 세상의 운명은 승자가 다 가져가는 것이다)

<아바>라는 그룹이 불렀던 노래입니다. ‘승자가 모든 걸 다 가져가고 진 사람은 작아지면서 그 옆에서 단지 쓰여지는 것이 이 세상의 운명이고 규칙’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네가 승자도 되지 못했으면서 왜 컴플레인이나 하는가? 왜 불평하느냐? 세상에 대해서 불평하지 말고 너 자신에 대해서도 불평하지 말라. 왜 세상은 승자 독식이니까, 다 가져가니까.’

제가 ‘아바’의 ‘The winner takes it all’이라는 이 노래를 왜 소개하느냐? 우리가 주님한테 매일 모든 일에 지시면 됩니다. 우리는 주님한테 지면 돼요. 주님이, 내가 하는 일을 전부 다 밟아버릴 때 오히려 그것을 당연한 걸로 여기고, 고맙게 여기고, 감사히 여기는 마음….

주님의 영광에 내 일이 끼어들면 안 되는데 우리는 주제 파악도 못 한 채 자꾸 끼어들어서 ‘주의 영광, 주의 영광’, 말도 안 되는 위선적인 발언을 하면서 실제로는 자기의 이익을 챙기려는 이런 종교적인 꼼수, 이 고질병! 주께서 때마다 쫙쫙 밟아줄 때 우리는 감사의 기도 외에는 할 게 뭐가 있습니까?

아까 그 집사님의 기도처럼 십자가 안에서 고마움이 그냥 흘러나오는 그 감사의 기도, 그 기도는 우리한테서 쉴 틈이 없이 주께서 흘러나오게 하십니다. 그게 세 번째 진짜 기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기도를 통해서 다시 한번 우리가 주님의 세계, 천국 안에서 사는 사람인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는 귀한 남은 날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마귀의 시험에 들지 말라’라는 그 말이 얼마나 의미 있는 말인지, 주께서 그걸 목표로 일하고 있음을 평소에 놓치지 말고 늘 고마워하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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