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선

원주특강을 다녀와서

아빠와 함께 2026. 2. 7. 22:18

원주 특강 소식에 고민할 필요도 없이 참석하기로 마음이 움직였다. 내가 나와 맞지 않는 증상과 함께, 복음을 고대하는 것같은 겉치레를 걷어내니, 복음보다 귀한 보물이 감지되었다. 원주 한라대학교를 치니, 길치의 하나님인 네비게이션이 그곳에서 아들이 취직한 곳까지의 거리를 시간으로 계산해 주었고, 겨우 50분 남짓 소요되는 거리였다. 군산에서 대략 3시간 거리가 원주에서 50분,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뀡 먹고 알 먹으려는 이익을 예측한 내부의 부정성은 외부의 초과가 활동하고 계신 것을 예측하지 못했고, 이러한 초과를 예측하고 계산을 도와 줄 세상 신은 없었다. 생성형 AI님조차 감당 불가한 그것이 원주에 미리 앞서가서 기다리고 있었다. 올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던 인천에 사는 친구를 원주 터미널에서 만났고, 가면 만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던 친구는 만나지 못했다.

예측 밖의 일은 내 중심에서 생성되는 예측을 경유해서 등장한다. 외부를 드러내시려고 내부를 이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외부와 내부가 어긋나는 그 사이에서 터져 나오는 무한, 무조건적인 사랑, 예수의 피로만 영광 받으시기를 기뻐하신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성막의 구조는 서로 어긋하여 배배 꼬여 얽히고설키고, 서로 연하고, 단단히 결합한 모습이 연상된다. 이것을 택하신 백성의 목을 조르는 헤드락(headlock)걸린 모습으로 예를 드시는데, 그 표현이 너무 적절해서 웃음이 났다. ‘내가 사랑하는 내 어여쁜 신부야’라고 하시며, 따뜻하게 꼭 안아주는 다정한 신랑을 기대했다가, 그만 기대한 죄를 다 털리는 사건이 된다. 신랑이 다가와서 난데없이 목에 락을 걸어 질식시키려고 하는 모습과 죽음의 위협을 느끼며 얼굴 벌게져서 발버둥 치는 처녀의 모습.

이걸 사랑으로 표현하는 말씀이 초과적이라 귀를 막거나, 미치거나, 어느 편으로든 갈려야 하는 홍해의 갈라짐은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이 이끄시는 곳에 증거처럼 따라다닌다. 헤드락을 거시는 주의 영이 말씀하신다. “네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오” 알았으니까, 주님 사랑 안 할 거니까, 절대 사랑 못한다는 걸 다 알았으니까, 락을 풀어달라고 애원해도, 끝내 놓지 않으시고 완성하신 말씀을 마저 하신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그래서 인간은 살아서는 결코 고마움이 나올 수 없다. 만약 주님의 사랑에 질식사하지 않고 도중에 풀려서 살아있는 상태로 감사를 했다면, 그건 연기이고 거짓 감사임을 본인이 안다. 죽으려다 숨통을 틘 자가 한 짓은 감사가 아니라 더욱 강퍅함이었다. “그러나 바로가 숨을 통할 수 있음을 볼 때에 그 마음을 완강케 하여 그들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출8:15)

택한 백성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모조리 죽을 때까지, 하나님은 락을 풀지 않으셨고, 살아있는 이스라엘이 아닌 바짝 마른 그들의 뼛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찬미가 나오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친히 앞서 움직이셨고 일하셨다. 예수님의 죽음이 뼛속까지 파고들 때, 그분의 부활 생명으로 살아 움직이는 백성은 출생해서 죽는 과정이 아니라, 죽음에서 생명으로 다시 생산된 자들이다. 이들이 성막의 운명에 결속되도록, 주께서 어긋 맞춰주시며 꼬~~~~옥 목을 졸라서 결단코 풀리지 않게 하신 연합을 주님이 하시는 ‘사랑’이라고 한다.

성막의 일부로 얽혀 있는 모습은 절뚝거리고 삐그덕거리면서, 마치 하나님의 뜻과 아브라함의 뜻이 어긋난 것처럼( 창17:19), 이삭의 뜻과 야곱 안에 하나님의 뜻이 서로 어긋난 것처럼(창27:33, 37), 이스라엘과 요셉의 뜻이 어긋난 것처럼(창48:14,17)), 안쪽 이스라엘과 바깥쪽 이스라엘이 서로 맞지 않는 모습과 같다. 보이지 않으나 실제이고 실재인 초과가 내 중심대로 하고자 하는 초월을 묵살하고, 나에게서 나를 발라내어 뼈로 만드시는 탈 주체 현상으로 말미암아 존재는 지워지고 사건만 남긴다.

나는 존경받는 아버지라고 생각한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으로, 나는 언약의 씨라고 생각한 이삭에서 이삭의 하나님으로, 내가 복의 목적지라고 생각한 야곱에서 야곱의 하나님(이스라엘)으로, 언약의 종점인 주의 이름의 자리가 완성되기까지,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과 다투셨고, 그들과 어긋났고, 오직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과만 상대하시며, 마침내 주의 이름이 십자가에 안착하셨다. 그 십자가 제단 위에서 창세전 주의 백성이 출현하고, 주의 대신 받으신 불세례 속에 함께 연합된 체, 주와 다투고 원망하는 부정성을 맘껏 표출하는 산 제물로써 예수그리스도의 피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재료가 된다.

‘언니, 잘 들어보려고 애를 쓰긴 했는데, 전하시는 말씀이 뼛속까지 들어오지는 않더라고. 나름 알아들은 것도 언니의 그것과는 다른 해석일 거 같고...’라는 말과 함께 덧붙인다. ‘들려오는 말씀이 마치 키오스크(무인 정보 단말기)에서 나오는 소리처럼 들렸어. 기계처럼 딱딱했다는 것이 아니고, 이건 설명하기가 쉽지 않은 어떤 건데...’ 키오스크라는 말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본디 수상한(?) 인간들 속에서 나오는 말이라는 것은 마치 무언의 약속처럼, 서로 간에 관계성을 전제로 나누고, 어떤 경우는 자기의 말에 예속시키기도 하는 낌새들이 동반한다. 말을 한다는 것은 결코 기호 자체만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 도사리는 설명할 수 없는 초월성이 덕지덕지 달라붙는다. 이런 자기 의미, 또는 자기 의가 말씀에 가미된 증상이 교만이고 우상숭배이다.

키오스크 자체나 거기에서 나오는 말은, 말 그대로 무인(無人), 사람을 거치지 않는다. 그냥 소리가 나고, 그 소리가 지시하는 대로 손이 움직인다. 사실상, 소리가 만들어낼 결과는 이미 준비되어 있고, 그 결과가 증거되도록 키오스크는 말하고 뼈다귀 같은 손가락이 움직이는 것이다. 나오는 말에 의미를 부여하며 자신의 행동에 따른 결과를 예측하거나 키오스크와 관계 형성을 시도하게 된다면 도대체 누가 미친 것인지.

산 위에 있는 모세의 손에 들린 지팡이가 이긴 것인지, 아래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여호수아가 이긴 것인지. 말씀의 책망이 귀에 쟁쟁히 울린다. 지팡이를 들고 있던 모세도 힘들었다고, 옆에서 아론과 훌도 열심히 도왔다고, 용맹스러운 여호수아도 공로가 있다고 주장하며 여전히 초월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모습이 마치 바짝 마른 뼈에 의미를 부여하고, 뼈에 울고 뼈에 웃으며, 때론 원망하는 바로 내 모습이라고.

강의가 끝나고 말씀에 대한 부분은 많이 나누지 못했지만, 친구는 헤어지기 전까지 여러 번 이야기했다. 자기가 근래 먹어본 한정식 중에 최고로 맛있는 점심이었다고. 너무 동의가 되었다. 원주 특강 덕분에 우리는 예수님을 찾는 까닭을 허심탄회하게 들킬 수 있었다. 눈앞에 십자가가 보여서가 아니라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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