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선

경계선

아빠와 함께 2025. 8. 31. 07:10

복음은 성도를 어떤 존재이고 누구누구라고 명명하기보다, 사건으로 드러나는 경계선이라고 한다. 경계선은 말 그대로 선이나 악으로 규정되지 않고, 옳고 그름으로 판단될 수 없고, 한 분의 활동 현상을 나타내기 위해 사건 중에 두드러질 뿐이다. 경계선상에 세워진 폭이 없는 얇은 막이 바람이 불어 빛 쪽으로 넘어지면 빛의 일을 보여야 하고, 어둠 쪽으로 넘어지면 어둠의 일을 보여야 한다. 경계선에 고정된 막이 어느 쪽으로 넘어지든 그건 넘어지게 한 바람의 일이지, 막을 가리켜 ‘넌 어둠이다. 넌 빛이다’라고 규정할 수 없다. 넘어지고 서는 것이 주인의 손에 달려있기에, 판단은 주인의 몫이다.

같은 말씀을 듣고 있다면, 같은 말을 하고, 서로 통해야 한다는 생각이 바로 선악체계 안에서의 생각이라는 책망과 함께, 가차없이 내동댕이치는 것이 주의 말씀 활동이다. 너 있고 나 있고의 선악 개념 안이기에, 예수님이 친히 생중계하신들, 마음 안에서 말씀이 왜곡되고 변질되어 구더기가 기어다니며 역겨운 냄새를 낸다.

뭣도 모르고 나대는 모르는 자를 그렇게 모르는 채로 두시고 주님은 주님 일 알아서 척척 진행하시는 것이,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라는 이미 완성된 말씀 안에서 펼쳐지는 증상이라고 하신다. 육체는 말씀과 결코 섞일 수 없게 하시면서, 그렇게 피조물을 잘 이용하고 계시는 성령의 일이 고마움으로 마감되는 것은, 배제의 작용이 일어나기까지 철저히 모르게 하셨기 때문이다.

몰랐던 것을 잠시 알게 되는 순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저주의 모습 그대로가 밝히 드러나기에, 그 상황에서 자신이 주체가 되어 수습을 해보려는 어떤 움직임도 극악한 원수의 모습,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습으로 펼쳐지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이제는 살아있는 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기적인 줄 알게 된다.

살아있다는 것 그 자체가, 주께서 허락하신 일분일초가 은혜 가운데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기에, 살 이유를 나에게서 찾는 것이 무모하고 어리석은 일이 되고, 억지로 찾으려 한들, ‘하나님을 대적하려고’라는 죽어 마땅한 이유를 예로 드는 쓸데없는 일이 된다. 가만히 있어도 그냥 거기 얼쩡거렸다는 그 자체가 저주받을 이유가 되어야 하는 지경에 던져졌을 때, 비로소 죽고 싶다는 마귀의 자존심이, 살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로 뭉개져 버리는 사건들에 감사가 나오는 것이다.

지금도 은혜로 살려내시는 주님이, 그분을 위해 쓰시려고 살렸다는 말씀이, 이 죄 덩어리를 쓰시는 예수님이라는 분이 들을수록 기이하고, 사용 용도가 다 하면 흔적 없이 처리해 주실 날을 기다리고, 주께서 임하시는 그날을 고대하지 않을 수 없다. 배제의 사건은 역할을 맡았다고, 주께 쓰임 받았다고 자신을 천국 백성으로 생각하는 망상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 세상에서 자기를 위해 숨 쉬지 않는 것은 자기 힘으로는 불가능하고, 그래서 이미 지옥이기에, 그 지옥에서 쓰시는 분의 이용으로 말미암아 ‘자기를 위해서’라는 올무에서 잠시 건져졌다면, 지옥에서 혀를 서늘하게 해 주시는 주의 자비하심에 감사할 수밖에 없다.

말씀을 우리가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안다고 한들, 율법 구조 안에 갇혔으니, 율법의 요구를 이루려는 부추김에 쫓기며 육체에 발작이 일어난다. 죄의 종인 육체가 사망이 왕 노릇하는 호령을 어찌 버텨낼까. 그러나 이 연약한 육체가 하지 못하는 그것을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신 한 분, 예수님의 피가 마음에 팥앙금처럼 삽입되면, 그분이 완성하신 율법의 요구가 스스로 활동하신다. “얼쩡대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데 그게 그렇게 어렵나?” 그게 참 어렵다. 다 이루어 놓고, 요구의 추궁이 오는 건데, 지키려고 해도 지킬 것이 없는 추궁에 왜 감사하지 못하고 벌벌 하는지. 도대체 누구를 보고 있는 건지.

딸의 공부를 봐주는 동생이 물었다. ‘언니, 성령이 뭐야?’ 교회를 다니고 있지 않은 동생의 본론적인 질문에 주춤했다. 그러나 그 질문이 누군가의 질문이 아니었고, 누군가가 답할 일도 아니었음이 금방 들통났다. 잠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그분이 이 땅을 다녀가신 여정과 아버지의 마음인 성령에 담겨있던 뜻을 이루시기까지 십자가로 이끌려 가신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언니, 내가 아는 예수님은 자기의 백성을 살리기 위해, 굳이 그 길로 가지 않을 선택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희생의 길을 스스로 택하신 숭고한 어떤 분이라고 알고 있었어. 예수님이 희생하신 건, 그분의 의지이고 그분의 결정 아닌가?’

예수님에게 아버지의 성령이 비둘기처럼 오셨을 때, 예수님은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아버지의 의지에 예수님의 몸을 넘겨드리고, 십자가까지 무사히 갈 수 있도록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자기의 뜻을 넘겨드렸구나. 성령은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개념을, 선택이라는 개념을 묵살해주시며, 한 분만 가리키도록 방향을, 길을 만드시는 영이심을 다시금 깨닫는다. 내 의지, 내 뜻이 도사리는 어둠 속에서.

롯의 처는 뒤를 돌아봤는데, 롯과 딸들은 왜 뒤돌아보지 않았지? “뒤돌아보지 말라”는 금지가 왔는데, 어떻게 돌아보지 않을 수 있지? 결국 육체는 “뒤돌아보지 말라”는 말씀 앞에, 모두 뒤돌아봐야 하고, 말씀과 분리될 때를 만나게 된다고 하신다. 말씀의 응하는 순서는 말씀의 주인이 정하시는 것이고, 때가 되지 않았으면 아직은, 눈 가리고 귀를 막고 기억이 나지 않게 해서 뒤돌아볼 수 없게 하신 것이다. 때가 되면, 모르게 하셨던 것을 알게 하시며, 말씀에서 배제해 주시고 탈락시켜 주신다. 이 세상에서 인간 피조물이 보여야 할 일은 금지를 어기는 일뿐이다.

금지를 금지하시며, 바위틈에 숨겨 보이지 않게 완전히 막아주실 수 있는 것은 오직 십자가에서 함께 죽도록 허락하시는 예수님의 선택뿐이고 그 사랑 안에 있는 자들은 어떤 율법도 어기려야 결코 어길 수 없는 십자가의 완성 안에 철벽 봉쇄된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다.

 

댓글

임청일 주님의 신부로서의 성도에 대한 어떠한 표현도 과연 적합하다고 할 수 있을까? 지옥 속에서의 삶일진대 주님이 인정하시는 감사의 순간이 주어진다는 사실만이 유일한 우리의 소망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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