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선

겨울수련회를 다녀와서

아빠와 함께 2026. 1. 16. 21:25

나타난 천국

어디서들 와서, 이 황량한 강당에 모여있을까. 화려하고 유용한 정보나 교양 지식 그리고 귀에 쏙쏙 들리는 감칠맛 나는 성경 말씀까지, 그런 것은 유튜브나 인공지능 왕궁에 있는데. 그러면 무엇을 보려고 이곳에 왔을까.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에서 나는 세미한 소리, 눈에 보여도 너무 하찮아서 들리지 않는 소리, 선지자의 소리에 이끌려 모두들 광야 강당에 앉아 있다.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그 소리에 자신을 갈아 넣듯 허비하며 말씀의 바람에 함께 흔들린다. 절취된 강퍅함, 속이 썩어 문드러질 정도로 적채된 원망이 대풍에 선 실과가 떨어지듯 털리고, 복음에 마음을 두고 있다는 말이 무색해지면서 부정성이 노골화된다.

‘나는 권력과 돈이 너무 좋아. 망할 때 망하더라도 실컷 맛보고 싶다’라는 말을 이태원도 아니고 화려한 라스베가스도 아닌, 푸석푸석한 흙먼지 그득한 광야에서 꺼낸다. 얼마나 자기 안에 있는 마음이 자기 꺼가 아니면,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되도록 떠밀려 왔을까. 무리가 모인 그곳은 인간의 욕망에 합당한 장소가 아닌 비(非)장소이기에, 왕궁이 아닌 광야이기에, 세상에서의 당연함이 이곳에서는 부정성으로 노출된다. 모여있는 적은 무리가 사람이 아닌 바닷물 같고, 잠시 보이나 다시 없어질 안개 같다. 말씀의 응함을 보여줄 비유들이고 모형들이다.

가짜 삯꾼 목자도 가짜 복음을 경계하라고 외친다. ‘이것이 가짜 교회이고, 가짜 목사이고, 가짜 복음이고...’ 그러나 그들은 가짜 인간을 말하지 않는다. ‘인간’이라는 보편적 언어에 자신이 자동으로 포함되기 때문에. 사람 또는 인간이라는 말은 그 말을 뱉고 있는 자신도 발 빼지 못하는 표현이고, 모두가 내부에서부터 밀어내고 싶은 말이다. 인간 스스로는 부정성을 감지하기가 불가능하기에, 이 세상에 천국 갈 길이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천국이 친히 오셨다.

어느 때나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수련회를 다녀와서 강의가 이러이러하다는 것을 쓰는 역할이 아니라, (말씀은 주님의 각 지체에 주께서 쓰실 분량만큼 채우실 것이고), 미처 참여하지 못한 분들뿐만 아니라 참여하신 분들과 함께 말씀이 떨어지는 현장에 있을 때만 감지되는 말씀의 흐름과 말씀으로 말미암아 속에서 작동된 것들을 글로 나누는 역할이다. 말씀이 뿌려지고 있는 곳에서 바둑판 위에 돌들이 말씀의 손에 의해서 움직이고, 소리를 내뱉게 되는 그 현장을 함께 하고 싶은 것이다.

유튜브 동영상을 보는 것과 수련회에 참석해서 말씀을 듣는 것의 차이는 현장성이다. 현장성은 내가 앉아서 말씀을 듣는다는 개념을 거부한다. 생생하게 말씀이 울리고 있는 곳에 앉아 있지만, 듣지 못하는 작용이 현실감 있게 드러난다. 세상을 꽉 채운 복음을 향한 부정성의 아우라가 강의실까지 가득 채운 채로, 듣는 말씀이 떨어지는 마음 밭에 주님의 편지가 쓰인다. 어떤 밭은 마귀가 즉시 말씀의 씨앗을 주워가고, 어떤 밭은 환란을 받고 넘어지고, 어떤 밭은 잘 심기긴 했으나 씨앗이 썩지 못하고 그대로 자신에게 소유되어 결실하지 못하고, 어떤 밭은 듣고 깨달아 결실한다.

여기에서 결실하는 밭은 듣고 깨달아야만 나타나는 천국과 같은 곳이기에 없는 밭이다. 현장에서 드러나는 현실은 ‘나’라는 자아로 말미암아 마귀에게 빼앗기고, 환란을 받고, 유혹에 넘어가는 부정성이 쏟아져나오기에 보배처럼 귀한 말씀이 만신창이로 허비되는 것을 보여야 할 세 종류의 밭뿐이다. 그래서 사도는 쉬지말고 기뻐하고 감사하라고 한다. 우리 인간의 육은 말씀 결실을 하지 못하는 부정성밖에 없는데, 유일하게 아버지를 알고, 그의 뜻과 말씀을 알고 깨닫는 옥토로 오신 예수그리스도의 결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자아가 사망선고를 받은 육체에 채워진다.

‘저 사람은 왜 성도의 칼럼에 직접 글을 올리지 않고 게시판에 올려서 관리자를 번거롭게 만들었는가. 저 자는 십자가 마을이 실체인 줄 알았던가?’ 그렇다. 십자가 마을과의 첫 만남은 이전 교회에서 퇴출 되는, 가족에게서 분리되는 아픔을 능가할 정도로 설렜고, 복음으로 가득 찬 실체라 여겼고, 겸손히 주제 파악해야 하는 율법이 작동하는 현실 그 자체였다. 십자가 마을이나 나나 다른 모든 사람이 비유이고 은유이고 환상이라는 이론은 장착되어 있었으나, 믿지는 못했다. 내가 가짜 인간인 것을 알아도 믿지 못했기에 마주치는 현장과 사람들은 늘 실체였다. 그 정도로 나는 나를 믿었다.

복음을 듣고, 복음으로 형성한, 복음만 있는 작은 우물 안에서, 육적 이야기들은 신기하게 잘 잊히고 들리는 말씀만 생생하게 기억났다. 말씀을 들으면 누구나 겪는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기에, 진짜 말씀의 주인이 손으로 눈을 가려주고 바위틈에 숨기시어 아무것도 모르게 하시는 은혜는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도리어 그 손을 치우시는 사건이 닥칠 때, 지금껏 주님의 숨겨주신 은혜를 고마워하는 게 아니라, 적반하장으로 왜 나를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로 만들었느냐는 원망이 터져 나왔다. 머리 검은 짐승은 집안에 들이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만들어 낸 복음의 우물 안에서 나오지 않으려고 몸부림쳤다. 나의 복음을 향한 믿음을 깨려거든 차라리 죽이라고 부르짖고 싶었는데, 예상치 않은 엉뚱한 말이 내뱉어졌다.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다 거짓이었어? 이 세상에는 복음이라는 것은 없구나. 믿음도 없구나. 속았다’

복음만 보이게 만들어놓은 나만의 인위적 세상에 락 걸린 채 갇혀 있었고, 그래서 우물 밖에 어마어마한 육의 세계가 느껴지지 않았다. 우물 안에서 세상을 보듯이 복음에 갇혀 하늘만 쳐다보며 말씀을 들었다. 이걸 누군가는 이렇게 표현한다. ‘종교성 개쩐다’ 때가 되매, 가둬놓으신 주께서 친히 사건을 일으켜 락을 풀었을 때, 밖으로 나온 자는 고마워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워한다. 밖으로 나온다는 것은 갇혀 있던 안쪽이 모두 거짓임이 들통나기에, 그 안쪽이 전부였던 내가 거짓이 되고, 그러면 내가 없어진다는 두려움으로 꺼내시는 분을 공격한다.

순식간에 밀려오는 상실감에 온몸이 떨렸다. 철저하게 나를 믿는 증상이 최후 발악을 한다. 눈이 빠질 정도로 나를 위해 울면서, 원망과 분노로 소리 지른다. 속았다는 것을 자신이 자신에게 들키지 않게 해야 하기에, 락이 풀리는 별것도 아닌 작은 사건 하나 때문에 나의 역사가 송두리째 거짓으로 바뀌지 못하도록, 필사적으로 말씀을 붙들고 자신의 의를 지켜야 한다.

그간에 나를 지지해 준 성경 이론들이 아무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이제 보이지 않는 말씀의 흐름 따위는 다 구라이고, 보이는 건 말씀을 내뱉은 사람뿐이다. 그 사람이 밉고, 원망스럽다. ‘나를 바보 등신으로 만들다니...’ 내가 사람인 이상, 말씀이 나를 공격한다는 생각은 불가능하고, 말씀이 나오고 있는 사람이 미워진다. 이유 없이 미워지니 뭐라도 근거를 만들어서 합당하게 미워하고 싶어진다.

‘내가 화가 날 만한 이유가 있는데, 저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즉, 나를)을 모독하는 말을 한다. 나사렛 예수가 교회(나의 신앙)를 헐어버리라고 했다. 모세의 율법을 자기 맘대로 고쳤다’ 오히려 율법과 상관없는 이방인들은 찾지 못하는 죄를, 하나님을 알고 율법을 받은 자들은 어찌 그리도 명확하게 잘 찾아내는지. 그것도 대충 때리고 보내는 죄가 아니라, 예수가 죽을 죄를 귀신같이 찾아낸다.

사람으로 사람을 상대하는 것, 피조물이 말씀을 위한 비유인 줄, 모형인 줄 알지 못하는 이 육의 세계, 이곳이 소돔이고 애굽이며, 이곳이 원래 나의 자리다. 이 세상의 신 마귀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가. 갇혀 있음을 비추는 빛이 조금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철저히 차단하는 능력, 혹시 틈새로 복음의 광채가 삐져 들어오려고 하면, 주변 사람들을 대동해 마음을 혼미하게 만들어놓는 지략, 뱀처럼 지혜로운 마귀야, 네가 이겼다. 그냥 네 맘대로 해라.

곤고함의 탄식이 절로 나오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누가 두려워하고 있는가. 도대체 누가 거짓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이렇게 죄책감을 일으키도록 정죄하는가. 도대체 누가 원래부터 없었던 ‘나’라는 허상이 없어진다고, 죽는다고 겁박하고 있는가. 분명히 그 누군가가 예수님은 아닌데, ‘나’라는 허상은 왜 예수님을 공격하는가. “내가 아니라 죄로다” 참으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감사하리로다. 내가 예수님을 보면, 예수님 안에 하나님을 보면 반드시 공격하고 싶어 하는 ‘죄’인 것을 주로 말미암아 발각되게 해주시는 은혜는 측량 불가, 예측 불가이다. 불가하다는 것을 알리시는 주님의 작업은 배제이다. “너, 빠져!”

말씀은 철저히 나를 ‘버리운 자’로 만드시고, 육의 세계에 내팽개치신다. “그게 너의 처음 자리야. 너를 잃어버렸던 어두운 자리. 어디서 날파리처럼 빛 쪽으로 스스로 날아 들어와. 학! 씨!” 실체도 아닌 비유 주제에. 내가 잃어버린 나를 찾으려고, 진리를 찾으려고 빛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원래 자리로 되돌림을 당하는 그것을 회개라고 한다. 회개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버려주실 때, 나의 외침이 아닌, 유일하게 아버지에게 버림받으신 분의 대신 외쳐주심으로 소리를 발한다.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예수님이 외치신 버려주시는 아버지가, 너의 아버지가 되는 새로운 탄생은 예수님의 죽음 속에서, 그분의 핏속에서 나온다. “네가 말씀을 듣고 깨달아 돌이키고 고침을 받을 일은 없다. 그냥 그 어두운 바벨론에 있어. 성한 곳이 없는 오염되고 후패한 네 사망의 몸 안으로 내가 찾아갈게. 함께 있을게. 이제 너는 살 필요 없어. 내가 살아 있을게”

주께서 더 이상 나 자신을 의뢰하지 못하게 하시는 배제 작업을 말씀은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4:6)라고 전해주신다. 이 은혜가 임한 증상은 죄의 권세에 심히 휘둘리는 것이다. 사방으로 우겨싸이고, 답답한 일을 당하고, 핍박을 받고, 거꾸러뜨림을 당한다. 이로 인해 십자가가 안에서 반복 재생된다.

믿음 없는 모습으로 연출되는 모든 사건, 사람이 실체가 되면서 말씀이 버려지고 짓밟히는 사건, 서로 미워하고 원망하는 사건, 속사람으로는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내 지체 속에 죄의 법이 나를 지배하는 사건, 결국 주의 영이 임한 형제를 미워하며 형제를 죽이는 사건(요일3:15), 그렇게 형제라는 비유 안에 실체로 계신 예수님을 죽인 사건을 반복시키신다. 이 세상이 지옥임을, 이미 심판 아래 있음을 사건으로 나타내게 하신다. “싸이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버린 바 되지 않고, 망하지 않는”다는(고후4:8~9) 결과는 비유의 것이 아니다.

이 사망의 몸을 사망의 몸답게 만들어주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된 자들은 한결같이 대답한다. ‘Yes!!’ 형제를 미워해야 할 역할 해라! ‘Yes!’ 형제에게 미움 실컷 당하면서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일이 너의 역할이다! ‘Yes!’ 내 지체에 거하는 죄는 언제나, ‘싫어요, 안 해요, 내가 미쳤어요?’라는 외침뿐인데, 주님의 만들어 내신 결과는 언제나 ‘Yes!’다.

사도는 자신을 강도의 위협에서, 바다의 위협에서, 매 맞는 상황에서, 굶주리고 몸이 아픈 상황에서 구해달라고 세 번 기도하지 않았다. ‘저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있어요. 형제를 미워하고 싶지 않아요. 형제가 저를 미워하게 되어서 복음이 막힐까 두려워요. 사단의 가시를 좀 빼주세요’라는 간구에 하나님이 이르시길, “너는 비유다. 실체인 내 능력이 이미 네 안에서 온전하게 다 이루었다”라고 확언하신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매, 사단이 주는 두려움이 나를 다시 상기시키지 못하고, 온전히 주께 맡겨진 지체가 예수의 생명으로 움직인다. 그 움직이 만들어내는 소리가 그리스도의 다른 지체들을 찾아가 마음에 주님의 언어를 전달하고, 기억나게 하시고, 작동하게 하신다. 말씀만 움직이고 있는 이 세상은 이미 예수님의 커다란 빈 무덤이다. 그분이 여기 계시지 않음을, 그 기쁜 소식을 이미 침몰한 타이타닉호에서 외치게 하시는 이것이 주님께서 주신 최고의 선물이다.

글을 게시판에 올리건 성도의 칼럼에 올리건 그런 아무런 의미 없다. 다만, 성도의 칼럼에 흐름은 둔하고, 게시판의 흐름은 빨라서, 신속히 날아가서 빠르게 흔적이 없어지는 게시판이 성질에 딱 맞아 좋은 것 같다.

 

 

댓글

공은주  왜 그렇게 분노하고 원망하고 발악하면서 이유없이 미워하면서 미워할 꺼리까지 찾나요?  왜 그렇게 어렵게 사시나요. "나는 거짓이다!"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다! 하면 될 걸.  너무 쉬운데요.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이런 분이 계신데요. 감사하잖아요. 신나잖아요. 이런 말씀을 전해주니 그 발이 아름답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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