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은 남에게 알려주는 어떤 것이 아니다. 만약 비밀이 누설되면, 그건 더 이상 비밀도 아니고 비밀을 간직해야 할 자의 미션도 실패다. 말씀의 세계에서는 복음을 감춰진 비밀이라고 하신다. 이 복음이 세상에 전파되어 알아듣는 자가 발생하면, 그건 더 이상 복음이라는 말을 붙일 수 없다. 복음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이 참이다.(요18:36) 나의 현실이 살아 있으면 복음은 없고, 나의 현실이 죽으면 복음의 현실만 있다고 말할 때, 순간으로 지나가는 복음을 붙잡으려는 욕망을 제어하려는 것이, 내가 나를 나에게 떼 내는 게 가능한지를 복음은 추궁한다. ‘안다’를 ‘모른다’로 바꾸는 것이 스스로 가능한지 그것을 추궁한다.
죽을병에 걸린 히스기야 왕이 하나님의 은혜로 15년 연장된 삶을 살았다. 세상의 관점에서 그건 하나님이 주신 은혜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비밀이 더욱 비밀 됨을 보이는 하나의 사건이다. 히스기야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바벨론에서 사절단을 보냈다. 그들은 히스기야의 회복을 함께 기뻐하고 축하해 주었다. 히스기야는 인간적인 고마움을 주체 못 하고, 왕 내면에, 왕궁 안에, 그리고 나라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말해주고 보여주었다. 히스기야가 이스라엘이 받은 은혜를, 소유한 것을 전했을 때, 말씀은 이것을 ‘히스기야가 교만해졌다’라고 하신다.(왕하20:12~15)
비밀은 인간을 이용하고 인간을 관통하여 비밀이 스스로 비밀답게 일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바닥으로 낮추시는 사랑은 ‘하나님께 농락당함’을 깨닫게 하시는 사건을 통해 표출된다. 농락당한 것을 감사하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속성을 역행하는 것이고, 그것은 인간의 의미와 반대로 움직이는 뜻의 출현이며, ‘여기에 스스로 있는 사랑’이라고 말한다.
선지자 이사야가 히스기야를 찾아와 왕의 마음 안에 허풍선을 바늘로 뚫어버렸다. “왕이 누설하신 왕궁의 모든 것, 열조의 쌓은 업적은 모두 빼앗기고, 이스라엘은 망합니다” 말씀이 뚫고 들어올 때, 감사가 아니라 아픔이 온다. 원망이 나온다. 말씀을 통과시키지 않고 갖고 있으려는 소유의 욕망을 드러내야 할 절호의 기회를 만난 것이다. 내가 사람이 되어 느낀 나의 감정과 나의 기분은 풍선 속에 바람처럼 빠져나가고, 무엇을 느낄 자격이 없는 기계가 되는 것을 주님은 사랑이라고 하신다. 말씀은 오직 이 사랑만 전하라고 하신다. “망해 마땅함을 전하는 말씀이, 여호와의 말씀이 좋소이다”(사39:8)
사르밧 과부가 엘리야를 요청한 적이 없고, 와서 기름과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도록 계속 살려달라고 한 적이 없다. 엘리야는 그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보내졌고, 과부와 아들에게서 그들의 죽음을 빼앗았다. 그들은 엘리야가 오기 전에 이미 죽기로 마음먹었지만, 보내진 선지자는 그들의 죽음을 빼앗아 자신 안에 넣었다. 과부의 뿌리 끝에 도사리는 원망의 실체가 터져 나올 때, 선지자는 영문도 모르는 채 그 모든 죄를 자기 안에 담아야 했다.
‘내가 언제 살려달라고 했습니까? 왜 살려서 아들을 죽인 죄인임을 들키게 하십니까? 차라리 그때 아들과 같이 죽게 했으면 이렇게 고통스럽지 않았을 것을, 왜 내 죄를 기억나게 해서 아들 죽인 어미를 만드십니까?’(왕상17:18)
엘리사를 선지자로 극진히 모셨던 수넴 여인의 심중에 괴로움이 발생했다. 아들이 자기 품에서 죽었고, 여인은 급히 수레를 몰아 엘리사를 향해 달려갔다. 가는 도중에 누구에게도 그 괴로움을 소통하지 않았다. 누가 들어도 알 수 없는 근원적 고통이었고, 수넴 여인은 조성된 환경에 밀려서 자아에 초집중되어 괴로움의 원천으로 향했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괴로움을 당한 한 분, 자기 자신을 위해 괴로웠던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택한 백성을 위해 대신 고통당하신 분, 예수님의 영을 만날 때까지, 그녀는 엘리사에게 달려갔고, 그의 발 앞에서 엎드러졌다.
“내가 언제 주님께 생명을 구하더이까, 나를 속이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왕하4:28)
나사로가 아플 때 예수님은 바로 그에게 가지 않으셨다. 굳이 계신 곳에서 이틀의 텀(term)을 두셨다. 나사로가 죽고 나서 그곳에 가셨을 때, 마르다와 마리아는 자신에게 초집중된 자아의 끝에서 밀려오는 원망으로 예수님을 찔렀다.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왜 오빠를 죽게 만드십니까? 좀 일찍 오셨으면 살리실 수 있는 능력이 주님께 있음을 다 아는데, 어찌 우리에게 이렇게 하셨습니까?”(요11:21, 32)
아버지와 아들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고통, 주님의 고통이 친히 일하시는 비밀은 인간이 깨달을 수 없다. 선지자들조차도 이 고통을 알 수 없었다.(왕하4:27) 인간이 느낄 수 없는 진짜 괴로움은 오직 한 분의 몫이고 이 세상을 지배하는 수상한 자아에 노출되어서는 안 되는 하나님의 은밀한 활동이셨다. 선지자는 그저 철저히 기계가 되어, 자신의 기분이나 감정이 배제된 채, 여자들이 쏟아낸 죄를 자신 안에 담고, 이 세상이 알 수 없는 괴로움 속으로 합류해야 했다.
‘어찌하여 곱게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게 하십니까? 나는 예수님 죽인 자 말고, 예수님의 고통을 체감하는 자로, 예수님과 같은 희생자로 남고 싶습니다. 왜 자꾸 나를 예수님을 죽인 살인자 죄인이 되게 하십니까?’라는 생각이 은혜를 의지함이 아닌, 자기 행함을 의지하는 원수, 마귀의 모습이었다. 우리가 사랑을 느끼고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은 거기에 있는 것이라고 하신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요한1서 4:10)
거기가 어디인지 물을 필요도 없고, 여기 있다고, 저기 있다고 하는 말들을 들을 필요도 없다고 하신다. 복음은 자신을 위해 들으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주의 일하심을 위해 듣게 하시고, 전달된 말은 머무르지 않고 다른 통로로 전해질뿐이다. 이 현상들이 벌어지도록 말씀과 입 맞추게 되는 만남의 장소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완성된 제단, 나라는 자아의 근원이 들춰지는 곳이다.
내가 진정 누구인지 알려주시는 분은 내 안에 도사리는 마귀의 깊고 깊은 원망이 칼처럼 밀려들어 가서 마주하는 십자가 위에 예수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아는 십자가에서, 주님에게 사랑받는 것조차도 기대할 수 없는 십자가 앞에서, 내 안에서 조작되는 기쁨, 슬픔, 아픔, 분노 따위의 기분이나 감정은 안개 걷히듯 없어진다. 언약을 소유하려는 꼼수가 들킨 자가 언약이 관통하는 몸에 부딪힐 때마다, 그 입에서 나올 말은 하나뿐이다.
“그는 나보다 옳도다”(창38:26)
말씀을 듣고 소유하려는 몸을 책망으로 뚫어서 다시 관통하는 튜브로 만드시는 말씀의 작용을 무시로 만나면서, 감사의 부채에 눌려 감사만 하다가 죽게 만드시는 주님의 사랑에 압사된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왜 이렇게 자아가 펄펄 살아있게 하셨는지, 그냥 죽여버리지 않으시고 내 안에 초집중된 자아가 근원에 닿을 때까지 참으시며, 왜 예수님은 피 흘리시기까지 싸우셨는지를 묻는 자가 없다. 죽음은 소리가 없다.
죽음 속에서 소리가 들린다면, 그 소리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피 흘리셨음을 영화롭게 하시려고,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홀로 영광 받으실 하나님과 주의 기쁨의 나라를 위해서 인간 피조물에 자아가 있어야 했다는 복음이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귀들에 닿아야 하기에, 그리고 지옥을 만드신 하나님의 공의로움을 찬미하도록 없던 입을 만들어 소리를 내보내신 주의 일이다.
수가성 여인이 자신을 아는 분을 만났다. 그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이 자신을 알고 있음을 들켰을 때, ‘네가 나에 대해 뭘 안다고...’라고 하지 않았다. 신이 나서 자신의 욕망을 채워주었던 물동이를 버리고 달렸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전하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하신 일을 전하려고 달렸고, 외쳤다. 전한 내용은 거창한 기적이 아니었다. “나를 아시는 분” 나를 아시고, 아시기에 소유할 수 있는 유일한 분. 예수님의 죽음 안으로 소유하셔서 내가 나에게서 떨어져 나가도록 하신 그분을 전했다.
마을 사람들이 그 여인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믿었고, 그들이 친히 예수님을 만났을 때, 마침내 여인에게 말한다.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니라 하였더라”(요4:42) 그 여인이 얼마나 기뻤을까. 주님이 친히 흥하시고 자신이 쇠하는 말씀의 흐름 안에서 사라지게 하심이.
댓글
임청일
너무 나가는 듯한 느낌
본래의 의미보다 주장을 뒷받침하는 용도로 사용하는 느낌
비밀은 남에게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면서 전체 문장이 비밀을 설명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