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비워진 기쁨

아빠와 함께 2026. 1. 13. 18:02

비워진 기쁨 

2026년 1월 11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애가 1:17-20

1:17 시온이 두손을 폈으나 위로할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사면에 있는 자를 명하여 야곱의 대적이 되게 하셨으니 예루살렘은 저희 가운데 불결한 자 같도다
1:18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였도다 너희 모든 백성들아 내 말을 듣고 내 근심을 볼지어다 나의 처녀와 소년들이 사로잡혀 갔도다
1:19 내가 내 사랑하는 자를 불렀으나 저희가 나를 속였으며 나의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소성시킬 식물을 구하다가 성중에서 기절하였도다
1:20 여호와여 돌아보옵소서 내가 환난 중에서 마음이 괴롭고 마음이 번뇌하오니 나의 패역이 심히 큼이니이다 밖으로는 칼의 살륙이 있고 집에는 사망 같은 것이 있나이다

이 본문은 구약에 주어졌습니다. 예레미야와 그 당시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미래에 답답해 합니다. 예루살렘이 불태워지면서 거의 절망적입니다. 성전이 불태워진 것은 하나님의 의도하심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좌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좌절마저 하나님의 스케줄에 들어 있는 바입니다.

과연 인간은 미래를 굳이 알아야 합니까? 오늘 본문에서 ‘시온이 두손을 폈으나 위로할 자가 없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미래를 당겨 알므로서 그만큼 위로가 된다고 여기는 것은 인간들의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미래를 미리 안다고 해서 위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이쯤에서 미래를 끊자고 나오십니다.

예레미야 당시나 지금의 인간들이나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어져야 하는 바를 오늘 본문을 통해서 말해주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왜 인간은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알지 말아야 할까요? 요한복음 14:12-13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지금 예수님은 제자들을 떠나고자 하십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외롭게 지상에 남겨져 있습니다. 절망적이면서도 인간적으로 좌절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없는 환경’에서 자신이 뭘해야 하는지 난감하기 짝이 없을 겁니다. 예수님 안 계신 환경 속에서도 주님의 일은 멈춤이 없습니다. 그 일이란 바로 ‘이름을 바꾸는 일’입니다.

보통 부동산 계약할 때, 그 부동산을 구입해서 살 사람이 최종 사인을 합니다. 자기 이름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제부터는 그러지 말라는 겁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사인이 되는 일들이 일어나고 주어진다는 겁니다. 이 이름 교체를 위해서 그동안 자신을 위해 살던 자신의 몸은 주님을 위한 몸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절망하거나 낙담하거나 좌절할 하등의 이유가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 게 아예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각종 상품으로 꽉차 있었던 편이점이 계약이 종료되어 문을 닫았습니다. 간판도 비품이고 모두 날아가 버렸습니다. 유리창 너머로 편이점 내부가 투명하게 훤히 다 비칩니다.

‘앙상한 모습’을 보입니다. 우리 성도도 이러해야 한다는 겁니다. 남들에게 내어놓은 게 아무 것도 없어야 합니다. 내 이름으로 자랑할 게 뭔가 들어 있으면 안됩니다. 그 이유는 바로 ‘주님의 이름’ 곧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억울하게 ‘희생당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주님의 희생을 노리고 덤벼들면 안 됩니다.

즉 “고생은 주님이 하세요. 우리는 스승님의 덕만 고맙게 여기며 내 것 속에 채우겠습니다”는 식으로 예수님을 대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여전히 ‘나의 이름’으로 불리워지는 것이 계속해서 발휘되고 있고 ‘그 나’를 ‘내 것’이라 간주하고 싶은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억울하게 이 세상 권력에 희생당하시는 경우를 십자가에서 임무 완수하시기 전부터 찾으셨습니다.

그것이 마가복음 12:40-44에 나옵니다.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연보 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 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 성전 앞에 연보궤를 설치해서 돈을 모은 자들은 그당시 이스라엘 당국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과 성전 짓는 것을 빌미로 과부의 재산을 유인했던 자들입니다. 여기에 어떤 과부로 낚인 겁니다. 그만큼 세상 권력에 의해 희생당한 겁니다. 즉 예수님의 뜻은, 구원이란 자신이 바르게 살아서 성사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희생당한 절차를 통해서 이루어진 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당하셨던 그 억울한 일에 ‘예수님의 이름’에 의해서 당하는 자들도 동일하게 발생되는데 그들은 더는 이 세상에서 위로를 구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하나님께서 제자들에게 제공하시는 것은 위로가 아닙니다. 평안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 16:33)

즉 환란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것이 ‘주의 이름’으로 소유권이 바꿔버린 천국 백성의 운명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 땅에서 본인이 책임져야 될 일도 없고 본인이 위로받을 일도 없습니다. 주님이 걸어가신 코스대로 움직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만드신 겁니까?

그 이유는 야고보서 4:13-16에 나와 있습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즉 인간들이 그냥 물방울에 지나지 않습니다. 잠시 사람 형체를 보이는 것은 죄악을 저지르기 위함입니다. 무슨 죄악말입니까? “나는 내 것이며 나는 그것으로 나의 이름의 명예와 자랑거리를 외부로 나타내기 위해서 나는 존재한다”는 죄 말입니다. 이런 소망은 예수님의 재림을 통해서 거부당하게 됩니다.

“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살전 4:13-14) 위로받지 마시고 평온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더는 나 자신을 뽐내기 위해 살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강-예레미야애가 1장 17~20절(비워진 기쁨)260111-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애가 1장 17~20절입니다. 구약성경 1144페이지입니다.

“시온이 두 손을 폈으나 위로할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사면에 있는 자를 명하여 야곱의 대적이 되게 하셨으니 예루살렘은 저희 가운데 불결한 자 같도다,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였도다 너희 모든 백성들아 내 말을 듣고 내 근심을 볼찌어다 나의 처녀와 소년들이 사로잡혀 갔도다, 내가 내 사랑하는 자를 불렀으나 저희가 나를 속였으며 나의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소성시킬 식물을 구하다가 성중에서 기절하였도다, 여호와여 돌아보옵소서 내가 환난 중에서 마음이 괴롭고 마음이 번뇌하오니 나의 패역이 심히 큼이니이다 밖으로는 칼의 살륙이 있고 집에는 사망 같은 것이 있나이다” 아멘.

하나님과 함께 했을 때 일어나는 현장성. 현장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이 조성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에 입각해서, 하나님의 계획, 스케줄에 입각해서, 지금 우리는 2026년도의 현장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 현장 속에서 내가 뭘 할 것인가 하는 그런 생각은 반칙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내가 뭘 할 것이냐 하는 그런 것은 솔직하지 못한 태도예요.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면, ‘이 현장에서 나는 어떻게 위로를 받을 것인가’라는 그게 솔직한 우리의 마음 자세죠.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오늘 성경 본문이 복음입니다. “위로할 필요가 없다. 위로할 자가 없다” 그러니까 너는 위로를 원하고, 하나님께서는 “위로할 자가 없다”를 위한 현장성을 우리에게 제공한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위로할 것이 없으면, 우리는 불행하지 않을까, 사는 게 힘들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근데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과 복음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왜 위로할 자 없는 게 복음이 되는지를, 여러분들은 아셔야 합니다.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2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안 되죠. “너희도 큰 일을 한다. 근데 나는 지금 빠진다. 난 아버지께로 간다. 너희만 남겨둔다”라는 이게, 지금 그 이야기 앞뒤가, 예수님의 이야기가 영 연결이 안 돼요. 그 뒤에 연결되는 것이 있어요. 13절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성경 말씀이 한국말로 돼 있어요. 방금 14장 12절과 13절을 읽었습니다. 읽었는데 이게 무슨 뜻인지가 와닿지를 않는데, 여기 예레미야애가 오늘 본문 1장 17절에 “두 손을 폈으나 위로할 자가 없도다” 이거는 이해가 되지요. 살다 보면 힘들 때 ‘주님 좀 위로해 주세요’ 정말 위로할 자가 없어서 위로를 요청합니다. ‘사랑의 하나님, 저를 위로해 주세요’

그런데 예레미야의 예언에 의하면 위로를 원하지만, 위로할 하나님도 없고, 위로할 자도 너한테는 허락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렇게 절망적으로 몰아세우는 겁니다. 이렇게 압박을 가하는 거죠. 우리들의 요구 사항에 압박을 가하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마귀가 자꾸 위로해 주지, 인간은 위로 같은 거 없어요. 그냥 압박해 주는 거예요.

압박하는 이유가 방금 요한복음 14장 12~13절을 가지고 제가 연결해 보는 겁니다. 왜 우리는 위로받지 않아야 되는가? 이게 사인(signature)이 내 사인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분 집 계약할 때 사인하잖아요. 사인한다는 것은 이게 내 것으로 돌아오는 내 위로, 내 소유, 내 부동산, 집 살 때, 내가 사인하는 것은 내가 살 집이기 때문에 내가 사인하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사인하는 내 손모가지를 꺾어버린다니까요. 오늘 오전에 이야기했잖아. 내 모가지를 쳐버린다는 거. 정과 욕심으로 들끓고 있는 내 모가지를 쳐버린다고요. 이차돈( 신라 법흥왕(法興王)의 근신이자 불교 순교자)인지 뭔지 모르지만, 모가지를 쳐버리면 거기서 피가, 십자가의 피가 나옵니다. 이름, 내 이름으로 살았던 내 인생의 사인을 주께서는 지워버려요.

지워버리고, 위로를 받든 뭘 하든 간에 이제는 네가 너한테서 손을 떼라는 이 말이죠. 예레미야애가의 이야기는 슬픈 이야기죠. 예레미야의 슬픈 이야기로 제목은 그런데, 이제는 그만, 이제는 그만해라. 네 인생 가꾸기는 그만해라. 네 손 좀 떼면 안 될까? 네가 백날 해봐야, 네가 너한테 너의 몸체가 하나의 부동산이 되고 마는 거예요. 내 거다. 내 부동산이다.

그러면 가장 기본적인 거, 누구나 아는 거,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해당이 안 돼요. 그 사람한테는 해당이 안 돼요. 내 이름이 멀쩡한데, 내 사인으로, 내 이름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는데, 이게 갑자기 주님께서 치고 들어와요. “너는 너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자, 나는 그런 인간을 천국에서 못 받아주겠다” 요한복음 14장 다시 얘기할게요.

“내가 떠나간다. 너를 놔두고 떠나간다” 그러면 그들은 ‘주님 떠나버리면, 우리는 멀뚱하니 뭐 합니까?’ “내가 와서, 이제부터는 그동안, 네 이름으로 너를 위해서 살았던 인생을 내 이름으로 다룰 거야” 이름 자체가, 사인 자체가 바뀌는 거예요. 이름이 바뀐다고요. 여러분 교회 올라오면서 아래 편의점 봤죠? 그 모습이 어떻던가요? 특히 양 집사님 모습이 어떻던가요? 앙상하죠.

훤하게 내부가 다 보이죠. 그게 우리의 말로(末路)입니다. 거기다가 뭐 채우면 안 돼요. 주님 보시기에 속이 시원해요. 물건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 이게 만약에 내 편의점이라면, ‘이 편의점에 뭐로 채우지?’라고 또 채울 생각을 해요. 비울 생각 안 하고 채울 생각을 한다고요. 채울 생각하게 되면, 이게 우리 인생 사달 나는 겁니다.

내가 아까 예배 전에 잠깐 이야기했지만, 수련회 안 가는 이유는 딱 하나예요. 같이 놀 사람이 없어서 그래요. 어디 가도 심심하면 짜증 나요. 나를 위로해 줄 사람, 같이 놀아주면서 나를 위로할 사람이 없어서 안 가는데, 시간이 아깝고 특히 돈이 아깝고, 뭐 여러 가지 있겠죠. 우리는 편의점이에요. 앙상한 편의점. 아무것도 없는 거. 아무것도 없으니까, 이제부터는 나의 몸에 내 사인하기도 부끄러운 거예요.

개뿔도 아무것도 없어서, 내 거라고 뭐 당당하게 내놓을 게 있어야 하는데, 내놓을 게 없어요.
세상 말로 해서 ‘뭐 자식이 잘되기를 하나, 집안이 잘되기를 하나, 뭐 자랑할 게 있나?’ 아무것도 없을 때, 그때는 묵언수행에 도전할 수밖에 없죠. 그냥 가만히 있어요. 남 말 듣기만 하고, 입을 가만히 있어요. 그런데 남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입을 벌리고 이야기한다면,
그거는 자식이 뭐 잘될 때죠. 100%입니다.

뭔가 잘될 때, 자식이 잘될 때, 좋은 대학 갔다든지, 갑자기 뭐 장학금 받았다든지, 취직이 됐다든지, 안 그러면 시집을 간다든지, 장가를 가든지, 뭐 일이 있을 때, 그때만 입이 활짝 열리겠죠. 입이 열리면 뭐가 나오느냐? 내 이름이 나와서 나의 성과가 이제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런 인간을 천국에서는 안 받아줍니다. 왜? 주님의 사인, 주님 소유의 주님 사인이 없으니까 받아줄 수가 없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지금은 구약을 보고 있는데, 신약 성경에 어디와 비교를 하면 좋아요. ‘위로할 자가 없습니다’라고 하면 신약에 와서는 “위로해 줄까, 아니면 네가 평온 할래?”라고 이걸 물어요. 이상하게 비슷한 이야기 같은데 전혀 다른 이야기예요. 네가 평온해질래, 위로받을래? 채워줄까, 아니면 네가 스스로 감당할 게 아무것도 남지 않은 텅텅 빈 상태로 평온함으로 받아줄 수 있는, 이 평온함으로 있을래? 어느 쪽이냐?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 먼저 몸소 시범을 보이죠. 예수님이 시범을 보인 것이 뭐냐 하면은, 예수님이 죄인한테 희생을 당했다는 거예요. 희생이라 하는 것은 억울하게 된통 당했다는 뜻입니다. 억울하게, 아무 죄도 없는데 당한 거예요. 예수님이 희생당한 걸 남이 뜯어먹을 생각하지 마세요. 주님께서는 희생을 당하면서, 그 희생당하는, 그러니까 예수님이 희생당하는 모습을 미리 자기 근처에서 찾아본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마가복음 12장 41절에서 44절에 바로 가난한 과부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께서 연보 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 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쌔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라고 돼 있어요.

예수님께서 이 연보 궤를 관찰하신 거예요. 이 연보 궤는 이제 비어 있겠죠. 비어 있는 곳에 이제 뭐로 채우느냐 하는 겁니다. 그 연보 궤는 성전을 짓기 위해서 돈을 뜯어내는, 그 당시에 그 성직자들이 돈 뜯어내기 위해서 연보 궤를 성전 앞에 둔 겁니다. ‘성전에서 헌금 하세요’라고 한 거예요. 그렇게 할 때, 이 연보 궤가 또 뭐냐 하면, 고아나 과부, 어려운 사람에게 최저 생계비를 지급하기 위한 복지 정책으로써 이스라엘 지도층에서 그렇게 한 정책이기도 해요.

연보 궤에 연보를 모아서 불쌍하고 어려운, 혼자 사는 과부에게 생활비를 주는 그런 연보 궤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이런 겁니다. 이 과부는 뜯긴 거예요. 종교 지도자한테 뜯긴 거예요. 요령을 부리지 못하고 생활비 전부를 몽땅 뜯긴 겁니다. 과부가 믿음이 좋고 나쁘고 하는 그런 게 아니라, 그 시대적 상황에서 이 과부가 다시 넉넉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여건은 전혀 없다는 사실, 이 세상 자체가 어차피 세상의 권력에 의해서 인간은 다 뜯기게 돼 있다는 그 현장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이 과부는 그 시대의 권력에 의해서 희생당한 거예요. 예수님도 이 과부를 보면서 지금 예수님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놓고 있습니다. 아버지 이름으로 이야기하는 나. 근데 그 아버지 이름이 이 세상에 와서, 그냥 아무것도 없이 다 뜯기고, 목숨까지 뜯겨 나가는 거예요.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 아버지 이름이, 나는 이제 아버지께로 가는데, 남아있는 너희들이 이제는 내가 당했던 그 이름으로 너희들도 똑같이 당한다.

“어떻게 위로해 줄까, 아니면 평온을 줄까?”라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요한복음 16장 33절에,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그다음에 17장 11절에 보면,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그러니까 도대체 이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위로해 줄 데가 없습니다. 위로받을 데가 어디 있습니까?’라고 부르짖을 때, 오늘 본문 내용에 의하면, 내(주)가 알아서 위로를 달라는 너희에게 위로를 주지 않는 조치를 했다는 거예요. 주님께서 먼저 나서서. 오늘 본문 읽었던 것 다시 한번 그 대목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1장 17절에 보면 “시온이 두 손을 폈으나 위로할 자가 없도다”

이유가 뭐냐 하면, “여호와께서 야곱의 사면에 있는 자를 명하여 야곱의 대적이 되게 하셨으니 예루살렘은 저희 가운데 불결한 자 같도다” 불결한 자와 같이 되어서 그들의 위로를 거부했다는 이 말입니다. ‘하나님이여 위로해 주소서. 하나님이여 우리의 아버지잖아요. 하나님이잖아요’라고 할 때, “나는 너에게 줄 위로는 남아있지 않다”라고 하시는 거예요.

아주 절망이죠. 근데 이 절망을 거치지 아니하면 주님이 주신 그 평온함으로 이전될 수가 없어요. 전달될 수가 없습니다. 과연 신약 성경에서 계속 줄곧 이 원리가 이어지는지를 디모데후서 2장 9절을 제가 읽어드리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디모데후서 2장 9절에서 사도 바울이 이런 이야기합니다. “복음을 인하여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그다음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지금 이게 위로입니까? 하나님께서, 지금 주님께서 사도바울에게 위로한다는 게 고작 이거예요? ‘저 옥에 갇혀서 죽게 되었습니다’라고 하니까, “죽어라, 인간아! 네가 지금 뭘 걱정하는 거야? 네 걱정할 입장이 안 돼!” 네가 감옥에 가야, 뭐냐 하면은 너로 인하여 ‘내가 복음 전했습니다. 내가 전도했습니다. 내가 사람 구원했습니다’라는 그런 너는 옥에 갇혀서 ‘나는 지금 아무것도 안 하고 있습니다’로 전환 시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주의 택한 백성은 계속 생산되는 이유는 너는 옥에 갇혀 있지만, 복음은 말씀은 옥에 갇혀 안 갇혀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됐잖아요. 그러면 됐잖아요. 참, 이런 이야기 듣고도 여러분들이 화가 안 난다? 그러면 더 센 것 들어갑니다. ‘교회 괜히 왔다. 교회 안 다닐걸. 교회 다녀도 여태 나한테 이익되는 거 없네’라고 안 나오고 아직도 버티고 있다면 더 센 것 들어갑니다. 야고보서 4장 14절에, 하여튼 성경에 보면 마지막 예수님 날에 믿는 자가 없다고 했으니까, 그걸로 이제 밀어붙여야 하죠.

야고보서 4장 14절에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안개가 물방울인데, 물방울이 무슨 위로를 받아요. 없어져! 제 역할은요? 없어지는 거야! 뭐 하다가 없어질까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자신에 대해서 자기가 살았다고 여기면서, “내가 주의 뜻이면 어디 도시에 가서 1년을 유하면서, 장사하면서, 이것저것을 하리라”라는 그 악을, 그 죄악을 펼치라고 주께서 우리 보고 잠깐 이 땅을 살게 한 거예요.

원형은 안개인데, 안개가 아니고 사람처럼 보이는 것은, 악을 저지르도록 주께서 그 일을 하시는 거예요. 다른 교회 같으면 벌써 “때려쳐라”라고 나올 텐데. 뭐 다른 교회 가면, 기도해서 응답받는 게 있는데, 왜 그걸 부정하느냐, 뭐 기도원에서 기도해서 큰 부자 됐다는 그 소리 나올 건데, 아직 뭐 내가 보니까 그런 혜택도 못 받은 것 같고.

그래서 드디어 요한계시록에 나옵니다. 주께서 왜 이렇게 위로가 위로가 아니고 평온을 주시는 이유는 바로 오늘 설교의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 20장에 나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첫째 죽음, 둘째 죽음, 첫째 부활, 둘째 부활, 뭐 그런 게 있어요. 성경에 그런 게 있습니다. 부활을 언급하는 거예요. 그리고 재림을 언급하고.

우선 부활 언급하려면 용어나 단어가 조금 어렵기 때문에 재림부터 먼저 이야기하면, 데살로니가 4장 13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왜냐 하면, 장차 주께서 구름 타고 오시기 때문에. 이게 너희들에게 위로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게 먹혀야 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동안 우리가 내 이름으로 살았잖아요. 그건 내 이름으로 살면 이런 게 위로가 안 돼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어쨌든 간에 이 현장성을 통해서 나를 위해서 사는 것을 삭제시키고 주께서 하늘로 가셔서 성령을 주시는 것은, 바로 이 밑에 있는 편의점, 편의점 안 망했으면 오늘 설교 못 할 뻔했어요, 그냥 휑하니 아무것도 없어요. 내 안에는 비록 과거, 아침에 얘기했지만, 내 안에 과거가 있지만, 과거는 돌아보면 아무것도 없어요.

남아있는 게 없습니다. 현재의 현장성만 남아있어요. 이 자리가 주님이 마련한 현장성, 이 나이에 여기 있는 이 현장성, 우리 보기는 살아 있는데 성경을 보니까 안개로써, 축축한 안개로써 살아 있는 거예요. 말씀과 함께 있는 거예요. 우리 외손주가 우리 집에다가 병에 담긴 작품을 하나 남겼는데, 그게 유자청이에요. 유자청을 만들어놓고, 내년 5월에 개봉하자고 하는 거예요.

유자청이 그만큼 오래 가는가 본데, 유자청을 보면서 내가 느낀 점이 뭐냐 하면, 유자청이 찐득찐득하고 같이 있는 유동적 결합체예요. 주님과 우리가 보이지 않는 찐득찐득한 결합체로 돼 있습니다. 그리고 그 찐득찐득한 게 뭐냐. 말씀이에요. 성도는 말씀 밖에 못 나갑니다. 이미 주의 사인으로 말씀이 덮쳐버리면, 우리는 유자청처럼 뭘 해도 말씀 안에서 움직입니다.

그 말씀이 뭐냐. 첫째 죽음, 첫째 부활, 둘째 죽음, 둘째 부활이 되는 거예요. 둘째 죽음은 영원한 지옥 불에 가는 것이 둘째 죽음입니다. 첫째 죽음은 우리가 늙어 죽는 거예요. 첫째 죽음. 그러니까 주님의 스케줄에 의하면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예수님이 하늘로 간 그 경로를, 첫째 죽음과 둘째 죽음,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 그 말씀으로 유자청을 만들어서 찐득찐득하게 우리에게 달라붙어서, 그저 안개에 불과한 우리를 말씀의 현실성, 현장성을 위해서 사용하는 하나의 배역, 역할로 맡기신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뭐냐 하면은 위로를 받는 게 아니고, 찐득찐득한 말씀 안에 있으니까 평온해야 되죠. ‘아버지 집에 불이 났어요!’ ‘얘야, 어차피 안개이니라’라는 뭐 이런 거, ‘엄마, 나 또 헤어졌어’ ‘어차피 안개이니라.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말씀이니라. 주께서 헤어지게 했겠지. 주께서 굿~굿바이 하게 했겠지!’ 모든 것이 첫째 죽은 자는 첫째 부활, 영광스러운 부활은 나중에 있고 지금은 뭐냐.

이미 주와 함께 있는 이 상태를 부활이라고 이야기해요. 첫째 부활로 이야기합니다. 네가 내 이름으로, 부활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너는 내 소유가 되었다는 거, 이것이 성경 전체를 위해서 말씀으로 이렇게 스케줄 된 중에서, 예레미야애가는 ‘위로해 주세요’라고 하면, “위로할 자 없다. 내가 위로를 끊어버렸다”라는 그 중간 과정에서 우리가 본문을 보고 있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고 그저 주께서 쓰시는 대로, 주의 말씀만 채워주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내 것이 없기에 내가 책임질 것도 없는 자유함을 마음껏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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