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자료

나타난 천국 6강-복음의 조직

아빠와 함께 2026. 1. 17. 09:19

2026 겨울수련회 고린도후서 강해 제6강 : 복음의 조직 - 이 근호 목사

‘연보’에 대해서 이렇게 사도 바울이 언급을 한 것은, 복음의 세계가 구조적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복음이 개인적인 이득을 그 복음 안에서 얻어서 나 개인적으로 잘 되기 위한 복음은 주께서 주신 적이 없습니다. 보통 그걸 두고 얌체라고 하죠. 복음의 내용을 날름 나 잘되기 위해서 나에게 가지고 가서 내가 소지한다든지 장착한다든지 탑재한다든지, 그렇게 함으로써 내가 구원받는 데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그런 꼼수는 통한 적이 없습니다.

연보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중에 고린도후서 9장 9절은 아까 이야기한 시편 112편 9절 이야기입니다. “저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에게 주었으니 그 의가 영원히 있고 그 뿔이 영화로이 들리리로다.” 그 의가 영원토록 있다고 했다는 말이지요.

제가 분명히 얘기합니다. 인간 대 인간을 상대해서 한 게 아니고, 모든 말씀은 누가 가져간다? 모든 말씀은 누구를 겨냥합니까? 모든 성경 말씀은 누구를 위함이에요? 예수 그리스도가 다 가져가는 거예요.

왜? 인간은 할 능력이 없어요. 이미 선악 체계 시스템이 가동되기 때문에 인간은 그 어떤 말씀도 지킬 수가 없어요. 생명나무에 해당되는 분이 말씀을 지켜야지, 이미 선악과 지식이 장착돼 있는 자는 어떤 성경 말씀도 지키면 안 되죠. 그래도 그것도 지키겠다는 것은 마귀가 뒤에서 부추겨서 그런 사달을 내는 겁니다.

따라서 ‘가난한 자에게 주었으니 그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할 때 그 ‘의’라고 하는 것은 구제함으로써 나에게 떨어지는 의가 아니라, 주께서 십자가 지심으로써 나에게 떨어지는 의가 되는 거예요. 그게 그쪽으로 타고 올라가야 돼요. c(악마), b(성도), a(주님), 악마와 주님 사이에 있는 인간은, 악마에 의해 장악되어 있는, 악마 입김으로 장악되어 있는 이 세상에서 성령에 의해 주어지는 이 말씀의 조직을 타고 위로 올라가야 돼요.

올라가서 주님을 경유해서 다시 내려와야 돼요. 주님을 경유해서 다시 내려오게 되면 이렇게 됩니다. ‘가난한 자를 구제하면 그 의가 영원토록 있다’고 규정된 그 의가 주를 경유해서 내려올 때 b에 해당되는 성도는 어떤 입장에 속하는가? 그것도 주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알려줬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에 나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뭐 한다?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폐지 팔아서 한 달 수입이 36만 원 나왔는데 교회 가서 복음을 듣고 주님을 알고 난 뒤에 374,000원 된 거예요.

어떻게 되었어요? 36만 원보다 무려 1만 4천 원 부요하게 된 거예요. 무려 만 4천 원입니다. 제가 이 예를 든 것은 왜입니까? 인간들이 이 세상에서 타인과 비교해서 내가 수립하는 욕망은 일체 예수님으로부터 뭐가 어떻게 돼요? 거부당한 거예요. 내 소원을 들어주는 게 아니고 어떤 소원도 누구로부터 새롭게 그 주어져야 하는가?

주님으로부터 새롭게 그 소원이 주어져야 하는데 소원 주고 그 소원을 들어주는 게 아니고, 소원 그 자체가 주님의 기도 응답이에요. 소원 적었죠. 기도해서 응답받는 것이 아니고 주님 기도의 응답부터 먼저 챙기도록 주시는 겁니다. 주시게 되면 우리가 어떤 형편, 예를 들어 36만 원 받다가 37만 4천 원이 되었을 때 이게 뭐로 나타나게 되나요?

이게 뭡니까? “주여, 나에게 주신 그 은혜가…” 그다음에 뭡니까? “…족합니다.” 그런데 폐지 경쟁자가 생겼어요. 자기 나이는 76인데 옆에서 폐지 줍는 경쟁자의 나이가 65에요. 완전히 젊은 사람이에요. 젊은 사람이 내가 줍던 폐지까지 다 가져갔어요.

그래서 36만 원 벌던 것이 37만 원대로 됐다가 갑자기 그래프가 떨어져서 32만 원 되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 은혜가 어떠하다? 나한테 뭡니까? 족하죠. 하여튼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족해요. 어떤 모양새로 있던 살아있는 것 자체가 족합니다.

그러면 죽여버리면? 그것도 족하죠. 그것도 족해요. 이게 뭐냐 하면 사사기에서 기드온이 천사를 만날 때 이미 내 존재는 산 존재가 아니고 어떤 존재? 죽은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그때부터 천사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어요.

2만 2천 명 왔는데 다 보내고 몇 명 남겼습니까? 300명 남았어요. 옛날의 기드온 같으면 꼴랑 이거 가지고 뭐 하겠냐, 하겠죠. 그러나 300명을 줬다는 것 자체도 주님의 은혜에 속하기 때문에 이걸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은 우리한테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고 기뻐하라. 내가 어떤 지경에 처한다고 할지라도 늘 기뻐할 수 있는 그것이 내 인생관이 되었다.”(빌 4:4, 11-13)라고 합니다.

“‘내가 부하든 가난하든 나는 족하다’라는 새로운 인생관을 내가 갖게 되었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이 점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으로 돌아가는 게 중요해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서 했던 그 예수님의 말씀이 십자가 안에서 완성된 상태로 초대교회를 거쳐서 현실로 전환되는가?

그 원류는 예수님이 하셨던 그 말씀에 있겠죠. 누가복음 6장 27절부터 보겠습니다. 산상 설교는 지금 실현되고 있어요. 산상 설교는 실현되고 있습니다. 주님에 의해서 다 이루었던 산상 설교의 그 말씀의 결과가 하나님의 의가 되어서,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로서 자기 백성에게 주어졌습니다.

누가복음 6장 보기 전에 마태복음 5장을 먼저 보겠습니다. 같은 이야기인데 5장부터 먼저 한번 보고 누가복음 6장을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 42절에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뭐 하지 말라? “…거절하지 말라.”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이것이 산상 설교입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에게 거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내가 만들어 내겠다’라는 뜻이죠. 다시 이야기하면 ‘내가 준 말씀은 말씀을 들은 네가 이룬 것이 아니고 말씀을 준 내가 이룬다.’ 다시 그 질문을 회수해서 주님이 대신 그 말씀을 다 이루어 주시는 거예요.

그 대신 우리는 뭡니까? 쪼다 되는 거죠. 다시 더욱더 죄인으로 드러나는 거죠. 얼마나 즐거운지 몰라요. “저거 제가 지킬게요.” “손 떼! 네가 지킬 게 아니야.” 누가복음 봅시다. 6장 27절,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여기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했죠.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가, 우리 자리가 주님의 원수 자리예요. 로마서 5장에 보면(롬 5:10, 8:7). 원수가 무슨 원수를 사랑해요? 원수는 원수다워야죠. “나는 원수를 사랑하지 못합니다!” 할 때 That’s right, “바로 그거야. 그게 네 모습이야. 그게 네 본질이야. 내 말씀에 대해서 전혀 네가 합치되지 못한다는 너 자신, 그 결과를 발견하고 감사하고 기뻐하라.”

어떤 말씀도 내가 하나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발견하는 기쁨. 해외여행, 베네치아 간 그 기쁨보다 더 놀라운 기쁨, 베네치아에 가든 집구석에 있든 간에 그 자체가 신기함이고 고맙다고 느껴지는 거예요. 여행 간다고 해서 즐겁지가 않습니다. 가는 데서부터 시작해서 올 때까지 싸우는데 뭐가 즐겁겠어요?

여기 있는 시공간은 어딜 가나 동일한 시공간이니까요. 다만 여행을 가시되 말씀이 따라가고 있다는 것은 잊지 마세요. 무슨 말씀? 누가복음 6장 27절의 말씀, “지금 네 옆에 동행하는 자는 너의 원수다. 따라서 네가 사랑할 수 있는가를 테스트해 봐라. 절대로 안 될걸?”

파스타 먹자고 하는데 피자 먹는다고 하고요, 여행지에서 어떤 경우라도 도대체 마음이 안 맞는 겁니다. 그다음에 누가복음 6장 28절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 100%, 100% 우리가 지키지 못하는 말씀을 이렇게 꼼꼼하게 챙겨주시니 어떻게 해요?

우리의 응답은 “고맙습니다.” 하면 되는 거예요. “예, 고맙습니다.” ‘이 말씀 없었으면 내가 얼마나 잘난 척을 했을까?’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누가복음 6장 29절에 “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말씀에 대해서 안 믿는 학자들, 안 믿는 철학가들은 뭐라고 하느냐? “이 말씀을 이야기한 예수 너는 지켰나?” 이러는 거예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귀싸대기 맞았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돼요? 십자가에 매달려 있을 때 천사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크로스! 해서 힘을 모아서는 “방금 누가 예수님 때렸어? 너 이리 와서 한 번 더 때려.” 이러고 자기가 알아서 다시 십자가에 슝슝슝, 하고 올라가서 매달려야죠.

그래야 그 말씀을 이룬 게 아니겠습니까? 이 말씀에 대해서 ‘어떤 과정을 통해서 하게 되면 이것은 성취에 해당됨’이라는 이 모든 아이디어는 주님이 거부합니다. 주님이 거부해요. 그것은 왜냐? 이런 것은 바리새인들을 통해서 그만큼 많은 테스트를 거쳤습니다.

기도할 때 꿇어앉아서 기도할까, 두 손을 모을 때 깍지낄까, 아니면 두 손을 그냥 합장할까, 옥색 원피스를 입을 것인가, 붉은색 투피스를 입을 것인가, 이런 것부터 해서 그 바리새인들은 모든 세세 조항으로 철저에 철저를 기하면서 말씀에 어프로치, 말씀에 접근하기 위한 시도를 했는데 그 인간들의 시도, 그게 뭡니까?

그게 바로 악마가 각개전투하는 거잖아요, 악마의 각개전투. 개인이 이런 식으로 내가 구원받아야되겠다는 거예요. 주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조직을 구원하지요. ‘예수 안’을 구원하지 인간을 구원하는 적이 없습니다. 죽이고, 죽은 것을 확인하고 난 뒤에 그 사람을 ‘예수 안’이라는 조직에다가 집어넣는 거죠.

그게 바로 세례잖아요. 성령의 세례인데 이미 죽여놓고 들여온 그 사람이 성경책을 다시 보게 되면 ‘아, 이래서, 죽을 만해서 죽이시네’라는 그 고마움으로 다가와야 되죠. ‘이렇게 고마운 말씀을 하셨어.’ 하지만 도대체 성경을 안 보니까 도저히 이해가 안 돼요. 어느 것 하나라도 이게 다 주님의 일기장이잖아요.

‘너 때문에 내가 죽었다, 너 때문에 내가 죽었다….’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있잖아요, 그 이야기를! 그게 얼마나 고맙습니까? “고맙소, 고맙소~.” 이 모든 이야기가 찬송이 저절로 나온다는 말이죠.

그다음 누가복음 6장 33-35절에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를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빌리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의수히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빌리느니라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그리하면 너희의 상이 클 것이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되리니 그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 인자하시니라.”

여기서 하나의 공식 하나 제시해 드리겠습니다. “인간의 죄는 하나님에게 죄짓는 것이 아니요, 사람 속에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에게 죄짓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 아버지께 죄 지은 것이 아니요, 아들 속에 있는 아버지께 죄지어서 그들이 악마라는 타이틀을 얻게 된 겁니다.

왜? 주님은 이 땅에 올 때 인간으로 오셨기 때문에, 연약하게 오셨기 때문에 누구한테도 무시당할 만한 분이에요. 번듯한 게 없으니까요. 아무도 그분이 누군지를 알아보지를 못해요. 심지어 제자들도 예수님이 누군지를 몰라요. 누군지를 모르고 예수님의 말에 대해서 일방적으로 자기 유리한 대로 해석했어요.

하늘나라 가면 우리 열둘 중에 누가 높은 자리에 앉겠습니까, 할 때 주님께서 엉뚱하게 어린아이를 데리고 왔어요. 저기 있는 어린아이 한번 여기 세워볼까요? 그 당시에 그 어린아이는 어리둥절했겠죠. ‘제가 어른들을 가르칠 입장이 못 되는데?’ 이런 식으로요.

지금 어린아이보고 뭘 가르치라는 것이 아닙니다. 뭐가 뭔지 아무것도 모르는 자인 그 어린아이의 특징은 자기에게 일어난 모든 주변의 일들에 대해서 자기 행함의 결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그냥 받기만 한 거죠. 어린아이는 그런 거예요.

어린아이에게 “너는 엄마한테 7시간 봉사하고 퇴근하라.” 이런 게 어린아이에게는 없잖아요. 받기만 하는 인간, 어떤 인간? 이게 가짜 인간이 아니고 어떤 인간입니까? 진짜 인간이에요. 하나님의 천국에 들어가는 데 필요한 ‘하나님의 의’는 그냥 줘서 받기만 하는 ‘의’지 내가 만드는 ‘의’는 천국에서 퇴짜 당합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6장 36절에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그다음에 이제 제가 이야기하려는 것이 나오는 데 그걸 위해서 길게 이야기했어요. 누가복음 6장 37-38절에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여기서 ‘준다’는 것, 준다는 것이 뭐냐? ‘죄사함’ 받는 것, 곧 ‘용서받음’을 주는 거예요. ‘용서받음’을 준다는 말은, 나는 뭡니까? 용서받은 자가 되잖아요. 용서받은 자에게는 용서를 하신 분의 일방적인 은혜가 주어졌잖아요. 그러면 이것은 무슨 뜻이냐?

나는 뭐다? 의인이 아니고 뭐다? 용서받을 자격 없는 죄인으로서 누구한테 다가서면 되는 거예요. 주께서 마련한 사람을 만날 때 죄인의 모습으로 그 사람 앞에 나가면 돼요. “한 2천만 원만 당겨주세요.” “나는 죄인이라서 줄 돈이 제게 없습니다만 주께서 주실 돈이 있습니다. 25만 원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 25만 원은 안 갚아도 됩니다.”

“왜 안 갚아도 됩니까?” 하면 “이것이 내가 당신을 통해서 느끼는 주님께 용서받은 나의 은혜의 값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것은 당신에게 돈을 준 게 아니고 내 용서받은 기쁨을 25만 원을 가지고 준 거예요. 그래서 ‘당신은 나한테 채무자가 아닙니다. 나는 당신에게 채권자도 아니고 그냥 난 용서받은 사람이라는 표현을 했을 뿐입니다.’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소문은 내지 마시고요. 다른 친구 데리고 와서 이번에는 30만 원을 달라고 하면 곤란하지요. 자, 지금까지 한 것이 고린도후서 8장과 9장의 연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뭘 봐야 하느냐?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이 만드는 그 조직의 부활이 되죠. 그 안에서 자기 백성이 함께 부활되니까요. 함께 부활되었어요. 로마서 6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그 의미에요.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 6:4-5).

그렇다면 교회는 뭐냐? 조직이 되는 거예요. 그 조직이 그 개인에게 어떻게 적용되는가? 그것이 고린도후서 4장입니다. 여기서 입체적으로 나오죠. 4장 7절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얼마 전에 설교했지요. 질그릇, 그냥 그릇입니다. 아무 보잘것 없는 흙덩어리, 그냥 흙덩어리고 그래서 이것은 깨뜨리면 그냥 흙으로 돌아가야 돼요. 흙으로 만든 질그릇에 반짝반짝 빛나는 보배를 담았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되느냐? 흙, 그리고 하늘나라의 모습이 성도 안에서 중첩돼 있다는 겁니다. 구조적으로 같이 엮여서 형성돼 있는 거예요.

그러면 성도는 뭐냐? 운반체죠. 무슨 운반체? 보배를 담는 운반체예요. 그 보배가 무엇이냐? 이 보배가 성령의 능력입니다. 성령의 능력이니까 이것은 고체가 아니고 유동적이죠. 유동적이다. 유동적이라는 것은 무슨 대상이 안 되느냐? 소유 대상이 안 돼요.

질그릇, 이게 뭐냐? 이 대리운전자죠. 아르바이트하는 대리운전사입니다. 필요할 때만 부르는 거예요. 누구에게 필요할 때만? 성령께서 필요할 때만 운반체로서 대리운전해서 “어디까지 모실까요?” 해서 가는 거예요.

‘하나님의 지극히 큰 능력을 우리가 가졌으니’, 그 성령의 능력에 인하여 이 질그릇에 포함되어 일어나는 모든 시추에이션, 상황, 형편에 있는데, 지금 이거 뭐 하라고 이런 상황이 인생에서 벌어지는 겁니까? 성령의 유동적인 능력, 인간의 능력으로 소지할 수 없고 일방적으로 활동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러한 상황들이 일어난 거예요.

계속 보겠습니다. 조직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8-10절에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이 이야기가 사도행전에는 일체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사도 바울이 여기 갔다 저기 갔다는 이야기, 핍박받았다, 누구의 도움을 받았다는 이야기만 나와요. 우리가 능히 오해할 만한, 사실은 오해지만, 오해할 만한 것, ‘사도 바울이 이렇게 활동했구나. 그런데 결과적으로 교회가 생겼네? 나도 여기저기 돌아볼까? 그러면 교회가 생기겠네. 그리고 나도 선교 훈련 받아서 터키나 그리스라든지 한 바퀴 돌게 되면…’

말로는 쉽죠. 성령의 인도함으로 했다, 하면서 돌면 이게 교회 세워집니까? 그래서 교회가 나타납니까? 사도행전만 보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이 들어가는데 고린도후서 4장을 보면 교회라는 것이 누구 소관이 아니에요? 인간이 세우고 말고 자시고 하는 인간의 소관이 아닙니다.

이것은 철저히 누구 소관입니까? 주님의 소관이죠, 주님의 소관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있다, 교회가 없다’에 대해서 우리 인간은 걱정할 권한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걱정할 권한이 없어요. 그 이유가 11절에 나옵니다. “…예수의 생명이 또한…” 그다음에 뭐라고 했어요?

생명이 어디에 나타납니까? “죽을 육체”, 곧 있으면 죽는다는 말이 아니고, 이미 죽었다는 말입니다. ‘죽은 육체를 내가 일방적으로 활용해서 성령의 지극히 큰 능력,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려고 너를 활용했다.’ 그런 겁니다. 그러니까 고린도후서 이 편지를 고린도 교회에 전할 때 고린도 교회가 이 말씀을 제대로 받아들인다면 고린도 교회 자체적으로 걱정할 게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그게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의 조직체에요. 그게 조직체입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성경 말씀을 그대로 실천에 옮김으로써 이 교회를 안정적인 교회로 만듭시다” 하는 그것은 100% 사기예요. 성경 말씀을 옹호하는 것 같지만 마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내 소유의 교회에요.

내가 4대째 걸쳐서 돈 때려 바친 교회, 우리 할아버지 집 팔아서 교육관을 지었던 교회, 그래서 시가로 1,200억이 된 교회, 이 모든 재산. 결국 재산이니까 설교 잘하면 목사가 오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기획사 사장, 혹은 걸그룹 하나 잘해서 주식값 오른 거죠. “교회는 역시 부동산이야!” 이거잖아요. “남는 것은 바로 재산이다, 재산! 이거 빼앗기면 안 돼. 왜? 우리 할아버지도 4대째 이 교회 장로니까.”

그게 죽은 육체입니까? 지금 펄펄 살아 있는 모습이에요? 누가 교회를 누가 방해합니까? 교인이 방해하지요, 교인이. 교회는 교인이 방해해요. 교회가 교회를 막아버립니다. 그래서 제일 답답한 것 중 하나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를 그대로 본받아서 우리 교회에 하자 있는 것, 문제 있는 걸 고치게 되면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교회’라고 외치는 것, 참, 사기도 참 가지가지로 치고요.

교회는 없어지라고 있는 거예요. 없어지라고 있는 겁니다! ‘교회를 위해서’라는 게 성립이 안 돼요. 그것은 교회의 머리 되신 분이 걱정할 문제지 왜 날파리가 그걸 걱정합니까? 머리 되시는 분이 무능합니까? 주님이 그렇게 무능해요? 자기 확정된 숫자, 택한 백성을 놓칠까 봐 그걸 교인들이 걱정해야 돼요?

아니죠.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교회는 인간들이 조직할 수가 없습니다. 이미 조직돼 있기 때문에, 이미 조직돼 있기 때문에 조직할 수 없어요. 이미 조직된 교회를 두고 무슨 교회를 조직해요? 그리고 ‘무교회주의자’ 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냥 교회가 있어요. 교회가 있는데,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왔는데 사람들이 메시아를 못 알아봤잖아요.

교회가 있는데 사람들은 그 교회를 교회라고 못 알아보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 자체가 구원받지 못할 사람들을 배제하는 기준점으로 사용되는 거예요. 마치 아브라함처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라는 그 기준점에서 저주가 반드시 포함돼야 돼요.

죽을 육체에 예수님의 생명이 이렇게 살아나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4장 12절에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그다음에 뭡니까?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이게 뭐냐 하면, 어두움이 짙으면 짙을수록 뭐가 빛난다? 빛은 더욱더 환하게 빛난다. 나는 되게 어둡고 약하고, 그런데 미약하면 미약할수록 더 이상 주님의 생명을 가릴 수 있는 여지가 나한테서는 점점 옅어지는 거죠.

이게 얼마나 감사하고 고마운 겁니까? 마치 내가 주님 앞에서 투명 인간처럼 되는 거예요. 이것을 저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성도는 주님의 블랙박스다.”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너를 구원하기 위해서 있었던 주의 모든 일이 이 블랙박스 안에 기록돼 있는데 이것은 인간이 열 필요 없어요.

왜 그러냐? 블랙박스 안에 어떤 내용이 들어있느냐? 미래까지 이미 블랙박스 안에 확정돼 있기 때문에 확정된 그대로 저와 여러분들을 인도하시고 이끄실 겁니다. 이끄실 때 이끈다, 안 이끈다를 어떻게 확정할 수 있느냐? 이 성경 말씀을 보면서, ‘원수를 사랑하라’ 하는 말씀을 보면서 “내가 바로 죄인입니다. 나는 한 터럭도 못 지킵니다”의 고마움을 표하는 거예요.

‘내가 지킬 능력이 없고 그냥 질그릇에 불과합니다’라는 것을 스스럼없이 고백하는 그 자유함과 가벼움, 감사.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또 머리를 굴려요. ‘못 지킬까 봐 애초부터 난 성경 안 보렵니다. 말씀 봐도 못 지킬 것을 왜 봅니까?’

성경 말씀을 안 보면 자기가 자꾸 독자적으로 높아지고 뭐라도 된 양 여길 수 있는 가능성이 자꾸 높아져요. ‘내가 성경을 안 보지만 딴 건 잘한다.’ 이렇게 될 수가 있다고요. 또 ‘내가 성경 안 봐도 애는 잘 키운다.’ 이런 게 있단 말이죠.

성경을 보면서 애 키운 것까지 그 죄라는 사실을 발견할 때, 엄마가 자식에게 다가설 때 죄인으로서 자식에게 다가서는 거예요. “얘야, 내가 또 너한테 죄인이다. 네가 수학을 빵점 맞을 줄은 생각도 못 했잖아. 엄마는 죄인이거든. 오늘 좀 맞자. 오늘은 밥도 없다.” “엄마, 밥은 줘야지.” “아니야. 나 죄인이야. 너 죽고 나 죽자.”

그럴 때 애처로운 마음이 드는 게 아니고 질그릇 같은 엄마에게 성령이 함께하사 매를 드는 거죠. 잠언서에 나옵니다.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잠 13:24). 그렇다고 또 아주 개 패듯이 패면 안 되고요. 또 그럴 사람도 없고요.

고린도후서 4장 13절을 봅시다. 제가 지금 이런 이야기하는 구조적이라는 겁니다, 구조적이다. 내가 빠진 구조가 아니라 ‘나’가 들어가는데 뭘 어떡한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 아무것도 즐거울 것이 없는 흙 같은, 있으나 마나 한 존재지만 주께서 쓰신다는 것이 굉장히 영광스럽고 감사한, 고귀한 신분으로 취업이 됐다는 그 사실, 주님의 블랙박스가 들어 있는 성도로서 다루어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가 나올 수 있도록, 찬양이 나올 수 있도록 이 성경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진 거예요.

고린도후서 4장 14-15절에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혼자 부활되는 게 아니에요. 더불어, 더불어 같이 되는 거예요. 고린도후서 4장 16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그다음에 나오는 게 뭡니까?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이제 문제 나갑니다. 여기에 나오는 겉사람과 속사람이 같은 사람입니까, 다른 사람입니까? 같은 사람이죠. 같은 사람이에요.

같은 사람인데 왜 속사람과 겉사람이 분리되어 있습니까?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같은 사람인데 주님이 다루는 방식이,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죄로 말미암아 죽고 주의 의를 위하여 살았다’는 그 경로를 질그릇 같은 우리를 통해서 나타내는 데 있어서 두 가지 기능으로 다루시기 때문에 두 가지 종류의 기능으로 보여지는 거예요.

철저하게 성령에 의해서, 주님에 의해서 ‘주님이 이 땅에서 어떤 일을 했느냐?’를 보여주는 경로로 우리가 활용되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걱정할 게 전혀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18절의 이야기가…, 이번 수련회 교재의 제목이 뭡니까? <나타난 천국>이죠. 18절과 관련돼 있습니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은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보이지 않는 것이, 영원한 게 있는데 나타난 것은 뭐냐? 블랙박스예요. 교회라는 이름의 블랙박스가 나타난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의 존재가 주님 보시기에는 확실한 데, 남들 보기에는 애매한 거예요.

“너의 정체를 밝혀라. 너 뭐야?”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감사하는 것을 보니까 성도인데, 인간이 뭔가 말씀을 지키겠다는 것에 대해서는 애초부터 싹을 잘라서 “우리는 말씀을 못 지킨다”라고 주장하니 “우리가 지킬 수 있는 말씀은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 완성체가 지킬 수 없는 나를 통해서 흘러나온다.” 이렇게 이야기할 때 다른 사람이 말해요. “어렵도다.”

이렇게 이야기할 거 아니에요? “어렵도다!” 그러면 우리는 “믿지 마, 믿지 마!” 이러면 되지요. 고린도후서 5장을 봅시다. 맨 구조입니다. 아까 고린도후서 8장과 9장에서 그 구조를 언급했는데요, 사도바울이 ‘왜 우리가 조직적으로 구원받았는가’를 4장과 5장에 딱 배치하고 그다음에 헌금 이야기를 한 거예요.

고린도후서 5장 1절에 보면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우리가 무너지는데 무너질 때 그냥 무너지면 되면 안 되죠. 뭔가 달라져서 무너져야 하죠.

그 달라지는 것이 5장 13절에 나옵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고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다음에 그 미친 이유가 뭐냐? 14절에 “그리스도 사랑이 우리를…” 뭐 한다 했습니까? “…강권하시는도다.” 나를 가만두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가만두지 않는다.

사랑이라고 했어요, 사랑, 그리스도 사랑에 나를 가만두지 않는다. 그러면 사랑을 받았는지 안 받는지 어떻게 확인될 수 있는가? 고린도후서 5장 14절입니다. 사람들이 여기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죠. “안 들을란다!” 이렇게 나오는 거죠. 그게 고린도후서 5장 14절의 성경 말씀에 분명히 나오는데 안 들어요.

“…우리가 생각건데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나는 이미 어떤 사람이다? “나는 이미 죽은 사람이다.” 이 말을 이해 못 하는 거예요. 내가 이미 죽은 사람이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었을 때 모든 사람은 죽은 것이다.”

모든 사람을 죽은 사람으로 간주해 놓고, 그렇게 간주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 죽었다고 돼 있어요. 그 인과관계를 사람들은 수용을 못 하는 거예요. 내가 지금 숨을 쉬고 있고, 여러 가지 계획이 있는데 왜 죽은 거예요?

“우리가 생각건데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그다음 빈칸에 여러분들이 글을 한번 지어서 넣어보라고 한다면 거기다가 뭘 집어넣겠습니까?

1번, 모든 사람은 살았다.
2번, 모든 사람은 신이 난다.
3번, 모든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해도 된다.
4번, 모든 사람은 죽은 존재다.

몇 번입니까? 죽은 존재잖아요. 이것은 뭐 선행학습 안 해도, 학원 안 다녀도 아는 거예요. 모든 사람이 죽은 자잖아요. 성경에 이렇게 돼 있다면,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이 보배를 질그릇 같은 우리에게 담아서 전달합시다. 죽은 자가 되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내가 하지 못할 일은 더는 남아 있지 않다’는 겁니다.

“이것은 내가 못 하겠습니다”라는 말을 내가 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죽은 존재가 죽은 존재를 들어서서 사용하는데 죽어도 좋다고 해놓고는 잠시 눈을 비비고 ‘내가 지금 일할 군번이 아닌데?’ 이런 게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죽은 존재라면 끝까지 죽은 존재가 되어야 하는데 사도 바울이 이런 고백을 할 때 남들이 사도 바울에게 뭐라고 합니까?

네가 뭐 했다? “네가 미쳤다.” 네가 미쳤다. “정말 미쳤어!”하는 노래처럼. 진짜, 진짜 미친 거예요. 미쳤다는 말은 뭐냐? ‘네가 통하는 그 언어의 체계하고 우리가 통하는 언어 체계가 왜 소통이 안 되느냐’는 그런 이야기죠. 남들이 미쳤다고 할 때 사도 바울은, 내가 미친 건 맞는 데 어디에 미쳤습니까? “주님의 사랑에 미쳤다.”

다시 말해서 “나처럼 사랑에 미치지 않으면 너는 내 말을 못 믿게 돼 있다.” 이렇게 돼 있어요. 어떻습니까? 들어보니까 여러분, 예수 믿기 쉬워요, 어려워요? 안 그러면 불가능합니까? 이미 믿게 된 사람한테는 쉽다고 하지 말고, 전혀 어려울 게 없다고 이야기해야 돼요. 부정어로 해야 돼요.

쉽다고 해버리면 ‘나도 쉬우니까 너는 쉬울 것이다.’ 이렇게 돼 있잖아요. 그런데 이미 믿음에 들어와 버리면 ‘전혀 어렵지 않은데?’ 이렇게 돼요. 전혀 어렵지 않아요. 왜? 전혀 어렵지 않기 때문에. “택시! …로 갑시다.” 할 때 이게 그렇게 어려운 일입니까? 그냥 실어 나르는 그 일이 그렇게 어려워요?

“가만있어 봅시다.” 해서 주민등록증도 보고, 이력서를 써오라든지, 이런 것 원하지 않아요. 그냥 죽은 자를 주께서 태웠다면 그래서 “그냥 싣고 가라”고 하는 대로 그냥 가면 되는 거예요. ‘이 손님은 미터기 한 3천 원 나올 때 내릴 거야’ 했는데 타자마자 한 200미터 가서는 “내려주세요.” 했다면 내려줘야지요.

왜? 손님이 불러서 탄 택시이기 때문에. 또 택시 요금이 오르든 말든 이건 내 소관 아니라는 말이지요. 내 인생은 내 소관이 아닙니다. 다시 묻습니다. 이게 어렵습니까? 가만 들어보니 점점 어려워지는 것 같은데…, 이게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 같아요.

“믿습니까? 믿는 것이 어렵습니까?” 하면 “그것은 뭐 어렵지 않죠.” “그러면 내 인생이 내 소관 아닌 그게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그것은 좀 생각을 해 봐야겠는데요?” 맞습니다. 인간은 악마의 입김이 작용하는 이 세상에 계속 죽치고 있습니다. 아무리 성경을 보고 은혜를 받아도 악마가 우리에게 두려움을 제공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또다시 다 잊어버리고, 내 인생 내가 개척하고 관리하려고 악을 쓰고 있습니다. ‘대신 죽으심’ 그런 것은 기억도 안 나고요, 내가 죽었다는 것도 기억이 안 나고, “네가 미쳤어!” “내가 왜 미쳤는데? 멀쩡한데!” 미치지도 않았고요, 사랑도 나는 모르고요, 오직 나는 나만 사랑하는 사람으로 쉽게 되돌아가는 것, 이게 바로 점멸등이죠.

깜빡깜빡! 다시, 다시 한번 우리가 성경 말씀과 상관없는 세상 사람으로 갈 수밖에 없는 그런 세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같이 새롭게 될 자입니다. 과거의 기억 가지고 우려먹을 생각하지 말고, 매일 같이 성령에 의해서 새롭게 다시 태어나고, 또다시 태어나는 그런 대상자가 됩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우리를 구원했으면 그만이지 우리로 하여금 왜 다시 세상에 가게 하느냐? 그것은 바로 우리가 날파리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하는 행동을 통해서, 주께서 덮치고 있는 이 성령의 세계를 통해서 십자가가 매일 같이 영광을 받기 위해서는, 죽었다가 살아나고 죽었다가 살아나는 이 블랙박스를 우리에게 심어놓은 거예요.

그래서 ‘성경 말씀대로 다시는 타락하지 않아야지. 믿음 생활 잘해야지.’ 이런 되지도 않은 결심 접으세요. 내가 보기에 벌써 접은 것 같아요. 제발 그런 결심은 좀 하지 마세요. 그것은 우리 소관 아닙니다. 살아온 것만 해도, 기억나는 것만 해도 그냥 감사하면 돼요.

고린도후서 5장 16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 같지 알지 아니하노라.” ‘예수님을 육체대로 알지 않는다’는 말은, 우리 형편을 경유해서 ‘내가 이렇다. 그러니까 주님도 이럴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게 ‘육체대로’거든요.

그러면 ‘육체대로 예수님을 생각 안 한다’는 말은 어떻게 생각한다는 말입니까? ‘육체대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러면 어떻게 아는 건데요? 그 뒤에 나오죠. ‘새로운 주님의 생산품, 주님의 새로운 피조물’로서 본다는 거예요.

이것을 하고 마치겠습니다. 이것이 상당히 중요하고 어려운데요. 자칫하면 소통 안 되는 수가 있어요. 새로운 피조물이 뭐냐? 새로운 피조물에 대해서 우리 자신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볼 수 있는 자격은 없어요. 우리는 나를 찍는 카메라를 뛰어넘을 수 없기 때문이에요. 카메라 이야기했죠.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은, 내가 생각하는 카메라에 다 찍혀서 그게 전부 다 과거 지사로 돌아가요. 그 카메라를 뛰어넘어서 미래에 가서 미리 나를 바라보는 그런 경우는 우리 인간의 육체에서는 없습니다. 이게 허용이 안 돼요. 그래서 중들의 한계가 그거잖아요. 머리 깎고 도는 닦았는데 닦아봐야 자기는 뭐냐?

자기 기억 속의 자기로 갇혀 있는 거예요. 자기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겁니다. 머리만 깎았지요. 중들이 머리 깎는 이유가, 머리를 깎아야 이게 현찰이 들어와요. 머리 안 깎는 것은 중이 아니라고 해서 돈이 안 들어오게 돼 있어요. 또 도사는 도사처럼 해야 하고요. 점쟁이나 법사들 수염은 왜 그렇게 했는지, 수염이 돈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복장도 늘 계량 한복이에요.

법사들 수염 기르면 나이 많아 보이죠. 60대가 법사 돼 보세요. 70대가 보면 애예요. ‘수염이나 좀 깎았으면 좋겠다.’ 대외적이지요, 대외적으로 자기 자리를 선전하는 방법이 그 방법이에요. 법복 입고, 머리 깎아요. 여자도 머리 깎아요. 특히 그중에서도 수녀들이나 신부들, 전부 다 ‘폼생폼사’예요. 폼에 죽고 폼에 사는 인간들이에요. 전부 다 대외적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우리가 새로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규정할 수가 없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을 내가 규정하게 되면 나는 옛사람이 되니까요. 새로운 피조물이 따로 있고, 옛사람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규정할 수 있어 버리면 이게 새로운 피조물이 아니고 따로 노는 거니까 이것은 성립이 안 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라 하는 것은 뭐냐? 이것은 철저하게 주님을 영적으로 이해할 때 자동적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거예요. 영적으로 이해하는, 주님을 육적으로 보지 않고 주님이 모든 말씀을 이루신 분이라는 걸 알 때 자동적으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로 예수님 안에 종속되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영적인 사람’이라는 것은 아까 이야기한 대로, ‘질그릇에 담긴 보배’로서 이해하는 거예요. 뭘 지키는 것이 아니고, 뭐를 실천한 것이 아니고, ‘어떤 상황도 주께서 말씀대로 모든 것을 이루셨음을 흔쾌히 감사합니다’라는 그 자세, 이 새로운 피조물, 이럴 때 ‘나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가 아니라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규정했던 말씀이 나를 통해서, 그 말씀 자체가 실현되었다’가 되는 겁니다.

실현되었다, 그 차이점! ‘나는 새로운 피조물이다’가 아니라,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그 규정된 말씀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던 거예요. 그러면 그 말씀의 새로운 피조물을 위해서 나의 옛사람은 그 새로운 피조물 앞에서 뭐가 돼야 돼요? 썩어야 될, 후패해야 될, 버려져야 될 옛사람으로 나는 드러나게 되죠.

‘말씀이 일하는 데 있어서 내가 이렇게 방해물이구나’ 하는 것을 알면서 이 말씀 하나하나에 감사가 계속해서 이어질 수가 있는 겁니다. 이제 5장을 마지막으로 하겠습니다. 고린도후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거죠. 고린도후서 5장 19절에 보면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셔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에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의 죄를 저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여러분 표정 보니까 지금 이해가 안 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저의 죄를 저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제가 설명하는 것보다 문답식으로 합시다. “저의 죄를 저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가 나한테 있습니까, 말씀한테 있습니까? 말씀에 있죠. 그 말씀은 말씀대로 반드시 실현됩니까, 나 때문에 이게 실현이 안 되는 거예요. 반드시 실현되죠.

그 실현된 데에 우리가 합류된 거예요. ‘너의 죄를 너에게 돌리지 아니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이익도 없어요. ‘야, 신난다. 이제 죄짓자.’ 이런 이익을 챙기면 안 된다고요. 말씀대로, 우리가 어떤 죄를 지어도 우리 죄를 돌리지 않는 말씀이 우리에게 장착이 된 겁니다. 우리는 질그릇이니까, 그리고 말씀이 보배니까요. 그 말씀을 실어 나르면 되잖아요.

“택시!”
“예!”
“고린도후서 5장 19절 실어 나갑시다.”
“예, 실어드릴게요.”

그러면 되는 거예요. ‘나는 이제 죄가 없다’고 자랑질하고 까불다가 엎어지고 자빠지고 하지 마시고요, 자꾸 거기다가 나를, 옛 자아를 거기다가 집어넣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다음에 고린도후서 5장 20-21절,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서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그다음에 ‘하나님의 의인’이 되는 겁니까,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겁니까?

‘하나님의 의’입니다. 우리가 의인 되는 게 아니에요. 그냥 하나님의 의가 되는 재료로 우리가 거기에 끼어들 수밖에 없는 겁니다. 저녁 먹으러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