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자료

나타난 천국 3강-점멸등

아빠와 함께 2026. 1. 17. 09:14

2026 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 제3강-고린도후서: 점멸등
(강의:이근호 목사)


세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인간은 비유고, 인간은 은유에 불과하다는 말을 했는데 비유, 은유란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거에요. 인간이 비유가 은유가 돼버리면 이거는 시공간에 구애받지 않는다. 나이 얼마든지 어디에 살든지 간에 주님에 대한 응시는 동일하게 여기서 투사되고 있어요. 똑같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시공간에 네가 인생에서 어떤 변화가 있든지 어떤 사고가 일어난다 할지라도 인간은 한결같은 비유고 한결같은 은유입니다. 그래서 독자적으로 나는 나라는 것을 뽑아낼 생각은 하지 말아야 돼요. 이 비유가 은유인데 이게 성경에서 밝힌 건데요. 실체는 당연히 누구밖에 없느냐 하면 창조주, 주님만이 실체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마귀가 개입해서 인간으로 하여금 주님의 복음의 광채, 그 빛을 가렸다. 이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고린도후서 4장 1절에서 4절까지 나옵니다. 복음을 가리는 것은 인간이 복음을 가리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비유가 은유가 뭘 할 수 있겠어요? 자기는 그냥 속성대로 갈 뿐이지요.

3절에 보면,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다 할 때 이 망하는 자가, ‘나 안 망하겠어’ 하고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4절) 개인보다 누가 더 세냐 하면 이 세상을 장악하고 있는 신, 악마죠. 악마가 더 힘이 셉니다. ‘꼼짝 마라’죠. 본인이 거기에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도대체 내가 어디서부터 무엇이 근본적으로 어떤 점에서 비유와 은유이어야 하는데 지금의 나는 얼마나 틀어졌는지 그 간격, 그 차이가 어느 정도인지를 알아야 되겠지요. 말씀이 이미 우리 자신의 형편에 대해서 제대로 알려줬는데 복음의 광채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너한테 문제 있다고 했으니까 그 문제 있게 된 상황들을 우리가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문제 있다는 그 말씀이 드러나기 때문에.

그래서 인간에 있는 간격인데 인간은 어떤 식으로 문제가 있느냐? 쉽게 예를 들어서 ‘오염된 피부’를 생각해봅시다. 색소침착이 일어나는 피부. 기미, 주근깨 같은 것, 피부가 오염됐지요. 빨강머리 앤, 색소침착이 돼 있단 말이죠. 이거는 그림으로 그리면 이게 피부의 표면이라면 점들이 있잖아요. 내부에 뭔가 호르몬 이상이라든지 무슨 문제가 있어서 세포 이상으로 점들이 찍혀져 있는 거예요. 점은 밑에 있는 문제점 때문에 피부에 증상이 나타난 거예요.

그렇다면 인간 자체에 대해서 오염된 색소침착이 일어나는 것이 인간이라면 원래 인간은 태어나면서 어디서 문제가 일어나는가? 처음에 태어날 때는 육신을 가지고 태어나지요. 부모로부터 육신을 가지고 태어났단 말이죠. 자기를 육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자아, 또는 나, 또는 나 자신 이렇게 달라지는 계기가 있어요.

이게 태어나서 나이가 들고 부모 밑에서 자라가면서 점차 나라는 것을 형성합니다. 형성할 때 이미 여기서 변질이 일어나는 거예요. 변질이 일어날 때 육신이 갖고 있는 비유적이고 은유적인 시공간에 구애받지 않는 그 인간 본래의 신비로움, 신비스러움이 육신에서 여기서 거울이라는 이차원적 물질, 사물을 마주하면서 거울에 비친 이미지를 나라고 규정을 해요.

처음에 갓난아이는 나가 없어요. 자아라는 게 없는데 처음 자아가 생길 때 거울에 비친 빛에 의해서 반사된 그 모습을 보면서 그걸 저게 바로 나구나, 라고 느낄 때 이미 오염이 된 거예요. 오염이 된 이유가, 이걸 진짜 나, 이렇게 보면 돼요. ‘진짜 나’가 있는데 이건 미지에요. 진짜 나를 내가 몰라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인데 거울은 뭐냐? 이차원 평면이에요. 이차원 평면에 비친 내 모습이 내가 앞에 섰을 때 비친 내 모습이 내가 아니면 누구란 말인가? 저게 귀신인가? 아니잖아요.

거울 앞에 선 사람이 나잖아요. 거울 앞에 선 사람이 나라고 할 때 이미 나는 나에게서 객관화되고 나는 내가 나의 타인이 되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인지 어렵지요. 그때부터 육신은 내가 창안한 나, 내가 규정한 나와 대화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이 육신이. ‘너 참 예쁘다. 너 귀엽다.’ 거울 앞에서 텐션 부르면서 몸짓으로 춤추면서 나와 나와 교류가 일어나는 거예요.

시편 135편에서는 이걸 우상이라고 해요. 놀랍게도 우상이에요. 우상은 인간이 물질을 통해서 자기를 표현할 때 이거는 흉내 내기에 지나지 않는 걸 가지고 인간은 동일시하는 거예요. 흉내 내기인데 동일시해버리고 거울 앞의 모습, 이게 나가 돼버리는 거예요.

이게 왜 중요하냐 하면 거울이 아니면 나를 알 기회가 다른 우회 절차가 없기 때문에 거울 앞에서 나로 규정을 하게 되면 그 이미지가 내 머리 속에 각인이 되게 되면 그다음부터 더 커서 누굴 만날 때에 나는 그 사람에게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내세울 때에 거울 앞에 동일시한 이미지를 그 사람 앞에 나라고 정당하고 올바르게 내세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벌써 사달났어, 사달났어. 내가 누구라 하는 것을 굳이 알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비유와 은유는 시공간에 구애받지 않기 때문에 주님이 나를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스톱, 거기서 스톱이 돼야 되는데 이게 주님과 나의 관계가 스톱이 되질 못하고 독자적으로 독립을 해버리는 거예요. 나라는 것을 거울을 비춰서. 그러니 인간의 우상 만들기가 이걸 누가 가르쳐준 게 아니고 본심이에요.

내가 먼저 설정이 돼 있고 확정이 돼 있고 그다음부터는 그 확정된 나를 시작으로 해서 신이든 타인이든 누구든 내가 생각하는 내 이미지를 정당하고 놓치지 않고 내 이미지가 옳다는 것을 점검하고 확인하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신의 형상과 타인에게 내 이야기를 내 언어를 발산하는 거예요.

‘나 어때? 이야기 좀 해. 심심해 죽겠어. 수련회 이야기할 사람 없어서 못 오곤 했는데 잘 만났다’ 하면서 이야기를 해대는 데 그 이야기하고 있는 나는 타인과 이야기하면서 정말 나는 진짜 나라고 오염된 나가 아니고 색소침착 된 나가 아니라 진짜 나는 독자적으로 자기 세계를 구성할만한 자격이 있다는 것을 점점 굳히는 거예요. 거울의 자기 동일시가 없으면 인간은 자아라는 것이 생겨나질 않지요. 태어나자마자 두 시간 만에 죽은 애가 무슨 자아가 있겠습니까?

심리학자, 생리학자에 의해서 자아가 생기는 거울 단계에서 자아를 발견하고 거울 단계에서 비친 자기의 모습을 보고 같이 변화하는 거울의 모습에 대해서 흥미를 느끼는 것은 1년 6개월 정도 보통 그렇게 이뤄진다는 거예요. 그러니 1년 6개월 만에 인간은 버려버렸어요. 자기는 오염 없음으로 이미 처음 봤던 내 모습이 오염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시작 자체는 흠도 티도 없는 것부터 이미 출발하기를 작심을 한 겁니다. 마음을 먹은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육신은 부모가 낳았지만 자아는 내가 만들었다. 근데 내가 누군지는 모르지요. 만들어진 게 나니까. 만들어진 것을 나라고 도로 가져왔으니까. 따라서 나는 나를 만드는 신적 생활을 출발한 겁니다. 온전하고 완전한 신, 그렇게 하는 거예요, 인간은. 제가 여기서 이걸 지우고 좀 길게 쓰겠습니다. 길게 쓰고 쓴 글로 강의를 이어보겠습니다.

방금 이야기했던 강의 내용에 의하면 바로 고린도후서 4장에 나오는 내가 어쩔 수 없이 세상 신에 의해서 복음의 광채가 가려졌잖아요. 복음의 광채가 가려졌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자 없고 나는 완벽해, 라는 자아를 구성한다는 것은 마귀가 준동하는 그 결과물로 인간이 제대로 수립이 된 거죠. 자체적인 빛으로 족하니까요.

고린도후서 4장, 세상 신은 복음의 광채를 비추지 못하게 했는데 마귀가 성공적으로 작품을 만들었어요. 자아를 만들었어요. 그래서 자아는 복음의 광채가 가려진 것에 대해서 그렇게 아쉬워하거나 애가 타지 않습니다. 자아로서 족하니까. 그런데 이것에 초를 치는 게 뭐냐 하면 고린도후서 3장에 모세가 시내산 내려오면서 완전히 사달 났어요.

이게 뭐냐 하면 모세의 광채는 본인 자아의 광채가 아니고 산 위해서 하나님 만나서 나왔던 그 광채를 얼굴에 빛을 발산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산에서 내려오는 모세, 그리고 산 밑에서 40일 만에 만났던 백성들을 볼 때 그 만남 사이에 어떤 이상기류가 흐르지 않겠습니까? 누가 정상이야? 누가 제대로야?

만약에 모세 얼굴에 빛이 있다는 것이 일시적 현상이 아니고 원래 인간은 그런 인간이고자 원했던 것이 하나님 뜻이라면 오염된 쪽은 어느 쪽이에요? 산 밑에 있는 자들이 오염된 거예요. 근데 산 밑에 사람들 입장에서 40일 만에 내려온 모세가 얼굴에 광채가 나니까 저거 천사야? 우리와 같은 부류가 아닌 것 같은데, 라고 그 사람을 자기와 같이 할 수 없는 존재로 간주하는 순간 그들이 산 밑에서 만들었던 그 여호와는 여전히 그들의 여호와로 계속 유지되게 됩니다.

정성과 모든 걸 모아서 금가락지 빼서 애굽의 황소를 여호와라고 만들었던 자신의 그러한 의견조합은 정당화되지요. 왜? 인간의 신의 형상을 만들 때는 출발점이 뭐라 했습니까? ‘나는 정당하다’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내가 여호와에 대해서 정성을 다해 귀한 금을 빼서 송아지를 섬기는 이 정성도 출발점이 나는 정당하다, 내가 낀 금반지도 가짜도 아니고 99.99% 진짜다. 진짜를 모아서 진짜의 금을 이루었다는 그 안에 단지 물질이 아니고 그 물질에 뭐가 스며들었어요?

내가 하는 일은 정당하다는 물질의 조합이 바로 여호와란 이름으로 신이 되었기 때문에 그 황소를 섬기는 게 아니고 금덩어리를 섬기는 것이 아니고 그 물질에 같이 담겨있는 이미지가 내가 섬기는 여호와이고 싶다는 것, 인간의 집단적 소망, 집단지성의 결정체 그것을 그들은 하나님이라고 유지하게 될 겁니다. 누가 오기 전까지는 그게 정당했어요. 40일 만에 모세가 내려오기 전까지는 정당했어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유대인들이 죽인 이유를 아시겠지요. 그들은 마태복음 5장 20절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누구든지 바리새인보다 의가 더 낫지 아니하면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 했어요. 그 말은 정성의 입장에서는 바리새인이 최고 경지에 이르렀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인간이 이거는 바리새인이 아니고 일반인이라도 그 대표자가 바리새인이에요. 일반인이 갖고 있던 자아의 속성을 극대화시켜준 그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 요한복음 8장에 의하면 그들은 누구의 자식이냐 하면 마귀의 자식이에요. 마귀의 자식이 구현하는 그 의의 장벽을 뛰어넘지 아니한 자는 절대로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모든 인간을 어디에다 줄 세웁니까? 저 앞에 바리새인부터 먼저 세우는 거예요. 천국 가지 못하고 천국의 장벽 앞에서 맴돌고 있는 거기서 스톱하고 있고 이쯤 했으면 이 정도했으면 우리도 할 만큼 했다고 주장하는 그들 앞에서 그 뒤에 모든 사람을 다 세워버린 거예요.

결국 모든 사람의 길은 어디에 합류한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 했던 행동에 노선을 같이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주님께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들은 종교인들이에요. 신 없이는 못 사는 겁니다. 여호와 없이는 못 사는 거예요. 그 여호와 어디서 나왔는가? 자기의 정성에서 나왔지요. 누구 정성? 자아의 정성. 자아가 뭔데? 그들은 답변을 못하는 거예요. 네가 뭔데? 네가 어디서 나왔는데? 답변을 못하는 거예요.

이 점을 첫째 시간, 둘째 시간을 같이 겸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성경 하나하나가 참 타이밍 죽여줍니다. 사도 바울이 모세의 시내산 영광을 보고 수건으로 가리고 그 수건의 영광과 지상의 인간의 영광은 타협할 수 없고 섞일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놓고 그다음에 성령을 중간에 집어넣어요.

성령, 그리스도의 영을 집어넣으면 볼 수 없는데 만날 수 없는데 같이 할 수 없는데 성령 안에서 그게 같이 되고 만날 수 있고 구원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지금 고린도후서 3장 말미에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있는 자는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자유가 있느니라. 구애받지 않고 자아가 있더라도 하나님의 거룩을 받아들일 수 있느니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유럽의 자본, 신대륙의 자원, 아프리카의 노동력, 이것이 자본의 무환 순환. 자본(정보, 전문지식)의 무환 순환시대에 돌입.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처음에는 이 세상의 주인은 신이었어요. 중세 때 신의 대리자가 등장해서 나한테 맡기라 해서 왕이 등장하고, 1789년 프랑스혁명 후에 왕 자리에 왕과 귀족적인 생활을 누가 했느냐? 일반인들, 처음에는 부르주아, 중소업자, 금융업자가 했지만 나중엔 인간. 인간 자리에 자본. 시대가 이렇게 달라진 거예요.

신 → 王 → 인간 → 자본
중세 → 고전시대 → 근대 → 현대

시대가 이렇게 바뀌는 겁니다. 신의 자리를 왕이 차지하고 왕 위주, 귀족. 땅이 많을 때는 귀족이에요. 생활이 너무 고급스러우니까 부러워해서 부르주아, 서민들도 나도 귀족 좀 하자, 나도 왕처럼 살자, 해서 혁명을 일으켰고 인간이 이 자리를 차지했거든요. 신의 자리가 지워지고 왕과 귀족이 신의 이름으로 그 자리를 차지했고, 그 백사장에 인간의 얼굴이 새겨져 있고, 그 백사장에 무슨 파도가 오느냐 하면 자본의 파도가 밀려와서 인간의 얼굴을 전부 다 삭제시켜버렸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방금 이것만 알아도 세상 역사는 어떻게 흘러가는지 압니다.

그다음에 인간은 뺑뺑이 돌리기 판. 옛날에 아이스께끼, 지금 젊은 사람 모르지만 회전판 돌려서 잘 찍으면 어떤 때는 한 개 줄 걸 두 개 주고 그래요. 그런데 그 뺑뺑이판에 열 개도 있거든요. 열 개는 백날 해도 안 꽂입니다. 왜냐? 뒤에 철판 깔아서 튕겨나가니까. 상술입니다. 회전추첨 판이죠. 돌아가는 카지노 룰렛 같은.

위의 존재, 이게 현재 인간이 이런 존재입니다. 자본이 인간을 대체했다 이 말이거든요. 뺑뺑이 판이니까 어떻습니까? 중심부위가 따로 있고 여기는 가장자리, 변두리부분이 있겠지요. 중앙에 사업기질이 없는 샌님 같은 존재는 자본의 회전 에너지로 휘둘려서 끄트머리로 나가떨어진다. 보통 밀려나간다 하는데 좋게 말한 거고, 나가떨어진다. 왜냐하면 회전판이 에너지를 갖고 있으니까 나가떨어진다.

여기 전문지식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변호사, 의사, 한의사, 치과의사, 세무사, 회계사, 약사, 이들의 자격증은 면허증에 불과하다. 이거는 영업할 수 있는 허가증에 해당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거에요. 평균의 함정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된다. ‘평균의 함정’이 무슨 말이냐 하면 의사들은 평균 얼마 벌더라, 약사들은 얼마 벌더라. 그건 환상이에요. 평균대로 가는 게 아니에요. 잘 되는 사람은 더 잘 되고 없는 사람은 전부 다 빚더미에 올라가는데…. 안 된다고요.

그다음에 플랫폼에 수수료를 떼어줘야 한다. 플랫폼이라 하는 것은 정보시장에서 전체적인 데이터를 갖고 있다든지 또는 어떤 기계에 대해서 독점적인 기술을 갖고 있는 이런 업체를 말하지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끝납니다. 특화된 분야의 집중해야 한다. 이런 전문직은 플랫폼의 하청업자로 전락. 제일 중요한 것, 사업가 마인드가 없으면 빚더미에 앉고 사업가 마인드가 있으면 크게 망한다. 도대체 인간은 이 땅에 망하기 위해서 태어난 거예요. 이래도 망하고 저래도 망한 거예요.

룰렛, 돌아가는 판은 뭐냐 하면 순환이라 하는 것의 에너지에요. 에너지의 수급에 의해서 뺑뺑 돌아가는 데 전 국민을 투기꾼을 만들어요. 투기장이에요. 이 세상의 백사장에서 인간의 얼굴을 완전히 덮어버립니다. 이 세상이 그래요. 자본의 흐름이. 이게 요한계시록에 나오지요, 18장.

여기 샌님 같은 존재는 자기 노동해서 월급 받는다. 이건 어느 시대냐 하면 근대시대에요. 노동의 대가를 받는다. 그런데 이 시대는 그 노동의 대가를 받더라도 그 노동의 가치가 빨리 도는 자본의 순환에 의해서 그 가치가 점점 더 내려가죠. 자칫하면 44분의 1로 떨어질 수 있어요. 이란의 리얄처럼. 똑같은 돈을 받아도 투자하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갖고 있는 돈이 점점 더 시세가 떨어지도록 자본의 순환이 그 원동력을 차지한다고요.

여러분, 범죄하는 사람이 범죄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착하고 싶어서예요. 착하고 싶은데 착할 능력이 없어서 범죄를 저지르는 거예요. 이 자본시장에서 착하다하는 것은 내가 의롭다는 것을 실질적으로 자본으로 표시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가 착한 사람이에요. 개뿔도 돈도 없으면서 착한 것은 모든 사람이 사양합니다. “오지 마, 오지 마.” “도와줄게.” “도와주지 마. 돈 벌어서 도와줘. 지금 도와주지 마.”

이 아이스께끼 판, 룰렛 판에 우리의 좌표를 찍어보자. 지금 어느 지점에 있느냐? 문제는 이게 회전력이 있기 때문에 한 지점에 있더라도 약간의 투자에 대해서 관심이 없든지 소홀하게 되면 벌써 25센티미터 밀려나가 있어요. 이게 쭉 밀려나간다고요.

이런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런 시대가 왜 되는가? 다 지웁니다. 이걸로 인류역사 끝났습니다. 인류역사는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인류역사는 끝나고 이 환경 속에서 우리가 할 것은 왜 이렇게 피부침착, 왜 오염됐는가? 오염된 이유가 뭐냐? 그게 바로 사도 바울에 의하면 그것이 자기 의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에서 나오는 나의 광채가 남한테 먹히는 그런 내가 되기를 바라는 거예요.

고린도후서 5장 봅시다. 5장 21절, 고린도후서에서 핵심부분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사람의 능력이나 사람의 지혜로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지혜로 아는 것이 십자가로만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이 고린도전서 1장, 2장에 벌써 나오는 데요. 고린도후서에는 5장 21절이에요.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니까 대신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의를 생산하는데 우리한테 맡기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만큼 우리는 오염됐으니까. 주근깨, 기미부터 해서 우리 자체가 따로 나만의 의를 가지고 독자적인 나의 세계, 내가 나를 계속해서 생산해내고 나를 확장시키는, 어릴 때부터 들은 습관이 나는 나를 창안한다. 나의 창안자는 나다. 이게 문제 있다는 걸 생각 못하고 그렇게 생겨먹은 걸 어떡하란 말입니까?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는데. 거기에 대해서 맞닥뜨려야 되겠지요.

그 저항이 뭐냐? 너를 대신하여, 그다음에 ‘죄 없으신 분’이라고 돼 있거든요. 그러면 대신하신 분 빼놓고 앞에 있는 ‘너’를 어디다가 연결시키느냐 하면 죄 있는 자로 아예 규정을 하고 규정이 된 채로 너를 대신하여 죄 없는 분을 투입해서 그다음에 뭘 제거하느냐? 너에게서 뭘 제거한다? 너의 의를 제거하는 거예요.

너의 의를 제거해버리면, ‘나는 의롭게 되고 싶다’ 현실세계, 자본의 세계에서. 이거는 뭐냐? 나는 의롭게 되려면 돈이 있어야 된다. 그래야 타인들이 있으니까. 돈이 있으면 그게 나의 힘이 된다. 따라서 내가 범죄하는 이유는 돈 있는 자와 힘 있는 자가 나보다 더 착하기 때문에 도대체 참을 수가 없는 거예요. 나도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너보다 착해질 수 있어. 그게 질투심이 나오는 거예요.

따라서 뭐냐? 빨리 돈 벌어서 내가 얼마나 훌륭하고 내 자아 자체가 내 스타트 자체가 훌륭한 자아로부터 시작해서 여기에서는 어떤 하자가 없고 어떤 미흡점이 없고 계속 완전, 완전, 완전을 계속 추구하고 있고 그것을 타인들이 알아줬으면 좋겠다. 그런 식으로 하고 싶은데 그게 실패로 끝나니까 그들은 뭐냐 하면 바로 살인부터해서 각자 범죄가 일어나는 거예요.

결국 무슨 문제입니까? 내가 의롭게 되기 위해서 현대에서는 뭐가 필요합니까? 양심, 착한 것 소용없어요. 돈이 필요한 거예요. 돈이 힘이 되니까요. 이게 바로 누가복음 15장에서 탕자가 아버지의 품을 떠난 결정적인 이유가 뭡니까? 그 아버지의 돈으로 종자돈 삼아 밖에 나가 뭐 하겠다? 독자적인 자기 세계. 돈 있으니까 친구가 왔는데 돈 떨어지니까 다 떠났잖아요. 그런데 그 아버지는 돈 떨어지기를 기다린 거예요.

주님께서 이 해결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돈 없어 힘없다. 그래서 나는 의롭게 됐다’ 이것을 어떻게 바꾸느냐? 썩어진 자가 복음의 빛에 눈을 뜬다. 이 방식을 주께서 사용한 거예요. 썩어진 게 어디 있느냐 하면 바로 여기 고린도후서 4장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후패한다는 건 썩는다는. 우리는 피부는 썩지만 썩는 것을 통해서 우리 속에 새로움이 계속 나온다는 거예요.

더 노골적으로 이야기해볼까요. 빛이 빛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점점 뭐 해야 돼요? 한없이 어두워져야 돼요. 로마서 5장에서 그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러분 이거는 안 찾아봐도 알지요.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20절) The law was brought in so that the trespass might increase. But where sin increased, grace increased all the more, 해놓고 율법이 들어와서 범죄를 추가시킨 이유가 뭐냐?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 넘치게 하기 위함이다. 이게 하나님의 방식이에요.

처음부터 인간의 육신은 마귀에 의해서 농락당하게 돼 있고 그 사실을 모르는 인간은 마귀가 부추기는 대로 자기 육신 안에서 작은 조그마한 신으로 행세했던 겁니다. 모든 것을 나로부터 시작한다. 나도 내가 만든다. 내가 없는 데도 불구하고 내가 만들어놓고 그 만들어진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나라고 가져와서 그 나로부터 남과 거래에 나선다. 그리고 이러한 내가 본색을 드러내죠. 내가 만든 내가 얼마나 의로운지, 정당한지를 대외적으로 보여주겠다.

이게 바로 가인이죠. 자기는 정당하게 제사 드리는데 동생의 제사 안 받고 자기 제사도 안 받으면 가인이 동생을 죽일 이유가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동생을 편애해서 아벨의 제사는 받아버리고 자기의 제사는 안 받았잖아요. 차이가 났지요. 동생의 제사는 뭔데 받고 내 제사는 왜 안 받는가? 이게 가인의 잘못된 생각이었어요. 둘 다 이게 오염된 거예요.

그러나 오염됐지만 오염된 것 한쪽을 받았던 것은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의해서 죄 있는 자를 받아준 것은 죄 없으신 분이 대신 죽으심이란 복음의 광채를 빛내기 위해 그렇게 한 조치란 말이죠. 그런데 가인은 그 사실을 모르고 이게 물질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우상화시켰기 때문에 여기서 신비로움이 날아갔어요. 신비로움이 누락된 것, 이것이 바로 시편 135편에 보면 우상입니다. 우리가 동으로 서로 움직인다는 말은 우리 자체가 곧 우상이란 뜻이에요.

그러면 하나님의 조치를 봐야 되겠지요. 이야기를 이렇게 끝나면 안 되겠지요. 상당히 절망적입니다. 내가 돈 필요하기 때문에 옛날식으로 노동해서 돈 버는 시대는 끝났어요. 사업적 기질이 없으면 자본의 순환 판에 중앙지로 가지 못하고 소외되지요. 소외되면 한직에 간다든지 외롭게 산다든지 기웃거리다가 튕겨져 나간다든지. 돈 없으면 그냥 있는 걸로 먹고 살면 되는데 성경말씀이 먹는 것 입는 것 먹고 사는 사람이 없어요.

중요한 것은 먹는 것 입는 것이 아니고 곧 죽어도 없더라도 잃고 싶지 않은 것은 뭐냐? ‘나는 정당하다, 나는 의롭다’에요. 이거는 어떤 경우라도 나 가난하다고 무시하냐, 이런 이야기하는 것은 뭔 뜻입니까? 드라마 모든 이야기가 이거잖아요. ‘날 무시하지 마라. 그래서 인간들은 어두움에서자체적인 빛으로 나오는데 주님께서는 빛 되신 분이 어두움을 유발시켜요.

어두움을 유발시킨다는 것은 범죄를 더 저지른다는 말이 아니고, 현재 우리가 있는 이 자체 어두움의 세계가 확장되는 거예요. 소경이 눈을 떠서 어느 것 하나 내가 어둡지 않은 게 없음을 새삼스럽게 파악함으로서 빛 되신 주님의 광채가 나와 족히 비교되지 않는 엄청남을 알지요. 그 빛 앞에서 자아는 어떻게 됩니까?

있으나마나 할 때 그게 바로 고린도후서 끝에 나오는 자유 아닙니까. 내가 있는 것 맞고 자아가 있는 건 맞는데 그래서 뭐? 나한테 중요한 것은 복음의 광채가 중요하지 어두움의 일부인게 뭐 중요해. 이게 바로 자유다, 자유. 자유의 특징은 앞으로 그 사람이 뭐든지 군말하지 않고 할 수가 있다는. “물 좀 주세요.” “예.” “여기 김도?” “예.” 뭐든지 할 수 있는 거예요. 이게 신비로움이에요.

그렇지 않고 이 신비로움이 없어서 어두움을 탈피해서 빛의 세계는 의로우니까 의로운 데로 가보자고 나선다면 이 사람은 그냥 이 사람의 충동, 충동이란 것은 욕구에서 요구를 빼면 이게 욕망이 돼요(욕구-요구=욕망). 욕구, 어린아이가 젖 달라 밥 달라 할 때 욕구가 있잖아요. 울면서 타인에게 욕구가 있는데 엄마한테 요구하게 되죠. 그런데 아이가 젖 줬는데 울어요.

이게 뭐냐 하면 내가 알지 못하는 충동을 내가 원하는 식으로 요구한다고 해서 그것으로 다 채워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게 벌써 인간은 오염된 거예요. 내가 원하는 것을 달라 해서 있으면 내가 만족해야 되는데 미흡함이 있어요. 늘 갈증이 생기는 것, 요한복음 4장에서 그게 바로 욕망으로 남는 거예요. 이 욕망은 뒤에서 부추기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충동입니다.

본능은 동물에게 있지만 충동은 인간에게 있는데 이 충동은 무엇과 관련되느냐 하면 절대자, 또는 신, 완전한 의식에서 비로소 충동이 생깁니다. 나는 신이어야 되거든요. 신인데 현실은 안 받쳐주니까 욕망을 따라 계속해서 떠나고, 떠나고, 떠나고 한 자리에 머물지 않고 계속 떠나는 거예요. 이걸 정주하지 않고 떠나고 떠나는데 떠나는 동기가 뭐냐? 내가 어디까지 나의 완전한 의로움을 실현할 수 있는가에 자체적인 세상 여행에 나섭니다.

자체적인 의가 있으려면 물질적인 뭐가 있어야 된다고 했어요? 돈이죠. 강의 잘 들어서 고맙습니다. 돈만 있으면 착해요. 기마이 쓸 수 있거든요. 돈만 있으면 친구들이 와서 사람 좋다는 소리 들을 수 있는데 누구든지 할 수 있는데 나도 그런 자질이 있는데 문제는 돈이 없어서 그래요. 돈이 없으니까 돈을 얻기 위해서 계속 돈이 있는 회전판 중앙으로 가는 겁니다.

가면서 여기서 뭐냐? 자본의 맛을 봐요. 자본의 맛은 <스카이 캐슬> 드라마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로 대신할 수 있어요. “어머님, 저를 믿으셔야 됩니다.” 이게 뭐냐 하면 신용, 현찰은 없어도 신용이 가치로 돌아오는 그 시대상을 말하는 겁니다. 땅 좋은 것 나왔는데 저를 믿으셔야 됩니다. 월급 가지곤 애 수술비 안 됩니다. 저를 믿으셔야 됩니다.

비트코인은 실체가 없어요. 비트코인의 가격을 결정하는 것은 그 투자자들의 투자의지가 가격을 결정하는 거예요. 내재적 가치는 없어요. 전기 돌리고 하는 그런 가치는 외부에서 투자자가 가치를 높여주면 그건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거예요. 이거는 비트코인뿐만 아니고 모든 가치가 사용가치는 거의 없어요. 시장에서 내놓을 때 교환가치가 그 가치를 결정하는데 그 교환가치는 신용입니다. 앞으로 가격이 더 높아질 거라는 신용.

“어머님, 믿으셔야 됩니다. 앞으로 더 좋은 세상이 오는 것을 믿으셔야 됩니다.” “어디서 이게 사기 쳐!” 맞아요. 사기인데 사기에 걸려들지 않으면 그 아이스께끼 판에서 밀려납니다. 그럼 어쩌란 말인가? 아까도 이야기했잖아요. 인간은 이래도 망하고 저래도 망하는데 한탕하고 크게 망하는지 아니면 지연시키면서 망하는지 인간은 이미 그 굴레에 빠졌습니다. 중요한 것은 해결책을 어떻게 하는가? 이 시간 끝내면서 해결책을 주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10분 동안 쉴 때 찜찜하면 안 되니까.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빛이 되셔서 어두움을 더 크게 할 때 뭐로 오느냐? 말씀으로 와요. 그 말씀 안에는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는 그 절차로 우리에게 파헤칩니다. ‘내 백성 거기 있나, 어린양 여기 있나.’ 주께서 찾아올 때 자신이 잃어버리는데 성공적으로 마귀를 뚫고 승리한 그 능력으로 집어넣는데 너의 의는 필요 없고요. 이제 필요한 것은 나의 의만 있으면 이 적은 자여, 두려워하지 말라. 하늘나라는 너의 것이다. 누가복음 12장 28절의 말씀이에요. 12장 32절에,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이것이 마태복음 7장에 나오는 넓은 길, 좁은 길이에요. 인간은 넓은 길, 좁은 길이 어떻게 차이 나느냐 하면 넓은 길은 찾는 사람이 많고, 대세지요. 좁은 길은 찾는 사람이 적어요. 그러나 그 끝은 한쪽은 멸망이고 한쪽은 영생, 이미 확정되었습니다. 그 말씀의 작용이 어떻게 되어지는지는 10분 뒤에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