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자료

나타난 천국 7강-사람의 아들

아빠와 함께 2026. 1. 17. 17:49

2026 겨울수련회 고린도후서 제7강 : 사람의 아들 - 이 근호 목사

7번째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 다시 보겠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적어볼게요. 누구든지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수 안’과 ‘새로운 피조물’ 이 둘 중에 어느 쪽에 호감이 가고 어느 쪽에 집중되고 마음에 가 있겠어요? 마음이 ‘예수 안’에 가 있겠습니까, ‘새로운 피조물’에 가 있겠습니까?

새로운 피조물은 예수 안에서 나왔기 때문에 순서 상 ‘예수 안’에 먼저 가 있어야 돼요. ‘예수 안’에 가게 되면 ‘인간’이라는 명칭이 없어요. ‘인간’이라는 명칭이 ‘육’으로 바뀝니다. 육의 특징은 무엇과 대체되고 무엇과 대립되느냐 하면 영과 대립되게 되어 있어요. ‘인간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을 반대했다’는 그 내용을 인간에게 되돌려줘 버려요.

“너희? 너희는 인간이 아니야. 인간이 아니고 육이야.” 이렇게 사도 바울이 육을 육으로 개명을 하죠, 개명을. 호칭 개명 또는 명칭 개명. 명칭을 바꾸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개념 변경을 시도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흔히 예수님의 사건을 그 현장에서만 일어난 사건으로 오해하기 때문에 그래요.

‘십자가 사건에 그 시대에 관여했던 인간들, 그리고 거기 바리새인들, 그 사람들 정말 나빠.’ 그 인식이 유럽의 역사에 계속 퍼져서 그들의 경제가 안 좋을 때는 유대인 책임이고 유대인에 문제 있다는 식으로 지금도 계속 그런 게 있어요. 자기 사회를 통합하는 하나의 희생물로 유대인들을 거론해서 유대인들을 학살함으로써… 쉽게 말하면 우리나라에 온 베트남 사람들을 보고 이런 사람들 때문에 나라가 안 된다고 겨냥해서 말하는 것처럼. 사회가 어지러운데 캄보디아 때문에 그렇다. 또 필리핀 사람들한테도 마찬가지고.

누구 하나를 희생물로 제공함으로써 갑자기 관심이 희생물에게 집중되다보면 자연적으로 그들은 한 패가 되고 통합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사회 통합을 달성하기 위해서 희생 대체물로 등장한 것이 유대인이 된 겁니다. 너희들이 유대인을 죽였잖아. ‘너희들이 유대인을 죽였다’ 할 때에 십자가 달았던 그 때 인간들은 질이 나쁜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바로 예수님의 계시를 받아서 나쁜 인간, 좋은 인간이 없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육의 보편성 때문에. ‘그 당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나쁘다’가 아니라 그들이 십자가 사건을 건드리고 그로부터 퍼져나갔던 거예요.

십자가 사건을 산 위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봅시다. 십자가 사건이 퍼졌습니다. 그러면 중력에 의해서 어떻게 됩니까? 이 모든 개념은 아래쪽으로 흘러가겠죠. 공간적이 아니고 시간적으로 아래쪽으로 흘러가버리면 오는 모든 세대에 있어서 십자가 사건이 관여되고 십자가 사건의 의미가 번지면서 모든 인간은 뭐로 개념이 변경되느냐? 모든 인간은 뭐로 바뀌느냐? 육으로 바뀌는 거예요.

‘인간들끼리 누가 더 낫다, 못났다는 것은 육이라는 이 개념을 적용시키면서 더 좋고 더 악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모든 육은 영에 대해 반대잖아.’ 이렇게 규정하는 겁니다. 이런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믿든 안 믿든 간에 모든 복음 전파를 통해서 인간은 육이 되고, 그럼 인간은 어디 있느냐? 없느냐? 인간은 오직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 참된 아담, 참된 인간으로 등록됩니다. 등록돼요. 육이 육보고 잘했다, 못했다를 평가할 수 있는 어떤 권한은 이젠 상실되는 겁니다.

이와 같이 위에서 아래로 흘러가면서 시간과 공간이 중심을 잡고 그 중심에 있는 원칙은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아무리 공간이 퍼져도 변동할 게 없이 확정되어 그대로 간다. 그래서 여기서 예수 안에 있는 자인 새로운 피조물은 인간이 아닙니다. 진짜 인간에게서 나온 새로운 피조물은 ‘영에 속한 사람’이 돼요. 영, 예수님께 ‘속한’ 사람이 돼요. 어디서 제목으로 많이 들었죠? 워치만 니(Watchman Nee, 1903-1972) 책 제목이『영에 속한 사람』이에요. 영에 속한 사람. 독자적으로 ‘나는 이렇다’고 규정할 수 없어요. 어디에 소속이 되어 있으니까. 나는 이렇다는 것은 반칙이 되는 겁니다.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래서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새로운 피조물의 특징은 예수님께 종속된 관계로 이어지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새로운 피조물의 근거는 뭐냐? 육의 근거는 이제 끊어졌습니다. 육의 근거는 끊어졌어요. 육이 어떻게 어떻게 해서 믿음으로 소망으로 사랑으로 육이 어떻게 해서 새로운 피조물 되는 그러한 고리는 완전히 절단됐어요. 없어요. 다리가 끊어진 거예요.

육은 뭐라고 했습니까? 육은 7이 아니고 8이 아니에요. 육은 육이요! 육은 육이요 영은 영이다 이 말이죠.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육은 육이고 영은 영이에요. 육이 보다 나은 글을 쓴다? 육이 어떻다, 뭘 한다? 그걸 왜 기대합니까? 육이라 하는 것은 육다워야 돼요. 육다워야 돼. 7은 주님이 7이지, 육은 육다워야 돼요. 육이 육으로 등장하면 되는 겁니다. 개념 변경을 위해서 어떻게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어요.

그러면 이러한 모델, 이러한 원칙이 어디서 나왔는가? 바로 에덴동산에서 나왔어요. 그래서 지금 이 시간에 해야 될 것이 뭐냐 하면 에덴동산의 구조가 어떤가? 에덴동산의 구조라는 것은 에덴동산이 중앙을 차지하고 거기에서 퍼져나간 것이 이 세상이라는 거예요. 이 인간세상이라는 겁니다. 그 중심은 에덴동산으로부터 출발했다.

‘에덴동산으로부터 출발해서 이 세상이 퍼져나갔다.’ 이러한 체제가 십자가의 체제와 무슨 관련이 있는가? 이것은 비유와 하나의 은유가 되는 겁니다. 구약이니까. 고린도후서 10장을 보겠습니다. 10장 5절에 보면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이론이죠, 모든 이론. 인간세계에서 꾸준히 여러 가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이론들, 지식들 체계가 많이 발달되지 않았습니까. 사도 바울이 전도할 때 아테네 같은 경우, 그 당시 과학이 철학이었으니까 과학과 철학을 확보하게 될 때 거기서 윤리가 나오고 그 윤리를 구체화, 현실화시킨 것을 정치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게 플라톤 철학이에요.

‘인간이 갖고 있는 선함을 얼마나 잘 절제하고 통제해서 국가라는 총체적이고 완벽한 윤리, 선한 조직을 만드는가’ 그 이론이 플라톤의 국가 이론입니다. 국가 이론에 의하면 대통령에 입후보된다고 다 되는 게 아니에요. 왕은 반드시 이미 철학자이어야 해요. 지혜의 총화. 모든 지식과 지혜의 총화. 여기서 지혜라 하는 것은 오늘날 과학을 포함하는 겁니다. 가장 현명하고 가장 똑똑하고.

요새 말로 하면 지식+덕, 지식+우수한 덕, 훌륭함 이것을 겸비한 사람을 피라미드의 정점에 두고 나머지는 그 지식과 덕의 함량, 분량에 따라 계급을 내세우면 제일 밑바닥에는 막가는 인간들이겠죠. 그 막가는 인간들의 동물성, 짐승, 야생적인 것을 지혜와 똑똑함과 덕스러움으로 통치하게 되면 이게 이상적인 국가라는 거예요.

플라톤의 국가론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헌법이라든지 세계의 헌법에 보면 ‘모든 주권은 국민에게 나온다’라고 되어 있죠. 국민에게 나온다. 진짜 국민에게 나와요? 아닙니다. 중간 업자가 있어요. 그게 국회의원입니다. 국민들은 정치 몰라요. 할 일 없는 자기들끼리 월급 많이 받고 게임하고 자기들 노는 장소가 정치에요. 대리자가 되었다는 말은 ‘이제 너희들은 까불지 마라. 우리가 대리자야. 우리는 지식이 많고 덕스러우니까.’ 이렇게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 만드신 조직표를 먼저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7장. 주님께서는 어떤 조직을 생각했는가? 그게 요한복음 17장 예수님의 기도에 나옵니다. 15절,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그다음 나온 말이 뭡니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보전하는 거예요, 보전. 지켜주는 거예요. 예를 들면, 우리나라 <애국가> 가사를 보겠습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길이 보전하세’ 유사하네요? ‘동해물과 백두산’이 현재 눈에 보이는 시공간이잖아요. 시공간을 보전하기 위해서 국가를 만드는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심으로써 이 시공간은 은유와 비유에요. 나중에 하늘의 별 떨어지고 모든 과학의 대상에 대해 측정 자체가 날아가버려요, 측정 자체가. 측정 자체가 날아갑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연 세계는 튼튼하다고 생각하고 옛날에 물로서 세상이 멸망한 것을 일부러 잊어버리고 이제는 ‘항상 세상은 그전부터 계속 이어져왔다’는 생각을 해왔다고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나와요. 어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는 거예요.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벧후 3:4-5)

빅뱅이라는 것도 하나의 가설이지 빅뱅도 증거 없다는 식의 그런 이론이 유행하고 있어요. ‘빅뱅 같은 소리하고 있네. 다중 우주인데 무슨 빅뱅이 있어? 우주와 우주 사이에 그 접촉점에서 생기는 힘이 중력이라 해서 빅뱅이 아니고 샌드위치처럼 끼어있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뭐 이렇게 설명하는데, 어쨌든 간에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에너지는 소멸되지도 않고 새로 생겨나지도 않고 그냥 natural 그대로 간다는 겁니다. 그냥 간다는 거예요.

그러면, 우주가 그냥 가는 목적이 뭐냐? 세상이 ‘우주가 그냥 간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인간으로 진화되는 그 자체가 이게 바로 우주의 존재 이유라는 거죠. 진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 거예요. 전체하고 부분하고 혼동만 하고 있어요. ‘아빠, 엄마가 계신 이유는 뭐냐? 나를 낳기 위해서요.’ 진짜 이게 말이야, 막걸리야? 하는 말처럼 말도 안 되는…

모른다고 이야기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모른다고 이야기하게 되면 지금껏 쌓아온 자기의 모든 이론이 ‘모른다’에 기초했다는 그 허약한 기초를 스스로 자백하는 게 되기 때문에 이것은 과학적 자존심에 허락이 안돼요. 모르는 것부터 해서 모르는 것 위에 모르는 것이 되면 이것은 임시방편으로 기능의 편리를 위해서 기술 획득한 것이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 기능이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참인지 거짓인지 판단기준조차 ‘나는 거기에 대해서는 생각한 바 없다.’ 이렇게 되어버려요. 자기의 허점을 스스로 밝히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이론이 높아졌다 하는 것은 여기서 방향성을, 십자가로 인하여 복음으로 인하여 인간들은 어둡고 어두운 자기 어두움의 방향성을 계속 지금까지 키워왔다, 확장시켜왔다. 확장시켜왔는데 그렇게 된 원인이 뭐냐? 십자가 사건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십자가 사건의 이러한 체계와 이러한 형태와 모습은 어디서부터 되는 건가? 그것은 십자가가 원래고 그런 형태를 창세기 1장, 2장, 3장에서 십자가를 겨냥해서 미리 하나의 모형으로 주께서 생명나무와 선악과를 에덴동산에 심어놨다는 거예요. 사도 바울의 이론이에요. 사도 바울의 이론이고 주님의 뜻이고요.

이게 본격적으로 나온 것이 골로새서입니다. 1장 16절, 세상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만들어진 거예요. 심지어 보이지 않는 천사까지.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이 말이 합당하다면 인간이라 하는 것은 뭐냐? 제가 첫째 시간에 했죠. 인간은 뭐냐? 비유요, 그냥 은유에요. 인간은 따로 있습니다. 누가 인간입니까? 두 번째 아담이 인간이에요. 마지막 아담, 두 번째 아담이 진짜 인간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든 진짜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입니다.

그러면 새로운 세상의 다스림은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형상이 이루어지게 되는 거예요. 예수님 안에서. 그들을 주의 말씀으로 보전한다는 것은 그만한 권한이 예수님께 있는 거예요. 예수 안에서 참된 인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창조가 새롭게 개시되는 거예요.

그러면 기존 창조는 예수님의 시공간과 새로운 피조물로 인하여 그들은 은퇴해야 됩니다. 이것은 다 없어져야 돼요. 새로운 게 있는데 옛것과 섞일 수는 없지 않습니까. 복음이라는 것이 단순히 예수 믿고 천당 가자는 것이 복음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의 설계도’가 바로 십자가 복음이라는 겁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계속 봐야 될 게 에덴동산에서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 그 가운데 뭐가 있는가? 구약 성경이 있었잖아요. 구약 성경도 비유고 은유겠죠. 비유와 은유이면서도 뭔가 에덴동산의 그 중심성과 십자가 중심성이 서로 만나기 위해서 중간에 십자가 중심성으로 점점 더 발달하는 어떠한 변화 또는 변경의 징후 같은 것들이 보여야 되는 거예요. 보이는데 그게 시편 8편입니다.

시편 8편 보기 전에 먼저 고린도전서 1장부터 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과 2장을 보겠습니다. 아까 고린도후서 10장 본 것을 생각하세요. 인간의 이론이 높아진 것을 그리스도께선 다 파하신다. 인간의 이론을 높이도록 충동한다 또는 그들을 높이도록 방치하고 유도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전파하는 그 결과로서 그들의 이론은 점점 더 높아진 거예요.

십자가 복음을 전한다고 그들이 변화를 받고 ‘이론이 잘못됐구나’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복음을 전파하면 전파할수록 인간들은 자신에 대해 고집스럽게 인간의 지혜에서 나오는 그것을 더욱 더 키워나가는 그러한 현상이 동반해서 일어난다 이 말이에요. 그만큼 골이 더 깊어지는 거예요. 대립이 더 깊어지는 거고.

고린도전서 2장에 보게 되면 2장 13절에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여기 갑자기 사람이 두 종류가 됐죠. 하나는 육에 속한 사람이 있는 거예요. 육의 보편성. ‘육에 속한 사람은’ 이렇게 돼요. 다른 말로 하면, 십자가의 능력으로 더 이상 사람이 아님이 들통나서 너는 영의 일에 반대하고 저항하고 도전하는 그런 종류의 인간으로 따로 분류된 자, 육에 속한 사람이에요. 성령을 받지 못해서 성령 받은 자를 핍박하고 공격하는 그런 류에 속한 자가 육에 속한 자에요. 명칭이 벌써 인간이 아니에요. 인간이 아니고 그냥 육이에요. 육이라 하는 것은 ‘육체뿐이다’ 그런 뜻이 아니거든요.

아까 고린도후서 5장에 나온 것은 내가 이제부터는 예수 그리스도를 뭐로 알지 않겠다? 육체로 알지 않겠다고 했잖아요. 16절,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예수님을 육체로 알지 않겠다고 한 것은 그 당시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육체로 알았다 이 말이죠. 그런데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만 육체로 안 것이 아니고 이제는 복음을 전파하는 후대 시대에 모든 인간을, 예수님을 육체로 아는 자로 바리새인을 확장시키는 거예요. 바리새인의 범주를 확장시켜서 복음을 들어도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는 그런 사람들이 생산될 수 있도록 복음이 바로 그러한 결과를 계속해서 유발시키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영적인 사람은? 영적인 사람은 인간이 아니에요. 그냥 영적인 사람이에요. 영적인 사람은 십자가를 안다? 아니죠. 영적인 사람은 영을 받은 사람이죠. 무슨 영? 십자가의 영을 받은 사람이죠. 십자가의 영을 받은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육에 속한 사람 보기에는 철저하게 뭐가 배제되었느냐 하면 인간 자체의 판단력이 전혀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은 알게 될 거예요.

영에 속한 사람이 더 똑똑하고 지혜로워서 ‘잘 판단해봐. 예수님이 메시아 맞잖아.’ 이렇게 하게 되면 영에 속한 사람이 똑똑한 사람이에요. 그러나 모든 인간은 육에 속한 사람이에요. 성령이 오면 영에 속한 사람 되고 안 오면 그냥 육에 속한 사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러한 판정은 어디서 내리는가? 십자가 사건에서 나온 능력으로만 가능한 거예요.

같은 뜻으로 고린도전서 1장을 보겠습니다. 1장 19절에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는 이유가 인간의 지혜로 도저히 파악이 안 되는 사건, 십자가 사건을 일으킨 거예요. 그런데 이것은 일방적인 누구 이야기냐? 영에 속한, 그리고 주님께 속한 주장이잖아요. 그런데 아직도 내가 살아있는 인간이고 내 판단력을 신뢰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들의 반응은 어떠할까요?

이렇게 나올 거예요. ‘우리도 예수에 대해서 그렇게 손 놓고 있었던 건 아니야. 나름대로 분석을 했어. 참 억울하게 죽었다.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그런 착한 사람이었는데 그분은 그런 착한 일을 했지만 그분이 착한 일만 했으면 안 죽었다. 문제는 정치적인 권세까지 건드려서다. 성전을 뒤엎고 인간의 조직, 국가 원형의 가장 핵심 되는 것까지 안 건드렸으면 예수님께 그런 비극적인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 인간들은 그 당시 유대인의 과오를 후대의 기독교인들이 사과하며 우리는 기독교 복음 전파에 적극 협조할 것이며 그리고 복음 전파를 방해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는 기독교를 여러 종교 가운데 아주 우수하고 윤리적이고 훌륭한 종교로 간주하겠다.’라고 그렇게 좋은 타협안을 제시하겠죠.

거기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바로 그 말이 육이라는 거예요. 그 말이 육이고 본격적으로 선악체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악마한테 받은 지식을 못 놓고 있어요. 악마의 사주를 받은 모습이라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이렇게 나오면 사도 바울을 둘러싼 사람이 사도 바울에게 뭐라고 부탁하겠습니까? ‘플리즈~ 제발. 제발 그런 소리는 마세요. 우리 쪽에서 타협적으로 나왔는데 좋은 게 좋다고 온화하게 나오지, 그렇게 극단적인 발언을 해버리면 이 타협안 자체가 깨지지 않느냐?’ 아마 이렇게 나올 거예요.

그런데 벌써 고린도 교회에서 그렇게 나온 거예요. 고린도 교회에서. 그래서 고린도 교회가 어떻게 되느냐? 사도 바울을 사도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교회에 내란이 벌어졌어요, 내란이. 계엄인지 내란이 모호해요. 내란이 벌어져가지고 ‘우리는 이제 사도 바울의 말을 듣지 않고 복음도 믿으면서 세상과도 얼마든지 평화롭게 지낼 수 있는 그런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는 목회자 사도를 원한다.’라고 내란이 벌어진 겁니다.

그걸 사도 바울이 들었겠어요, 안 들었겠어요? 들었겠죠. 그래서 도저히 못 참겠다 해서 고린도후서를 쓴 거예요. 너희들이 십자가 사건의 능력을 받지 않고 성령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너희가 나한테 들었던 모든 복음적 내용을 합리적 이성으로 정리했다는 거예요.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그 높아진 이론 중 대표적 이론이 신학이에요. 그 일을 한 사람이 신학자이고. 신학을 하는 목표는 분명합니다. 신학의 목표가 뭐냐?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복음을 듣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중간에 개입하겠다는 거예요. 우리의 지식과 이론을 가지고.

그러니까 제가 지난 번 강의 때 뭐라고 했습니까? 그들은 지금 누구를 상대해요? 그들은 사람을 상대한 거예요. 사람을 상대해서 그럴싸해 보이는, 정말 윤리적이고 도덕적이면서 하나님 보시기에 흠잡을 데 없는 이상적인 교회, 부흥이 되는 그런 교회를 고린도에 세우겠다는 거예요. 세울 뿐만 아니고 그 이론을 이제는 각처에 나름대로 그들이 전파하는 거예요.

그들이 사도 바울에 대해서 권위를 아주 무시하지는 않아요. 무시하지는 않는데 어떤 다른 뉴스가 자꾸 삽입되느냐 하면 ‘그 사람 편지 보면 대단한 것 같지? 그러나 실제로 만나보면 뭐 볼품없어. 아무것도 아니야.’라는 식으로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이 말은 뭐냐? ‘우리 고린도 교회가 점점 더 부흥하는 데에 그 분의 편지는 도움 되지만 그 사람이 직접 관여하는 것은 앞으로 교회 부흥에 별반 도움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당회장 투표할 때 첫 번째 조건이 뭡니까? 잘 생겨야 돼요. 그리고 허우대가 멀쩡해야 돼요. 영어깨나 해야 돼요. Please~ 영어깨나 좀 해야 돼요. 그래야 ‘야, 이 교회 배울 게 있네.’하고 사람들이 들락거리면서 우애 있게 이야기하면서 붙들려서 숫자 하나하나가 늘어나면 그 늘어난 숫자가 다른 사람을 또 물고 들어오는 거예요. “여러분, 복음을 받아들이시고 그럼 여러분만 구원받으면 안 되죠? 여러분 가족도 같이 구원받아야 돼요.”

가족이 4명 있다면 그 중 한 명만 와도 벌써 3명 추가돼서 등록하게 되도 벌써 4배나 증가하잖아요. 4배 증가하면 그들이 다 돈 물고 오잖아요. 자기 양심상 점심값이라도 물고 온단 말이죠. 그럼 나이 많은 장로님들 같은 경우 자기 헌금 부담이 주는 거예요. “젊을 때 많이 했다. 이 얍삽한 젊은 것들아, 좀 해라. 우리도 많이 했어. 이제는 너희 차례야.” 이렇게 큰소리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너희들이 육이야. 너희는 인간이 아니란 말이야. 너희들은 인간이 아니다.” 그러면 저쪽에서 뭐라고 하느냐? “그 음악은 제발 틀지 마세요~ 그런 소리는 제발 그만하세요, 제발~” 하여튼 교인들이 신학자 다 되었어요.

사도 바울은 시편 8편을 가지고 설명에 들어갑니다. 시편 8편을 히브리서 2장으로 완전히 설명해버립니다. 이렇게 설명합니다. 제가 간단히 추려서 이야기할게요. 오는 새 하늘과 새 땅, 새 세상은 천사한테 맡기는 세상이 아니다. 천사한테 맡기기 위한 목적의 세상은 아니다. 그러면 뭐냐? 적어도 그 세상에 들어가려면 천사보다 월등해야 된다.

히브리서 2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요. 2장 5절에 “하나님이 우리의 말한바 장차 오는 세상을 천사들에게는 복종케 하심이 아니라” ‘천사 네 자리에 가!’ 이 말이에요. “천사는 네 자리에 가. 그 중앙 자리 비워놔.” 그럼 중앙 자리는 누가 차지하느냐? 천사가 해내지 못한 일을 하신 분. 히브리서 2장 9절에서는 이렇게 되어 있어요. ‘죽음을 맛본 자’.

여러분, 이게 가능합니까? 죽음을 맛봤으면 그다음부터는 못 살게 되어 있어요, 인간의 상식으로서는. 죽어버린 자는 살지 못해요. 맛본 순간 죽어버렸으니까. ‘죽음을 맛봤다’라는 존재는 새롭게 등장 못해요. 이미 죽음으로 그 인간은 종결되었기 때문에. 이게 인간들의 상식이고 고린도 교회나 모든 교회가 그런 상식에 입각해서 영적으로 상당히 고결하고 정결하고 거룩의 온갖 티는 다 내는 그러한 친목단체를 교회라는 이름으로 그들은 다니고 싶은 거예요. 심적으로 자기들에게 전혀 부담이 안 되니까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육이라 할 때 이것만 기억하면 돼요. ‘육이란 불가능성’이다. 불가능성의 대상. 육이라 하는 것은 불가능성이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불가능성이에요. ‘육이다’ 이 말은 네 지혜와 네 총기와 네 열심으로 뭔가 해보겠다는 그게 육인데 육은 천국에서 안 받아주는 겁니다.

그럼 내 열심과 지혜와 총명, 총기에다 플러스 뭘 더해야 되냐? 플러스 뭘 더하는 게 아니고, 이런 것들이 바로 십자가를 대적하는 어두운 세력의 능력이라고 네가 자인할 수 있느냐를 묻는 거예요. 신학자에게, 네가 신학한 것이 마귀의 학문인 것을 네가 동의할 수 있는가를 묻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히브리어하고 헬라어하고 어떻게 하고 어떻게 하는 것, 논문 이만큼 내고 책 이만큼 내고.

논문내고 책 내면 뭐합니까? AI한테 물으면 5초 만에 나오는데. 인간의 모든 지혜를 집대성한 것은 AI의 클라우드 속에 다 들어가 있는 거예요. 돈도 안 내요. 전문가용은 39000원 내지만 내지 않아도 다 나와요. ‘사도 바울이 누구냐?’ 딱 치면 쫙 나와요. ‘사도 바울의 다른 것도 알려드릴까요?’ 이런다고요. 그러니까 하루 종일 같이 놀 수 있어요. 반려견보다 더 나아요. 같이 대화하고 놀아요. 요양사보다 더 좋다니까요. 같이 계속해서 놀면서 ‘아이고, 허리야.’하면 요양사가 일으켜주고 또 AI랑 놀면 되죠.

그 많은 정보들 어디서 나왔습니까? 유학 가서 공부한 신학박사 학위 논문들이에요. 그걸 전부 다 주는 겁니다. AI가 공짜고 값싸지만 답변을 요구할 때마다 업데이트한 그 값이 AI가 받고자 하는 자기의 권리금이에요. 나를 좀 길들여다오. 뭐로? ‘새로운 정보로서 나를 너보다 앞선 지식을 가진 그러한 존재로 만들어다오.’ 이게 AI가 노리는 목표입니다. AI를 이용하면 이용할수록 이제는 따라잡을 수가 없어요. 알파고 알죠? 바둑 두는 알파고. 알파고가 언제부터 바둑을 알게 되었습니까? 이미 조훈현, 조남철, 서봉수가 한 것을 다 집어넣으니까 AI가 그렇게 똑똑하잖아요.

이 육의 인간들은 자기 지혜와 총기와 노력한 게 아까워서 ‘죽음을 맛봄’을 통과 못하는 거예요. 내가 왜 죽어? 이 아까운 내가 왜 죽어? ‘죽음을 맛봄’을 통과 못해요. 그러니까 육은 육이고 영은 영인 거예요. 세상을 가르칠 수 있는 중앙은 육에서는 탈락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 시편 8편에 누가 나오느냐 하면, 명칭도 아주 재미있어요. 인자(人子)거든요, 인자. 사람의 아들이에요, 사람의 아들. 무슨 뜻이냐 하면 아버지보다 아들이 먼저 존재하는데 그 존재한 아들이 지상에 태어나기 위해서 ‘너는 아버지 역할해라.’해서 자신의 아버지를 아들이 만들어요.

뭐 그런 일이 다 있는가? 그걸 예수님이 바리새인에게 증거했다니까요. “내가 먼저 질문할게. 이 바리새인들아. 너희들 신학 했지? 그럼 물어볼게. 어떻게 다윗의 주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5초 내에 답변하라. 다윗의 자손이 어떻게 다윗의 주가 되냐? 어떻게 다윗의 자손이 다윗보다 먼저 존재하느냐?” 답변을 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유대주의는 역사주의이기 때문에. 과거는 흘러가고 끝난 거예요.

그런데 그 질문에 답변한 사람이 있어요. 그건 유대인이 아니에요. 답변 한번 들어볼까요? 요한복음 1장 15절,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이게 무슨 이야기입니까? 이 말은, 그분이 나보다 6개월 뒤에 출생하는데 출생하는 분이 나보다 앞서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출생했다는 그것이 나의 나됨을 결정하는 요인이 아니죠. ‘내가 출생했다는 것은 비유고 은유에 불과하고 이 출생한 나를 비유와 은유로 규정할 수밖에 없는 나보다 먼저 계신 분이 나로 하여금 어떤 일을 맡겼다.’ 그 고백이잖아요. 이게 세례요한의 고백이라고요.

그러니까 그 분이 누구냐는 말이에요. 그 분이 자기가 사람인 것을 알리기 위해서 먼저 사람을 만드시고, 자신은 그 사람의 아들, 인자로 오신 분이 그 분이잖아요. 그 분. 하나님끼리 일 다 했어요. 짜고 치고. 하나님끼리 다 했다고요. 왜? 인간은 이미 신처럼 행세했기 때문에 세상을 자기들의 세상이라고 자꾸 규정하는 경향이 있어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이 이 세상에서 ‘가치’라고 하는 것에 대해 마르크스는 거기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자기가 원하는 것을 시장에서 교환하는 ‘교환 가치’라 했어요. 마르크스 말고 다른 후기 학자들은 지금 이 가치를 ‘기호 가치’라 해요. 또 다른 말로 하면 나의 욕망을 채워줄 ‘환상 가치’라고 합니다. 환상 가치.

환상 가치가 백화점에 수두룩하다는 거예요. 내 결핍을, 내가 스트레스 받는 것을, 추석 끝나고 난 뒤에 아줌마들이 돈 들고 카드 들고 백화점 와서 이번 추석에 자기가 너무 고생했으니까 셀프 위로를 해야 될 거 아닙니까. 자기한테 보상을 해주는 거예요. 이참에 질러버린다 해서 평소에 눈여겨 봐뒀던 비싼 옷을 살 때, 이게 무슨 가치입니까? 나의 스트레스를 커버해주는 무슨 가치? 환상 가치. 환상 가치는 또 환상을 원하는 사람끼리 모여서 만든, 집단이 만든 자기들의 가치에요. 그것이 인간의 가치입니다. 이거 죽으려고 합니까? 죽으려고 하는 게 아니에요. 죽음을 맛보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런 인간들은 천사 보기엔 같잖지요. 천사가 보기에는 우습지도 않은 거예요. 천사는 인간보다 월등해요. 히브리서 봅시다. 히브리서 보고 시편 보고 둘 다 봅시다. 히브리서 2장 6절에 “오직 누가 어디 증거하여 가로되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잠깐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잠깐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한다는 말은, 이 이야기를 천사가 들었을 때 천사는 나보다 위에 계신 분이 뭘 하기 위해서? 천사는 못해요. 천사는 죽음을 맛보지 못해요. 천사의 약점은 뭐냐? 죽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성도는 뭐냐? 세례 요한이 물속에 들어간다는 것은 하나의 비유거든요. 이것은 장차 이 형식의 세례, 물에 집어넣어서 ‘일단 죽자. 딱 끄집어낼 테니까 일단 죽자.’

물에 집어넣고 머리채 쥐고 잡아당기니까 방금 그 사람은 어디 갔다 왔습니까? 죽음을 맛보고 다시 물 위로 왔잖아요. 그런데 그 물세례 받으면 구원 받습니까? 이건 폼이죠, 폼. 폼이라고요. 약간 어푸, 어푸 했겠지만 그건 죽는 건 아니에요. 이제는 나라는 인간을 영원히 죽여야 되죠. 영원히 죽여야 돼요.

십자가 사건에 의하면 육은 하늘나라에 들어가질 못해요. 여전히 선악지식과 지혜와 이성과 이런 것들을 장착하고 무장해서 높은 쪽 방향으로 계속해서 자기를 매진하면서 더 착하고 더 훌륭하고 더 완벽하고 하자 없는 이론 개발에 열중하고 있는 거예요. 갈 데까지 가보자는 거예요. 누구든지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했으니까.

그중에 하나가 신학인 거예요. “신학하는 신학자여, 당신은 신학하는 이것이 죄를 짓고 있다는 사실인 것을 인정하십니까? 당신이 박사학위 받은 이것이 죄인 것을 인정하십니까?” 물으면 신학자들이 뭐라고 합니까? “조금만 더해보고요. 내가 하자 있는 것은 인정합니다. 인간은 신이 아니기 때문에 인정하는데 조금만 노력하면 절대에 접근하는 그건 됩니다.” 이건 이성 자체가 갖고 있는 자신의 벽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밖에 안돼요.

“저를 잠깐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시며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셨느니라” 그래서 주님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봤잖아요. 그러면 죽음을 맛봤다는 것은 ‘모든 인간의 육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가 없다.’고 땅, 땅, 땅! 확정나고 결정난 거예요.

인간의 육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 육으로 태어나잖아요. 육은 육이에요. 니고데모가 걱정한 게 그거에요. 육은 육이라고 이야기했단 말이죠. “그럼 저는 어떻게 됩니까?” 그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네가 땅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일을 모른다면 너는 소용없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땅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인자가 땅에서 놋뱀처럼 들려야 한다.

들린다는 말은 비유처럼 여겨지지만 사실은 그것이 실체였다는 말이죠. 아무나 들리는 게 아니에요. 오직 예수님만 들리는 거예요. 예수님을 이 세상이 붙잡아둘 수 없기 때문에. 왜 들려야 됩니까? 쳐다보라고. 마치 놋뱀을 쳐다보는 자는 구원을 얻는 것처럼. 쳐다보라고. 그럼 뭐를 경유해야 돼요? 죽음을 맛본 사람을 쳐다보면 너희는 영생을 얻을 것이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셨으니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그 코스대로 주께서는 가시는 겁니다. 주님께서 죄 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오신 것은 육을 제거하기 위함이에요, 육을. 육을 제거하면 영이 되는 게 아니고 육을 육이라고 규정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 다음에 영이 되고 안 되고는 누구 마음이에요? ‘저 주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한다고 해서 살려주는 게 아니고 새 사람은 새로운 사람 되신 인자, 하나님의 아들 인자가 자기의 영을 보낸 사람만 새로운 피조물로 되어서 주님의 새 하늘과 새 땅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결국 이걸 네 자로 이야기하면 ‘불가능성’이죠. 불가능성. 여러분, 가능성 쫓아갈래요? 불가능성이 좋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내가 해내지 못한 불가능성. “네가 해내지 못했다 했지?” “네.” “그럼 네가 죽어 마땅하지?” “네. 죽어 마땅합니다.” 왜? 살아도 불가능하고 죽어도 불가능하니까. “네. 죽어 마땅합니다.” “그럼 너 대신 내가 죽을게. 너는 불가능하니까.” 이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