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자료

나타난 천국 5강-두려움과 사랑

아빠와 함께 2026. 1. 17. 09:18

2026 겨울수련회 고린도후서 강해 제5강 : 두려움과 사랑 - 이 근호 목사

제5강 시작하겠습니다. 고린도후서 2장 11절에 “이는 우리로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사탄의 궤계, 악마의 술책, 악마가 어떤 식으로 일을 진행하는지, 그 전술에 대해서 우리가 다 알고 있잖아.’라고 지금 사도가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정작 이 성경을 보는 우리만 이 사탄의 궤계가 뭔지를 모르고 있다면 문제가 되지요. 그래서 이 사탄의 궤계가 무엇인지 이 시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복잡한 논리가 준비돼 있을 때는 결론부터 하는 게 먼저겠죠. 사탄의 전술, 계획, 책략이 있는데 그 책략은 개인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거예요.

조직이 아니라, 개인으로 움직이게 만들어서 그 개인이 자체적으로 자기의 형편을 변화시키려고, 전환시키려고 시도하는 것, 이게 사탄의 전략입니다. 사탄의 전략에서 대표적인 것이 뭐냐? ‘예수님이 부활했다. 따라서 나도 부활하자.’ 살아서 고생을 되게 했기 때문에 죽어서는 호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이 땅에서 상실된 내 것이 보상되니까요.

이 땅에 살면서 얼마나 많이 힘들었습니까? 뭔가 보상책으로서 천국이 있어야 된다는 생각을 해요. ‘나도 부활해야 되겠다.’ 할 때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사실이 어디에 해당되느냐 하면, 사탄의 전술에 해당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부활했다. 따라서 나도 부활한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을 보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육신이, 말씀이 육신이 되었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조직체가 부활 된 거예요. 이 조직체라 하는 것은 ‘말씀 완성’, 말씀 완성이 부활이 된 겁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었던 그 말씀에서 만들어진 그 조직 체계 자체가 부활이 된 거예요. 조직 체계가 부활 됐으니까 따로 ‘내가 부활 되냐, 안 되냐?’에 대해서 고민하거나 걱정할 이유가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예수님의 조직체 안에 들어가는 그 백성들은 성령께서 이렇게 묶어준다 이 말이죠.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여기 엘리베이터가 서 있다. 상당히 위태롭다. 엘리베이터에 4명 타고 있다면 ‘이 4명 중에서 나만은 살아야 하겠다’고 뭔가 분투 노력하겠죠. 그러나 문제는 간단해요. 엘리베이터만 수리되어서 정상적으로 운영된다면 너와 내가 싸울 이유가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엘리베이터라는 그 조직체 자체가 정상으로 가동되면 그 안에 있는 너와 내가 개인적으로 싸울 이유가 하나도 없는 거예요. 예수님의 부활을 나의 부활로 연계하지 말고, 예수님의 부활을 새로운 조직체의 부활로 보자는 말이지요. 새로운 조직체의 부활로 보는 게 아니고 사실이 그렇고요.

예수님께서 자기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왕으로서 부활했다면 이스라엘도 덩달아서 같이 부활한 거예요. 그러면 그 조직체 안에서 우리의 존재는 어떠하냐? 극단적으로 말해서 이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조직 안에 있는 날파리죠. 날파리가 자기 인생을 그렇게 고민하거나 걱정할 자격과 권리는 없습니다. 내가 내 구원과 내 운명에 대해서 염려하거나 걱정할 자격은 일체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 속했다는 것, 예수님 안에 있다는 것, 예수님이 만든 그 세계 안에 있다는 그걸로 족해야 하지, 거기서 따로 내 것을 끄집어내서 ‘그러니까 나에게 돌아올 이익은 뭐냐? 장차 내 운명의 실익은 뭐냐?’ 이렇게 따져버리면 그거는 누구 술책에 말려든 거예요? 악마의 술책에 말려든 겁니다.

악마가 ‘개인적으로’ 나오도록 하는 이유는 뭐냐? 악마는 우리 인간이 개인적으로 무엇에 벌벌 떤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모든 인간의 행동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두려움’에서 나옵니다. 모든 것이 두려움에서 와요. 이 두려움이 뭐 때문에 두려운 것인가 하면, 저주받을까 봐 두려워요, 저주받을까 봐!

저주받을까 봐 두렵다. 저주받을까 봐 두렵다는 것은, 인간 자체가 개인적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께서 집단적으로 인간을 이 저주 속에 두신 겁니다.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을 저주 가운데 두셨기 때문에 그 아담과 하와 자체도 저주의 대상이 되어서 직사하게 고생했고, 그리고 그 후의 모든 인류도 아담과 하와의 후손들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제사를 드린다든지, 하나님을 믿는다든지, 종교를 갖는다는 이 모든 것은 그 출발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두려움에서 나온 거예요. 이 두려움은 저주받을까봐 두려운 것인데, 이 저주는 이미 주님께서 판정을 내린 거예요. 뭐냐 하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실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저주가 네 안에서 준동하고 작동하게 될 것이다. 그게 네 모습이다. 너는 그 저주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러면 그 저주를 받지, 뭐. 저주받으면 되잖아.’ 이렇게 마음을 편하게 먹을 수도 있는 문제인데 문제는 이 저주가, 우리가 생각하는 어떤 낭패를 당한다든지 그게 아니고 이 저주가 우리 내부의 마음에까지 작용해서 두려움을 야기시키는 겁니다. 두려움을 야기시킴으로써 이 저주를 우리 홀로 받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지배하는 악마의 저주와 한 통속으로 저주를 받는 그 두려움이 악마의 속성을 가진 우리에게도 똑같이 주어지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거예요.

교회에 왜 나오느냐? 무섭기 때문에, 두렵기 때문에. 그러면 ‘두렵지만 교회 나와서 은혜받으면 구원받잖아.’ 그 구원받겠다는 것도 두려움인데요? 두려움이 삭제되지 않는 이상은 아무리 은혜받겠다고, 성령 받겠다고, 또 말씀을 알아서 두려움을 해소하겠다는 이것은 부적을 믿는 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무당 굿거리하고 똑같은 겁니다.

굿하고 난 뒤에 심란한 마음이 안정된다는 그걸 기대하는 자체가, 그 원천 자체가 ‘어떻게 하면 각개 전투로, 내 개인의 어떤 행함으로 이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느냐?’하는 그러한 논리에서 이탈된 적이 없어요, 이탈된 적이 없다고요.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복음을 전할 때는 분명히 구조적으로 복음을 전했어요. 구조적으로 복음을 전했는데 그걸 받고 난 뒤에 ‘나한테 주어진 이 구조와 이 조직 사회에서 나한테 돌아올 게 있을까?’라고 자기에게 다시 한번 집중하는 순간 그것은 마귀의 궤계에 빠진 거예요.

고린도 교회가 마귀의 궤계에 빠졌으니까 사도 바울이 걱정을 늘어지게 하는 겁니다. 걱정을 늘어지게 해요. 고린도후서 2장에서 그렇게 걱정하는 거예요. ‘사탄의 궤계를 우리가 모르는 바 아닌데 네가 거기에 빠졌구나. 그래서 너희에 대해서 근심이 있다. 그래서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즉 이 조직 관리를 위해서 가만히 있을 수 없으니까 내가 너에게 답변하는 모든 것은, 너 개인이 어떻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는 이 예수 안, 성령 안에 있는 조직이 어떻게 필연적으로 완성 단계에 있는가를 계속해서 언급하고 또 언급하는 식으로 다가서는 거예요.

고린도후서 2장 15절입니다.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여기 ‘냄새’라고 돼 있죠. 냄새는 ‘어떤 이익이 있느냐’를 따질 수 없는 입장입니다. 냄새라고 하는 것은 그 냄새를 피우는 주인 되시는 분을 위한 기능에 불과해요. 제가 그것을 날파리라고 한 거예요. 날파리는 ‘개인에게 돌아올 이득은 뭐냐?’를 이제는 잊어야 돼요.

왜 그걸 잊어야 하는가? 안 잊어버리면 우리 안에 있는, 악마한테 유혹당해서 따먹은 선악의 그 논리가 계속 자극을 받아 우리에게 살아있게 돼요. ‘내가 어떻게 하게 되면 선한 쪽이고, 어떻게 하면 악한 쪽이냐? 선한 쪽에 왔을 때 보상은 무엇이며 악한 쪽에 왔을 때 저주는 무엇인가?’ 내 몸에서 그 선악 체제가 안 죽고 계속해서 발휘되고 있으면 두렵고 힘든 것은 누구 몫입니까? 본인 몫인 거예요.

주께서는 우리의 선악 체계 자체를 무효화시키기 위해서 집단적으로, 곧 예수 그리스도의 집단 조직으로 그걸 덮어버렸는데 덮어버린 그 안에서 꼼지락거리고 있다는 그 말이죠. 사도 바울 말이 ‘네가 꼼지락거린다고 해서 이 조직이 취소되는 건 아니다.’ 그 말이에요.

자꾸 개인적으로, 개인적으로 두려움을 해소하려는 그런 시도는 마귀의 술책에 빠졌다는 거예요. 사도 바울의 편지는 아니지만 사도 요한의 편지 속에 그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요한일서 4장 18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오죠.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이 말은 뭐냐? 두려워하면 두려워했다는 그 죄목으로 네가 저주받고 벌 받는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네가 두렵다는 자체가 이미 형벌에 포함돼 있다’는 말입니다. 네가 두렵다는 것 자체가 이미 벌 받고 있는 중이에요. 요한일서 4장 17절에 보면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라.” 돼 있어요.

그러면 심판 기준이 뭐냐? 개인적인 게 아니고 조직적으로 심판을 해요. 기준이 조직이에요. ‘사랑 안에 있느냐, 아니면 사랑 밖에 있느냐?’가 기준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네가 하나님을 사랑하느냐?’를 묻는 게 아니고, ‘애초부터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 적이 없다는 그 사랑, 나는 하나님을 사랑한 적이 없다는 이 사실을 안다는 것 자체가 사랑이다.’ 이 말입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한 적이 없습니다.’라는 말을 한다는 자체가 더할 나위 없는 사랑이에요. 사랑은 주님이 일방적으로, 조직적으로 준 것이지 내가 사랑한다는 조건 보고 우리를 사랑한 적이 없다는 거예요. 그것은 각개 전투인데 누가 그런 짓을 하느냐? 마귀가 그런 짓을 한 거예요.

‘주님이 십자가 졌으니까 십자가 사랑을 받아들이면 구원받는다.’ 이것은 마귀들이 하는 짓이에요. 뭘 받아들여요? 받아들일 재주가 있습니까? 무슨 무슨 수로 받아들입니까? 받아들일 때 이미 뭐가 가동됩니까? 선악을 안 빼고 ‘사랑하는 것은 착한 일이야. 내가 이 착한 일을 해서 하나님께 사랑을 얻어내야지.’

이건 뭐 흥정도 아니고, 주님께 장사하는 것도 아니고요. 주님이 개인을 사랑하는 그런 장사를 하지 않아요. 왜 자꾸 자기 속에 있는 선악적인 구분이 작동하도록 왜 그걸 방치하냐 이 말이죠. 그것은 사랑이 없을 때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왜 사랑이 없느냐? 조직을 바라보지 않고, 조직을 바라보지 않으니까 개인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개인 생각을 하지 않고 조직으로 가려면,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어떠한 조직을 염두에 두고 우리에게 주어졌느냐?’를 봐야 하는데 그것은 이미 구약 때부터 나오는 겁니다.

사사기 7장을 보겠습니다. 사사기 7장을 보셔야 할 이유는, 그들이 굉장히 무서워하고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래요. 아담 후손은 다 마찬가지예요. 사람이 어떤 선택의 기로에 서면 두려움부터 먼저 생겨요. ‘내가 어떤 선택을 할 때 손해를 덜 볼 수 있느냐?’ 손해 안 보고 이익 보는 선택을 했을 때 자기에게 ‘나는 참 잘했다’가 돼요. 참 잘했다.

참 잘한 일을 하게 되면 두려움이 그걸로 끝납니까? ‘다음에는 괜찮은 선택을 또 해야지’라고 하지요. 어떤 식으로? ‘잘하는 선택을 또 해야지.’ 이렇게 된다고요. 그러니까 그 사람은 계속해서 어떻게 됩니까? 두려움이 떠날 새가 없어요.

a, b, c, 점이 3개 있어요. 이 점이 3개 있을 때 이 점 3개를 다 통과하는 곡선의 곡선은 몇 개입니까? 이 질문을 수학적으로 할 수 있어요. 정답은 무한대죠. 이렇게 갔다가 이렇게 갈 수도 있고, 여기서 한두 바퀴 돌다가 이렇게 갈 수도 있고, 이렇게 갔다가 다시 돌아서 c로 갈 수 있고, 그래서 무한대가 되는 거예요.

“a와 b와 c를 통과하는 곡선은 몇 개입니까?”라는 질문을 했잖아요. 그런데 정답은 뭡니까? 무한대죠. 무한대니까 어느 쪽에서 잘못되었습니까? 질문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질문 자체가. “a(예수님), b(성도), c(마귀) 여기서 이 세 지점을 통과하는 경우의 수는 몇 가지입니까?”라고 물을 때 관건은 출발을 어디서 하느냐 하는 거예요.

‘성도’에서 출발하게 되면 이것은 무수히 많겠죠. 무수히 많은데 문제는 선악 지식에서 출발한다는 거예요. 선악 지식에서 출발한다고요. 왜냐하면 정답을 내가 가져야 되니까요. 그런데 그 출발을 주님으로부터 하면 주님께서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해답을 예수님이 가져가요.

예수님이 가져가서 “너는 질문을 받을 자격이 없고, 내가 질문하고 답도 누가 낸다?” ‘주님께서 다 이루었다’로 냅니다. 주님(a)께서 성도(b)를 통해서 마귀(c)를 거쳐서 다시 이렇게 올라오는데요, 이 자체가 조직이 돼요. 조직에서 어떤 경우가 발생되든지 모든 것이 주님 안에서 ‘예스’가 되고 ‘노’는 하나도 없다는 거예요.

왜? 중간에 끼어 있는 날파리에 의해서 중도에 멈출 수도 있는 예수님의, 하나님의 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모든 의미는 주로부터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가는 그 의미로 마감이 돼야 되거든요. 그러니까 성도 입장에서는 뭐가 통과입니까? 두려움이 어떻게 돼요? 마지막 도달되는 경로가 내 쪽에서 멈추지 않고 주님께 간다면, 내 쪽에서 마치 멈춘 것처럼 벌벌 떨 이유가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없습니다!

하나의 경로만 주님 앞에 제공하세요, 그 경로만. ‘저를 거쳐서 주께서 하시고자 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을 하세요. 저는 가라 하면 가고 오면 오나이다.’ 그러면 되잖아요.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조직적으로 주님한테 있기 때문에, 주님 사랑 안에 있을 경우에는 이 주님 사랑을 내 것으로 끄집어 당길 하등의 권한은 우리한테 없습니다.

왜? 우리는 애초부터 주님을 사랑할 수도 없고, 사랑한 적도 없고, 사랑해 봐야 소용없고, 사랑은 일방적으로 주께서 사용하는 그 자체가 사랑이기 때문에 두려움이 나한테 머물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이게 주님의 세계잖아요. 고린도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을 전했는데 마귀가 밑에서 작동을 해요.

마귀가 작동해서 성도가 있는 그 삶의 현장에서 뭘 하느냐? 입김을 훅 불어요. 악마의 입김, 악마의 입김을 훅 불면 희미하게 보이던 이 세상 자체가 전부 다 무엇으로 나타나느냐? 선택해야 할 문제들로 쫙 깔려 있어요. 온 사면에 쫙 깔려 있습니다. “아빠, 내가 이 여자 친구를계속 사귀어도 돼? 아니면 그만 사귈까?”

방금 십자가 마을에서 은혜받고 내려왔는데 아들이 하는 말이 ‘저 여자를 계속 사귀어야 할까, 말아야 할까?’ 뭘 줍니까? 선택의 여지를 주죠. 그게 악마가 입김을 분 거예요. 유리창에 뭐가 하나도 없는데 추운 날에 입김을 부니까 거기에 글씨 쓴 것이 나타나듯이, 복음으로 나는 세상을 꿰뚫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현실에 가니까 계속해서 선택해야만 일거리를 잔뜩 안겨줍니다.

그러면 그 아버지는 무엇에 빠지겠어요? 고민에 빠지겠죠. 어떤 선택을 해도 책임은 아버지께 돌아오겠지요. “그때 왜 아버지는 저를 안 말렸습니까?” 이럴 수도 있고, 그때 아버지는 그냥 통과하고 “내가 선택해서 이 여자를 구했다.” 이렇게 자기 잘남으로 갈수도 있어요.

어떤 선택을 해도 아버지께 돌아올 이익은 전혀 없어요. 모든 인간이 다 그러니까요. 남한테 조언을 구한다는 것은, 공로가 자기한테 오기 위한 하나의 중간 과정으로만 사용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상대를 이용하는 거거든요. 자아가 제일 중요하기 때문에. 그런 세상이 우리를 기다립니다.

그런데 어떻게 돼요? 사랑 안에는 뭐가 없다고요?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다고 했는데 갑자기 선택 여부에 따라서 이 나한테 덤터기가 씌워질 수가 있어요. ‘선택 잘해야 돼, 잘해야 돼…’ 그 자체가 뭡니까? 갑자기 근심이, 두려움이 찾아와서 잠을 자지 못하는 거예요.

“그 여자 직업이 뭐라 하더냐?” “집에서 논답니다.” “넌 이제 죽었다. 같이 벌어서 대출이라도 갚아 나갈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 그냥 집에서 빈둥빈둥 놀면서 쇼핑이나 하고 다니면 큰일이다. 보통 문제가 아니네.” 상담가 오은영 박사를 찾든지 해야 할 판이에요.

그런 말 자체가 나한테 뭐예요? 두려움이에요, 두려움. 주님, 주님, 하다가 갑자기 각개전투 된 거예요. 근심이 확 밀려오는 겁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결해야 될까요? 사사기 6장 보겠습니다. 6장 15-16절에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하리라.”

해결책이 뭐냐? 여전히 악마의 입김이 크게 작용하고 있는 이 세상에 나가서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다’는 이 복음이 어떤 쓸모가 있고, 어떻게 효과를 나타내느냐? 거기에 대한 정답은 여기 크게 적겠습니다. 간단합니다. 이게 첫째 시간에 이야기한 거예요. 하나님이 세운 교회는 누구하고 상대하지 않는다? “사람하고 상대하지 않는다.”

교회는 그렇게 세워지는 거예요. 사람을 안 만난다는 게 아니에요. 상대하지 않는다. ‘이렇게 하면 저쪽이 어떻게 반응하고, 이렇게 하면 어떻게 욕하고, 이렇게 하면 얼마나 나에게 잘해줄까?’ 그렇게 내 선택에 의한 그 사람의 반응을 일체 고려할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모든 악마의 입김 배후에는 누구의 입김이 있느냐 하면, 성령님이 입김이 있습니다. 그래서 입김과 입김의 싸움이에요. 내가 여자 친구와 결혼할까요, 말까요, 언제로 날짜 잡으면 좋겠습니까, 가을이 좋겠습니까, 아니면 봄이 좋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묻게 되는 것은 배후에서 누가 한 거예요? 성령께서 그러한 상황을 조성한 겁니다.

사사기 6장 15-16절에서 첫 번째 반응은 “나는 미약합니다.” 사사기에서 기드온의 반응이에요. 나는 미약합니다. 오늘날 현대의 아버지한테 이걸 적용시키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뭐 아는 게 있어야지. 너희가 서로 좋으면 좋은 거지.” 이것으로 끝나는 거예요. ‘어디서 아버지를 덤터기 씌우려고.’

아버지가 강권해서 혼인을 시켰다면 아파트 사는데 아버지 돈 2억 정도는 보태야 면이 서잖아요. ‘아버지도 우리 결혼에 동의했잖아요. 그러면 노후 자금으로 꿍치지만 말고 한 2억은 내놔야지요.’ 이런 마음의 부담이 있기 마련이고, 그래야 나중에 ‘우리 아버지가 참 훌륭한 아버지다’ 할 것 같고, 그래야 아내도 존경할 것 같고요.

내가 이런 결정할 때 저쪽에서 나에게 좋은 걸 준다는 것 자체가 나한테 새로운 두려움으로 작동하는 겁니다. “여보! 좋은 며느리가 들어온다고 아파트 사는데 2억을 보태달라는데 당신 생각은 어때?” “500만 원만 주고 치우자. 그냥 500만 원만 주면 돼. 결혼식 때 부조 받은 것 2천만 원 중에서 1,500은 우리 먹고 500만 원만 주면 돼.” 이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자기 아내가 했습니까, 성령님이 하셨습니까? 누구 입김이에요? 아내 입김이에요, 성령님의 입김이에요? 아내라는 악마가 주님에 의해서 말하는 거죠. 아내라는 악마가 주님에 의해서 그런 바람이 나오도록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아내 말을 들으면 누구를 상대하는 게 됩니까?

아들하고는 상대 안 했는데 누구하고 상대한 거예요? 아내하고 상대한 거예요. 같은 날파리끼리. 같은 날파리들끼리 무슨 능력이 있어요? 아들 장가보내려고 다 준비했는데 그 예식장에 불이 났네. 누가 불 냈습니까? 이란의 시위대가 불냈어요? 누가 불냈어요?
주께서 그렇게 하겠죠.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요, 사사기에서 기드온이 사람을 만난 게 아니라 누구를 만났어요?
천사를 만났어요. 천사를 만났을 때 기드온의 자세가 이런 겁니다. 사사기 6장 22절에 보면 “기드온이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줄 알고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나는 사람 앞에서는 내가 죽은 자가 아니고 당당하지만, 적어도 하나님의 천사 앞에서는 나는 더 이상 내가 살았다는 것 자체가 이제는 성립이 안 되는 그런 자리에 주께서 호출시켜서 천사 앞에 나를 세웠다’라는 거예요. 내가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 된 자리에 주께서 기드온을 세운 거예요.

그러면 기드온이 하는 모든 전쟁은 누구 전쟁입니까? 천사의 전쟁이죠. 그 나라가 무슨 나라입니까? 이스라엘이에요. 그 나라가 이스라엘이라고요. 교회는 하나님이 세우지, 사람하고 상대해서 교회가 세워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만이 주께서 계속 유지시켜줘요. 왜? 마지막 심판 날까지 그 교회만 지속돼야 되기 때문에.

사랑 안에는 뭐가 없다? 두려움이 없다. 다른 말로 ‘사랑 안에는 너의 선택은 일체 내가 고려하지 않는다. 네가 어떤 판단을 하든, 어떤 선택을 하느냐는 이 사랑하고는 별개 문제다. 네가 무슨 선택을 해도 사랑은 취소되지 않는다.’ 이걸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거예요. 그런데 마귀의 입김이 세면 갑자기 자기 단도리 하기에 걱정이 싹 되는 거죠.

사사기 또 봅시다. 사사기 13장 13장이에요. 그래서 13장의 삼손의 부모들 이야기입니다. 21-22절에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와 그 아내에게 다시 나타나지 아니하니 마노아가 이에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줄 알고 그 아내에게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사람하고만 상대했기 때문에 자기가 펄펄 살았다. ‘내 선택에 의해서 어떻게 내가 저 사람을 다룰 수 있고, 저 사람 앞에 내가 피해를 볼 거냐, 이익을 얻을 거냐?’ 내가 살아 있기 때문에 자꾸 그런 생각을 하는데, 그 자체가 선악과를 따먹은 그 부수적인 두려움을 계속해서 유발하는 계기가 돼요.

선택한다는 자체가 선택을 잘해도 문제에요. ‘아, 선택을 좀 더 잘할걸.’ 이런 식으로요. 주식을 3천 원에 샀어요. 그다음 날 보니 3,200원대에요. ‘야, 이건 팔아야 한다.’ 해서 팔았는데 다음 날 3천5백 원이 되었을 때 어제 잘했다는 그 선택이 오늘은 실수가 돼 버렸어요.

그러면 이것은 뒤까지 다 덤터기로 두려움을 갖게 돼요. ‘바보야, 바보!’ 이렇게요. 사람이 후회한다는 것은 뭐라고 했습니까? 후회한다는 것은 아직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기대를 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성경은 우리한테 기대를 안 하는데요. 왜? 우리는 주님을 사랑한 적도 없고, 사랑할 자격도 없는 그런 입장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조직 안에서, 날파리 주제에 조직 안에서 벌벌 떨면서 살 이유가, 하등 그럴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 마귀의 궤계를 알았으니까 그 마귀의 궤계가 어떤 식으로 적용되는지를 고린도후서 8장과 9장에서 보겠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조직적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장이 길잖아요. 그것을 정리할 수 있는 본문이 나옵니다. 시편 112편 7절의 본문으로 고린도후서 8장과 9장을 다 설명할 수가 있어요.

누가 크게 한번 읽어주세요. 시편 112편 7절입니다. “그는 흉한 소식을 두려워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 ‘흉한 소식’이에요. 그 흉한 소식이란 고린도후서에서는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흉년이 들었다’는 거예요. 자기 동네 흉내 든 게 아니에요. 남의 동네 흉내 든 거예요.

고린도에 있는 교회가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흉년들었다는 걸 생각해서 1년 동안 적금하기를 당부했어요. 그런데 고린도교회 입장에서는 우리 동네 흉년이 아니잖아요. 예루살렘이라는 남의 동네 흉년이라 그 말이죠. 그 흉년에 대해서 내 일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평소에 물 관리 좀 잘하지. 흉년은 왜 들어서 사도 바울로 하여금 자꾸 우리한테 압력을 가하게 하지? 꼭 적금 해야 해?’ 이런 식이면 어떻게 됩니까? 전체 조직이 돼요, 안 돼요? 헌금을 주고 안 주고는 누구의 일이 된다? 나의 일이 되겠죠. 그래서 그 구제 헌금하기를 주저한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 겁니까? 세자로 무엇을 뜻하는 거예요? 두렵다는 거예요, 두렵다.

복음은 좋게 잘 받았는데 돈 내라 하니까 갑자기 두려운 거예요. 두려운 이유가, 뭐 때문에? 시편 112편 7절에 의하면 뭐 때문에 그렇습니까? 흉한 소식, 가뭄 들었다는 흉한 소식 때문에 그래요. 그 가뭄을 누가 들게 했습니까? 주님이 들게 했죠.

그러니까 같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여기 예루살렘이 있고, 여기 고린도 있는데 이쪽 사람이 바지에 오줌을 싸고 말았어요. 그러니까 자기는 오줌을 안 쌌다는 말이죠. ‘전립선을 수술하든지 하지 오줌도 못 참고 왜 이래?’ 이렇게 된 거예요. 자기는 오줌 안 쌌지만 다른 쪽에서 오줌을 쌌다는 이게 무슨 소식이 됩니까? 흉한 소식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시편 110편 7편에 보면, 그 흉한 소식으로 인하여 내가 뭐 하지 않는다?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내가 주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조직적으로, 조직적으로 그렇다는 거예요. 사도 바울은 지금 아주 기분 좋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시편 112편 7절의 상황이 구약 이야기잖아요. 이 조직을 봅시다. 구약은 입체적이 아니고, 구조적이 아니에요. 구약은 역사적입니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에게 어떤 일이 있었다. 그때 역사적으로 나타난 것이 시편 112편 7절이 적용될 수밖에 없는 그런 일이 일어난 거죠.

그다음에 시편 112편 8-10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그 마음이 견고하여 두려워 아니할 것이라 그 대적의 받는 보응을 필경 보리로다 저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에게 주었으니 그 의가 영원히 있고 그 뿔이 영화로이 들리리로다 악인은 이를 보고 한하여 이를 갈면서 소멸하리니 악인의 소욕은 멸망하리로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흉한 소식을 듣고 그 재물을 흩어서 빈곤한 자에게 주었다. 이것은 첫째 강의에서 모든 인간은 비유고, 그다음에 뭡니까? 실체가 구조적으로 a(예수), b(성도), c(악마)에서 일어난 사태가 어디를 경유하느냐? 말씀이 육신에 되어서 다 이루신 예수님에게 올라가게 되면 이것은 돈 문제, 돈으로 구제하는 문제가 아니고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과 의를 나눠주는 게 돼요. 본문 해석이 그렇게 됩니다.

구약에 있는 본문 해석은 반드시 신약에서 십자가 사건의 의미와 결합이 되어서 우리에게 다시 주어지는 겁니다. 악인들, 여기서 악인들을 하는 것은 구제를 안 한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를 통해서 의인에게 나타내는 그 의가 악인들에게는 있어요, 없어요? 없다는 그것을 보고 악인들은 분노하고 한탄하는 거예요. ‘나한테는 왜 그런 의가 없어?’

동일하게 흉한 일이 있었는데, 구약은 하나의 은유니까, 구약적으로서는 자기가 가진 것을 팔아서 재산을 내주는 것으로 가난한 자의 빈곤이 문제가 해소됐을 때 ‘내 돈 가지고 너 먹여 살렸다.’ 이러면 어떻게 돼요? 그 사람은 뭡니까? 누구하고 상대한 거예요? 사람이 누구하고 상대했어요? 사람이 상대 사람하고 상대했잖아요.

사람이 사람을 상대하면 무서움이 생겨납니다. 내가 분명히 저 사람이 어려울 때 도와줬는데 그다음 날 딩동 찾아와서 “저번에 주신 20만 원 너무 고맙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일이 더 터져서 50만 원이 필요하네요.” 하게 되면 ‘나 이사라도 가야 해, 말아야 해.’ 지금 큰 문제가 생긴 거예요.

‘아, 날 호구로 아냐?’ 호의가 넘치니까 뭐가 됐다? 권리인 줄로 알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머리 검은 짐승 집에 들이는 법이 아니에요. 도와주면 안 돼요. 전문적인 업체가 있어요. 플랫폼이 있다고요. ‘이렇게 하면 사람이 감동받아서 교회에 헌금이 많이 들어온다.’ 이런 것까지 막 가동되고 있다고요.

지난 낮 설교에서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하고 제자들하고 뭐 했어요? 구제했어요, 복음 전했어요? 솔직하게 이야기해 보세요. 예수님이 열두 제자 데리고 뭐했습니까? 구제했습니까, 복음 전했습니까? 복음 전했잖아요. 왜 구제가 등장합니까? 이단들이나 하는 짓이에요. 구제를 한다는 것은 ‘에이, 이 돈이나 먹고 떨어져라. 무서워 죽겠다. 돈 더 뜯기면 안 되는데.’ 지금 두려움에 빠져 있어요.

또 찾아와서 돈 달라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폭삭 속았수다, 해서 쫓아낼 수도 없는 문제고요. “봉 잡았네 니! 어! 니 봉 잡았어!” 이렇게 되면 그 사태 수습할 수 있겠습니까? “지난번에는 순순히 줘놓고 왜 사람이 돌변합니까? 그렇게 사람이 함부로 돌변할 수 있습니까?” 또 이렇게 나온다고요?

제가 스크루지 이야기했던 게 어느 강의입니까? 광주입니까? 스크루지가 한 말 중에 제일 옳은 말이 있어요. “크리스마스입니다. 구제하세요.” 이렇게 하니까 스크루지 영감이 하는 말이 “나라가 할 일을 왜 내가 하는데?” 맞잖아요. 세금 냈잖아요. 국세청에 세금 다 냈어요. 나라가 할 일을 왜 본인이 해요? 주제넘게 본인이 왜 끼어듭니까?

성경 해석은, 주님께서 나누어 주려는 게 돈이 아니라는 거에요. 뭐냐? ‘나 너한테 돈 줘도 두려움이 없음’을 돈에다가 실어서 나눠주는 거예요. ‘흉년 들었다는 상황조차도 그로 인해 돈 뺏기는 자기 자신이 걱정되는 것이 아니고, 흉년이 들어서 흉년을 들게 한 주께 원망하는 그러한 자세는 흉년 든 본인이 할 자세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줘라.’ 이 말이에요. 사도 바울의 뜻은 그겁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는 뭐가 없나니? 두려움이 없나니. 그게 로마서 8장에 나오잖아요. 35-39절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든 걱정하지 마라.’ 왜? 다른 교회에서 도와주기 때문에? 아니죠, 아니죠. 뭡니까? 그런 환란이 있더라도 그리스도 사랑해서 끊어지지 아니한다. 끊어지지 아니한다. 끊어지지 아니한다.

그러니까 도움받는 사람이나 도와주는 사람이나 서로가 누구를 상대하면 안 돼요. 사람을 상대하면 안 돼요. ‘돈이 남아도는구먼!’ 이런 식으로, 또 ‘이러면 더 빼먹을까?’ 이런 것, 그렇게 나오면 진짜 그 사람은 받는 쪽이 사랑이 없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흉년 든 것을 뭐로 보느냐? 이 조직이 시공간을 떠나서 동일한 조직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계기로 삼습니다. 왜 이게 조직이어야 되는가? 악마가 각개 전투를 시작하기 때문에요. 성경 말씀을 가지고. 제가 전에 했잖아요. 성경 말씀에 더해서 뭐가 있어야 된다? 성령이 있어야 되죠.

조금만 더 해봅시다. 사사기에서 사사들이 누굴 봤어요? 천사를 만났죠? 그러면 하나님의 이스라엘 운영 책임자가 누굽니까? 인간이 아닙니다. 누굽니까? 천사지요. 천사가 운영자잖아요. 그것을 어떻게 알았어요? 본인이 그 천사 일에 좀 협조하려 해도 협조를 못 해요. 왜냐?

천사와의 만남 자체가, 자기가 더 이상 살았다 할 수 없는 죽은 자의 입장인 것을 파악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성령이 임했다는 건 뭐냐? 성령이 임했다는 것은 천사를 보내신 원 구원자, 주님의 십자가 앞에 섰잖아요. 십자가 앞에 설 때 우리는 산 자입니까, 죽은 자입니까?

로마서 6장에서 이미 우리는 죽은 자가 돼요. 죽은 자가 무슨 구제를 해요? 벌써 5년 전에 죽었어야 될 인간인데, 지금 살아 있는 것도 신기해 미치겠는데! ‘어떻게 선택하면 됩니까? 뭘 하면 됩니까?’ 할 수 있는 그 자격 자체가 우리한테는 없어요. 천사보다 더 대단한 분을 만났기 때문에.

그러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악마의 술책을 발견하기 위함입니다. 악마의 술책에 대해서 시간이 약간 가더라도 빨리 해보겠습니다. 교재 봅시다. 교재의 초반부를 제가 한번 읽어볼게요.

【1. 가짜 인간. 사람은 노동을 통해서 자기의 가짜성을 드러낸다. 예를 들면, 일반 사무실에서 ‘바빠 보이는 책상 꾸미기’ 같은 것이다. 최대한 바쁘게 보여야 한다. 서류도 책상 위에 잔뜩 쌓아둔다. 겉보기에 중요해 보이는 종이지만 실은 그는 바쁜 삶을 연출하는 단순한 소품으로 수주간 그냥 놓여만 있는 것들이다. 또한 보여주기 위해 컴퓨터 모니터 2개와…】

그 두 개에 뭐가 깔려 있겠습니까? 엑셀 프로그램이 깔려 있겠죠.

【…노트북이 책상 위에 놓여 있고, 거기에 깨와 같은 글씨가 적혀 무척 중요해 보이는 샛노란 포스트잇으로 심도 있게 꾸민다. 모니터 한쪽 화면에는 진짜 복잡한 코딩 화면을 띄워놓고 다른 화면에는 상사에게 온 이메일을 띄워놓으면 내가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는지 볼 수 있다. 말하자면 모두가 언제나 끊임없이 뭔가 하고 있어야 한다는 압력에 시달린다.】

이걸 세자로 이야기하면 뭡니까? 두려움이죠. 이런 모습이 두려움이에요. 누구한테 들키면 안 되니까. 두려움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정한 적이 없는 가짜 인간이에요. 남을 의식하니까. 교재 3페이지 3번을 봅시다. ‘국가는 두려워하는 인간들이 자체적으로 그 두려움을 없애고 해소하고자 서로 힘과 지혜를 모은 것이 국가’예요.

여러분, 이스라엘은 국가입니까, 국가 아닙니까? 국가가 아니에요, 국가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에 왕이 있어야 돼요, 없어야 돼요? 왕이 없어야 돼요. 왕이 없어야 됩니다. 국가가 생기고 왕이 있다는 것은 변질된 겁니다. 점점 더 악화된 거고 나빠진 거예요. 주님께서 오셔서 원형으로 돌립니다.

인간의 어떤 왕도 필요 없고, 인간의 어떤 국가도 필요 없고, 그냥 사랑 그것만으로 충분한 그러한 새로운 조직체의 건설, 두려움이 없다는 이것 가지고 악마가 지배하는 이 세상, 두려움을 어떻게 벗어나고자 악바리처럼 애쓰고 있는 가짜 인간들 속에 날파리 같은 우리를 집어넣었습니다.

집어넣는 이유는, 너희가 생산하는 그 너의 의로움, 선악 체계에 있는 자랑거리 주께서 거저 주시는 이 사랑 중에서 어느 것이 고귀하고 가치 있는지를 대비해서 바라보라고 주님께서 이 악마의 입김이 온 천지에 작용하는 이 세상에 그냥 잔존하고 살아있게 해 주시는 거예요.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