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자료

나타난 천국 8강-모형의 마감

아빠와 함께 2026. 1. 17. 17:51

2026 겨울수련회 고린도후서 강해 제8강 : 모형의 마감 - 이 근호 목사

8번째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고린도후서 6장 2절에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6장 2절에서 이사야 49장 8절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어떻게 이사야 49장 8절의 말씀을 인용한 게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그런 논리가 성립이 되는지. 그 논리 사이가 뭔가 매끄럽지 않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은혜를 주신다. “고맙습니다.” “또 은혜 줄게.” “고맙습니다.” 이러면 되는데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이 말은 뭐냐? ‘그전은 은혜 받을만한 때가 아니였었는데 그냥 예언만 했었을 뿐인데 지금은 은혜 받을 때고, 그전에는 온전한 구원이 성사될 수 없는 때였는데 지금은 구원의 날이라고 이렇게 확정짓는 근거는? 어디서 그런 근거가 있느냐?’ 그런 질문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 질문에는 이렇게 답변하면 돼요. 그동안 비유나 은유였던 것이 이제는 마감되었다는 거예요. 마감되었다. ‘원고 마감되었습니다. 기사 마감되었습니다. 더 이상 안 받습니다.’ 하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을 맛보고 죽었다가 부활함으로써 더 이상 메시야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메시야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천사가 보기에 그야말로 ‘우리는 당신에게 굴복하겠습니다.’하는 대상자가 드디어 천사 눈에 이미 등장해버렸어요. 등장해버리면 그 후부터 새로운 창조가 개시되는 시기, 시점에 들어왔다는 겁니다.

새로운 창조가 개시되는 시점에서 여기서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새로운 창조가 되려면 뭐가 있어야 돼요? 능력이 있어야 되잖아요. 이 능력이 무슨 능력이냐 하는 거예요. 그 능력이 무슨 능력이냐? 그게 바로 2절에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아버지가 구원을 마감할 때 누가 도왔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이 아버지의 말씀에 입각해서 아버지의 구원이 완성되도록 예수님이 자기 역할을 다했다 이 말입니다. 이 말은 아버지의 뜻을 아는 유일한 분은 예수님 본인뿐이다. 예수님만이 아버지의 뜻을 아는 거예요. 새로운 창조는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 두 분의 합작품입니다. 두 분의 합작품. 전달자는 성령께서 그렇게 전달하고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언약이 완료가 되었습니다.

완료가 되었으면 백성은 어디 있느냐? 완료가 되었기 때문에 그때부터는 아들의 영이 아들에 종속되도록 자기 원하는 백성을 선택해서 불러 모을 수 있는 자격이 예수님한테 있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성령께서 백성을 불러 모을 때, 성령께서 자기 백성 된 사람에게 찾아와서 이끌 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모습을 보이느냐는 거예요.

성령을 받았다. 진짜 성령 받았다. 진짜 복음을 알았다. 진짜 주님을 알았다. 이 배경에서 뭐가 부수적으로 나타납니까? 아까 이야기했죠? 십자가 복음을 전하면 반드시 거기서 인간의 지성과 이성에 의해서 높아진 모든 이론도 같이 확장된다 했죠. 인류가 끝날 때까지. 이 세상의 모든 것, 옛 세상이 다 허물어질 때까지 가짜 성령, 가짜 복음, 가짜 주님이 같이 동반해서 성행하게 되는 겁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알고 고린도후서 6장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4절에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 매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라고 되어 있죠.

누가요? 누가? 누가 그렇다는 거죠? 지금 사도 바울 본인이 그렇다는 거예요. 사도 바울은 이렇게 된 이유가 참된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구원에 충실하게 도움을 줬던 예수님이 성령을 통해서 그 은혜가 지금 누구한테 임했습니까? 은혜가 사도 바울에게 임하니까 사도 바울에게 뭐가 재생되느냐 하면 레코드 재생되듯이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겪었던 모든 것이 사도 바울에게 그대로 복제가 되는 거예요.

사도 바울은 레코드판 같아요. 틀고 또 틀고 또 틀어도 똑같은 노래가 계속해서 나오는 것처럼 예수님이 지상에서 있었던 그 모든 것이 반복되는데 그걸 사도 바울은 지금 뭐라고 표현하느냐? 자기가 지금 고생을 해요, 안 해요? 많은 고생을 하죠. 고생을 하는데 이걸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이걸 ‘주님의 은혜’라고 보는 거예요. 아무나 되는 게 아니에요. 인력으로 되는 게 아니란 말이죠.

다시 보게 되면 8절에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그냥 ‘참되고’하면 될 텐데 ‘속이는 자’라는 말을 왜 집어넣었습니까? “속이는 자 같으나” 누가 보기에? 하도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하니까 육에 속한 사람이 ‘너 지금 사기치고 있지?’라고 하는 말을 얼마나 많이 들었겠어요?

그런데 그러한 욕설과 비난은 이전에 누가 들었어요? 이 땅에 몸소 오신 하나님이 벌써 이 땅에서 그런 비난을 많이 받았어요. 그들은 인간이 아니고 육이기 때문에. 예수님 혼자 영이고 그들은 육이잖아요. 육한테 욕을 얻어먹는 그것이 영이에요. 이게 은혜기 때문에 실천한 게 아니에요. ‘나 이렇게 살아야지.’ 하는 게 없습니다. 그냥 덮쳐진 은혜가 이런 은혜였어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이름도 없는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여기서 이제 구조적으로 중복이 일어납니다. 땅에서는 죽었는데 하늘에서는 산 자로 이미 인정받는, 그런 하늘과 땅의 두 세계가 사도 바울의 일상 속에 같이 하나의 샌드위치처럼 겹쳐 있는 거예요. 같이 포개져 있는 겁니다.

너희들 보기에는 우리가 시시해보이지?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 유명하다? 하늘나라에서 다 유명하죠. 그래서 사도행전 19장에서 마귀가 예수님을 압니까, 모릅니까? 마귀가 알아요. 15절,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예수님과 바울이 같은 쪽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누가 압니까? 귀신들이 알아요, 귀신들이. 귀신들이 귀신같이 아는 게 뭐냐? 너는 아니라는 것을 귀신같이 알아요. 도사에요. “너는 아니야! 너는 사도 바울 쪽이 아니야. 너는 그 반대쪽이야.”라고 귀신이 귀신같이 안다니까요. 척해도 소용없어요. 그러면 우리는 행동거지를 조심해야 되겠네. 조심해야 될 문제가 아니고, 그냥 이게 은혜라니까요. 덮쳐진 은혜가 그래요. 의도적으로 조작해야 되고 연출해야 되는 게 아니고 그냥 은혜에요.

그다음에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이건 또 무슨 이중성이에요? 뭐 조울증 걸렸어요? 너무 너무 슬퍼… 아하하하! 이게 뭡니까? 나 너무 걱정이 돼. 그런데 왜 이렇게 기쁘지? 진짜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하늘의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되죠. 이걸 그대로 어디까지 가져가느냐 하면 11장에 가져가는 겁니다. 10장 10절부터 보게 되면 “저희 말이 그 편지들은 중하고 힘이 있으나 그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 하니”

‘뭐 이런 사람이 그동안 우리 사도를 했냐?’ 이렇게 한 거예요. 그래서 본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짓인지 다 아시겠지요? 그래서 뭐라고 하느냐? 10장 1절에서 그들의 자기에 대한 평가를 고려해요. “너희를 대하여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한 나 바울은” 너희들 말이 맞아. 나 아무것도 아니야. 하지만 나는 모든 일에 담대해.

그리고 11장에 보면 1절, “원컨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청컨대 나를 용납하라” ‘너희들 소문에 나 아무것도 아닌 자라고 평했는데 그래, 아무것도 아닌 자가 한 마디 할 테니까 너희 좀 용납하라.’ 이렇게 이야기한단 말이죠.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주님께 중매한다. 중매쟁이다 이 말이죠.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중매하는데 여기에 누가 개입됩니까? 뱀을 개입하게 하는 겁니다. 뱀을. 이것도 은혜에요. 뱀이 어떤 짓을 하는지 간파하는 것도 은혜에요. 뱀이 하와, 여자를 유혹한 것처럼 그 유혹이 지금도 멈추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그 점을 설명해볼게요. 에덴동산이잖아요. 에덴동산으로부터 물이 흘러나와서 온 지구 대지를 다 적십니다. 맞죠? 네 개의 강이 다 적십니다. 그런데 에덴동산 중앙이 있어요. 중앙에 나무 두 개가 세워져 있습니다. 생명나무와 선악과가 심어져 있어요. 이게 낙원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상식에 의하면 낙원엔 누가 들어와서는 안돼요? 낙원에는 방비가 철두철미하게 되어서 악마, 사탄이 이 낙원에 들어오면 안돼요. 낙원이 깨어질 거니까. 이 낙원이 실체라면 악마가 들어오면 안 되죠. 그런데 구약성경은 뭐라고 했습니까? 모형이고 비유고 은유에요. 비유고 은유란 말이죠. 비유고 은유니까 실체, 영원히 살 천국은 아니에요.

그러면 이 비유가 장차 올 영원한 천국인 것을 ‘내가 보자’가 아니라, 그 천국을 위해서 미리 앞서서 이러한 모형물을 주님께서 제작하신 거예요. 모형물을. 여기 있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고 뭐가 되고? 육이 되고. 여기 있는 뱀은 뱀이 아니었고 뭐가 되고? 사탄이 되고. 여기 있는 모든 창조는 오랫동안 영원할 창조가 아니고 나중에 파괴될 창조고. 이 전체가 비유고 은유기 때문에 나중에 실체가 오게 되면 그들의 운명을 다하고 양보해야 돼요. 그들의 비유 기능이 마감되어야 될 그러한 임시방편적인 조치가 에덴동산입니다.

그런데 이 에덴동산에서 강이 생겨 발원해서 전 토지를 적시잖아요. 여기서 중요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 낙원에서 쫓겨나고 그 후손들이 전 토지에서 경작하며 살았잖아요. 제가 묻습니다. 그 토지는 인간들 보기에 실체입니까, 비유입니까? 인간이 살고 있는 전 토지, 이 지구상, 이 지구의 흙덩어리, SiO₂ 이 흙. 그리고 저 산, 해와 달과 별. 그리고 이 신체. 이것은 진짜에요, 아니면 마네킹입니까?

‘나에게 이게 전부에요, 전부가 아닌 거예요?’라는 질문입니다. 아까 고린도후서 5장에서 우리의 장막, 우리의 몸은 이제는 시효가 다 되어서 이 고물 같은 몸을 벗어버리면 은유가 벗어져버리면 실체가 덧입혀진다고 되어 있거든요. 고린도후서 5장 1절,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우리는 여기서 잠시 탄식하며 기다리지만 하늘로부터 와서 우리를 영원한 집으로 인도한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그러니까 고린도후서 전체 내용이 뭐에요, 결국? “이 가짜야, 좀 참아라!” 이 이야기에요, 결국. 가짜야, 좀 참아라. 그럼 가짜인데 무슨 구원을 받습니까? 은혜 줄게, 은혜 줄게. 진짜로 오는 은혜를 가짜에게 덧입히면, 가짜의 비유 기능과 은유 기능이 마감되고 그때는 진짜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할 그날이 온다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거대한 프로젝트에요. 프로세스에요. 계획입니다.

이제 강의 끝자락 오니까 감이 좀 잡히십니까? 자기 자신의 모형가지고 남하고 비교해서 억울해하고 슬퍼하거나 대결하거나 경쟁하거나 그런 부질없는 짓은 하지 말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심하게 구박을 받았기 때문에.

11장 23절 보겠습니다. 22절부터 “저희가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아브라함의 씨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자칭 뭐로 봅니까?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자처하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힘 있게 이야기하죠. 네가 정신 나간 소리했다 이 말이죠. 사기를 쳐도 정도껏 쳐야지.

그러면 묻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이게 지금 상당히 낭만적으로 들리시는 겁니까? 낭만적이 아니죠. 다시 말해서 비유와 은유가 마감되면 예수님이 이 땅에서 당했던 실체가 자기의 몸을 통해서 은혜로 말미암아 그게 노출되고 그게 같이 체험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그런 힘든 일을 중간에 포기하고 하지 말지.” 할 거잖아요. 그러니까 하는 말이 “이거는 내가 하는 게 아니고 부득불 할 수밖에 없다. 그게 은혜기 때문에.”

심지어 여기 12장에 보면 자기가 몸이 아파요. 몸이 아파서 기도했습니다. 몸이 아픈데 감기, 뭐 독감 정도가 아니에요. 무엇의 가시입니까? 사탄의 가시에요. 그 사탄의 가시를 줬는데 그게 또 하나님의 은혜에요. 이게 보통 인간적인 마인드에서는 도저히… 사탄의 가시가 들어왔는데.

에덴동산에 뱀이, 악마가 들어왔는데 이게 은혜랍니다. 이게 말이 돼요? 에덴동산 파탄 났는데요? 깨어졌는데요? 인간 입장에서는 도저히 에덴동산 못 살고 직사게 고생하는데요? 그런데 이것조차도 하나님의 은혜의 일부였다는 거예요. 아담과 하와가 쓰여진 대로 쓰여졌기 때문에.

자, 그렇다면 거기에 대한 원인을 봐야 될 것 아니겠습니까. 뱀이 이야기했어요. 뱀이 와서 어떤 작당을 했느냐 하면 고린도후서 11장 4절에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다른 예수입니다, 나왔어요, 다른 예수. 그다음에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다른 영, 다른 성령 나왔습니다. 예수, 성령 그다음에 뭡니까?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다른 복음 나왔습니다.

이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전파하는 그 사도를 고린도교회의 당회장으로 세웠거든요. 그 의도가 뭡니까? 왜 그 사람을 세우죠? 그러니까 이것은 교인들이 못 알아보는 거예요. 교인들이 저 사람이 예수 언급하니까 예수 믿는 사람인 줄 알고, 성령 언급하니까 언급하기만 해도 성령 받은 사람인 줄 알고, 복음 이야기하니까 복음에 철두철미한 사람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어디서 그게 들통나느냐 하면 이렇게 들통납니다. 11장 20절에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너희가 용납한다. 이게 뭡니까? 가스라이팅 당한 거예요. 가스라이팅 당했는데 당한 사람이 나쁩니까? 아니죠. ‘당신의 그러한 성령, 그러한 복음, 그러한 예수를 우리가 일찍부터 원했습니다.’하는 거예요.

그래놓고 하는 말이 사도 바울에 대해서는 이젠 더 이상 고린도교회에 간섭하지 말래요. 요새 말로 하면 원로목사쯤 된다고 생각하는 거죠. 간섭하지 말래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렇게 합니다. 13-15절을 오랜만에 다 같이 읽어봅시다.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자, 문제 나갑니다. 서로가 서로보고 사단의 일꾼이라 한다면? 서로가 서로보고 이단이라고 한다면? 서로가 서로를 보고 이야기하는 그 결정의 기준은 뭐냐? 두 여자가 잠을 자는데 각자 애가 하나씩, 둘이었어요. 자다가 애 하나가 여자의 무게에 눌려 죽었어요. 아침에 보니까 애 하나밖에 없었어요. 어떤 여자인 줄 모르겠지만 어떤 여자가 아이를 놔두고 이건 내 애라고 했고 억울한 여자가 하나 생겼습니다. 그때 솔로몬에게 찾아왔습니다.

솔로몬 재판 어떻게 했습니까? 여러분 잘 아시잖아요. 솔로몬 재판은 굉장히 지혜로운 재판이라고 소문났습니다. 그 지혜가 뭡니까? “애 가져와. 반반 나눠.” 잔혹동화 같아요. 서로 자기 애라고 주장하니까. CCTV도 없고 구별할 방법이 없잖아요. 그럼 잘됐네. 애를 쪼개면 되겠네요. 반반씩. 그럼 아주 공평하지 않습니까. 외부적으로는 둘의 의견을 둘 다 존중한 게 되죠.

그러면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너희들 당회장은 지금 마귀다. 마귀라고 사도 바울로부터 규정된 자는 엉터리 사도다. 한때 유명했지만 지금은 우리하고 관계없다.”라고 했을 때 그것을 판정하고 나서는 중간에 있는 교인들은 어느 편을 들어야 되며, 어느 편을 들어야 될지 결정할 수 있는 기준은 뭐가 되겠습니까? 기준이 뭡니까?

1층에서 예배드리고 2층에서 예배드리고 서로서로 정통 당회장이라고 주장했을 때 아래층서 예배드린 사람들에게 주도권이 있습니까? 2층에서 예배드린 사람들에게 주도권이 있습니까? 그와 똑같은 이야기에요. 그러면 재판관은 어떻게 합니까? 교회 팔아서 재산 반 나눠라. 결국 재산 문제에요. 그럼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어요? 아까 이야기했는데요.

사도는 내가 이런 지적하는 것이 인간을 상대하는 게 아니에요.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은혜에요. 자기는 어떤 승리를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온 게 아니에요. 약하디 약한 것으로 약하게 가는 거예요. 교회를 장악한다든지 교회를 다시 복음으로 돌린다든지 힘을 발휘할 생각이 없습니다. 다만 무엇이 진리인가를 그냥 전하고 나머지는 누구한테 맡깁니까? 그건 누구 일이에요? 전한 것도 주의 일이지만 결과도 누구의 일이에요? 주의 일이잖아요. 고민할 게 없죠. 고민할 게 없어요. 걱정하고 근심하는 건 좋은데 그렇다고 해서 그 교회를 쫓아내고 하는 그 정치적 일은 사도 바울이 할 일이 아닙니다.

다만 사도 바울이 할 것은 왜 그들이 가짜 사도인지를 자기 은혜 받은 대로 계속 전할 수밖에 없죠. 전했는데 그게 12장에 나옵니다. ‘그들은 중첩되지 않았다.’ 이게 결정타입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이게 어디 나옵니까? 고린도후서 12장 1-3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부득불. 어쩔 수없이 자랑하노니. 자랑하고 싶은 것이 아니고 너희들이 먼저 건드렸잖아.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가 어느 하늘에 갔습니까? 셋째 하늘로 올라갔죠. 셋째 하늘로 올라갔다는 말은 뭐로 들리느냐 하면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께서 “내가 이 땅에 왔는데 나는 하늘에 속하고 내 말을 듣는 너희들은 땅에 속했기 때문에 너희들은 내 말을 듣지 못한다. 오직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사람, 믿음을 받은 사람, 은혜를 받은 사람만이 내 말을 듣는다.”라는 그러한 모습을 주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똑같이 일어나게 만들어버렸어요.

결국 예수님의 말씀을 알았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홀로 돌아가셨기 때문에. 저 사람은 억울하다. 데모하자. 이미 재판 끝났습니다. 사형. 사형으로 끝났어요. 그게 인간이 따라올 수 있는 것의 전부에요. 재판 끝나니까 제일 먼저 누가 흩어졌습니까? 제자들이 시마이.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나는 이제 돌아가겠소. 여기까지가 끝이에요.

그러니까 여기서 또다시 뭐가 나옵니까? 불가능성이 또 나오는 거예요. 불가능성. 그동안 내가 성경을 보고 신앙생활을 하고 복음을 생각하는 이 모든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던가. 내가 마음만 먹으면 해냈던 일이었던가. 아니면 그전부터 모든 성경을 대할 수 있는 찬스, 성경을 보는 기회, 시간마저 불가능성에 근거해서 제공된 하나님의 기회였던가를 생각나게 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정리합시다. 정리하면 이렇게 돼요. 사탄은 철저하게 인간의 가능성을 공략합니다. 인간의 가능성이 원인이 되면 이 가능성에 합당한 결과가 가능성에 입각해서 만들어집니다. 이게 사탄입니다. 사탄은 인간의 능력을 부정하지 않고 인간의 가능성을 긍정하죠. 긍정합니다. 그러니까 사탄에게 있어서 예수, 성령, 복음 이것은 노력만 하면 얼마든지 성경에서 요구하는 것을 믿을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고 알 수 있는 그런 대상으로 본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은? 은혜입니다. 은혜는 어디서 안 나옵니까? 행함으로 안 나오죠. 로마서 4장에서 은혜는 행함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은혜에 속한다는 것은 인간이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한다는 거예요.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리는 아브라함에게 일어난 그 언약 사건은 은혜에 속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의 가능성이 아니고 인간의 불가능성이죠. 불가능성의 특징은 불가능성에서 화살표가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인간의 불가능성에서 나온 게 없어요. 그러면 되어진 결과를 통해서 이 ‘있음’이 오히려 예수님께 바로 가면서 ‘이것은 네가 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했다’를 경유해서 그러면 나한테 주어진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은혜였다는 그러한 흐름 차트, 하나의 코스를 보여주는 거예요.

만약 여기 사도 바울이 있고 고린도교회 당회장이 있다 합시다. 두 말을 다 경청해봅시다. ‘두 말이 다 옳다’가 아니라 내가 어느 쪽인가를 판단하기 위해서 한번 들어봅시다. 들어보고 ‘인간은 이렇게 해서 이렇게 된다’는 이쪽을 할 겁니까, 아니면 ‘결과가 예수님을 통해서 그냥 거저 주신 은혜였다’는 쪽을 할 겁니까?

이 과정 속에서 불가능성이 주어지는 것은 관찰하는 나의 배제, 나의 부정성을 아울러서 드러내는 겁니다. ‘나는 죄인이기 때문에 구원될 수 없었습니다.’ 하는 것을, 이 차트가 회전하면서 계속해서 반복해서 느껴지는 거예요. 그걸 그대로 사도 바울에게 적용하게 되면, 내가 부득불 자랑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부득불. ‘내가 이렇게 천국 가고 싶어 애썼는데 들어갔다.’ 이게 아니라 결과를 이야기해요. 결과를.

‘결과가, 내가 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로소 나는 부득불 자랑할 수밖에 없다. 내가 했으면 자랑 안하지. 내가 자랑할 수밖에 없다.’라고 하면서 “내가 삼층천에 올라갔는데…” 계속해서 말하기를, 자기를 부정하고 빼내기 위해서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누가 모른다고 되어 있어요?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누군지 나는 몰라. 이게 뭐 말이 안 되죠. 본인이니까.

‘본인은 본인이 모르는 본인입니다.’ 이런 이야기밖에 안돼요. ‘나는 내가 하나의 결과물이지, 나에서부터 도출된 결과는 아닙니다.’ 그런 뜻이에요. 5절에 보면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라고 하면서 뒤에 “나에게 사탄의 가시가 주어졌는데 이것도 은혜인 이유가 내가 너무 큰 계시를 받았기 때문에.”라고 했죠.

그럼 앞에 나온 삼층천 올라간 계시는 누구에요? 사도 바울 본인인 것을 뒤늦게 자백하고 있죠. 내가 너무 큰 은혜를 받은 것을 은혜 받았다고 우쭐대지 않기 위해서 주님께서 우쭐댐을 방지하기 위해 장치를 줬다는 거예요. 그럼 사탄의 가시가 안 오게 되면 사도 바울은 100% 뭐합니까? 우쭐댈 수밖에 없는 속성을 자기 육신에 갖고 있었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우쭐대고 안 우쭐대고 간에 그것조차도 주님께서 이미 감안해서 필요해서 사탄의 가시를 줬기 때문에 ‘주님은 모든 것이 나한테 은혜입니다.’라는 거예요.

7절,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을 위해서 악바리처럼 아주 결사적으로, 너무 아파서 기도를 몇 번했습니까? 세 번. 삼세판이라 하죠. 한 번 해도 안 되고 두 번 해도 안 되고 세 번 기도했지만 결과는 세 번째 다 철회되었습니다.

이 장면은 마치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에서 처음에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그만 철회되게 하옵소서” 기도한 장면이 연상되지 않습니까? 연상되는 거예요. 이걸 사도 바울이 고집스럽게, 너무 아파서 이런 가시를 빼달라고 한다는 것이 얼마나 인간적입니까? 얼마나 육적이에요. 그런데 그 육을 하나님께서 쓰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그 가시가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그렇게 가시가 있음으로써 전체적으로 사도 바울이 내보인 결론은 뭐였습니까? ‘내가 약하기 때문에 비로소 나는 주님께서 온전하다고 평해줬다. 내가 약하기 때문에. 내가 약한 데서 온전하리라. 내가 진짜 사도인 이유는, 내가 이렇게 자랑할 것은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만을 자랑하기 때문에 내가 진짜 사도다. 이 어리석은 고린도 교인들아. 현재 당회장은 뭐를 자랑하는가, 한번 대조하고 비교해보라.’ 이런 이야기에요.

12장 12절에 “사도의 표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내 자신이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한 일밖에 다른 교회보다 부족하게 한 것이 무엇이 있느냐 너희는 나의 이 공평치 못한 것을 용서하라 보라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기를 예비하였으나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리라 나의 구하는 것은 너희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어린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이에 부모가 어린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덜 사랑을 받겠느냐” 이렇게 하면서 다시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누구를 보내느냐? 디도를 보내요. 디도는 <디도서>라는 편지의 수신 대상자입니다. 그레데 섬의 당회장(딛 1:5)이 디도에요. 그렇게 해서 사도 바울이 당했던 이 이야기를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어려운 대목을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정리하면서 여러분께 질문을 던질게요. 사도 바울이 많은 기적을 베풀었잖아요. 예수님처럼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렸잖아요. 그런데 자기 신상은 왜 이 모양입니까? 왜 그 모양 그 꼴입니까?

아니, 주님께서 그런 기적을 행했으면 주께서 사도 바울을 잘 쓰려면 안 아프게 하고 건강하게 하고 기적적으로 환난을 피하고 매 맞는 것도 없어야 하잖아요. 아까 쭉 나열한 것 봤죠? 이것은 죄를 보통 많이 지은 자도 그 정도 벌은 안 받아요. 왜 혹독한 징벌을 이렇게 사도 바울에게 가하도록 주께서 은혜를 주셨는가? 그 이유가 뭐냐? 그것은 바로 불가능성 때문에 그래요. 인간은 아픈 것은 싫어하고 자기한테 좋은 것은 좋아하잖아요.

이게 넓은 길로 갈 수밖에 없는 건데 주께서 자기 백성을 건질 때에 사도 바울처럼 중첩이 되는, 성령으로 인하여 중첩이 된 사람. 그냥 육인데 성령이 오시니까 어떤 사람이 돼요? 영에 속한 사람이 됐죠, 영에 속한 사람. 영에 속한 사람은 본인도 이것을 취소할 수 없어요.

영에 속한 사람이 ‘이제 영에 속한 사람 안하고 죄 많이 지어서 육에 속한 사람 할래.’ 이렇게 영을 주신 하나님의 일방적인 것이 철회가 안 됩니다. 철회가 안 되기 때문에 영이 인도한 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어요. 내 인생을 내 마음대로 컨트롤할 수 있는 처지가 못 됩니다. 할 수가 없어요.

이게 바로 중첩이에요. 누가 내 위에 올라탔어요. 누가 내 위에 올라타서 내 소원대로 되는 게 아니고 오히려 정반대에요. 내 소원은 항상 내가 멀쩡하고 우수하고 남을 이기고 지기 싫어하고 말빨 세우고 이런 것인데, 그런 건 전부다 족족 거부당하고 갈수록 내가 뭔가 내 스스로 할 수 있다는 것이 불가능성에 의해서 전부다 차단되게 만들어버려요.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그게 주님이 성령으로 임한 것처럼 중첩이 되는 겁니다.

이제 이 시간 마지막으로 이것을 따져보고 마치겠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은 누구 이야기냐 하면 십자가에서 사도 된 사도 바울 이야기잖아요. 지금 제가 보고자 하는 것은 마태복음 3장입니다. 마태복음 3장에 누가 나오느냐? 세례 요한 나오죠. 세례 요한을 여기서 왜 거론하느냐?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관계는 비유고 은유거든요. 이 비유와 은유가 사도 바울에 이르러 마감이 되어서 사도 바울은 ‘지금이 은혜 받을 때요 구원의 날이다. 시간이 더 진전되고 공간이 넓어진다는 것은 이젠 더 이상 무의미하게 되었다.’라고 했어요. 그러나 세례 요한은 그렇지 않아요. 아직까지 오실 분이 더 일을 추진해야 돼요. 그러나 구조는 한결같이 동일한 구조를 갖고 있으니까 동일한 구조를 찾아보자는 거예요.

마태복음 3장 봅시다. 세례 요한의 구조를 우리가 봐야 될 이유가 뭐냐 하면 우리는 내 중심으로 보면 안 되고 구조 중심으로 세상을 다시 봐야 된다는 뜻이에요. 세례 요한의 마인드 있잖아요. 구조 중심으로 보는 것. 우리가 동일한 구조 안에 지금 놓여있어요.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고 사도 요한도 마찬가지고 세례 요한의 예수님과의 관계성이 그대로 성령을 통해 완성된 채로 그 구조는 변함없이 동일한 구조로 주어져있습니다.

자, 세례 요한이 어떤 구조를 갖고 있는가? 세례 요한의 구조,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시간이고 또 하나는 공간이죠. 둘의 공통점이 뭐냐 하면 ‘분리’에요. 시간적으로 새로운 시간이 오면서 기존 시간은 먹히지 않는다는 거예요. 시간적인 분리. 그다음에 공간적으로 분리. 거기 있지 말고 도시에서 나와. 광야로 와. 광야로 오게 되면 도시와 광야를 가로지르는 요단 강물이 흐르죠. 뭐 깊지는 않습니다만 그때는 어땠는지 모르죠.

지금 세례 요한이 있는 위치는 의도적으로 세례 요한과 관계되어 있는 예수님이 원했던 지정한 위치에요. 그 위치와 맞은편에 세례 요한 외에 모든 자의 위치를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선지자를 통해서 마주보게 만들었습니다.

우선 시간적으로 마주봅니다. 시간적으로 세상은 ‘마지막 심판은 아직 아니다. 심판 멀었다.’라는 것이고 세례 요한은 뭐냐? ‘지금이 바로 심판 때다.’ 심판을 예고했던 그 분이, 당사자가 심판을 예고했다는 말은 심판주가 오신다는 그 당사자가 이미 와버렸다는 거예요. 와버렸으니까 시간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겁니다. 이게 뭐냐? 마태복음 3장 2절,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천국이 왔기 때문에 가까이 왔다는 표현을 한 거예요. ‘아직 여유 있어.’ 이럴 것 같으면 가까이 왔다는 표현을 할 필요가 없어요. 이미 천국은 여기 와 있다 이 말이죠.

대리기사 불렀는데 ‘차가 가까이 와 있습니다.’ 이 말은 타라는 이야기에요. ‘저 기다리게 하시지 마시고 타세요.’ 이런 뜻이지, ‘뭐 아직 몇 분 남았는데…’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그럼 말을 굳이 할 필요 없잖아요. ‘나에게 선지자를 맡겼던 그 분이 이미 여기에 도달했습니다.’ 그게 바로 심판의 날이에요. 심판이기 때문에 회개가 필요하겠죠. 심판이 아니면 회개가 필요치 않잖아요. 심판이기 때문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라고 하면서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광야에 적합한 의복을 하고 음식은 광야에 적합한 음식이었습니다. 뭡니까?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습니다. 이것은 기존의 이스라엘 땅에서 의도적으로 공간적으로 기피하는 거예요. 나는 너희들하고 같이 안 놀아.

그러고 난 뒤에 내가 있는 곳에 오려면 회개해야 된다. 회개하지 않고 세례 요한한테 온 자들이 있었어요. 그게 누구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요한에게 오는데 그냥 왔어요. 뭐가 없이? 분리 의식이 없이. ‘우리는 잘못된 세계에 살고 있다. 진짜 세계는 세례 요한 저쪽이 진짜고 우리는 가짜다.’ 이런 생각 없이 그냥 관찰하러 조사관으로 나온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세례 요한이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7절에 그들에 대한 명칭이 뭐에요? “독사의 자식들아” 이제 막가는 판에 무슨 말을 못하겠습니까?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정말 그들이 임박한 진노를 고려해서 세례 요한한테 왔을까요? 안 왔죠.

“너희들이 나한테 온 이유가 잘못되었으니까 그 이유를 내가 똑바로 알려줄게. 너희들이 나한테 왔다. 그럼 너희들은 지금 임박한 진노가 무서워서 회개하러 나와야 마땅했다.” 이 말이에요. 회개가 안 된 인간에게 회개하는 그 내용을 세례 요한 쪽에서 제공해주는 거예요.

그 대신 너희는 나한테 욕이나 얻어먹어라. 욕 얻어먹고 그 욕을 감당해야 돼요. 독사의 자식들아. 뭐 너희들이 아브라함의 조상이라고? 9절에 보면 “너희가 아브라함의 조상이라고? 이 돌멩이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가능성이 있다, 없다? 불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불가능성.

지금 이 구조를 여러분들이 그대로 생각해보세요. 이 구조가 사도 바울이 이야기한 구조와 일치됩니다. 오늘날 우리하고도 마찬가지고요. 그 구조, 전체 체계, 시스템을 생각하시라고요. ‘나는 어떻게 되느냐?’ 개인 생각하지 말고 ‘시스템 안에 들어있는 이 구조 안에서 나는 어디에 지금 놓여있는가?’ 그걸 생각하시라 이 말입니다.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불가능성이죠.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여러분 발목이 좀 근지러운지 한번 보세요. 날카로운 도끼가 여러분 발목에 간질거리게 놓여있지 않습니까?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예수님께서 알려준 대로 이야기해요.

그런데 세례 요한은 지금 뭘 모르느냐? 좋은 열매가 뭔지 몰라요. 그는 아직도 비유고 은유기 때문에 좋은 열매가 뭔지는 실체로 오신 주님께서 포도나무가 되어 열매를 맺는 그 때 최종적으로 알아요. 세례 요한은 인간의 행함으로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여지를 줘요.

그래서 회개하는 것도 그냥 반성 수준으로 보는 거예요.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나는 물로 세례 주는데 이건 폼이다. 이게 실체가 아니다. 전부가 아니다. “내 뒤에 오시는 이”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뭐로 세례 줍니까? 나는 물로 세례 주는데, 물로 세례 준다는 말은 덮친다는 말이죠. 강제로 덮치는 거예요. 물속에 집어넣는 거예요.

나는 지금 물속에 집어넣는 일을 하는데 내 뒤에 오시는 분은 어디다 집어넣는 일을 하십니까? 두 종류에요. 한 종류는 성령에 집어넣고 한 종류는 불속에 집어넣고. 알곡은 성령에, 그리고 지옥 갈 자는 불속에 집어넣는 일을 하신다. ‘그러니까 나 제치고 그 분 만나러 가지 말고, 비유와 은유가 되는 나를 경유해서 물세례부터 받고, 코스가 돼요, 그다음 차례로 나와 함께 있을 경우에 오실 분을 나와 함께 만나자.’ 라고 하는 거예요. 그 역할을 사도 바울이 지금 완성된 입장에서 안내자로 하고 있는 겁니다. 안녕히 주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