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자료

나타난 천국 4강-두 개의 흐름

아빠와 함께 2026. 1. 17. 09:16

2026 겨울수련회 고린도후서 강해 제4강 : 두 개의 흐름 - 이 근호 목사

네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두 개의 흐름’에 대해서 하겠습니다. 이미 자본이 흘러가게 되어 있죠? 자본이 이렇게 흐릅니다. 그 흐름을 잡는 자가 큰돈을 버는데 주님께서 공격하는 것이 요한계시록 18장 9-10절에 보면 나옵니다. “그와 함께 음행하고 사치하던 땅의 왕들이 그 불붙는 연기를 보고 위하여 울고 가슴을 치며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 일시간에 네 심판이 이르렀다 하리로다.”

땅의 상인들이 그를 위하여 울고 통곡한다. 요한계시록 18장 20절에 의하면, 주님의 심판은 도시에 대한 심판이에요. 도시라고 하는 것은 남아도는 에너지가 거기에 모여 있는 거예요. 도시와 도시 아닌 것의 차이점이 뭐냐? 그냥 하나의 공간으로 보면 매끄러운 공간, 예를 들어 바다와 사막 같은 곳, 여기는 야생 그대로죠.

야생 그대로의 바다와 사막 같은 이곳은 어디서 어디까지의 구역이 안 잡혀 있잖아요. 그런데 도시는 여기에 길이 생기고 필지(筆地)가 생겨요. 몇 필지, 몇 필지의 구획이 돼요. 도토리묵이나 두부 같은 경우에, 그냥 놔두면 야생 그대로지만 거기에 토막을 내요. 칼질해서 “내 필지는 1개인데 네 필지는 몇 개야?” 할 때 “A는 필지가 하나뿐인데 B는 필지가 여기도 있고 저기도 있고, 필지가 여러 개야.”

이렇게 되면 이게 구획이 되고 도시에 있어서 내 지분이 많아지잖아요. 지분이 많아지면서 졸지에 동사가 명사로 바뀌어요. ‘기수’하고 ‘서수’가 있는데 ‘기수(基數)’는 필지 같은 것, 길 같은 겁니다. 1, 2, 3, 4, 5, 여기서 1과 2는 관계없고, 2와 3이 관계없어요. 1은 1대로 2는 2대로 독자적이고, 3은 3대로 4는 4대로 독자적이에요.

그러나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이것은 ‘서수(序數)’거든요. 순서가 있는 서수란 말이죠. 순서가 되면 여기서 하나의 연관성이, 관계가 생기죠. 전체적으로 하나의 에너지 흐름이 유지가 돼요. 여기서는 명사가 아니고 뭐가 되겠어요? 명사가 아니고 동사가 되는 거예요.

이것은 두 개의 흐름인데 하나는 아까 이야기한 ‘자본의 흐름’이에요. 그렇다면 이 자본의 흐름에 있어 근본적인 문제는 자아의 오염됨을 모르는 거예요. 모른다. 모른다는 말은 내 속의 부정성을 빼고 자아를 생각한다는 거예요. 내 속의 부정성을 뺀다는 것, 그 뺄 때의 그 판단, ‘나한테는 어떤 부정성도 없다. 있더라도 충분히 용납된다’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특권화된 대상체로 보는 겁니다.

자기 연민이죠. ‘누가 뭐래도 나는 나를 용서한다. 나에게는 할 말이 있다.’ 특권화되어 있어요. 이게 방금 말한 도토리묵 판에서 어떻게 돼요? 도토리묵에서 자기 지분을 따로 챙기는 겁니다. 그런데 자본의 흐름은 어떻게 돼요? 계속되는 흐름이니까 어떻게 돼요? 동사잖아요.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가야 되겠죠, 그렇죠? 계속 흘러간다고요.

왜? 인간의 충동이 욕망을 계속 결핍되고 목마르게 해서 쫓기듯이 계속 가는 거예요. 떠나고 또 떠나고 또 떠나는 거예요, 계속해서. 남자와 여자가 만났을 때 여자 쪽에서 그 남자를 처음 만났을 때 갈구했던 것을 얼추 알았는데 그다음부터는 자기 욕망이 채워지지를 않는 거예요. 그 여자는 남자를 떠나게 되어 있어요.

“내가 땅을 치며 후회하도록 실컷 웃어라, 자기를 스스로 비하할 정도로 땅을 치고 울어라. 하지만 나는 너와 바이바이다. 나 떠날 때 우리 좀 우~아하게 떠나자. 그냥 떠나지 말고 우아하게. ‘우아할 거야~’ 좀 우아하게 떠나자.”

여자가 남자 떠난다고 좋아하면서 홀로 춤을 추는데 남자는 이렇게 저렇게 지그시 보다가 나중에는 어떻게 하는가? 허리 뒷춤에 빨강 샌들 두 개를 딱, 물론 지금 이것은 슬리퍼지만요……, 제가 강의 시간에 이런 것까지 해야 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남자가 샌들 두 개 딱 들고 가까이 가니까 여자가 어깨를 한 쪽씩 흔들어대는 춤으로써 ‘떠날까 말까, 떠날까 말까?’ 이러고 있단 말이죠.

남자가 “그래, 떠날 때는 떠나는데 이게 마지막 선물이다. 신발은 가져가!” 그 여자가 하는 말이 샌들을 탁 바닥에 던지면서 “바이야이야~, 바이아이야~!” “네가 그렇게 가고 싶으면 놔줄게, 바이야이야~, 굿, 굿바이! ……… 신발 가져가야지!!” <굿, 굿바이>(화사, 2025) 이게 자본의 위력입니다. 이게 넓은 길이에요.

굳이 복음인지, 말씀인지, 그런 고민이나 생각을 하지 말고 그냥 대세가 진리에요. 현 상황의 대세가 진리니까 골치 아프게 성경 보고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할 것도 없이 그냥 흐름대로 맡기면 된다는 거예요. 그 흐름대로 맡기는 것이 뭐냐? 자본의 흐름이에요.

여기에 대해 주께서 준비한 다른 흐름이 있어요. 이런 모든 인위적인 구획과, 나눔을 뭐로 집어넣느냐? 빛으로 집어넣어요. 빛을 집어넣으면 무슨 흐름이냐? 이 자본의 흐름에 대비해서 빛의 흐름입니다. 그 빛의 흐름이 어디 나오느냐?

고린도후서 4장 6절을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이게 하나의 흐름이 되는 거예요. ‘빛을 비추면 빛이 비친 거지 우리가 뭘 어쩌라고?’ 하잖아요.

고린도후서 1장 20절에 아주 결정타가 내려옵니다. 모든 이 자본의 흐름을 우습게 만들어버리는, ‘아이고, 꼴랑 그거? 여기에 사람들이 다 매여 있구나. 이게 뭔데?’라고 할 수 있는 구절이 이거에요. 제가 읽겠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 18-20에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실루아노’는 실라를 말합니다. ‘실라(Silas)’는 히브리어고 ‘실루아노(Silvanus)’는 로마식 이름에요.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한다.’ 쳐들어오는 예수님의 빛을 막을 인간은 없는 흐름이다. 자본의 흐름은 ‘내가 투자하느냐, 마냐?’ 이게 성립이 되지만, 빛의 흐름은 말릴 수가 없어요. 이게 넘치니까요. 넘치는데 그 빛은 밝다, 그 빛은 환하다, 그게 아니고 ‘모든 게 yes!’ 모든 것이 합력하여 그 자체가 선이 되는 것.

고린도후서 5장에서 내가 어두움, 내가 죄인을 찾아가는 이유는 내 쪽에서 이미 대신하심을 완료시켰기 때문에 그래요. 네가 어떤 존재인지, 네가 자본에 빠졌는지, ‘굿굿바이’를 하든 신발을 가져가든 관계없이 ‘나는 너를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심에 대해서 이 계획을 취소할 의사가 없다’는 거예요. ‘너를 향한 하나님의 의를 만들어 낸 하나님의 이 일을 나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모든 것이 예!’라고 한 겁니다.

디모데는 2차 3차 여행에 사도 바울과 동행한 사람인데 실라도 2차에 동행했죠. 여기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실라와 디모데가 사도 바울을 왜 따라다닙니까? 빨리 자본의 흐름에 참여해야죠. 취직해서 자기 인생 살 생각 안 하고 왜 자꾸만 사도를 따라다니죠? 뭐 잘해준 게 있어요? 디모데가 바울을 왜 따라다닙니까? 미친 거 아니에요?

우리가 신앙생활 오래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야 할 것은요…, 자, 말씀의 모든 것이 ‘예스’가 됩니다. ‘노’는 없습니다. ‘노’는 아예 그어버리세요. 모든 것이 말씀대로 이뤄집니다. 말씀대로 이루어진다는 것,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이 올 때 이것이 우리에게 오게 되면 여기서 나에게 하는 질문 자체를 뭐로 바꾸는가? 부정성 있는 것으로 노출시킨다.

내가 나에게 진지하게 묻는 모든 질문이 오염됐고, 더럽고, 추잡한 질문만 쏟고 있다는 것을 노출시키는 능력이 바로 빛의 능력이고 말씀의 능력이에요. ‘예스!’ 좋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좋죠. ‘너의 죄에 대해 어떤 것도 일체 묻지 않는다’, 너무 고맙죠.

‘네가 잘못한 게 아니고 마귀에게 속은 건데 뭐 속은 사람보고 내가 닦달할 수 있느냐?’라는 것, 강도 만난 사람보고 “네가 강도 만나 왜 털렸어, 같이 붙어서 왜 안 싸웠어?” 이럴 수는 없는 거예요. 강도가 힘이 세기 때문에 강도 만난 사람은 그냥 널부러져 있는 거예요. 있는 힘도 다 빼앗기고요.

그래서 오늘 제목을 ‘점멸기’로 하겠는데 점멸기가 뭐냐? 어제 우리 올 때 눈 왔죠? 눈밭에 빨강 불빛을 내는 점멸기가 있다고 봅시다. 깜박, 깜박, 한다면, 하얀 배경에 빨간 점멸기가 시그널을 보내고 있다면 그게 뭐냐? ‘살려주세요.’하는 거예요. 깜박, 깜박….

그런데 빛이 늘 켜져 있는 게 아니고 어떤 때는 사그라들었다가 어떤 때는 강화되는데 ‘얼추 내 힘으로 살 수 있겠다’ 싶을 때는 점멸기에 빛이 별로 없어요. ‘어딜 봐도 내가 정당하다.’ 내가 정당하다는 것은 무슨 뜻이라고 했습니까? 사람처럼 살만한 재산이 있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갑자기 일이 터졌다, 보이스 피싱이라도 당하면 어떻게 돼요? “하나님, 살려주세요.” 그게 구약 무엇의 반복이에요? 사사기 아닙니까, 사사기에요. 하나님의 언약은 딱 대기하고 있다가 깜박일 때 찾아와요. 점멸기가 깜박깜박…. 눈밭은 말씀이죠.

말씀의 눈밭에 있는 점멸기가 어떤 때는 강화되었다가 어떤 때는 소멸되었다가 하는데 소멸 될 때는 안 찾다가 강화될 때 “하나님 살려주세요.” 한다는 것은 자기 의를 포기했다는 거예요. “‘내 잘난 맛에 살겠습니다.’라는 이것을 하지 않겠습니다”예요.

“살려주세요”라고 하게 되면 주님께서는…, 지금 사사기 이야기하는 겁니다. 사사기 때 ‘살려주세요’ 하면 사사들에게 성신을 보내서 그들을 구원합니다. 구원하면서 뭐도 같이 드러나느냐 하면, 그들이 애써 감추고 있었던 자신의 부정성을 같이 노출시키는 거예요.

‘이게 문제였어, 이게! 이게 오염되었네. 이게 암세포네.’ 하고 끄집어내듯이 그걸 노출시키는 겁니다. 이런 상황을 그 순서를 바꾸면, ‘이미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죄 없으신 분이 대신 죽었다’는 말은, 주의 대신 죽으심이 공짜가 아니라는 뜻이에요.

호텔에서 주는 티켓으로 공짜로 온천 가는 것과, 자기 돈 내고 온천 가는 거랑 어느 게 때를 더 빡빡 씻겠습니까? 공짜면 대충 씻고 나오죠. 그런데 자기 돈 주고 가게 되면 본전 뽑는다고 자기 피부 다 벗겨질 정도로 ‘뭐 또 오겠나.’ 이래서 빡빡 밀죠.

주님께서 거저 주심은 본전 뽑습니다. 그냥 공짜가 아니에요. “아이고, 고맙습니다. 내가 안 그래도 하나님께 감사를 했어요. 안녕히 계세요.” 하고 후딱 가는 게 아니고 “이리 와. 아직 네 부정성을 본전대로 다 못 뽑았어.” 뽑을 대로 다 뽑는 거예요.

그런데 뽑을 대로 뽑을 때 거기서 자본의 흐름에 속한 사람과 빛의 흐름에 속한 사람이 차이가 나요. 자본의 흐름에 속한 사람은 ‘내 의지, 내 의로움과 나의 독자적인 특권적 대상으로서의 나, 나 없이는 못 사는 나, 그 나를 건드린다면 복음이고 예수고 십자가고 거부하겠습니다.’라고 자기 본색을 드러내는 겁니다.

그러면 점멸기의 깜박이는 것이 없어지죠. 없어지게 되면 이것은 조용한 거예요. 그냥 세상과 한통속이 돼서 달리고 있습니다. 그냥 가는 거예요. 그런데 이 자본의 흐름에서 뭐 ‘나도 인간답게 살아보겠다. 나도 내 소유성을 갖겠다’라고 하다가 잘 안되니까 주님 앞에 호소할 때 ‘하나님 도와주세요. 주님께서 이렇게 살아있으심을 몰랐습니다’ 하는 식으로…, 간증 집회 보면 그런 것이 많지 않습니까?

이렇게 주님 앞에 호소하면서 나오거든요. 이렇게 나올 때 주님께서는 이 부정성을 뽑아내는 준비된 원리가 있어요. 그게 뭐냐? 아까 흐름이라고 했죠. 흐름을 달리 이야기하면 우연이죠. 우연에서 뭐로 들어가느냐? 필연으로 바뀌면서 그 필연은 모든 것이 뭐가 되느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예스’가 되는 거예요. 필연입니다.

‘너는 원래 그때 그 당시에 망했었어야 해.’ 그런데 너는 그 전에 우연한 존재인데도 불구하고 독자적으로 나는 이만하면 됐다고 필연적 존재로 스스로 문을 닫아버렸어요. 나는 내 잘남으로 평생 살겠다고 다짐을 해버렸습니다.

그렇게 다짐을 했는데 이 세상의 마귀보다 더 센 분이 주님이잖아요. 주님께서 마귀를 이겼으니까 그 마귀의 장벽을 뚫고 예수님이 찾아와서 ‘네게 필연이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고, 넌 어디까지나 우연한 존재’라고 이렇게 규정하는 겁니다.

어제 두 번째 시간에서 빨리 지나간 게 있어 아쉬운데요. 다시 이야기하면, 좀 어려운 부분인데, 이미 생명나무를 보호하기 위해서 인간을 추방했습니다. 인간은 선악과 지식을 아는 채로 저주받습니다. 저주의 세계에 빠진 겁니다. 여기에 누가 오느냐? 예수님께서 생명나무 통해 오실 때 이 벽, 이 펜스를 유지하기 위해서 한번 들어간 것은 예수님도 자기 능력으로 못 빠져나와요.

제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면서 생명나무를 두른 이 펜스 자체가 예수님 속에 들어와 버려요. 예수님 속으로 펜스가 들어오면 펜스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자체가 펜스예요. 예수님 자체가 하나의 벽이 되어 버렸어요. ‘나를 미워하는 자는 영원한 저주를 받고 나를 믿는 자는 복을 받으리라.’라는 창세기 1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에게 내렸던 그 원칙이 예수님 안에 완전히 장착되고 말았어요.

그래서 나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는 말이 맞아요. 이 말은 무슨 뜻이냐? 나를 믿지 않는 자는 영원한 저주를 받는다는 말도 맞아요. 왜냐하면 옮겨졌으니까요. 공간적인 이 펜스가 주님의 인격 안으로 쑥 들어가 버렸으니까요. 그렇게 들어감으로 예수님과의 만남이라는 것은, 내가 모르고 있는 부정성을 이미 예스가 되어서 주님이 다 끄집어냄으로써 남는 것은 뭐냐?

값이 없는 구원인데 그 값이 뭐로 바뀌는가? 값이 엄청난 구원으로 바뀌는 그런 고백과 경험을 성도는 하게 되는 겁니다. ‘야, 이거 비싼 거구나. 이게 고귀한 거구나.’ 어느 정도로 고귀하냐? ‘예수님 자신의 생명을 바칠 정도로 고귀한 것이 아무것도 아닌 나를 위해서 치러졌구나. 아버지와의 그 계약금을 대신 대납했구나. 우리가 할 수 없는 계약을.’

그걸 ‘갚아준다’라고 이야기해요. 그걸 구약에서는 ‘고엘 사상’이라고 합니다.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을 대신해서 갚아주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이웃 사랑이 되는 겁니다. 강도 만난 사람은 자기의 여관비나 치료비를 대체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요. 없고 일방적으로 이웃 되시는 주님이 갚아줬잖아요. 선한 사마리아인이 다 갚아줬단 말이죠.

그래서 강도가 치료되고 난 뒤에 식사대접이라도 했습니까? “고맙습니다.” 이렇게 했습니까? “나는 강도였습니다”하는 고백으로 충분합니다. “나의 자체적인 의가 바로 마귀 짓이었습니다.” 그 고백으로 충분합니다. 왜? 그것은 인간의 능력을 벗어난, 주님께서 집어넣은 말씀의 능력만이 그 고백을 나올 수 있게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가라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오고’ 어떤 일도 “못 하겠습니다”라고 하는 게 하나도 없어요. “안 하겠습니다”도 없어요. 너무 큰 값을 받았으니까요. 마태복음 16장에서 주께서 그걸 미리 아시고 이렇게 이야기하죠. 26절에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이 말은 ‘온 천하보다 더 큰 게 너에게 주어진다.’ 온 천하야 곧 망하기 때문에 별로 중요하지 않잖아요. 자본의 흐름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온 천하보다 더 큰 것을 너에게 주겠다.” 그 점에 대해서는 제자들도 동의하고 있죠. “맞습니다. 동의합니다.”

문제는 그 목숨이 진짜 중요한 것, 큰 것을 위해서 주께서 필요로 한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16장 28절에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라고 해놓고 17장 1-3절에 보면,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이렇게 되어 있죠.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광스럽다. 그 영광스러움 앞에서 베드로와 야곱과 요한은 뭘 느끼느냐? 자기가 우연적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합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만든 나를 쳐다보고 살았던 인생을 이젠 더 이상 안 쳐다봐도 돼요.

이 편안함, 더 이상 나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왜냐하면 내가 우연적 존재에 매이게 되면 나도 같이 우연적 존재가 되어서 이것은 미래가 불확실하거든요. 그런데 주께서 허락하신 엘리야 모세 및 예수님은 필연적 존재의 세계에 이미 들어가 버렸어요.

이게 고린도후서 1장 20절에서 이야기하는 것, 모든 것이 ‘예스’가 되는 겁니다. 아까 한 질문에 답변해보겠습니다. “디모데와 실라는 왜 사도 바울을 따라다니는가?” 질문 자체가 잘못됐어요. 따라다니는 게 아니에요. 고린도후서 1장 24절에 나옵니다. 오늘날 기성 교회에 상당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사도 바울을 따라다니는 게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누구의 믿음을 주관하려는 의도가 없어요. 그런 것이 없고 디모데와 실라는 지금 사도 바울을 따라다니는 게 아닙니다. 뭘 따라다니는가? 1장 22절에 나옵니다.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그다음에 보증으로 뭘 주신다?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다, 성령을! 주님은 성령을 주시고, 사도 바울 자기는 빠지는 거예요. 사도 바울은 빠지는 겁니다. 예수님의 영이 임하고 자기는 빠져버리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도 우연적 존재이기 때문에요. 고린도전서 9장 27절에 나와요.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물론 잘린 건 아니지만 잘릴 수도 있다.

오늘 강의에서 이야기한 것입니다. 인간은 생물학적 욕구가 있다. 육신이 있으니까 요구를 하게 되어 있고, 요구하는데 그 요구가 미흡하니까 욕구에서 요구를 빼니 욕망이 생긴 거예요. ‘욕구(need)-요구(demand)=욕망(desie)’ 욕망이 생겼다는 말은, 이것을 예상 못 했다는 거예요. 젖 달라고 해서 젖을 줬는데 이게 아니었어요. 그래서 어떤 말을 할 수가 없어요. 욕망은 표현할 말이 없어요.

무조건 그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 이거?” 그것도 아니라고 해요. “뭐? 말을 해. 뭘 어떡하면 돼?” “나도 몰라.” “그럼 어쩌라고?” 괜히 투정부리고 있는 거예요. 뭘 확실하게 원하면 그걸 주면 되는데 그건 아니고, 그건 아니고…. “그러면 뭐?” “몰라!” 나도 몰라요.

이게 뭐냐? 인간의 육신이 있을 때 그 안에 들어있었던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부정성입니다. 거울 보면서 ‘저게 바로 나다’하고 흉내도 아니고 아예 동일시 했을 때 뭐가 빠져버렸어요? 이 ‘부정성’이 빠져버렸어요. ‘나는 나야.’ 특권적인 그 평가를 자기가 내려버렸어요.

그런데 자아는 내가 만들었지만, 부모로부터 나온 이 육신이 내 마음대로 안 돼요. 자아가 내 마음대로 안 된다고 여기서 짜증을 부리기 시작합니다. 화를 내고 짜증 부리고 이유도 모르고. 그러면 이유를 알면 뭐 됩니까? 이유를 알면 “그게 다가 아니야.” 또 이유가 그게 다가 아니래요. 그러니까 뭐가 성립이 안 되냐 하면요, 이웃 사랑이 성립이 안 돼요, 이웃 사랑이.

옛날에 MBC 개그 프로에 이홍렬이라는 개그맨이 있었잖아요. 그리고 임하룡이라는 개그맨 알죠? 상하이 트위스트 춤춘 사람. 이 두 사람이 <귀곡 산장>이라는 걸 했었잖아요. 그거 말고 이홍렬이 했던 코너가 따로 있어요. 그것이 아직 잊히질 않는데요.

동그란 풍선 같은 데 있고, 그 속에 얼굴만 내놓고 발끝까지 다 들어갔어요. 그 상태로 한집에 살면서 일상생활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런데 악수 한번 하려고 해도 힘든 거예요. 왜? 자신에게 있는 알 수 없는 욕망 때문에, 그 욕망 때문에 말이 안 통하는 거예요. <큰 집 사람들>이라는 코너였는데 자기 몸도 제대로 못 가누면서 풍선에 들어간 몸들이 가까이 가면 튕겨 나와요.

생각이 있어도 제대로 포옹할 수가 없어요. 풍선 때문에 너무 뚱뚱해서. 뭐가 안 됩니까? 둘 다 똑같이 본인의 부정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들끼리 이웃 사랑이 돼요, 안 돼요? 안 되는 겁니다. 이웃 사랑이 될 수가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 풍선을 푹 찔러버려야죠. 풍선을 터뜨려서 문제성 있는 것을 노출시킬 때 그제야 주님과 대화가 되는 거예요.

아, 고린도후서 3장에 나오는 모세가 시내산 내려올 때 그 영광은 그냥 멋있다, 빛난다, 가 아니라 ‘우리가 이러한 영광을 놓쳤구나.’ 원래 하나님이 기획하신 모든 게 ‘예’가 된다는 것은 복음의 광채가 있는 인간을 가지고 ‘예’라고 하는데, 그동안 중간에서 부정성, 악마, 그 천재적인 악마가 이걸 알고 어떻게든 우리로 하여금 자본시장에 내보내서 ‘넌 네 인생 살면 돼. 넌 괜찮은 존재야. 넌 너를 사랑해야 돼.’라고 악마의 입김을 불어넣는 겁니다.

상담가들의 특징이 뭐예요? ‘넌 널 사랑해야 해.’ 사랑이 너무 과도해서 문제인 거예요. 사랑할 가치도 없는 걸 자꾸 사랑하라고 상담가들이 그렇게 부추기는 거예요. “힘내세요. 할 수 있습니다.” 혼자가 아닌 나, 이런 거 있잖아요. 혼자가 아닌 나.

이웃 사랑이 성립이 안 된다는 것은,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라고 하는 것처럼 둘 다 문제가 있는 거예요. 문제가 있으니까 주님께서는 이 문제가 있는 인간들끼리 이 땅에서 뚱뚱보들 둘이 자꾸 만나게 하는 거예요. 모세하고 평소에 엘리야하고 만났다고 하면 둘이 싸우겠어요, 안 싸우겠어요? 한 600년 차이 나는데 모세와 엘리야 둘이 만났다면 싸우겠어요, 안 싸우겠어요? 당연히 싸우죠.

그런데 모세와 엘리야 이 뚱뚱보들이 누굴 쳐다봐요? 모세와 엘리야가 누굴 쳐다보죠? 예수 그리스도를 쳐다보면서, 누가복음 9장에 보면 대화를 해요. 어떤 대화를 하느냐? 지금 베드로 야고보와 요한은 대화할 생각도 없고 뭘 드리겠습니다, 너무 좋습니다, 이런 소리나 하고 있고 예수님과 이 두 사람 사이의 진짜 대화는 뭐냐?

“예수님 우리 죄를 위해서 언제 돌아가실 겁니까?” 그 이야기 하고 있어요, 둘 다. 둘 다 예수 그리스도의 필연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을 때 그 둘 사이에 뭐가 성립돼요? 둘 다 자아를 안 보잖아요. 출발점이 자아가 아니고 주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이 필연을 가지고 이야기할 때 둘이 대화가 될까요, 안 될까요? 대화가 되죠.

대화 되는 사람들끼리 영원히 사는 세계가 무슨 세계입니까? 그게 바로 천국이에요. “너도 네 형편이 ‘예스’고 나도 이 형편이 주님 보시기에 ‘예스’다.” 성령 받아서 둘 다 ‘예스’가 되었으니까 “나는 당신을 따라다니는 것도 아니고, 네가 나를 따라다니는 것도 아니고 주께서 성령을 이렇게 붙여 주셨다”는 겁니다. 이게 고린도후서 1장 24절에 나오는 “나는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즉 나는 너의 믿음을 주관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언제까지나 필연이다’ 하지 마시고 필연이 옴으로서 우리는 언제까지 붙어 있을지 모르는 우연한 존재로서 발각당한 거예요. 우연한 존재에 신경 쓰거나 거기에 집착하거나 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 것은 자아 시절 때나 하는 이야기지 우연한 존재가 거기에 대해서 매료되거나 빠지거나 하면 안 되겠죠.

고린도후서 2장 보겠습니다. 2장 보기 전에 이것부터 먼저 합시다. 고린도후서 6장부터 보겠습니다. 고린도후서 6장에 보면 성전이 나와요. 아, 이 주제가 묵직~합니다. 성전은 어떻게 이뤄지는가? 성전은 측량으로 이루어집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필연이 우연에 대해서 뭘 하느냐? 측량해요.

이게 에스겔 40장에 나옵니다. 천사가 측량 작대기 들고 측량해요. 규격에 맞춰서 건축하는 겁니다. 그런데 에스겔은 구약이기 때문에 모형적이에요. 아까 ‘비유’라고 했죠. 로마서 5장 14절에 보면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되어 있습니다. 아담은 오실 그리스도의 뭐라? ‘모형’이라고 되어 있고, 갈라디아서 4장 24절에는 하갈과 사라가 ‘두 비유’라고 되어 있어요.

“기록된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 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 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갈 4:22-24).

인간을 주께서 그냥 갖고 노시는 거예요. 인간의 주체나 그런 것은 계산 안 해요. 그런 것은 인정하지 않고 주께서 쓰시는 대로 쓰시는 거고, 쓰임 받는 사람은 그것 때문에 편해요. 그것 때문에 마음이 편하다고요. 자기는 그저 측량의 대상이니까요.

측량의 대상이 되었다는 그 자체로 이미 구원받은 겁니다. 왜 측량하느냐? 배당하기 위해서, 성전에다 꽂아 넣기 위해서 측량해요. 구약 에스겔서에서는 건물을 측량하는 것처럼 보이잖아요? 그러나 그것은 모형이고요. 요한계시록 21장 17절에 보면 “그 성곽을 척량하매 일백 사십 사 규빗이니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

사람을 하나의 필연적인 건물로 보는 것은 구약에서 했던 모형이 신약에 사람들의 집합체로 완성되었다는 것을 묘사해 주는 겁니다. 그렇게 측량이 되면 결과물이 뭐로 나오겠습니까? 숫자로 나오죠. 숫자는 두 종류라고 했죠? 하나는 ‘기수’ 또 하나는 ‘서수’, 순서가 있는 거예요. 이제 서수는 우연과 우연이 맺어지는 거니까 끝났어요. 마지막 때는 기수만 남습니다. ‘14만 4천’으로 확정되었어요.

오늘 아침에 뉴스를 보는데 우연히 14만 4천이 딱 나왔어요. 이 숫자가 오늘 강의하는 것과 어떻게 우연히 들어맞았는지요. 14만 4천 숫자가, 우리나라에 시집온 외국인 여자들이 낳은 19세 이하 자녀들의 숫자입니다. 그러니까 뭐가 없는 거예요? 국적이 없어요. 한국 사람이라고 봐주지를 않는 거예요.

국적이 없는 19세 이하의 2026년도 통계가 14만 4천 명입니다. 무엇에 제가 유념했겠어요? 우리의 시민권은 이 땅에서 국적이 없는 사람을 만들어놔 버리는 거예요(빌 3:20). 측량을 했으니까. 이 측량의 기초는 하늘의 천사가 이스라엘의 숫자를 계산하는 데 신명기에 나옵니다.

숫자를 정확하게 해서 생명책 명단에 기록된 숫자에 그대로 들어가게 되어 있어요. 필연적으로 그 숫자에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필연적으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를 내가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때에 다시 살린다고 할 때 그건 ‘서수’가 아니고 ‘기수’로서 확정됐어요. 확정된 겁니다.

이렇게 보니까 우리가 걱정할 게 아직도 남아 있습니까, 없습니까? 남아 있지 않죠. 남아 있지 않습니다. 고린도후서 6장 14-16절에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이 말을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행동을 조심해서 안 믿는 사람하고 사업하지 말고, 동업하지 말라, 결혼하지도 말라.’는 그런 뜻이 아니고, 이미 순서, 서수적인 생활은 끝났다는 거예요. ‘내 운명의 측량을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필연적이 되시는 성령께서 이 운명을 확정 지었다.’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숫자로 확정 지었기 때문에 측량자의 소유가 돼요. 소유가 되면 더 이상 내 인생에 대해서 내가 소유권을 행사할 수가 없습니다. 지난 오후 설교 때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부동산을 사놓고 사인을 할 때 내 이름으로 사인한다는 말은, 내 소유가 된다는 조건하에 내 이름으로 사인하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 “치워라. 내 이름으로 사인한다.” 주의 이름으로 사인을 했다는 말은 집을 구매해도 그 집은 누구 집이다? 네 집이 아니고, 주님이 대신 값없이 치렀던 그 값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의 이름으로 등록되는 거예요. 주님은 손해 보는 장사는 합니까, 안 합니까? 다 뺏어가요. 내 목숨부터 해서 집, 자식, 가정, 인생 전체를 주께서 몽땅 다 가져갑니다.

왜? 이미 그것보다 더 많은 값을 치렀기 때문에요. 우연한 존재는 인간들 인식의 한계에요. 아침 10시에 왔다. 12시에 왔다. 오후 3시에 왔다. 퇴근 시간 한 시간 앞두고 포도원에 일하러 왔습니다. 다 각자 각자 놀죠. 그런데 품삯을 주는데 어떻게 줬습니까?

차이 나게 준 게 아니고 전부다 일당을 똑같이 줘버렸어요. 그렇게 주니까 주께서 주신 일당, 그 필연에 대해서 우연적 존재가 반발을 하잖아요? 반발 하니까 주께서 하시는 말씀이 “내 것을 내 사람에게 내 마음대로 주는데, 너는 네 소유도 아니고, 네 것도 아닌데 왜 네가 거기에 대해서 들고 일어나느냐? 놀고 섰던 주제에! 먼저 된 자는 나중되고 나중 된 자는 먼저 된다”라고 하는 겁니다.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 20:14-16).

또다시 거기서 ‘부정성’을 끄집어낸 거예요. ‘아, 인간에게 마귀가 이런 생각을 집어넣었구나.’ 말씀을 전하면 그렇게 부정성이 나오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빛이 오기 위해서는 ‘우리의 어둠이 어둡다’라고 그 짙은 어둠을 드러내야 하는 거예요.

마태복음 13장 5절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빛이요, 너희는 소금’이라는 말은, “너희는 빛이요” 할 때 ‘너희는 어둠이요’, “너희는 소금이요” 하면 ‘너희는 맛없는 소금이요’, 이것을 우리에게 일러줌으로써 그 말씀을 성취하는 분은 우리가 아니고 주께서 그 말씀대로 다가서서 우리로서는 그 부정성만 노출될 뿐입니다.

바로 그 계획에 차질이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이 ‘예스’가 돼요. 성령을 받은 자만 이 사실에 대해서 인정하게 됩니다. ‘나는 누구도 사랑할 수가 없고,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할 수도 없다. 그냥 이 모든 일이 필연에 소속되어 있구나. 그리고 내 운명도 이미 하나님의 성전으로 확정되었다’라는 거예요.

고린도후서 6장 계속 보겠습니다. 16절에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필연이죠. 예스가 됩니다.

17-18절에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라고 되어 있죠.

이번 시간 끝내면서 마지막 질문합니다. 고린도전서 6장 18절의 말씀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는 이유가 뭐예요? 우리가 이 말씀을 지키지 못하는 이유가 뭡니까? 우리는 우리의 부정성을 발각당할 주님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주님의 관찰 대상이 되기 때문에 “고린도후서 6장 18절의 말씀대로 이미 이루어졌음을 고백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러면 되는 거예요.

지금은 이게 쉽죠? 쉬운 데 막상 현장성에 들어갔을 때…, 아, 이 현장성이 문제지요. 현장성에 들어가게 되면 거기에 뭐가 흐르냐? 과거 기억, 현재, 미래에 대한 기대감 이게 막 뛰어들어요. 복음의 광채를 가리기 위해서. ‘너 어제 뭐 했잖아, 앞으로 너 뭐 할 거잖아. 너 오늘만 살 거 아니잖아?’

이게 마구 떨어지면서 원인과 결과, 인과 관계를 가지고 계속 우리를 쑤시는 거예요. ‘착해야 좋은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 현장성에 속한 이 자아를 향하여…, 참, 마귀는 자아를 놓지 않아요. 계속해서 자아에 압박을 가하는 겁니다. ‘네가 욕망하는 것을 성취해야 될 것 아니냐? 네 마음의 결핍을 네 행동에 여하에 따라서 만족시켜야지.’라는 의식이 계속 들어와요.

그야말로 현장성에서 우리의 숨을 턱턱 막히게 만들어요. 꼭 사우나실 같아요. 고민하게 만들고, 갈등하게 만들고, 이게 그야말로 질식이에요. 삶의 현장 자체가 우리를 질식케 해요. 선악 의식이 우리의 목을 졸라요.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성령 없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과감하게 이야기합니다. 후회하는 사람. 후회를 왜 합니까? 후회해서 뭘 얻겠다고요? 후회하겠다는 그 의도가 뭐예요? 후회 해놓고 신부 찾아가서 고해성사하고요, “성모송 다섯 번 하고 기도문 다섯 번 하세요.” 처방전 받고 돌아와서 또 살다가 후회하고 있고요.

후회한다는 것은 뭘 포기 못 한다? 나의 의를 포기 못 해서 슬픈 얼굴로 성당에 고해 성사하러 찾아가는 거예요. 후회한다는 것은 이런 상황에 대해서 뭘 한다? ‘나는 하나님께 분노한다.’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가 이야기하는 충동 가운데 눈 충동, 입 충동, 여러 가지 충동이 있어요. 눈 충동을 위해서 도시에 미술관이 있고요, 귀 충동을 위해서 도시에 음악당이 있어요. 손 충동을 위해서는 울산 태화 강변에 파크 골프장이 있어요.

결핍된 것을 보충하기 위해서 계속 충동, 충동…, 이렇게 가는 겁니다. 그런데 충동을 이야기하면서 프로이트가 큰 실수를 했어요. “인간에게 죽음 충동이 있다”라고 했는데 거짓말입니다. 인간에게는 죽음 충동이 있는 게 아니고 살인 충동이 있죠. 살인 충동이 있습니다. “너 죽고 나 죽을게.” 이게 가룟 유다 아닙니까?

예수님 죽이고 나도 죽고, 이게 살인 충동이에요. ‘나를 건드린 대가를 네가 한번 당해봐라.’ 복수의 충동, 이 충동은 우리가 관리 못 합니다. 빛 되시는 말씀이 와서 충동, 숨어있는 우리 부정성을 끄집어낼 때 우리는 내가 우연적 존재고, 모든 것이 비유고, 그야말로 하나의 은유에 불과한 것을 다시 한번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끝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