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 제2강-고린도후서: 주님의 언어
(강의:이근호 목사)
이 시간에는 인간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거부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 언급을 할 수밖에 없고, 그리고 인간들이 하나님이 세운 교회를 기다리기 보다는 자신이 말씀을 가지고 성경을 가지고, 또는 교회를 가지고 교회 세우는 것이 자기 스스로 자기 마음에 위로가 된다는 그런 의식이 왜 생기는가, 하는 거예요.
그거는 무엇 때문에 그러냐 하면 ‘기억’ 때문에 그래요. 시간에 있어서 인간은 자체적으로 시간을 탑니다. ‘탄다’는 말은 자동차 타듯이 시간을 타고 다닙니다. 첫째는 현재를 타고 다니고, 인간은 과거를 타고 다니고, 그다음에 미래를 타고 다니는데….
현재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속히, 과거와 미래가 나눠지는 이 정점을 현재라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현재는 없지요. 현재 없는 순간, 속히 과거와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고, 과거는 이미 기억 속에 하니까 ‘현재는 없다’ 할 때 이게 현재고요. 과거는 뭔 뜻이냐 하면 아무리 살아도 과거된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지나 보면 전부 다 과거로, 과거로 집합된다.
그러니까 아무리 살아도 과거된다는 말은 뭐가 없다는 말입니까? 현재 없음, 또 뭐가 없음? 미래는 구라지요. 거짓말이죠. 지 상상한 거니까 없는 거잖아요. 미래 없음. 있는 것은 축적된 과거뿐이다. 기억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데, 미래는 뭐냐? 좀 어려워요.
현재, 과거는 나 중심이에요. 미래라 하는 것은 현재 나를 구상 또는 구성하기 위한 원인들, 계기들, 원인과 결과의 사슬들이 내가 구성되기 전부터 이 우주에 퍼져있다는 거예요. 우주에 퍼져있는 것은 어떤 때는 나의 과거로 들어오고, 어떤 때는 나의 현재로 들어오고, 어떤 것은 미래로서 대기돼 있다. 이게 미래에요. 그러니까 내가 내 원하는 대로 세상이 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뭔가 자기들끼리 주고받고 하는 원인과 결과, 원인과 결과들이 있단 말이죠.
그 결과들이 거기에 계속해서 순서, 순서가 겹치다보니까 오늘날 나는 이렇게 가난한 집에 태어났고, 나는 남자가 아니고 여자고, 날 때부터 근지럽다든지 이러한 DNA적인 문제가 있고, 이 모든 것은 내가 책임질 수 없는 나한테 원인이 아니고 내가 미처 모르는 여러 가지의 그런 관계망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으니까 앞으로 내 미래가 노력한다고 미래가 펼쳐지는 것이 아니고 어떤 새로운 아다리, 새로운 타이밍, 어떤 계기가 올지 내가 모를 때 그게 바로 미래라는 것에 휩쓸리는 나, 그게 미래에요. 그게 미래입니다, 인간은.
일리가 있어 보이지요. 이러한 현재, 미래, 과거 특히 미래 같은 것은 바로 금강경,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사상과 통하는 거고, 철학이라든지 현재 물리학에서 많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중우주라 해서 아직 오지 않은 미래가 있기 때문에 동시성이 깨어진다는 거예요. 지금 우리 눈앞에 있는 저 별은 이미 사라졌는지 안 사라졌는지 모르고 이 별빛이 우리한테 오는 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빛이 있다고 여기지만 오는 동안에 별이 사라져버리면 그 별은 없는 거란 말이죠.
그래서 미래 때문에 현재, 과거로 구상된 나는, 내 중심은 미래 앞에서 맥을 못 추고 진리가 아닐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런 주장을 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게 뭐냐? 이런 질문이 나오는 거예요. 이런 논리, 이런 철학을 가졌다. 그래서 뭘 원해서 이런 논리와 철학을 갖느냐? 뭘 원하느냐? 그것은 바로 시간, 현재, 과거, 미래를 다 알게 되면 나는 모든 진리를 다 알았다 하는 것을 획득하는 즐거움이 있지 않겠느냐? 이런 아이디어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것 알아서 뭐 하는데? 그걸 알면 나를 알 수 있잖아. 그것 알아서 뭐 할 건데? 알면 나는 진리를 초월할 자가 돼 있다. 초월해서 뭐가 되는데? 초월하면 내가 뭐냐? 내가 곧 신이다. 보세요. ‘내가 곧 신이다’ 이것 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왜 제가 지금 이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왜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그렇게 관심이 많은 이유가 뭐냐를 따지는 거예요. 나한테 관심이 있으면 자연적으로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외부 존재가 됐어요.
요한복음 1장을, 이번엔 안 틀렸으면 좋겠는데, 내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몰라서…. 1장 46절에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왔어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이렇게 하니까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할 때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자, 와 보라 할 때 나다나엘이 가서 그 사람을 만나보겠다 할 때 이때 나다나엘은 자기가 실체에요. 판단을 내가 한다고요. 그리고 판단의 대상은 누구냐? 예수라는 그분이에요. 그분이 내가 믿을 만하고 정말 신뢰할 사람인지 성경의 선지자의 말에 부합되는지 내가 파악해서 내가 믿을 사람인지 아니면 거부할 사이비인지 결정은 내가 하겠다는 마음으로 갔어요. 가봤는데 48절에 이렇게 돼 있어요. 주객이 바뀌었어요.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라고 할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고 된 거예요. 자기가 예수님을 판단해서 믿을 분인지 아닌지 결정하려고 아주 사전에 마음준비를 했는데 딱 오니까 나는 네가 어떤 행동, 어떤 태도, 어떻게 나한테 나올지 다 안다고 했어요.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다.” 그때 나다나엘이 이렇게 합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49절) 이렇게 이야기해요.
여기서 제가 예를 들겠습니다. 시간과 관련돼 있는데요. 인간이라 하는 것은 흐름을, 절취란 말이 좀 어렵습니까? 절취라는 것은 규합하는 것, 집합하는 것, 또한 더 쉬운 말로 응집하는 것. 흐름을 응집하면 ‘나’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은 그렇게 못하고 내가 흐름을 응집해서 그 응집된 것은 나라고 현재 있는 나와 일치시키려고 애를 쓰는 거예요. 잠 깨우는 방법도 여러 가지지요.
응집에서 내가 되는 것이 아니고 나라는 게 있는데 내가 되게 궁금하거든요. 궁금하니까 세상의 진리를 통해서 응집된 걸 나라고 이렇게 일치시키는 노력을 하는 거예요. 그 노력을 할 때 이게 왜 무의미하게 의미 있느냐 하면 모든 인간이 그렇게 살아요. 여기 철로가 있는데 그림을 그려 보겠습니다. 1960년대 나왔던 초창기 카메라입니다. 감독이 뒤로 빠져나가면서 내가 어떻게 하는지 카메라로 찍어요. 내가 이만큼 A라는 지점에 오면 카메라는 뒤로 물러가면서 찍고, B라는 지점에 오면 카메라는 더 물러가서 찍어요. C라는 지점에 오면 더 물러가서 찍습니다.
이게 AI가 됐던 뭐가 됐던 인간은 이미 내 자신이 생각한 대로 찍히기를 원하면서 그렇게 찍었던 것을 나라고 하고 싶어서 이러한 장치를 인간이 만들어낸다니까요. 아무리 해도 이게 뭐냐? 펜스, 벽이거든요. 이 카메라 밖으로 나를 찍는 그 밖으로 내가 빠져나갈 재주는 없습니다. 인간은 교회를 다니고 신학을 하고 철학을 공부하고 과학을 공부해도 내 바깥의 응시에 다가갈 수 있는 인간의 방법은 없습니다. 괜히 혼자 호들갑 떨고 있는 거예요.
이 벽을 뚫으려면 양자터널현상이 일어나든지 해서 이 바깥이 있다는 확률이 있어야 되는데 문제는 확률이 있든 없든 간에 뚫을 수 있는 그게 뚫어서 이 벽 뒤에 천국에 도착해야지, 라는 아이디어가 그런 생각이 나왔던 것을 다 카메라가 포집하고 자기 기억 속에 담아버리니까 백날 해도 뛰어도 카메라 뒤로 못 물러가는 거예요.
‘너 가만있어. 너를 뛰어넘을 거야’ 따라오면 그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는 거예요. 어떤 인간도 어떤 물질도 빛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고 접근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빛의 속도로 뛰어넘을 수 없다는 물리학의 한계처럼 인간은 지켜보고 있는 자아를 스스로 뛰어넘을 수가 없습니다. 평생 그렇게 살아가고 있어요.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느냐? 흐름을 절취해서 이걸 나라고 규정하고 싶다. 이걸 간단한 세 자 말로 뭐라고 하느냐? ‘정신병’이라고 이야기해요. 모든 인간은 타고난 정신병자에요. 정신병입니다. 그 정신병이 형성한 것이 도시고요. 그 도시에 살면 살수록 과잉에너지에 의해서 이렇게 정주해서 사는 시기가 있었어요.
‘이건 내 자리다’ 정주해서 살았는데 정주시절이 현대의 자본이라는 과잉에너지 덕분에 정주에서 뭐로 빠지느냐? 흐름으로 빠져요. 집구석에 혼자 앉아 있지 않아요. 어디를 가느냐? 카페를 가요. 카페를 ‘비-장소’라 합니다. 카페, 공항, 터미널, 쇼핑몰. 하여튼 집구석에 가만있지 않다니까요.
밖에 나가서 흐름을 타야 사는 맛이 나는 이유가, 자기가 자본을 위해서 더 추가된 에너지를 본인이 감당을 못해요. 밥이나 먹고 살고 하루 종일하는 일이 그 자연인들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면 하루 종일 스물네 시간 하는 일이 뭐냐 하면 밥 짓는 것, 땔감 마련하는 것 그러면 해져요. 아침에 일어나서 밥 짓고 땔감 구하고 그것뿐이에요.
그러나 도시의 삶은 그런 게 아니에요. 밥 짓고 하는 것은 보장돼 있고. 그건 기초연금으로 보장돼 있거든요. 노인기초연금 사십 만원 주는 것. 그리고 나가는 것은 지하철 공짜니까 지하철 타고 돌아다니는 거예요. 밥 먹고 남는 에너지를 흐름을 타서 돌아다니면서 기억되는 것은 뭐냐 하면 자기 영사기로 오늘도 나는 이렇게 살았다, 일기 쓸까, 이런 거죠. 이렇게 찍어볼까? AI와 대화하면서 내 동영상 만들어봐, 맨날 이런 식이에요. 자기라는 펜스를 넘어설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인간이 할 수 없는데 나다나엘은 미리 알았다는 거예요. 그런데 미리 아는 방법은 뭐냐? 그러면 목사님께서는 미리 알았다, 미리 안 자를 ‘구원했다’와 ‘구원 안 했다’와의 차이점이 뭡니까, 라고 묻는다면 구원된 사람은 주께서 찾아오는 그 과정을 통해서 얼마나 나는 고집스럽게 내 힘으로 나의 한계를 넘어서려고 애쓰고 있는지를 발각당하는 거예요.
말씀공부하고 뭘 해서 내가 내 영역을 이렇게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내가 보다 나은 삶은 위해서, 행복을 위해서 지금 살아가는 삶의 형편을 대규모로 획기적으로 전환시켜서 내가 경험하지 못한 그야말로 내가 만들어내는 나의 미래를 하고 싶다고 발버둥치는 그것이 얼마나 헛짓인가를 고발당하는 식으로 주님 앞에 부름을 받습니다. 부름 받는 그 순간을 뭐라고 하느냐? 회개라고 하는 겁니다. ‘회개하라. 이 땅은 이미 심판이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이 점을 좀 더 생각해봅시다. 정신병 나왔으니까요. 전체적인 그림을 보겠습니다. 자연세계는 에너지 덩어리다. 에너지인데 여기서 전제가 뭐냐? 누가 이 에너지를 준 것인지 모르겠다. 누가 이 해와 달과 별을 만들었는지 일단 모르겠다. 인간은. 신이 만들었다는 건 모르겠다는 뜻이에요, 그게. 신을 압니까? 모르잖아요.
그냥 모르겠다는 말을 궁색하니까 신이 하나님이 창조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천지를 창조했데.” “그래서 뭐 어쩌라고? 당신하고 무슨 관계있는데?” “신이 만들었겠지, 뭐. 누가 만들었겠어.” 그래서 내준 효과는? 모르지요. 효과가 없지요. 이것 알면 대단한 겁니까? 이거 알고 예수님 죽였잖아요. 유대인들이 이것 알고.
그러니까 모른다는 이야기에요. 신이 어떻다는 말은 내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모르겠다는 말을 부끄러워서 신이 했다는 말로 모든 덤터기를 신에게 돌려버리는 거예요. 모든 에너지를 누가 줬는지 모르겠다. 모르는데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문화가 생겨요. 여기에 인위적인 요소가 가미되면 여기서 문명이 됩니다. 모르는 것은 혼돈이잖아요. 혼돈에서 나한테 의미 있게 잡아당길 때 이건 질서가 돼요. 질서가 문명입니다.
질서가 문명이 되면서 여기서 에너지를 억지로 취합, 또는 응집하면서 내 몸이 이상이 생겨버려요. 그게 스트레스에요. 반드시 이 일은 일어나야 돼. 반드시 수능은 만점 맞아야 돼요. 갑자기 여기서 스트레스가 생기면서 스트레스라는 게 고통이잖아요. 고통에 대해서 보상을 원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근데 에너지가 질서가 되면서 이게 나야, 라고 상상하게 되면 ‘나’가 되면 고통이 오고 고통은 그냥 빈칸으로 두게 되면 안 되고 보상을 원해서 여기서 억지를 부리게 돼 있어요. 점점 더 정신병이 과도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정신병을 고치려면 어떻게 하느냐? 고치려면 또 새로운 지식과 에너지가 또 필요한 거예요. 정신병 고친다고 스트레스 추가해서 받는 거예요. 이게 안 우스워요? 정신병 고친다고 상담 받는다고 상담료 엄청나게 많이 들어간다고요. 나중에 고치고 난 뒤에 돌려줍니까? 안 돌려줘요. 돈이 아까워서 미칠 지경이에요. 이렇게 쉬운 걸 내가 알아서 할 걸 괜히 돈 줬다는 그 후회감이 밀려와서 스트레스를 더 받는 거예요. 그 스트레스로 또 정신병원에 가게 되면 이제는 추가적인 비용이 더 들고. 뭔가 말려든 것 같아. 꾐에 빠진 것 같아. 그 속임수에. 유대인의 돈 버는 방법, 돈 벌게 해줄게 해놓고 뜯어내는 방법.
중요한 것은 이겁니다. 이 정신병 자체를 인정하고 수긍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정신병이라 했지만 성경으로 이야기하면 모든 것이 주님의 뜻과 반대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 원인을 고린도후서 1장에서 찾아보겠습니다. 에너지로 가득 차있는데 그걸 누가 만들었다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에너지로 차있는 우주, 이 세계가 그래서 그걸 안다고 해서 나한테 돌아오는 이익이 뭐냐? 도무지 그걸 모르겠다는 거예요.
신이 만들었다, 누가 만들었는지 그건 됐고 중요한 것은 그래서 나한테 돌아오는 이익은 뭐냐? 그 점이 불분명해서 짜증이 난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고린도후서 1장, 하나님의 방법이 나옵니다. 1장 9절,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여기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에요? 죽은 자를 다시 살리지요. 그럼 다시 살리기 위해서는 전제가 무엇이 확실한 전제로 깔려야 됩니까? ‘죽은 자’죠. 그러니까 지금 나는 정신병이라는 이 자체를 정신병에 꽂히지 말고 그냥 나는 이미 죽었다고 하면 돼요. 나는 죽었다고 하면 되는데 이 죽음에 대해서 숨 안 쉬는 이걸 죽음이라 하잖아요.
성경에선 이걸 죽음이라 하지 않고, 이걸 죄 지었다고 보는 거예요. 나는 죄를 지었다. 또는 나는 내 안에 죄가 있다. 더 나아가서 죄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것을 내가 인정하면 된다 이 말이죠. 왜? 죄 값은 사망이니까요. ‘나는 죽는다’를 아까워하지 말고 그동안 내가 억지 부리면서 나한테는 그런 게 없을 거야, 하고 강제로 나한테서 밀어내는 게 있었어요. 그게 뭐냐? 내가 죄 지었다. 또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억지 부리면서 밀어낸 거예요.
그러면 처음부터 다시 해봅시다. ‘세상은 에너지로 되어 있다’ 이것 맞아요, 틀려요? 이 정도 힌트 줬으면 눈치 채야지요. 세상은 에너지로 돼 있다, 이게 맞습니까, 틀렸습니까? 틀렸지요. 세상은 뭐로 돼 있다? 죄로 돼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주께서 뭘 하십니까? 죄에 대해서 죄 사함해주면 되는 거예요. 그래야 아귀가 맞아요.
주께서 하시고자 하는 취지가 그동안 안 먹힌 이유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세상을 판단하고 중요한 것은 나한테 뭐가 이익이냐, 내가 인간으로 사는데 어떤 도움이 되느냐, 출발점을 그쪽으로 잡았기 때문에 세상 전체가 죄라는 사실에 대해서 그걸 출발을 안 했어요. 그러면 내가 죄 지었단 말입니까, 라고 하는데 내가 죄 지은 게 아니고 내가 죄에서 태어났지요. 시편 51편의 말씀처럼. 모친의 죄 중에서 내가 태어난 거예요.
문제가 쉽게 풀려요. 그러니까 이것은 내 책임 일체 없고 다 누구 책임? 죄 책임. 자율성,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다? 그거 있어서 어쩌라고? 인간에게 팔다리가 있다? 팔다리가 있어서 어쩌라고? 팔다리가 죄를 위해서 쓰여진다? 오케이. 그럼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 그 자유의지를 왜 주셨는가? 죄 지으라고 준 거죠. 뭐가 어려워요, 이게? 크게 골치 아픈 겁니까? 죄 지으라고 준 거죠. 문제는 죄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게 문제에요.
그걸 성경에서는 마태복음 16장에서 표적이라고 합니다. 네가 하늘의 천기, 주께서 일기예보하신 대목이 나오거든요. 마태복음 16장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2,3절)
‘표적’이란 말이 나와요. 표적이란 것은 인간의 죄에 가려져있는 죄 바깥에서 보는 보이지 않는 분의 응시는 너희들이 전혀 모른다는 거예요. 나는 너희들 바깥에서 왔기 때문에. 아까 벽 있지요. 카메라 바깥쪽에서 따라다니면서 나를 찍으면서 나로 하여금 헉헉거리면서 잘 찍히기를 원하고 인생 잘 살았다. 마지막 커튼 내려갈 때 마이웨이, 나는 내 방식대로 살았는데 후회 없다. 이런 자기 영화를 찍잖아요. 프랭크 시나트라의 가사를 보면. 참 오늘 숙제했어요?(서영은, <혼자가 아닌 나> 들어보기) 숙제 안 했네. 참 수련회 왔잖아. 왔으면 숙제할 필요 없고.
이 벽이 있는데 벽을 뚫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누구도 벽을 뚫을 수 없는 게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생명나무에서 추방시켰기 때문에 이 벽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추방을 시킨 거예요. 인간이 불쌍하다. 인간이 가엽다 그것 의미 없습니다. 주께서 보호하는 것은 생명나무지 인간이 아니에요. 정확하게 말해서 생명나무와 선악과나무가 둘 다 인간보다 선제하고 있습니다. 먼저 존재한 거예요.
생명나무와 선악과나무의 관계를 통해서 그 관계를 지키고 관계를 증거하기 위해서 인간이 만들어진 거예요. 따라서 인간이 이 관계를 흩뜨릴 때에는 생명나무를 지키기 위해서 인간을 이 생명나무 있는 곳에서 추방을 해요. 천사로 하여금 벽을 만들고. 어떤 인간이 이 벽을 뚫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불로써 차단시켰습니다. 강력한 하나님의 방어체제가 있어요. 하나님은 방어의 신이에요.
주의 이런 조치에 대해서 인간은 이게 말씀이잖아요. 창세기 2장, 3장에 나오는 말씀이잖아요. 말씀을 확인할 수가 없어요. 뭐가 없기 때문에? 문자만 있고 ‘문자+영’에서 영이 없어요. 죄에 갇혀서 성령이 없으니까 성경을 백독해도 선악과가 있다, 생명나무가 있다. 그래서 나한테 돌아오는 이익이 뭐냐? 맨날 의미가 자기한테 소환돼요. 그래서 성경을 봤다. 하나님 있다. 그럼 나한테 돌아올 이익은 뭐냐? 그 이익을 왜 생각하는 데요?
주께서는 이런 성경책 내용이 나한테 이익은 뭐냐? 그게 바로 죄다 이 말이죠. 성경책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 네 중심으로 행하는 그게 죄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을 봐야 돼요. 보고 계속해서 내 죄를 자체적으로 계발해야 돼요. ‘아하, 성경 이용해서 잘 되려고 이런 꼼수를 쓰고 있구나. 내가 이런 요령을 부리다니.’ 그런데 문제는 그게 바로 거짓이고 죄가 된다는 사실. 그게 얼마나. 여러분, 인생 재미나게 삽시다. 내가 가짜고 거짓인 것을 매일 같이 스물네 시간 확인하는 즐거움이 최고에요! 이게 최고의 즐거움입니다. 왜? 전혀 부담을 안 느끼니까요.
주께서는 이게 생명이고, 이게 영생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내가 생명나무라 했습니다. 내가 생명의 떡이라 했으니까 주님께서 이 차단막을 뚫고 들어옵니다. 주님께서 이걸 뚫고 들어오면서 성령을 통해서 마리아가 임신하면서 이 벽을 뚫을 때 이 벽은 어떠한 뚫렸다는 흔적을 남기지 않고 여전히 차단시켜버립니다. 이 말은 이제는 예수님도 한 번 나갔다 못 들어옵니다. 아주 재미있습니다. 예수님이 들어갔잖아요. 이젠 살아 있는 예수님은 못 들어와요.
그래서 이쪽 세계는 뭐냐? 저주와 심판의 세계입니다. 이것을 주께서는 자기 아들 살리기 위해서 이 벽 자체를 주님 앞에 가까이 밀어붙여요. 이 세상에서 천국 못 간다고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유일한 모델이 예수님이 되는 거예요. 못 간다고 표현하지 않고 예수님이 표현한 것은, 주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로마서 8장에서는 주께서 나를 내어주사. 내어줄 때 어떻게 내어주나? 아끼지 않고.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32절) 차단막이 예수님 자체 안에 스며들면 이젠 예수님이 움직이는 차단막이 돼요. 예수님 자체가 차단막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 자체가 길이요, 예수님 자체가 길이 없음이 되고, 예수님 자체가 장소가 되고, 예수님 자체가 비-장소가 되고.
왜 그렇게 되느냐 하면 예수님 자체가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라는 주님이 아들이지만 나를 버렸다는 그 원칙이 계속 예수님 안에 작동하고 있습니다. 작용하고 있어요. 이것을 빈자리, 공백이잖아요. 빈자리를 ①내용으로 채울 것인가? 아닙니다. 탈락입니다. ②사건으로 채운다. 이게 옳습니다. 십자가 사건으로 빈 공백을 채웁니다. 주님께서 가시고 떠나면서 남아있는 게 빈 무덤이죠. 인간은 빈 무덤에 도착할 뿐이고 더 진전이 없어요. 더 나가질 못합니다.
근데 빈 무덤에서 작용하는 것은 뭐냐 하면 내용이 아니에요. 성경지식, 신학지식, 조직신학 이런 게 아닙니다. 뭡니까? 사건입니다, 사건. 무슨 사건? 십자가 사건. 예수님이 십자가 질 때 있는 것에 대한 재탕, 그것이 빈 무덤을 채우게 됩니다. 거기에 대해서 오늘 오전에 여러분 설교 들었기 때문에 제가 재탕하기가 뭐하다마는 쉽게 이야기하면 그걸 엿치기라 했지요. 양쪽 다를 보게 합니다. 나의 옛사람과 나의 새사람의 구성요소를 양쪽 다 보게 하는 거예요.
중간에 우리 이상철 집사님이 기도를 잘해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기도 안 했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나는 구원받았다’ 나는 구원된 자, 그걸 보는 게 아니고 나는 구원될 수 없는데 어떻게 구원되어서 그 중간과정을 주시하고 주목하는 거예요. 이미 벌어진 현장에. 그 사건이 벌어진 현장이 내가 끼어들 수 없는 무슨 자리? 빈자리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 안에는 항상 주께서 말씀으로 뭘 하느냐? 자리를 텅텅 비게 하는 겁니다.
우리교회 밑에 편의점 몇 년 있었지요? 한 3년. 3년 동안 물건 꽉 채우고 날마다 그 앞에서 사람들 담배피우고 쓰레기 버리는 것, 참 힘들었는데 지난 목요일, 금요일 날 깨끗하게 다 치워서 유리창만 있고 안이 투명하게 선명하게 훤히 다 보여요. 물건 하나도 없어요. 엉성하기 짝이 없어요. 허해요. 그 빈자리. 주께서 우리를 이렇게 빈자리를 채우면서 그 자리에서 우리의 과거를 소환합니다. 너는 이런 인간이야, 과거를 소환시키고, 그리고 주님이 소환되면서 네 힘으로 될 수 없는 것을 내 사람 만들게 되는 그 사건에 우리로 하여금 주목케 하는 겁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에서 부지런히 튀르키예와 그리스를 왔다 갔다, 왔다 갔다 심지어 로마까지 가면서 나오는 사도 바울이 역사적으로 행적을 남겼잖아요. 그런데 그 행적과 사도 바울이 행적을 하면서 썼던 편지내용과 완전히 달라요. 여러분, 충격 받아야 돼요. 어디 가서 뭘 전했습니다, 어디 가서 뭘 전했습니다, 이거는 지상의 장소적이에요. 비-장소가 아니고 장소적입니다. 실제로 몸을 왔다 갔다 했으니까.
그런데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로마서, 그리고 골로새서, 빌립보서에 보면 그 내용은 인간이 어떻게 하시오, 라가 아니고 뭐냐 하면 허황되기 짝이 없는 중첩된 내용을 이야기합니다. 너희들이 아무리 애써도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십자가를 알 수 없다. 고린도후서 이야기잖아요. 고린도후서 4장을 볼까요.
4장 11절,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이렇게 돼 있잖아요. 이게 사도행전에 나옵니까? 안 나옵니다. 사도행전은 겉으로 보면 사람 대 사람의 만남의 이야기지 이 이야기는 누구 이야기냐 하면 성령 안에서 사도와 누굴 만나느냐? 예수님과 직접 만난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그리고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 사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1,2절) 이 이야기가 사도행전에 나옵니까, 역사책에 나옵니까? 안 나옵니다. 안 나오고 고린도후서 편지에 나와요.
이 고린도후서는 3차전도 말미에 북쪽 마게도냐에서 남쪽에 있는 고린도, 아가야 지방에 편지한 거예요. 고린도전서는 에베소에 3년 동안 있었거든요. 제일 장기체류하면서 고린도에 편지한 게 고린도전서고. 그것도 역시 3차전도할 때 있었고. 2차전도 고린도후서는 이게 마케도냐 넓은 지역인데 어느 쪽인지 모르겠지만 고린도후서 7장 5~8절에 나와 있어요. 내가 마케도냐에 갔을 때 편지 썼다는 내용이 나오거든요.
그 내용에서 편지를 썼다는 내용은 역사적으로 나온 것 맞아요. 그런데 이런 이야기는 고린도후서 편지 안에 있는 내용이라고요. 그러나 이 편지는 역사도 아니고 그야말로 하나님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역사 속에 있으면서 역사를 초월한 영적 세계에 대한 중첩, 상호 얽힘, 중첩된 것. 거기서 뭘 하느냐? 내가 있는 자리가 곧 십자가 사건이 반복해서 일어나는 주님의 현장, 장소다 이 말이죠.
그걸 세상적으로는 장소 같은데 장소가 없으니까 비-장소라고 이야기할 수 있어요. 비-장소니까 사건이 일어나는 거고, 사건이 일어나도 잡히지 못하니까 절취하고 손으로 소유할 수 없으니까 이거는 주님의 바람 같이 부는 성령의 흐름이라고 볼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 그 흐름 안에서 실체는 예수님이고 우리는 그 예수님 앞에서 가볍게 하나의 비유 같은 존재, 은유로 살아가는 겁니다.
지금 감히 우리가, 그렇다면 고린도후서를 해석할 때 어떻게 하면 됩니까? 방법은 다 나왔는데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나의 육, 그리고 영, 주님의 영이죠. 나의 육과 주님의 영을 사건 속에서 만나는 식으로 해석하면 되지요. 해석하게 되면 해석이 몇 가지 나오겠어요? 이질적인 요소가 둘이 만났으니까 어떤 해석이 나옵니까? 첫 번째 해석은, 육의 해석이 나오겠지요. 두 번째 해석은 뭡니까? 주님의 해석 나오겠지요.
이 차이 나는 두 개를 소개하는 그것이 바로 고린도후서 1장 9절에 나오는 말씀처럼 다시 쓰면, “죽었다가 다시 살리신” 이 복음이 계속해서 반복해서 나타나게 되는 겁니다. 살았다가 아니라 죽었다가 살아난 것을 이 사건을 위해서 나의 육이 필요하고 주님은 또 주님대로 주체로서 필요하고. 이 두 가지가 죽었다가 살아나는 현장이 되게 하는 겁니다. 현장성.
그러면 나의 육은 무엇으로 무장돼 있습니까? 선악지식으로 무장돼 있겠지요. 선악지식은 우리로 하여금 자기 의를 추구하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여러분 자기 의를 추구하니까 우리가 갖고 있는 자기 의를 알아서 버려야 되겠습니까, 그걸 지켜내야 되겠습니까? 야무지게 지켜내야지요. 우리가 그게 주특기니까. 이것 외에 잘하는 게 없어요.
내 변호와 내 변명과 온갖 거짓말과 이런 걸 총동원해서 나는 존재할 가치가 있다고 웅변하는 것, 이건 뭐 유치원 졸업한 애들도 다 알아요. 이거는 애들부터 어른까지 당회로부터 어린아이까지 못하는 게 없어요. 모든 것이 자기 존재의 정당성을 발휘하는 데 있어서 이건 누가 안 가르쳐도 너무 잘해요. 너무 잘합니다. 그 선악체계.
그다음에 또 뭐냐 하면 이 선악체계에 의해서 희생당하고 핍박을 받으신 주님의 희생과 주님의 약해지심, 그걸 고린도후서를 봅시다. 제일 끝부분에 13장 4절,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이라고 돼 있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누구보다 약해요? 인간보다 셉니까, 약합니까? 인간보다 약하게 죽었어요. 인간한테 약한데 누구는 이겨요? 마귀한테는 세요.
와 이게 진짜 납득하기 힘들어요. 인간한테는 지는데 마귀한테는 진 적이 없어요. 그 말은 무슨 뜻입니까? “마귀야, 너 원하는 게 뭐고? 내가 죽는 거잖아. 내 죽어줄게.” 이거잖아요. 이거라니까. 그러니 마귀는 미치는 거예요. “왜 내 시키는 대로 해. 내가 원하는 것을 왜 해주는데? 왜 당신은 배알도 없고 줏대도 없고, 왜 그렇게 사는데? 누가 센지 상대해보자.” “상대 안 해.” “죽인다?” “죽여.”
여러분, 이게 말이 돼요? 날마다 우리가 예수 죽으심을 짊어짐은 나는 죽고, 그다음 뭡니까? 네모 안에 뭐가 들어갑니까? 내가 날마다 새롭게 살게 하려 하심이라. 무엇의 힘으로? 주의 살려주시는 능력으로 살게 하심이라. 근데 좋아하지 마세요. 살려줘 봤자 5분도 안 돼서, 이게 존재가 아니고 사건이거든요. 살려주게 되면 그다음은 또 어떤 시추에이션을 연극을 또 만들어요. 주께서 연극을 만들어서 나는 주의 능력으로 살았다, 이것이 나의 이익이다, 이렇게 또 나온다니까요.
그러니까 첫째 시간, 둘째 시간을 끝내면서 여러분도 여러 가지 말을 들었겠지만 제가 한 가지를 잊지 말라고 당부하고 싶은 것은, ‘나는 비유다’하는 것. 나는 실체가 아니고 하나의 은유다. 내 안의 그리스도가 실체지 나는 그분이 하고 싶은 대로 오늘은 이 역할, 내일은 저 역할 그렇게 맡은 역할은 주께서 각본 쓰신 대로 상황 짜여진 대로 그렇게 살 뿐이에요.
구름 따라 바람 따라 그거는 도가에서 이야기하는 거고요. 구름 따라 바람 따라 그것 예상하지 마세요. 우리는 핍박받을 뿐이지 주께서 처해있는 상황 따라 가는데 어쨌든 간에 우리는 하나의 비유와 은유로서 이 땅에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제목을 뭐냐 하면 나는 주님의 언어다. 아까 나왔지요. 고린도후서 3장, 너희는 나의 뭐다? 나의 편지다. 주님이 자기 하고 싶은 것을 담은 언어인데 이 나밖에 모르는 더러운 이기주의 육을 통해서 주께서는 자기의 십자가, 너 같은 인간도 죽여서 살려냈다. 죄 사해줬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사용하도록 우리를 날마다 주님 앞에 맡기시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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