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자료

나타난 천국 1강-두 가지 교회

아빠와 함께 2026. 1. 17. 09:10

2026 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 제1강-고린도후서: 두 가지 교회
(강의:이근호 목사)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어느 때나 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의 허락과 주님의 스케줄로 주님의 인도하심을 통해서 뚜렷한 목적, 말씀을 생각하는 그런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기회가 허무하게 날아가지 않게 하시고 주의 말씀이 더욱더 쏟아지는 그런 계기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고린도후서 시작하겠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 1절에 보면 이런 단어가 나와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이 교회”라고 나와 있는데 성경에 나와 있는 이 교회와 오늘날 교회가 어떤 차이가 있느냐는 거예요. 교회가 두 가지가 있겠지요.

인간이 세울 수 있는 교회 →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교회
인간이 세울 수 없는 교회 → 인간이 선택할 수 없는 교회

이 두 가지 개념에서 이 개념을 바꾸겠습니다. 이거는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교회, 이거는 인간이 선택할 수 없는 교회. 이렇게 정리가 될 수 있어요. 예를 들면 인간이 선택할 수 없는데 인간이 선택했다는 말은, 인간이 선택한 교회가 인간이 세울 수 없는 교회에 들어가는 것은 여기서 거부되겠지요. 이거는 못 들어갑니다.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교회는 하나님의 인간이 세울 수 없는 교회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그리고 똑같은 이치에 의해서 인간이 선택할 수 없는 교회에 속한 사람은 인간이 세울 수 있는 교회에서 거부당합니다. 들어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3장에서 이 교회를 이렇게 규정합니다. 문자+영, 문자는 인간은 누구나 읽을 수 있으니까 성경책이요. 성경책 더하기 이 영이 있느냐, 없느냐 여부에 따라서 문자만 있는 교회는 인간이 세울 수 있는 교회고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교회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영이 들어가 버리면 인간이 세울 수 있는 교회에서 추방되게 되고, 인간이 선택한 교회에서 쫓겨나게 되고, 그게 섭섭하다는 게 아니고 선택할 수 없는 교회, 인간이 세울 수 없는 교회로 강제로 전출이 이뤄지지요. 강제전출이 이뤄집니다. 들어가기는 이리로(인간이 세울 수 있는 교회) 들어갔는데 성령에 의해서 이쪽으로(인간이 선택할 수 없는 교회) 집합이 돼 있어요. 여기에 모이게 돼요.

이 사이를 이 과정을 고린도후서 1장에서는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환란”이라고 돼 있어요. 환란, 고난.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6절) 4절에 보면,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환란 중에 있는 모든 자를 능히 위로한다.

환란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일부러 환란 받으려고 설치진 않잖아요. 환란을 원하는 자가 없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환란을 선택하지 않아요. 인간이 뭔가 할 때 환란을 겪기 위해서 노력하는 자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환란은 무엇과 연관돼 있는가? 문자 말고 영과 관련돼 있습니다.

문자가 아니고 성령이 갖고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 왔을 때 환란이 주어지는 데 이 환란은 예수님께서 경험하심에 되풀이, 같은 말로 반복이라 하죠. 예수님이 세상에서 경험하심의 반복 작용으로 환란이 주어집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지금 하늘에 계시지만 성령은 땅에서 활동하시잖아요. 그러면 하늘에 계신 예수님과 땅에 있는 성령 사이에서 자기 백성과 결합하면서 예수님이 땅에서 경험했던 그 환란을 성령을 통해서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겁니다.

그럴 때 결과로 생기는 것이 뭐냐 하면 인간이 세울 수 없는 교회가 등장하고, 인간이 선택할 수 없는 교회가 등장하는 겁니다. 인간이 세울 수 없는 교회, 여러분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천국은 우리 행함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구나, 사도행전 19장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은혜로만 들어간다고 했거든. 천국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들어가요.

생전에 사도 바울이 복음 전하면서 같은 말인데도 ‘인간이 세울 수 없는 교회에 들어왔다’ 이거는 이해되는데 ‘인간이 선택할 수 없는 교회에 들어왔다’는 것은 여기선 뭐가 있느냐 하면 성령께서 그냥 주시는 게 아니고 강제성을 동원시켰다는 뜻입니다. 강제성란 말은 본인의 의사에 맡기면 언제든지 인간이 선택할 수 있고 언제든지 인간이 세울 수 있는 교회로 되돌아 갈 수밖에 없게 돼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여러분 생각에는 인간이 세울 수 없는 교회가 천국이고, 선택할 수 없는 교회가 천국이라면 그럼 나는 천국 가고 싶은데 기껏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교회에 머무는 데 그럼 천국 가고 싶은데 천국 가는 방법을 뭐가 근치시키느냐 하면 선택할 수 없다는 상황이, ‘네가 천국 가고 싶다고 해서 갈 수 있는 게 아니다’라는 것을 분명히 명확하게 여기서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환란 받으면 되지 않겠느냐? 환란 받아도 소용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이 만들 수 있는 환란, 선택할 수 있는 환란이 따로 또 있기 때문에. 완전히 철저한 봉쇄지요. 철두철미한 봉쇄 작용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머리 굴리고 저 머리 굴리다가 안 되면 나머지 뭐 하냐? 그러면 성령 받으면 되잖아. 문자에다 영이 필요하다하니까.

고린도후서 그 대목을 봅시다. 그냥 말할 것이 아니라. 3장 2절에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인쇄된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쓰셨다.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이렇게 돼 있어요.

지금까지 제가 오늘 강의를 시작해서 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봉쇄가 너무 철저해서 어느 누구도 천국 가고 싶다고 해서 이런 조건에 맞는 것, 심지어 성령까지 있어야 천국 간다는 것에 대해서 이미 인식을 하고 어쨌든 간에 문자에 머물지 않고 성령 받기 위해서 기도원에 다니면서 백날 노력해도 이것조차도 주께서는 그 틈새를 저지하는 겁니다.

그러면 천국 가는 것은 희망이 없지요. 모든 노선은 차단됐으니까 희망이 없지요. 예수님께서 좁은 길로 가라 해놓고는 좁은 길 갈 사람이 아무도 없잖아요. 주님의 말씀은 그런 식이에요. 천국이 여기 있다고 하면서 갈 길은 전혀 제시하지 않아요. ‘나 외에는 갈 길이 없다.’ 그 이야기는 하나마나에요. 그 이야기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에요. 어차피 못 가는 건 마찬가지니까. 약 올리시는 것도 아니고.

나 외에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면,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를 건드리지 않으면 천국 못 간다는 이야기인데 그럼 왜 쓸데없이 그 이야기를 해서 괜히 약만 올리고 우리 간만 보고 말이죠. 짜증나게. 왜 이렇게 하느냐? 바로 그에 대한 해결책이 있어요. 너무 절망하지 마시옵소서. 해결책이 뭐냐 하면 우리를 천국 가는데 환란을 유발해서 도와주는 것은, 우리가 환란을 받는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환란을 도와주는 자들이 있어요. 누구냐? 이들입니다. ‘고맙다, 마귀야.’

환란을 내가 자초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원치 않는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환란을 제공하는 것이 이걸 사자성어로 ‘기성교회’라 합니다. 기존에 있는 교회, 인간이 세울 수 있는 교회에 인간의 아이디어가 거기 집합돼 있거든요.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을 조직했기 때문에 계속 설교시간에 인간의 선택에 대해서 강력하게 여러분의 결단력을 요구하는 설교가 튀어나와요.

‘이렇게 하지 마시고 이렇게 해주시고, 이렇게 하지 말고 이렇게 해주시면 여러분들은 하늘의 복을 받을 것이고 기도에 응답받을 것이고 죽어서는 천국 갑니다’라는 이것을 계속해서 언급해주는 겁니다. 그래서 모인 교회가 신천지고 그렇지요.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계속 제공하니까. 그럼 신천지를 욕하면? 욕해도 마찬가지지요. 또 기성교회니까.

그러면 여기서 이야기가 계속 되지요. 그럼 기성교회가 아니라면 기성교회가 아닌 교회가 어디 있느냐? 없어요. 이게 없다니까요. 자, 이렇게 이야기를 끌고 가면 복잡해지니까 제가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어린아이 동화에 나오는 이야기인데요. 칠백 살 먹은 멸치가 어느 날 꿈을 꿨는데 요상한 꿈을 꿨어요.

무슨 꿈이냐 하면 하늘로 올라갔다고 땅으로 내려갔다가 어지러운 꿈을 꿨어요. 올라갔다가 내려오면서 구름도 일으키고 불길도 일으키고 바람도 일어나고. 그래서 꿈자리가 너무나 심란해서 참을 수 없어서 옆에 가자미한테 이야기했어요. 어떻게 꿈 해석할 수 없느냐고. 그 꿈 해석에 있어선 망둥이 할머니가 최고라는 거예요.

그래서 망둥이 할머니를 찾아서 설명을 했어요. 망둥이 할머니가 듣고 있다가, 망둥이 할머니가 그 당시에 최고 상담자거든요. 이혼숙려 상담자 이런 비슷한 것 있잖아요. 최고의 상담가가 되어 어쨌든 간에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를 쓰면서, “이거는 우리 멸치 대감님이 용이 될 꿈입니다. 위로 올라갔다 내려가는 것은, 자연의 조화를 일으키는 것은 용 아니면 못합니다” 이렇게 하니까 대감이 이제부터 바다 속 왕궁에 다른 물고기들 모아놓고, ‘내가 이제 용이 된다’ 해서 그 망둥이 할머니한테는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면서 잔치를 벌였어요.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가자미가, 자기가 망둥이 할머니를 대한다고 헤엄치면서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는데 아무 보상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서 화가 나서, “용 같은 소리하고 있네. 그게 무슨 용꿈이냐. 당신은 어부에 낚일 꿈이다. 어부의 낚싯줄에 걸려 잡아당기니까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고 내리니까 땅에 꼴아 박는 것이다. 그러면 구름은 뭐냐? 구름은 당신 잡아 석쇠에 구우면서 하얀 소금을 치니까 그게 구름이고, 불은 뭐냐? 불에 석쇠 구우니까 불이다. 그럼 바람 부는 건 뭐냐? 잘 익으라고 부채질하니까 시원하고 따뜻하고 그런 것이다.”

여러분, 이 말을 들어 보세요. 어느 것이 합리적 해석입니까? 합리적 해석이란 서사구조에서 앞의 이야기가 전체적으로 하나의 통일성으로 연결이 돼야 되거든요. 연결될 때 사람 좋게 하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그러한 망둥이 할머니의 그것보다도 가자미의 이야기가 앞뒤가 아귀가 맞잖아요. 문제는 뭐냐 하면 꿈꾼 사람을 완전히 공격하는 식이란 말이죠.

그래서 화가 난 멸치가 가자미를 힘 있게 치니까 정면 된 것이 옆으로 박아 놨어요. 그걸 보고 눈 돌아갈 정도로 때릴 수 있는 멸치 대감의 완력에 놀랐던 낙지와 꼴뚜기가 자기의 눈을 떼서 자기의 허리춤에 숨겼어요. 물고기의 형태가 그렇게 되어 있는 가장 합리적 해석을 내리는 거예요. 동화에서. 그걸 보고 옆에 있던 새우가 그 꼴뚜기와 낙지가 눈을 숨기는 모습이 우스워서 배꼽을 잡다보니까 허리가 구부러진 거예요. 그 때리는 걸 겁내서 망둥이 할머니가 도망을 치는데 급해서 헤엄쳐서 못 가고 펄떡펄떡 뛰다보니까 망둥이가 그렇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망둥이 형태, 새우 형태, 꼴뚜기, 낙지 행태 눈 아래쪽에 있는 것, 그리고 특히 가자미가 눈이 옆에 있는 것을 한꺼번에 하나의 원칙으로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가장 합리적인 것은 멸치가 팼다는 것. 여기서 하나님의 방식은 뭐냐 하면 이겁니다. 빨간 걸로 해야 돼. 파란 걸로 할까요? 모든 존재는 비유다. 어느 관점에서? 주님의 관점에서, 성경의 관점에서 모든 인간은 있다가 없어지는 잠시 등장하는 것은 예수님의 활동을 실제 되는 예수님의 실재를 설명하기 위해서 임시방편으로 조성된 그냥 은유의 존재가 인간이라는 겁니다.

그럼 성령은 뭐냐? 자기를 실체로 보지 않는 거예요. 누구 손에 잡혀서 그분이 하시는 일을 드러내는 데 어떻게 활용을 당하느냐? 왜 저는 가자미의 눈은 옆에 있는가? 그렇게 활용 당했어요. 왜 꼴뚜기는 눈이 아래쪽에 있느냐? 그렇게 활용 당한 거예요. 인간의 다양성, 인간의 존재 자체가 실제가 아니고 이게 하나의 은유요, 하나의 비유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걸 사도 바울은 복음으로 전했습니다. 본인이 자기 자아가 이 땅에 주체가 될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환란을 당한 것은 자기가 주인공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너 주인공 아니야’라는 그 지적 때문에 당했던 환란을 이제 똑같은 환란을 성령을 통해서 교회, 천국이죠. 인간이 세울 수 없는 교회, 인간이 선택할 수 없는 교회의 성도로서 주께서 그렇게 등장시켰다는 겁니다. 이것을 약간 고상하게 설명해보겠습니다.

‘흐름을 절취한다.’ 이 세상에는 모든 것이 머무름이 없고 흐름에 지나지 않는데 이게 절취돼버리면 사람들은 뭐로 인식하느냐 하면 이게 존재로 인식되는 거예요. 물리적으로 말해서 흐름은 에너지의 흐름이죠. 에너지의 흐름이 절취돼버리면 파동에서 입자가 되는 방식이에요. 다시 풀리면 다시 파동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에너지의 순수 흐름이 인위적인 요소가 가미돼버리면 흐림이 일시적으로 저항을 받지요.

저항을 받으면 이게 질량이 된다는. 물리학에서 그렇게 이야기해요. 저항을 받을 때 내 몸무게가 되잖아요. 그냥 가만 놔두면 나란, 이걸 정신의학에선 질량이라 하지 않고 주체라고 하는 거예요. 주체는 나 됨에 누구 나라고 호명하고 내 앞길을 누가 막을 때 비로소 그 순간 나는 저항력을 느끼는 거예요. ‘나 건드리지 마!’ 갑자기 나 건드리지 말라는 식으로 쫄깃한 긴장상태에 들어가는 거예요. ‘나한테 함부로 지시와 명령은 내리는 네가 누구야?’ 이래 되는 거죠.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절취되었을 때 이 주체를 어떻게 하느냐 하면 해체시켜버립니다. 다시 원래대로 해체를 시켜버려요. 그냥 해체시켜버리면 인간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되잖아요. 근데 해체시키면서 여기에 뭐가 들어가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십자가 사건, 말씀 사건, 이 사건으로 해체시키면 여기서 인간은 흐름에서 새로운 천국 성도로서 새롭게 생산되게 돼 있어요.

주님이 건드려줄 때 새로운 성도가 되는데 이렇게 보면 성도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세상적인 예수님을 반대한 세력, 또는 권력이죠. 세력에서 주님께서 개입하니까 성도가 되는 거예요. 성도라 하는 것은 그전에는 하나님의 원수로 한 통속했다는 같이 집단적으로 그쪽에 속했다는 것을 분명히 하면서 성도되는 거예요. 인간이 세운 교회,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교회, 교회란 말을 구약적으로 하면 모임이죠, 모임.

다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모세를 통해서 말씀을 줬잖아요. 율법입니다. 율법을 줄 때 인간들은 율법을 통해서 뭘 만나느냐 하면 이스라엘이라는 택한 백성, 그러한 개념을 형성했어요. 이들이 누굴 핍박하느냐 하면 예수님을 핍박했고, 이들이 사도 바울을 핍박하고, 고린도에 있는 교회를, 고린도에 있는 성도를 핍박하고, 에베소에 있는 성도를 핍박하는 거예요.

핍박할 때 가만있으면 핍박이 안 되잖아요. 안 되는데 사도 바울을 보내서 가만있는 이방인들,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사도의 성령으로 쓴 편지라고 해서 말씀이죠. 편지라고 하면서 그들에게 다가서니까 그 시대에 있던 이방인사회와 유대인사회가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면서 환란을 주고 저항을 하니까 그 저항을 통해서 이들이 뭐가 되느냐 하면 성도가 돼버리는 거예요. 묘~하지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이렇게 묘합니다.

사도행전 13장 49절에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사도 바울이 시리아 아람나라에 있는 안디옥에서 구브로 섬을 거쳐 지금 튀르크에 내부를 한 바퀴 도는 1차 전도입니다. 그때 선교할 때 바나바와 같이 갔는데 삐져서 나중에 2차에는 바울이 실라와 가요. 1차 전도는 바울과 바나바, 2차는 바울과 실라와 같이 가는데 가면서 핍박을 받고 도망을 쳤는데 성경에는 아까 뭐라고 돼 있습니까?

13장 49절에 현장에 누가 없어요? 사도 바울이 없어요. 없는데 사도 바울 떠난 그 자리에 뭐가 있느냐 하면 사도 바울이 떠난 그 현장에 주의 말씀이 두루 퍼져버렸습니다. 퍼진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말씀 자체가 발이 달렸는지 말씀 자체가 어떻게 소문이 들렸는지 소문을 들은 말씀이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주의 능력으로 작용하고 있어요. 희한하지요.

근데 정작 전했던 사도 바울은 뭘 받고 있고요? 환란 받고 그 현장에 없어요. 도망쳤다니까. 현장에 없어요. 그냥 외치고 도망쳤는데 그 동네에 주의 말씀이 자기들끼리 통용되고 있었다, 이런 형편이란 말이죠. 사도행전 19장 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 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다는 말은,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교회,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교회를 인간들이 벌써 자생해서 만들어냈다 이 말이거든요. 성령은 듣지 못하고, 그러니까 성령이 누락된 상태에서 얼마든지 간판은 어느 교회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을 여기서 확인할 수 있어요. 성령은 모르겠고, 라는 말은 ‘문자+성령’이 아니고 그냥 문자만 있는 것, 성경공부만 있는 거예요. 성경공부만 빡세게 한 거죠.

빡세게 하면 사도 바울 입장에서는, ‘아이고 열심히 하네, 뭐 더 가르칠 필요 없네. 그럼 나, 빠질 게. 딴 데 가야지’ 이렇게 하면 될 텐데 왜 갑자기 사도 바울이 혹시 성령 들어봤느냐는 그 이야기를 왜 하느냐 이 말이죠. 이거는 누가 가르치고 누가 배워버리면 그 사람은 가르치는 사람한테 종속돼요. 그 가르치는 사람이 주님이 아니고 사람이 돼버리면 교회의 근본적인 취지, 지금 중요한데요. 안 중요한 게 없겠지요, 제 입장에선.

원칙을, 교회는 진짜 교회지요. 교회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사람을 상대하지 말라.’ 사람 상대하면 교회 안 됩니다. 그 사람 자꾸 생각나서. 사람을 상대하면 교회가 아니에요. 그 사람이 하나의 모델이 돼요. 사람을 상대하면 그 사람‘처럼’ 되려고 해요. 그러면 교회는 사람을 상대하지 말기 위해서는 사도 바울은 사도 바울을 보내서 여기다가 뭘 집어넣느냐 하면 사람 대 사람 가운데서 만나지 말라는 건 아니고 상대하지 말라는 뜻이거든요.

뭘 집어넣느냐 하면 여기 성령을 집어넣어요. 성령을 집어넣도록 말씀을, 사도 바울은 말씀의 택배기사니까. 요새 쿠팡, 새벽배송해서 성령을 통해서 집어넣는다고요. 그게 사도행전 16장 6절과 9절에 보면,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러니까 튀르크에 쪽은 전도하지 말고 지금의 그리스 쪽으로 북쪽은 마케도니아, 아래쪽은 아가야로 크게 나누면서 2차 전도가 시작되는 거예요. 2차 전도가 영적으로 확장이 된다고요.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사도 바울이 돌아다녔다? 근데 교회가 생긴 거예요. 왜, 왜 생기지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아 사도 바울이 전도해서 교회 생겼구나.’ 그거는 인간이 만든 교회고요. 그거는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교회고. 인간이 만들고 선택할 수 있는 교회는, 사람이 사람을 만나고 상대해서 뭔가 말씀 가르쳐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성경공부해서 만들어낸 교회는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교회입니다. 이게 성령과 상관이 없어요.

성령은 사람을 상대해놓고 사람을 상대하고 사람을 만나놓고 내가 구원받은 것은 그 사람 때문이 아니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게 교회 아닙니까. 누굴 만나고 강의를 듣고 설교하면서 ‘나는 당신 아니야. 이거는 주님이 직접 하셨어’가 고백이 될 때 그게 바로 참된 교회입니다. 사람 만나놓고 사람을 팽치는 거죠. 배신자여, 배신자고 뭐고 간에 누가 배신하고 싶어 배신하는 게 아니고 사실이 그래요, 사실이.

만나놓고, ‘너 아니야’라고 이야기하는 것. 그러면 이 말을 이렇게 하면 쉬울 거예요. ‘너 아니야’란 말을 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만나는 것, ‘너 아니야’라는 것을 전제하고 결사적으로 만나는 거예요. 그러면 뭐가 성립되느냐 하면 이게 성립돼요. ‘나는 이제 성도다’가 이게 성립이 되겠지요. 이게 바로 틀린 거죠. 나는 이제 성도라는 이 말은 결국 사람을 이용해서 내가 성도되는 본래의 목적을, 천국 가기 위한 목적을 위해서 성경말씀을 또 이용한 게 됩니다.

그럼 어떻게 되느냐? 나는 이제 성도라는 것이 성립되는 것이 아니고 ‘나는 이제 말씀의 전달자다’ 이 말은 나는 말씀의 전달자란 말이 아니고 말씀이 작용하는 데로 나는 그냥 호출 당한다. 말씀이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는 호출 당한, 주객이 말씀이 주체가 되고 나는 그의 객체가 되는 그런 관계가 될 때 비로소 사도 바울의 편지가 그 사람에게 계속 유효합니다.

그러면 나는 무엇이다, 라는 이런 규격은 여기서 성립이 안 돼요. 성립이 안 되기 때문에 여기서 나는 무엇이라고 규정을 못하기 때문에 ‘나는 말씀의 흐름이다’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이 흐름이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실체는 누구냐 하면 주님이 실체기 때문에, 성령이 실체기 때문에. 그 이야기가 누가복음 17장 20절에서 21절에 나옵니다. 누가 크게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 아무 흐름을 안 주시네요.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하늘나라가 언제 옵니까?” 인간은 자기의 뜻대로 자기의 선택에 의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대로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항상 질문 자체에 그게 섞여있어요. 내가 뭘 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언제 오는지 미리 당겨서 알게 되면 그 시점에 다다라서 조신하게 살면 되지 않겠느냐. 흰옷 입고 주님 재림하는 날 어떤 낌새가 보일 때 이 때가 그때라 해서 나팔소리 들으려고 보청기 끼고 조그만 소리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하는 것, 어느 때에 옵니까? 시간을 이야기했어요.

이런 질문할 때 여러분, 뭐가 문제라고 봅니까? 본인이 비유, 은유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완전히 이거는 상실하고 있지요. 이거는 아무것도 아니야. 중요한 것은 주님의 스케줄이 중요하지 너의 스케줄은 녹아져야 되지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예수님께서 어느 때에 있다가 아니라 또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한다. 이건 시간뿐만 아니고 공간까지 주께선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뭐냐? 하늘나라는 바로 너희 안에 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하늘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고 하면 될 텐데 유도해내요. 자신의 꿍꿍이 평소에 어떤 마음가짐, 나한테 유리한 것을 포기 못하고 있다는 것, 나는 모든 것이 나 잘되기 위해서 한다는 그 심보를 주님께서 그대로 노출시키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질문을 유도해서 그 질문에서 ‘너는 아니야’라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께 환란으로 되갚아주기를 예수님은 지금 유도하고 있는 거예요. ‘죽여, 죽여. 날 죽여. 날 죽이라니까. 그래야 일이 돼. 네가 날 죽이지 않으면 영원히 인간은 천국에 막혀있어.’ 나를 죽이고 짓밟을 때 그래서 내가 천국 가는데 할 수 있는 것은 개뿔도 아무것도 없었음이 분명해질 때 비로소 천국은 눈에 들어오는 겁니다.

이걸 첫째 시간의 제목을 이렇게 정해봤어요. ‘보이지 않는 분의 응시’ 응시란 지켜본다, 주목하는. 보이지 않는 분의 응시, 보이지 않는 분이라 했지만 실은 이 땅에서 인간에게 린치를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인간세계에서는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 분이 다른 곳에서 우리를 지켜보는 그 응시에 걸려든 자, 그럴 때 그 사람은 우리를 지켜보시는 분의 그 실체, 그 주체의 일부가 되는 겁니다. 일부가 되면서 우리는 이 땅에서 비유가 되고 은유로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비유와 은유란 말을 하는 이유는, ‘나는 누구다’가 아니라 ‘나는 말씀의 자투리, 말씀의 일부를 나의 신체와 내 인생을 통해서 드러내는 기능을 하게 되었다’ 내가 누구냐가 아니라 내 안에 작동하는 말씀은 이런 식이라고 드러내는 기능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성령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또 하나 예를 들겠습니다. 사무엘상 19장, 이건 어떤 읽어주셔야 되는데. 왜냐하면 읽어주셔야 제가 질문할 게 있어요. 이건 광주강의에서 언급했는데 다시 한 번 해봅시다.

사무엘상 19장 23절부터 24절까지. “사울이 라마 나욧으로 가니라 하나님의 신이 그에게도 임하시니 그가 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 행하며 예언을 하였으며 그가 또 그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종일 종야에 벌거벗은 몸으로 누웠었더라 그러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하니라” 고맙습니다.

“사울이 라마 나욧으로 가니라” 거기 왜 가는가? 그것은 다윗이 라마 나욧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잡아 죽이기 위해서 갔지요. 20절에 보면 사울이 다윗을 잡으려고 간 거예요. 잡으려고 라마 나욧으로 갈 때에 하나님의 신이 그에게 임하니까 그가 갑자기 예언을 하는데 그냥 좋게 예언을 하면 되는데, “그가 또 그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종일 종야에 벌거벗은 몸으로 누웠었더라 그러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라고 돼 있어요.

무엇이 장악했지요? 무엇이 장악했다는 말은 사울을 실체가 아니라는 뜻이에요. 하나님의 신에 의하면 사울은 본인의 의견, 본인의 계획, 본인의 다짐, 본인의 결심, 의지 ‘나는 다윗을 기어이 잡고 말리라’ 뭐 이런 것 있잖아요. ‘치토스, 언젠가 먹고 말 거야’ 그러한 결심이 허망한 것으로 완전히 노출됐지요.

내 인생 계획, 내 삶에 연금을 몇 년 동안 타고, 그 계획이 성령이 오는 순간 완전히 이게 안 이뤄진다는 말이 아니고 연금도 못 타 먹는다는 게 아니라 그게 의미가 없어요. 왜냐하면 내 자체가 의미가 없어졌기 때문에 나한테 돌아올 의미가 더 이상 내가 없으니까 돌아올 것도 없는 거예요. 모든 연금을 타든 뭘 타든 그 연금은 주님이 주신 거죠. 주님에게로 그냥 되돌아가죠. ‘사나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하는 것처럼.

그런데 재미나는 것은 그 과정에서 사울이 다윗을 잡아 죽이려고 했다는 거예요. 그러면 다시 정리해봅시다. 사울이 다윗을 잡아 죽이려고 할 때 다윗 입장에서는 사울이 뭐냐 하면 악인 중의 악인이죠. 다윗 입장에서는 자신에 대한 공격이니까 악함인데 성령이 임하니까 그 악도 악이 아니네. 그것도 하나의 연기.

몰입하는 연기를 뭐라 합니까? 매소드 연기. 자기 매소드 연기에 아주 충실합니다. 허장강이 나쁜 역한다고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 많은데 <여로>에 나오는 나쁜 역하다가 일찍 죽은 사람 있잖아요. 달중이. 젊은 사람들은 모르겠구나. 옛날에 <여로>라는 드라마가 있었어요. 달중이가 악한 역을 잘해서 동네사람들한테 욕 얻어먹고 빨리 죽었다는 비합리적인 설이 있어요.

그런데 주님 보시기에는 그건 하나의 역할을 했을 뿐이에요. 선하다는 말이 아니고 악이고 선이고 간에 그 결정은 누가 한다? 주님이 일방적으로 내리는 거예요. ‘가룟 유다, 너는 지옥 가라’ 그건 주님이 내릴 문제지 같은 제자가 가룟 유다한테 그런 소리할 입장이 아니다 이 말이죠.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너는 네 역할이나 잘하세요. 똑같은 죄인 주제에, ‘저거 죽여야 됩니다. 1억을 받았답니다’ 딴소리 하지 마. 1억을 받았든 2억을 받았든 공천을 하던 그거는 그 사람 역에 충실한 거예요. 갑자기 정치문제로 왔는데….

현실은 없고 모든 것이 몽롱한 환상의 세계에요, 이 세상이. 흐름이 절취 기구 또는 기관을 통하는데 이 기관이 인간의 신체입니다. 허파, 신장/콩팥, 그리고 간 이 모든 것은 우리 몸에 들어오는 에너지에서 절단해서 하나의 기관을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처음 흐름을 어떤 학자는 ‘기관 없는 신체’라 했어요. 들뢰즈란 철학자가 기관 없는 신체라 했거든요.

원래 처음에 인간이 신체로 세포분열이 일어나기 전의 원형덩어리, 거기는 기관 없는 신체가 돼서 잠재성만 갖고 있어요. 나중에 팔, 다리가 나오고 두뇌가 나오거나 잠재성만 있다. 이게 모든 자연의 원형이라 봤는데 이걸 공격하는 사람이 있어요. 당신은 기관 없는 신체를 이야기했는데 ‘신체 없는 기관’은 왜 이야기 안 하느냐? 신체 없는 기관이 뭐냐 하면 보이지 않는 분이에요. 일은 다 벌여놓고 우리 눈에 그 신체가 보이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 이 철학자들의 문제는 ‘뭔가 있다’부터 출발하는데 철학자들의 사고방식이 뭐냐 하면 ‘뭐가 없다’라는 있다, 없다를 생각하는 나도 하나에 누구 활동을 증거하는 비유에 지나지 않는다는 그 발상을 그들은 해내지 못합니다. 이유가 뭐냐? 성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이유는 성령을 받지 못해서 그래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튀르키예, 그리스 한 바퀴 돌고 교회 생겼다. 이게 성립이 되느냐? 성립이 안 되잖아요. 그런데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 사도행전 16장에도 아시아에서는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했다는 말은, 누가 주인이 되고 누가 종입니까? 성령이 주인이 되는 거예요. 성령이 주인이 되고 사도 바울은 그냥 시키는 대로 움직일 뿐입니다.

이걸 여러분, 편하게 생각하면 안 되겠습니까? 내 천국과 구원받기 위해서 악을 쓸 게 아니라 모든 것을 전체 그림을 한꺼번에 다 받으면 그게 편하지 않습니까? 제 생각이지만. 인생 이렇게 사는 게 좋지 않습니까? 악바리 같이 은혜 받고 악바리 같이 천국 가고 이런 짓을 그거는 인간이 세운 교회에서 하는 거잖아요.

다시 말해서 인간이 기껏 하는 건 저거밖에 할 줄 모르는구나. 하지만 저것에 의해서 지금도 주님이 핍박받고 있고 환란 받고 있고 지금도 진짜 교회가 인간이 세운 교회로부터 공격받고 있다는 생각. 그런데 그들을 비난하거나 미워할 것이 아니고 그들은 성령 받지 못해서 그 일을 하는 건데 그거는 성령 받은 자가 우쭐될 문제가 아니고 살아 계신 주님이 패스할 자와 커트할 자를 주님이 알아서 결정한 그 결정에 우리가 동의하면 되잖아요. 마음 편하게.

여러분 생각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성경 전체를 한꺼번에 보는 거예요. 내 인생을 따로 딱 뽑아내지 말고 성경 전체를 먼저 그리고 내 인생을 거기에 하나의 역할, 배역으로 삼으면서 거기다가 끼어 넣는 거예요. 끼어 넣으면서 10분을 쉬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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