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강의

제3의 요소

아빠와 함께 2025. 9. 22. 19:00

안양20250911a역대상17장13절(제3의 요소)-이 근호 목사


114페이지. <역대기와 한국교회>. 역대기는 열왕기와 어떤 차이가 나는가부터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역대기의 주인공은 다윗입니다. 봉우리가 이스라엘 역사의 정점을 다윗에 맞추어서 이렇게 나오면 이것은 역대기. 그다음에 이스라엘에 맞추면 열왕기. 열왕기가 됩니다. 이 차이점이 어떤 차이점이 있느냐? 그것은 제가 여러분한테 물어볼 수도 있어요. 어떤 차이가 있느냐, 하는 그것을 이렇게 질문할 수가 있어요.

“어떤 나라가 좋습니까? 어떤 인간이 좋습니까?”라는 질문. 여러분한테 물으면 나라가 현재 “여러분, 대한민국이 좋습니까? 옛날에 뭐 유명한 대통령 그 사람이 좋습니까? 어떤 스타가 좋습니까? 손흥민이가 좋습니까?” 이런 물음과 똑같아요.

그 대부분 뭘 좋아하냐 하면 나라를 좋아해요. 옛날에 뭐 이렇게 유명한 스타가 있었고 야구 선수도 있었지만 그 다 지나가면 인간은 그냥 지나가는 거. 인간은 지나가지만 나라와 땅은 남는다. 그리고 나라와 땅이 남는다는 것이 왜 좋으냐 하면 바로 내가 그 땅에서 계속 살아야 되기 때문에. 내가 존경한 사람은 맞지만, 그 사람은 이미 고인이 되고 존경해 봤자 타인이잖아요. 내가 아니잖아요.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구를 좋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나에게 내가 더 소중하니까요. 내가 현재 있을 나라가 있다. 땅이 있다. 그리고 가까운 가족과 민족이 있다. 그러면 이거는 나는 그 어떤 대단한 인물보다는 이순신 장군도 좋고, 세종대왕도 좋은데 현재 나는 현재 우리나라가 좋다. 이렇게 이야기가 할 수가 있습니다.

방금 그 질문을 다시 한번 구체적으로 해 볼게요. 내가 여기 있는데, 여기서 어떤 특정 인물이 좋으냐, 나라가 좋으냐 할 때 사람들은 인물도 좋지만 어떤 영웅도 좋지만 현재는 나라가 좋다. 이 말이에요. 이 인물 이것은 분리돼요. 하나의 내 기억 속에 분리되지만, 나라는 지금 내가 소속되어 있잖아요. 내가 이 나라에 소속되어 있으니까 이 나라가 잘돼야 내가 잘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열왕기상에서 이스라엘은 이렇게 굳건해야 되는데 이게 망해요. 망합니다. 열왕기상 망해 버려요. 그럼 역대기 망하는 것도 역대기도 마찬가지 아니냐? 그럼 차이점이 없지 않느냐, 이렇게 하는데. 역대기는 다윗의 준 약속, 언약은 나라는 망하지만 다윗의 약속은 안 망한다, 가 아니고, 다윗의 약속을 위해서 필히 나라가 이스라엘이 망해야 된다는 쪽이에요. 이 인식의 자체가 완전히 다르지요.

나라가 망해야 된다.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아까 이 그림에서 나라가 좋은 우리나라 좋은 것은 내가 그리 살고 있기 때문에 그렇잖아요. 살고 있기 때문에. 그런데 뭐냐 하면 나를 없애려면 나라도 같이 없어지는 게 맞다, 라는 쪽의 인식, 사고방식. 그게 역대기에요.

세상에 어느 인간이 자기가 사라지고 망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사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제주도로 서울로 왔다 갔다 어떻게 망하려고 그렇게 사시는 겁니까? 아니지요. 안 망하려고 살잖아요. 안 망하려고. 그 인식이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 그 인식이.

이거는 더 넓게 확대해서 우리가 교회 다니고 또 성경을 보는 이유가 망하려고 보십니까? 안 망하려고 보시는가? 이 질문과 동일한 질문이에요. 그래서 초반부터 문장 하나 쓰겠습니다. 이 문장 쓰면 여러분들이 좀 긴장해야 돼요. “나는 질문자가 되면 안 되고 나는 답이 되어야 됩니다.” 질문은 우리가 할 권한이 없어요. 왜냐하면 진정 살아 계신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땅에서 자신이 던진 질문에 답들이 나타나도록 출몰하도록 하나님이 조치를 그렇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던진 그 과제를 하나님이 친히 이루어 나갔던 그 증거 흔적들로 역대기는 이스라엘을 그렇게 보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진짜 하겠지요. 열왕기 상이 먼저고 역대기는 나중에 열왕기상하를 염두에 두고 역대기가
어떻게 되겠어요? 기록되겠지요.

열왕기상은 마음은 안 되는데,다시 말해서 우리는 잘해야 되는데,우상 섬기지 말고 하나님만 섬겨야 되는데, 섬겨야 되는데, 섬겨야 되는데..., 죽 망해 버렸어요. 대책 없어요. 우리가 어디에서 잘못된 걸 알면 안 망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잘못된 것을 품에 아는 채 망해 버려요. 문제는 짐작하는데 해답은 없는 것. 꼭 우리 인생 같지요.

우리 인생의 그 오해 중에 하나가 내 잘못을 내가 알게 되면 나중에 이것이 상황이 나아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건 우리 생각이고 성경에서는 꼭 열왕기상하 같아요. “문제 있으면 문제 있는 걸로 그만 니 자신 에 대해서 포기하시지요.” “하나님, 저 문제 많습니다.” “어, 그래요? 이제 알았네. 이제는 뭐 힘 좀 뺄 수 있지요. 이제는 포기할 수 있지요?” 그걸 물어요. “아이, 이렇게 반성하는데요. 하나님! 이렇게 내 잘못을 아는데요.” 그럼 하나님이 “뭐, 어쩌라고? 어쩌라고?” 반성한다고 해서 그걸 근거로 해서 내가 원하는 모든 인생이 전복으로 전환되고 만회된다는 생각, 그건 얍삽한 인간들의 생각이에요.

어떤 내 인생에 대해서 시도한다는 것 자체가 열왕기상이나 역대하에서는 용납하지 않습니다. 열왕기상이나 열왕기하나 역대기상에서 “그냥 이스라엘이 해볼대로 다 해 봐. 해볼대로 다 해보는데 안 되지. 역시 안 되지 그지? 안 되지. 그지? 이제는 네가 힘들 때가 되었잖아.” 그런 거. 그래서 이 열왕기상 이곳에서는 어떤 문제점이 드러났다면 역대기에서는 해답을 주는 거예요. 해답을.

그런데 문제지부터 먼저 있고 난 뒤에 해답지가 있으니까 열왕기 상하 다음에 역대기 상하가 전체적으로 정리한다 할까요. 다시 한번 해석을 이스라엘 역사에 대해서 이스라엘 역사 내에서 발견하지 못한 그 해답을 이스라엘이 망하고 난 뒤에 완전히 망하고 난 뒤에 그 망했다는 입장에서 다시 역사를 돌이켜 볼 때에 거기에 답이 생깁니다. 그 답을 한 문장으로 또 쓰겠습니다.

문장 쓸 때 이게 요거 염두에 두시는 거예요. 문장 하나 하나 크게 씁니다. “어디서 왕 따위가! (까불고 있어).” 이게 답이에요. 어디서 왕 따위가. 요즘 말로 하면 “어디서 대통령이 기자 회견하고?” 이런 거. 대통령 기자 회견 하는데 어떤 기자가 묻는다 칩시다. 그러면 경호원들이 있겠지요. 그런데 기자가 질문하면서 대통령에게 심기를 건드리고 약간 그 무례한 불편한 기사를 줬을 때 그 경호원들이 그 기자를 잡아가 가겠죠. 잡아가면서 무슨 소리 하겠습니까? “어디서 기자 따위가.” 하겠지요.

그 역대기는 “어디서 왕 따위가!” 이래요. 그러면 역대기에서는 그러면 이스라엘의 왕은 뭐냐 하면 보이지 않는 진짜 왕에 대해서 열왕기상에서는 대리한다는 입장이 강하지만, 진짜 보이지 않는 왕을 위해서 대신한다, 이리 하지만, 역대기는 이게 가짜가 되는 거예요. 가짜.

피라미드에서 밑에 백성이라 봅시다. 중간 관리자 있고 최고급 관리자 있잖아요. 정점에 누가 무슨 자리입니까? 왕의 자리가 있죠. 그래서 이 백성의 입장에서 그 인간들 입장에서 왕 자리는 “어디서 왕 따위가?” 라는 소리를 할 수 가 있었요? 없어요? 없어요. 왜 없느냐? 그들이 내심 원하는 그들이 하는 에너지 힘의 힘은 지금 이러한 염원은 이러한 희망을 가지고 그들은 이스라엘을 만들어 왔습니다.

자, 여기서 이제 첫 번째 나온 중요한 점 이러한 희망과 이러한 염원을 가지고 괜찮은 왕이 있으면 우리는 산다 해서 뭐가 안 나오느냐 하면 “어디서 왕 따위가?” 하는 말이 성립이 돼요, 안 돼요? 안 되지요. 왕이 왕의 자리가 있다는 것은 그 왕자리에 “좀 살려주이소.” 이런 염원이 포함이 되어 있는 자리에요. 이 염원이. “왕이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우리 개미 같은 아무것도 아닌 백성들 좀 살려 주세요.” 이리 된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건 역대기상하에서 보면 이 왕이 잘못된 게 아니에요. 이거 구분해야 돼요. 왕의 잘못이다. 이게 아니고, 왕이 가짜다. 이리 되어야 돼요. 왕이 가짜다. 왕이 가짜다.

자, 왕이 가짜가 되면 왕의 자리에 연연하면서 그 왕 괜찮은 왕을 하나님이 완전한 왕을 주셔서 내 잘 살게 하겠다는 이 구조 전체가 뭐가 돼요? 가짜가 되겠죠. 그 가짜 안에 누가 포함되어 있습니까? 이 백성이 포함되어 있지요. 백성들은 본인이 가짜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것을 본인이 인정하지를 못했습니다. 인정하지 못했어요. 내가 사는 게 가짜라는 사실을 깨닫지를 못했어요. 이런 게 열왕기상하에서. 또는 역대기 상하에서 깨닫지를 못해요.

그럼 가짜가 있다는 말은 진짜가 따로 있다는 뜻이겠죠. 열왕기 상하에서는 진짜는 뭐가 진짜냐? 진짜는 선지자가 품고 있는 숨어 있는 왕이 진짜겠지요. 그래서 열왕기상하에서의 선지자는 왕들을 보고 “제대로 해. 잘해 봐. 우상 섬기지 말고. 철폐하고 제대로 해보란 말이야. 하나님이 너 키워 줘.” 이게 열왕기상하거든요.

열왕기 상하에서 무슨 대목이 많으냐 하면 엘리사, 엘리야 대목이 많아요. 선지자가 부각이 됩니다. 선지자가 왕한테 제대로 조언해서 왕이 선지자 말을 잘 들으면 선지자가 하나님과 더불어 왕에게 괜찮은 왕 되기를 바라는 백성들까지 같이 편안해지는 그런 스토리가 이렇게 있어요. 그 왕이 잘못했 때 선지자가 조언하게 되면 선지자의 말 듣고 또 내가 회개한 이러면 또 백성 이스라엘 백성이 호전되는 그런 경우들이 이렇게 연결, 연결되면서 선지자를 강조하는 반면에 이 역대기상하는요, 아무리 선지자가 조언을 해도 그 왕은 말 안 듣습니다. 말 안 들어요.

그래서 요아스 왕 같은 경우에는 선지자를 돌러 쳐 죽여 버려요. 선지자 사가랴. 그래서 예수님도 아벨과 사가랴와 피가 피처럼 나도 너희에게 내가 맞아 죽는데 그 책임은 내가 너희에게 돌린다. 이 뒤에 뭐 하나 성경 안 나오지만 붙인다면 “이 가짜야!” 이 가짜야. 사람이 가짜라는 걸 본인이 가짜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더 이상 자기한테 기대를 걸 필요가 없지요.

우리가 자꾸 자기 인생에 남은 인생에다가 뭔가 몰빵을 하고 자꾸 희망을 거는 것은 적어도 가짜가 아니라는 자꾸 그러한 선입감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성경 전체를 보세요. 간단해요. 성경 전체 문장 하나 쓸게요. 성경 전체를 보면 이렇습니다. “말씀이 없으면 가짜다.” 맞지요. 말씀이 없으면 가짜에요. 성경 전체는 말씀이 없으면 가짜에요.

그런데 이 말씀의 진짜인 말씀을 가짜가 말씀 대형으로 그들 내부에서 조성해 내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이거예요. 말씀 대신에 그들이 대체하는 거. 윤리, 도덕입니다. 윤리 도덕. 윤리 도덕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윤리도덕을 끄집어냄으로써 인간이 뭘 자꾸 본인한테 확인하느냐하면 “나, 착하잖아. 나 여전히 착하네.” 이런 거.

그 나의 착함이 가짜인 줄 몰라요. 그건 하나님께서 그거는 버리라고 준 그 선함이 계속 내 안에서 샘솟듯이 계속 나와요. 내가 어떤 행동을 하면 사람과 하나님 보시기에 그다지 나쁘지 않은 착한 사람으로 내 인정받을 수 있느냐 그걸 계속 속에서 개발하는데 머리가 스트레스를 받아요. 오늘 또 어떻게 착한 나를 어떻게 이렇게 그걸 인테리어 어떻게 하면 내가 착함으로 나를 포장할 수 있는가.

그리고 성질 급할 때는 스스로 자기한테 자제를 시키지요. “침착해. 침착해. 너 자처하면 폭싹 드러날 수 있어. 너는 착해야 돼. 전화할 때는 뭐 어떤 말 할 때는 조심도 해야 되고, 누굴 만나도 말 조심해야 돼. 니 본색 들통나면 안 돼. 그러면 네가 쌓아놓았던 모든 상아탑이 다 모두 무너지는 거야.” 이거 하는데 스트레스를 많이 봤습니다. 고객~님~~ 이렇게 해가지고. 가짜 아니기를 가짜 아님을 스스로 설득시키는 24시간. 자기가 가짜가 아님을 설득시키는 24시간. 부부도 마찬가지에요.

“어디서 왕 따위가?” 라고 이야기하려면, 왕보다 더 높은 진짜 왕이 따로 있지요. 따로 있고 열왕기상에서는 바로 나를 대신해서 나의 증인으로서 왕들을 세웠다, 이래 되지만. 역대하에서는 진짜 왕을 알리기 위해서 그동안 가짜가 어떤 가짜 짓을 했는지를 가짜 왕들을 미리 깔아놓고 이런, 이런 점에서 너희들은 몽땅 가짜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식으로 이스라엘 역사를 내가 이끌어 왔다는 거예요. 이끌어 온 겁니다.

그러면 우리도 우리의 인생을 열왕기상하에다가 대입해도 되지만, 역대기상하에다가 대입을 해 봅시다. 그러면 우리가 10년 20년 30년 인생을 살면서 성령 받은 성도 같으면 어떤 아무리 눈치 고치 없더라도 무슨 낌새를 느껴야 되지 않습니까? 그 낌새가 뭐냐 하면은 이거예요.

더욱더 하나님의 기도의 응답은 이미 확정 났어요. 더욱더 가짜다워라. 이게 기도의 응답이에요. “네가 보여 줄 가짜가 그게 전부냐? 아마 더 있을걸?” 이런 거. “왜 실력이 없어? 가짜 흉내 내는 감이 요새 많이 떨어졌네.” 점점 더 나 자체에서는 진짜라는 것은 일체 안 나오고 가짜만 나온다. 나오게 하시는 것을 진짜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유도하셨다는 거. 그 관계. 진짜 하나님과 가짜의 나의 관계. 그 관계가 역대기에서 말하는 다윗 언약입니다. 이게 언약이에요. 그게 언약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왕 따위가. 어디서 건방지게.” 라는 말을 요걸 이제 바꿔서 나한테 하는 거예요. “나 따위가 어디서 건방지게.” 이리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역대기상하에 보면 뭐가 많이 나와요? 교만. 왕이 교만해서 잘렸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와요. 그런데 교만한 왕들이 대단하게 하나님께 칭송받을 짓을 많이 했던 왕들이에요. 이상하게 칭찬 많이 받으면 이게 왜 그게 교만으로 나오지요? 아~ 참, 그게 역대기상하에서 그것을 실습해서 보여 주는 거예요. 잘한다 잘한다 하니 이건 뭐 천지도 모르고 깨춤추고 있잖아요. 그 본성이 잠재되어 있거든요. 인간 속에.

그걸 인간이 본인이 해결이 안돼요. 그 병을 본인이 고칠 수가 없어요. 인간의 병은 하나밖에 없어요. 건방진 병. 아, 건방져도 괜찮은데, 이 건방짐이 나의 가짜 됨을 이거 원 없이 보여 준다. 이걸 그냥 받아들이면 그 병이 싹하고 그 병이 가셔져요. 없어진다고요. 신기해요. 진짜도 아닌 게 자꾸 가짜에 자꾸 하다 보면 어느새 그게 가짜가 진짜로 뭐 변한다는 줄 알고 그렇게 착각들을 하는 거예요.

자, 그러면 역대기상하에 초반부터 뭐냐 하면 아담의 족보가 나와요. 아담의 족보가. 참 이 대목도 참 어려운 대목인데 역대상 1장 1절 첫 단어가 뭡니까? 아담이지요. 아담. 아하! 참, 여기에 많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그 담긴 내용을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는 인간이 안 나와요. 첫 번에. 천지 창조가 나오죠. 첫 인간은 안 나오고 천지 창조가 나와요. 해와 달과 별이 인간보다 먼저 만들어졌어요. 먼저 만들어졌다.

그 점은 어제 수요 설교에서도 약간의 그 내용이 거기에 관련된 내용이 수요 설교에서도 나왔습니다. 자연은 답입니다. 자연은 답이에요. 자연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것은 자연들의 본인의 몫이 아니에요. 배후에 하나님께서 다루시잖아요. 그 질문자는 누가 되느냐? 질문자는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 질문자에요.

그러면 자연이 답이라면 창세기 1장에서는 자연 속에 누가 있습니까? 인간이 있지요. 그러면 인간은 질문할 수 있는 자격이 없어요. 질문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는 말은 뭐냐? 인간은 스스로 자기를 위해서 법의 제정자가 될 수 없다는 거예요. 나를 위해서 내 속에 양심이라는 것을 만들 자격이 인간 본인에게는 있어요? 없어요? 없다. 양심이라는 걸 만들 자격이 없어요. 양심을 자기가 수리하고 개선하고 관리할 자격도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인간은 물론 자연에게 개입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해 뜨는데 인간이 뭐 보태 준 거 있어요? 집사님이 보름달 뜨는데 막 잡아당기고 했어요? 없지요. 별 하나 없어지고 나타나는데 우리가 도와준 거 없지요? 없어요. 그런데 어제 수요일날 뭐라고 했느냐 하면, 인간은 자연에다가 뭐를 붙인다 했습니까? 명사를 붙인다 그랬죠. 명사. 별 하나 내 하나, 별 둘 나 둘, 너 둘, 뭐 이렇게 명사 이름을 짓지요. 명사를 붙인다고요.

명사를 붙이면 그 명사는 이름을 붙이는 자에 의해 소유처럼 그렇게 느껴져요. 착각이죠. 오해합니다. 나는 너를 꽃이라 부른다. 마치 꽃이 이름 부를 때 꽃은 쪼르르 쫓아와서 인간 앞에 부복하면서 나는 당신의 의미예요. 이래 해야될 의무가 꽃한테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제가 말하는 취지는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자연을 보는 그 안목과 인간이 자연을 보는 안목에서 틀어진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이게 틀어지는 거예요. 인간은 자연히 나의 생존을 보장해야 마땅하다는 것은 인간들의 일방적인 우김이에요. 이거는 터무니없는 이거는 도를 선을 넘은 거예요. 도를 넘은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아담이에요. 아담. 역대상에 있는 아담이에요. 아담.

아담은 지 할 일만 하는 게 아니고 아담은 자기중심으로 해서 자연을 가지고 자연을 관찰하고 거기서 빼먹을 걸 빼먹으면서 자연을 마치 자기 소유인양 여깁니다. 내가 자연의 주인인 양 창조자인 양 그렇게 간주하면서 살아가요.

왜냐하면 이 아담부터 해서 인간은 이거는 독립했다고 본인들이 자부하기 때문에 심지어 갓 태어난 아이들도 갓난아이도 그 내부에 뭐가 있느냐 하면 “나는 독립했다.” “나는 모든 출발을 나로부터 시작하기로 나는 작심했다.” 응애 우는 그 갓난아이가 이미 엄마의 탯줄을 끊으면서도 벌써 시작된 거예요. 그 훈련을 그 갓난아이 속에 들어있는 아담의 그 성깔. 성질이 그 꾀를 할 때 그 내부를 내부 세계를 그런 식으로 조작하게 만드는 겁니다.

여기에 대한 문장은 너무 간단해요. 너무 간단한데 간단하게 써보겠습니다. “인간은 악마다.” 너무 간단하죠. 인간이 악마다. 인간이 마귀다. 인간은 마귀인데 그 인간의 마귀가 만들어낸 마귀의 세계는 족보입니다. 족보. 혈통. 육적인 족보와 혈통. 아답,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에녹, 무드셀라 이런 쭉 쭉 쭉쭉 나가요. 쭉쭉 족보.

예를 들면 아담, 북극성 그 다음에 하마, 아답 이리 안 나오지요. 인간은 인간끼리 벌써 분류를 해요. 인간은 인간끼리. 인간의 족보란 특별한 우리끼리의 어떤 의미는 우리끼리 굳혀야 된다. 그 아집과 고집. 그 배후에 누가 그렇게 조종했습니까? 악마가 조종했지요.

악마는 인간을 조종합니다. 조종해요.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을 어떻게 하느냐면 조정합니다. 조율 한번 해 주세요~ 하지요. 조율 했어요. 어디까지 까부는가 한번 쥐었다, 폈다, 났다, 이렇게 당겼다 밀었다 하면서 조율하는 거예요. 악마하고 어디까지 놀아나나 보자. 조율하는 건 하나님이고, 직접적으로 조종하는 것은 마귀가 조종해요. 마귀가.

그런데 인간에게는 하나님도 없고 악마도 없어요. 왜냐하면 이미 독립했기 때문에. 인간이 스스로 독립했어요. 독립하면서 자기 노선 혈통적인 노선을 밑에 쫙 깔아갑니다. 쫙 깔지요. 제가 어느 그 부산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죠. 인간의 사적인 대화를 하게 되면 지 가족 이야기만 한다고. 자기 가족 이야기만 한다. 가족 이야기를 해도 우리 가족이 이래서 총체적으로 가짜인데 이렇게 시작하지 않죠. 이렇게 시작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도 해와 달과 별에 대해서 이야기를 운을 떼지 않아요. 자기 가족 이야기하는 거 중심이 자연에 있는 게 아니고 자기 가족에 있어요. 자연 따로 내 혈통 따로 이렇게 구분되고 말았습니다. 자연과의 괴리 현상이 일어난 거예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썰물 밀물에 그리고 초석간만에 그리고 해 뜨는 거, 지는 거 인간이 관여하지 않잖아요. 관여하지 않는데, 해가 인간이 관여하지 않아서 태양이 우리 보고 “좀 밀어주세요.” 이럽니까? 그렇지 않지요. 인간이 어떻게 생각을 갖고 어떻게 가족끼리 뭐 캠핑을 하든 어떻게 하든 관계없이 해나 달은 다른 분의 조정을 받고 있잖아요. 이 관계를 인간이 놓쳐 버리는 거예요. 해와 달과 별은 하나님의 조정받고 있다는 사실을 놓쳐 버리는 겁니다.

시편 19편 누가 한번 읽어 볼까요? 19편 1절에서 3절까지.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지요. 그 말씀이 온 세계 이르지요. 이 말씀을 함축하면 이렇습니다. “인간들아! 그거 봐. 우리 자연만큼 네가 따라올 수 있어?” 이런 거예요.

인간은 창세기에 보면 인간은 자연의 일부에요. 자연의 일부인데 인간 빼고 다른 자연은 전부다 하나님 말씀을 열심히 전하고 있는데 말씀 전하는데 인간하고 또 피조물 뱀하고 악마, 사탄 저들끼리 뭐 하고 있는 거예요? 도대체. 지금 딴짓하고 있는 거예요. 누가 착각하고 있는 겁니까? 누가 주제 파악 안 되고 있는 거예요? 마귀하고 인간은 주제 파악을 못 하고 있어요. 나머지는 자연은 지금 주님의 지시에 따라 잘 따르고 있는데.

사람이 화를 낸다. 성질낸다. 그 왜 성질냅니까? 간단하죠. 세상이 내 마음대로 안 되는데. 왜 세상이 네 마음대로 되어야 되는데요? 자연은 그렇게 하나님께 대듭니까? 자연스럽게 하나님께 대들어요? 왜 하나님께 따지고 이런 거 합니까? 자연은. 이미 인간 속에 악이 들어온 거예요. 자연스럽지 못한 악이 하나님께 반역한 악한 영의 마음이 인간 속에 들어온 말미암아 악마가 인간에게 하나님께 그 반발 반란을 일으킨 것처럼 거기 전부다 같이 인간도 같은 편이 되어가지고 하나님께 대적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로마서 5장에서는 우리를 가지고 하나님의 원수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원수된 자에요. 하나님의 원수 된 자. 인간=악마. 하나님 원수 된 자 하니까 뭐 그렇다 싶지만, 갑자기 인간이 악마라 하니까 막 수긍이 잘 안되지요. 눈만 뜨면 반발하고 화내고 불평하고 아침에 비 왔다고 짜증 내고 날 좋아서 놀러 못가고 직장에 간다고 짜증 내고. 뭐 뭐 그럼 어쩌라고? 어쩌라고? 그럼 얼마나 해 줘야, 얼마나 해 줘야 자연만큼 하나님께 그 인자하심을 표출해 내겠습니까?

해를 보라 달을 보라. 그 인자하심이 바깥으로 막 철 철철 흘러넘치잖아. 너는 꼴라당 땀 냄새만 넘친다. 진짜. 뭐 뭐 도대체 뭐가 흘러넘치느냐, 이 말이에요. 도대체. 불평과 불만이 흘러넘치잖아요. 그 원인을 알아야되지요. 원인을 알아야되는데 인간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스트레스받아서 못 살겠다.” 스트레스받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뭔가 단절돼 있어요. 뭐 어디 출발점을 간파를 못하고 있어요. 출발점을 인간부터 출발한 것 자체가 잘못이에요. 이건 하나님이 원한 게 아니고 마귀가 원했던 겁니다. 따지려면 마귀 보고 따져라, 이 말이에요. 마귀보고. 그런데 하나님 보고 따지도록 마귀가 뒤에서 조종을 하는 거예요. 조종을 하는 겁니다. 조종을하면서 항상 마귀가 우리 보고 “네가 원래 나쁜 사람이 아니고 어릴 때부터 나쁜 아이가 아닌데 환경이 너를 그렇게 만들었다.” 이런 식으로.

“우리 집의 개는 안 물어요.” 이거하고 똑같은 거예요. “우리 애는 사고를 안 쳐요.” 무슨 자신만만한 확신입니까? 그 엉터리 같은 확신. 우리 개는 안 문다고요? 나중에 집안에 기근이 나고 먹을 게 없어가지고 아버지 아들하고 서로 개처럼 으르릉 거려요. 케이크 두고, “내가 먼저 먹겠습니다. 아버지” “내가 먹는다. 으르릉.” 으르릉. 으르릉 으르릉 하는 노래 있지요. 인간 속에 개 있습니다. 개 본성이 있어요. 그래서 순수했던 자연이 인간의 죄값에 자연도 같이 휘둘리게 되고 휩쓸리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 때문에 말씀을 전하던 그 자연도 같이 불쏘시개로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자연이 잘되기 위해서 자연 속에 제대로 자연답게 하나님이 창조한 창조성 영광성답게 하도록 인간에게 책임을 부여한 게 창세기 1장 28절에 모든 것을 다스리라. 그 다스리는 건 어떻게 다스리냐? 인간이 다스린게 아니에요.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다스리죠.

그 하나님의 형상을 하나님이 인간과 분리시키고 인간들은 가짜라고 차버리고 진짜 하나님의 형상과 진짜 인간 되신 예수님을 결합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이 준비한 것은 다윗 언약이었습니다. 약속이 그만큼 중요한 거예요.

약속이 이 땅에 왔다는 것은 인간은 벌써 가짜라는 뜻입니다. 약속은 바로 말씀이 응축된 게 바로 약속이 응축된 게 꽉 짜여진 거. 그래서 역대기는 진짜인 말씀과 가짜인 인간의 대결 구조 싸우는 구조. 그렇게 역대기가 구성돼 겁니다. 인간은 이제 혈통 위주지요.

그런데 더 추가적으로 말씀드릴 게 있어요. 인간은 일방적으로 자연을 자기 거라고 옛날 버릇이 자연을 지배한다는. 그 인간이 자기가 신이니까 신이 자연을 지배하는 건 마땅하다. 따라서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건 마땅하다. 이런 생각을 하는데 자연은 이러한 인간 자체가 가짜기 때문에 자연은 누구 말을 듣느냐 하면, 언약 속에 어떤 분. 언약 속에 있는 어떤 분 숨어 있는 진짜 왕을 자연은 그걸 품게 된다.

품게 된다는 말은 그 마술사가 비둘기 끄집어낼 때 보자기 했다가 쏙 하고 안에 “요기 비둘기 들었지롱!” 하고 이렇게 내놓는 것처럼. 자연이 진짜 왕을 풀어내 주는 겁니다. 풀어 넣어 주면서 자연이 풀어 주면서 자연 안에서 가짜와 가짜 사이에 여기서 투쟁, 경쟁, 싸움 또는 전쟁을 자연 안에서 하나님께서 전쟁을 일으키는 겁니다.

이 전쟁을 할 때 표준이 뭐냐? 왜 다윗처럼 전쟁을 못하느냐? 요게 이제 역대기에서 표준이 돼요. 다윗처럼 왜 못하느냐? 다윗처럼. 특히 역대기 상하 같은 경우에는 뭐 앞에 있는 아담 뭐 뭐 아브라함 이야기 뭐 모세에게 조금 화려하고 족보고 균등 있게 족보를 양을 분배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을 다윗 쪽에 몰빵하고, 다윗 쪽에 부풀러 올라요. 그게 터질듯이 부풀러 올라요.

그 다윗 쪽에 부풀면서 역대기에서 강조하는 것은 이스라엘 하나님의 진짜 왕이 만든 이스라엘이 따로 있는데 가짜가 아니고 따로 있는데 진짜 이스라엘의 특징은 뭐냐 하면 이게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 아들이에요. 자연 세계 속에서 아들이 나올 수 있도록 그동안 가짜 이스라엘 속에서 언약이 작업을 해 왔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역대기상하에서.

그러니까 인간은 분명히 가짜라서 헛수고했다, 했는데 또 문장 하나 또 하겠습니다. 문장 하나. “하나님에게는 낭비가 없다.” 여러분 인생 전혀 낭비 없어요. 하나님께서 딱 딱 맞춰서 맞춤정장 있잖아요. 치수 딱 재서 딱 필요해서 어느 허비한 적 없이 완벽한 답. 아까 이야기한 답으로서 여러분들을 살게 하셨습니다.

세상에 이런 완벽한 가짜가 어디 있어요. 이런 가짜가 어디 있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가짜 아들에서 진짜 아들로 통하는 연결되는 고리를 가짜 속에 집어넣는 작업을 하지요. 가짜 속에 집어넣는 작업. 그것을 신약에 오면 그걸 열쇠라고 이야기해요. 열쇠. 천국 천국의 문을 여는 열쇠. 베드로가 보통 그 마태복음에서 열쇠를 가졌다고 했잖아요. 그림으로 한번 그려 보겠습니다.

열쇠를 그려보겠습니다. 베드로가 이 열쇠를 갖고 있다. 황금 열쇠. 한 돈짜리. 베드로는 열쇠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고 열쇠 일부예요. 베드로가. 베드로가 열쇠 일부가 되는 겁니다. 가짜가 없으면 열쇠가 성립이 안 돼요. 가짜가 없으면. 구약에 이스라엘이 없으면 신약의 이스라엘이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가짜 속에 빵꾸를 내서 진짜 천국 열쇠 입구를 출입구를 만들어요. 그 가짜는 배경이 되지요. 베드로가 이 구멍 사이로 통과해서 천국 갑니다. 가짜가 배경이에요. 그래서 주님은 낭비가 없어요. 실수가 없고, “아, 일이 잘못되었다. 새로 하자.” 이런 거 없어요. 모든 것이 협력해서 선을 이루십니다. 예수 안에서.
완벽하게 짜여진 것. 하나 빈틈없이. 철저하게. 이 완벽함 하나님이 생각하는이 완벽함 속에서 우리들의 반복되는 어설픔이 재료가 됩니다. 반복되는 어설픔과 실수와 실패와 낙담과 절망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 위로해 주는 것이 아니고 딴 거 아니에요. “뭐 어째서? 그래서? 뭐 어쩌라고? 아직도 이 절망을 덜했구나.” 이런 식으로. “아주 자기한테 희망 거른 거 봐. 가짜인 자기한테 진짜 될 거를 희망을 걸고 이 꼴을 봐. 이게 말이 돼?” 이런 식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몽땅 다 망했어.” 완전히 다 해체돼 버렸어요. 몽땅 다.

약속의 땅에는 한 명도 없어요. 전부 다 어딜 가느냐 하면 바벨론 제국 밑에 인간 같은 인간들은 거기 가버리고 나머지기는 찌기 같은 것은 각지로 다 흩어졌어요. 그래서 역대기 마지막은 뭐냐 하면 이겁니다. 땅 비워라. 땅 비워라.

여러분들이 그 식당에 식사하고 나왔는데 좀 가다 보니까 비가 왔어요. 비가 왔을 때 ‘아! 그때 내 먹던 테이블에 우산 놔두고 왔는데 우산 가져가야지.’ 다시 우산 가지러 가보면 그 테이블 어떻게 돼 있어요? 깔끔하게 없지요. 우산은 주인아줌마가 놔두고 갔는가 싶더라. 찾아주고 없지요.

나의 자리는 처음부터 없음의 자리였어요. 그걸 우리는 평생 동안 거기에 진수 성찬으로 온갖 먹고 싶은 것을 거기다 다 얹었어요. 고디나 다슬기나 약간의 잡채 또는 겨울철에는 대게 또 햄버거, 피자, 이런 거. 내가 먹고 싶은 거 죽 하지요. 죽고 난 뒤에는 싹 다 쳐버려요. 개근상 받았는 거, 우수상 받았는 거, 싹 다! 테이블 위에 아무도 싹 다! 교도소 일곱 번 왔다 갔다 한 거 싹 다! 싹다 다 날아갔어요.

왜? 하나님은 허비를 안 하니까. 어디 갔나 싶어 보니까 쓰레기통에 혼합되어 다 거기에 들어가 있어요. 그래서 모든 성경은요, 성령 받으면 뭐냐, 뒤돌아보는 해석이 돼요. 성령 받으면. 성령을 안 받으면 내 잘되기 위해서 성경을 보는데 성령 받고 난 뒤에는 뒤돌아보는 일이 다 끝나고 완성이 된 상태에서 내가 얼마나 인생을 불실하게 살아왔고 어설프게 살아왔고 말도 안 되게 뭐 오해 가운데 살아왔는지를 성경 말씀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보게 되면, 내가 기억했던 열왕기상하처럼 내가 기억했던 과거 현재 순서대로 내 인생을 보는 것이 아니고, 역대기 상하처럼 일이 다 포로잡히고 난 뒤에 싹다 약속의 땅을 비워놓고 난 뒤에 다시 이스라엘 역사를 회고하듯이 뒤돌아보게 되면 주님의 그 섬세한 손길이 없었던 적이 하나도 없지요. 그렇게 되면 ‘처음부터 나는 하나님의 것이었구나. 처음부터. 애초부터. 중간에 내가 주께 믿어서부터 백성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님의 것이었구나’ 하고 신약과 연결되는 겁니다.

“그럼 목사님, 우리는 어떻게 살면 됩니까?” 가짜로 살면 되고요. 실수하면 되죠. 실수. 그런데 실수할 때는 실수인지 모르는데 돌아서면 실수. 실수일 때가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그 뭐 물건을 잃어버릴 때에 그 옆에 있는데, ‘그걸 못 보고 왜 옆에 갔을까?’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 거예요. 주께서. 그래서 성령 받고 난 뒤에는 매사가 절대로 내 뜻대로 의도적으로 내 뜻대로 안 해 준다는 사실에 감사하게 될 겁니다. 의도적으로 내 뜻대로 안돼져요. “내 뜻대로 안 하고 주의 뜻대로 할래?” 그것도 내 뜻이 아니고 그것도 엉터리에요.

그냥 사시면 나는 어설프기 짝이 없고 그냥 사시면 그게 하나님의 낭비 없는 주님의 스케줄 일과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첫째시간에 마치면서 하고 싶은 것은 그냥 우쨌든간에 경상도 말로 나훈아 톤으로 우쨌든간에 성질대로 사세요.

자꾸 조정하지 말고 자꾸 조정하지 마세요. 그러면 속에 있는 마귀의 윤리 도덕이 살아나요. 자기 의가 살아나 가지고 갑자기 자기가 가짜에서 진짜 행세하는 더 큰 난관을 받게 되면 그다음부터 찾아오는 것은 마귀가 준비한 스트레스가 찾아옵니다. 10분 쉽시다.

 

 

 

안양20250911b역대상17장13절(제3의 요소)-이 근호 목사

첫 번째 시간에 역대상하의 전체적인, 열왕기상하와 비교하면서 전체적인 이야기했는데, 두 번째 시간에서는 직접 역대기상하를 직접 한번 보겠습니다. 보기 전에 나눠드린 교재에요. 북이스라엘 통치 그다음에 남유다 통치 그것도 보셔도 좋은데 저는 뭐를 주목하냐 하면 왕과 왕 사이에 남쪽 북쪽 유다 이스라엘 사이에 있던 이 선지자들이 이렇게 걸쳐 있다는 거예요. 이렇게 걸쳐 있지요. 선지자가 걸쳐 있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악을 알라 하지 않고, 선을 알라 하지 않고, 선악을 아는 지식이라 했어요. 선악을 아는 지식일 때, 이게 A를 선이라 하고, B를 악이라 할 때, A와 B 두 가지밖에 없잖아요. 두 가지가 이렇게 같이 결합돼 있을 경우에는 제3의 요소가 나타나지 않아요. 제3의 요소가.

인간은 이미 제1, 제2의 요소로서 하나가 되게 되면, 구원받을 거냐, 구원 안 받을 거냐, 천국 갈 거냐, 지옥 갈 거냐, 이것만 계속 줄곧 그것만 생각하게 된다, 이 말이지요. 제 3의 요소를 생각 못 해요.

제 3의 요소가 뭐냐 하면, 내가 죽어서 지옥 갈 거냐, 천국 갈 거냐, 하는 그 인간 자체가 날아간다는 사실 그게 제3의 요소예요. 천국, 지옥, 극락, 이런 것들을 생각하게 되면 이거는 어떤 경우라도 나 자신이 안 날아가요. 이게 마귀의 조종을 받고 있는 거예요. 그런 종교의 조종을 받고 있는 거예요. 구원받는 당사자가 구원에서 빠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해야 돼요.

구원에서 빠져 있지 않으면 구원의 대상이 안 됩니다. 구원은 제3의 요소로서 다가와서 제3의 요소에 갈 수 없는 것을 자기의 요소로서 하나의 집어넣는 방식으로 이게 구원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선악을 하나에 묶어요. 묶고 선악을 묶어 버리면 인간은 이 선과 악의 대립 안에서 빠져 있기 때문에 선이냐 악이냐 그 안에서 투쟁하고 갈등하고 몸부림치기 때문에 이 바깥에는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 선의 끝은 천국이고, 악의 끝은 지옥이기 때문에 인간의 한계로서는 이 선악 안에서만 이게 갇혀 있는 꼴이 돼요.

그런데 요한복음 같은 경우에 요한 1서 같은 경우에 특히 뭐냐? 선악 말고 따로 마련된 게 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생명이 있어요. 생명. 그러면 인간에게는 생명 하면 이거는 뭐라고 봅니까? “어? 선한 거.” 이리 나오지요. 그러니까 인간이 문제가 되는 거예요. 생명은 선한 것, 생명 없는 것은 악한 것.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어떤 말씀을 줘도 그 받아들이는 인간의 입장에서는 그 바탕이 받아들이는 그 수단이 선과 악의 지식에 입각해서 받아들이지요. 구원이 될 수가 없습니다. 구원이 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오시니까 예수님을 없애 버렸어요. 예수님이 없어져야 뭐가 남아요? 예수님을 죽이는 것은 잘했다는 선악 구조가 여전하게 남기 때문에 예수님을 없애 버렸습니다. 그게 이제 이 마귀의 권세가 그렇게 한 거죠. 바리새인은 마귀의 자식이니까. 너희 애비는 마귀다 했잖아요.

그러면 유대인을 통해서 십자가를 통해서 인간들이 확인하고 또 확정을 한 사실은 선악 구조가 맞다. 그리고 그게 전부 다. 우리는 그 안에서 할 것은 악에서 벗어나서 어떻든간에 어디로 돌진하면 된다? “악에서 벗어나서 선으로 돌진하게 되면 여기서 하나님은 우리를 천국에서 우리를 기다린다.” 이 인식. 이 인식으로 굳어져 버렸어요. 인식으로 굳어졌습니다.

그러면 이게 악에서 선으로 나가면서 거기에 매개체 또는 매체 또는 실체, 실체는 바로 누가 되느냐 하면, 바로 나가 되겠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으심으로서 선악체계 안에서는 예수님이 계십니까? 안 계십니까? 안 계시는 거예요. 선악체계에서는 예수님이 안 계셔요. 추방 당했으니까. 예수님은 따로 생명이라는 걸 따로 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추방하면서 어떤 구멍을 만들었지요. 구멍을 만들었어요. 그 구멍이 뭐냐 하면 선에 의해서 죄로 규정됨. 악에 의해서 죄로 규정된 게 아니고 인간이 선을 추구하는, 인간은 악하다 선하다가 아니라 선을 추구한다는 것 그 자체가 인간에게서는 이미 모든 인간에게는 굳어졌지요.

이 선악 체제 안에서는 악은 될 수 있는 대로 버리고, 뭘 추구하면 된다? 선을 추구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주신다. 이걸로 이미 굳어졌잖아요. 그렇지요? 애부터 어른들까지 여기서 못 벗어납니다. 그 선의 집대성. 완성에 의해서 주님께서 추방이 돼 버렸다, 이 말이지요. 추방이 된 거예요.

그것도 그냥 한 것이 아니고 죄목이 있지요. 하나님을 모독한 죄. 메시아도 아닌 게 메시아라고 행세한 죄. 하나님의 율법을 모독한 죄. 더 나아가서 귀신 들린 자. 여러 가지 죄목을 붙여서 예수님께서 빠져나왔습니다. 빠져나올 때에 제자들이 거기서 어떤 적극적인 노력도 하지 못하고 많은사람들도 거기에 대해서 어디 말릴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빠져나오는데 거기에 동조하거나 합세해서 같이 빠져나갈 위인은 이 땅 있었다? 없었다?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무도 없어요.

그래서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처소를 마련하게 되면 그 다음에 내가 다시 너희로 가서 나 있는 곳에, 한번 적어볼게요.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이거 받아들이면 여러분 지금 자살해도 괜찮아요. 그만 살아도 상관없습니다. 인생이 어떻게 꼬라박든 아무 의미 없어요. 왜냐하면 이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기 때문에. 내 있을 곳은 주님이 따로 이미 마련해 놓았기 때문에 이 땅에 내 있을 곳에 연연하면 안 되죠. 연연하면 안 되죠.

그런데 우리의 있을 곳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주님이 어떤 제자들도 한 명도 자기 따라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해요. 중요합니다. 베드로는 자기 장소를 생각해서 어디로 갑니까, 하고 따라 붙이려고 했는데 주께서 베드로마저 천국의 열쇠 된다는 베드로마저 “오지 마! 오지 마!” 이래 되죠. 아무도 갈 수가 없지요. 이게 얼마나 모순입니까? 아무도 갈 수가 없다는 말은 아무도 자기 몸둥아리를 쥐고 예수님 따라갈 수 없다는 말이에요. 그 자아를 가지고 주님 따라갈 수 없다는 말이에요. 이게.

우리의 자아는 베드로가 이미 대신해서 다 이야기했어요.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다시 말해서 “나라는 인간은 주님을 버리기 싫습니다.” 라는 고백을 이미 했잖아요. 얼마나 이게 근사한 고백이에요. 얼마나 기특한 고백입니까? 주께서 그거 용납했어요. 어떻게 했습니까? 거부한 거예요. “따라오지 마. 네가 갈 곳이 못 돼.” 그러니까 나는 죽어서 갈 곳이 있다는 생각 자체가 너는 갈 곳이 없는 조건이 돼 버린 거예요.

나를 살리겠다는 그 생각 자체가 갈 곳이 있다는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자는 천국에는 오지 못하는 곳이 천국이라는 것을 이미 주께서는 확정을 지어 버렸던 거예요. 그 말은 뭐냐 하면 내 자리도 내가 생각해서는 안될뿐더러 더 중요한 것은 이 문제입니다.

이게 자아 자체가 하늘에서 안 받아준다는 거예요. 나라는 인간 자체를 안 받아 준다는 거예요. 나라는 자체를 하늘나라에서 안 받아줘요. 이게 우리가 선악지식을 받았다 하니까 우리는 어떻게 오해하느냐 하면 나는 멀쩡한데 문제는 선악 지식이 달라붙었으니까 이걸 강제로 떼어내면 멀쩡한 나가 오롯이 온전하게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오해한 거예요.

그런데 선악 지식은 앞에 뒤에 뭐가 붙어요. 뭐냐 하면 네가 그걸 따먹는 날에는 정녕 어떻게 된다? 죽음이죠. 그러면 하나님의 계획은 뭐냐? 선악지식을 먹으면 이 나라는 이 자아가 뭐로 전환돼요? 죽음의 재료가 될 뿐이에요. 주께서는 이 죽음을 바라고 있는 거예요. 죽음을 얻고자 하는 거예요.

내 자아가 그렇게 보고 싶은 게 아니고 죽음을 보고 싶은 거예요. 왜 죽음을 보고 싶으냐? 뭐든지 이 세상은 이 피조 생활은 내 말한 대로 그대로 된다는 점을 하나님 아버지는 만족하게 되기 때문에. 관점을 하나님 관점으로 바꾸세요.


하나님의 관점은 말씀이 말씀대로 이루어지면 그만큼 하나님이 안식되는 게 없어요. 만족한 게 없어요. 하나님께서 그냥 농담 던진 게 아닙니다. 먹는다면 정녕 죽으리라 할 때, 우리는 내 입장에서 생각해가지고 ‘아하, 먹지 말걸. 바보같이 왜 먹는데?’ 하는데, 주님은 그 죽음을 놓치지 않습니다. 죽음조차도 완성이 돼야 돼요. 죽음조차도. 우리는 거기에 재료가 될 뿐이고, 죽음을 죽음답게 하겠다는데 이 아담이 재료가 되는 거예요.

지난 오후 설교 때 초반에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오후설교하면서 에돔에 대해서 설교했지요. 그 오후 설교의 첫 그 문장이 그거였어요. 그들은 주님 앞에 놀아났다. 주님 앞에 놀아난 거예요. 모든 인간은 주님 앞에 농락당한 겁니다. 그 농락당함을 아는 자가 성도예요. 그게 그렇게 즐거운 거예요. 하나님께서 마음먹고 나를 농락 시키는 게 그렇게 즐거운 거예요.

그래서 어린애들의 특징이 그거는 뭐냐? 어린애의 특징이 어린애가 가볍다고 아빠가 막 들고 이렇게 하고 물론 위험하지 않도록 침대나 이불 위에서 약간 붕 띄우고 다시 받고 할 때 애가 막 슬퍼서 막 공포스러워서 웁니까? 어떻게? 까르륵~ 까르륵~. 아빠 더 해 줘. 더 해 줘. 비행기 태울 때 손잡고 우우~~하고 태우면 애가 좋아서 환장을 하잖아요.

왜? 무중력을 느끼니까. 무중력. 힘센자에 붙어서 그 힘센자에 끌려가는 그 가벼움. “운전기사님은 주인이 있습니까?” 그걸 우리 자신에게도 물어야지요. “과연 내가 주인입니까? 아니면 우리에게 주인이 있습니까?” 만약에 우리에게 주인이 있다면 일기장에 쓰세요. 2025년도 9월 10일 오늘 날씨 참 좋다. 내용은 까르르 까르륵. 뭐 또 무슨 내용이 필요해요? 딴 내용이 뭡니까? 까르르 까르르 웃다가 설거지 그릇 2개 깼다. 더 까르르 까르르. 애가 취직이 또 떨어졌단다. 까르르. 까르르.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라고 할 때 이제 죽음에 불과한 우리에게 처분, 이 처분이란 말이 적당한데, 처분은 일방적으로 완전히 누구한테 넘어갔습니까? 우리 주님한테 넘어갔어요. 완전히 넘어갔어요. 차단돼 있으니까.

그래서 그럼 성도는 뭐냐? 예수님이 생명 되신 예수님이 나는 길이요, 진리고 생명이니 예수님이 생명이에요. 길이 되시고 진리 되시고 생명 주심이 선악 체제와 섞였을 때에 어떤 독특한 증거와 흔적을 보여 주느냐 그게 바로 성경에서 성도에 대해서 기재하는 내용이에요. 주님이 당했던 것과 똑같이 당하는 경험이 공통적으로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느냐를 보는 겁니다.

베드로전서 2장 21절. 주님께서 십자가 지신 이유는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심이라. 그 자취를 밟아오게 하심이라. 그렇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선악 체제를 주님은 오늘날 우리에게 강화시키죠. 강화시킵니다. 강화시킴으로써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선악체계 식으로 천국 간다는 오해를 하지 않도록 선악체계 식에서. 선악체계 자체가 내가 없어진다도 맞지만, 없어지는 정도가 아니고 ‘내가 없어짐’ 이게 정답이 아니고 ‘내가 죽었음’ 이게 정답이에요.

보통 인간 사이에서는 죽음은 없어지잖아요. 아니에요. 살아 있으면서 죽음을 나타내는 이 기능을 주께서 하게 됩니다. 그게 바로 성도가 보여주는 기적입니다. 성도는 멀쩡히 죽어있는데도 본인이 살아 있다고 계속 말하는 놀라운 특이성이에요. 성도의 시그니처라고 할 수 있는 어떤 개성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흉내 낼 수 없는 누가 따라올 수 없는 거.

자,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했으니까 여기서 이제 응용문제를 내가 내야 여러분들이 이해했는지 안 했는지 이걸 잘 나타날 수가 있거든요. 응용문제를 냅니다. 응용문제 내기 전에 수학정석에도 이제 본문 문제 있고 응용문제 있어요. 다시 한 번 이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환경이란, 주님을 떠나보낸 환경 속에서 그 환경의 속성, 선악적인 속성은 어떻게 나타낼 수 있는가, 이걸 알아야 될 이유가 우리가 성도라면 주님 가신 것과 공동 체험을 해야 되기 때문에 이 문제가 의미 있는 거예요. 이제 문제 나갑니다.

오늘 아침에 그 다음에 떴던 한 문장인데 쓰겠어요. ‘(고)김수미의 며느리가 한국을 떠나기로 했다.’ 요걸 통해서 복음적으로 설명해 보세요. 이게 문제에요. 이건 뭐 과거 시험지보다 더 어려운 문제지요. 우선 (고)김수미부터 알아야 되겠지요. 전원일기에 나왔던 그런데 내가 여러분 답변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문제가 너무 난해하기 때문에. 김수미라는 그 연예인이 죽은 탈렌트가 이야기가 왜 뉴스시간에 왜 그게 나오는가 하는 문제예요. 도대체 세상이 어떤 세상이기에 김수미 이야기가 아직도 등장하고 그게 용납이 되는 세상인가를 보자 이 말이지요.

이 세상이 관심사가 어디에 두기에. 어디에 두기에 김수미 이야기가 뜨느냐 하는 거예요. 인간들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거예요. 이걸 분석을 함으로써 지금 내가 하루, 하루 살면서 나는 주님 가신 길을 공동 체험을 하고 있는지를 자신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고)김수미 며느리가 한국을 떠나기로 했다, 라는 것이 일반 성령 받지 않는 일반 사람들에게는 이게 어떻게 다가옵니까? “고래? 어! 그런 소식은 처음 듣는 소식인데.” 이리 나온다고요.

그 말은 돌아가신 김수미라는 탈렌트. 교회를 예수를 잘 믿었대요. 어쨌든. 성질은 이상해도. 그 사람을 용납하는 세계가 있잖아요. 용납하는. 껴안는 세계. 우리에게 한 때 인기를 얻었던 그 사람을 용납하는 세계에서 어떤 공통체험을 원하느냐? 역시 이 세상은 우리가 살 만한 세계라는 공통 체험을 그들은 스스로 포기할 줄을 모른다는 사실이에요.

김수미 이야기가 뉴스에 뜨는 것을 우리는 충분히 기쁨으로 그걸 용납하고 영접하겠다는 거예요. “그게 뭐 어때서? 우리는 그 연예인 덕분에 우리는 재미나게 살아갔는데. 그게 뉴스거리 아니면 뭐가 뉴스거리가 돼.” 이런 식인 거예요.

그런데 김수미 며느리가 한국을 떠났다. 김수미 며느리가 여기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김수미 아들이 사기를 쳤다, 이 말이지요. 사기를 쳤는데 김수미가 사기친 아들을 아들로 여기지 않고 자기 며느리에게 자기 귀한 평창동에 자기 집을 그 며느리한테 다 줘 버렸다는 이 말이죠. 그래서 김수미가 죽을 때 며느리가 그렇게 오열하면서 애통해했다는 뉴스에 떴다, 이 말이지요.

그래서 이제는 김수미 며느리는 이제는 그 시어머니가 공짜로 줬던 집을 버리지 않고 행복하게 한국에서 팬들을 위해서라도 살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디 간다? 미국으로 떠나버린다. 청산하고 떠나버렸다. 남편과 이혼하고 이름이 해림인가 하여튼 있어요.

자, 문제는 이거예요. 이 이야기가 “목사님, 우리는 성도라서 관심도 없습니다.” 이렇게 하잖아요. 지금 그걸 묻는 게 아니고 왜 이 이야기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뉴스거리가 되느냐 하는 거예요. 이것도 뉴스거리냐 하고 만약에 이걸 시비 건다면 그러면 당신이 보는 사는 세상은 당신은 어떤 관점에서 어떤 토대에 의해서 이 세상을 평가할 것입니까? 그 평가에 대해서 여러분이 내놓으세요. 이게 문제잖아요. 이게 문제라고요.

이걸 왜 제가 문제를 제시하느냐 하면, 우리가 말씀들을 때는 말씀에 관심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러나 말씀이 떠나 버리면 뭐가 우리에게 뭐가 강하게 느껴지느냐 하면 자아성이에요. 자아성. 우리가 자아가 강렬하게 작용해요. 강하게 작용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사는가? 자아 중심주의가 됩니다. 그렇죠? 자아 중심주의가 되겠지요.

자아중심주의가 되게 되면 이건 필히 뭐가 나오느냐 하면, 이게 선악중심주의가 돼 버려요. 선악 중심주의. 내가 구원받는데 있어서 나는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길을 따라갈 것인가? 이렇게 되겠죠. 그러면 이 구원 문제가 주님한테 이미 다 넘겨진 게 아니고 일부 도로 어디로 왔어요? 이게 내 문제로 돌아왔지요. 내 문제로. 내 문제로 돌아왔다고요.

그러면 아까 그 문제를 다시 돌아보는 겁니다. (고)김수미 며느리가 한국을 떠나기로 했다. 그러면 어떻게 돼요? 그거 참 흥미로운데. 이리 되어야 되지요. 누구야? 기자가 누구야? 내가 몰랐던 소식을 전하는 게 누구야? 그렇게 거기에 관심을 보이는 겁니다. 관심을 보이면 우리에게 어떤 게 남아 있느냐 하면 이미 주님께서 우리 자아한테 우리의 구원을 안 맡겼잖아요. 일방적으로 가져갔으니까.

그러면 어떤 문제가 되느냐 하면 왜 주님은 나의 구원 문제에 대해서 내가 신경 쓰도록 안 하시는 방법이 뭐냐가 주님 쪽에서 이미 그게 정해 놓았다, 이 말이에요. 말을 2중 3중 꼬아가지고 지금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우리는 모든 구원이 주님께 넘어갔겠다는 그게 이론상 지식상 우리는 받는데 그게 지식으로 받아버리면 선악 지식이 일부가 돼 버려요. 같은 류가 되어버려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흠뻑 좋아하고 우리가 같이 친하고 싶은 것을 친하게 할 때, 거기서 우리에게서 뭘 하느냐? 제 3의 요소를 따로 뽑아내는 거예요. 제3의 요소를.

나는 이제 선악적 지식의 세계에서 떠난 사람이다. 앞에 뭐가 붙어요? 나는 떠난 사람이죠. 나는 떠난 사람이다. 그다음에 너 또는 너희들. 너희들은 뭡니까? 이 세상이죠. 이게 복음을 모르는 세상. 복음을 모르는 너희들은 선악체계 그대로 머물러 있다. 이리 되지요. 이게 뭡니까? 이게 바로 대립관계에 있는 2자 요소가 되지요. 2자 요소. 제 3의 요소가 안 되지요. 제 3의 요소가 안 되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평생 죽을 때까지 2자 관계를 우리에게 유지시켜요. 유지시키면서 수시로 네가 생각 못한 네가 선악 지식으로 생각 못한 제 3의 요소를 그때, 그때마다 우리에게 제공해 주는 겁니다. 제공해 주는 거예요.

그러면 그 방법은 뭐냐? 아까 방법은 그대로 한 거예요. 나는 오직 주님의 말씀만 생각하고 나는 연예인도 모른다. 그런데 어? 뉴스에 보니까 (고)김수미 며느리가 한국을 떠나게 되었다. 이미 그 남편하고. 남편하고 왜 이혼했데? 사기 쳐서 했다. 그 다음부터 김수미가 화를 내서 내 자식 아니라고 했다. 그 뒤쪽에 죽 나온다고요. 뒤쪽에 나오는 걸 이미 나왔다는 데서 2자 요소에 있는 이 내 육신 있잖아요. 내 육신. 육신이 안 끌릴 수가 없어요. 끌리게 되어있다. 이미 알아버리면 거기에 남한테 안 들킬 정도로 들키면 안 되니까. 완전 복음만 생각하고. 안 들킬 정도로. 이게 끌리게 되어있어요.

그럼 이제 끌리게 되니까 어떻게 돼요? 2자 관계. 나는 선한데 이쪽은 악이잖아요. 연예인 세상은 악이잖아요. 악을 버리고 뭘 추구한다? 선을 추구하지요. 이게 바로 우리의 신앙의 한계잖아요.

그러면 제3의 요소가 뭡니까? “니도 똑같아.” 이게 바로 생각도 못한 제3의 요소가 되는 겁니다. “네가 똑같아. 마찬가지야. 별날 것 없어. 대단하지 않아. 니가 뭐 대단한 거 같아? 베드로도 따라오지 마라 했어. 순전히 주님의 솜씨야.” 그리고 네가 순수한 너로 그러니까 진짜 죄인이 아니라 순수한 나로 남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바로 복음을 모르는 세상 속에 너를 한 군데다 탁 놓아두고 온갖 뉴스와 모든 것들이 나를 시험 들게 만드는 그런 노선으로 가득 차게 만들었어요.

우리는 그 시험을 내식으로 이긴다고 저걸 거부하고 오직 말씀에 추궁하지만 그게 바로 바리새인이 했던 악을 버리고 나는 선하니까 선한 나를 따로 거기서 물들지 않고 빼내기 위한 그 치열한 그 신앙적인 투쟁 그게 바로 마귀 자식들이 한 일이에요. 마귀 자식들이.

그냥 사세요. 아, 정말 그냥 사시면 돼요. 그냥 사시면 돼요. 이게 땅의 문제였습니다. 역대기상4장 10절, 야벳의 기도. 한때 유행했는데 요새 유행 덜 하고 있어요. “아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가로되 원컨데 주께서 내게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기를 넓혀 쓰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를 환난에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이거 이게 바로 열왕기 상하에는 안 나와요. 역대 상하에 나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첫째시간에 제가 이야기했지요. 인간들이 그 투쟁하는 모든 집착과 집념은 바로 이 약속의 땅에서 자기가 사는 것. 그것이 바로 가짜 인간입니다. 가짜. 이 이야기는 어디서 나왔냐 하면은 그 땅을 얻겠다는 말은 그 땅에서 평생 동안 살겠다가 아니라 아까 첫째 시간에 한 것처럼 족보, 혈통. 나는 죽어도 혈통이 살아 있으면 이 땅에 살아있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계약 안에 속에서 생존하는 것이 된다.’ 라고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던 거예요.

그래서 땅을 원했던 겁니다. 나는 죽고 땅은 있고. 역대상 10장 13절. 이러다가 역대기하까지 다 가버립니다.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함이라. 저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시접한 여인을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함으로 여호와께서 저를 죽이시니라 되어있지요.” 사울이 여호와를 묻지 않았습니까? 정말 한 번도 안 물었어요? 초반기에 물었잖아요. 심지어 왕 되기를 거부했잖아요.

이것은 뭐냐 하면 역대상하에서는 특히 역대 상에서 사람들이 역대 상을 보면서 열왕기상도 약간 관련되어 있지만, 제일 이해 못하는 것은 처음에는 잘하는데 왜 잘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주셨으면 끝까지 잘하도록 왜 끝까지 은혜를 안 주셨느냐 하는 문제에요.

왜? 좀 도와주면 처음부터 도와주면 끝까지 도와줘야지. 왜? 왜 그들이 자꾸 나락에 떨어지도록 하느냐, 이 말이에요. 나락에. 이스라엘의 그 사람들의 성군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여호사밧, 그다음에 요아스, 히스기야, 그다음에 요시아왕 결국은 어떻게 됩니까? 나락가 떨어지잖아요.

심지어 미리 한번 당겨 봅시다. 역대하 35장 21절, “느고가 요시야에게 사절을 보내 가르되 유다 왕이여 내가 그대와 무슨 관계 있느냐? 내가 오늘날 그들을 치르는 것이 아니요 나로 더불어 싸우는 족속을 치르는 것이라 하나님이 나를 명하사 속히 하라 하셨은즉 즉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그대는 하나님을 그 다음 뭡니까? 거스리지 말라. 했지요. 이 느고가 누구냐 하면, 애굽의 왕이에요.

애굽의 왕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이 말이지요. 전하니깐 요시아 왕은 그게 하나님의 말씀인 줄을 모르고 “너는 아니야. 내가 말씀을 내가 정통적인 노선이야.” 라고 하면서 “너는 하나님 적이니까 내가 나와서 싸워야 된다.”라고 하니까 누가 말려요? 적이 말린다고요. 하나님까지 동원해가면서.

“아저씨, 이러지 마세요. 내가 당신을 말립니다. 이게 하나님의 뜻이에요.” 해도 안 듣습니다. 이건 뭡니까? 인간의 한계를 소위 성군이라고 하는 요시야를 통해서도 보여줍니다. 이거는 히스기야도 마찬가지에요. 32장 25절, “히스기야가 마음에 그 다음에 뭐 나옵니까? 교만하여. 성경이 나오는데 우리가 한번 이게 이걸 다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 교만 안 합니까? 교만이 뭐냐 하면 그 뒤에 나와요. 교만이란 말은 이리되어 있어요. 그 받은 은혜를 보답지 아니한다 했지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해와 달과 별처럼 청안합니까? 마음이. 날은 날마다 하나님의 소식만 전해요? 이게 왜 인간의 마음이 안 그러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자연을 중간에 두고 자연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과 그 자연을 인간이 자기중심으로 자기 살길을 위해서 자연을 이용하겠다는 그 마음을 자연을 경계로 해서 두개의 대치 관계를 만들었어요. 그리고 그 인간 때문에 그 자연도 같이 불시할 사람을 망하도록 그렇게 조치를 한 겁니다.

그러니깐 인간의 역할은 뭐냐? 결국 교만에 빠져야 되는 역할을 인간이 맡은 거예요. 인간 내가 완벽한 인간다운 인간 그거는 주님께서 이미 다 아버지를 만족시켰습니다. 내가 교만 안 하려고 애쓸 필요 없어요. 주께서 다 하셨던 거예요.

그 예수 안에서 우리가 구원받지,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아서 예수님도 잘났지만 나도 잘났다. 이런 식으로 구원되는 법은 없어요. 그러니까 이 역대기에 나오는 왕들. 이 모든 이런 많은 사람들은 바로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던 마음가짐을 앞당겨 보여주는 선배 격들이죠. 선배들이죠. 그리고 또 여기서 우리가 성경에서 어려운 것은 그 방금 교만했잖아요. 방금 히스기야가 교만했지요.

교만했는데 32장 26절 봅시다. 교만 분명히 했어요. 그다음에 히스기야가 마음에 교만함을 그다음에 뭐라고 돼 있습니까? 뉘우쳤지요. 여기서 또 성경 해석이 또 어려운 거예요. 왜 히스기야는 뉘우치게 만들어줬고 왜 다른 사람은 왜 안 되는데요? 답변해 보세요.

누구는 무 뿌리 먹고 누구는 인삼뿌리 먹고 하는 말이 있듯이 왜 일관성이 없어요? 왜 다 같은 죄인인데 왜 다른 사람은 뉘우침이 있고 왜 다른 사람은 안 뉘우치고 계속 교만으로 계속 끝까지 주께서 가게 하는 이유가 뭐냐? 이유가 뭐냐?

그것은 제3의 요소를 2자 관계에 있는 선악 체제 안에 있는 자가 “나는 이렇게 해 주세요.”라고 요구할 권한이 없음을 분명히 하는 거예요. “아, 저 사람 뉘우쳤구나! 그럼 나도 저 사람처럼 뉘우치게 해 주세요.” 이러한 권한이 선악이라는 대립 구조에 있는 사람은 선악체계 바깥에 있는 제 3의 요소를 잡아당길 수 있는 어떤 권한을 부여한 적이 없습니다.

만약에 그게 부여가 되게 되면 선악체계에 있는 자아가 정녕 죽으리라 하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에 이게 충돌을 일으켜요. 정녕 죽어야 되지. 죽을 뻔했는데 뉘우치고 살았다는 것은 이거는 이런 일은 없어요. 그 성경 보는 우리가 기대사항이지, 희망사항이지 그런 건 없어요. 항상 제3의 요소가 들어와야 돼요. 제3의 요소.

그러면 히스기야가 뉘우쳤으면 그다음 또 문제 나와요. 자꾸 문제 나와요. 히스기야가 메시아입니까? 뉘우쳤습니까? 안 돼요. 그럼 히스기야는 뉘우치고 난 뒤에 이익은 뭐냐? 곱게 죽는 거죠. 그냥. 까불지 않고 “죽을 만해서 죽이시는구나!” 곱게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 다음에 계속 봅시다. 그 다음에 역대상 6장1절 누가 한 번 읽어볼까요? “레위의 아들들은” 됐습니다. 지금 레위의 아들들은 나오지요. 이게 뭐냐 하면 중심을 역대상하는 중심을 다윗 왕국 중심이에요. 다윗 왕국 중심에서 그 어선들이 그물에 고기 잡히면 어떻게 돼요? 그 그물을 막 신나게 잡아당기죠. 다윗 성전 중심으로 신나게 과거에 있던 모든 열두지파를 족보를 다윗 유다 지파로 쫙쫙!! 끌어당겨요. 끌어당깁니다.

그렇게 해서 다윗 왕에 의해서 레위 지파가 통제받고 지배받는 걸 정당화하는 그 근거를 이렇게 이스라엘 역사를 뒤돌아보면서 그런 조치가 성전에서 일어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나오는 문제 또 생기지요.

다윗은 지 할 일 왕 만하면 되지, 왜 레위지파까지 지가 지배하고 난리냐, 그것은 다윗이란 인격이 뭐로 바뀌느냐하면 이걸로 바뀌어요. 이 역대기상하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인데요. 다윗이 성전을 못 짓습니다. 역대기에 보면 피를 많이 흘려서 적절하지 않다. 그러면 누가 성전을 짓느냐? 솔로몬이 짓는다, 했잖아요. 솔로몬이 짓는다 하지 말고 여러분 바꿉시다. 다윗의 아들이 성전을 지어요.

그러면 성전 짓겠다는 것은 누가 그 법을 만들었어요? 아버지가 법 세웠지요. 실제로 이룬 것은 누가 이룹니까? 아들이 이루지요. 아들로부터 다시 아버지의 계약이 완성이 되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완성되면 여기 남는 건 뭐냐 하면 성전이지요. 성전은 나중에 불타 버립니다. 불타도 이게 역대상하의 특징은 아까 가짜라 했지요. 가짜. 가짜 성전은 불타야 돼요. 가짜 성전은 불타고 대신 진짜 성전 나타나는 게 아니고 가짜 성전이 불탐으로써 숨겨져 있는 진짜가 이제사 나오는 방법. 이제사 나오는 방법.

첫째 시간에 한 거 다시 해 볼까요? 가짜 인간을 죽이고 그 대신 진짜 인간을 세우는 게 아니고 가짜 우리를 죽이는 쪽으로 감으로써 우리를 통해 진짜 예수님이 나타난 방식을 역대상하에서 취하는 거예요. 그게 왜 그렇게 되느냐 하면 한 번 더 역사를 예수님 관점 언약 중심에서 뒤돌아보기 때문에 그런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런 해석이 가능한 거예요.

그러면 이제 중요한 것은 이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요, 이 아들이 성전을 세웠지요. 그다음부터 성전은 어디로 가느냐 하면 성전은 약속의 땅이 있잖아. 약속의 땅과 건물이 있지요. 땅과 건물 그리고 거기에 인물들 왕들 있지요. 왕. 아까 히스기야 또는 요시야 있지요. 그 인물들이 제기되면서 다윗의 자손이 등장할 때까지 이러한 가짜들이 여기서 제거가 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이 다윗 자손이니까 이거는 성전, 건물 땅보다도 뭐가 기준이냐하면 인물에서 인물로 바로 가버립니다. 인물에서 인물로 가버려요. 그러면 이 중간에 가면서 이게 이제 부산강의에서 했는데. 다윗 오기 전에 뭐가 있었다 했습니까? 레위 지파가 있다 했지요. 레위 지파를 다스리지요. 요거는 히스기야 7장에 나옵니다.

다윗은 유다 지파예요. 레위는 무슨 지파? 레위 지파예요. 12 지파 가운데서 레위 지파 중심으로 하다가 어느 지파? 다윗 중심으로 다 나아갑니다. 요걸 연결하는 선지자가 역대 상에 나옵니다. 이게 누구냐 하면, 바로 사무엘이에요. 사무엘이 예언한 대로 지파가 그 사울 왕에서 다윗에게로 나라를 넘겼다. 사무엘이 이야기한 거예요. 사무엘에서. 넘기게 되게 되면 여기서 다윗은 바로 멜기세덱의 위상으로 위상이 드러납니다.

멜기세덱이 뭐냐 하면 왕 같은 제사장 또는 다른 말로 하면 제사장 같은 왕. 이 말은 다윗 왕국이 진짜 예수님 올 때까지 여기서 뭐가 이 전체가 다윗이 희생 제물의 역할을 하는 거예요. 제사장이 있던 제사 말고 이제는 그 제사장의 제사법이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의 인물에 등장하기 위해서 주님의 희생에 참여하는 식으로 여기에 역사가 진행됩니다.

그래서 이 역대기상에 보면 그 제사에 대해서 굉장히 거기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어요. 제사에 대해서. 그래서 오르난의 타작마당 나오지요. 다윗이 뭐 한다? 제사장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제사장이 되는데 여기서 사탄이 충동을 일으켜 가지고 다윗으로 하여금 가짜 인물 다윗으로 하여금 진짜 다윗 계약 당사자인 하나님의 아들 올 때까지 다윗은 제사장 역할요소도 이스라엘 역사가 이스라엘 국가와 함께 더불어 진행되도록 그렇게 조치를 한 겁니다.

방금 이야기한 거 쭉 이야기한 거고요. 이제 이거는 그냥 찾지 말고 시간관계상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역대하 3장 1절에 보면 역대하5장 2절에 보면 그 앞에 모든 백성을 직결시킵니다. 왕이 레위지파를 지배하는 것은 역대하 8장 15절을 보면 거기에 나와 있어요.

그리고 솔로몬 이후에 요건 찾아봐야 돼요. 역대하 10장 15절에서 16절, “왕이 이같이 백성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 일은 하나님께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 여호와께서 전에 실로 사람 아히야로 하여금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에게 이르신 말씀을 응하게 하심이더라” 이게 이제 오늘 강의를 이제 끝부분을 마감하면서 우리가 머리속에 정리해야 될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다윗 언약에 대해서요. 사람들이 이스라엘 관심이 없어요. 하나님의 언약대로 이스라엘을 만든다는 그 하나님의 계획에서 인간들은 당체 관심이 없어요.

인간은 본인이 약속의 땅에서 남의 이웃 나라처럼 풍성하게 잘먹고 잘 살기 위해서 그 백성들이나 왕이 힘을 합쳐서 힘을 모으는데 신경을 쓰는 거예요. 힘을 모으는데 그러니까 본인이 잘 사는 것이 뭐가 돼요? 선이 돼 버리는 거예요. 내가 못 사는 것이 악이 되고 여기서 무슨 관계? 2자 관계 또는 대립 관계에 있는 거예요.

제3의 요소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충분히 그들의 본성대로 네 밥 먹고 사는데 신경 쓰도록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놔두는 겁니다. 놔두면서 제 3의 요소 어떻게 사느냐? 그들 사이에 하나님이 개입해 가지고 그걸 나누어요. 나눈다고.

불신자의 등장은 하나님께서 마귀로 하여금 자기 백성을 데려가도록 의도적으로 이걸 허용을 해요. 의도적으로. 예수를 안 믿어서 불신자 된 게 아니고 내 사람 내가 찾아간다는 식으로 마귀가 활동해서 데려가요. 얼마나 고마운 마귀입니까? 얼마나 마귀가 고마워요. 알아서 자기 사람 알아서 내 자식 내가 데려간다. 가만히 있어도 지옥으로 데려가요. 그러면 천국으로 가는 것은 성령께서 내 백성은 내가 데려간다, 알아서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제 3의 요소가 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자아가 갖고 있던 선과 악의 양심 이 모든 것이 구원에 전혀 영향을 주지를 못하기 때문에. 그게 바로 방금 봤던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라. 여로보암은 말합니다. “우리가 다윗과 무슨 관계있느냐? 야! 밥 먹고 살았는데 그 다윗 언약이 무슨 그게 뭐 중요해? 우리가 힘 모아서 잘 먹고 잘 살면 되잖아. 그러면 되잖아. 뭐 다른 거 뭐 필요해?” 그런 식으로 하는데 그게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발생된 그렇게 필연적 현상이다, 이 말이지요.

자, 끝으로 한 가지만 더 봅시다. 그게 바로 역대하 22장 10절. 9절, “아하시야는 사마리아에 숨었더니 예후가 찾으매 무리가 그를 예후에게로 잡아가서 죽이고 이르기를 그는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던 여호사밧의 아들이라 하고 장사하였더라 이에 아하시야의 집이 약하여 왕위를 힘으로 지키지 못하게 되니라” 그 다음에 10절에 보면, “아하시야의 어머니 아달랴가 자기의 아들이 죽은 것을 보고 일어나 유다 집의 왕국의 씨를 모두 진멸하였으나”

자, 문제 나갑니다. 아달랴가 왜 자기 아들 죽은 것을 보고 유다 집에 왕의 씨를 진멸하려고 그렇게 한 의도가 뭐냐, 요거 알면 오늘 강의 끝났습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죽고 해 왔습니다. 아달랴의 엄마가 있어요. 이세벨이었습니다. 이세벨은 종교가 뭐냐? 바알 종교에요. 그래서 북쪽에 엄마가 친정 엄마가 딸한테 지시를 했어요. 남쪽에 있는 마지막 남아 있는 다윗 언약을 제거하라. 그게 오늘날 마귀가 이 세상을 지배하는 원칙입니다.

십자가 새 언약을 복음을 제거하라. 2자 관계 선악 체계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의 자아와 생존이 중요하기 때문에 거기에 필요한 우리는 착함 윤리도덕, 착함이 유지되어야 돼요. 왜? 착함이 있어야 사람이 정신적으로 내가 살 만한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자부할 수 있기 때문에 마음에 정서적으로 안정이 돼요.

죄를 많이 져서는 불안에서 못 살아요. 이 선악체계 때문에. 그러나 안정되나 불안하나 둘 다 무슨 관계입니까? 제3의 요소가 없어요. 제3의 요소가 없으니까 착하게 사나 악하게 사나 상관없이 그거는 구원의 대상이 아니죠. 마귀의 조종에서 못 벗어나는 겁니다.

그런데 제3의 요소, 성령의 요소, 십자가가 들어와버리면 주님은 낭비를 안 한다 했죠. 제 3의 요소 들어온 것은 뭐냐 하면 내가 정서적으로 안정을 취하든 뭐 양심이 있든 착하든 관계없이 그것이 십자가를 증거 하는데 꼭 필요했던 거예요. 우리 자신이.

우리 자아의 후달림, 우리 자아의 불안정이 주님의 십자가만 드러내는데 필수적인 요소였던 겁니다. 그러니까 이게 얼마나 감사하고 고마운 일입니까? 평생을 구원받겠다고 애쓰는 거 구원받고 난 뒤에는 꼭 필요했던 거예요. 그 애씀을 통해서 우리가 죽어 마땅한 존재인 것을 깨달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이 말씀대로 그대로 되어진다는 것을 우리가 지식적으로 뻔히 다 아는 이야기인데, 그러나 우리가 온몸을 통해서 현실을 통해서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 자신 챙기기였던 것을 이제는 고백합니다. 이제는 우리 자신을 안 챙길 수 없는 존재인 것을 도리어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이런 어설픈 우리를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함이 제 3의 요소가 우리를 증인으로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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