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강의

권세 보다 예언

아빠와 함께 2025. 7. 19. 18:40

안양20250710a신17장18절(권세보다 예언)-이 근호 목사

110페이지. <열왕기와 한국교회>. 열왕기에는 열왕기상도 포함돼 있고, 열왕기하도 포함돼 있습니다. 열왕기상, 하의 내용을 한 마디로 이야기한다면, 왕의 시대가 서서히 퇴색하고, 물러가고, 선지자의 위상. 선지자의 존재가 높아지는 시기. 이게 열왕기상과 열왕기하,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 뒤에 나오는 역대기도 마찬가지지만. 그런데 왕의 시대가 퇴색한다는 게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역사가 과연 역사냐?” 라고 되묻는 거예요. 역사가 과연 역사냐? “역사는 역사지 뭐 역사가 아닌 게 뭐 또 있겠느냐.” 이렇게 하잖아요.

그런데 이 역사라 하는 것은 시간을 기록한 것이 역사 아닙니까. 그렇죠. 과거 시간을. 과거 시간을 그 기록을 누가하고 그 기억을 누가 하죠? 인간이 하지요. 역사가 과연 역사냐, 역사의 퇴색. 퇴색이란 말은 색깔이 있었는데 색깔이 점점 지워지는 거예요. 분명히 그러니까 역사가 하나의 벽화처럼 또 기념물처럼 고물이 되어가는. 역사라는 것이 퇴색이 된다는 말은 좀 어렵게 설명해 드리면 이렇습니다.

있는데 없어진다. 이런 퇴색도 있을 수 있지요. “어? 요거 있네. 없어지네.” 이것도 있는데. “애초부터 없는데 드디어 없어지네.” 이럴 경우도 생각해 봐야 돼요. “애초부터 없었는데, 없어지네. 당연하지. 뭐.”이리 되는 거예요. 당연한 거예요.

이럴 경우 어떤 경우냐 하면 바로 어디 정신과 치료를 받을 때에, “나한테 이런 고민거리가 있습니다. 이러한 불안증세가 있습니다. 이러한 걱정거리가 있습니다.”라고 잔뜩 안고 의사를 만났는데, 치료받고 난 뒤에 “내가 고민하고 걱정하는 게 애초부터 이게 실체가 없었는데” 할 수가 있지요. 실체가 없다. 허상. “그동안 허상을 쫓았구나!” 이리 되는 거예요. 허상을 쫓았구나! 처음부터 상당히 좀 어렵지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이게 오미자지요. 이 오미자가 한 컵에 있는데 이걸 내가 방금 조금 마셨어요. 그러면 그 오미자는 없어지는 게 아니고이 컵 안에 있는 오미자가 내 속에 들어가서 지금 현재 내 눈에 안 보일 뿐이지요. 눈에 안 보였지만 자리 이동은 한 거죠. 자리 이동.

여기 있는 것이 없어진 만큼 내 몸에 그만큼 있다. 이 말이죠. 이걸 에너지 보존 법칙이라 합니다. 어디 손실되거나 증가하는 것이 아니고 그게 형태가 바뀌는 거예요. 위치 에너지가 운동 에너지로 바뀌고, 전기 에너지로 바뀌고 바뀌는 거예요. 그거는 허상이 아니에요. 물질이니까.

그런데 역사라는 것은 과연 있는데 없어지는 현상이 일어난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 없는데, 있다는 말은, 이 역사가 딴 데도 또 있겠지. 이래되는데. 이게 아니고 애초부터 역사라는 게 성립이 안 될 수 있었잖아. 역사라는 게. 역사라는 게 없었는데 퇴색, 색깔이 없어질 수 있다. 이 말이죠. 없어질 수 있다.

그러면 자 역사가 뭐냐 하면, 지난날에 대한 나의 해석이지요. 이게 역사가 되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일기장 같은데 일기장. 지금 나이 서른이 넘어서 일기를 쓰는데 내가 처음 왔을 때 그 골목길 일곱살 때 이사 왔을 때 골목길 내가 다니던 그 국민학교 담벼락 이런 거 있지요. 그러면 일기에다가 오늘 또 담벼락에서 놀았다 했다. 이 말이지요. 그 나이가 이제 서른되면서 그 일기장 보면서 그 담벼락을 가보니까 재기발되고 없어졌어요. 담벼락이.

그러면 실제적으로는 거기에 있던 담벼락에 있는 벽돌 담긴 에너지는 딴 데로 소비가 돼 있겠죠. 건물하든지.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 기억이 그냥 기억일 뿐이라는 거죠. 일곱살 때 기억이 일기장이 됐다면 그 일기장의 그 사실은 내 기억은 서른살이 되면서 그 기억은 아무짝도 소용없는 기억이 되는 거예요. 소용없는 기억. 역사라는 것은 나와 더불어 정확하게 ‘나의 소멸과 더불어 사라지는 것.’ 역사라 하는 것은 나와 더불어 나의 소멸과 더불어 사라지는 거예요. 역사라는 게.

가끔 꿈속에 보면 어릴 때 20대 여러분 10대 꿈속에 나오지요. 꿈 깨면 그 10대에 있던 그건 어디 갔습니까? 단지 나의 내 머리 사이에 있는 기억일 뿐이지요. 그래서 인간은 이 기억을 담는 담아서 시간의 흐름 따라 운반하는 운반체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그럼 여기서 인간이 우세냐 시간이 우세냐, 라는 질문에 대해서 답이 딱 나오죠. 인간을 삼키고 인간을 없애는 것은 누구에게 달렸다? 시간에 달렸다. 시간에 달린 거예요. 시간에 함몰 되게 돼 있어요. 인간은.

그러면 여기서 이제 우리는 여기서 약간의 기분 나쁜 태도로 시간이 뭔데? 이렇게 하지요. 시간이 뭔데? 바로 여기서 하나님이 등장하게 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시간을 위해서 모든 인간의 시간의 흔적과 자국을 없애시는 분이다. 이렇게 방금 이야기한 강의를 요 한 문장으로 정리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의 주특기는 뭐냐? 우리의 인간의 모든 자국을 없애시는 분, 사라지게 하는 분. 어디 감히 내가 창조한 이 창조의 이 바닥에 평면에 너 것을 왜 그렇게 얹지는가? 너 것을 얹지는가. 여기 오다 보니까 이사하던데 33층 이사하는데 이사할 때 옛날 그 옛날 집만 이렇게 바꿉니까? 아니면 이사 온 사람이 돈 들여 가지고 싹 다 바꿉니까? 싹 다 바꾸죠. 싹 다 바꿉니다.

심지어 전에 살던 집에서 자살이 있었다든지 사건 사고가 있으면 돈 더 들여서 인테리어 싹 다 바꾸지요. 창문부터 다 바꾸지요. 다 바꾸는 거. 그리고 난 뒤 바꾸고 난 뒤에 그 사람이 한 10년 살다 이사 가면 그다음에 이사 온 사람은 그 앞에 내가 했던 것을 싹 다 바꾸죠. 왜 바꾸지요? 나를 위한 환경으로, 내게 맞춘 환경으로 바꾸지요. 바꿀 때 인테리어할 때 인테리어업자한테 이거 이거 주문하는 것은 자기가 자기 인생이 과거에 살아왔던 그것에 기초해서 내 과거가 빛날 수 있는 인테리어에 들어가는 겁니다.

이걸 간단히 말해서 내 취향이 아니다. 이거는 내 취향이 아니다. 보통 그 처녀 총각들 연애할 때도 그 선 볼 때도 하잖아요. “그래 그 아가씨가 어때? 선보니까 어때?” 그러면 “내 취향이 아니에요.” “그 남자 어때?” “내 스타일이 아닙니다.” 이러면 이제 이야기가 끝난 거죠. 이것을 인간들은 이러한 행위를 뭐냐 하면, 자아연속성이라 합니다. 자아연속성. 이 자아가 특징이 중단됨이 없이 계속 이어가고 이어가려 하는 거예요. 이 자아가. 끈질긴 자아가. 어디까지 이어지냐 하면 천국까지 이 자아를 이어가려고 하고 그렇게 하는 겁니다.

천국에서는 이 자아를 출입을 금합니다. 넣어 주지 않습니다. 넣어 주지 않습니다. 천국에서는 이 자아를 거부하죠. 거부합니다. 그러면 열왕기상에 들어와서 왕의 하는 일은 과거의 선조 선배 왕들이 했던 걸 완전히 자기 시대에 인테리어 해버려요. 열왕기상과 열왕기하를 보면서 여러분들이 보면서 굉장히 뭔가 찝찝하면서도 찌꺼기 남듯이 깔끔하게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계속 열왕기상과 하를 이야기하면서 이걸 성경을 독자들로 하여금 찜찜한 기분을 자꾸 남겨요.

열왕기상하를 다 읽었는데, 뭔가 이해 안 되는 게 있고 납득이 안 되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왜 선배들을 안 본받느냐 하는 거예요. 왜 선배들을. 선배가 그렇게 여호와를 섬기고 잘했다면 그럼 후배는 어떻게 해야 돼요? 우리도 그렇게 해서 나라가 부흥했다면 후배 그다음에 왕이 됐던 그 왕의 아들들은 아버지를 본받아 여호와를 섬겨야 될 거 아닙니까? 안 섬깁니다. 재벌 3세가 재벌 2세한테 그 회사 물려받고 난 뒤에 그다음에 아버지처럼 합니까? 자기처럼 합니까? 자기처럼 하죠.

여기서 이제 그 독자들이 성경을 보는 우리들이 왜? 왜? 그렇게 하는가? 그게 왜라는 말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가, 우리는 이미 신약에 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흘러가는 걸 전체적 조망을 했잖아요. 다 알고 있잖아요. 바뀌어 가지고 잘되는 법 없지요. 망했지요. 망하고 가끔은 가끔은 안 망하지만 망하고 망하고 망했다, 이 말이지요.


망했는데, 우리는 알죠. 이게 여호와 버리면 망한다는 거. 근데 왜 당사자들은 왜 그걸 그것조차 모르느냐 하는 그게 찝찝함으로 남는 거예요. 찝찝함으로. 왜 모르지? 왜 모르지? 아버지가 어머니가 훌륭하고 어머니가 훌륭하면 자식이 아버지 엄마 따라 훌륭해야 되는데 왜 안 훌륭하지? 왜 아빠 엄마 안 닮으려고 하지? 그 이유가 뭘까요? 그걸 풀어야 뭐 열왕기상이고 하고 다 풀리는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지루해서 그래요. 상투적이라서. 답답해서. 시작점을 내가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시작점이 나의 신선함이 시작점으로 꽂히지 않기 때문에 일거에 다 버리는 거예요. 그거를. 문학 작품에서 제일 가치 있게 봐주는 게 신선함이에요. 그걸 창의성이라 합니다. 그런데 이미 나왔던 테마나 그 스토리를 하게 되면 그건 뭐냐하면 진부하다 해요. 그 용어로 진부한. 아이구, 지루해! 돈 주고 그 책 안 보지요. 새로운 게 없는데 왜 봐요. 새로운 게 없는데.

파동입니다. 파동이죠. 파도가 물결치지요. 파동은 바다에 파도칠 때 여기에 있는 물고기. 이 물고기는 자리를 이동합니까? 이동 안 합니까? 파도칠 때 물고기 여기서 이렇게 갑니까? 안갑니까? 안 가요. 항상 제 자리에 올라갔다 내려갈 뿐이지. 맨 그 자리에 있으니까. 그 자리에 있습니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게 파동이 치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파도가 입자거든요. 입자. 하나의 덩어리거든요. 덩어리는 이쪽 덩어리 이쪽 덩어리 연결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왔던 것 끝이고 나부터 시작이에요. 나부터. 탕탕 이거 칸막이가 쳐져 있어요. 장막이 쳐져 있어요.

자, 열왕기니까 왕 이야기잖아요. 왕. 왕이 무엇이냐고 이야기할 때는 “특정 중간에 있는 왕 뽑아서 왕이라는 게 뭐냐?” 이렇게 묻는 게 아니에요. 왕은 처음에 왕 생길 때 그 원칙이 하나님은 파동, 인간들은 그것도 모르고 내가 남들이 하지 않은 새로운 것을 내가 새로 시작하겠다고, 입자, 내 주장을 내세우는 입자부터 출발하겠지요.

왕이 최초로 왕이 등장하는 그게 창세기 4장입니다. 노골적으로 자기를 왕으로 지칭한 최초의 사람은 창세기 4장에서 라멕이에요. 라멕. 라멕이 아다야 씰라야 한 대목이 나오거든요. 창세기 4장 한번 왕이 뭔가를 지금 제가 설명해 드린 겁니다. 열왕기하면서. 23절 24절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야 씰라여 내 소리를 들어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배지만 라멕을 위해선 벌이 칠십칠배다. 이렇게 돼 있죠.

요렇게 말하는 라멕에게 그 말하는 그 싸가지. 태도. 태도를 한번 보세요. 아내하고 동등이 아니죠. 아내는 나의 왕 됨에 대한 액세서리. 부속 물품 정도 위치밖에 없어요. 이게 일종에 아내가 아니라 하녀 같은 느낌을 봤습니다. 하녀 같은 느낌. 그런데 이 라멕이 가인을 언급해요. 라멕이 이야기하는 최초의 왕은 누구냐? 가인이에요. 가인.

그러면 가인이 한 일이 뭐냐하면 나만을 위한 삶의 터전 공간을 도시라는 이름으로 최초로 건설한 사람이 가인입니다. 그래서 최초의 사회는 농촌 사회가 아니고 도시 사회가 먼저에요. 도시 사회가 도시가 먼저 생겼어요. 사회라는 게. 도시가 먼저 생기면서 사회라는 게 그동안 서로 돕고 돕던 관계가 다 깨어지고 하나의 구심점이 발생하는 거예요.

이게 뭐냐? 권력이 한 곳에 집중할 때 그게 최초의 왕의 자리가 등장한 겁니다. 권력이 한쪽으로 집중했다. 그러면 그 집중한 권력은 어디서 수급한 겁니까? 개인 개인이 갖고 있던 자기 권력을 뺏은 거죠. 강제로 뺏어서 빼앗긴 백성들은 권세가 그만큼 없어졌고 뺏었던 왕의 권세는 그만큼 세졌고 직결돼 있으니까 강하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인류는 왕중심 외에는 다른 사회가 형성되지 않았어요.

왜? 한번 권력이 계속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까 지금 제가 하는 말은 뭐냐면 이 파동은 연속성을 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창세기 4장부터 있었던 연속성은 뭐냐하면 인간의 왕적 권세의 연속성이 가인부터 시작된 거예요. 왕의 연속성이 시작된 겁니다. 시작대를 보니까 개인, 개인이 갖고 있던 권세는 내가 가졌으면 안 되는 것처럼 그렇게 이해되기 시작했어요. “나는 홀로 살면 안 돼. 나는 스스로 자릴 뜨면 안 돼. 나 같은 게 혼자 살면 안 돼. 내가 살 수 있기는 나보다 더 힘세고 똑똑하고 공부 많이 하고 나보다 더 용기 있는 사람에게 내 권력에 아부를 하든지 권력을 양도하고 그분 밑에 소화시키는 대로 해야 그게 인간이 사는 것 같은 사는 것이 돼.” 라는 경향이 연속적으로 등장했어야 했습니다.

이걸 신약 성경 에베소서 6장에서는 이걸 뭐라고 하냐하면 이걸 권세라고 합니다. 권세. 아, 어린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너희가 천국에 못 간다는 말씀이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나옵니다. 그리고 그걸 낮추라고 이야기해요. 요 비슷한 말씀이 그다음에 20장 25절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자, 여기서 권세자가 나오지요. 권세를 부리는 자.

그러면 이 말씀을 하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어떤 연속성이 있다는 것을 감안을 하신 거예요. 그 연속성이 무슨 연속성입니까? 힘의 연속성. 권세의 연속성이에요. 권세 연속성. 자, 이 점을 여러분들이 실감나게 느끼려면 이래야 됩니다.

두 사람이 서로 연애를 하는데 집안에서 반대해요. 집에서 반대한다고요. 그러면 뭐 대사에 나온 것처럼 우리 사랑하게 해 주세요. 한 게 옛날 드라마에 나오잖아요. 그런데 둘이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이에 결혼하면 그게 정상 아닙니까? 그런데 집안에서 그 결혼을 반대해요. 그럼 반대하든지 말든지 둘이 사랑하는 사이에 혼인하면 되잖아요. 그러면 드라마 안 되겠죠. 그 젊은 사람이 기성세대에 반대해요. 로미오와 줄리엣 비슷하게 반대한다고. 자, 반대해야 될 이유가 나와요.

그게 뭐냐면 우리가 얼마나 개인적으로 착하냐, 악하냐, 성실하냐, 나쁜 짓 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윤리 도덕보다 더 센 게 있어요. 그거 뭐냐하면 권세의 말을 들어야 된다는 거예요. 권세의 말을. 윤리 도덕은 법이잖아요. 법보다 더 센 게 이미 이 세상을 장악하고 이 세상을 역사란 이름으로 미래까지 계속 물결치게 하는 겁니다.

그게 뭐라고요? 권세예요. 권세. 힘에 집중되어 있는 힘의 에너지가 권세예요. 이걸 인간은 태어날 때 어디서 태어나냐 하면 엄마 아빠에서 태어났다고 말하지 마세요. 권세 안에서 태어난 거예요. 권세 안에서.

먼 옛날에 이야기입니다. 못사는 집안에 지지리 못사는 집안에 아빠 엄마 태어나도 소용없어요. 나중에 아빠 엄마가 “야, 우리 더 도저히 못 키우겠다. 따라서 돈 있는 집안에 우리가 네 양자 보내기로 했으니까 너 클 때까지만 나중에 클 때까지만 잘 크고 다시 우리 그때 우리 사정이 가정 상황이 나아지면 우리 온 식구 만나자. 그러니까 너도 어리지만 이해해라. 잠시 맡긴다. 이래 생각하고 이해해라.” 하고 자기가 낳은 자식을 권세 있는 집안에 맡기고, 자기 부부는 열심히 살려고 애를 썼던 경험들이 많이 있잖아요.

그게 뭐냐 하면 이게 나쁘냐 안 나쁘냐를 그 집안에 물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왜? 개인적으로 자식을 버리는 것은 안 되지만 권세에 밀리니까 뭐 이런 거예요. 이걸 파란 걸로. “권세 없는 정의는 선도 아니다.” 이 말이에요. 선한 게 아니다. 착한 게 아니다. 권세 없는 거. “이거 돈도 없으면서 무슨 착한 짓을 하고 있어?” “아, 돈 있는데 그 정도면 봐주지 뭐.” 이런 거. 모든 게 권세 문제에요. 윤리, 도덕이 권세 문제입니다.

이걸 사람들이 자꾸 놓치면 안 돼요. 왜냐하면 이게 왜 놓치면 안 되느냐 하면 예수님은 이미 인간이 권세 안에 갇혀 있다는 전제 하의 말씀을 던지는데 주의 말씀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한다, 하면서도 내가 권세 안에 완전히 눌려 있다는 사실을 빼먹고 “자, 하나님 이야기하세요. 착하게 살면 착하게 살고, 바르게 살면 바르게 살겠습니다.” 자, 이런 마음 자세니까 말씀하시면 지키겠나이다. 이거는 자기 주제를 파악을 못 하는 태도예요.

평생 동안 여러분들의 고민과 걱정이 뭐 때문에 그런 건 줄 알아요? 기존 권세의 압박 때문에 고민과 걱정이 있는 겁니다. 눈치 본다고. 그 권세 눈치 본다고. 나이 들어도 뭔가 세상을 파악하면서 나이가 들어야 돼요. 도대체 왜 내가 이따위로 사는지 감이 안 잡히면 정답을 모르면 안 돼요. 오늘 정답 알려 드리겠습니다. 오늘 정답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니에요. 오늘 정답 알려 드리겠습니다.

인간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권세에 압박과 지배를 받는 형편 안에서 우리는 태어났고 거기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권세가 연속성이라는 말은 다른 말로 한번 이렇습니다. 이 세상의 안정성. 이 세상의 안정성은 곧 권세의 안정성. 이 권세가 안정적입니다. 이 악마의 권세지요. 가인이니까. 가인. 이 권세는 어디서 나왔다? 가인에게서 나왔죠. 이 가인은 왜 이런 도시와 권세 왕이 스스로 왕으로 자처했는가? 이거는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도 않고 내가 도움받을 필요도 없기 때문에.

아벨과 하나님이 결부되어 있던 그 땅에서 추방된 모습이 가인이기 때문에 그래요. 아벨과 하나님, 하나님과 아벨이 연결되었던 그 상태 그 공간에서 가차 없이 튕겨져 나오는 “니는 이 관계에 못 들어 와. 너는 네가 어디 너 혼자 살아.” ‘너 혼자 살아’가 오늘날 이 권세 있는 세상을 지금껏 연속성으로 형성해 오고 있습니다. 너 혼자 살아. 너 혼자 힘 가지고 살아. 요령껏 살아. 이런 뜻이지요.

그런 예는 북한에 권력 서열 구조를 보면 간단합니다. 김일성 집안이 온 인민을 대표해서 모든 권세를 다 끌어당기고 있지요. 인민들의 권세를 다 끌어당기고. 거기에 대해서 인민들이 반항하고 싶지 않아요. 길들여졌으니까. “어버이 태양 같은 어버이 수령님이 아니면 이 백두대간을 누가 l일으켰고, 이렇게 민족을 살리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그러니까 외국에 있는 정치학자들이 볼 때, 저 북한은 뭐냐 하면 아직까지 조선왕조예요. 조선시대에요. 왕 없으면 안 돼요. 전에 그랬잖아요. 이순신 장군의 조선의 나라는 없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충성한 것은 백성들을 충성한 게 아니에요. 이순신 장군이 지키려고 하는 것은 왕의 백성을 지키려고 하는 거죠. 그게 이데오르기예요. 그게 이념화 돼 있어요. 이념화 돼 있어요. 이순신 장군의 종교는 뭐냐, 왕의 나라지요.

어떤 사람은 이순신 장군이 죽으면 천국가느냐, 지옥가느냐, 그걸 질문을 하는데 이미 그 사람 종교를 갖고 있어요. 종교가 뭐냐? 역사를 믿는 종교예요. 역사를 믿는. 이 조선의 땅과 이 조선의 왕조는 윗대의 왕들의 그 묻히는 무덤이 있지요. 그 무덤을 지키는 것이 신하의 도리잖아요. 백성들 무덤 지키는 게 신하의 도리가 아니고 왕들의 계열의 무덤을 지키는 거예요.

정릉입니까? 서울에 왕릉 있는 곳. 이제 여러분들이 역사를 백번, 천번 들어도 이해 못하는 걸 여러분이 이제는 풀렸습니까? 그들은 종교인들이에요. 종교인들이에요. 그들은 결혼식을 해도 왕이 있는 쪽을 향해서 절을 하고요. 모든 것이 허한 우리 자신들의 정신적인 중심지가 왕이 있어야 박혀야 안정성을 얻는다니까요. 권세 안정성을.

나라가 가물어도 햇빛 그 비를 내리는 것도 왕의 은총 때문에 비 오는 거예요. 벚꽃이 펴도 왕의 은총으로 벚꽃이 피는 겁니다. 봄바람 날리며~~벚꽃 휘날리며~~ 그런 노래. 자연과 인간 자기 인민들 사이에 중간에 무당 같은, 무당 같은 왕이 거기에 박혀 있는 거예요.

그 무당을 뭐냐 하면 단군들이라고 하는 겁니다. 단군들.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에 보면 단군이 한 사람이 아니에요. 여러 명이에요. 삼국사기라 하는 것은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역사에 보이는 사건들이에요. 삼국유사라는 것은 신하 같은 걸 집어넣은 것을 삼국유사에요. 무당들의 나라에요. 무당들의 나라. 단군. 무당. 어간이 같아요. 눈에 보이는 신을 보고 싶은 거예요.
자연의 조화에 대해서 행세, 권세를 행사할 수 있는 백을 쓸 수 있는 특출한 영웅을 인간들은 원합니다. 왜? 그게 가인의 후예들이 만든 종교고 그걸 아주 지긋지긋하게 그걸 비판하는 민족은 오직 하나의 민족밖에 없어요. 그 민족이 무슨 민족입니까? 이스라엘입니다.

그 어디 근거해서? 출애굽기 20장 십계명에서.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다른 신. 도대체 다른 신이 얼마나 많으면 그런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다른 신이 얼마나 많으면. 심지어 모세가 하나님 보고 ‘이것도 무슨 신이야? 뭐 여러 신 중에 또 하나구나!’ 이렇게 해 가지고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니까 여호와 하나님 뭐라 하십니까? “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야.”

스스로 있는 자라는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을 배제한다는 겁니다. 아까 그랬죠. 인간을 소멸시키는 거예요. 자꾸 인간이 끼어드니까 “제 역사가 어떻고 제 기억이 어떻습니다.” “좀 안 빠질래? 좀 빠져.” 그래서 뭐냐 하면 지금 이스라엘 역사 열왕기는 뭐냐 하면, 나의 역사가 제거되고 이게 어디로 전환되느냐 하면, 주님의 역사로 전환되는 이야기가 열왕기상과 하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역사로 전환할 때 나의 역사 그러니까 과거에 우리 이스라엘 찬란한 역사 우리 선배들 왕들의 행렬 이렇게 이스라엘은 그런 왕들의 고귀한 역사 때문에 왕들이 믿는 하나님 때문에 도와졌다. 이 모든 역사가 허구다 말이지요. 이걸 주님의 역사로 바꾸면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이 누구냐 하면 선지자입니다. 선지자.

그러니까 열왕기상 답 나왔지요. 왕과 누구의 싸움? 선지자의 싸움. 아주 양보 없는 싸움. 왕은 뭐가 있다? 권세가 있지요. 죽인다. 내 말 안 들으면 죽인다. 그러면 질문입니다. 왕은 내 말 안 들으면 죽인다. 실제로 죽일 수 있는 권세가 있으니까요. 그러면 거기에 대항하는 선지자의 말은 한마디 말은 여러분이 뭐 선지자라고 생각해 보고, “죽인다. 내 말 안 들으면 죽인다.” 할 때, 여러분은 선지자라면 뭐라고 답변하겠습니까?
부부싸움 안 해봤어요? “니 죽인다.” 하면 뭐라 합니까? 독이 나서. “죽이라! 죽이라!” 하잖아요. 선지자는 그렇게 대들지도 않아요. “웃기네.” 가 돼요. 왜? 왜 웃기느냐가 되느냐 하면, 말씀은 안 죽거든요. 지금 선지자는 내가 죽는다는 거 아무 관심이 없어요. 흐름이 인간의 몸과 몸뚱아리 인간의 역사는 이미 악의 권세에 의해서 연속성으로 유지되고 있잖아요.

그런데 선지자는 그걸 뭐로 해석 하냐 하면 언약의 연속으로 봐요. 언약이 연속되는 거. 그러니까 이미 선지자 입장에서는 뭐보다 뭐가 우세해요? 역사보다 예언이 우세해요. 예언이 역사를 잡아먹습니다. 옛날 그 컴퓨터 게임에 보면 있잖아요. 뽀로록~ 해가지고 입벌려가지고 잡아먹고 톡 뛰어가지고 입벌려가지고 잡아먹고 잡아먹으면 50점 막 머리에 떠오르고 300점 떠오르고, 또로록가서 톡 잡아먹고.

역사를 예언이 다 잡아먹어요. 역사가. 요나를 누가 삼켰습니까? 큰 고기가 삼키는 것처럼 예언이 역사보다 더 큰 역사로 삼키는 거예요. 시편 2편 1절에서 4절까지 보겠습니다. 제가 읽어 보겠습니다.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이리 되어있지요. 열방, 여러나라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 하나마다 누가 있겠어요? 왕이 있겠지요.

2절에,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그 다음에 뭐합니까?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이리 되어있습니다. 방금 1절과 2절 읽었잖아요. 요게 예언입니다. 다른 말로 말씀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열왕들이 그런 소리를 하되, 그 다음에 아까 제가 답변했지요. 선지자가 어떻게 나온다고요? “웃기네” 했지요. 그 웃기네, 가 4절에 나옵니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왜 하나님이 웃을 수밖에 없느냐 하면, 예언은 인간이 지킨다고 성취 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의 예가 있는데, “죄를 회개하면 구원해 주시렵니까?” 이렇게 말하는 거. 이게 어디서 문제 되느냐 하면,
인간이 죄라는 걸 생각할 때, 이 죄는 어디서 나오는 개념이냐 하면 선과 악을 나누어서 생각하는 선악 의식에서 비롯된 죄 개념입니다. 그러니까 “이건 죄입니다.” 라고 내가 이야기한다면 그 사람은 뭐냐 하면 “죄라고 한 것만 나쁜 거고, 이 죄라고 규정한 선악의 구조는 나쁜 거 아니지요. 그치요?” 이렇게 묻는 거와 똑같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이 이게 왜 구원이 안 되느냐 하면, 죄라는 의식 자체가 이게 죄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네가 뭔데 죄에 대해서 언급해. 네가 뭔데?”

죄는 어디서 나와야 하느냐 하면, 죄는요 예수님께서 나와야 돼요. 왜? 예수님은 생명이고 우리는 선악과잖아요. 예수님은 생명나무고 우리는 선악과라고요. 그러면 죄라는 것, 구원이라는 것, 천국가는 것, 주 개념이 어디서 나와야 돼요? 생명 나무되는 예수님에게 나와야 돼요.

죄에 대해서 누가 알고 있느냐? 예수님만 알고 있어요. 우리는 개코도 죄도 모르면서 회개할까요? 이리 나오더라 말이죠. “그 입 다물라. 너는 죄가 뭔지 몰라.” 죄를 언급한다는 것은, “죄를 죄라고 규정할 수 있는 이 능력은 내가 나쁜 거 아니겠죠. 그죠? 이거는 내 옳은 판단하는 거 맞지요?” 라고 이걸 자기 의로 내세우기 때문에 죄라는 걸 생각하는 겁니다.

죄 아닌 게 어디 있어요. 다 죄인데.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내가 예수님이 생명이 너희에게 찾아올때는 예수님만 알고 있는 죄의 개념도 너희에게 알려주면서 이거 세트에요. 세트 알지요? 배달 음식할 때 물품 있고 보조품 다 한 세트 있잖아요. 세트로 되어 있는데, 죄라는 것 플러스, 예수님의 용서 피와 한 세트를 이루어서 예수님이 찾아옵니다. (죄+죄 용서) 이거 외에는 예수님 찾아오고, 성령 찾아오는 경우가 아니에요.

여러분들이 유튜브 보면 임사 체험이 있거든요.

( 임사체험(Near-death Experience, NDE)은 죽음 직전의 극한 상황에서 발생하는 의식 경험으로, 유체이탈, 터널 통과, 빛과의 조우, 고인과의 만남 등 공통된 특징을 보입니다 )

죽을 때 예수님 만났다. 그런 이야기. 그리고 뭐 재림 날짜가 어떠니 교회는 이렇게 해서 바르게 해야 된다느니, 내가 요번 수련회 할 때 첫째 시간에 할 거예요. 준비해 놨어요. 고린도전서를 볼 때는 어떤 선입감으로 보느냐? 선입감부터 제시하고 내가 그게 왜 엉터리인지를 내가 첫째 시간에 말씀드릴 거예요.

예수님이 아는 죄와 예수님만 흘렸던 피로 다가오면서. ‘나 이거 죄 지었어. 그러니까 내가 계속 구원받으려면 나의 연속성이 유지되려면 일단 이 죄는 회개하고, 일단 죄는 처리하고, 가뿐한 마음으로 천국 가야 돼.’ 이런 아이디어를 성경 보는 사람, 신약 성경 복음이라고 듣는 사람들 다 그걸 그 생각을 발생시키고 있습니다. 그건 왜냐하면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에. 그런 잘못된 성경 해석을 해석할 수 있는 그 자질이 빡빡하게 있어요. 인간 속에 넉넉하게 있다고요.

그걸 성경을 안 보니까 그걸 나한테 이러한 구원받는 죄가 있는 줄 몰랐지요. 성경을 그동안 몰랐으니까 그동안 절에 가서 불경 외우다가 교회 오니까, 야~ 성경이 복음이 이런 소리 한다는 거예요. 교회 안 나가다가 교회 나오면 막 그런 아이디어가 막 떠오르는 거예요. 나 새사람 됐다고. 내가 주님을 붙들고 찾는 것은 아무짝도 소용없어요. 그건 내가 만드는 소설에 예수님을 나의 소설의 영웅으로 내가 애니메이션 주인공으로 내가 만든 거예요. 내가 만화 쓴 작가고, 예수님은 내 쓰는 만화 작가의 주인공이고 그것밖에 안 돼요.

실제로 오신 주님은 죄와 더불어 피가 오잖아요. 그러니까 피를 받고 난 뒤에 내가 뭘 해도 죄가 된다는 사실을 기쁨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어제도 이야기했지만 갈라디아서 3장 1절, 어리석도다. “너 머리 안 돌아가지” 이런 뜻이에요.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십자가가 안 보여? 나는 보이는데.” 십자가가 뭐냐? 예수님이 저주받았다는 이야기예요.

왜? 너희들은 아무도 모르니까. 죄가 뭔지, 천국이 뭔지, 구원이 뭔지 뭐 백독 했습니다. 그럼 천독하면 압니까? 백독한 그 실력으로 천독해 보세요. 압니까? 그래서 수요일 어제 이야기했잖아요. 되지도 않는 발음이지만, 나라 말씀이 중국과 달라 서로 사맞지 아니할쌔...어제 왕의 임무는 뭐라고 했습니까?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는 거예요. 발명하는 거, 창조하는 것. 그 왕이 누구예요? 이 땅에 저주받은 분입니다.

그 왕이 아까 마태복음 20장에서 “너희 중에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된다. 28절 아까 안 읽었는데 읽어 보면,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그다음에 뭡니까? 대속물. 누가 대속물에 끼어들 수 있을까요? 우리가 끼어들까요? 우리가 끼어들었습니까. 아닙니다. “너 나가! 너 나가 있어. 내가 대속물 돼서 찾아올게.” 찾아오게 되면 세팅되어서 와요. 세팅되어서. 세트로 되어 있어요.

세트에 보면 세트에 항목을 보면 죄인이지 뭐에요. 어? 죄인? 나 죄지은적이 없는데. “아하! 이거구나! 왔다. 장보리!” 하잖아요. “맞다. 이거다.” 이게 뭐냐 하면, 시편51편 모친의 죄중에서 죄의 파동성, 연속성. 모친의 죄는 모친은 또 다른 부모의 죄 옛날부터 내려오는 그 죄가 연속성으로 연속적으로 계속 내려왔다. 왕이 됐든 장관이 됐든 제사장이 됐든 모조리 다 죄의 연속성이었다. 나는 인류의 역사를 이렇게 본다. 이것이 예수님의 안목이에요. 나는 열왕기상, 열왕기하를 이렇게 본다. 죄에 대한 선지자가 받은 핍박과 고난의 역사 이게 열왕기상, 열왕기하입니다.

선지자는 기름부음 받았지요. 왕은 건성으로 기계적으로 형식적으로 받았죠. 제대로 받는 선지자는 영적으로 하나님의 신을 받았어요. 성령이 이기느냐 아니면 인간의 행함이 이기느냐 그 싸움이 신약의 싸움에서 이미 결정 났지만, 구약에서 그 싸움이 열왕기상하를 통해서 벌써 출발하고 있었던 겁니다. 오늘날 그 싸움은 우리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었지요. 이어왔습니다.

이제 한 가지만 설명하고 첫째시간 마지겠습니다. 방금 이 긴긴 이야기를 요 문장으로도 이렇게 간편하게 컴팩트와 간편하게 할 수 있습니다. ‘결과와 원인 사이에 너 끼지 말라.’ 결과와 원인 사이에 “이거 나쁜 짓이니까 다시는 안 하겠습니다.” “이렇게 끼어들지 마!” “이거 나쁜 짓이니까 원인은 이거는 좋은 결과 나오지.” 좋은 결과 안 나옵니다. 좋은 결과 안 나와요.

그러면 그럼 우리보고 어쩌라는 말입니까? 파동은 내가 책임질게. 언약의 파동은. 그러면 우리는 뭐 하면 됩니까? 아까 입자. 물고기. 물방을 분자. 물방을 분자 물결이 친다 할지라도 물 분자는 이동하지 않아요. 그냥 제자리에요. 올라갔다 내렸다 올라갔다 내렸다. 요거 우리 역할입니다. 우리 역할이에요.

성령의 파도가 넘실되면 모든 영광은 주님이 다 몽땅 가져가고 우리는 죄인으로서 제자리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피조물을 통해서 모든 영광과 기쁨은 공로는 이 언약을 홀로 주관하시고 이끌어 가시는 주님 홀로 다 받아내는 거예요. 이것을 가지고 아주 어려운 이야기지만 이걸 가지고 신약에서는 천국이라고 합니다.

천국은 파동, 신약 성경 특히 예수님 당시에 이걸 뭐냐 동사에요. 천국은 다른 말로 하면 언약적변화. 변화입니다. 천국을 고정화시켰던 유대인들이 “죽으면 천국 간다.” 고정화됐잖아요. 명사로. 그런데 실제로 오신 예수님은 천국이 기존의 권세를 아주 박살을 내면서 휘적고 다니면서 거기서 변화를 일으키는 거예요. 두 파동이 마주치는 거예요. 두 파동이.

인간의 권세가 세냐, 예수님의 용서가 세냐 사랑이 세냐, 이 두 파동이 넘실되는 거. 이 두 파동이 넘실되는 이것이 신약 성경에 오게 되면 사도행전부터 오게 되면 성도는 이 두 파동이 중첩돼 있어요. 파동이 중첩돼 있어요.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육으로 생각하더라도 성령께서 다시 한번 우리를 위아래로 흔들어 버리면 다시한번 이 모든 되어진 것이 주님의 대규모 언약의 흐름에 우리가 거기에 이미 속해 있다. 천국 변화에 우리가 포함된 백성으로서 살아가는 겁니다. 이 변화를 일으키는 분이 진정한 왕 중의 왕 우리 주님이십니다. 10분 쉽시다.

 

 

 

안양20250710b신17장18절(권세보다 예언)-이 근호 목사

자, 두 번째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자, 이렇게 보니까 야, 이 선지자라는 게 중심 잡는데 정말 핵심적인 것이다. 신명기 18장에 보게 되면 그 선지자에 관해서 20절에서 22절에 나와 있어요. “그가 여호와의 이름을 말하면 정함도 없고 성취가 없으면 그건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라고 돼 있지요. 그런데 신명기 17장에 보면 누가 나오냐 하면 왕이 나와요. 17장 15절에 보면, “반드시 내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자를 내 위에 왕으로 세울 것이며 내 위에 왕을 세우려면 내 형제 중에서 한 사람으로 할 것이요.” 됐습니다. 거기에 여러분 눈에 잘 띄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왕이 남자만 왕이 될 수 있어요. 형제 영어로 브라더 되겠어요.

여자는 왜 왕이 안 되지요? 이방 민족에 대한 여자가 왕이 있어요. 클레오파트라도 그렇고 시바 여인도 마찬가지로 있지요. 자, 이게 근원적인 것부터 한번 생각해 보자 말이지요. 왜 남자만이 왕이 될 수 있느냐, 인간 세계에 많은 망하는 이유는 여자 몫이 아니고 남자 몫이에요. 남자가 일해서 망하고 여자가 일하면 생명으로 옮겨가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가는 거예요.

이게 바로 창세기 3장 15절에 여자의 후손과 싸우는 상대가 누굽니까? 보통 여자의 후손 등장하면 싸우는 상대가 누구여야 짝이 맞아요? 여자의 후손과 남자의 후손이 싸워야 되는데, 이게 아니고 여자의 후손과 그다음에 뭡니까? 뱀의 후손이죠. 뱀은 남자, 여자를 초월해요. 남자냐 여자냐 관계없이 남자, 여자 위에 군림하는 어떤 이 땅의 권세가 있다. 악한 권세가 있어요.

“남자, 여자와 관계없이 이 땅은 인간이 남자냐, 여자냐, 상관없어. 상관없어.” 이게 악마의 주장이고. “아니야, 남자가 왕이 되어야 돼. 왜? 남자가 일을 조져놨거든. 망해 놨거든.” 그래야 남자가 일단은 일을 조져놓고, 망해 놓고, 그다음에 숨겨 놓은 생명이 이름이 하와 아닙니까. 남자가 조져놓은 이 세상에 여자의 후손, 그때 여자의 후손이 이때 액센트가 있지요. 여자의 후손이 이 세상에서 천국을 만드는 겁니다. 그렇다면 남자로 태어나서 이 땅의 권세 안에서 이 땅의 권세의 파동 안에서 남자로 태어나서 최고 정점에 오를 때 그게 왕이죠. 특히 이스라엘에서. 특히 이스라엘 왕이죠.

그런데 선지자는 사무엘은 어디서 태어났습니까? 여자에서 태어났지요. 여자에서. 그냥 한나의 남편은 “그냥 참아라. 참아라. 뭐 애 못난 여자가 뭐 그런 설움 받아야 마땅하지. 하나님이 안 주시는 걸 어떻게. 참아야지.” 이렇게 되지요. 여자가 남편과 관계없이 단독적으로 기도해서 나온 자식이 사무엘이에요. 사무엘.

그런데 이 사무엘은 한나와 사무엘 연결 빼고 나머지 모든 그 당시의 이스라엘을 완전히 정신적으로 부정해 버립니다. 엘리가문이에요. 엘리가문. 정신적인 지도적 입장의 가문이 날아간다는 말은 곧 이스라엘은 망했다는 것. 그런데 이스라엘이 망한다는 것은 뭐가 부각되는가? 왕의 시대. 왕의 시대로서는 이스라엘은 구원될 수 없고 구원되어야 될 이스라엘이 굳이 이스라엘 된다면 왕의 시대를 공박하고 구박하는 새로운 다른 노선의 새로운 하나님과의 매치 관계 선지자 계열이 등장해야 된다.

선지자 계열. 그게 누구죠? 그게 사무엘이잖아요. 사무엘 그 8장에 지난 사무엘 할 때 8장에 제일 먼저 중요한 사건이 뭐냐? 백성들이 뭘 달라? 우리에게 왕을 달라.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에게는 선지자가 필요 없습니다. 선지자는 한시적일 뿐입니다. 우리에게는 연속성이 필요합니다. 어떤 자동적인 권세가 자동적으로 우리에게 작동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한시적으로 잔소리 하는 잔소리꾼은 우리에게 필요치 않습니다. 우리는 연속적인 권세에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다 받칠 용의가 다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나온 게 사울 왕이었어요. 그래서 왕과 더불어서 누가 같이 망합니까? 백성이 망하고 백성 망하면 왕도 망하고 전부다 둘이 한 통속이 되어가지고 하나님의 인간 세계를 누가 이렇게 저질래 해 가지고 망쳐놨는가? 그것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여과 없이 다 드러내는 역할. 그게 이스라엘이 해야 될 역할이에요.

이방 민족은 망해도 망하는 이유도 몰라요. 망하는 이유는 이스라엘에게만 나와요. 이스라엘에게만. 왜? 이스라엘에게만 뭐가 있기 때문에? 여호와의 보내신 선지자가 이스라엘에게만 거기에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렇다면 제가 제 말을 할 때 여러분들은 생각해야 돼요. 그럼 이스라엘이 가장 어두울 때 어디냐? 역사적으로 가장 깜깜할 때가 어디냐? 언제입니까? 1번, 왕이 없을 때. 2번, 선지자가 없을 때. 몇 번입니까? 선지자가 없을 때. 그게 말라기로 끝나는 완전 계곡이에요. 역사 끝났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그 다음은 없어요. 말라기로 끝났어요. 계시가 역사를 이어가지. 어떤 인간의 왕의 혈통이 역사를 이어가는 것은 이방 민족이나 찾아라, 하세요. 이스라엘은 그런 것 없습니다. 언약의 단절이 단절이에요. 언약적으로 단절이에요. 언약과 언약의 연결은 하나님의 왕 되심으로 연결이고, 그 왕 되심의 연결은 중간 중간에 보조 역할하는 선지자가 이 땅에서 “곧 왕이 온다. 곧 새로운 왕이 온다. 제대로 된 왕이 온다.” 왕이 온다는 이야기를 선지자 입에서 할 때, 오실 왕이라는 이야기를 선지자가 그 왕 오심을 이야기할 때, 그걸 왕의 사자라고 해요. 왕의 사자.

쉽게 말하면, 왕의 긴 망토 같은 거. 왕의 긴 드레스 같은 거 또는 왕의
그림자 같은 거. 이걸 세례요한은 왕의 소리라고 해요. 왕의 소리. 보이스. 왕의 보이스. 여러분! 예수님의 보이스피싱한테 걸린 거예요. 진짜 이거는 이런 복이 어디 있어요? 보이스피싱의 특징이 뭡니까? 완전히 100% 사기죠. 주님이 바로 사기 아닙니까? 따져서 믿을 만한 것은 하나도 없으니까. 요모 저모 따져봤자 전혀 우리한테는 이익 될 게 하나도 없는 것이 바로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인간의 이성과 능력으로 하등 믿을 이유가 없는 게 십자가예요. 왜? 단절이니까. 의도적으로 단절이니까요. 그 단절을 뛰어넘는 것은 선지자의 영을 받지 아니하면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뛰어넘을 수가 없지요.
재미있는 사실은요, 예수님이 십자가 달릴 때, 십자가 달린 사건 이게 십자가 아닙니까? 십자가 이야기할 때, ‘상당히 이거는 정신적이다. 영적이다. 추상적이다.’ 이래 생각하지요. 보통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정신적으로. 그런데 십자가 달릴 때에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휘장이 뭐예요? 이건 뭐냐? 물리적입니다. 물리적이에요. 효과 있다는 거예요. 십자가 사건이 멀리 떨어진 십자가 달린 사건과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 성 밖에서 일어난 거예요. 예루살렘성 밖에 나가서 죽으신 거예요. 성 밖에 나가서 히브리서 12장에 나오잖아요. 우리가 고난을 받자 예루살렘 성 밖에 나가서. 가자. 성 밖에 가면 그 쓰레기통이 있는데, 그 쓰레기통이 게헨나, 지옥이에요. 지옥에 가서 저주받은 거예요.

그러면 그 성전은 휘장은 어디 있습니까? 성전 안에 있겠죠. 성전 안에. 성전 안에 휘장이 누가 막 찢어놓는 듯이 찢어졌다 이 말이죠. 이게 물리적이잖아요. 그냥 정신적 현상입니까? 우리의 정신적인 물리적으로 믿으면 된다. 이런 정신적으로 국한되는 거예요? 아니에요. 실질적인 효과가 있는 거예요. 그 밖에 효과라 하는 것은 이제 해가 어두워지고 뭐 이런 것은 무덤에 있던 자들이 그 예루살렘 근처에 무덤이 많거든요. 그래서 무덤이 열리면서 죽은 자가 부활하고, 부활한 자가 살아가지고 예루살렘 시내에 돌아다니고, 막 그런 이야기 있지만, 그런 거 있지만 그것도 뭐 지어냈다 할 수 있는데, 멀쩡한 휘장이 찢어진 것은 이거 뭐 이것도 지낸 거예요?

일부러 찢어놓고 주님 타이밍을 일방적으로 맞춘 겁니까? 아니잖아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단순히 정신적인 문제가 아니고, 영적인 문제만이 아니고, 이게 물리적인 어떤 결과물을 내고 있다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물리 현상만 쳐다보고 믿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입니까? 야~~, 이 십자가 사건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십자가 사건에. 라면 물 끓이는 것도 십자가 사건과 관련되어있어요.

신명기 18장 15절 보겠습니다. 유명한 말씀이고 이것은 스데반 집사님이 사도행전 7장 설교에도 나온 이야기예요. “내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중에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희를 위해 세우리다.” 참 이런 게 어려워요. 18장 15절에는 하나님께서 모세 같은 선지자 세운다고 돼 있지요. 그런데 17장 18절에 보면 “그가 왕이 오르거든 이제 남자입니다. 여자는 못 올라요. 오르거든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서 보관한 율법서를 등사하여서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배우며 그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키게 행할 것이다.” 신명기 17장 19절은 왕에 대해서 언급했지요.

그 다음에 18장 15절은 선지자에 대해서 언급했지요. 그렇죠? 그 둘 중에 어느 노선이냐 하는 거예요. 어느 것이 비중이 세냐, 어느 것이 우선권을 갖고 지배권을 갖고 이스라엘 역사를 이끄느냐, 신명기에서 딱 이게 투톱이 딱 나와요. 투톱이. 그냥 선지자로 밀어붙이겠습니다. 안 돼요. 왜냐하면 우리는 선지자만 있으면 족합니다. 하는 그렇게 말한 사람은 본인이 본인을 지금 의도하지 않게 속이는 거예요.

우리의 심성은 우연적이고 단편적이고 불확실한 것을 원하는 게 아니고 안전빵으로 권세를 가지고 우리를 안정적으로 늘 보호하기는 왕 같은 존재를 우리가 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왕은 실패작이라는 겁니다. 실패작이라는 거예요. 어떤 새로 나온 우리나라의 영화에 보니까 아주 희한한 영화가 나오는데 거기에 보면 영화의 한 장면이에요. 사람이 있는데 어떤 소녀가 보니까 사람에게 붉은 끈이 없는 사람도 있고, 있는 사람도 있고, 그 하늘에서 붉은 끈이 내려와서 이 사람이 말을 할 때도 이 끈대로 말을 하고, 끈이 이끄는 대로 가는 그 모습을 어떤 소녀가 보이는 약간 괴기스러운 영화가 새로 나왔습니다.

영화 제목은 모르겠습니다만, 어디서 많이 베낀 거 같은 느낌이 들지요. 오순절 성령 베끼는 거 같은 느낌 들지 않습니까? 성령 받은 사람에게는 뭐가 보인다? 이렇게 어떤 하늘과 관계되는 선이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선지자는 뭐냐 하면 단독자가 아니에요. 왕은 모든 인간에서 인간으로 왕이라 하는 권력은 인민들의 권력을 자기가 채취했기 때문에 그 권력은 아래에서 올라온 권력을 지가 최정점에서 그걸 집결시킨 거죠. 그게 왕자리에요. 왕 자리.

그래서 신명기 17장에서 왕의 주의 사항이 옆에 네가 최고가 아니고 옆에 율법이 최고다. 하나님의 말씀이 최고다. 뭐든지 말씀대로 된다는 걸 명심하라고 이렇게 당부를 하는데 어디까지나 당부고, 지킨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제대로 지키지 못해요. 예수님 빼고는 없다 이 말에요.

그런데 선지자는 본인 존재도 한시적이에요. “나 이렇게 선지자에서 오래 살래. 나 선지자에서 호강할래, 노후 대책할래?” 이게 선지자한테는 성립이 안 돼요. 왜냐하면 내가 나를 주도한 게 아니고 하나님의 성신이 임하면 말씀 전하고 성신이 임하지 않으면 뭐 전할 말이 없어요. 전할 말이 없습니다. 뭐 받아야 전하지. 안 받은데 뭘 전해요?

그러니까 이 선지자의 존재를 무슨 존재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가지고 우연적 존재라. 우연적 존재. 오늘날 뭐와 같으냐? 오늘날 성도의 모습이에요. 선지자의 모습이에요. 우연적 존재입니다. 나를 연속적 파동으로 만들면 성령께서 그걸 입자로 중간에 난도질해서 입자로 만든다는 거예요. 어제 나하고 오늘 나와 달라. 연결된다는 것은 성령께서 연결시켜 줘야 어제 너와 나 연결되지. 니 단독으로서는 너는 딱딱 모든 게 끊어졌다는 거예요.

딸 시집보낼 때 내 모습과, 한바탕 싸웠을 때와의 내 모습과 지금의 내
모습하고 다 다르지요.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고.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어떤 사람은 막 비아냥거리고 막 비꼬지요. 뭐냐 하면 “참, 그 문제 해결 쉽네.”라고 자꾸 비꼬는데. 이게 문제 해결이 쉬운 정도가 아닙니다. 천국은 어떤 책임도 지지 않습니다. 천국에서는. “너, 왜 그랬어?” 라고 묻지 않는 게 천국이에요. 이 나라 갈래요, 안 갈래요? 이 나라 전부다 갈래요? 안 갈래요?

지옥은 어떻게 반대입니다. 꼬치꼬치 다 물어요. 꼬치꼬치 다 따져요. 그 나라 갈래요, 안 갈래요? 안 가고 싶어요. 내가 어디서 뭘 했는지 일체 책임을 묻지 않는 그곳이 천국입니다.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누가 너를 송사하리요? 그 어떤 것도 책임지우지 않는 곳이 천국입니다. 아이고 뭐 젊은 애들 해 봐야 귀에 들어오지도 않고, 지가 뭐 왕이 되고 싶어서 환장했는데 이게 들어옵니까? 왕 되지 말고 선지자 되면 좋은데. 자기 자체의 어떤 연속성을 포기를 못 하고 있어요.

“엄마! 내년 생일 때까지 내가 이룬 성과 거두어서 내 엄마 앞에서 내가 얼마나 대단한 자식인 걸 내가 엄마한테 보여 줄게.” “보이지 마. 보이지 마. 그거 옛날에 다 해 봤어. 나도 다 해 봤다고. 그 허세와 허풍 다 해봤다고.” “여보! 걱정하지 마. 내가 퇴직했지만 밥 먹여 살릴게.” “하지 마. 하지 마. 나, 그냥 죽을래.” 개뿔 돈도 없으면서 권세자 행세하고. 꼴에 남자라고.

일종의 왕이거든요. 가정에서 왕 행세한다고 하는데. 그 가족들도 문제에요. “믿어도 돼? 니가 책임져. 니가 남자아이가?” 그런데서 보면 여자들이 얍삽한 게 있긴 있어요. 남자 하나 물어 가지고 지는 놀고. 랄랄랄랄라~~지는 쇼핑하면서 롯데백화점 다니면서 랄랄랄랄랄라~~ 해. 요새 특히 젊은 여자들은 뭐까지 요구하냐 하면, 남편의 아내 사랑 감정까지 또 요구한대요. 돈 벌어 줘야 돼. 아내 개 키우는데 같이 신경 써 줘야 돼. 고양이 키우는데.

아내 감정까지 다 챙겨 줘야 돼. 이거는 남자는 폭발할 것 같아. 세 가지, 네 가지를 하니. 무슨 천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돈 버는 하나도 못하는데 두 가지 다하려하니. 완벽한 남편에다가 완벽한 가장노릇에다가 완벽한 돈벌이에다가 다 하니. 그러니깐 바로 여자도 결혼해서 남자를 만나 봐야 자기 죄를 아는 거예요. 얼마나 욕심쟁이인지.

보통 소개팅 할 때, “왜 당신은 그런 남자를 원합니까?” 여자의 할 말은 단 하나밖에 없어요. 이쁘니까. 아이고 참 그만한 대우받아도 나는 마땅하다는 거예요. 이게 아내인지 여왕인지 구분이 안 되지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선지자는 어떤 존재다? 우연적 존재다. 우연적 존재에 뭐가 성립되지 않는다? 나라는 것이 말씀을 줄 때만 나가 되고. 말씀 없으면 나는 죽은 자가 된다. 고 기능은 선지자의 고유의 기능이에요. 말씀도 오지 않았는데 선지자 보고 “선지자님!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할까요?” “나, 죽었어. 나, 죽었어.”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게 아니고 떡으로 사는 것은 남자고 보통 세상 사람이고, 말씀으로 사는 것은 선지자예요.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모든 이스라엘이 다 선지자 되기를 원한다. 민수기에 나와요. 어떤 장로들이 “뭐 저희보고 모세님처럼 예언을 합디다. 좀 말리세요.” 이렇게 하니까 모세가 하는 말이 “말릴 게 없다. 모든 선지자가 다 같이 나 같이 성령 받아서 성신 받아서 다 같이 선지자 기능 되기를 하나님이 원하신다.” 했어요.

자, 다시 정리해 보면, 선지자는 뭐가 없다? 왕이 없다. 왕은 뭐가 없다? 선지자가 없다. 둘 중에 어느 거 할 거예요? 힘으로 살 거예요? 말씀으로 살 거예요? 같은 질문이에요. 이게 딱 같은 질문이라고. 이 질문을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지금도 우리는 늘 추궁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어떻게 했는가? 말씀으로 고맙게도 말씀으로 그걸 왕의 권세로 이것이 우연적 존재가 아니고 필연적으로 뭘 해도 이게 권세가 있기를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했던 거예요. 그래서 그들은 왕 제도에 그렇게 집착을 했던 겁니다. 그 왕 제도에 집착하는 리스트 한번 읽어 볼까요. 자, 이제 교재 이렇게 교재를 하나 복사해 왔습니다. 내가 쭉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남북 이스라엘 왕들과 선지자>

BC 1050~1010년 사울 왕 40년 동안 통치했지요. BC1010~970년 40년동안 다윗이지요. BC970~930년 40년 솔로몬이지요. 세 명 다 몇 년 동안입니까? 40년, 40년, 40년 광야지요. 죽은 세상 광야지요. 931년에 드디어 남북으로 갈라집니다. 어쨌든 기원전 931년에 나라가 둘로 쪼개집니다. 북쪽 이스라엘은 처음에 여로보암, 나답, 바아사, 엘라, 시므리, 오므리(디브니), 시므리, 오므리는 같이 중첩돼 있던 시기이고. 아합, 아하시아, 요람까지 해서 B.C 840년에 도달합니다. 이쪽 유다는, 르호보암, 아비얌, 아사, 여호사밧, 여호람, 아하시아까지 와서 북이스라엘과 연대를 같이 갑니다. 840년까지는 두 나라가 사이좋게 있어요. 유다 쪽에 왕이 비록 적고 북쪽 이스라엘에서는 왕이 많지만 쿠데타가 일어나서 빈번하게 왕이 교체가 일어났기에 북쪽 나라의 왕의 수명이 얼마되지 않아서 이렇게 맞추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왕만 주목하면 안 되겠지요. 선지자들을 주목해야 돼요. 여로보암에게는 ‘이름 모를 선지자’가 등장하고 그리고 아히야라는 선지자도 등장합니다. 잇도라는 선지자도 등장합니다. 오므리 시대에는 에훗이란 선지자가 나옵니다. 오므리 북쪽 이스라엘을 통제합니다. 이쪽 유다나라에서도 르호보암 시대에는 스마야 선지자가 등장하고 아사왕 시절에는 아사랴, 하나니 선지자가 등장합니다. 여호사밧, 여호람 시대에서는 아하시엘 선지자가 등장했습니다.

자, 선지자가 등장했다는 말은 뭡니까? 계속해서 왕 제도라는 것이 이게 문제가 있고 하자가 있고, 이거는 인간이 왕이 되는 이런 나라는 하나님이 원하는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낌새를 계속해서 선지자를 통해서 준다는 뜻이에요.

그 다음에 계속 봅니다. 북이스라엘에서 요람왕 다음에 예후가 나오고 예후 다음에는 여호아하스, 요하스, 여로보암 2세, 이게 746년까지고, 유다에서는 아하시아 다음에 요시아 있고 아마샤가 있는데 아주 오랫동안 통치해서 왕 둘만 해도 얼추 기원전 746년이 맞춰집니다. 북이스라엘 계열에서, 여로보암 2세 다음에 스가랴, 살룸, 므나헴, 브가히야, 베가, 마지막에 호세아입니다. 이렇게 해서 722년에 망합니다. 유다 쪽은 한참 멀었어요.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므낫세, 아몬, 요시야,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 이렇게 586년에 끝나는 겁니다.

왜 이렇게 남쪽이 이렇게 길게 이어졌는가, 북쪽 이스라엘 지나고 난 뒤에 남쪽에 왕 중에서 하나님 말씀에 맞추는 왕의 왕다운 모습이 등장하는 왕이 한쪽은 완전히 날아가고, 한쪽은 없는 상태에서 남쪽 유다왕에게 그런 현상이 일어났어요.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뭐냐, 하나님께 언약대로 하면 다윗의 등불의 효과가 북쪽에는 없었고, 남쪽에는 살아있다는 겁니다. 다윗의 등불.

다윗의 등불이 뭐냐 하면, 다윗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그렇다면 이 등불은 꺼지겠어요? 안 꺼지겠어요? 모든 말씀을 제대로 된 이스라엘이 나올 때까지는 안 꺼지겠지요. 그 등불의 이음새로 마지막 등장한 분이 바로 예수님이지요. 예수님이 등장하면서 유다나라가 하는 역할이 또 있습니다.

자, 선지자는 우리가 생각하는 생존/생계의 세계, 눈에 보이는 국가에 대해서 마주침의 주체로서 존재합니다. 아무리 한 국가가 평화롭다고 해서 하나님과 전쟁마저 멈추고 있는 상태는 아닙니다. 선지자가 이렇게 등장하게 되면 그 다음에 나온 단어가 있지요. 뭐가 등장합니까? 뭐가 갈라지고? 틈. 틈을 내는 역할을 선지자가 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할 때 그 당시 가짜 선지자와 왕들이 신하들이 자꾸 욕을 해요. 너는 왜 우리한테 욕을 하느냐 하는 거예요. 자꾸 욕을 한다고 이야기해요.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고 예레미야 선지자는 답답해가지고 또 하나님께 일러요. “하나님, 말씀만 전하면 욕한다고 합니다.” 틈이니까 우연성이지요. 뾰족한 것.

반면에 왕의 권력은 연속성이니까. 바로 연속성이니까 단단한 것. 단단하니까 선지자가 뾰족한 걸로 틈을 내는 거예요. 그러면 왕 쪽에서 어떻게 합니까? 선지자를 죽여 버리지요.

자, 그다음에 봅시다. 선지자가 이렇게 등장하게 되면 틈이 갈라지고, 표면층이 균열이 갑니다. 균열 되어있지요. 지구의 표면에, 지구가 이리 있으면, 그 지구 밑에 지각이 있고, 지각 밑에 용암 녹은 게 있어요. 맨틀. 뜨거운 용암 녹은 것이 있어요. 이 지각이 두 종류로 되어있어요. 하나는 뭐냐 하면, 해양지각이 있고, 하나는 대륙지각이 있어요. 해양지각이 대륙지각 밑으로 파고들면 대륙지각은 위로 파고들면서 이 대륙지각은 올라오게 되어있어요. 이 지각이 올라오면서 이것이 지표면까지 밀어 올리면서 응축한 에너지를 밀어붙이면 이게 뭐가 되는가, 지진이 되는 거예요. 지진. 또는 화산이 되는 겁니다. 이건 눈에 안 보이잖아요.

집이 무너진다 하는 것은 지구 표면에 관한 문제지요. 그래서 질문을 “지진이 일어나서 집이 무너졌어요.” 라고 하게 되면 여기 밑에 지각 쪽에서 뭐라고 하겠어요? “표면에 왜 집을 지어놨어?” 집짓기는 왜 집을 지어 놔. 그럼 하나님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이 지구상의 모든 인간은 죽으라고 사는 거야.” 죽으라고 태어나게 한 거예요. 죽으라고.

밑에서 지각이 밑에서 파고드니까 레슬링 할 때 파고들지요. 마찬가지지요. 파고드니까 힘이 약한 쪽은 들리지요. 들리니까 이 들린 것이 지금 인간들이 살고 있는 표면까지 올라오니까 표면에 균열이 일어나는 거예요.

지구 물리학적으로 계산해도 우리가 사는 게 사는 게 아닙니다. 봐주고 있는 거예요. 봐주고 있는 거예요. 밑에서. 밑에서 이렇게 두 지각 싸움에 싸움이 붙으면 이거 위에 다 날아가는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의 에너지가 밑의 땅의 에너지보다 작으니까. 큰 에너지가 작동하면 작은 에너지는 에너지도 아니에요. 아슬아슬합니다. 인간사는 게. 지구의 온난화도 마찬가지고요.

그다음에 봅시다. 이게 이제 현실의 표면층이 갈라집니다. 그러니까 이게 방금 이 지각 이야기는 어디에 해당되겠습니까? 우리 정신도 마찬가지지요. 여자의 후손, 뱀의 후손. 영적존재. 악마와 주님하고 싸우는 그 싸움에 의해서 우리의 정신 구조. 우울증, 불안증세, 초조감, 원망, 불평, 질투, 미움, 이건 뭐냐 하면, 영적 싸움에 결과물이에요.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어요. 불안을 어떻게 잠재웁니까. 초조를, 어떻게 밤에 잠 안 오는 걸 잠이 오게 하겠어요. 양 한마리, 양 두 마리하다가 새벽 4시에 양2,535마리 해서 깼는데. 우리 정신은 우리가 어떻게 통제할 수 없어요.

그래서 잠 잘 잘때는 운동을 해서 잘 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신 거예요. 그냥 우리는 아슬아슬한 존재이고, 수동적 존재이고, 피동적 존재이고 위에서 내려꽂는 권세에 따라서 우리는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격입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인간은.

즉 선지자가 갖고 있는 언약적 효과를 향하여 이 남유다 나라와 북이스라엘이 선지자 쪽으로 당겨지게 됩니다. 남북으로 균열되어버린 이스라엘 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명받은 선지자는 오직 유일한 현실로 인식되는 이 국가라는 조직체 양쪽에서 끌어당겨서 하나님으로부터 의미를 현실층에 쏟아내는 거죠. “망해라. 인간들아. 망하는 것이 답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망했지요.

망함으로서 그들은 뭐를 느끼느냐 하면, 약속의 땅에 하나님이 바다가 갈라지고 유월절 양 잡고 희한한 피 바르니까 똑같은 인간인데 저 장자는 죽고, 이스라엘 백성은 살았잖아요. 그때는 그냥 고맙게 느껴졌지요. 자기가 당연한 줄 알았어요. 나중에 들어간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그 때 그 당시 출애굽 당시 주신 은혜가 이 언약과 말씀을 이루기 위한 효과였다는 사실을 다시 언약을 가지고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 그 때 감을 잡아요.

“야~~, 이건 말씀이 인간이 무서워하는 권세보다 예언이 세구나!” 그 예언이 예수님께서 완성을 이루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이 이 세상에 악마의 권세보다 셉니다. 더 세요. 예수님이 바둑이 9단이라면 악마의 권세는 17급입니다. 게임이 되지를 않습니다. 그걸 믿음이라 하지요. 믿는 자한테는 그냥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라는 고백 이외에는 별로 필요치 않아요.

그다음에 그 밑에 봅시다. 의미가 현실 층에 쏟아낸다면 쏟아낸 현실이 뭐냐, 마치 신발 끈을 조일 때 양쪽을 잡아당기게 되면 끈 구멍으로 나열된 신발은 양쪽 덮개 면이 가운데 덮개로 쏠리는 현상과 같습니다. 바짝 쪼면 뜯길 정도로 바짝 쪼이지요. 그럼 덮개 역할이 중요하지요. 그게 선지자의 역할이에요.

아까 준 거 다른 거 한 번 봅시다. 지도. 이리 보면 있지요. 여기에 보면 남쪽, 북쪽 나와 있고 중간에 누구 이름이 나열되어 있습니까? 선지자지요. 선지자가 어느 왕 때 어느 시절만큼이 돼 있다. 뒤에 보면 큰 거 이렇게 크게 나와 있죠. 크게. 스가랴, 학개까지 나와 있습니다. 스가랴 학개 마지막 그 뒤에 보면 이제 마지막에 더 뒤에까지 나오는데 말라기 선지자 나오는데 이게 연도가 이래서 잘려 말라기는 안 나오지만, 그 전까지의 선지자는 이게 쭉쭉 다 나오지요.

요거 여러분, 9월 달까지 보관하고 가져와야 돼요. 왜냐하면 이 다음에 또 역대기가 돼 가지고 또 이 그림이 또 필요하거든요. 이 두 달 동안에 화장실에 가서 심심할 때 휴대폰 보지 마시고 이거 보시고 볼일 보시기 바랍니다. 화장실에서 집중되니까. 할 일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이 역대하, 역대상에 나온 왕하고 선지자 이야기가 이 도표 두 장으로 다 나온다. 보시면 돼요. 9월 달에 갖고 나오신다 해도 안 나올 거예요. 그래서 내가 또 준비할게요. 계속해 봅시다.

신발 끈을 딱 쪼이는 거예요. 그러면 선지자 층과 그 밑에 왕 층에 틈이 생기면서 왕은 백날 해 봐야 결국은 이게 아까 처음에 했던 하나님은 왕 이스라엘의 왕 제도를 망치는 동시에 이 세상의 모든 민족의 왕을 갖고 있는 이 민족을 하나님께서는 소멸시키는 의도가 처음부터 있었다는 것이 등장하지요.

그런데 그 위에 붕 뜨는 것. 붕 뜨는 게 무슨 세계? 선지자의 세계죠. 주체가 없고 주체는 따로 있고 말씀만 전달받는 그 사람들의 세계. 그게 선지자의 세계거든요. 그 선지자의 세계가 밑에 가라앉는 이스라엘 세계를 대체할 새로운 이스라엘로 등장한다. 이스라엘로.

혹시 제가 이렇게 하면, “목사님, 그거 진짜예요?” 이래 나온다면 제가 이렇게 합니다. “휘장 끝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진짜입니다.”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그 근처에 있지도 않은 멀리 떨어져 있던 휘장이 찢어졌다는 말은 십자가 사건이 진짜라는 거예요. 물리적인 진짜라는 거예요. 하도 요새는 물리적이 아니면 진리로 생각을 안 합니다.

자, 그다음에 봅시다. 구약을 보면 이사야 예레미야, 예레미야애가, 에스겔, 다니엘,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가 나오는데, 예를 들면 그림 이야기하는 거예요. 선지자 요나는 그림에 보면 어디 있느냐, 여로보암 2세때 있어요. 위쪽은 엘리야 담당이고 바로 밑에는 요람부터 해서 엘리사 담당이고, 그 밑에는 요나부터 나오는 선지자 등장하지요.

BC 931년에 북이스라엘과 남쪽 유다로 갈라졌습니다. 그건 아까 이야기했고, 이렇게 정리될 수 있습니다. 양쪽으로 국가가 갈라져 있습니다. 그 가운데 선지자가 배치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양쪽 국가를 당겨주는 기능을 선지자가 하게 됩니다. 맨 처음 이름 모를 선지자로 출발해서 예후, 엘리야, 미가야 선지자의 역할이 강조됩니다. 즉 인간들 이 세상에서 어떤 짓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약속은 여전하고 일관됩니다. 그냥 일관적으로 차질 없이 이루어진다. 이걸 한국말로 하면 ‘아멘’이라고 합니다. 아멘.

실제로 주님의 일하신 파동은 어떤 경우라도 모든 것이 아멘이 된다. 아멘이 된다. 그거는 고린도후서 1장 20절,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언제든지 아멘이 된다. 아멘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예가 된다. 아멘 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우리끼리는 아멘이 되는데, 그럼 안 믿는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그게 고린도후서 2장 16절에 나옵니다. 요건 중요하기 때문에 누가 한번 읽어 보세요. 고린도후서 2장 16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다.” 아멘. 진짜 아멘입니다. 하나님께서 두 쪽으로 갈라지게 했지요. 중간에 예수님이 있었고, 선지자니까 잡아당기는 거예요. 예수님 때문에 양쪽이 다 두 패로 갈려지는 겁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우리입장에서 이상하게 똑같은 인간이고 똑같은 인간인데 한쪽은 향기고, 한쪽은 악취로 느껴지는 그것이 희한한 현상이라는 거예요. 그게. “죄 용서하십니다. 여러분의 죄를 용서합니다.” 아무리 복음의 기쁜 소리를 전해도 “고마 해라, 많이 묵었다.” 해가지고 안 들어요.

그게 그 이유는 이제 고린도후서 4장에 나옵니다. 중간에 누가 끼어들어요. 선지자에 반대되는 적그리스도가 끼어들어 가지고 복음의 광채를 복음을 기쁘게 못하도록 방해하는 세력이 이 세상 신이 그렇게 방해한다는 거예요. 고린도후서 4장 4절, 이 세상 신이 믿지 않는 자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한다.

이제 이 강의를 끝내면서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던 것은 그 권세 있잖아요. 권세. 가인의 권세. 권세가 신약 시대 보면 이게 뭐냐 하면 사탄의 권세예요. 사탄의 권세는 이 세상에 어떤 흠집이나 틈이 나면 안 돼요. 꽉 차 있어야 돼요. 그 권세로 꽉 차 있어야 돼요. 권세로. 보이지 않는 왕이에요. 보이지 않는 왕. 보이지 않는 왕의 눈치코치를 보면서 인간들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노골적으로 그 악마의 권세라 하면 될 텐데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이 이방 민족이 되었어요.

자, 이방 민족을 이제 공부를 했으니까 복습해 봅시다. 이방 민족의 특성은 뭐가 없다? 선지자가 없다. 같은 말로 언약이 없다. 같은 말로 율법이 없다. 같은 말로 말씀이 없는 거예요.

자, 말씀이 없으면 힘은 어디에 직결된다? 바로 인간이 뽑아 세운 그 개인에게 집결돼요. 둘이 되면 이게 힘의 균형이 갈라서 안 돼요. 윤석열, 이재명 둘로 갈라서면 안 돼요. 뭐 한쪽으로 몰아붙여야 한쪽을 구속시키던지 해가지고 한쪽으로 이게 몰아 붙여야 돼요. 나라가 돼요. 이게. 나라가 된다고요.

항상 구심점은 하나야 돼지 둘이 안 돼요. 하늘의 태양이 둘이 될 수 없듯이. 부부가 서로 마음 맞추고 이렇게 해야 뭐 가정이 편안하다고요? 부부가 마음 맞출 리가 없어요. 한쪽의 권세를 상대방에게 양도하면 그게 아내든 남편이든 그 사람이 가장이 되는 거예요.

“아이구, 내가 참아야지.” 이러면 이제 양도한 거예요. “이게 내 존재를 무시해?” 이러면 이제 지가 자진해서 가장이 되는 겁니다. 그 가정의 그 모습이 현재 이 땅의 악마의 나라의 권세를 빼 박았지요. 그대로 빼 박은 겁니다.

P.111 페이지 교재 봅시다. 중간에. 언약의 공동체가 하나님의 약속을 어겼으니 존재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이 파괴될 수 없다. 그들은 이방 나라에 들어감으로서 땅을 비워둔다. 여기 땅을 비워둔다. 땅을 비워둔다. 요 설명을 하고 마치겠습니다.

“그들이 실패했으면 끝나잖아. 그런데 땅을 왜 비워두지?” 이 문장 때문에 그래요. “그 땅에 무슨 일이 일어나지?” 이 땅에. 같은 뜻인데 요게 더 분명합니다. “그곳에 무슨 일이 있었지?” “그곳에 무슨 일이 있었지?” 여기서 그곳이라는 것은 인간 세계에서는 그곳은 없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이미 인간의 권세로 꽉 차 있어요. 빈 곳이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했습니까? 빈 곳을 만들었지요. 빈 곳이 있으면, 빈 곳이 생겨 버리면 그거는 뭐냐? 아무것도 없어요. 왜? 비어 있으니까 없어요. 없는데 뭐가 일어났습니까? 그 없는 쪽에서 무슨 일이 생겼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은 비워놓고 인간들이 예상 못한 어떤 What happening? 무슨 일이 있지? 무슨 일을 일으키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겁니다. 비워놓고.

그런데 인간 세계에서는 꽉 차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스스로 자기가 죽으시지요. 스스로 죽었습니다. 죽게 되게 되면 예수님이 죽는 공간은 인간입장에서는 이미 인간의 사형시켰다는 법률로서 예수님이 있는 거처를 덮었다고 자부하잖아요. 덮었다고 자부했지요. 맞지요? 예수님마저도 세상 권세를 이기지 못했어요. 그런데 여기서 부활이 돼 보세요. 부활. 부활.

저 충남서해안에 조석 간만이 제일 심한 곳에 갯벌이 생기잖아요. 처음에는 물로 있다. 지구가 달에 딸려가면서 지구의 혓바닥 바닷물이 에~~ 하고 내밀잖아요. 달쪽으로 딸려가지요. 딸려가게 되면 거기에 갯벌이 나오지요. 갯벌에 보면 조개 잡으러 가는데 조개가 있으면 잡는데, 조개가 없어요. 없는데, 뭐만 있어요? 빼꼼 빼꼼하게 빈 구멍만 있는 거예요. 빈 구멍만. 주님의 부활은 뭐냐? 구멍이에요. 이 땅의 권세에 구멍 난 거예요.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사도 바울이 하는 말이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남이 없으면 너희들의 모든 믿음은 헛것이라 했어요. 헛것이다. 성도가 뭐냐? 그 구멍에서 기어 나온 사람들. 그 없는 데서 생긴 사건이 성도예요. 그래서 성도가 누구 보고 놀라느냐 하면, 본인 보고 놀라야 돼요. 본인보고 놀래야 돼요.

지난 그 낮 설교 그 끝부분에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 36도가 되는 그 더운 날에 세 시간 동안 교회 천장에 그 등 떨어진 걸 고정하는 작업을 했어요. 할 수 있어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봉사해 놓고 티도 안 내고 생색도 안 내는 게 특이성이라 했지요. 특이성. 그 말 할 때 찔리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닐 겁니다.

왜 헌금을 해 놓고 왜 티를 내느냐 이 말이지요. 왜 봉사해 놓고 봉사 티를 내느냐 이 말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티를 내지 않아요. 그분이 그래요. 원래. 내가 보기에는. 본인이 뭘 했다는 의식이 없어요. 주의 종이기 때문에.

형광등이 떨어진다. 저건 달아라, 고 주께서 지시한 거 같아. 달면 되고. 온도가 덥다. 여름이지 뭐. 여러분은 덥지 뭐. 남한테 뭔가 너희들은 놀았고 나는 너희들이 교묘하게 나 안 할려는 때문에 너희들 때문에 나 혼자 고생해서 나는 당신들에게 이용당했어. 라는 타인에게 할 말을 하기 위해서 일하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누굴 쪼다로 아나? 응? 뺀지리들. 나만 쪼다인가?” 이런 거 있잖아요. 그런 투로 이야기하는 그런 발상이 떠오르지 않는 거예요. ‘내가 일할 때 저는 편안하게 있을 거다. 아, 이거 분해라. 이거 어떻게 복수를 하지?’ 이런 생각 자체가 발상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거예요. 자기는 없는 데서 주시는 힘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없는 데서. 이게 비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 이제 열왕기상과 하를 보면서 왜 왕들이 그렇게 재벌 2세 3세들이 나대는지를 알 수 있겠지요. 남한테 “여러분! 내가 이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내 권세 밑에서 탈출할 생각하지 마세요. 내 덕분에 여러분 삽니다.” 전부 다 자기 행함에 대한 보상을 얻고자 하는 라멕같은 존재들입니다. 모든 인간들. 전부 다 쓰레기라 보면 되죠.

열왕기상, 열왕기하는 마지막에 어떻게 끝나느냐, 그래서 망했다. 그래서이스라엘 망했다. 사람이 남하고 경쟁해서 남한테 같이 밉보이지 않기 위해서 남한테 졌다는 소리를 안 듣기 위해서 이기기 위해서 애쓰는 그것이 본인을 망치게 만들지요. 이게 얼마나 어리석은지 몰라요. 경쟁할 필요도 없는 허상 같은 좀비 같은 인간하고 싸운다고 내 인생을 다 날려버렸어요.

“이래도 날 무시할 거야?” “지금 당신 누구보고 이야기했어요?” 지금 있지도 않은 허수아비 보고 이야기한다고요. 본인도 허수아비이고, 하나님의 영이 오게 되면 우리의 싸움은 주님이 대신 다 싸워주고 우리한테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바르게 살자. 바르게 살면 인간입니까? 그거는 자기 본색을 선악 체계를 그냥 노출시킨 것밖에 안 되지요.

바르게 사는데 그냥 바르게 사는 게 아니고 티내려고 생색내서 바르게 살았으니까 보상해 달라. 주식값 오르게 해 달라. 이런 거죠. 자식 잘되게 해달라. 뭐 도대체 이게 무슨 나라예요? 이 세상 나라지요. 권세 나라지요. 권세 없어서 환장한 거 그거 우리 모습이지요. 주께서 날마다 우리를 날마다 없애 주는 것에 있어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천하에 어리석고 어리석은 우리들. 하나님 힘 빌려서 남한테 기죽지 않으려고 살아가는 철딱서니 없는 게임에 빠진 우리들. 얼마나 마귀가 웃고 조롱하고 있는지를 모르면서 남들 뒷꽁무니 따라가는 저희들 바로 이 권세에서 주께서 세트로 죄와 피를 보내 주셔서 우리는 이제는 우리의 모든 싸움을 우리가 할 게 아니고 주께서 다 이루었다는 사실을 결과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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