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강의

썩은 사과

아빠와 함께 2025. 10. 27. 21:02

안양20251016a에스라1장1절(썩은 사과)-이 근호 목사

116페이지. <에스라와 한국 교회>. 오늘 에스라와 느헤미야 같이 하겠습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핵심 내용은 이스라엘이 남의 나라에 이방 나라에 포로 잡혀 가야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된다는 그 내용입니다.

자체적으로 있을 때는 이스라엘이 스스로 자기 환상을 만들어내요. 우리가 택한 백성이라는 환상.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 자체적으로서는 왜 이스라엘이라는 의식자체가 이게 환상에 불구하고 이게 가짜 이스라엘 될 수밖에 없는가?

그것은 그들이 애굽에서 처음부터 이스라엘 만들어진 게 아니고 애굽에서 살던 자를 그 중에서 뽑아서 이스라엘 되게 했거든요. 애굽에서 살던 자예요. 애굽에서 살던 자를 이스라엘을 뽑아낼 때에 그 뽑아내는 그 방식이 언약이었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으로 뽑아내었어요. 유월절 어린양.

인간이 인간을 이끌어내는 것은 모세의 아이디어였는데 그게 거부당해요. 인간이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 특징은 인간은 인간을 구원해 내지 못한다. 인간에다가 나를 대입하는 거예요. 나는 나를 구원하지 못한다.

어떤 사람이 물에 빠졌다. 물에 빠졌는데 자기가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그 물에 빠져서 운동화 신고 있을 때 운동화 끈이 있을 거 아니겠습니까? 자, 그 끈을 잡아당기면 자기가 물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요? 운동화 끈을 물에 빠진 상태에서. 다리만 발만 올라오겠지요. 그런데 그 대신 몸통은 도로 더 깊은 물속에 빠지겠지요. 인간은 자기에게 손대서 되는 일이 없습니다. 되는 일이 없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뭐냐 하면 자기 말고 남들에게 살려 주세요. help me. 살려 주세요.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자기를 살려 달라. 우리 인간이 인간을 구원하는 방법이에요. 그런데 남이 타인이 나를 살려 달라 할 때, 그 타인이나 나나 똑같이 인간에 해당된다면 이거는 구원에 실패합니다. 구원이라는 게 성립이 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특징은 구원하지 못한다. 그러면 어떻게 이스라엘이 자체가 이스라엘 자체 나라가 없는 거죠. 그래서 다시 한번 정리하면 인간의 아이디어 속에는 이스라엘은 없다, 가 돼요. 인간의 아이디어에서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없습니다.

대신에 애굽이라는 나라가 터 잡고 있지요. 애굽이라는 나라. 애굽에서 잘 살기를 원하는 거죠. 이스라엘이 되려면 애굽을 기피해야 돼요. 애굽을 거부해야 돼요. 나 애굽에서 안 살래. 나 이스라엘을 살래. 그래야 이스라엘 되는데 인간은 인간의 그 총체 인간의 모든 의식과 삶의 기준의 총체가 애굽이에요.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 아브라함의 자손을 애굽에다 집어넣어서 거기서 양성시킨 겁니다. 애굽은 이스라엘의 양성소. 양성소. 바사나라. 지금 에스라, 느헤미야의 배경은 바사나라예요.

바벨론은 이스라엘을 해체 시킨 나라가 바벨론이에요. 없어져라 이스라엘, 흩어져라 이스라엘. 이게 이제 바벨론 역할이고, 그 바벨론에 갔던 그 바벨론에 잡혀갔던 그들은 더 이상 이스라엘은 아니에요. 이스라엘 아닌데 그 이스라엘 없는 데서 바사나라가 등장하면서 특히 고레스라는 사람이 등장하면서 너희 종교 찾아가라, 하는 그러한 엄명에 의해서 그들은 바벨론도 아니고 바사나라가 아닌 우리만의 특별한 나라를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는 사실. 그 사실을 그들은 경험하고 돌아온 자가 에스라, 느헤미야였습니다.

이사야 45장에 보면 고레스를 찾고 있어요. 고레스라는 이 왕은 바벨론 아닙니다. 바벨론이 멸망하고 그 다음에 바사 나라에 속한 자가 고레스예요. 그 고레스에 의해서 너희 종교 찾아서 해라 할 때 그 고레스를 이사야에서는 뭐냐? 메시아라고 이야기했어요. 메시아. 하나님 메시아. 그러니까 이 메시아 오기 전에 메시아 장차 올 메시아가 어떤 일을 하느냐를 미리 앞당겨서 모델로 세워진 그 사람이 이방 나라 왕인 고레스입니다.

이 고레스는 뭐냐? 기름 부은 자에요. 기름 부은 자 고레스가 너희 종교 찾아가라고 한 거예요. 그러면 바사나라는 뭐냐? 바사나라 페르사나라인데 바사나라 페르사 고레스왕이 바사나라는 뭐냐? 이스라엘을 보관한 은행 금고. 은행 금고. 이스라엘을 안전적으로 지키기 위해서 안전적으로 고레스를 한 거예요.

이 고레스가 뭐냐? 메시아라 했죠. 메시아. 그러면 도대체 지금까지 이야기한 거 의하면 이스라엘은 없는 거예요. 왜 없느냐 하면 인간 머리에는 이스라엘이 없어요. 인간 아이디에는 이스라엘이 없어요. 인간 좋아라고, 인간 행복하라고 만든 나라가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이스라엘 되고 난 뒤부터는 이 뭔가 착각을 해가지고 이스라엘이 함으로써 우리는 복을 받고 행복하다 이런 쪽으로 정황 다 떼어버리고 뭐 어떻게 되는지 그건 다 떼어내고 나는 이스라엘 속에서 하나의 하나님이 지켜주는 나라에서 백성으로서 그냥 행복할래, 이런 쪽으로 이제 밀어붙이는 거죠.

인간 머리에는 이스라엘 없는데, 그들은 이스라엘이 어떤 내력으로 이스라엘 됐는가는 그거는 모르겠고 그런 관심도 없고 지금 이 약속의 땅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에 대해서 얼마나 행복하냐, 그걸로 족하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바로 애굽이고, 그게 바로 바벨론이에요. 그게 애굽 바벨론입니다.

내가 인간으로서 인간의 내 행복을 추구하는 게 이게 뭐가 나쁘냐? 행복을 추구한 게 뭐가 나쁘냐? 이것은 이스라엘뿐만 아니고 모든 이 세상의 인간들은 전부 다 그렇게 생각했던 거예요. 그렇게 생각한 거예요. 어떤 특이점이 없습니다. 네가 생각하는 거 똑같고 내가 생각하는 거와 똑같고. 그러니까 굳이 거기에 대한 구출 또는 구원이라는 게 성립이 되지 않아요.

인간은 이런 겁니다. “너, 어떻게 살고 싶어? 어떤 인생을 살고 싶어?” 물으면 “나는 내 마음 맞는 사람하고 같이 살고 싶어.” 이거예요. 마음 맞는 사람. 그러면 “네 마음에 문제 있다는 것을 네가 알아? 몰라?” “그거는 내가 알 필요 없지. 나는 내 마음 맞는 사람만 하면 되니까. 내 마음만 사람 안 하면 되니까 그 뭐 내가 내 행복하면 그만이지. 뭐.” 내가 옳다 그렇다 할 그러한 것을 내가 생각하기도 싫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애굽이고 그게 바벨론이고 바사나라고 이스라엘이고 전혀 차이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뭐가 성립이 안 돼요? 구원? 구출? 그게 뭔데? 왜 그래야 되는데? 애굽 같은 세상에서 그냥 마음 맞는 사람끼리 행복하고 오손 도손 잘 살면 그만인 거예요. 이 본능 죽을 때까지 계속 갑니다. 이 본능이.

마음 맞는 사람이 없어서 문제인 거예요. 터놓고 내 마음 다 들어주고 또 내 마음 위로해 주고 뭐 그런 사람이 없어서 문제지. 그래서 우리가 이 강의 초반에서 언급하는 것은 바로 이스라엘은 없다. 없는데, 바사나라가 은행 금고에 보관해 놨다. 보관했을 때 빨리 너희 종교 찾아가라 할 때, 그게 무슨 기능? 메시아적 기능. 기름 부은 자의 메시아의 기능이다. 이 말이지요.

이스라엘은 사람이 사람을 구원하는 것을 반대해서 어린 양이 새 사람을 창조해서 만든 나라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어린양. 어린 양은 뭐냐 하면 짐승이에요. 가축입니다. 사람 아닙니다. 인간보다 못하고 인간이 충분하게 다를 수 있는 인간이 다룰 수 있는 그러한 대상이 어린양. 인간이 죽이려 하면 죽으라 하면 그냥 죽어야 되고 그럴 수밖에 없는 거예요. 어린양이니까 어떻게 됩니까? 굉장히 연약하고 약하죠. 연약하고 약한 거예요.

약하디 약한 이 어린양이 새 사람을 창조한다. 그런데 어린 양이 살아서 새 사람을 창조하는 게 아니고, 이 새 사람은 어린 양의 죽음을 아예 포장을 해요. 여기다가 페인트 피로 그 죽음을 페인트를 칠해 버리면 죽음에 의해서 페인트칠 되게 되면 페인트칠을 한 나는 어린 양의 죽음에 합류되죠. 어린 양의 죽음에 합류되는 거예요.

이 어린 양의 죽음 이걸 가지고 하나님의 언약이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약속이라 하는 거예요. 약속. 그래서 내린 결론은 이스라엘은 약속이 만들어낸다. 그래서 이스라엘이라는 것은 뭐로 아느냐, 그 안에 하나님의 약속이 그대로 살아 있는지, 하나님이 살아 있지 않은지, 하나님의 약속이 살아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이고, 하나님이 살아있지 않다면 그건 이스라엘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그 은행 창고 역할하는 바사나라에서 준 강제로 너희 종교 가져가라 했을 때, 그들이 반강제로 자율적이긴 하지만 에스라 느헤미야가 그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그 황폐한 그 가나안 땅으로 돌아와서 그들이 진짜 하나님 언약이 살아 있는 이스라엘 되기 위해서 그들이 할 수 있던 것은 뭐를 어떤 걸 할 수 있지요?

어떤 식으로 해야 그들이 진짜 이스라엘에 부합되는 그런 삶을 살 수 있겠어요? 그들의 아이디어는 이제 끄집어내는 아이디어는 뭐냐? 그들은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우리가 이 이스라엘이었던 적이 있었다. 이스라엘이 깨어졌지만. 깨진 이스라엘을 하나님에 의해서 깨트리고 이제 하나님에 의해서 다시 우리가 이스라엘로 뭉쳐야 되는데 그 뭉칠 때 그들의 에스라, 느헤미야 아이디어는 이거예요. 우리가 깨질 수밖에 없는 그 문제점을 빼는 겁니다.

그러한 잘못을 이제는 우리는 두 번 다시 안 하면 되고, 그다음에 하나님께서 원했던 것을 우리가 행함으로 실제로 그걸 보여 주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이 옛날 이스라엘을 회복할 수 있다는 그런 아이디어를 그들은 그런 생각으로 그들은 뭉쳤던 겁니다. 포로 잡혀 들어왔던 사람이.

그럼 여기 두 가지가 있지요. 에스라 느헤미야가 이게 바사 사람이에요. 에스라 느헤미야가 생각하기를 우리가 이스라엘이 깨질 수밖에 없었던 그 원인은 무엇이냐고 그들은 정리했을까요? 우리는 무엇 때문에 우리는 이스라엘이 망했다는 그 원인을 제거해야 되니까 빨리 잘못한 것은 알아서 우리는 두 번 다시 안 그러면 되잖아요. 그러면 그들이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 결정적으로 잘못된 게 어떤 게 있느냐 그게 바로 왕 제도였어요. 에스라, 느헤미야는.

이방 나라와 차이점을 두자는 거예요. 이방나라와. 이방 나라는 전부 다 누가 있어요? 왕이 있지요. 우리 이스라엘이 이방 나라처럼 흉내 내 가지고 우리가 왕을 세웠는데 그게 결정적 잘못이었다. 이게 잘못된 것이다. 우리 왕 세우지 말자. 왕 제도하지 말자. 그런데 이 왕이 없으면 어떤 점에서 도움이 되냐 하면 왕이 없으면요. 다른 민족 보기에 그게 나라 같습니까? 나라 같지도 않은 겁니까? 나라 같지도 않은 거예요. 왕이 없는데. 여러분, 왕이 없다면 그건 나라입니까? 나라 아닙니까? 그건 나라 아니죠.

왕이 있어서 독자적인 나라가 구성되는 거지. 나라라고 하면서 “너희 왕은 누구냐?” “우리 왕 없어.” 그러면 나라 아니죠. 나라 인정받지 못해요. 이 나라 인정받은 받지 못한 점이 어떤 점이 유리하냐 하면 나라 같지도 않으니까 남들부터 공격 대상이 안 됩니다.

그러면 나라가 있고 그 나라의 강력한 권력을 집결해 있는 왕으로부터 공격을 받지 않지만, 그러면 혜택은 그들로부터 혜택이 있어져야 되는데 그 혜택은 바로 기존의 세상 왕의 보호를 받고 보호를 받아서 이 이스라엘이 의도적으로 남하고 싸움을 할 필요 없이 이스라엘을 이렇게 장악한 나라가 이스라엘 대신해서 다른 나라 이스라엘을 괴롭힌다면 다른 나라가 이스라엘 대신해서 전쟁해 주면 되지요.

어떻습니까? 이 아이디어 어떻습니까? 괜찮죠? 괜찮은 거예요. 그러면 바사나라 입장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요건은 뭐가 되겠습니까? 너희 종교대로 하되, 너희 종교는 종교대로 하되, 왕 뽑고 군대 만들고 그런 짓은 하지 마라. 오케이? 오케이! 그 대신 우리 바사나라에서는 너희들이 성전 짓는 거 그 모든 비용 그 자재 일꾼 다 대줄게. 오케이? 오케이! 그렇게 된 거예요. 이게 에스라 느헤미야입니다.

이 나라에 땅을 딛고 백성 그 어떤 사람들이 집결 했는데 뭐가 없다? 왕이 없는 거예요. 그러면 다른 나라의 입장에서는 그거 뭐 나라 같지도 않지요. 누가 공격하면 뭐 군대가 있어야 뭐 대비를 하죠. 누가 와서 다 잡아먹을 수 있는 그러한 나라 같지도 않은 나라가 된 거죠.

자, 그러면 에스라 느헤미야가 왕 자리에 대신 그걸 집어넣는 요소가 무엇일까요? 왕은 없어요. 왕은 없는데 뭔가 사상적으로 정신적으로 집결해가 있는 집결할 수밖에 없는 요인은 무엇일까요? 무엇일까요? 그게 바로 율법입니다. 율법.

율법을 현실로 만들면 되지 않겠는가? 그러면 율법은 율법이 되려면 우리는 왕 없이 직통으로 하나님께 통하려면 누가 있었는가? 제사장 있어야 되겠지요. 그럼 제사장은 율법에 의하면 아무 지파 되는 게 아니에요. 레위 지파가 돼요. 그래서 돌아올 때 레위지파 위주로 돌아오고 점호할 때 명단이 레위지파 우선적으로 명단을 발표해 버립니다. 레위지파를 필요하고 제사장이 필요하다는 말은 이제는 왕 모시고 하는 나라는 우리는 안 한다. 다만, 제사를 드림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약속 언젠가는 우리가 다윗 시대 같이 이 세상에 지배적인 나라가 될 때를 우리가 사모하는 사람 다 모이자. 사모하는 사람 다 모여. 그리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제가 이 아이디어를 끄집어냈는데 여러분들은 이것이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이스라엘이 바로 그런 이스라엘이라고 여러분이 여기십니까? 어떻습니까? 이런 아이디어가 오래 갈 것 같아요? 안 그러면 파토 날 것 같아요? 에스라 느헤미야 파토 났습니다. 파토 났어요. 파토나면서 그들은 뭘 모르냐 하면 우리가 율법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그들은 몰랐어요.

그들은 과거를 조망하는 사람들이에요.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이 아니에요. 과거에 자신들이 어디에서 허점을 보이느냐? 왕이 있어서 그렇다. 왕이 있게 되면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율법을 왕이 왕 개인의 욕구와 욕망 권세에 대한 욕구가 이것을 하나님과의 제사 관계를 훼방하고 방해한다. 그렇게 그들은 과거를 그런 식으로 해석을 했었습니다.

자, 그들이 과거에 충실하자. 과거에 충실 하는 요건은 제사의 충실. 제사장에 의해서만 제사. 제사하는 장소 건립. 이게 뭐냐 하면 성전을 재건. 성전 재건이지요. 다시 세우는 것. 성전 리모델링하는 것. 그다음에 율법을 잘 지키기 위해서 율법이 과거를 생각해 볼 때 율법을 위반했던 것은 마누라 잘못 만난 거예요. 이방 아내와 결혼해서 이방 아내가 자식을 낳게 되면 자식 교육은 누가 담당입니까?

원래 남자가 해야 되는데, 남자가 바쁘니까 여자가 담당할 때 이게 바로 율법이 없는 이방 교육을 자식에게 해서 그것이 대세를 이루었다. 사상이 대세를 이루었다. 따라서 이렇게 되니까 이 자식이 씨가 정신적으로 올바른 언약적인 하나님의 약속의 핏줄이 아니고 자꾸 이방 쪽으로 넘어가니까 온전한 아브라함의 정숙한 씨의 보전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여자부터 물갈이해야 된다.

그러면 이미 자식을 낳으면 어떻냐, 그 아내한테 물드는 자식도 다시 저 아내와 같이 살도록 그냥 내쫓아 버려야 된다. 하갈이 어땠어요? 하갈이. 하갈의 행동에 대해서 그 아브라함의 사라의 태도가 어떻습니까? 내어 쫓아라. 했지요. “내어 쫓아라.”가 그게 하나님의 명령입니까? 아니면 인간의 명령에서 나온 거예요? 내어 쫓아라. 하나님의 뜻이었지요.

그러면 그 하나님의 뜻을 지금 계속 지켜내려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에게 일어난 아브라함이 결단한 그 결정을 지금 그 시대에 받아들이면 하나님 보시기에 너희들은 아브라함의 자손답게 제대로 행동했다. 이게 딱 결정돼서 나오겠지요. 그리고 그 입장에서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조망을 해 보니까 과연 나라꼴이 이 꼴이 된 것이 바로 그 이방민족과 관련된 여자와 혼인해서 생긴 결과로 보는 거예요. 이방민족.

그다음에 제사장에 의해서 제사를 드리려면 여기 뭐가 필요 하냐 제사장들은 농사짓기보다는 제사에 충실하기 위해서 여기 뭐가 필요합니까? 십일조지요. 그런데 에스라 느헤미야의 입장에서 율법의 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 재건을 성취하려는 인간적인 방법은 바로 성전을 재건하고요. 성전을 짓고 성전에서 제사장 모시고 할 때 제사장이 유지할 수 있도록 십일조 대고 그다음에 율법만 가르쳐야 되니까 율법. ‘우리보다 율법이 우선되니까 율법 우선되는 율법을 제대로 가르쳐야 되기 때문에 그 율법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율법에 방해되는 이방 여인 여자들과 이혼하고 새로운 씨로서 율법의 사람들을 키우면 된다.’ 라는 게 에스라 느헤미야의 생각이었던 겁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생각이 어때요? 성경 에스라 1장 1절 한번 보겠습니다. 역대하 그다음에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역대하였죠. 아사왕 고레스 나오지요. 이사야44장 28절에 보면 고레스에 대하여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45장 1절에 “여호와께서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고레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그의 오른손을 붙들고 그 앞에 열국을 항복하게 하며 내가 왕들의 허리를 풀어 그 앞에 문들을 열고 성문들이 닫히지 못하게 하리라.” 기름 부었다는 말은 메시아 주께 주님이 하는 일을 행하는 자 이게 메시아지요. 이 모든 고레스의 메시아적 역할이 45장 4절 보면, 내가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이스라엘 위하여 내가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나를 알지 못할지라도 내가 너희를 칭호를 준다. 그렇게 했어요.

그리고 이 예레미야한테 예언하기를 잘 들어보셔야 돼요. 성경에서 계속 내가 이야기하는데 이 이야기가 모든 게 어디 집중되는가 한번 보세요. 예레미야에 이야기하고 역대하 마지막에도 그게 나와요. 예레미야에게 약속한 게 있어요. 역대하 마지막에 역대하 36장의 마지막이거든요. 거기 보면 주께서 22절 바사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 응하기 위해서 고레스 마음을 어떻게 했습니까? 감동해 가지고.

23절, “바사 왕 고레스가 이같이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을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올라갈지어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그렇게 돼 있죠. 여기 몇 년 만에 오는가? 그 몇 년 만에 온다 하는 여기 첫 번째 여기 보면 연대표 나오죠. 연대표에 보면 거의 70년 만에 와요. 고레스 원년이 538년쯤 되니까. 제사장이 포로 잡힌 게 605년 정도 되거든요. 605년이니깐 얼추 70년 후에 이 제사장들이 다시 약속의 땅에 돌아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게 지금 뭘 알아야 되느냐 하면 에스라, 느헤미야가 성경 해석을 어떻게 오해했느냐, 그 문제에요. 그런데 아무리 살펴봐도 그들이 오해한 게 아니고 말씀대로 믿었죠. 오해한 게 아니고 그냥 말씀대로 그냥 믿은 거예요. 그냥 말씀대로 그대로 받아들인 거예요. 뭐 오해하고 자시고 할 것 없이 주께서 그렇게 고레스를 통해서 돌아 온다 하니까 예레미야 25장 11절 누가 한 번 읽어 보세요.

예레미야 25장 11절, “모든 땅이 폐허가 되어 놀랄 일이 될 것이며 이 민족들은 70년 동안 바벨론의 왕을 섬기리라.” 12절,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70년이 끝나면 내가 바벨론의 왕과 그의 나라와 갈대아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벌하여 영원히 폐허가 되게 하되” 폐허가 되면서 그다음 나라 바벨론 그 다음의 나라가 바사나라고 그 멸망시킨 왕이 누구다? 고레스 왕이고 지금 에스라 느헤미야의 그 사고방식의 결정적 문제가 뭐냐 하면 과거로 돌아간다는 거예요. 과거 그 좋았던 그 영광으로 돌아간다는 겁니다.

미래가 어떻게 펼쳐지는가 전혀 아이디어가 없어요. 그러니까 에스라 느헤미야는 과거로부터 구원받지를 못한 거예요. 시간 구원이 없었어요. 시간 구원. 과거 현재 미래라는 과거 현재 미래에서 에스라 느헤미야의 잘못은 미래는 과거에 문제 있던 그 과거 영광을 미래와 그대로 과거를 카피해서 과거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미래 모습인 줄 알았던 겁니다.

지금도 유대인들 그렇게 생각해요. 인간의 한계지요. 이방 나라로부터의 구원. 이방 나라로부터 구원된다고 이스라엘 되는 게 아니에요. 결국 뭐냐? 시간으로부터의 구원이 되어야 진짜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시간으로부터 구원. 그리고 또 하나 빠진 게 있어요. 뭐냐 하면 공간으로부터 구원되어야 돼요.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구원되어야 돼요.

그들의 공간은 뭐냐? 여기서 성전 지으면 그 성전은 영원토록 오래 갈 줄 알았어요. 왜냐하면 그들의 생각은 하나님께서 성전 지으라 했으니까 하나님이 지은 성전을 하나님 스스로 부술 일은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한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그게 아닙니다. 그들로 하여금 인간이 시간과 공간에 갇혀 있다는 것을 에스라 느헤미야를 통해서 시간과 공간의 한계 있는 인간을 통해서 인간의 근원적인 구원이 시간과 공간 자체에서 구원이라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 에스라 느헤미야의 한계, 인간의 한계, 인간의 생각의 실패성을 그들에게 한 번 더 보여 주기 위해서 그들로 70년 만에 돌아가라 하는 겁니다.

이 인간의 시간의 한계를 벗어난 자가 누구냐? 다니엘이었어요. 70년에서 뭐로 바뀌었지요? 70이레로 바뀌었어요. 70년에서 70이레. 70년과 70이레의 차이점이 뭐냐, 70이레는 하나님의 시간이고, 70년은 인간의 시간이었던 겁니다. 인간으로부터 인간의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 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 그냥 안 됩니다. 인간의 생각과 나라의 사고방식이 박살나야 돼요. 그 박살나는 시범조로 에스라 느헤미야가 다시 옛날 구닥다리 성전을 다시 짓습니다.

성전을 짓는데 그 성전에 모든 설계, 도면 모든 것이 실상이 너무나 과연 과거에 솔로몬하고 비교할 때 너무 초라했어요. 한쪽은 성전 지었다고 웃고 있고, 한쪽은 성전 지은 모습을 보고 너무 서글퍼서 울고 있고, 이게 뭐 웃음과 울음의 중첩. 한마디로 서글픔이지요. 서글픔. 과연 이게 구원일까? 이게 과연 구원이냐? 에스라 느헤미야 그 내용에 여기 그 교재 이 복사한데 나오지만 여기 그 두 번째 보면 에스라 내용이 나와 있어요. 에스라 1장부터 10장까지 쭉 내용이 나오잖아요.

1장은 고레스의 친 명령 가라. 이 말이지요. 2장에 명단 사만구천명 명단, 3장에는 제단 재건, 초막절 지키고 성전 기초 놓을 때, 감격해서 막 울었어요. 4번 사마리아인의 방해. 내 땅인데 왜 갑자기 너희들이 우리 땅에 네가 왜 들어와? 팔레스타인 땅은 누구 땅입니까? 팔레스타인 땅이에요. 그런데 거기에 1948년도에 누가 들어왔어요?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그 땅에 들어온 거예요. 그 땅에 들어와 살도록 누가 허락했느냐? 팔레스타인을 자치 정부로 인정해 주고 팔레스타인을 그 땅을 통치했던 바로 나라가 영국이었습니다.

영국이 그 땅을 자치 나라로 이렇게 일종에 지배했어요. 왜냐하면 오스만트르크에 지배받던 것을 영국이 해방시켰기 때문에. 주인이 바뀐 거죠. 주인이 바뀌면서 그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우리 전쟁하는데 오스만트르크에 대해서 당신의 통치하는 그 나라에 대해서 같이 싸워 준다면 여러분들에게 자치권을 우리가 허용하겠습니다. 나중에. 전쟁 끝나고. 자치권을 허용하겠습니다. 그런데 허용 안 해줬어요.

그 <아르비안 로렌스>라는 영화 그 이야기에요. 영국이 약속을 안 지켰습니다. 안 지키고 영국에는 뭐가 중요하냐 하면 영국에서는 전쟁할 때 돈이 필요하죠. 은행이 필요하잖아요. 영국의 유명 은행들이 유대인들이에요. 유대인들이 전쟁할 때 자금 대줄 테니까 끝나고 난 뒤에 저 옛날 전에 이스라엘 땅을 우리 흩어진 유대 나라 세우도록 허락하겠습니까? 허락했어요. 그리고 계약을 이중으로 계약한 거죠. 전세 사기입니다. 이중 계약한 겁니다.

그래 가지고 이스라엘이 그 텔아비브 해서 예루살렘 그 전역을 이렇게 독립을 해 버렸어요. 그러니까 팔레스타인이 가만히 있지 않고 반발했지요. 반발했는데 반발했다가 미국과 그 서방에서 무기를 제공했던 그 때문에 6일 전쟁 동안에 중간에 아랍 완전히 작살났어요. 그래서 6일 전쟁 동안에는 요르단부터 해가 이집트부터 해가지고 전부 다 이스라엘 땅 다 됐습니다. 하도 나라 세상에서 이스라엘 너무 횡포 심하다 해가지고 그럼 자치 단체로 봐주겠다는 게 가자지역하고 요단강에 그 서쪽에다가 조금 이게 팔레스타인 나라가 둘로 쪼개졌어요.

하나는 지중해에 있는 가자 지역하고, 이쪽에 있는 요단강 근처 좀 그 두 개를 자치 단체로 그냥 허용했을 뿐이에요. 그들은 올리브 나무를 재배하고 목축하면서 살아갑니다. 뭐 생계도 변변치 않아요. 별로 위험 요소가 안 되기 때문에 놔뒀는데 이스라엘이 자꾸 이스라엘 미국 사람 다른 폴란드 크로아티아 이런 유대인들 요새 유대인들 얼마나 많습니까? 들어와 가지고 나라를 나라답게 선진국으로 만들려고 하니까 그 팔레스타인 땅을 어떻게 해야 돼요? 잠식하는 거예요. 잠식하면서 그들과 우리 사이는 다르다 해가지고 장벽을 세웠거든요.

장벽을 세워가지고 팔레스타인 땅에다가 이스라엘 정착촌을 만들어 버린 겁니다. 만들고 거기에 이스라엘 경찰이 들어와 버리고 식민지 상태에요. 그래서 그 테러 집단 반발하자 해가지고 그 하마스가 등장해서 테러하다가 테러해서 전쟁 벌이다가 64천명 죽었잖아요. 작살나고 포로 수백명 살려주고. 이제 무장 해제 당할 거예요. 까불면 또 까불면 또 당합니다. 다 죽일 요량이에요. 하여튼 작정이라. 가자지역에. 미국이 와서 거기에다가 지중해 연안이니까 아주 휴양국가를 만들면 팔레스타인 이익이지요. 왜? 관광객 해가지고 호텔 짓고 하면 그들을 취업하면 살잖아요. 그러면 테러집단은 더 이상 알라고 알라고 알라 알라고 자본주의 사회에 알라고 뭐 필요해요. 돈이 최고지.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시공간이 시간과 공간이 성경의 이스라엘하고 아무 상관도 없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현재 있는 이 시온파 그걸 시온파라 하는데 현재. 시온파 이스라엘이 아니고 진짜 율법대로 해야 된다. 하는 그 사람들이 바로 펭귄 옷 입고 돌아다니면서 머리 이렇게 해 가지고 신명기대로 머리 꼬고 해서 군대도 안 가고 이래 하니까, “너희들 군에 와! 왜 군에 안 와?” 해가지고 강제 징집까지 명령내렸잖아요. 정통 유대주의. 정통 유대주의는 바로 이 율법을 우리가 어떻게 지킬 것이냐 하는 거예요. 율법을. 바리새인들의 후손들입니다.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 쿰난 공동체 그 후손들이 지금 이 그 현재 정통 유대주의인데 현재 8%에요. 얼마 되지도 않아요. 현재 이스라엘 인구가 850만인데 뭐 해 봐야 얼마 되지 않아요. 그런데 그중에서 젊은 사람들 어떻게 됩니까? 정통 유대인 안 하고 자꾸 이렇게 다른 그 시온 이스라엘 다른 이스라엘과 연애해 가지고 결혼해서 독립해 버립니다. 점점 숫자가 줄어요.

자, 그러니까 에스라 느헤미야가 지금 우리가 문제 삼아야 될 것은 이겁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결국 이게 메시아 나라가 아니거든요. 메시아 나라가 아닌데 왜 메시아 나라인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렇게 몰아가셨는가? 왜 몰아가셨는가? 성전 초석은 나중에 놓인다, 는 거예요. 이 원칙. 이 원칙을 인간들은 납득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납득을. 솔로몬 성전의 초석이 초석으로부터 솔로몬 성전의 성전이 성전의 모델로 알고 있어요. 에스라 느헤미야는.

뭐 신약 자체가 없어요. 그 사람들은. 옛날처럼 되면 OK. 그게 이스라엘입니다. 그것뿐이에요. 문제는 왕이 말씀대로 안 살아서 문제인데, 이제 왕 없애 버리고 우리가 율법이 있으니까 이 율법을 지키면 우리는 이스라엘로 제대로 된 이스라엘로 OK다. 그게 에스라 느헤미야의 한계점입니다.

그런데 한계점이 이걸 하나님께서는 이 잘못으로 보는 게 아니고 과정으로 보는 거예요. 누구든지 에스라 느헤미야를 거쳐서 복음을 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학개 선지자를 통해서 이렇게 뭐냐 하면 계속해서 성전을 지으라고 하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작전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성경 말씀대로 살려고 주께서 부추기면서 그걸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허점과 한계와 우리의 문제점과 우리의 죄를 들추어내는 방식을 사용하십니다.

어느 인간도 어제 수요설교에서 했지요. 어느 인간도 옳은 인간은 아무도 없다가 하나님의 율법과 하나님의 말씀과 결합이 되어서 뜯겨져 나가야 되는 거예요. 이게 뜯겨져 나가야 돼요. 어제 수요설교에서 했잖아요. 어떤 흉터가 있을 때 딱지가 붙을 때 딱지가 저절로 없어지는 게 아니고 딱지 두꺼운 딱지가 떨어지면서 새로운 살이 나올 수 있는 아무것도 햇볕을 보지 못한 분홍빛 살갗이 뜯겨져 나가면 그게 있지요.

그때 후시딘 해가지고 밴드 하나 붙여야 돼요. 괜히 또 덧나는 거예요. 잘못하면 종기 나고 수술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그건 짜야 돼요. 주께서 우리를 톡하고 잘랐고 말씀을 주시는 거예요. 거쳐서 오라. 그 절차 과정을 거쳐서 오라. 나는 복음 안다 까불지 말고 거쳐서 오면서 우리는 우리 속에 이미 뭐가 들어있다? 이미 율법 요소가 들어 있었다. 이게 바로 사도 바울의 로마서 7장의 이야기입니다.

로마서 7장. 참 사도 바울이요, 알았던 주님이 알려줬지만 사도 바울이 알았던 그 7장 가운데서 7장 14절 잘 들어놓으세요. 7장 14절. 우리는 율법이 뭡니까? 신령한 줄 알겠지요. 에스라 느헤미야입니다. 여기 에스라 느헤미야가 요것까지 요것까지예요. 신령합니다. 신령하지 줄 않았는데, 나는 육신에 속해서 뭐에 팔렸다? 죄에 팔렸다. 이걸 바리새인과 사도개인들은 모르는 거예요. 서기관도 모르고 에스라 느헤미야도 모르는 겁니다.

그 이방 여자하고 이혼한다고 해서 이게 나라가 되는 게 아니에요. 자식하고 생이별 한다고 빠이 빠이 한다고 나라가 되는 게 아닙니다. 여기 교재 두 번째 페이지에 보면 혼인 결혼 문제 보고 돼 있죠. 9장에. 여기서 에스라가 회개 기도하지요. 이거 에스라가 잘못한 게 아니에요. 잘못한 게 아니고 지금 주어진 것이 뭡니까? 율법밖에 없잖아요.

율법에 대해서 인간들이 회개할 때 회개 기준이 율법이에요. 율법으로 기준하는 그 회개의 기준은 에스라 느헤미야가 딱 이것까지 이것까지예요. 따라오는 것은 딱 이것까지. 콘드로이친 CF 광고처럼. 콘드로이친이라고 다 같은 것이 아니다. 딱 여기까지. 이름값 제대로 하는 것은 따로 있다는 거예요. 선전에 보면. 그 에스라 느헤미야는 딱 그것까지예요. 에스라 느헤미야가 요런 행동을 할 때 이거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게 하신 거예요.

거기에 하나님이 중첩하셨습니다. 스가랴 묵시가 에스라, 느헤미야, 학개 위에 같이 중첩을 시켜 놨어요. 성전은 성전인데 사람 손으로 짓지 않는 성전. 지금 이 이야기가 에스라 느헤미야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생뚱맞는 겁니다. 성전을 지으라고 그렇게 독촉해 놓고 그거는 사람이 지은 성전이잖아요. 실컷 지어라 해놓고 “지었냐?” “지었습니다.” “그거 성전 아니거든. 앞으로 올 메시아는 사람이 짓지 않는 성전을 지을 거야. 그 성전이 바로 온전한 이스라엘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될 거야.” 이렇게 스가랴가 이야기합니다.

거의 같은 시대예요. 학개, 스가랴, 에스라, 느헤미야 같은 시대거든요. 말라기는 나중. 말라기는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이지만. 그러니까 이 에스라 느헤미야가 왜 이스라엘 망하고 난 뒤에 신약에 오기 전에 중간에 에스라 느헤미야가 왜 끼어 있는가? 그리고 다음 시간에 이야기할 때는 말라기는 왜 마지막 예언자가 되느냐? 10분 쉽시다.

 

 

 

 

안양20251016b에스라1장1절(썩은 사과)-이 근호 목사

에스라, 느헤미야의 하나님께서 성전을 지으라고 하나님께서 모든 상황을 그런 식으로 성전 짓는 쪽으로 몰아세우는 그 취지를 쉬운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처녀와 총각들에 있어서의 결혼은 그들은 당장 시급하게 하고 싶은 그것은 바로 결혼이겠지요. 그런데 이미 결혼 해 본 사람은 알아요. 결혼이 인생의 끝이 아니라는 것을. 그러나 그들에게는 인생의 끝이에요. 결혼은.

결혼하게 되면 이제 마음 맞는 사람이 있어가지고 평생에 이제는 눈에서 눈물 날 일은 없다고 웃을 일만 있고 행복한 일만 있다. 이렇게 자부하고 결혼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희망의 부푼 그들을 향하여 “결혼하지 마! 결혼은 인생의 무덤이야.” 이리하면 돼요, 안 돼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결혼을 해봐야 될 거 아닙니까?

인간이 율법을 나름대로의 율법 해석에 대해서 우리가 우리 선조들이 잘못한 것을 없애고 우리는 이제는 매를 맞은 입장이니까 매 맞고 난 뒤에 이제 정신 차렸으니까 정신 차린 우리가 다시는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으면서 율법을 지킬 때 어떻게 율법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이게 온전한 이스라엘이 되느냐, 그 시도를 그들은 해 보는 거예요.

해 보는데 그들의 허점은 뭐냐 하면 바로 그들의 기억 속에는 과거만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준비한 새로움이 전혀 없이 과거 그때를 유사 모방하고 그걸 온전히 땜질하는 온전하게 만들려는 그런 시도에 불과한 겁니다.

“초석은 나중에 놓인다.”라는 말은 그들은 상상도 못 할 거예요. 초석이라는 것은 머릿돌인데, 시작은 뭐든지 건물 지을 때, 머릿돌은 머릿돌부터 짓는데 스가랴에 의해서는 그 머릿돌이 사람으로 짓지 않는 머릿돌부터 새로 시작해야 된다는 거예요. 사람으로 짓지 않는. 에스라, 느헤미야의 그 마음가짐의 연속성이 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율법이야말로 우리 인간의 존재보다 우선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다. 그들의 논리에 대해서 같은 인간으로 허점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율법이 먼저고 우리는 율법을 지키고 얼마나 고통과 힘들고 몰살하는 경우가 닥친다 할지라도 다친다 할지라도 약속은 약속대로 다 이루어진다. 무슨 사상이냐, 하나님의 무슨 사상? 주권 사상. 하나님의 주권 사상에 토 달 수도 없어요. 어느 인간이 하나님의 주권 사상에 토 답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하나님께 돌아가는데 그걸 부정하는 것은 하나님 자체를 부정한 거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바리새인들은 굉장히 자부심 가진 겁니다.

가말리엘 교법사가 그 베드로 체포될 때 그때 체포해서 뭐 어떻게 죽이자 할 때 가말리엘 교법사가 뭐라고 했는 줄 알아요? “놔둬라. 하나님의 뜻이면. 스스로 망할 것이다.” 이 사고방식 어떻습니까? 얼마나 철저하게 하나님의 주권 사상으로 평소에 그들이 백성에게 가르쳐 왔다는 것을 알지요. “하나님이 살아 계신데 왜 우리가 그들을 처벌한다고 하느냐? 채찍 몇 대 때리고 앞으로 주의하라고 그 정도로 해야 되지 우리가 꼭 죽일 필요가 뭐 있느냐? 그런 식으로 메시아라고 까불다가 났다가 소멸한 사람이 한둘이었는가? 그냥 우리는 하나님 편에 서서 인간들이 철딱서니 없는 것을 그냥 지켜보기만 해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잘 이룰 것이다.” 어떻습니까? 율법에 위반되는 율법 마음에 어긋난다고 우리가 볼 수가 없지요.

그러니까 에스라, 느헤미야도 마찬가지고 지금 자기 하는 일에 무한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겁니다. 바리새인 사두개인과 마찬가지로. 같은 인간으로서. “그게 아니야.”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나설 수 있는 것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모든 인간은 거기에 그 논리에 동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이라는 게 원래 그렇거든요.

하나님의 방법은 성경 방법은 이겁니다. ‘부분이 전체를 이긴다.’ 는 방법은 옛날부터 한결같이 초장부터 한결같이 쭉 신약까지 마지막 때까지 이 원리가 계속 이어집니다. 부분이 전체를 이긴다. 인간들은 전체가 부분보다 크다. 전체가 부분보다 크다는 이 사고방식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아무리 연구해도 하나님의 약속은 전체적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하셨다.”가 맞아요. 천지는 누가 만들었다? 하나님이 만드셨다. 우리 인간도 하나님이 만들었다. 그들은 이걸 철석같이 이 진리로 알았습니다. 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게 메시아가 죽어야 합니까? 여러분! 그 생각해 본 적 있어요? 저 이방 민족한테 예수님이 처형당하지 않고 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서기관, 유대인들의 손에 의해서 메시아가 죽어야 될 이유가 여러분 어디 있다고 생각합니까?

유대인들은 무엇을 복종하느냐 하면, 율법 체제 안에 자기들이 놓여 있기 때문에 그들은 하자가 없고 생각에 빈틈이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주권사상. 하나님의 주권사상에 대해서는 천주교도 심지어 루터도 칼빈도 어떤 개신교도 어떤 교파도 이걸 부정한 사람 아무도 없어요. 감리교까지. 하나님의 주권 사상. 신 자체가 신 스스로 주권을 내세우는데, 주권을 무시하면 이거는 신이 아니죠. 심지어 힌두교도 마찬가지예요. 심지어 불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은 모든 것을 가질 자격이 있고, 우리는 다 신 밑에 우리는 피조물이다. 우리는 유한하지만 신은 어떻다? 무한하다. 모든 종교에서 이걸 거부하는 종교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까 종교인들이 자기의 허점을 모르는 거예요. 자기의 문제점을 모르는 거예요.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율법을 생각하는 그들의 하나님의 주권 사상은 율법에서 나왔다면 이 율법 자체가 복음에 의해서 파괴된다. 더 정확히 말해서 교체된다. 이것을 유대인들은 상상을 못했습니다. 그 상상 못한 이유를 짧게 알려 드리겠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또 인간들은 율법은 이해하되 복음은 가로막혀 있어요. 복음은 성령이 아니면 아무도 몰라요. 복음이 아니면. 그래서 신학은 뭡니까? 복음입니까? 율법입니까? 율법이죠. 신학은. 여러분, 신학이 뭘 하고, 뭘 하지 말고 되어있잖아요. 그게 신학은 율법이에요. 복음이 아니고. 복음은 신학화될 수 없는 게 복음이에요.

그러니 에스라, 느헤미야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인간의 영향, 인간이 할 수 있는 신앙심 심지어 회개. 여기 느헤미야 한번 보세요. 느헤미야를 보게 되면 느헤미야 기도부터 해서 방해받는 핍박 받지요. 성전 완성됐지요. 8장에 율법을 낭독하지요. 8장에 기쁨과 슬픔이 있지요. 9장에 백성들이 회개하지요. 10장에 언약에 인을 치지요. 그다음에 12장에 드디어 레위인 명단이 발부되지요. “왕 없다. 너희들이 율법대로 하면 그게 우리나라다.” 레위 제사장과 레위인들. 그리고 봉화식 하지요. 또 개혁조차 합니다. 이방인들 개혁하지요. 제사장들 개혁하죠. 안식일 지켜야 되죠. 안식일 날 그 일하지 말고 남한테 이자 빌려주지 말고. 이런 거 나오지요. 마지막에 뭡니까? 느헤미야 마지막에. 이방인과의 혼인 금지하는 거예요.

자, 인간이 성전 지었지. 이제 성전만 지으면 안 되겠지요. 인간 자체가 바뀌어야 되죠. 율법화 돼야 되죠. 율법에 철저한 인간으로 율법이 만든다면 이런 인간이어야 돼. 율법대로 산다면 백성이라면 곧 이런 백성이어야 진짜 율법이어야지. 이것을 에스라 느헤미야가 충실히 그 임무를 감당했습니다. 율법적으로 완벽한 자가 된 거죠.

이제는 하나님께서 이 지어진 성전과 그리고 이 인간들을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부정하지 못한다. 뭐 이리 나오겠지요. 그런데 약간의 세월이 지나서 말라기가 BC 400년경이니까 뭐 약간 이제 약간 후 여기 있죠. 440년 에스라 느헤미야 곧 뒤에 말라기의 선지자가 뭐라고 이야기했습니까? 그게 말라기의 내용이 나와요. 제사장이 제사를 드리는데 하나님이 안 받겠대요. 받지를 않겠다는 그들은 완전 충실한 시스템을 가동했는데 그 시스템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겠답니다.

온갖 노력을 다해서 모든 그 순수하고 정결한 걸 다 투자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걸 받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그럼 말라기의 대책은 뭐냐? 말라기의 대책은 심판이에요. 마지막 때에 와서 불로서 너희들을 싸질러 버린다. 말라기. 그러면 우리가 구원받으려면 어떻게 하느냐? 구원받으려면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다시 보낸다. 엘리야를 다시 보낸다. 말라기 마지막에. 엘리야를 보냈으면 어떻게 하겠던가? “아버지의 마음을 아들에게로, 아들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돌이킨다.” 이리되어 있어요.

이거도 보세요. 엘리야가 온다는 거예요. 여러분, 엘리야가 어떻게 올라갔습니까? 불수레 타고 올라갔잖아요. 그 엘리야가 다시 온다는 겁니다. 말라기 선지자에 의하면. 말라기 선지자도 진짜 엘리야가 오는 걸 알고 있는 거예요. 진짜 엘리야가. 에스겔 선지자도 진짜 다윗이 오는 줄 알았어요. 다윗의 자손이 오는 게 아니고 진짜 다윗이 오는 줄 알았어요. 다윗이 오는 게 아니고, 다윗의 자손이 온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베드로예요. 성령을 받은 베드로가 사도행전 2장에서 그걸 수정하죠. 다윗이 오는 게 아니고 다윗은 무덤에 있고 다윗의 자손이 오시죠. 그거는 신약에 와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구약에 있던 구약에 있는 그 선지자의 그 모든 내용은 뭐가 되느냐 하면 수요일에 했는데. 이거는 하나의 표적이 되고 히브리서의 말대로 하면 이것은 그림자요, 그리고 모형에 해당되는 거예요. 그림자 모형이니까 그림자, 모형이라 하는 것은 그림자는 내리쬐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실체가 따로 있고, 이 땅에는 얼렁거리는 그 보이지 않은 것에 얼렁거리는 그 사인 표적 또는 그림, 모형. 모형만 있는 거예요. 모형만. 특히 세례요한도 마찬가지고요. 세례 요한도. 세례 요한한테 어떻게 하면 열매를 맺힙니까? 하니까 국민들은 자꾸 임금 인상하려 하지 말고 가나한 사람한테 옷 나눠 주고 그러면 된다는 거예요. 세례요한이. 그러면 그게 열매겠어요? 그게 영생의 열매입니까?

자, 영생의 열매가 어떻게 하는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2장 15절. 아버지가 아들의 마음으로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의 마음을 아버지에게 돌린다. 말라기는 자녀라고 돼 있어요. 말라기는. 어떻게 하느냐? 마태복음 2장 15절에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 애굽에서 그다음에 뭡니까?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러내었다.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러내었다. 어? 이거 이스라엘 아니에요? 아닙니다.

그러면 이거 뭐예요? 그러면 분명히 그 출애굽을 말한 게 아닙니까? 아닙니다. 이거는 과거만 생각하고 미래의 예수님 때문에 그걸 잘라버리고 과거만 생각한다면 이 말씀은 과거에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왔듯이 앞으로 이방 민족으로부터 이스라엘을 따로 뽑아내어서 고토 옛날 땅 약속의 땅에 거기서 나라 만든다. 그런 식으로 해석했던 자들이 누구냐? 바로 에스라 느헤미야하고 선지자들이었어요.

그게 삑!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이거는 바로 모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라는 거예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러내었다는 말은 이 땅의 아들 같은 아들은 이스라엘 같은 이스라엘은 애초부터 없었다는 겁니다. 애초부터 없었다는 거예요. 초석은 나중에 놓이니까.

그런데 초석이 나중에 놓일 초석 대신에 인간 쪽에서 초석을 놓은 거예요. 성전의 초석을. 율법을 가지고. 그것도 단단하게 말씀대로 이렇게 말씀대로 이 율법의 성을 쌓으면 하나님께서는 이 하늘나라 인정해 준다는 거예요. 구약 전체가 그래요. 뭐 아벨부터해서 모든 사람이 구약 노아도 마찬가지 다 그렇게 했습니다.

그거는 하나님과 함께 하심도 아니고 그거는 성전도 아니라는 거예요. 성전의 시작은 끝에 오시는 분이 성전의 시작이 된다. 끝에 오시는 분이. 완전히 기존의 시간 과거에서 현재로 미래로 가는 시간으로부터 탈출이 되려면 이제 그림을 한번 보겠습니다.

과거 → 현재 → 미래. 과거로부터 현재, 미래, 이래 가잖아요. 미래. 이렇게 되잖아요. 이걸 어떻게 탈출하느냐? 미래 중첩된 미래가 이걸 그냥 덮쳐버리지요. 덮쳐버려서 거꾸로 늘어뜨리는 거예요. 그러면 미래가 처음이 돼요. 마지막이 처음이 되어버려요. 처음을 위해서 과거가 있었던 거예요. 역사가 있었던 겁니다. 역사의 시작을 수평적으로 보지 말고 이렇게 수직적으로 봐야 돼요. 역사의 시작을 나중에 오시는 분이 역사의 시작이 되는 거예요.

지금의 땅은 모형이고 진짜 땅은 예수님의 나라가 진짜 땅이고 그 땅을 비춰 주는 그런 그림자로서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뭐냐 하면 히브리서 11장의 말씀처럼 우리는 방랑자예요. 방랑자. 방랑자의 할 일이 있습니다. 할 일. 방랑자의 할 일은 선을 넘어야 돼요.

물론 우리 인간으로서는 선을 못 넘어요. 성령에 의해서 선을 넘어 버립니다. 이 선이 있다면 방랑자의 삶에서 자주 이 복음의 세계 쪽으로 선을 넘어 버려야 돼요. 선을 넘어 버리면 그 순간 우리가 이 땅에 살 존재가 아니고 천국에 살 존재인 것을 이 땅에 있으면서 우리는 이미 중첩된 상황에서 파악이 된다, 이 말입니다.

이 쪽 세계는 뭐냐 하면 선악 체제예요. 선악 체제. 다시 쉽게 말해서 법이에요. 법. 율법이에요. 율법.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그렇게 율법을 자기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이유를 알겠죠. 바리새인들은 “이레 두 번씩 금식하고 기도하고 십일조하나이다. 저 세리와 같지 아니하나이다.” 하는 말을 그걸 충심으로 우리가 이해를 해줘야 돼요. 충심으로.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허물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율법밖에 없기 때문에, 말씀밖에 없기 때문에. 진짜 이 율법이 없으면 자살할 수밖에 없어요. 왜? 해답이 없으니까. 인생에 목적과 의미가 없으니까 이게 없으면 못 살거든요.

헤르만헤세가 지은 책이 <싯다르타>하는 책이 있어요. 어떤 청년이 부처를 만나서 깨달음을 얻으려고 했는데 그 부처조차도 그게 엉터리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내가 부처였다. 뭐 그 내용이에요. 그 내용. 헤르만헤세의 <싯다르타> 동양사상. 헤르만헤세의 아버지가 선교사예요. 동양사상에 대한 책들이 있으니까 그걸 어릴 때부터 본 모양이라. 동양사상에서 나오는 <싯다르타>책에서 한 무효한 문장이 이런 게 있어요. 뭐냐 하면 “지식은 남들에게 전달할 수 있으나, 지혜는 전달할 수 없다.” 이 내용이에요. 그게 뭐냐? 깨달아야 된다.

이게 이제 헤르만헤세가 파악한 불교의 정수로 봐요. 깨달음. 뭐가 안 됩니까? 헤르만헤세의 이 이론 말고 요즘 이론도 여기에 많이 포함이 되어있어요. 싯다르타의 이 책에 보게 되면 인간이라 하는 것은 강물이다. 나의 기억의 강물이다. 흘려가는. 결국은 모든 인간은 어디로 간다? 바다로 간다. 이런 이야기가 막 동양 철학을 통해서 이야기하거든요. 이게 뭐가 문제입니까? 불교의 문제가 뭐예요? 아까 요한복음 5장 39절, 모든 말씀은 누구한테 속한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을 모르는 거예요. 세상 죄를 지신 어린 양이 이스라엘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몰라요. 그냥 아까도 했잖아요. 인간 대 인간 그냥 인간 대 인간뿐이에요.

어제 수요일에 했지요. 인간 대 인간. 젊은 사람이 인생 살면서 힘드니까 오기를 부리면서 뭐 해요? “난 너하고 헤어져도 난 돈 많이 벌 거고, 바쁘게 살 거고, 미국은 막 여행 다닐 거고 20일 동안 막 확 다닐 거고, 난 남보란 듯이 내 좋아하는 사람 많이 생기게 만들 거야.” 씩씩거리면서 그러면서 뭐 또 막 울어요. 울기는 왜 우는지 몰라. 그런 주장의 문제점이 뭡니까? 십자가 사건이 없어요. 십자가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 없다고요.

자, 하나님의 주권적인 하나님이 살아 있어야 주권이잖아요. 그런데 그 하나님이 죽어요. 하나님이 죽는 이유를 몰라요. 사람들은. 인간은 죽지만 하나님은 안 죽는다는 거예요. 안 죽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부채표가 없는 것은 활명수가 아니에요. 십자가를 위해서 에스라 느헤미야가 있는 겁니다. 구약이니까. 십자가를 위해서 에스라 느헤미야가 있어요.

어제 수요일도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이야기했죠. 요한복음 12장 수요일에도 했지만, 제가 한 번 보겠습니다. 12장 37절,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니”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다음에 나오는 말이 뭡니까? 저희가 믿지 않았다. 아니요. 인간들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열두제자는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가룟 유다 빼놓고 열 한 제자 믿었어요. 많은 사람이 믿었어요.

그러나 온전한 믿음은 하나님이 하늘나라에서 받아주는 믿음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러 애굽에서 그냥 사람으로 나온 거예요. 아들로 나온 게 아니고 애굽에서 아들이 나와야 되는데 애굽에서 훌라당 나와 버린 그냥 인간이에요. 괜찮은 인간이 돼 버린 거예요. 문제는 이 인간 인간으로부터의 해방, 인간으로부터의 구원이 돼야 돼요. 내가 인간이라는 자체로부터 구출돼야 돼요.

인간은 선악체계에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 복음은 인간은 못 들어가요. 들어갈 수 없어요. 왜? 믿음이 없으니까. 표적을 받았지만 믿음은 없어요. 표적을 알아도 그건 믿음 아니에요. 믿음이라 하는 것은 주님의 고유 믿음이에요. 여기는 무슨 나라? 영생의 나라입니다. 이거는 영생의 나라예요.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오거든요. 이 말씀이 굉장히 어려운 말씀인데 어려운 말씀이지만 여러분 한번 보세요.

3절, 영생은 곧 뭡니까?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를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게 영생이지요. 아는 자가 없다니까. 알 수가 없고 아는 자가 없어요. 기껏해야 에스라, 느헤미야가 다에요. 그게. 말씀대로 열심히 사는 거예요. 그게 다라고요. 영생의 나라 없어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들로서 애굽에서부터 아들을 뽑아냈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밟는 곳마다 전부다 뭐가 되냐 하면 애굽이 돼 버려요. 예수님이 성장하면서 경험했던 모든 환경이 하나님 보시기에 예수님 보시기에 말씀에 입각해서 제대로 된 그림자 말고 진짜 말씀의 해석에 입각해서 이 세상은 자체가 애굽입니다.

최초의 아들은 누구죠? 예수님 본인이죠. 이제는 그 예수님께서 애굽의 나라에서 표적을 전하면서 그 애굽 나라에 어떤 인간도 아들이 없는데, 없는 아들을 만들어낸 작업을 주께서는 십자가 지는 걸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을 바탕으로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러낸 자만 되게 하시는 거예요. 아들이 돼 버리면 아들은 뭘 아느냐 하면 아들과 더불어 함께 있는 아들이 돼요. 맏아들과 함께 있는 양자가 된다고요. 그러니까 이쪽은 뭐냐? 선악체계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선을 넘은 겁니다.

선악인 게 아니고 율법이 아니고 선을 넘으니까 선을 여기 아들 아는 자는 뭘 얻었다? 생명을 얻은 거예요. 그러니까 생명을 얻었다는 말은 인간에게는 도저히 예상도 못하고 상상도 못한 이거는 축복입니다. 기적입니다. 생명을 얻었다는 것은. “그 생명을 어떻게 얻는데 한번 생명대로 이야기해 봐라. 생명 얻은 티를 한번 내 봐. 생명 설명해 봐.” 라고 한다면 요거 이쪽 선악체계에서 선 넘은 거 이야기할 수밖에 없어요.

그럼 그 쪽에서 뭐라고 해요? “너, 선 넘었어?” “That's right. 바로 그거야. 나, 선 넘었어.” 그런데 선 넘는 거 왔다 갔다 해요. 왜? 주에 증언한다고. 왔다 갔다 한다고요. 스파이도 이런 스파이가 없어요. 선 넘어 놓고 자주 이 선악체계에 기웃거리고 여기서 활동하고 있는 거예요. CIA 요원. 이것들이 선악체계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입니다.

여기 선 넘고 이게 영생은 이미 도착했어요. 꼭 그게 거북이 같아. 산에서 보니까 여기 누가 잠자고 있어요? 누가 잠자고 있습니까? 토끼. 날래는 솜씨 좋은 달리기 잘한 토끼가 자고 있어요. 게임 끝났어요. 게임 끝났어요. 그러면 여기서 이제 에스라 느헤미야가 신약으로 넘어오는 과정을 이제는 설명을 해야 될 시간이에요.

하박국 2장 13절, 누가 크게 한번 읽어 보세요. “민족들이 불탈 것으로 수고하는 것과 나라들이 헛된 일로 피곤하게 되는 것이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음이 아니냐” 아멘. 여기 민족에다가 미국을 집어넣고 러시아 집어넣고 한국을 집어넣어 보세요. 우크라이나 집어넣고 이스라엘 집어넣어 보세요. 모든 민족들은 불타기 불탈 걸 위하여 그들은 굉장히 수고하는데 어느 정도 수고하느냐? 무지무지하게 피곤하게 수고하는 거예요. 이게 선 넘었을 때 보이는 겁니다.

대통령을 뭐 하고 뭐 하고 법을 만들고 뭐 여러 가지 노력하고, 하고, 젊은 애들은 “나, 돈 많이 벌 거야. 바쁘게 살 거야.” 그게 뭡니까? “나 열심히 수고해서 내 아픔을 내가 내 마음으로 서로 보상할 거야.” 그게 선 넘은 사람이 보게 되면 그거는 뭐 하기 위해 있냐 하면, 헛된 일로 피곤하게 만나는 거예요. 계속 헛된 일을 계속하게 만드는 거예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민족 안에 바로 이스라엘을 주께서 집어넣었다. 유대 민족을 여기에 집어넣은 거예요. 이걸 유대인들은 상상도 못 한 거예요. 에스라 느헤미야부터 해가지고 상상도 못 한 겁니다.

다니엘은 알았지요. 왜? 중첩돼 있으니까. “아니야. 아니야. 70년 아니야. 70이레야. 그건 모형이야. 하나님의 기도의 응답은 70년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돌아갈 필요 없어. 70이레에 합당한 70이레라는 특수한 시간으로 지배되려면 현재 바벨론에서 벗어나는 게 아니고 바벨론 그 새끼들 바벨론 바사, 헬라, 마케도니아, 마지막 그 자식이 뭡니까?

마지막 발톱 부분 발부분에 섞여 있는 로마 짐승 그 로마 짐승을 어디서 날아오는지 모르지만 돌멩이 하나 날아와 가지고 그걸 작살을 내고 태산을 이루죠. 그게 바로 70이레에요. 그게 이스라엘이에요. 이게 영원한 성도의 나라예요. 영원한 성도의 나라.

지상의 나라가 전부 다 완전히 와해되어야 돼요. 성도의 나라지. 지금 지상의 나라 따로 있고, 이스라엘 따라 있고, 이거는 아니 그건 아니에요. 그거는 하나님 나라 아닙니다. 어떻게 올라타야지요. 지상의 나라가 어떻게 2020년도 나라가 200개 있더라도. 월드컵을 몇 국이 하고, 48국이 하고, 뭐 어떻게 하든 간에 그걸 올라타야 그게 중첩돼야죠. 그걸 위에서 내려다 봐야 되지요. 사람들이 뭐 때문에 울고 뭐 때문에 웃습니까?

신명기 30장 18절 보겠습니다. “내가 오늘날 너희께 선언하노니 너희는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너희 날은 오래 가지 못한다. 장구치 못하리라.” 모세가 이미 예언을 했어요. 모세가 들어가서 들어가거든 망해라. 그게 하나님의 뜻이다. 율법의 저주를 받아라. 율법대로 사는데 율법을 붙들고 사는데 그 율법이 너희를 망하게 할 것이다. 이런 구절은 뭐 한두 군데 여러 군데 많이 나옵니다. 시편 2편도 마찬가지고요. 이 민족들이 기름 부은 자를 해하려 할 때에 하나님께서 비웃으시로다.

그 아들이 모든 민족을. 길에 가면 있잖아요. 그 장독 같은 거. 질그릇 깨뜨리듯이 깨뜨릴 것이다. 망치 가지고 그 완제품 질그릇 깨 보세요. 재밌습니다. 보통 많이 깨요. 왜냐하면 야구하다가 야구공 해가지고 많이 깨지거든요. 그 비어 있는 질그릇 깨보면 팍싹!! 그게 주님께서 재미로 하시는 거 같아요. 주님이 기뻐하시는 바가 그거에요. 깨는 기쁨이 있어요. 주님은. 그 깨는 기쁨을 그 망치를 뺏지 마세요. 턱! 턱! 깨면서 이 헛된 것. 헛된 것. A라는 헛된 것. B라는 헛된 것. 헛된 것을 박살 내는 겁니다.

주께서 에스라, 느헤미야에게 성전지으라는 그 성전을 깨뜨려 버리지요. 성전을 깨뜨립니다. 바사나라를 통해서 성전을 일으켜 놓고 그다음에 헬라 마케토니아 그다음에 로마 와가지고 특히 헬라 그 나라가 완전히 성전을 완전히 박살 내고 최종적으로 박살 내는 것은 바로 마태복음 24장에서 성전이 마지막 무너지는 그날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비참하게 비참한 모습을 띨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이야기를 해요.

그럴 때 제자들이 궁금해 가지고 예수님 묻습니다. “그 때에 어떤 표적이 일어날 겁니까?”라고. 어떤 표적이 일어날 겁니까? 마태복음 24장에 나와요. 이런 징조가 있을 것이다. 할 때 제자들이 볼 때 그때 어떤 표적이 있습니까? 할 때, 마태복음 24장 29절. 그날 환란 때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고 달리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로다. 하늘의 권능 별, 해, 달, 이게 뭐냐 하면 인간들이 기껏 알고 있는 든든했던 공간. 공간의 한계성입니다.

그걸 수요일날 저는 그걸 자연이라 했어요. 자연. 자연은 누구의 지시를 받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위해서 자연이 그동안 인내성 있게 꾸준히 인간과 더불어서 함께 이 공간을 이렇게 움직임을 보여 왔던 거예요. 모든 자연의 움직임은 예수님 십자가 죽음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환난 때 즉시 해가 어두워진다 했어요. 그러면 환난 때 즉시 어두워지는데 이걸 미리 앞당겨서 표적을 보여 주는 것이 바로 예수님 십자가 지실 때 갑자기 해가 어떻게 됐습니까? 여러분 아시다시피 해가 어떻게 됐어요? 깜깜해졌지요. 캄캄해지고 그다음에 휘장은? 휘장이 찢어졌지요. 휘장을 찢었다는 말은 이제 성전에 존재 의미가 없어요.

그리고 그 뒤에 예루살렘의 무덤에 이미 죽은 시체가 살아나고, 거리에 나가 돌아다니고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고 이게 무슨 난리예요. 이게? 이걸 어떻게 인간들이 이걸 해명할 수가 있습니까? 이런 예수님의 이야기를 에스라 느헤미야가 알았습니까?

지금 에스라 느헤미야가 계시도 안 한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에요. 그들은 주님의 지시를 안 따른다는 말이 아니고, 그들은 주님의 지시에 충실 하는데 그게 다가 아니다. 그것조차도 주님의 십자가를 위한 하나의 절차에 해당된다는 이야기를 제가 말씀드리는 겁니다.

인간이 인간 쪽에서 율법을 율법과 결탁해서 인간적 율법을 결탁해서 그 인간 속에 법이 있지요. 법의 정신있잖아요. 법의 정신. 법을 해석하는 의식.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쉽게 말해서 지성이라 하는 거예요. 지성. 법 없는 인간 짐승이라 하잖아요. 그게 뭐냐? 지성이 모자란다 이 말이지요. 지성. 다른 말하면 교양. 남에 대한 배려. 이웃을 사랑하라.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 말은 그들 인간들이 아는 수준에서는 이웃을 어떻게 내가 배려하면 됩니까? 하나님께 어떻게 복종하고 순종하는 마음 자세를 겸손한 마음을 자세를 하면 됩니까? 지금 인간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물을 수 있는 한계가 뭐 그런 거예요. 지성 수준이고, 교양 수준이에요. 그런데 십자가는 그걸 뜯어낸다니까요. 율법 지킬래? 십자가 믿을래? 지금 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요. 예수님께서.

어제 수요 설교를 제가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인간에게 어떤 성경 지식이 있으면 성경 지식은 나한테 짐이 돼요. 왜? ‘나한테는 지성이 있기 때문에 교양이 있기 때문에 법 성경을 알고 안 지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어.’ 자꾸 이런 마음이 들거든요. 그거는 선을 넘은 게 아니에요. 지금 계속 그 동네에서 지금 열심히 자기가 개선하고 훌륭한 사람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어요. 스스로 반성하고 회개하고 또 반성하고 회개해서 보다 하나님 앞에 실수를 줄이고 온전한 사람이 되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그 모습을 보이는 거예요.

선을 넘어 버리면 이거는 이 자아가 주도권을 쥐는 게 아니고 주님이 주도권을 쥐어가지고 네가 어디서부터 벗어나는가를 이 세상의 방랑자로 해서 그걸 증거 하라. 방랑자가 영어로 하면 같은 뜻이 뭐냐, 놀랍게도 이게 무법자예요.

자, 예수님이 십자가 죽은 원인이 이것 때문에 율법 없어서 죽였어요. 율법을 삶의 기준으로 삼지 않아서 죽였어요. 안식일 위반했지요. 성전 모독했지요. 자기가 메시아라고 주장했지요.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사형당할 사형집행 당할 이유가 됩니다.

자, 계속해 보겠습니다.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메시아가 끼어들면 분란이 일어나요. 메시아가 끼어들면. 분란이 일어난다는 것은 뭔 뜻이냐 하면 이게 전체입니다. 전체인데 이 전체를 내가 모양을 바꾸겠습니다. 요걸로 이렇게 바꾸겠어요. 전체를.

전체 바꾸면 전체를 통합하는 자 이걸 왕이라고 해요. 그래서 이 율법을 믿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들을 믿는 이들의 왕은 누구냐 하면 여호와예요. 여호와 왕이라 하는 것은 이건 누구 신학이냐 하면 유대인들의 신학이고 여기 느헤미야의 신학이에요. 아까 첫째 시간에 우리는 왕이 필요 없다. 했지요. 이게 왜 그러느냐 하면 하나님이 왕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율법을 주셔가지고 백성이라면 왕이 주신 율법을 지킨다. 이게 에스라 느헤미야의 기본 정신입니다.

이걸 누가 문제 있다고 누가 시비를 걸 수 있겠어요? 없지요. 그런데 이 전체가 이게 하나님에 의해서 부정당해요. 그러면 여기서 다른 대안이 있을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모든 신학의 신학, 모든 진리의 진리, 모든 정의의 정의를 하나님은 왕이 되시고 우리는 복종하는 백성이다. 하는 이걸로 딱 정리했는데 이걸 가지고 하나님 앞에 결제 받으려하니 주께서 찢어버려요. 주님께서 이걸 찢어버려요. 시킨 대로 했는데 그걸 찢어버려요.

왜 찢느냐? 이 사과의 속에 썩은 요소가 자라나기 시작하는 이야기입니다. 요 사과를 사자성어로 뭐라 하느냐 하면, 썩은 사과라 해요. 썩은 사과. 이게 뭐냐, 나입니다. 나.

겉으로는 다 알아. 다 알아. 복음 알고, 다 알고. 완전히 다 아는데. 속은 썩었어요. 썩은 것을 어떻게 하느냐? 썩은 것을 억누르기 시작해요. 이제 정신병이 시작됩니다. 억눌러서 외부적인 장점이 화려해서 화려한 장점으로 해요. 내부적인 썩음이 이 전체 사는데 안 들키게 내 속에서 조정하려고 애쓰다 보니까 암세포는 점점 더 더욱더 급속도로 속도를 더해서 퍼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오는 메시아는 뭐를 노리겠습니까? 아까 신명기 30장 18절. 너희는 반드시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반드시 망하리라 돼 있죠. 아까 하박국 2장 13절, 민족들은 반드시 불태워질 것이고 너희들이 크게 전체를 유지하려고 애쓰는 그것을 너희들이 말할 수 없는 피곤함만 더 주어진다.

이걸 어제 수요 설교에서는 뭐냐 하면 내게 아는 성경 지식이 오히려 나에게 짐으로 가동되는 거예요. 피곤한 거예요. 그럼 방법은 뭐냐? 주께서 이것을 그 말씀으로 집게 가지고 집었잖아요. 집어 가지고 말씀을 주신 쪽으로 이걸 가져가요. 주님이. 그걸 제가 어제 수요 설교하면서 뭐라 하면 숨바꼭질할 때에, 이불 속에 있는 애가 이불을 들춰보면 내 모습이 민망하지 않도록 이불을 붙들고 있는 거예요.

그동안 내가 아는 복음과 성경 지식으로 나를 감추는데 얼추 성공해 왔는데 이걸 들춰버리면 우리는 외마디가 나오지요. 안 돼! 안 돼! 하고 길게 내 빼는 거죠. 안 돼! 안 돼를 뭐로 바꾸느냐 하면 이걸로 바꾸면 돼요. “화로다. 내가 망하게 되었구나!” 속이 시원하다. 왜 진짜 이 말을 왜 진작 이 말을 터트리면 끝날 문제를 가지고 그 대신 우리는 뭡니까? “안 돼! 안 돼!” 안 돼 라고 하는 거예요.

종기 나면 수술하고 들키면 안 돼! 이처럼 자신이 발견하는 자신의 약점이 자기 약점이 발견될 때는 다행이라고 여기시기 바랍니다. 이미 주께서 일부러 썩은 부분을 나도 알도록 만드는 거예요. 나도 알도록. 그동안 우리가 어느 부분에서 썩었는지 도대체 썩은 부분을 요리 그려놨잖아요. 사실 정답은 뭐냐 하면 구석구석 다 썩었는데 지금 나이가 이제 50밖에 안돼가지고 요거만 알지. 나중에 60되면 다 튀어나오는 거예요.

다 튀어나와서 저주받아 합당한 게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이건 한꺼번에 다 아는 거고, 이사야가 이 정도 아는 것은 진짜 영광 햇빛보다 더 놀라운 영광을 받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숨바꼭질 할 게임 할 문제가 아니에요. 숨을 데가 없어요. 차라리 깨끗하게 신나게 “망한 사람 여기 있습니다.” 하고 손들고 나오면 돼요. 베트남 전쟁 때, 그 미군이 그 동굴 보고 나와! 하니까 베트공이 손들고 나오듯이 주님 앞에 항복하면 돼요.

그것도 안 하고 주의 주권이 어떠니 복음이 어떠니 십자가 어떠니 그 십자가 어디에 써먹을려고요. 아무 쓰잘데기 없는 자기가 자기를 숨기는 이불의 무늬. 아주 다채로운 무늬처럼 지식으로 아주 짜깁기를 했어요. 퀼트 이불을 덮은 거예요. 나중에 실밥 마구 터져 나와요. 그게 내 잘난 체 하는 나한테는 이런 말씀이 연결이 안 돼요.

아까 했던 말씀 다시 하겠습니다. 부분이 뭐보다 크다? 전체보다 큰 거예요. 이 부분이. 우리는 전체가 크기 때문에 부분을 감췄는데 부분을 드러내면서 이 전체 말고 다른 전체. 이 부분을 끄집어내는 주님의 세계가 바로 우리의 죄까지 해결했다는 그 전체. 그 전체로서 이 땅에서 우리로 하여금 방랑자로 살아갑니다.

따라서 에스라 느헤미야의 그 말씀 주신 이유는 에스라 느헤미야가 항상 우리 육신의 요소로서 지금 자리 잡고 있다는 거. 무슨 일 터지면, “제대로 했잖아요. 말씀에 순종했잖아요. 복음도 알았잖아요. 왜 저한테 이런 일이 벌어집니까? 에스라, 느헤미야처럼 그럼 회개할게요. 회개하면 빨리 이 상황이 나아지겠죠.” 이런 식의 에스라 느헤미야의 그 반복되는 썩은 운동, 썩은 내 종교 운동, 이것을 주님께서는 원하는 게 아닙니다. 그거는 나의 잘남의 일종이지요.

다시 한 번 우리가 이미 끄집어냈다는 말은 십자가가 붙어 있어야 십자가 차원에서 우리는 아들도 아닌데 아들 되게 해주셔가지고 주의 십자가를 어린 양을 증거 하게 하기 위해서 완전한 이스라엘로 이미 만들었다는 사실을 여러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에스라 느헤미야가 참 수고도 많이 했고, 어느 부분을 봐도 오직 믿음이고 오직 순종이고 오직 충성밖에 없는 그래서 어떤 결과를 내놓았는데 주께서 그 결과마저 하나님의 다음 계시에 의해서 다 처리하고 무너뜨린 것을 저희들이 깨닫게 해 주시고 진짜 구원은 우리 자신으로부터 우리 자신의 의로부터의 구원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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