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

이 세상이라는 완충공간

아빠와 함께 2025. 12. 15. 22:36

성경에 나오는 대로 천국 가기 위해서 준비해야 하는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게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 17, 18절이에요.  5.16, 5.17, 5.18, 전 이런 식으로 외웁니다만,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그러면 내 쪽에서 뭘 한단 말인가? 아니에요. 내 쪽에서 뭘 한다는 말이 아니고, 이것은 결과고요. 데살로니가전서 5장 10절이 핵심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마중 나오시는 거예요. 마중 나오는 거, 마중 나오는 겁니다. 주께서 마중 나오는 거예요. 이 세상이라는 완충 공간을 통과하는데 그 마중 나오신 분이 어떤 분이냐 하면, 실제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겪었던 분이 마중 나와요. 예수님이 마중 나와요, 예수님이!

그 예수님이 마중 나오는데 마가복음 10장 38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많이 들었던 이야기죠. 그런데 그다음 말을 여러분이 잘 기억 못할 수가 있어요.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나의 잔을 마셔야 해. 그리고 내가 받은 세례를 너희도 같이 받아야 해.’ 이게 바로 완충 공간에서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말씀 사건이에요. 잔을 마신다? 쓴잔이겠죠. 뭔가 짐작 가죠. 그런데 ‘주께서 받은 세례를 같이 받는다.’ 이건 뭡니까?

주께서 받은 세례 받지 아니하고, 주께서 받으신 잔을 받지 아니하면 완충 공간을 통과하지 못한 걸로 쳐서 그 사람은 천국에 이르지 못합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교회를 다니시든지 할 수가 있는데요, 어떤 교회를 다닐 때 그 교회 목사님이나 교인들이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마태복음 7장 22~23절입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라는 마태복음 7장 22~23절을 언급하는 교회가 있던가요?

있던가요? 막 열심 낸다고 난리도 아니잖아요. 열심을 내니 뭐 합니까? 주께서 “너 누구고? 나는 너 모른다.” “제가 금식했고요, 많은 돈을 헌금했고, 전도도 했습니다!” “내 기억에 없네. 너 누구지?” 주께서 왜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중간의 완충 공간을 통과 안 해서 그래요.

완충 공간은 뭐냐?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우러러보며 가로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막 8:22-25).

주께서 소경에게 안수를 해줬는데 안수를 받고 보니까 사람이 아니었어요. 뭐냐? 그냥 나무였습니다. 나무,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나무. 모든 인간 존재는 그냥 나무 같은 존재예요. 그 안목을 경유하고 난 뒤에 다시 안수해 주니까 사람으로 보였다 그 말이지요.

‘아, 사람은 개코도 아무것도 아니구나.’ 나를 포함해서, 본인을 포함해서 사람은 그냥 주님의 십자가 사건에 놀아나는 하나의 비품일 뿐이에요. 비품, 하나님의 물품에 지나지 않아요. 하나의 사물에 지나지 않는 것. “다리를 다 자를까, 아니면 정강이 밑을 자를까?” 어디를 잘라도 우리는 관여할 수 없는 존재, 이게 사람입니다. 이게 본래 인간이에요.

인간은 한결같아요. 인간의 자아는 “다음에 잘할게!” 인간은 다음이 없습니다. 유치원부터 90까지 달라진 적이 없습니다. 몸은 늙었지만 자아는 늙지를 않아요. 희한해요 하여튼, 이게 마귀 자아이기 때문에. 마귀 자아는 시간을 초월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 세례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갈라디아서 3장 1절에서.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저기 있는 십자가’ 아니라는 거예요. ‘이 십자가, 내 안에 들어온 십자가’예요. 내 안에 들어온 십자가. 저기 바깥에 있어서 내 믿음의 대상이 되는 십자가가 아니라, 내 안에 실제로 활동성을 보여주는 십자가. 매일 같이, 매일 같이 이미 다 이루어짐을 증거하기 위해서 사용해 주시는 거예요.

뭐를 증가하지요? 아까 본 데살로니가전서 5.16, 5.17, 5.18 다시 볼까요? 쉽게 말하면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 이제 설교 마지막 대목이니까 큰 거 하나 말씀드려야죠. 악마가 여러분 속에,

 

여러분 마음에 이렇게 이야기하면 악마의 음성으로 들으시기 바랍니다. 어렵지 않아요. 딱 6자입니다.
“애걔? 이게 뭐야, 이게 뭐야?” 악마가 마지막으로 하는 이야기가 이거예요. “애걔? 이게 뭐야?” 다시 말해서 ‘내 인생 이게 뭐야, 내가 가진 게 이게 뭐야, 내 수입이 이게 뭐야, 내 몸이 왜 이게 뭐야?’ 감기까지 걸려서 ‘뭐야, 내 몸이?’ 항상 악마는 범사에 감사하는 걸 제일 싫어해요.
‘이게 뭐야? 내 마음에 안 들어! 차라리 날 죽여버리시지, 욥처럼! 열심히 했는데, 나의 절제력, 나의 집중력, 평생토록 내가 수고한 것, 그런데 그 대가가 애걔…’, ‘애걔’ 이게 들어가야 돼요. ‘애걔? 이게, 이게 뭐야? 아, 정말 실망스럽다.’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주님이 주셨잖아요.’ 하는 고마움, 이거 우리가 유지할 수 없습니다. 유지할 수 없는데 우리가 등대지기 같아요. 우리의 육은 “애걔? 이게 뭐야?” 우리가 마귀의 복제물이니까 ‘이게 뭐야?’ 하다가 그다음에 뭡니까?
등대는 ‘깜빡깜빡’ 하니까 “비로소 내 진짜 찐 모습을 발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바로 십자가 사건, 내가 존재가 아니고 이미 다 이루어진 하나님의 동일성, 하나님의 일관성, ‘내 백성은 내가 잃어버리지 않는다, 는 그 일관성에 포함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감사, 그리고 3분 뒤에 ‘이게 뭐야?’ 다시 3분 후에 ‘감사합니다!’
이거 뭐 깜빡이도 아니고, 시소도 아니고, 늘 깜빡, 깜빡, 깜빡…, 감사할 때 ‘나’와의 작별이거든요. “어이! 이거(빨강 구두) 갖고 가야지!” 휙 던지고 그냥 가버리죠. “야이야이야이야! 굿, 굿바이~!” 기쁘죠.

교회는 캠핑장이에요. 자기와 자기가 작별한 자의 모임인데 ‘내가 당신한테 진짜 친절했는데 나한테 돌아온 건 뭐냐? 이게 뭐야?’ 맨날 회까닥하는 이 모습, 이게 뭐냐? 완충 공간,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그런 시련과 시험을 다 통과하시고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완성했음’, ‘죄 사했다’라는 것, 죄 사함을 끝냈다는 것, 주께서는 매일의 사건을 통해서 말씀이 우리에게 드러나도록 현장성을 주고서, 그 현장성을 통과하게 하신다는 걸 잊지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일이 주께서 홀로 하신 일인 것을 모르고 우리가 내 착함으로 거기에 끼어들려고 시건방지게 설쳤습니다. 마귀는 웃고 있고, 마귀는 우리의 그런 모습에 통쾌해하고 있는 것을 이제는 우리가 깨닫게 해 주시고, 주께서 기뻐하는 것, 주의 깜빡이의 경고하심이 우리 안에서까지 깜빡일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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