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교훈이란 ‘신의 존재 중심’으로 세상을 보고 자신을 정립하고자 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다 내 잘되기 위해서 하나님은 계시다‘는 의식입니다. 이는 신의 존재와 더불어 자신의 존재가 있기에 자신의 몸과 자신의 마음은 절대적인 전능자로부터 주어졌음을 전제로 해서 세상을 살아가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압니다.(롬 1:21) 문제는 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근원적으로 차단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따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심을 받은 분을 이 땅에 보내셨기 때문인데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즉 그 어느 인간이라는 하나님을 아는 자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오로지 아들만이 아버지를 아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요 14:10-11)
그래서 하나님 일의 일관성도 동일성도 오로지 예수님만이 보여주시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사건과 사건으로 덮혀져 있습니다. 그 모든 사건들은 다 아버지와 아들의 언약 성취와 연계되어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동시에 구원될 자격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은 아들 외에는 아버지를 알고 있는 인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될 자는 오로지 인간의 의견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의 일방적인 결정에 의해서 찾아가심으로만 성립됩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 6:37-40)
이 두 가지점, ㉮모든 것은 십자가 사건 중심과 ㉯구원될 자는 찾아가심으로만 성립한다는 사실을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습니다.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요 19:30)
이제 남은 것은 인간의 모든 존재를 사건으로 전환시키는 일입니다.
끝까지 사건됨을 거부하고 자기 존재를 붙들고 있는 대표자가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사단’입니다.(요 6:70) 사단의 복제물인 인간들이 이 사단의 정신으로 품고 태어났기에 평생을 다음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무장되어 있습니다. “내 인생은 내가 끝까지 안고 갈거야” 혹은 “나 외의 존재의 손에 죽기보다는 차라리 내 손으로 내 인생을 끝낼거야” 라고 말입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늘 사단의 다음과 같은 음성을 내부로부터 듣게 됩니다. “에게, 이게 뭐냐? 왜 내 인생이 이것 밖에 안 돼? 나의 절제와 나의 집중력과 내가 나에게 바친 혼신의 노력의 집대성은 나의 의는 어떻게 되는거야?”라고 말입니다.
인간들의 이러한 보편성은 사단의 뜻과 관련해서 이 세상에 나타난 인물을 통해서 밝혀집니다. 욥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 내의 유일한 상대자인 사단과의 대화의 결과가 인간 세계에서 어떤 식으로 전개되는지를 보인 인물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15)
욥은 자신의 출생을 원망했습니다. 이럴 것 같으면 괜히 태어났다는 식으로 하나님께 원망했습니다.(욥 3:11/6:4/7:16) 하지만 하나님은 그 원망한 욥을 그 시대의 메시야로 만들어주므로서 악마가 끝까지 욥을 자기 손아귀에 놓이지 않고 거기서 빼내어주셨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의 우매한 대로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욥 42:8)
오늘날 성도도 욥처럼 일방적으로 사건으로 찾아와 이 존재의 세계에서 빼내어주십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완충 공간을 두십니다. 즉 그동안 세상에 보고 왔던 그 안목 자체에 변화를 주시는 겁니다.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우러러보며 가로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막 8:22-25)
즉 인간이라는 존재는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마치 나무 같은 사물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따라서 주님과 함께 있음의 세계로 옮겨 놓으려면 거기에 합당한 새로운 안목으로 장착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 안목이 바로 데살로니가 5:10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인간의 몸은 늙어도 자아는 한결같이 늙지 않습니다. 악마 성격의 동질성이며 여기서 인간들은 십자가 사건 중심의 동질성을 외면서 자기 위주의 동질성을 추구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십자가 사건을 자기 백성 안에 집어넣으셔서 성도가 살아가는 모든 것이 존재로서가 아니라 사건과 사건의 연결성으로 성립하게 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성도는 더는 존재가 아니라 육과 영의 사건을 반복적으로 깜박이는 완충 공간으로 지나가면서 천국에 가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친히 통과하신 이 세상을 이제 주님과 더불어 이곳을 통과하면서 주님의 잔과 세례를 받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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