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

12/10-한나

아빠와 함께 2025. 12. 10. 09:54

한나가 여기서 뭐 하느냐 하면 서원을 하는데 아아 대단한 도박을 벌이고 있는 거예요. 정신적으로 분명히 사랑받고 있고 하나님 믿습니다, 하는데 누가 안 알아줘요? 주변에서 타인의 욕망들이 시선이 안 알아주잖아요. 이참에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거예요. 뭐로? 서원하는 것으로. 일종의 객기 같은 거죠. ‘그것 봐. 하나님 나 사랑하고 있잖아, 맞잖아.’

그래서 아까 여기서 나오지만 원수라는 말, 그 한나 수준의 원수가 이미 기존에 인간적인 모습으로 있잖아요. 이게 사사기 13장에 나오는 진짜 서원한 자의 모습은, 이건 뭐냐 하면 누가 나보고 조롱하고 자식 없다고 미워하는 게 아니고 아예 마노아 가정은 자식이 없어요. 누군가 서원을 해야 될 자를 주께서 개입해버려요. 그냥 일방적으로 집어넣어버려요.

“네가 자식이 없지?” “없습니다.” “네가 자식이 생길 거야.” “그래요?” “생기는데 나한테 바쳐야 돼.” 무슨 요소가 빠졌습니까? 나는 원하는데 자식 없다고 남들이 욕합디다. 내 자존심 채우기 위해서 주께서 내 기도에 응답해주세요, 이 요소가 빠졌지요. 일방적으로 집어넣어서 일방적으로 사원을 해버리면 이거는 뭐냐 하면 바로 ‘아들 안의 아버지’라는 공식이 성사되는 겁니다. 그걸 오후에선 이질적이라 했지요.

나는 나 혼자 조용하게 평범하게 살고 싶은데 하나님이신 아버지가 나를 가만두지 않고 거기다가 주님이 십자가 사건을 집어넣어요. 그러면 나는 내 안에 이미 가룟 유다가 작동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그 모든 서원을 주께서는 유일하게 지옥에서 천국으로 통로를 뚫어버립니다.

아까 제가 레위기 17장 11절 읽어보라 했잖아요. 그 내용이 뭐였습니까? 주께서 뭐만 받는다? 피만 받아요. 피만 받으면 주께서 내 피는 받습니까? 내 피는 안 받지요. 그럼 어떤 인간의 피는 받습니까? 안 받아요. 제사장 피 받습니까? 제사장 피 안 받습니다. 제사장은 양의 피를 안고 들어가야 받아요.

그러니까 안고 들어가는 그것, 그거는 사랑의 대상이지만 나는 사랑의 대상이 아니에요. 사랑이란 수치를 소멸시켜 없애서 연합시키거든요. 연합하기 전에 먼저 개인의 수치를 안고 있는 개인을 대표해서 집단적으로 대표자가 있어야 돼요. 설명이 더 필요한데, 대표자가 있어야 돼요. 그 대표자가 누구냐? 왕입니다.

아까 사무엘상에서 왕은 뭐하는 짓을 했다? 네 것도 내 것이라고 계속 소유로 하고 싶지요. 백성들은 그것을 빼앗기면서도 왕이 있어야 될 이유가, 저 왕이 누굴 지켜준다? 변변치 않은 나를 지켜주는 것은 내 것을 가져도 저 왕이 나를 지켜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얼마나 협소한 생각이에요.

그러나 주님의 왕은 우리한테 없는 왕이에요. 없는 왕인데 불쑥 나타나서 우리한테 의논도 하지 않고 알아서 아버지 앞에 서원을 해서 자신이 세상 죄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이미 피를 생산하고 말았습니다. 이미. 그러니 율법에 대해서 이스라엘 집단형상과 의논하지 않고 율법이 이야기하는, 그걸 나실인이라 해요. 포도주 먹지 말고, 주검 가까이 하지 말고, 머리 깎지 말고.

다시 말해서 머리 깎지 말라는 것은 약속의 땅과 일상에 괴리된 모습으로 살아가라. 인간이 생각하는 약속의 땅과는 전혀 다른 약속의 땅을 앞당겨서 보여주는 게 나실인이거든요. 의논하지 않고 피를 흘렸다 이 말이죠. 그다음부터는 뭐냐? 빼앗는 것이 아니고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지요.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기서 다툼이 일어나는 거예요.

권력은, 다른 말로 하면 돈이죠. 권력을 얻고 싶습니다. 권력을 얻는 것이 바로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모양새입니다. 그러니까 남들 잘 사는 것처럼 저도 부자 되게 해주세요, 라고 요청하는 거예요. 그 모델은 뭐냐 하면 모든 권력을 다 쥐고 있는 왕이 모델이겠지요. 그러면 일반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잘 살려면 누구와 선이 닿아야 돼요? 왕과 왕족. 왕과 가까운 사람이 누구냐 하면 제사장, 선지자, 랍비들이에요.

랍비는 나중에 나왔지만 제사장, 선지자 이래 돼 있지요. 관리, 또는 장로 계급 그들에게 서민들이 가까이 와서 권력을 얻으려고 하니까 권력자들은 있는 것까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재산까지 노리면서 이것 해주면 해줄게, 라는 인간적인 거래행사가 되겠지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점점 더 뭐가 돼요? 권력단체가 되겠지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멸망합니다. 구약에서. 고구마줄기처럼 다 연결돼 있어요.

내가 원하는 권력은 내 소원대로 이뤄지는 게 아니고 그런 나를 권력자가 나를 철저하게 이용해먹는다는 사실을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이거는 실험에서 알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이스라엘 상황을 주께서 허용한 이유가 뭐냐? 주께서 준비한 왕은 인간들이 생각한 것 꼭 반대 방향으로 노출해요. 그냥 값없이 천국 문을 허용해버려요. 아무 대가없이 천국 문을 허용해버립니다. 값없이 그냥 생명수를 주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서 이미 준비된 거예요. 왜냐하면 그건 아버지와 아들만 아는 계약이기 때문에.

그래서 어떤 인간도 그 언약에 참여할 수가 없습니다. 참여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나님은 이렇게 했어요. 누구든지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면 저주받고 지키면 복을 받는다, 라는 말을 신명기 28장에서 했잖아요. 그거는 누구도 내 율법 계약을 지킬 수 없고 참여할 수 없다는 말로 들어야 되는데 이걸 잘못 알아듣고 열심히 노력하게 되면 나도 복을 받겠다는 본인의 숨어있는 권력욕을 율법을 통해서 그걸 노출시켜버린 거예요.

여러분, 시편 1편 정도는 다 외우지요. 뭐 답변 안 하셔도 됩니다. 이게 성경적 방법이거든요. 하나님께서 너 십계명 정도는 다 지켰지, 이 말은 뭡니까? 너희 중에 아무도 못 지켰다는 뜻이에요. “복 있는 사람은 날마다 율법을 묵상하는 자로다.” ‘하지 뭐. 묵상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묵상의 의미는 뭔데? 몇 시간 쉬고 묵상해? 쉬는 시간 몇 분인데? 전혀 마련된 게 없어요.

그래서 바리새인은 뭘 준비합니까? 십계명을 지키고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세칙들을 마련하는 것이 유대인 사회였고,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이었고 그 세칙 마련할 때 그들이 뭘 갖고 있나? 문자를 갖고 있고, 그 문자는 그들이 율법을 구성하는데 하나의 언어를 담당하기 때문에 그게 권력이 작용하는 거예요. 무식한 인간들은 우리가 지은 법이나 지켜.

예수님께서 거기에 대한 대답은 간단합니다. 신명기에 그런 법이 있다고? 간음한 자를 돌로 쳐라. 그러면 이중에서 죄 없는 자가 돌을 쳐라. 죄 없는 자가 돌을 치는 것이면 우리 같으면 어떻게 돼요? 그럼 나네, 하고 돌로 쳐야 되는데 이상하게 그러지 않았던 이유가 있어요. 그 당시에 주님이 주머니에 손을 넣었는지 안 넣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손을 넣고 글을 씁니다. 이걸(화이트보드) 땅이라 하고 글을 써보겠습니다.

김 아무개, 1965년도 3월 5일 오후 3시에 율법에 위반했음. 또 최 아무개, 돌 들고 있지요. 최 아무개, 1972년도…. 왜 이렇게 안 써도 되는 이유는, 인간의 자기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서 위선적인 죄는 평생 갈 때까지 반복하기 때문에 문장 몇 개만 해도 돌 다 놓게 돼 있어요. 왜냐? 찔리기 때문에. 그러니까 땅에 글 쓴 거예요, 그 사람 마음에다 글 쓴 거예요? 마음에다 글 쓴 거예요.

카프카의 [유형지]라는 단편소설이 있어요. 유형지에서 어떤 장교가 기계를 만들었는데 이 기계가 뭐냐 하면 죄를 지은 사람에게 벌을 내리는 형틀을 만들어놓고 무엇 때문에 죄냐 하는 것은 그 형틀에 찌를 때 바늘로 몸에다가 그 사람의 지은 죄 문장을 문신처럼 바늘로 콕콕 찔러서 죽어가는 죄수의 몸에다가 그 죄목을 적는 방식으로 사형을 시키는 기계를 만든다는 거예요. 잔인하지요. <어쩔 수가 없다> 영화보다 더 잔인한 것 같아.

네가 죽는 이유는 이 죄 때문이야, 라고 사람이 바늘에 찔려서 피 흘려 죽게 만드는 기계. 그걸 장교가 시범 보인다고 지가 먼저 죽어버렸어요. 카프카는 그렇게 했어요. 그걸 시범 보이는 본인이 벌거벗고 누었다가 죽어버렸어요. 이게 인생이다. 인간은 자기가 알지 못하는 죄에 대해서 벌 받고 있는 게 인생이다. 인생이란 벌 받는 과정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 죄가 뭐냐 하는 건 지옥 가서야 아는 거예요.

인간의 죄는 뭐냐? 피의 사랑이 도착하지 않아서 수치스러운 것이 그대로 지니고 있다는 게 죄가 되지요. 수치가 해소되는 게 아니고 사랑에 의해서 이미 다 용서받은 상태에서 도대체 뭐가 용서받았지? 내가 이런 의로움을 유지하고 있었구나, 그걸 들춰냄을 당할 때 그 관계를 뭐냐? 의라고 하는 거예요. 의는 소유가 아닙니다.

사랑은 소유가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가, 그 관계가 사랑이에요. 우리는 그 사랑을 보여주는 들러리고. 우린 껍데기고 안에는 아버지와 아들, 아들과 아버지 사이에 영원한 관계가 있어요. 그걸 가지고 전에 봤지요. 그게 언약이에요. 히브리서 13장 마지막에 나와요. 언약의 피를 살리기 위해서 그동안 하나님께선 자기 죄인들 사용했다. 아주 노골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어요.

우리를 구원하는 게 아니고 언약을 구원하는 거예요. 그걸 아까 제가 뭐라 했습니까? 주께서는 우리에게 사랑을 심어놓고 그 사랑을, 우리를 가져가는 거예요. 받은 인간들은, 성령 없이 사랑을 이해하게 되면 그 사랑은 무슨 사랑이냐 하면 그게 바로 전영록이 불렀던 무슨 노래? <얄미운 사람> 정주고 마음 주고 사랑도 줬지만 지금은 남이 되어 떠나가느냐. 김지애가 부르고 작곡은 전영록이 하고.

원래 인간은 피조물이에요. 인간은 6일째 마지막에 만들어졌다고요. 다른 해와 달은 그런 데모를 안 합니다. 4일째 만든. 꼭 인간들이 마귀의 앞잡이 되어 달려들고 항변하고 이러고 있어요. 그래서 주께서는 예수님이 고분고분하잖아요. 예수님은 십자가 죽을 때 고분고분했지요. “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아주옵소서.”

주께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할 수 있거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하는 그 고분고분한 그 마음이 성령이라고 해요. 성령이 찾아오게 되면 그다음부터 우리 육신에 있던 죄가 얼마나 발악을 하고 있는지를 비로소 우리는 밝혀집니다. ‘주여, 사랑 없이는 못 살잖아요. 내 인생 이래 조져놓으면 안 되잖아요.’ 이런 식으로 발악하는 것이 나중에 어떻게 되느냐?

다시 반복하면서 회상되면서 이게 바로 죄였구나, 하는 죄를 들춰내는 기쁨, 내가 온전하게 사랑을 소유했다는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은 내가 이렇게 철딱서니 없이 주님께 개기고 대들고 맨날 육신이 할 줄 아는 게 이것밖에 없다는 것을 알 때 ‘주여, 날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그런다고 떠나지 않습니다.

이미 안 떠나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범사에 감사와 기쁨으로 이어지도록 주께서 하셨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바로 이 마지막 때 주 앞에 바쳐진 한나, 바쳐진 서원하는 입다의 딸처럼 그렇게 다뤄집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신분이 바뀌고 자리가 바뀌고 모든 것이 바뀌게 하는 것은 우리의 수치를 수치답게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주님의 그 큰 사랑뿐인 것을 이제는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