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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0-대책 없는 전쟁

아빠와 함께 2025. 11. 10. 08:19

 내가 나를 인도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는 것, 그 차이를 여호사밧 왕이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내가 나를 인도하는 것, 이건 뭐 모든 인간이 태어나면서 하는 게 이거에요. 내가 나를 인도하잖아요. 그런데 내가 나를 인도할 때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이게 생겨요. 자존심, 또는 자존감.

그래서 역대하18장에 보면 여호사밧도 인간인지라 지 자존심 세우려고 북이스라엘의 아합 왕과 더불어서 전쟁을 했습니다. 전쟁을 하다가 시껍했어요. 죽을 뻔했어요. 그게 역대하 18장 31절에 보면, “병거의 장관들이 여호사밧을 보고 이르되 이가 이스라엘 왕이라 하고 돌이켜 저와 싸우려 한즉 여호사밧이 소리를 지르매 여호와께서 저를 도우시며 하나님이 저희를 감동시키사 저를 떠나가게 하신지라”

왕의 갑옷이 특별난데 그 갑옷을 아합 왕이 여호사밧에게 입히고 자기는 보통 병사처럼 위장을 한 겁니다. 안 죽으려고. 그런데 적들이 와서 “이스라엘 왕이다. 저 왕만 죽이면 끝난다. 빨리 승리하고 집에 가자”라고 했는데 여호사밧이 어떻게 했습니까? “아니야, 아니야. 나 아니야.” 이래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적들이, “어, 아니네. 저 사람 아니야. 저 사람 가짜야.” 그래서 “병거의 장관들이 저가 이스라엘 왕이 아님을 보고 쫓기를 그치고 돌이켰더라”(32절)

그러니까 아님을 본다는 것은 여호사밧은 인간과 인간의 전쟁에서 어떤 인간이 되느냐 하면 왕이 아닌 거예요. 남쪽 왕인데 왕이 아닌 것이 됐잖아요. 이걸 그냥 쉬운 말로 뭐냐?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어느 상황에서? ‘전쟁하는 상황에서 나는 전쟁의 목표가 아니야. 목표에 끼어들 가치도 없어. 아니야. 화살로 나 쏘지 마. 나는 이 전쟁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야’ 라고 외쳤던 경험을 여호사밧이 한 겁니다.

여러분도 이런 경험 하셔야 돼요. 주께서 그렇게 하실 겁니다. 되지도 아닌 게 지가 자존심 세서 ‘내가 앞장설게’ 앞장서지 마세요, 앞장서지 마세요. 이 세상 인간과 인간, 말과 말의 전쟁에서 나대지 마시고 나서지 마세요. 만약 여러분 붙들고, ‘네가 대장이야’ 하거든요 이렇게 하세요. 오늘 좋은 것 배운다.

“나 아니야.” “뭐가 아닌데?” “아무것도 아니야.” I'm nothing,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오야봉도 아니고, 나는 주요 인물도 아니고, 나는 무가치해. 쓰레기야. 똥피야. 화투에서 그냥 버려도 되는 것, 아무것도 아닌 것 이 경험을 여호사밧이 했습니다. 

 

그럴 때 19장 2절에 예후 선지자가 나타납니다. 아까 처음에 했잖아요. 내가 다시 그려보면 이렇습니다.

왕 있고, 예후 선지자 있단 말이죠. 둘 다 인간이라 했잖아요. 그런데 이 위에 누가 있는가? 하나님께서 왕과 선지자에게 양쪽 다 말씀을 줬습니다. 말씀을 줬는데 왕은 지가 자존심이 있어서 인간나라치고 자기보다 높은 사람 없다. 왜?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고 나만 특별나다는 의식을 가지고 왕이 됐단 말이죠, 여호사밧이. 모든 권력가 부귀영화가 자기한테 집중돼 있으니까요.

그게 18장에 보면 나오지요. “여호사밧이 부귀와 영광이 극하였고”(1절) 요새 말로 하면, ‘나 돈 많아. 그러니까 내가 당신한테 함부로 이야기해도 괜찮아.’ 왜? 돈 많으니까. 피라미드 구조에서 자본주의사회에서 제일 높은 자리에 있으니까 아래 것들에게 함부로 말할 수 있는 자격이 된다고, 이렇게 해서 전쟁에 같이 뛰어든 거예요. 아합 왕과 연혼하여 사돈 맺어 같이 뛰어든 겁니다. 뛰어들었는데 막상 전쟁 통에서 여호사밧이 고백한 것은 뭡니까? “나 아무것도 아니야. 나 쏘지 마. 쏠 가치도 없어.” 이렇게 된 거예요.

인간의 말들이 통하는 인간의 세계에서 다시 한 번 여호사밧은 구출, 구원되었습니다. 구원되었다는 말은 뭐 대단한 게 아니고 아주 치사스러운 우스운 꼴을 보면서 그 동네에 합류하지 않고 빠져나왔다. 이게 구원입니다. 아주 치사스럽게. 그중에 뭐가 날아갔어요? 지 자존심, 자존감, 위신, 체면 그 딴 것 다 버린 거예요.

왜? 하나님의 구원은 그 딴 것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기 때문에. 위신, 체면, 전통, 자기 잘난 것, 가진 것, 자기 주특기 아무 관계없이 그냥 어린양의 희생으로 구원된 겁니다. 어떻게 그 구원 마음에 드십니까? 나의 의를 박살내고 구원하는 그 구원이 여러분 마음에 드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마음에 들고, 안 들고 간에 이거는 마음대로 우리 정하는 대로 되는 건 아니지만 앞으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이끄실 거예요.

우리에게 수시로 올라오는 게 우리 자존심이고 우리 위신이잖아요. 그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허락 하에 우리가 망가지는 일이 벌어질 거예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들어요. 망가질 때에 우리는 뭘 느끼게 되느냐? 바로 희생, 십자가의 고통을 아는 기회로 삼아야 돼요. 그동안 고통 없는 행복한 인생을 추스르는데 전력을 다했다면 성령께서 관여하사 너의 모든 구원과 천국, 축복은 주님의 고통에서부터 나온 힘이에요.

그런데 우린 그걸 끊어버리고, 말씀의 완성을 끊어버리고 자기 몸 하나 추스르는데 평생을 급급했습니다. 자기 몸을 추스르고 자기를 방어해버리면 거기서 뭐가 나오겠습니까? 사명감 나오겠습니까, 자존감 나오겠습니까? 자존감 나오지요. 이 자존감을 예후라는 선지자를 통해서 왕에게 직접 전달합니다. 어떻게 전달하는지 19장 2절에 나옵니다. “하나니의 아들 선견자 예후가 나가서 여호사밧 왕을 맞아 가로되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 가하니이까”라고 물었지요.

이러한 발언은 나단 선지자가 다윗 왕에서 당신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당신이 죽이라고 한 사람이 죽는 게 아니고, 당신이 죽어야 될 그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그렇게 죽일 거예요, 하고 다윗에게 지적했을 때에 다윗은 비로소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말이 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저 사람을 통해서 나한테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달했다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때 다윗이 뭐냐? 성신 받았다고 돼 있어요. 신약으로 하면 성령 받은 게 돼요.

자, 그렇다면 머리 좋은 사람은 생각하겠지요. 성령 받은 게 뭐냐? 어떤 경우가 성령 받은 것이냐?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지적을 받았을 때. 그 지적받는 조건은 뭐냐? 이게 아무것도 아닌 게 없는 걸 있게 하고, 죽은 걸 살려놓으니까 다시 네가 있는 것처럼 여기고, 마치 펄펄 산 것처럼 여기는 그 점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십자가의 말씀으로 이걸 지적해줄 때 그 지적당하는 그 관계가 성령 받은 순간입니다.

그러면 그게 뭐냐 하면 우리 안에 말씀이 안착되는 순간이에요. 말씀이 심겨지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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