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요 6:48-51).
예수님께서 생명의 떡이니까 예수님께서 어떻게 그 떡을 보여줬느냐? 이 땅에 와서 죽었고 이 땅에 와서 사흘 만에 살아났어요.
그걸 바라보고 있는 우리 인간들은 ‘아, 저분은 죽었다가 살아났구나.’라고 하는데, 그거는 어떤 관점이냐? 내가 지금 안 죽고 살아 있는 관점에서 ‘저분은 죽었고, 저분은 또 살았다’라고 일방적으로 잘못된 해석을 하는 거예요. 곡물로 인하여, 음식으로 인하여 지금 죽어가고 있으면서 죽어가는 자기 신세에 대해서, 내가 왜 죽어가는지의 그 이유를 전혀 모른 채 전혀 모르는 채 자꾸 상상하는 거예요. ‘이생이 끝나면 저 생이 있겠지.’ 이생과 저 생이 정보 교환이 안 되는데요. 이생의 정보가 저쪽의 정보로 안 넘어갑니다.
왜냐? 말씀에 입각해 보면, 이생에서의 모든 정보는 이미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떻게 참하게 살고, 어떻게 바르게 살든 관계없이 그것은 다 죄라고 규정했어요. 누가? 예수님이요. 예수님이 누군데요? 말씀이에요. 말씀이 육신이 되었잖아요. 말씀 되시는 분이 육신으로 오셔서 육신의 모습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나 자기나 똑같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똑같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입니다. 그 사실을 모르고 인간들의 권세로 예수님을 처벌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죽었습니다. 인간은 죽어도 죽는 이유를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죽을 때 참된 인간으로서 죽기 때문에 그 죽음이 참된 의미입니다. 그 죽음이 뭐냐? 생명이에요. 언약의 피, 아벨 피보다 더 낫게 하는 언약의 피가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내 죽음의 말씀을 가지고 합류시키기 위해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게 뭐냐? 산, 땅이 아니고 산, 산 위에서 주신 말씀, 그 말씀을 산상 설교라고 이야기합니다.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말씀이죠.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마 5:1)
산상 설교로서 우리를 죽이는 방법은…, 우리의 몸은 곡물로 인하여 소멸하기 때문에 우리의 몸은 소용없어요. 어디를 집중공략 하느냐? 우리의 마음을 공략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5장 3절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첫 번째 복을 거론 하면서 마음을 공략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음이 텅텅 비어 있는 자가 복이 있나니 천국에 너의 것이니라.’ 다시 말해서 마음 자체가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유지하라.’는 말입니다. 재산이 10억이 되고 20억이 되든 우리의 마음가짐은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의 선행을 받지 않습니다. 우리의 악행도 물론 받지 않습니다. 우리의 똑똑함도 받지 않고 어리석음도 받지 않아요. 왜 주께서는 우리의 것을 안 받는가? 그게 요한일서에 2장에 나옵니다. 요한일서 2장 15절에 보면 왜 안 받는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아버지의 사랑이 있지 않기 때문에 안 받는 거예요. 우리가 한것은 안 받습니다. 아버지가 받으시는 것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시는 거예요.
이 산상 설교를 통해서, 주께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죽이십니다.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마 5:29) 라는 이 말씀 돼, 안돼?” “못합니다.” “안돼? 저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마 6:31)는 말씀 돼, 안돼?” “못합니다.” “저주나 받아라!”
예수님이 죽었을 때 저주받고 죽었거든요. 말씀으로 하여금 그 저주를 우리에게 나누어 주는 겁니다. “네가 너한테 져. 네가 너한테 패배해. 그러면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괜히 착한 짓을 해서 좋게좋게 해서 너를 자꾸 건지려고 하지 마.” 말씀을 보게 되면 우리는 우리가 내세울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산상설교 같은 경우에. 그 말씀을 가지고 우리에게 찾아옴으로써 결국 말씀에 의해서 죽어버리면 우리의 옛사람이 죽어버려요. 그냥 옛사람이라 하지 말고, 우리 자아가 죽어버려요.
죽고 난 뒤에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의 자아가, 예수님의 자아, 예수님의 영이니까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고리도전서 2장에 보면 예수님의 깊은 마음(10절)이 우리 속에 들어오게 되면, 텅텅 비어 있는 우리 마음에 ‘다 이루었다’는 주님의 온전한 마음이 우리 마음을 차지해 버립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의 소유가 되고 예수님의 겉이 돼요.
예수님의 겉이 되면, 그때부터 우리는…, 이 영이 무슨 영이냐 하면, 아들의 영이죠. 아들의 영이라면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하라고 이미 기도를 규정했어요. 뭐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걸 경상도 버전으로 번역하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예!’ 이 뜻이라는 말이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그 이름만을 거룩히 여기면 참 좋겠습니다.” 그런 기도라는 말이죠. 아버지 하나님이 예수님의 아버지 된 것처럼 이젠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한 식구가 되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의 패밀리가 돼 버려요.
그러한 과정을 위해서는 우리에게 뭐가 필요하냐? 두껍지만 이 말씀이 날마다 살아서 우리로 하여금 이 자아를 못살게 굴죠. 이렇게 착했습니다, 이렇게 훌륭했습니다, 바르게 살았습니다, 믿음 좋습니다…, 그걸 자근자근, 그냥 낙엽 부수듯이 다 부숴버리는 그 작업, 내가 나한테 패배해서 나는 아무것도 아님을 아는 그 기쁨과 즐거움이 바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아들의 특징적인 모습이에요.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 이미 이 땅에서 예수 안에 있는 자는 하늘이고, 예수 밖에 있는 자는 땅입니다. 하늘에 속한 자는 언약의 피만, 피의 공로만 감사하고 고마워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문제였습니다. 좋은 것 있다면 다 내 것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이 고집스러운 우리의 마귀적인 품성, 이 사실을 우리가 알게 됐다는 것이 이미 합격한, 구원받은 주님의 식구라는 것을 깨닫고, 오직 모든 공로를 주께 감사드리며 같이 기뻐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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