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운명
2025년 11월 9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2:25-29
12:25 너희는 삼가 말하신 자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자를 거역한 저희가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 좇아 경고하신 자를 배반하는 우리일까 보냐
12:26 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가라사대 내가 또 한 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12:27 이 또 한 번이라 하심은 진동치 아니하는 것을 영존케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든 것들의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니라
12:28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12: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세상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면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대로 진행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만드시고 스스로 만족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창 1:31)
그러나 이러한 만족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제 구실을 다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바, 즉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과실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에 위반하면 하나님의 만족도 깨어지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과 같이 영원히 상대역을 해줄 존재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실려있는 자기 백성을 원하시는 겁니다. 이 작업에 하나님께서 나서시는 겁니다. 우선 기존 하나님을 만족하셨다는 땅과 하늘은 흔들리면서 무너져 내려야 합니다. 그것이 무너지면서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영원한 것이 바닥에 보이게 됩니다. “주께서 옛적에 땅의 기초를 놓으셨사오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니이다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주의 종들의 자손은 항상 안전히 거주하고 그의 후손은 주 앞에 굳게 서리이다 하였도다”(시 102:25-28) 이제 제대로 된 하나님의 상대역, 혹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신 분을 등장시켜 그분을 보위하는 새하늘과 새땅을 준비해주셨습니다.
자연적으로 기존의 옛땅과 옛하늘은 파괴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떠합니까? 오늘 본문 히브리서 12:29에 보면, ‘하나님은 소멸하시는 불’이라고 하셨습니다. 기존의 땅과 하늘을 통해서 인간들은 자신의 안정적인 심성을 확보했습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늘 자연을 살피고 지구환경을 계산하면서 자신이 무너지지 않고자 전력을 다 기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연의 불안정을 말하는 하나님의 계시를 멀리 치워버립니다. 외면합니다. 무시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과는 다른 특이함을 보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생겨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은 난감하고 영문도 모르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러고 난 뒤에 선지자들이 나타나서 특이한 사건들을 해석하고 설명해줍니다. “너희들이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위반해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말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이런 경우들의 반복입니다. 이런 지적에 대해서 이스라엘은 반성하면서 다시는 그런 일을 행하지 않더라도 다짐을 해보지만 소용없습니다.
왜냐하면 기존의 자기 노력으로 처리할 수 없는 새로운 사태가 맞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들처럼 자신들의 철저함으로 자기 나라를 지켜낼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진동은 선악과 나무 의식으로 갇혀있는 자를 생명나무가 있는 곳으로 데려가려는 하나님의 ‘진동 통과 프로그램’을 위한 진동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방식은 인간 안에 있는 기존의 ‘하나님의 형상’을 ‘예수님의 형상’ 곧 ‘맏아들의 형상’을 삽입시켜 그 형상에 의한 새로운 ‘신생아’를 탄생시키는 겁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
또한 갈라디아서 4:19에 이와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알지네이트Alginate 라는 물질에 형체를 집어넣고 그 형체를 5분 후에 빼내고 난 뒤 그 빈어 있는 자리에 석고를 붙고 난 뒤, 석고가 굳으면 밖에 붙어 있는 알지네이트를 깨부수셔야 하나의 조각품이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십니다. 인간의 심성상 죄에 맛들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죄란 ‘하나님에게 대드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해서 ‘독자적으로 자기 의미 챙기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마가복음 9:43-45에 보면,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라는 극단적인 발언도 주님께서 서슴치 않고 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인간이 지금 살아있다고 여기는 것은 정말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척’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말씀 앞에서 죽어 있는 게 너무나도 분명한데도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자기에게 안착시켜 그것으로 하나님 나라를 노렸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통해서 준비한 것은 바로 그 행위를 모조리 다 깨는 겁니다. 자기 행함을 계속 쥐고 있는 바로 그 자체가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이유라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행함을 깨시는 식으로 진동마저 통과하는 프로그램을 실행에 옮기십니다.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9:32-33)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친히 성도의 남편이 되십니다. 여기에는 ‘이제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법칙이 적용됩니다.(마 19:6)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도 내용은, “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고 하셨고(요 17:16) 그들도 아버지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라고 하셨습니다.(요 17:21)
요한계시록 21:1-2에서는 이러한 프로그램이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마감하십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이제 성도는 뱀 껍질을 벗어야 합니다. 자기 육에서 나오는 모든 행함의 껍질을 벗어세요. 거기에는 세상 것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5-16)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의 우리 자신이 율법과 더불어 이미 죽어버렸음을 감사하고 우리 안에 사시는 예수님을 보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92강-히브리서 12장 25-29절(세상의 운명) 251109-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12장 25-29절입니다.
히브리서 12:25-29
“너희는 삼가 말하신 자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자를 거역한 저희가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 좇아 경고하신 자를 배반하는 우리일까 보냐 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가라사대 내가 또 한 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이 또 한 번이라 하심은 진동치 아니하는 것을 영존케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든 것들의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찌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하나님에 대해서 ‘불’이라고 이야기하고, 그 불의 기능은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그냥 따숩게 하기 위한 불이 아니고 소멸하는 불이다. 우리를 소멸하기 위한 목적이 하나님의 일하심 속에 담겨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소멸 되어야 될 그 이유와, 그리고 땅이 진동해야 될 이유에 대해서 또한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또 한 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라고 하는데 오늘 본문 27절에 보면 ‘한번 진동해야 될 이유’가 땅에 있다는 겁니다. 땅이 진동되어야 될 이유는, 소멸되어야 될 인간이 거기 살고 있기 때문에 그렇죠. ‘인간에게 문제가 있어서 인간이 살고 의지하는 땅도 진동이 되어야 된다’는 거예요.
‘진동한다’는 말은 인간의 소멸과 더불어서 같이 소멸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땅이 진동한다는 것에 대해 이미 성경에서 예언을 했다’라고 하십니다. 시편 102편 25절에 보면 “주께서 옛적에 땅의 기초를 두셨사오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바니이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기초’라는 말이 나와요. 그리고 26-27절에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같이 낡으리니 의복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여상하시고 주의 년대는 무궁하리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기초가 제 기능을 못 하면 그 위의 땅도 무너지게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땅을 만드셨다. 그런데 하늘도 주께서 만드셨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땅이 무너진다는 말은, 하늘도 곧장 무너진다는 이야기에요. 그러면 ‘하늘 무너지고 땅 무너지고 인간 소멸하고, 남는 게 뭐가 있느냐?’
인간입장에서는 황당하게 들릴 거예요. 그것은 주님의 영존함을 축하하기 위해서, 주님만이 영원히 존재하는 것을 부각하기 위해서 무너지는 하늘 땅 말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들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무너져야 할 땅과 하늘이 인간 때문에 무너지거든요. 그렇다면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하늘과 땅, 인간 자리에 교체해서 뭐가 들어가는데 그게 바로 ‘주님이 사람이 되셔서 제대로 된 사람으로서 주의 말씀을 성취하게 되면 거기에 대한 보상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 마련된다.’ 이게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시편 102편 2-3절에 “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같이 낡으리니 의복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여상하시고 주의 년대는 무궁하리이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관심사가, ‘주님 혼자 살려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든 건 아닐 것인데 주님 중심으로 만들어진 새 하늘과 새 땅에 누가 참여합니까?’라는 그러한 기대가 있을 거예요.
시편 102편 28절에 보면 “주의 종들의 자손이 항상 있고 그 후손이 주의 앞에 굳게 서리이다 하였도다.”라고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세상의 인간들을 소멸해요. 소멸하고, 하늘과 땅도 없애버립니다. 진동시켜서 무너지게 하죠. 그런데 그 과정속에서 뭘 생산하느냐?
하나님의 천국 백성을, 무너뜨리는 작업을 동반해서, 연동해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들어 내십니다. 신생아죠, 신생아. 새로운 생명으로 낳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을 저는 ‘진동 통과 프로그램’이라고 이렇게 이름 붙여 봤는데요.
진동하는 걸 어떻게 통과하는지의 프로그램을 하나님께서 마련할 때 우리 인간들 입장에서는 갖가지 의문점들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인간들을 그렇게 소멸할 것 같으면 애초에 만들지를 말든지, 무너질 해와 하늘과 땅을 귀찮게 만들어놓고 또 무너뜨리지 말고, 처음부터 완벽하게 무너지지 않을 하늘과 땅을 만들면 되지 않겠느냐?’ 이런 의문점들이 발생됩니다.
이러한 의문점을 해소하는 해답이 또 성경에 나와 있어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창세기 1장 3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를 하시고 스스로 감상하십니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심히 좋았더라.’ 여기서 심히 좋았다고 하실 때 이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에 대한 만족감입니다. 그런데 이 창조하신 만족감을 하나님께서 계속 이어 나가면 될 텐데 이어 나가시질 않고 중간에 인간을 마지막 6일째 만드시면서 하나님과 인간과 주고받는 관계가 만들어져요.
하나님 혼자 만드시고 혼자 즐겁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을 만드시고 인간과 주고받는 관계가 새로 설정이 됩니다. 그래서 만든 것이 인간이에요. 인간과 주고받는 그 관계를 가지고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기에게 만족하시되 하나님의 자기 형상을 분양해요. 인간 속에 분양 해놓고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 자신과 주고받는 관계 속에서 이걸 가지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마치 인간이 인공지능을 만들어놓고 방치하는 것이 아니고, 같이 웃고, 울고, 심심하면 장난치고요, 개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개를 그냥 키우기만 하려는 게 아니고 뭔가 주고받는 정서적인 관계가 있을 때 키우는 보람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자기 안의 자기 형상을 바깥으로 끄집어내고 끄집어낸 형상을 주고받으면서 하나님 스스로 심히 만족하시는 창조를 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이 하나님의 형상이 무너집니다. 무너질 것을 주께서 이미 아셔요. 미리 아셔서 무너질 그 상황을 ‘죽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에덴동산에 나무를 하나를 심은 게 아니고 두 개를 심어놨다는 것, 여기에 비밀이 있어요, 창세전의 비밀.
하나의 ‘생명나무가 어떤 나무냐’를 이야기 안 해요. 뭐부터 이야기하느냐 하면, ‘선악과나무’부터 이야기합니다. “저 선악과나무 과일, 내가 만든 인간 네가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하나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들 때 인간이 해야 할 역할이 있어요.
그 역할은 뭐냐? 죽음이라는 것, 죽음조차도 하나님께서 만드셨다는 사실을 알려줄 그런 대상이 필요한 겁니다. 죽음이라는 것, 저주죠. 심판 또는 지옥 이런 거예요. ‘정녕 죽으리라’ 했단 말이죠. 따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먹어버리면 죽는 것은 인간에게 오지만 뭐도 날아가느냐 하면, 더 이상 선악과라는 나무 존재 그 자체도 쓸데없는 게 돼요.
쓸데없는 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여분의 나무로 생명나무 말고 선악과나무를 따로 하나 장만해서 여기에 순위를 결정해 놨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어서 그 나무가 훼손될 경우에는 생명나무 순위가 첫 번째가 되고, 선악과는 두 번째로 빠지는 겁니다. 순위가 결정돼요.
그래서 요한계시록 22장에 보면 선악과나무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천국은 에덴동산의 회복이 아닙니다. 에덴동산의 회복을 이야기하는 것은 통일교에서 문선명이가 이야기해요. 에덴동산 회복 없습니다. 인간이 익히 아는 그 세계는, 인간의 소멸과 더불어서 그들이 익히 아는 것도 다 날아가 버려야 해요. 다 없어져야 돼요.
진동은 어디서 생기는가? 진동은 선악과에서 바로 생명나무로, 중심이 둘에서 하나로 이동하면서 생기는 현상이에요. 털어버리는 것, 남자들은 알 거예요. 그것도 옛날에 군대 갔던 남자들은 알아요. 군에 가게 되면 남성들이 집단생활을 하기 때문에 ‘이’가 많이 생깁니다.
낮에 상사나 선임하사관이 사병들 모아놓고 내무반 담요를 들고 나오라고 해요. 담요 귀퉁이를 양쪽에서 들고 털어버려요. 그러면 담요에 붙어있던 이들이 다 떨어져 나갑니다. 아침부터 징그러운 소리를 해서 죄송합니다만, 그렇게 떨어져 나가요. 붙어있던 이들이 담요로부터 분리되죠.
옛 땅과 옛 하늘에 빈대가 붙어있고 이가 붙어있는 겁니다. 그런 담요 같은 거예요. 그걸 털어버리면, 그 담요를 덮을 수 없는 이유가 같이 떨어져 나오죠. 하나님이 창조했거든요. 하나님이 창조한 것들에 대해서 창조의 그 취지에 위반되는 것은 그 땅과 하늘에 같이 엮일 수가 없다는 하나님의 일관성 있는 고집이죠. 봐주기 없기, 철저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진동을 사람들이 몰라요. 왜 모르느냐? 인간은, 자기가 사는 조건을 기존의 환경에서 찾는데 이 환경이 너무 안정되어 있어요. 성경에서는 진동한다고 하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태어나 살아오면서 이 하늘과 땅이 뭐 진동한 적 있습니까?
진동한 적 없어요.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사람들이 말합니다. “뭐 심판? 세상은 처음 창조될 때부터 지금까지 안정화 되어서 왔는데 이 세상이 불로써 망한단 말이냐? 그럴 일 없어.”라고 합니다. “먼저 이것을 알찌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벧후 3:3-4).
그런데 그러한 심성 이 인간의 심성이 바로 안정화된 자연으로부터 형성된 심성입니다. 이게 일상생활 속에서 인간이 경험하는 인간의 마음가짐이에요. 인간이 이런 마음가짐을 갖고 있으니까 뭘 못 받아들이는가? 이 진동한다는 것, 요동친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에 지옥 불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데 인간의 심성은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고 상황을 보면서 성경과 이 현실이 얼마나 유사한지를 애써 찾아봤지만 전혀 안맞다는 거예요. 세상은 너무나도 극히 안정되어 있고, 성경은 요란을 떨고 있고, 그러니 이 심성은 어떤 심성이냐? ‘안정된 것에서 온 심성이기 때문에 나는 성경을 거부하고, 이 현실의 안정성에서 규칙을 찾는 과학과 인간의 지혜 쪽을 선택하겠다, 그걸 공부하겠다.’ 이게 바로 인간이 이미 안정적인 일상의 삶에서 획득한 심성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렇게 요란을 떨고 고함을 치지만 인간들의 그 모든 몸이 그것을 안 받아주죠. 내 마음이 받아주지 않기 때문에 거부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모든 인간이 다 그래야 되는데…,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경고라는 말을 해요.
히브리서 12장 25절에, “하물며 하늘로 좇아 경고하신 자를 배반하는 우리일까 보냐.” 이 경고하게 한 새로운 인종을 이 땅에 출몰시켰습니다. 그 나라가 이스라엘 나라에요. 이스라엘 나라는, 모든 일이 영문도 모르는 채 터지고 발생되는 아주 특이한 나라입니다.
그 이스라엘의 운명이라는 것은 영문도 모르는 사건에 의해 지배를 받습니다. 그런데 일이 터지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그걸, 터지기 전에도 마찬가지지만, 터지고 난 뒤에도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그걸 설명해 줘요. ‘너희가 이런 난처한 곤궁에 빠진 것은 모세를 통해서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주신 준 말씀을 위반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라고 항상 뒷북 치듯이 율법을 들이대면서 해석하고 설명을 해줘요.
그러니까 그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른 민족과 달리 뭘 유념해야 하느냐? 나의 몸, 나의 일상적인 삶, 내 생존보다도 율법이 먼저라는 것을 감 잡아야 했던 겁니다. 이게 특이한 민족이에요. 다른 민족은 그런 거 없어요. 다른 민족은 그냥 안정적인 삶을 도모하다가 ‘수능시험이다. 손자가 수능을 친다.’ 그러면 약간 불안하잖아요?
그 불안 요소를 안정적이게 하기 위해서…, 어제 토요일부터 갓바위로 가는 도로가 얼마나 막히던가요. 갓바위에 올라가야 하는 거예요. 그게 구약 성경의 산당이잖아요. 산당은 산 위에 있어요. 높은 산에, 하늘과 가까운 데 있는, 인간으로 하여금 최선의 노력을 결집하는 장소, 그게 산당입니다.
나의 정성을 하늘의 가장 가까운 지점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 그러한 노력, 그래서 갓바위에 가야 되는데 이 갓바위가 비좁다고 하면 어디로 빠져요? 동화사로 빠져요. 거기 대불산 있거든요. 왜 그런 짓 합니까? 이미 안정화된 나의 정서와 심성이 진동되지 않기 위해서,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 그런 노력을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운명이 계속 율법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데 그 율법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반성을 해요. ‘앞으로 율법대로 살겠습니다, 율법대로 살겠습니다.’ 이렇게 반성하는 데 그게 소용없습니다. 왜 그런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본인이 미처 모르는, 다시 말해서 율법이 어떤 내용을 깊이 있게 품었느냐에 대해서 이스라엘 사람들도 사람인지라 제대로 몰라요.
율법이 뭘 지적하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일단은 ‘바르게 살겠습니다’ 해놓고 살다 보면 또 새로운 사건이 기다려요. 새로운 사건이 터져버리면 또 뒤늦게 선지자가 와서 ‘네가 이런 것이 율법에 위반되었다’라고 이야기를 해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꾸 뭔가 ‘있는 존재가 없는 존재’로 궁지에 몰리게 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성전을 짓겠습니다.” 하지요. 성전을 지으면 안정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운명도 안정적으로 보장이 될 것 같아서 다윗이 성전을 지으려고 합니다. 다윗이 성전을 짓기 전에 무엇이 주어졌는가? 언약궤라는 것이 모세 율법에서 만들어졌거든요.
그런데 그 언약궤가 만들어졌을 때 이상하게 언약궤가 따로 노십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따로 놀아요. 사무엘상 4장에서 블레셋과 전쟁할 때 이스라엘은 언약궤가 자기편인 줄 아는데 언약궤를 빼앗겨요. 그래서 헤어집니다. 헤어지고 난 뒤에 언약궤가 자기 마음대로 돌아다니면서 이스라엘은 패배했던 블레셋을 홀로 패배시킵니다. 승리케 합니다.
그 말은, 이스라엘이 사람들이 모여 산다고 해서 나라가 아니라 ‘언약궤가 빠져있는 이스라엘은 이스라엘로 간주하지 않겠다’라는 하나님의 분명한 의지를 드러낸 거예요. 그 언약궤 있고, 성전 만들었다고 이제 이스라엘은 좋다고 하면서 솔로몬 때 부귀영화를 누렸잖아요.
그런데 그 성전이 파괴돼요. 성전이 파괴된다는 것은 아무리 하나님의 율법대로 말씀대로 한다고 할지라도 거기에 인간이 언약궤를 통해서 나는 진동하지 않으려고 애쓴다면 율법이 그 사람을 가만두지 않습니다. 선악과 따먹은 인간으로 하여금 생명나무로 통과시키는데 반드시 여기에 진동이 필요합니다. 거기에 불이 들어가요.
창세기 3장 24절에 보면 ‘소멸하는 불’ 화염검이 있단 말이죠. 불이 동원되어서 현재 있는 선악과를 아는 인간을 천국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으니까, 하나님이 백성 만들기 위해서는 선악과에 있는 인간을 생명나무로 이동시키기 위해서 하나님 나름의, 진동을 통과하는…, 진동은 아무도 통과하지 못해요. 그래서 진동을 통과하는 프로그램을 따로 하나님께서 실시하신 거예요.
일반인들 오늘날 우리를 포함해서 이방 민족들은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 이야기가 구약 성경 여러 군데에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바로 시편 65편 7절입니다. “바다의 흉용과 물결의 요동과 만민의 훤화까지 진정하시나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분명히 모든 것이 흔들어져야 하는데 하나님이여, 왜 이스라엘 우리는 안정되어 있습니까?’
그렇게 지금 시편 65편에서 다윗이 고백해요. 세상 나라와 정반대입니다. 세상 나라는 ‘신이시여. 안정된 저 정서에 합당하도록 편안하게 남은 인생을 살게 해 달라.’ 이것은 일반인들이 요구하는 욕망이고, 이스라엘은 “무너져야 하는데 왜 안 무너집니까?” 묻는 거예요. 그 물음을 통해 무엇을 아는가? 무너지지 않는 이유가, 성전이 있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뜯어내시면서…, 하나님의 뜻은 이거에요. 뜯어내시면서 이스라엘 내부에 영원히 뜯겨지지 않는 요소가 밑바닥에 깔려 있다는 것을 들춰내기 위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뜯어내는 작업을 하시는 거예요. 그렇게 함으로써 이스라엘로 하여금 ‘아, 무엇이 영원하고 무엇이 영원하지 않은지’를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파악하게 만드는 겁니다.
우리는 영원하지 않아요. 우리는 잘 알잖아요. 우리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좋은 점은, 그들이 알아야 할 점은 ‘나는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나를 위한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거예요. 이러한 대목에서 한국교회 전체, 아니 세계 교회 전체가 가짜가 아닌지를 돌아봐야 해요.
교회 왜 나옵니까? 자기 안정화 정책이잖아요. 자기 가족 안정화, 국가 안정화, 사회 직장 안정화 지금 그것과 관련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선지자는 그렇게 안 봤어요. 반대로 물으라고 하는 겁니다. ‘어제부로 죽어야 하는데, 어제부로 망해야 하는데, 파괴되어야 하는데 왜 아직도 멀쩡합니까…, 아, 나 때문이 아니고 내 안에 뭔가 영원한 것, 하나님의 프로그램, 진동마저도 통과해서 지옥 갈 인간을 천국으로 보내는 작업이 우리 안에 이미 들어와 있구나’ 하는 것을 감 잡으라는 그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선악과에서 생명나무로 합치하는 거예요. 그러면 둘이 아니고 ‘하나’가 되는 겁니다. 성경에서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말은 어디 나오는가? 두 개체를 만들어놔요. 선악과와 생명나무 두 개의 나무를 만들어놔요. 인간을 만들 때도 남자와 여자 두 인간을 만들어놓습니다. 만들어놓고 둘이 아니라고 하시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 생각과 인간 생각의 다른 점이에요. 인간은 자기 위주기 때문에 나 아니면 타인이에요. 그러면 숫자가 나 하나, 너 둘이 돼요. 그러나 그건 인간 생각이고 그런 인간의 생각을 허물어버리겠다는 겁니다.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겁니다.
둘이 아니고 하나가 되려면 그 둘 사이에 공통적인 하나님의 형상이 그 안에 들어있어서 서로 대화가 통해야 돼요. 영원함끼리의 통함, 일시적인 것이나 허물어지는 것 말고, 자기 자랑 하는 것 말고, 그건 헛된 것이고 영원히 진동을 통과할 만한, 영원히 손을 대지 않는 것들과의 대화가 성립될 때 그때는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을 에베소서 5장에서 사도 바울이, 본인 결혼도 아니면서 신랑 신부의 결혼에 대해서 엄청 이야기합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지가 결혼도 안 했으면서 뭘 하느냐’라고 하는데요. 하여튼 신학자들이 문제에요. 사도가 ‘이건 부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이고 신비로운 것이다.’라고 신비롭다는 말을 했어요.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찌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 5:31-32). 그 신비로움에 대해서 요한복음 11장에 예수님의 기도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겟세마네 기도의 내용이 나와 있는데 요한이 그걸 알아서 하나님의 계시로 기록한 거죠.
기도 내용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여, 저들은 더 이상 저들이 아니고 내 것입니다. 둘이 아니고 하나입니다. 따라서 내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과 같이 그들도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합니다.”라고 이야기했어요.
이 세상은 안정화되어 있고 아무 문제 없고 흔들림도 없는데 왜 성경에서는 진동이라고 하고.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라고 하느냐? 그런 실체가 드러나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오셔서 이 땅을 경유해서 다시 하늘로 아버지께 복귀하면서 그 모든 상황을 진동하는 상황으로 그대로 소개하는 겁니다.
“왜 땅과 하늘이 무너져야 되는가? 너희들이 하나님께 대들었거든.” 그거예요. “죄가 뭐냐? 죄는 네가 하나님께 대드는 게 죄야.” 사람들이 “하나님은 어딨는데?” “내가 하나님이잖아. 나를 믿지 않는 것이 곧 아버지를 믿지 않는 것이고 이게 대드는 것이고 이게 진동해야 될 이유고, 그것이 땅과 하늘 다시 말해서 이 안정적인 땅과 하늘에서 안정적인 자기 미래까지 계산하는 인간들은 불로써 소멸하자.” 소멸되는 자들이 가는 불이 지옥 불이에요.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통과한다는 것은 모든 말씀의 해답이, 해결책과 해석이 몸이 되어서 통과하는 것을 그대로 반영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그 통과 프로그램의 특징은 뭐냐? 모든 행함을 다 뜯어내면 되겠죠. 간단한 문제예요. 모든 행함은 다 뜯어내는 거예요.
인간이 죽는 방식이 아니면 거기서 신생아가 나타나지 않는 방식이에요. 그런데 모든 인간은 죽어가면서도 살려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자기 힘으로, 육에서 육으로 신생아가 나올 수가 없어요. 주께서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건 이겁니다.
“이제 답답한 육의 허물을 벗어라. 뱀 껍질을 그만 뒤집어써라. 뒤집어쓴 그 허물을 좀 벗어라.” 육이라는 것 그 육을 벗는다는 것은 무슨 말이냐? 자기 행함에 대해서 왜 그렇게 신경을 쓰느냐는 거예요. 그 행함의 도사들이 있어요, 귀신들.
행함만 연구해서 그걸로 천국 가겠다는 도사들, 그 도사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스라엘 나라 민족을 만들고 유대 민족을 남겼다는 거예요. 남긴 자들에 대해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스라엘이 왜 행함을 주장하느냐?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쫓아가기 때문이다.’ 법을 쫓아갔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법을 쫓아가는 그들의 이유는, 그들은 율법마저 내 것 만들어서 나의 안정적인 심성에 부합되는 법으로 자기에게 장착했다고 본 거예요. 율법을 자기 안에 착상한 거예요. 율법을 착상하면 율법의 힘으로 구원받겠다, 유대인의 사고방식입니다.
왜? 율법은 하늘에서 온 고귀한 말씀이기 때문에 고귀한 그 말씀을 내게 착상하면 나 자체가 그 고귀한 말씀의 열매라고 그렇게 생각했던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다른 인간들은 반박을 못 해요. 왜 못하느냐? 율법을 채택하고자 했던 그 유대인의 심보 자체가 자기 안정화 중심이에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들 유대인들이 머리를 썼는데, 거룩한 법을 지키면 나는 안정적으로 구원받는다고 했는데 너희가 율법과 관련된 너희의 행위를 의지함으로써 그것이 너에게 화근이 되었다. 왜? 믿음에 이르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에.’
‘율법대로 지키고 믿음도 지키고’ 이게 되지를 않고요, 열심히 바르게 사는 이것을 허물지 아니하면 믿음에 이르지 못하게 되어 있는 구조가, 하나님께서 율법 주시고 복음 주신 그 이유가 된다는 겁니다. 사람이 율법을, 하나님의 법을, 그 귀한 말씀을 얼른 받는 이유는 자기 안정화 작업 때문에 그래요.
‘나는 내 힘으로 진동에서 벗어나겠다, 어떤 난관도 이겨내겠다.’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 뜻은 이겁니다. 왜 안 죽으려고 하느냐는 거예요. 내가 너에게 율법을 준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어요. “제발 좀 죽어줘.” 이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궤, 성전마저 자기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들은 언약궤를 중요시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 언약궤가 이제 바빌론에 의해서 불태워졌거든요. 그래도 불태워진 이유를 몰라요. 왜 하나님이 바빌론을 보내서 언약궤를 불태워 없앴는지를 몰랐어요. 그들은 언약궤 없는 자리에 그들의 율법을 놓고 그 율법을 지키면 된다는 식으로 유대교가 만들어진 겁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뭐라고 하느냐? 그 하나님의 언약궤 있던 자리에 앉아 있는 너, 끌어내는 거예요. “네가 앉을 자리가 아니잖아. 성전은 네가 앉을 자리가 아니야. 나와!” 멱살 끌고 나옵니다. 끌고 나오는 방법이 뭐냐? 바로 율법의 제대로 된 적용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로마서 9장 31-32절에 보면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께서 준비한 것은 부딪히는 돌을 만들어놓고 부딪히는 돌을 어디에 두느냐? 시온에 둬요. 시온에 둔다는 이 말씀은 잠깐 여러분들이 집중하고 들어봐야 돼요. 이사야 24장 전체 내용이 이 세상이 무너지는 이야기에요.
이사야 24장 19-22절에 보면, “… 땅의 기초가 진동함이라”라고 18절 끝에 되어 있고요, “땅이 깨어지고 깨어지며 땅이 갈라지고 땅이 흔들리고 흔들리며 땅이 취한 자 같이 비틀비틀하며 침망 같이 흔들리며 그 위의 죄악이 중하므로 떨어지고 다시 일지 못하리라 그날에 여호와께서 높은데서 높은 군대를 벌하시며 땅에서 땅의 왕들을 벌하시리니 그들이 죄수가 깊은 옥에 모임 같이 모음을 입고 옥에 갇혔다가 여러 날 후에 형벌을 받을 것이라.”
지옥에 모여 있다는 그 말이죠. 23절에, “그때에 달이 무색하고 해가 부끄러워하리니…” 해와 달까지 이제 무너집니다. 인간의 안정화된 심성 자체를 문제 삼아요. 그다음에 중요해요.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시고 그 장로들 앞에서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니라.”(사 24:23).
그러니까 ‘시온’이라는 것,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지키고자 하는 성전이 따로 있고 그 성전은 안정돼 있는데, 그 성전마저 인간적으로 생각했을 때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통해서 그 성전까지 불태워버려요.
성전까지 불태워버리고 이스라엘에게 줄 때 처음부터 안정화된 것이 있었어요. 그게 뭐냐? ‘언약궤’고, 언약궤를 안치한 곳이 성전이고, 그 성전은 영원토록 갑니다. 요한계시록에 언약궤가 보인다는 말씀이 나와요.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계 11:19).
이게 영원토록 가는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궤가 왜 안정돼 있는가? 언약이기 때문에, 언약궤는 언약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변한 적이 없어요. 이제 남은 문제는 뭐냐? 성경에서 어떤 말씀을 줘도 우리가 구원받는 데다가 다 집어넣기 때문에 그게 문제가 되거든요.
그래서 성경 백날 지키고 복음 알아도 소용없어요. 우리는 이제 지옥 불에 적당한 심성으로 지옥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된다는 그 말이죠. 그런데 제가 분명히 아이디어를, 힌트를 드렸어요. 성전만큼은 안정되다. 성전만큼은 안정되다!
그러면 안정된 성전을 주님께서 만들면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되겠죠. 그 성전을 만드는 데 어떤 방식으로 하느냐? 성전에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고 언약궤가 안정되면 성전이 안정되게 되어 있어요. 그 언약궤에 예수님 자신의 형상을 둡니다.
갈라디아서 4장 19절에 보면,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집어넣어요. 로마서 8장 29절에 보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가 아들의 형상을 본받도록 주께서 우리를 인도한다고 했어요.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게하기 위해서. 방법은 뭐냐? 석고상을 만드는 겁니다. 석고상을 뜰 때 만들 때 ‘알지네이트(alginate)’라는 물렁물렁한 물질 안에 손을 집어 넣어요. 알지네이트는 시중에서 팝니다.
알지네이트를 물에 섞어서 물렁물렁할 때 손을 집어넣고 한 5분 있으면 굳어져요. 그러면 완전히 굳기 전에 손을 빼요. 그다음에 석고 가루를 물과 섞어서 넉넉하게 붓습니다. 붓고 난 뒤에 알지네이트라는 그걸 바깥으로 뜯어내면 안에 집어넣었던 손의 형상이 그대로 드러나죠.
주님의 형상을 집어넣고 겉에 있는 우리 인간의 형상, 자기를 위한 형상을 주께서 뭐로 뜯어내는가? 율법으로 뜯어냅니다. 율법으로 뜯어내요. 율법으로 뜯어낼 때 그 과정이 뭐냐? “내가 너에게 율법 줄 테니까, 그리고 율법을 네가 못 지키니까 너는 제발 좀 살아 있는 척하지 말고, 살 이유도 없으면서 살아 있는 척하지 말고 그 율법과 함께 내 목숨은 날아갔다고 그렇게 좀 생각하라”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말씀을 내가 줄 테니까, 말씀을 줌으로써 아직도 남아 있는 이 뱀의 껍데기, 허물을 이제 좀 벗으라는 거예요. 일단 성경에 나온 뱀의 허물에 대해서 일단 말씀드리겠습니다.
요한일서 2장 15-17절,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이것 좀…, 이걸 우리 힘으로 몸 뜯어내요. 뜯어낼 수가 없습니다. 평생 이거 찾기 위해서 살아왔는데 이걸 뜯어낸다는 것은, ‘차라리 날 죽여라!’ 하잖아요. “그래, 그 말이 맞아. 하나님은 말씀으로 널 죽여주는 거야. 네가 스스로 죽지 못하니까 말씀으로 죽여주는 거”예요.
알지네이트라는 이것은요, 치과에서 주로 사용합니다. 현재 우리 자체가 알지네이트에요. 다시 말해서 저주를 유발하는 그 껍데기에 불과한 겁니다. 굳은살? 발뒤꿈치의 각질? 이런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뜯어낼 재주가 없어요. 재주가 없습니다!
어떤 화학자의 아내가 어느 날 음식을 해줬는데 그게 감칠맛이 났어요. 감칠맛, 당기는 맛인 거예요. 그 감칠맛이 어디서 나는가 연구했어요. 그 감칠맛이 ‘글루타민산(Glutamine acid)’이라는 단백질에서 왔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 사람이 거기서 멈추지 않죠. ‘이 단백질이 왜 감칠맛을 내지? 그래, 그 맛이 난다 치자. 그런데 왜 인간은 그 맛이 자꾸 당기지? 왜 그 맛을 원하지?’ 연구하다 보니까 알게 되었어요. 엄마가 임신하면 뱃속 양수의 44.1%가 바로 글루타민인데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이미 그 맛을 들였어요. 벌써 길들여진 그 맛이 인간은 자기도 모르게 당기는 겁니다.
인간은 죄로부터 출생했다 했어요. 다윗의 고백에 의하면 이미 죄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인간에게 제일 재밌는 게 죄짓는 일이에요. 그 맛에 길들여 있어요. 글루탐산에 이미 맛이 들려 있어요. ‘monosodium glutamate’ 줄여서 ‘MSG’라고 하는 거예요.
이것은 몸에 전혀 해롭지 않아요. 이거 해롭다고 새것도 갖다버리는 그런 경우도 있는데 이것은 다시마, 표고버섯, 콩에 다량 함유된 겁니다. 인체에 아무 해가 없어요. 미원, 괜찮아요. 미원이나 미풍, 미풍은 이제 없구나, 이거 막 치세요. 인간의 타고난 거.
그런데 ‘이것은 타고났으니 그냥 봐주세요.’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성경은 이걸 죄로 규정하는 겁니다. 죄로 규정했는데 인간이 빠져나올 수 없는 죄이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죄를 마법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마법에 빠졌어요. 마법에 빠진 것을 인간의 힘으로 헤어날 수가 없기에 주님께서는 다른 마법을 준비한 겁니다.
그 특이한 민족 이스라엘에게 예상도 못 한, 영문도 모르는 신기한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났는데 그 해석이 뭐냐? 진동한다, 선악과 이야기, 생명나무 이야기,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서 둘이 아니고 하나였어, 라는 이런 이야기,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의 모세의 그 법,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서 그렇게 알려주고, 그게 오늘날 구약 성경이 된 거예요.
여러분, 신데렐라 이야기 아시죠? 신데렐라 이야기에 보면 성경의 이야기가 가득 담겨 있어요. 신데렐라 동화 이야기를 여러분 다 아시잖아요. ‘왕자가 분명히 신데렐라와 춤을 췄는데, 그래서 얼굴을 다 아는데 왜 왕자가 얼굴 보고 안 찾고 구두를 통해서 찾느냐?’의 문제.
그것도 유리 구두. 왜 얼굴 보고 안 찾고 그 구도 보고 찾느냐? 유리 구두에는 마법이 담겨 있거든요. 다른 것은 마법을 썼어도 다 풀려요. 예를 들어서 신데렐라만 남겨두고 언니들 다 파티장에 갔을 때 신데렐라는 집에서 일하고 있는데 요정이 나타나서 마법을 씁니다.
그래서 쥐는 말이 되고, 도마뱀은 시중을 들고, 거위는 마부가 되고, 호박은 마차가 되지요. 다 마법에 걸렸어요. 그래서 12시 이전에 집으로 돌아오라고 했지요. 마법이 풀리면서 마차는 다시 호박으로 변하고, 말은 쥐로 변하고, 시중들던 사람은 도마뱀으로 변하고, 마부들은 거위로 다 변했어요.
그런데 왜 유리 구두만큼은 안 변하느냐? 유리 구두는 바로 있는 데서 마법을 걸었던 게 아니고, 없는 데서 마법을 걸었어요. 꼭 언약 같아요, 언약 같아! 그리고 ‘신데렐라’는 원래 이름이 ‘엘라’거든요. 그런데 언니가 놀린다고 ‘신데(Cinder)’, 그 뜻이 ‘불타고 남은 재’예요. ‘잿더미 아가씨’가 신데렐라예요.
‘잿더미 아가씨’ 얼마나 복음적입니까? 불 속을 통과 못 하고 재가 되어버린 가운데 그 재 한 줌 가운데서, 이미 죽은 데서 있게 하고 없는 데서 생기는 것, 이게 바로 언약 아닙니까, 로마서 4장에서!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롬 4:17).
그래서 왕자의 ‘내가 원하는 신붓감은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신붓감’이어야 돼요. 마법에 걸려버린 인간, 그 인간 세계 마법보다 더 센 마법, 기존 마법을 능가하는, 이미 모든 인간이 죽어버리고 모든 인간은 불로 소멸돼야 하는데 죽은 데에서 살아나고 없는 데서 생겨나는 그 마법, 그 마법은 하나님의 언약이고 그 언약으로 나타난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 예수님이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드셨거든요. 그러면 예수님이 하신 일은 뭐냐? 겟세마네의 기도대로 하나를 만드는 거예요.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4-17).
예수님이 책임지게 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이제는 아버지와 나와 저들과 하나가 된다’라고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그런 내용으로 기도가 나와요.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2절).
그러면 방법은 뭐냐? 일단 율법이 와요. 율법이 오게 되면 고린도전서 15장의 말씀이 적용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5-56절에 보면,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율법이 사망을 찾아가서 “네 인생이 이렇게 불행한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야.” 다시 말해서 “네가 사는 게 불행한 이유는, 네가 법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너는 불행하고, 나중에는 결국 지옥 간다.” 이 말이에요. 이것은 도저히 인간에게서 나올 수 없는 사고방식이에요.
‘착하게 살아야 천당 간다’라는 것은 갓바위에 가는 사람도 다 알아요. ‘정성을 쏟으면 그만큼 보상받는다.’ 갓바위에 가는 사람들도 다 압니다. 그런데 성경은 반대로 나가요. “현재 네가 알고 있는 선악 지식을 뜯어내야 거기서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보인다”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 선악과가 안 뜯기려고 하는 거예요. 내 양심이라는 게 뜯기지 않으려고 하고, 내 착함 안 뜯기고, 내 의로움을 안 뜯기려고 하니까 점점 더 지옥 불이 너를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마가복음 9장 43절에서 얼마나 주님께서 심하게 이야기하는지 제가 대신 말씀드리겠습니다.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게 하나님의 일관된 뜻입니다.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그러면 난 불구자인데요?” “불구자로라도 네가 천당 갈래, 아니면 온전해서 지옥 갈래?”
이렇게 극단적인 선택으로 가혹할 만큼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왜 그런 이야기를 하십니까? 자꾸 우리가 선한 것, 의로운 것, 착한 것을 남기고자 하는 의도가 있어요. 그 착한 것 가지고 안정적인 땅과 하늘에서 안정적인 인생으로 살고 싶어 하는 것, 이미 우리는 죄라는 이름으로 그 본성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것을 준비했느냐? 심판을 시원~하게, 속 시원하게 심판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만족하겠다는 의사를 에스겔 5장에서 이미 밝혀주신 적이 있어요. 에스겔 5장 13절에 보면, “이와 같이 내 노가 다한즉 그들에게 향한 분이 풀려서 내 마음이 시원하리라 내 분이 그들에게 다한즉 나 여호와가 열심으로 말한 줄을 그들이 알리라.”
하나님이 “진심으로 내가 이야기한다. 내가 너에게 진노하고 지옥 보내니까 내가 다 속이 시원하네.” 바로 창조의 만족에서 심판의 만족으로 하나님 자신을 더 깊이 우리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아직 말씀드리지 않은 게 있어요.
우리 힘으로 말씀은 당연히, 당연히 못 지키고요, 우리가 그 말씀대로 죽는다고 해서 천국 가는 것도 아니에요. 말씀대로 죽으면 지옥 가지요. 원래부터 지옥 가요. 원래부터 지옥 가는데 지옥 가는 그 속도를 알고 지옥 가는 거예요. 지옥 가는 이유를 안다고 천국으로 빼주는 게 아니에요.
지옥 갈 이유는 알고 지옥 가고, 지옥 가는 이유도 모르고 지옥 가고요, 둘 다 지옥은 가기 마련인 거예요. 우리의 이 심성이 이미 하나님께 대드는 죄로 물들었기 때문에 이건 어쩔 수 없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성경 요한계시록 21장에 해답이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1-2절에 보면,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이게 해답이에요. 주님께서 올 때 우리의 남편으로 오시는 거예요. 남편으로 오게 되면 이제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둘이 아니라 하나이기 위해서, 남의 것을 받아서 남편 되는 게 아니고, 남편의 자기 것을 아내한테 주입시키고 몰딩해서 조각함으로써 없는 신부가 새로운 신부로 재탄생하는 거예요. 그렇게 만들어지는 겁니다.
남편 것을 아내에게 심겨주는 거예요. 심겨주게 되면 에베소서 4장 4-6절,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내 것이 어디 있습니까? 다 주님 건데 주님 건데 내 것이 어디 있어요? 내 거요? 내 거 따로 돼버리면 따로따로예요. 둘이 하나가 아니라 ‘따로’가 되면 거기서 율법에 공격당합니다. “너 이 말씀 지켰어? 이 법 지켰어? 네 오른 눈이 범죄 할 때 뺐어, 안 뺐어? 네가 예수님처럼 살 수 있어?” 묻습니다. 못 살면 지옥이에요. 장애자 정도가 아니고 지옥입니다.
끝으로 한 말씀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골로새서 1장 23절에, ‘그러니까 행함 말고 믿음으로 흔들리지 말라’라는 것이 나옵니다.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바 복음의 소망에서…” 우리 소망 아닙니다. 신부 소망이 아니고 신랑 소망입니다. 제발 신랑의 신랑을 우선시하세요.
그렇게 하시고 그 신랑 앞에서 우리를 잊으세요.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군이 되었노라.” 그리고 흔들리지 마세요. 진동하지 마세요. ‘진동 통과 프로그램’이 우리 안에서 지금 작동 중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 뱀의 껍데기는 언제 벗어지는지, 죽어가면서도 산체하는 그 허세는 도대체 언제 언제 제거되는지…. 감사하게도 신랑 되시는 주님께서 신부 단장시키기 위해서 날마다 말씀으로 지적해 주시니 그 지적이 곧 복이라는 것을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