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의 일
2025년 11월 16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3:1-3
13:1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13:2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13:3 자기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
‘부지 중에’라는 말은 우연을 말합니다. 인간들이 살아가는 모든 것에 대해서 인간은 우연히 마주치는 것들입니다. 이로 인해 인간들은 필연을 모릅니다. 그러다 보니 인간들은 쉴새없이 불안하고 의심하고 흔들립니다. 이렇듯 인간세계는 불안정합니다. 인간들은 이렇게 만든 존재가 따로 있습니다.
유다 1:6에 보면,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특정한 천사가 나오는데 악마입니다. 이 악마는 하늘에게 쫓겨나 인간이 사는 세계는 들어와서 세상의 왕이 되었습니다.
이 악마의 권세를 이길 위인은 이 인간 세계에는 없습니다. 특히 중요한 사항은 이 악마의 운명은 확정되었다는 점입니다. 이 확정난 존재가 권세를 가지고 지배된 이 세상도 악마의 운명과 더불어 지옥가도록 확정났습니다. 여기에 천사가 찾아옵니다. 천사도 나름대로 확정된 임무를 가지고 들어옵니다.
천국 백성될 자를 골라서 그들을 지옥에서 영생의 나라로 빼내고자 하는 일이 확정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8:10에 보면,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 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즉 천사는 늘 하나님의 지시를 받으면서 천국 백성을 어떤 식으로 보호하고 데려갈 것인가에 대해 권세를 발휘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부지 중에 천사들을 대접’했다는 경우를 고려해서 ‘천사의 도움없이 구원없다’는 사실을 파악해야 합니다. 즉 구원은 나의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입니다. 그래서 천사를 직접 만난 자들의 특징은 매우 당황스럽게 느낍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와 그 아내에게 다시 나타나지 아니하니 마노아가 이에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줄 알고 그 아내에게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삿 13:21-22)
단순한 당황함을 넘어서 ‘나는 이미 죽었음’을 인정해야 할 지경에 이릅니다. 야곱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창 32:30) 이는 인간들이 소위 ‘살아있음’은 필연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우연과 우연적 사실을 종합해서 내린 결론입니다. 대충 살아있는 것이 이런게 아닐까 라고 서로를 마주보면서 결론내린 겁니다. 그러나 인간이 출생된 이 세상은 하늘나라에서 이미 결론 내려진 세계입니다. ‘지옥이다’고 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우연에 대해서 필연적 관점을 천사에게 실어서 천사가 자기 백성을 찾아가로록 지시했습니다. 천사에게는 애매모호함이 없습니다. 의심도 없습니다. 흔들림이나 불안 요소도 없습니다. 인간들이 천사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해서 고민하지도 않습니다. 강제조치를 해버립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찾아왔던 천사가 이런 조치를 내린 겁니다.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인자를 더하심이었더라 그 사람들이 그들을 밖으로 이끌어 낸 후에 이르되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무르거나 하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창 19:16-17)
천사들의 활동은 이처럼 세상 멸망을 전제로 해서 활동합니다. 하지만 인간들이 그 이유를 모릅니다. 자기 생활을 하는데 있어 크게 문제될 게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즉 천사가 굳이 자신을 보호할 필요가 없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인간의 미래는 이미 죽는 것으로 결정나 있습니다.
죽음이 필연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는 ‘전 장례, 후 임종’으로 조치를 취하십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미리 참여시켜서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지어버리는 겁니다. 즉 “내가 너를 구했으니 네 목숨도 내 것이다”는 겁니다. 이러한 천사의 일은 모두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근거로 하십니다.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실 즈음에 밤 중에 베들레헴 근처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자에게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천사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눅 2:15-16)
이런 예수님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형제’가 발생합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히 2:11-12)
형제들의 등장이란, 주님과 더불어 동거동락하면서 이 지옥에서 수난을 받는 집단이 되는 겁니다. 이 세상은 이미 멸망받기로 되어 있습니다. (히 1:10-11) 이런 상황에서 주님께서 천사보다 못한 천한 모습으로 오시고 대접받는 것은 앞으로 등장할 형제들도 같은 취급받을 받으므로서 그들을 주님과 같은 신세에 처한 자로 간주하시는 겁니다.
즉 성도들의 특징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주님께서 일어난 ‘죽음의 권세에서 벗어난’ 그 능력에 주어진 사태였던 겁니다.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마 28:2) 세상은 예수님 마저 죽음의 힘으로 눌려서 못 빠져나오게 했지만 천사는 죽은 자와 산자를 가름하는 그 돌마저 굴러내고 그 돌 위에 앉아있는 겁니다.
이게 천사의 위력입니다. 이 천사의 위력으로 오늘날 ‘예수님의 형제’에게 작용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형제들은 더는 이 세상의 행복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십자가의 거룩 앞에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를 반복하게 됩니다. (사 6:5) 이런 고백이 조금도 슬프지 않는 이유는 이미 그 객관이 자신의 주관을 대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와 성도의 만남 속에서 자기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해석하면서 필히 십자가 복음을 거론하는 관계가 바로 형제와의 사랑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양식말고 말씀을 먹음으로써 오로지 그 나라와 그의 의말 진술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93강-히브리서 13장 1-3절(천사의 일) 251116-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13장 1-3절입니다.
히브리서 13:1-3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자기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
이 말씀을 얼른 들어보면, 윤리적인 감각을 갖고 있는 사람은 능히 마음만 먹으면 해낼 수 있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이것의 틀을 깨는 단어가 하나 나와요. “천사를 대접한 자들이 있었느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는 윤리 도덕적으로 통하는데 이 천사라고 하는 것은 외부 존재거든요?
우리는 인간과의 만남에서 이 세상을 구성하고, 나는 이 세상의 일부라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그런데 천사는 세상의 일부가 아닙니다. 세상의 일부가 아닌,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존재가 이 세상에 속한 나와 만난다?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이냐, 이 말이에요.
여기서 더 나아가서 만약에 천사를 못 만난다면? 그냥 끝나는 거죠. 외부 세계의 존재가 들어왔다는데 그냥 들어올 리는 없을 거고, 데리고 나가려는 목적으로 찾아왔다는 말이죠. 그런데 천사와 접촉이 안 되면 이 세상 바깥으로 벗어날 수가 없다는 뜻이거든요?
천사를 만난 적이 없다는 말은, 혼자서 교회 나와서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데 그게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는 거예요. 외부 세계의 접속이 없기 때문에요. 인간관계에서 도덕적으로 남한테 잘해줄 수는 있어요. 열심히 잘해줄 수는 있단 말이죠. 잘해줘 봐야 이 세상 안에 갇혀 있는 형식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부지중에 천사를 만난 사람들이 있다는 그 대목에서, 도대체 천사가 왜 인간들만 사는 동네에 왔느냐는 거예요. 왜 만나지 않으면 안 되는가? 만나지 않고 구원되는 길은 없다는 식으로 다가오게 되면, 우리 인간들 입장에서는 우리의 역량을 벗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난감하기 짝이 없습니다.
천사들을 만난 적이 있는 분을 성경에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천사들이 왔다는 것은 이 세상 멸망의 전조 현상이 되는 겁니다. 소돔과 고모라, 소돔과 고모라에 두 천사가 등장했습니다. 아무도 초대한 적 없어요. 천사의 특징은 소돔과 고모라에 주민 등록이 안 되어 있었다는 거예요. 이 세상 출생자가 아닙니다.
이 세상 출생자가 아닌 자가 이 세상 사람 사는 마을에 왔다는 것은, 너희들은 끝났다는 뜻이죠. 멸망을 언급하는 겁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천사가 왔을 때, 소돔과 고모라의 그 잘난 자들이 자기와 같은 인간인 줄 알고 주민 등록이 되어 있는 같은 이 세상 출신자인 줄 알고 “우리 같이 연애하자.”(창 19:5)하고 꼬시고 난리도 아니었지요.
그러나 천사는 분명한 임무가 있었고 목적이 있었습니다. “가자. 내가 이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러 왔다”(창 19:12-13). 멸망시키러 왔다고 할 때 롯의 가정은 그 이유를 물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게 정말 중요한 거예요. 천사가 날 데리러 왔을 때, 천사의 만남의 과정입니다, 천사와의 만남에서 “왜 저를 데리러 오셨습니까?” 하고 물을 필요가 없는 이유는, 내가 아는 것보다 천사가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말은 뭐냐? 천사는 이 세상에서 전혀 애매하지 않습니다. 모호하지 않아요. 천사한테는 불신앙도 없고, 불신도 없고, 의심도 없고, 불안도 없습니다. “왜 저를 데리러 옵니까?”를 묻는 것은, 묻는 것 자체가 뭔가 의심하고 있다는 뜻이거든요? 불안증을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천사와 만난 롯의 가정도 사실은 주저했죠. 하지만 천사는 자기 임무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강제조치가 일어납니다. “빨리 나와!” 강제로, 주저하는 그 롯과 그의 가정을 강제로 끌어당겨서 멸망되지 않도록 했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이러한 조치에 대해서 천사는 주저하는 법이 없고 애매하지 않아요. 흔들림이 없습니다. 세상을 너무 잘 알아요. 천사가 세상을 너무 잘 안다는 것은, 인간들의 철학과 지혜와 과학의 수준을 초월하고 초과하는 그러한 분의 지시에 따르고 있다는 뜻이거든요.
그렇다면 이 천사가 우리에게 찾아와서 우리의 의견을 감안하지 않고 강제조치에 나서는 것은 우리가 이미 강제적으로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취할 수 있는 천사의 태도입니다. 도대체 우리는 어디에 강제되어 있는가?
권세에 강제되어 있는데 그 권세가 어떤 권세냐? 유다서 1장 6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여기 나오는 단어가 음산하기 짝이 없죠? 상당히 부정적입니다.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 그다음에 나오는 단어가 “심판”, “결박”, “흑암에 가두었으며” 이게 악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타락한 천사에 관한 이야기예요. 타락한 천사를 하나님께서 가두신다고 하는데 그 타락한 천사가 피신한 장소가 어디냐?
인간 세상입니다. 인간 대 인간의 만남으로 종결되는, 모든 세상은 인간 대 인간의 만남으로 형성된다는 것으로 의미가 종결된 우리가 아는 이 현실 세계가 악마가 다스리는 나라 권세로서 통치하는 나라입니다. 어느 인간도 어둠에, 흑암에 갇혀야 될 악마의 권세에서 못 빠져 나옵니다.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이걸 누가 아느냐? 인간이 알아요? 몰라요. 바보 같아요. 모릅니다. 모르니까 선한 천사가 와서 강제조치를 해야죠, 만나서! 인간이 뭘 알아요? 시작도 모르고 끝도 모르고, 시작도 모르고 끝도 모르면 중간도 모르죠. ‘현재’라는 것은 ‘미래’가 만드는 겁니다.
‘현재’에 천사를 만났다는 것은 이미 ‘미래’를 알고 있는 천사가 활동할 수 있는 무대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현재’라는 것은 ‘과거’가 만들어요.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던 간에 인간들은 현재에 와서 과거를 조작합니다. ‘내가 옛날에 이렇게 잘나갔어.’ 또는 ‘이렇게 힘들었어.’ 그건 현재 본인 이야기 본인 생각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미래를 모르고, 과거는 현재가 조작하니까 인간이 알고 있는 것은 ‘현재 내가 있다’는 것을 이렇게 느끼죠. 현재 자기가 있다는 걸 느끼니까 인간은 죽음을 느끼지 못하죠. 죽음이라는 것은 그냥 미래의 우연적인 사실로 생각하지 당장 죽음이라는 것은 경험하지 못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아는 지식에 의하면 결국 인간은 죽습니다. 그러니까 죽음이라는 필연이 미래고 그 필연, 죽는다는 미래의 필연을 위해서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겁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죽어야 된다는 그 필연을 위해서 지금 끌려가고 있는 과정이 우리가 아는 이 살아있다, 또는 삶이라는 거죠. 살아있는 것이 모여서 죽음이 돼요.
세상에 어떤 인간이 자기 몸을 만지면서 이걸 흙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수면내시경 하면서 ‘흙 속을 한번 볼까?’ 흙이라고 간주를 안 하잖아요. 살아있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래서 천사가 주님의 지시에 따라서 자기 백성을 찾아와요.
찾아와서 하시는 일이 뭐냐? ‘선 장례 후 임종’ 먼저 주님과 함께 장례 치르고 그 결과로써 네 목숨이 나중에 임종을 맞이하는 방식을 사용하십니다. 매일같이 장례를 치르는 작업이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천사의 활동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너는 살아야 된다.”
다시 말해서 죽음에 갇혀 있는…, 그냥 죽음이 아니에요. 악마는 어디에 있다? 흑암의 권세에. 그래서 결국은 필연적이에요. 우연이 아니고, 하다 보니까 지옥 가는 것이 아니고 지옥 가기로 확정된 자의 권세 안에 인간은 확정된 운명으로서 악마와 함께 더불어 웃고 있어요. 필연적이고 확정된 거예요. 이런 상황으로 가게 되면 지옥은 확정된 겁니다.
따라서 이 확정된 사실 속에서 소돔과 고모라에 전조 현상을 주죠. 불로써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고 그 가운데서 롯의 가정을 강제 조치해서 끄집어내는 것은 우리 보기에는 뭐, 우연적 존재, ‘내일 오면 또 살겠지.’ 하지만 천사 입장에서는 필연적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겁니다. 천사는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안되죠. 그렇게 안 하면 자기가 사탄이 되니까, 악마가 되니까요.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는 천사? 악마. 시키는 대로 하는 천사? 선한 천사, 간단한 문제예요. 그런데 인간은 어디에 있는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는 천사의 권세 안에, 그 능력 안에 사로잡혀 있음. 그런데 하나님의 자기 백성이 지금 악마에 사로잡혀 있음. 빼내는 방법은 인간들에게 맡긴다? 윤리나 도덕? 다 소용없어요.
천사를 만나야 되겠죠. 천사를 만나서, 성도로 하여금 ‘지금 내가 여기 존재하는 것은 천사의 일의 대행’이거든요. 천사가 옴으로써 천사의 일을 대행하는 거예요. 그게 오늘 본문의 ‘형제 사랑’이에요. 천사를 만남으로써 형제를 사랑하는 겁니다. 학대받는 자를 사랑하는 거예요. 학대받는 것은 뭐 정치적 이론 때문에 학대받는 것이 아니고 복음 때문에, 하나님의 이 진리 때문에 학대받는 자를 보고 ‘너도 학대받고 있잖아. 너도 같은 신분이잖아.’ 그걸 세자로 ‘전우애’라고 하는 겁니다. 고생을 같이 하고 있는 거예요.
악마는 성경을 갖다 버리라는 거예요. 그 성경을 보지 말고 듣지 말라는 것에 대해서, 인간은 태어나면서 성경을 보지 않는 것에 친숙해졌어요. 이게 우리 본성에 맞아요, 그게 자연스럽고. 성경 보는 것이 억지처럼 느껴질 정도로요. 그만큼 우리는 악마로부터 철저하게 세뇌받은 거예요, 악마가 힘이 세니까.
그런데 그러한 이 세상의 분위기에 학대받는다는 말은 독특해요. 특이합니다. 이 세상에 속한 건 분명한데 천사가 와서 만나서, 강제 조치해서 영생의 나라로 빼돌리기 위해서 천사는 주께서 찜해놓은 사람을 빠뜨리지 않고 찾아갑니다.
따라서 여기서 다음과 같은 질문의 답은 마태복음 18장에 나옵니다. 어떤 질문인가? “굳이 천사를 만나지 않고 구원되는 법은 없습니까?”라는 질문, ‘한평생 살아도 천사 만난 적이 없는데 천사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데 과연 내가 천국에 갑니까?’ 하는 그 질문, 그 질문에 답은 마태복음 18장 10절에 나옵니다.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천사는 성도의 매니저입니다. 담당자예요. 천사는 성도와 하나님 중간 연락책입니다. “저 작은 자에게 필요한 건 뭡니까, 하나님?” “이거, 이거 필요하다.” 해서 천사를 보내서 지켜줍니다.
그런 예가 마태복음 2장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 있을 때 꿈에 천사를 보내서 예수님의 가족, 패밀리를 외국으로 급하게 빼돌려요. “지금 베들레헴에 있으면 안 돼.”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는데 거기 있으면 왜 안 됩니까?
악마가 어떻게 아기 예수에 대해 조치를 내릴 것인지를 이미 하나님이 꿰뚫어 보고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 모든 일어나는 변화가요…, 일단 인간은 무식해요. 아무것도 아는 게 없어요. 그러나 인간을 대신하여 무식하지 않고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이 저 인간보다 월등한 지혜를 가지고 있는 ‘악마의 술책으로부터 어떻게 빼돌리느냐?’ 거기에 온 열심과 정력과 일을 소모하고 계신 겁니다. 그렇게 발휘하고 계시는 거예요.
도대체 평소에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합니까? 이 세상이 이렇게 분주한데요. 시편 121편 4절에 여러분이 잘 아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우리는 졸면서 무슨 생각을 하죠? 주무시면서 무슨 생각하고, 일하면서 무슨 생각합니까?
‘내 인생은 내 소관이다.’ 그 생각하고 있죠. 내 인생 내 소관이 맞습니까? 하나님 뜻은 이겁니다. “내가 너를 구원했으니 너의 목숨도 내 것이다.” 이것은 너무나 명백하지 않습니까? 이게 애매모호합니까? 이게 우리 인생을 그렇게 불안하게 만드는 요소에요? 이게 뭐 불분명한 겁니까?
‘진리가 뭔지를 모르겠다…’ 이게 뭐 산에 가서 고민해야 할 문제입니까? “사나 죽으나 너는 내 것이다.” 이미 끝난 상태잖아요. “주께서 너를 구원했으니 너의 목숨은 내 것이 되었다.” 올 12월에 무슨 계획, 내년에는 무슨 계획…, “그걸 네가 왜 걱정하느냐?” “우리 딸이 아직 시집을 안 가요.” “그 걱정을 왜 네가 해?” 시집가면 흙이, 흙이 아닌 것으로 변하는 거예요?
‘현재’는 ‘미래’가 만드는 거예요. 주님이 만드시는 겁니다. 따라서 주의 것이 된 자에게는 취소할 수 없는 그러한 천사의 일이 계속 관여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소위 교회 다니는 사람을 만나보면 이런 생각을 갖고 있어요. 싸가지 없는 생각을 고백하는데요.
“내가 하나님 당신을 믿었으니 영생 얻는 나는 여전히 내 소관에 속합니다.” 이런 소리를 해요. “내가 알아서 예수 당신을 믿었으니 여전히 내 인생은 내게 속해 있습니다.” 아주 싸가지 없는 소리거든요. 그 싸가지 없는 소리, 그게 바로 신학이라는 겁니다. 그게 신학이에요. 그것 가지고 지금 사람들이 교회 장사하는 거예요.
천사는 하나의 일목요연한, 한결같은 활동의 성격이 있어요. 그게 뭐냐? 예수님의 활동에다가 사람들을 주목하게 하는 거예요. 주께서 뭘 하느냐에 주목하게 하는데 그 핵심은 이거에요. ‘구원은 너 혼자만의 작업이 아니다. 구원은 너에게 속한 네 일이 아니다’에요.
그러면 성도가 아닌 사람은, 천사의 관리 대상이 아닌 사람은, 성령이 오지 않은 사람은 이 인간 세계 바깥의 어떤 낌새도 만나지 못한 사람의 그 생각 속에는 세상에서 사람 만나서 하는 그 일, 사람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 일에 대해서만 열중하게 되는 거예요. 자기를 살리기 위해서 자꾸 힘을 끌어모으는 그 일에만 하루 24시간을 다 거기에 소비하게 되는 겁니다.
자, 주님의 활동을 언급했으니까 주님의 활동은 어떻게 되는가? 주님의 활동이 어떻게 되느냐는 것은, 천사가 주님한테 와서 어떤 관계를 이루었는가가 하나의 샘플이 되어서 그걸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시킵니다. 항상 천사의 활동은 주님에게 합류되어 있어요.
누가복음 2장에 보면, 천사가 아기 예수 출생한 베들레헴 근처의 들판에 나타나요. 천사가 나타나서 사람들을 만났을 때 “진짜 천사를 만난 사람은 어떤 변화가 있습니까?” 물으신다면 누가복음 2장이 적절한 답변이 돼요. 그게 뭐냐 하면, 수동적이 돼요. 수동적입니다. 갑자기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서 수동적으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 겁니다.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9-11).
목동들은 자기들의 일을 접어버리고 천사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요. 하늘에서 천하들의 음성이 들립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 2:11). 목자들이 “이제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눅 2:15).
천사의 활동은 일관성 있게 자기 백성을 지옥에서 빼내서 영생의 나라 천국으로 데려가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미 가능한 일을 실시했다는 거예요. 그건 네 실력으로는 안 되지만 천사의 도움으로 된다는 겁니다. 아까 마태복음 18장 10절을 다시 말씀드리면요, 그 말씀이 상당히 중요한 말씀으로 보입니다.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할 때 여기 소자, 작은 자 이야기가 마태복음 25장에 다시 한번 길게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34-36).
이렇게 하니까 그 성도가 하는 말이 있어요.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마 25:37-39)라고 반문하죠.
여기서 우리가 감안해야 할 것은, 어떤 성도도 주님을 만나는 것이 흔한 일이 아니라는 거예요. 천사를 만나야 구원받는다…, 이야기 잘 들어보세요. 천사를 만나야 구원받는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천사를 만난 적이 없으니 구원받지 못합니까?” “그건 아니다.” “그러면 천사를 만난 경험도 없는데 어떻게 천사의 도움을 받는 구원받는 대상이 됩니까?”
그것은 어떤 수동성, 자기 인생에 대해서 자기가 수동성, 피동적인 그런 경험을 갖게 되는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I lost myself. I found you’ 갑자기 방언을 해서 죄송합니다. 이 땅에서 내 인생 돌아가는 모든 것에 나의 주관, 나의 의지, 나의 목표, 나의 기대, 나의 소망을 상실케 하는 일들만 일어난다는 것이 온몸으로 적셔지는 거예요. ‘뭐지? 내 인생 뭐지? 내 마음대로 왜 안 되지?’
사람들은 ‘왔다가 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하는 데 왔다가 간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인간은 죽어도 갈 데가 없습니다. 이미 확정되어 있어요. 악마가 갇혀 있는 곳에 같이 참여해서 영원한 지옥에서 살아야 돼요. 이게 인간이 타고난 운명인데 가기는 뭘 가요? 왔다가 가는 그런 인생은 없습니다.
그러나 왔으면 못 빠져나오는데 그 못 빠져나오는 것을 하나님은 성령과 천사를 통해서 이 땅에서 빠져나오도록 조치했습니다. 하나의 코미디 같은 이야기인데요, 마태복음 28장 2절과 5절에 보면 인간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굴에 매장했어요. 사람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큰 돌로 막아놨습니다.
마태복음 28장 2절에 보면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이게 코미디 같은 이야기예요. ‘너희 인간들이 하는 일들이 늘 그렇지 뭐. 기껏 너희들 생각하는 게 마귀 생각 범주 밖으로 벗어나질 못하니까’
죽은 자를 가두어 두면서 죽은 자와 살아있는 우리를 구분하려고 무덤이라는 걸 만들었어요.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이 세상 전체가 다 무덤입니다. 인간들은 자기 마음대로 산 자와 죽은 자를 구분해요. 이거 하늘나라가 보기에 반칙입니다.
진짜 인간, 사람의 아들 인자, 진짜 인간은 죽음이 가둬둘 수 없습니다. 죽음이라는 권세가 가둘 수 없는 유일한 분 바로 예수님, 그 예수님을 살려내는 것은 한결같은, 일관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이 인간들의 생각은 ‘죽을 때 죽더라도 우리가 살아있을 때 뭘 할 거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그 전체, 모든 생각은 죽음 안에서 이뤄지는 일인데 그게 오늘날 KBS MBC 뉴스에 나와요. 대장금인지 대장동인지 그 모든 일어나는 일, 트럼프 이야기도 그렇고 그 모든 일이 자기 주제 파악이 안 되어 있는 거예요, 자기 주제 파악이!
뭐 때문에 고민하고, 뭐 때문에 불안하고, 뭐 때문에 걱정해야 될지 ‘이게 걱정거리가 되냐, 안 되느냐?’를 구분도 못 해요. 염려거리가 되는지 구분도 못 한다고요. 수동성이 아니고, 인생의 난관에 뭔가 해야 한다는 적극성만 남발하고 있어요.
천사의 활동과 개인의 각자 활동은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개인의 활동은 자기 생존의 가치가 그걸 유지하고 증대시키는 것 그게 인간이 하는 일이에요. 그러니까 인간이 하는 일은 이 세상 악마의 세계의 고유성, 고유함, 자기 것만을 이야기하고요, 천사는 하늘나라의 고유성만 제시하는 겁니다.
따라서 그런 인간이 천사를 만난다? 천사를 직접 만난 사람들이 있어요. 직접 만난 사람들의 반응은 어떻겠습니까? 1번, 침착했다. 2번, 좋았다. 3번, 반가웠다. 그런 겁니까? 아닙니다. 몹시 당황했어요. 굉장히 당황했습니다. 천사를 직접 만났던 그 당황함이 사사기 13장에 나옵니다.
사사기 13장 21-23절에 보면 마노아 가정이 나옵니다. 21-22에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와 그 아내에게 다시 나타나지 아니하니 마노아가 이에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줄 알고 그 아내에게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평소에 용기 있고 “나 남자 아이가!” 거들먹거리던 그 남자가 천사를 만나고 난 뒤에 쫄았어요. 바짝 쫄았어요. 천사를 만났다는 말은, 이미 우리는 죽은 목숨이다. 왜? 미래의 필연성이 앞당겨서 우연성 속에 찾아왔기 때문에. 우리가 죽어야 만나는 그 세계의 존재자가 살아있을 때 내게 찾아왔다는 말은, 천사의 심판 앞에 우리는 어떻게 몸 둘 바가 없죠. 왜냐하면 천사는 거룩한 곳이니까요.
천사보다 더 센 분을 만난 분이 있어요. 이사야 6장에 나와요. 성전에 있던 이사야 선지자가 살아있는 천사를 봤어요. 천사의 특징은 영원함, 죽음이 없는 영원함이 발산되고 있는 거룩함, 그리고 곧 죽어야 될 내가 보여주는 수치스러움과 지저분함, 이것이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구절이 바로 이사야 6장입니다.
거기 보면 성전 문지방에 연기가 일어나요. 요동치면서 연기가 일어납니다(사 6:4). 내가 머물고자 하는 이 안정감이 완전히 상실되면서, 안정감 속에 안정되게 살고자 하는 이사야 역시 벌벌 떨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사야가 주저하지 않고 급속히 외칩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 이 명백함, 이 확실한 현실성, 생생한 현실성 외에 다른 현실성은 다 우연한 거예요. 하나의 환상 같은 거예요.
환상이 아니고 가장 명백한 것은 뭐냐? 거룩한 분을 직접 만나서 거룩한 공간 안에서 자기가 놓여있을 때 자기의 지저분함을 발견하는 거예요. 이사야가 이 경험을 하고 난 뒤에 인간들 말을 듣고 세상의 권세에 벌벌 떨고, 그런 거 없습니다. 그런 것 없기! 그런 것은 이제 없습니다.
인간을 초월한 권세와 능력을 접하고 난 뒤에 세상 나라의 기존 어떤 권세로부터도 탈피된 상태, 이사야는 이미 남들이 자기가 살았다는 그 개념 자체에서의 탈피, 곧 죽음 안에서 영원한 자유를 누리게 된 거예요.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하나님 앞에서 나는 더럽다. 깨끗한 인간아! 내 앞에서 설치지 마라. 내 앞에선 똑같이 더러운 인간이다. 내 앞에서 힘주지 마. 아무것도 아니야, 너희들!’
마노아라는 그 남자가 큰 소리 내니까 이때 또 여자가 얼마나 지혜로운지요.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우리를 죽이려 하셨더면 우리 손에서 번제와 소제를 받지 아니하셨을 것이요 이 모든 일을 보이지 아니하셨을 것이며 이제 이런 말씀도 우리에게 이르지 아니하셨으리이다”(삿 13:23).
이게 놀라운 이야기예요. “치워라, 안 받는다!” 이러면 끝나는 거예요. “네 재물, 네 기도 안 받는다. 필요 없어, 필요 없어!” 이러면 그 관계는 끝난 거예요. 인간이 바쳐도 안 받는다는 말은 너 자신을 안 받는다는 말이거든요.
그런데 무엇이 이상하냐 하면, 받는다는 게 이상한 거예요. 지금 마노아 가정에 이 천사가 와서, 하나님이 아니고 천사입니다, 천사가 와서 제사와 제물을 받으니까 그 받는다는 말은 “너는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 백성이라고 찜 찍었어”라는 걸 티 내는 거예요.
마노아 가정은 소제와 번제를 드렸잖아요. 지금 하나님께서 받는 것은 예수님의 피에요. “네 안에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의 피가 있느냐? 그러면 그걸 나에게 표현 해 봐.” 그 고백, 어떻게 표현하느냐? “지금 내게 일어난 일, 내게 일어난 어떤 일도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나온 사건입니다.”라고 표현해요.
가다가 자동차 펑크 났다. 이 일조차도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일어나야 할 일로서 펑크가 났다고 보는 거예요. 내가 언제 태어났고, 무슨 일을 하고, 언제 죽는지조차도 “그것은 다 내게 속한 일이 아니라 주께서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일어난 일입니다.”라고 고백해요. 참 특이하죠?
이 특이한 사건이 창세기 32장에도 나옵니다. 창세기 32장 30절에 보면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하나님과 대면했는데 왜 이게 신기하지요? 어떤 일이 신기하냐? ‘왜 내가 아직도 살아있지? 내가 살아있지 않아야 하는데 왜 살아있지?’ 무슨 뜻이냐?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내가 너를 구했으니 네 목숨은 네 것이 아니다.” 내 목숨이 내 것이 아니라면 뭐냐? “주님의 영생을 위해서 넌 나에게 다루어져야 할 목숨이다. 소속이 바뀌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 당사자 야곱은 야…, 자기가 살아있다는 그 자체를 두고 이제는 신기함으로 품고 살아있는 거예요. ‘왜 살아있지?’ 다시 말씀드립니다. 이건 애매모호하지 않아요. 명백합니다. 흔들린다든지 불신앙, 의심 이게 있을 수가 없어요. 의심이 용납되지 않습니다.
“주님을 보지도 않고 어떻게 믿느냐?”
“내가 여기 살아 있잖아.”
“그게 무슨 설명이 돼? 나도 살아 있잖아.”
“넌 죽었어!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 너무나 놀랍고 신기하다.”
“왜 넌 살아있으면 안 돼?”
“내가 추잡하고 더럽거든.”
“네가 추잡하고 더럽다는 것은 거울 보고 알았어? 누구 보고 알았어?”
“십자가 사건이 바로 그걸 이야기하는 거야!”
십자가 사건의 예수님이 나 대신 저주받았다는 말은 내가 저주받았다는 뜻이고, 따라서 나는 저주 안에 있어야 된다는 것, 진작 죽어도 할 말이 없다는 것을 주께서 십자가 필연적 사건으로 이 우연적 사건 속에서 미리 보여주신 거예요.
이처럼 천사들의 등장은 당황스럽고, 그리고 이런 경험을 남한테 양도할 수가 없어요. 나누어 줄 수가 없습니다. 자기에게만 일어난 특이 사건이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 ‘학대받은 자를 도와주라’는 그 말씀과 더불어 13절에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이렇게 ‘형제 사랑’이 등장하죠.
천사가 찾아오는 이것이 어떻게 ‘형제 사랑’으로, 형제 사랑으로 이어지는가? 여기서 ‘형제’가 뭐냐? 제가 아까 약간 언급했습니다만, 이 ‘형제 사랑’이라는 것은 ‘전우애’를 두고 이야기합니다. 어떤 전우애냐? 나한테 일어났던 이 우연 속의 필연적 상황이 “세상에!” 나한테도 놀라운데, 그 놀라운 상황이 다른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벌어져요.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에는 공통점이 있어요.
뭐냐 하면, 모든 인간은 악마에 갇혀 있다. ‘지옥 가기로 확정 난 악마의 권세에서 우리는 몸부림쳐도 빠져나오지 못한다.’ 그런 겁니다, 서로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아요. 그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냐? 주관의 이야기, 개인적인 주관이 아니라 벌써 주관에서 벗어나 객관적인 사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객관적인 사실은, 너한테 일어나나 나한테 일어나나 똑같은 물체 또는 확실시된 사건으로서 똑같은 사실이에요.
똑같은 사실을 주고받기 때문에 여기서 토를 달거나 이의를 달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내 주관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주관적인 것이 아니에요. 예수 믿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복음 전하면 안 믿는 사람들이…, 여러분들이 많이 들었을 거예요. 상투적으로 자주 듣는 이야기가 뭡니까?
“그것은 네 느낌이고 네 생각이잖아. 너의 주관이잖아”라고 많이들 하잖아요. 그게 바로 복음으로 학대받는 거예요. 우리가 예수님을 안다고 해서 형제가 되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형제 되는 방법은 어디 있느냐? 이미 했었어요. 히브리서 2장에 보면 나옵니다.
히브리서 2장 9절에 보면,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간 동안 못 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이게 객관적인 거예요. ‘주관적’이 아니에요. 나를 떠나서 뭔가 일어나는 건 ‘객관’이고 일어난 객관이 내 안에 객관으로 이렇게 스며 들어오게 된 거예요. 천사의 도움으로 들어오게 된 겁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임신한 게 이게 주관입니까? 이게 가상 임신이에요? 마리아가 진짜 임신도 안 했는데 “예수님 임신했다” 이랬습니까?
마리아는요, 직접 아기 예수를 출생시켰어요. 그때 천사가 얼마나 이야기를 했습니까? 마리아가 잘 안 믿었어요. 확실하게 믿지는 않았는데 아기 예수가 태어나니까, 내가 평소에 주관· 객관이라고 구분했던 그것조차도 주님 중심으로 통합시켜버린 거예요.
나 때문에 너의 주관·객관이라는 것도 생겨났다는 거예요, 나 때문에! 네가 너한테 원인이 아니고, 원인은 너의 바깥에, 나한테, 나 예수한테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보다, 천사보다 못함을 입으면서 왜 이렇게 고난을 받았는가?’
그게 히브리서 2장 11절에 보면,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형제라 부르시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러면 형제라는 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그것은 몇 가지를 더 첨가해 보면 분명해집니다. 히브리서 1장 10-12절에 보면,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바라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의복처럼 갈아 입을 것이요 그것들이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임시적이고 한시적인 인간, 인생 존재를 영원하고 바꾸기 위해서는 그냥 못 바꿉니다. 그냥 못 바꾸고, 하늘나라에 적합한 인간으로서, 적합한 인간의 요소로서 전환해야 돼요, 이 땅에서. 그 작업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고, 천사와 성령으로 하여금 우리에게 하게 하시는 거예요.
예수님이 그렇게 하게 하실 때 우리의 주관은 빼버리고 주님의 객관을 집어넣는 겁니다. 주님의 객관이 뭐냐? 주님을 천사보다 못하게 하셨잖아요. 우리의 꼬라지가 변변치 않게 만드는 이 이 작업이 객관이 되는 거예요. 분명히 성도인데, 천국 백성인데 이 땅에서 별 볼 일이 없어요.
알아주지를 않아요. 내기 당구를 쳐도 만날 돈을 잃어요. 게임 해도 져요. 공부도 변변치 못해요. 지옥에 갈 사람들은 사탄이 계속해서 지옥에 갈 만한 자로 성숙시키고, 확정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 악마를 이용했거든요. 그들은 지옥 갈 준비가 돼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들은 뭐냐? 자신의 가치와 자신의 행복을 양보 못 하는 자들이에요. 자기 행복밖에 몰라요. 참, 하나님의 일은 허점이 없어요, 허점이 없어! 지옥 갈 자는 지옥 갈 자답게, 천국 갈 자는 천국 갈 자답게 해요. 지옥 갈 자는 철저하게 자기한테 철저한 사람, 그런데 천국 갈 사람은 매가리가 없어요.
자기를 사수하고 방어할 생각 자체가 없어요. 이런 관점에서 여러분, 형제를 한번 찾아보세요. 혹시나 있는가? 혹시 좌우에 있습니까? 인간 세계에서 우리 자신에 대해서 제대로 좀 알아야 됩니다. 인간 세계는요, 배고프면 모든 걸 포기할 거예요.
인간의 양식 없이 못 산다. 이건 너무나 당연한 거예요. 인간은 자기 주관이고 객관이고, 양식 없이는 못 살죠. 그런데 만나라는 양식은 이름이 없어요. 그래서 만나가 무슨 말이냐? “뭐야 이거?” 그게 외계 음식이거든요. 만나를 먹인 것은 주께서 삽입해 주는 거예요. 천국에 합당한 양식을 삽입해 주는 겁니다.
신명기 8장에 보면, ‘네가 그걸 단지 양식으로 받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뭘로 받아야 되느냐? ‘말씀으로 받아야 된다’는 거예요, 말씀으로!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3).
대장 내시경 검사할 때 의사 선생님이 제일 짜증 내는 것은 “약 먹고 변 다 빼라 했지요? 그런데 왜 아직 남아 있어요?”하고 퇴짜 놓잖아요. 그러니까 제일 짜증 내는 것이, 대장에 찌꺼기가 남아 있는 거예요. 내장이 깨끗해야 혹시 암이 있는지, 용종이 있는지를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찌꺼기가 내장에 남아 있는 그게 제일 짜증 나는 거예요.
천국에 적합한 인간으로 변환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뭘 주느냐? 말씀을 줘버려요. 이제부터는 여러분의 모든 식사가 만나라고 생각하세요. 찌꺼기가 뭐냐? 말씀을 주시는 것은 자아라는 지꺼기가 남아 있는지 아닌지를 보는 거예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구나”(사 6:5)가 아니라 ‘저 쓸만하지요? 아직도 남한테 기 안 죽을만큼 가치 있습니다’가 남아 있는지? 이거 남아 있으면 짜증 나는 거예요!
“이게 아직도 말씀으로 깊이 있게 안 쓸어냈구나. 내가 약 먹으라고 몇 번이나 했어?” 계속 말씀 줘서, 그거 좀 쓸어내라 이 말이죠. 그 찌꺼기, 내 의, 내 의를 쓸어내라 이 말이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건 그겁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 그 말이죠, 그의 나라와 그의 의! 네 행복 구하지 말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
이제 마지막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그 찌꺼기가 뭡니까? “도대체 어떤 찌꺼기를 말하는 겁니까? 뭐까지 빼내야 찌꺼기 다 빼냈다고 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으신다면, 뭐 제 이야기보다도 노래 가사 가지고 설명하는 게 훨씬 쉬울 것 같아요.
언제라도 넌 내가 원한 것을 다 줄듯 보였고 샤바 삽사바
변덕스러운 내 기분 맞추려 고민도 하고 사바 삽사바
하지만 너의 고마웠던 사랑을 난 당연한 듯 생각했었던거야
나 이제 알아 혼자된 기분을 그건 착각이었어
1995년도에 ‘룰라’가 불렀던 <날개 있는 천사>라는 노래거든요. “천사를 찾아 샤바 샵사바 천사를 찾아 샤바 샵사바 천사를 찾아 샤바 샵사바…” 그 노래입니다. 거기에 보면, 사람들이 자기의 연애 상대, 결혼 상대를 찾는데 “넌 키도 작고 차도 없다 했지. 난 오 이런저런 조건, 조건 따지다 보니까 진실한 사랑의 의미, 의미, 도대체가, 도대체가 찾을 수가 없어.”라고 하는 거예요.
그 사랑이 내 중심의 사랑이었다는 겁니다.
언제라도 넌 내가 원한 것을 다 줄듯 보였고 샤바 삽사바
변덕스러운 내 기분 맞추려 고민도 하고 사바 삽사바
하지만 너의 고마웠던 사랑을 난 당연한 듯 생각했었던거야
나 이제 알아 혼자된 기분을 그건 착각이었어
그게 착각이었다는 거예요. 거짓 천사죠. 이제는 주께서 위치를 바꿉니다. ‘네가 뭔가 잘못됐다’가 아니라, ‘너는 잘못된 걸로 확정된 세상에서 출생했다’는 겁니다. 너의 잘못을 나무라는 게 아니에요. 깨끗하게 살아, 바르게 살아, 이제 정신 차려, 이제는 새 사람 돼야지, 그걸 지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네가 그렇게 이 세상에 머물고자 하는데 너희는 하나님 보시기에는 마귀와 더불어 지옥 가기로 확정 난, 애매모호한 것도 아니고 확실한 확정 난, 필연적인, 객관적으로 지옥으로 가야 될 그 세상에 너희가 출생했다. 그 출생 된 자에게 주께서 성령과 천사를 보내서 거기서 영생의 나라로 빼돌리는데, 빼돌리는 방법은 예수님이 어떤 인간보다 더 낮아지고 다 처참하게 망가진 거기서 나온 결과물, 살과 피를 집어넣어서 살과 피가 객관적이라는 사실, 십자가의 확정된 사실, 다른 거 필요 없다는 사실, 그 사실에 기뻐하기 위해서, 일어난 그 모든 일이 십자가와 연결되어 일어나는 사건’인 것을 우리에게 새로운 객관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겁니다.
이걸 아는 사람에게는 ‘내 생각은 이렇고, 네 생각은 이렇다’는 주관은 없고, 주께서 일으키는 객관적인 사실만 주고받으면서 “나에게는 이런 객관적인 사실이 일어났는데 너는 어떤 객관적인 사실이 일어났어?” “내가 미장원에 머리하러 갔는데 잘 안 나왔네?” ‘아하, 그것도 십자가와 관련돼 있구나.’ 이런 거, 모든 세상일이 십자가 중심으로 모여서 형제 사랑이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일, 여러분에게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을 벗어나서 세상을 보게 하옵소서. 제발 남들 이야기 듣지 말고, 남들이 수군대는 이야기에 합류하지 말고, 주의 말씀 속에서, 주어지는 말씀 속에서 만나를 먹으면서 예수님의 모든 활동이 관련돼 있는 그 객관적 사실을 우리의 양식으로 받아들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