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자아
2025년 11월 2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2:22-24
12:22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12:23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12:24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하늘은 땅에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하늘나라를 상상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내용을 근거로 그림을 그려보고 그 세계를 믿습니다. 문제는 그 상상한 천국은 존재하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이 상상하는 천국을 거부하도록 장벽을 만들어주셨습니다.
그 장벽이 바로 ‘언약의 피’ 곧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피’입니다. 참으로 인간들이 천국에 들어서려면 ‘언약의 피 속까지’ 들어와야 합니다. 즉 자신을 배제하는 그 장벽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내가 그동안 알았던 모든 것이 주님을 위함이 아니라 나를 위한 일이었음이 드러납니다.
예를 들면, 성경에서는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살아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예수님께서 죽으심을 죽은 것으로 여기고, 예수님의 살아나심을 ‘살아나신 것’으로 여깁니다. 어떤 차이가 있지요? 그것은 이미 인간들이 자신이 살아 있음을 ‘살아 있음의 존재’로 여기고 그 안목으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살아나심을 이해한다는 겁니다.
즉 “나 알아, 살아 있다는 것이 뭔지를 알아”라고 여기면서 자신만만해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살아나심을 아는 것은 예수님과 같이 죽은 자에만 해당됩니다. 그런데 인간의 자아는 스스로 죽지를 못합니다. 인간들은 자신에 대해서 ‘죽어도 사는 존재’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자신이 살아있는 방식대로 저 하늘 나라에도 동일한 방식으로 영원히 살아 있기를 기대합니다. 하지만 땅과 하늘 나라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장벽이 있습니다.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 12:24) 이 장벽을 통과한 경우에만 ‘교회’라는 것이 성립합니다.(히 12:23)
예수님께서, 언약의 피 밖에 있는 인간들을 향하여 ‘교회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밝혀주셨습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따라서 참된 교회에 속했다면 이 세상의 모든 권세에 감당못할 정도로 당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패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에는 분명히 ‘교회가 음부의 권세를 이긴다’가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인간 권세 입장에서 분명히 패배했습니다.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마 27:39-42)
이 현장에 오늘날 우리가 함께 하고 있다고 봅시다. 과연 누가 이겼는지 모를 리가 있습니까? 분명 예수님은 지셨고 세상 권세를 이겼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자기 자신이 분명 교회에 속한다고 자부하려면 세상에서 범람하는 모든 법 적용에 대해서 철저하게 패배해야 합니다.
마치 아벨이 하나님과 관계지어진 자로 확정되고 난 뒤에 형에게 맞아 죽는 것과 같습니다. 가인쪽에서 보면 누가 뭐래도 가인이 이겼고 동생 아벨을 패배자로 분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도 예외가 아닙니다. 인간치고 그 어느 인간도 자진해서 모든 세상 권세에 대해서 패배자 되기를 소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가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피, 곧 유일하게 언약의 피가 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자진해서 패배자가 되셨고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최후의 전지전능입니다. 즉 인간들의 자아는 장벽 없는 천국을 바라보고, 전지전능한 신을 믿고자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단 하나의 대책도 제공하지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은 해답을 가질 자격 자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모든 인간들은 음부의 권세에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그 여파로 인간은 자기가 자기를 지배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땅에서 획득한 자기 정보를 하늘 나라까지 이전시키려고 시도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통해 인간 자아의 한계를 밝힙니다. 마태복음 6:27에 보면, “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고 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자아가 자신의 것이라면 왜 자아는 자신의 소원대로 되지 못하느냐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생각하신 자아의 정보는 오로지 말씀 안에 담겨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말씀입니다.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요 6:65) 이 말씀에 입각해서 보면,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만 받습니다. 그것은 일반인들이 예수님께로 나아오는 것을 거절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게 바로 ‘말씀대로’입니다. 인간의 존재나 구원보다 말씀이 먼저입니다. 이 말씀의 훼방자는 바로 인간의 자아입니다. 그래서 산상설교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적 발언으로 철저하게 인간의 자아를 짓밟습니다. 오른눈이 범죄하면 빼버릴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어느 인간도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그 ‘어느 누구도’ 저주받아도 마땅합니다. 주님께서 찾아내시는 자기 백성은 자신이 ‘필히 잃어버리지 않음’이라는 말씀의 내용까지 성취시키는 결과물입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9)
이런 말씀에 의해서 성도는 옛 자아에 대해서 더는 기대걸 게 없습니다. 즉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 참으로 아무 것도 아니기에 늘 실패하는 것조차 기쁘게 여기며 살게 됩니다.
즉 더는 자신이 자기를 지배하지 않고 벗어난 자가 진정한 교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아들뿐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91강-히브리서 12장 22-24절(말씀의 자아) 251102-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12장 22-24절입니다.
히브리서 12:22-24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모세가 올라갔다 내려왔던 그 시내산의 구조가 오늘날 똑같이 형성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시내산은 하늘이에요. 여기 22절에 ‘하늘의 예루살렘’이라고 되어 있죠, 하늘나라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땅에서는 하늘나라가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인간들은 이 말씀을 근거로 해서 머릿속으로 상상을 합니다.
상상한 그 세계,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이미지로 그려보는 거죠. “너희가 이른 곳은…”했으니까 ‘너희’ 자리에 우리 자신을 집어넣는 거예요. 내가 이른 곳은 시온산, 내가 이른 곳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 내가 이른 곳은 하늘의 예루살렘, 내가 이른 곳, 또는 우리가 이른 곳은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총회, 우리가 이른 곳은 하늘의 교회,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 그리고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 이곳에 우리가 이르렀다, 이렇게 상상해 보는 거예요. 새언약의 중보이신 예수님, 그다음에 말한 것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피가 있는 곳에 이른다’라고 되어 있어요.
여기서 공간적으로 ‘나 여기 땅에 있는데 하늘은 잘 모르지만,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으니까 그 성경에서 말하는 것을 머릿속으로 묘사하며 상상하고 그려보는 거’예요. 그려봤을 때 ‘여기 있는 나는 성경에 있는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라고 생각하는데 이 ‘들어간다’가 헛된 믿음인 상상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있지도 않은 그런 세계라는 사실은, 바로 24절 끝에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뿌린 피니라. 이 피가 없으면 우리가 상상한 곳에 간다고 스스로 위로받을 수도 있는 문제인데, 피가 등장하니까 지금 살아있는 내가 살아있는 채로 간다? 이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고, ‘살아있는 네가 피와 먼저 만나서, 피에 의해 너는 어떤 상태인가를 확인하고 노출한 적이 있느냐?’라고 묻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를 마중 나오는 피는 어떤 피냐 하면, 하나님이 오셨지만 모든 인간이 들고 일어나서 반대했던 그분의 피입니다. 모든 인간이 반대했던 분이 이 땅에 흘린 피예요.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했을 때 그걸 반대했던 사람들이 머리가 나쁜 사람들이 아니고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들도 아니에요.
자기가 이 땅에 살다가 죽으면 천국 간다고 자부했던 사람들이에요. 바리새인 같은 경우에는 부활까지 다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로마의 압제에 견디는 이유가 뭐냐? 언젠가 이 땅에서 죽으면 우리가 천국에서 부활한다고 그거 하나 믿으며 살았던 사람들이에요. 여기 있는 내가 저쪽에 있는 천국에 심긴다는 겁니다.
새집 지어서 마당에 잔디 심을 때 그 잔디를 어디서 가져오죠? 잔디 파는 농장에서 잔디를 실어 와서 심잖아요. 잘 자라라고 애써서 심잖아요? 그거처럼 내가 여기 있는 나를 천국에 심어보자, 하는 생각이 우리에게 왜 없겠습니까?
여러분 볼펜 심 다 떨어지면 새심 넣잖아요. 이걸 한번 생각해 봅시다. 컴퓨터가 고장 났다. 새 컴퓨터로 본체를 바꿀 때 그냥 깡통으로 바꾸는 게 아니고 옛날 컴퓨터에 있던 정보를 빼내서 새로 구입한 컴퓨터 안에 집어넣어야 전에 것이 그대로 살아있지 않습니까?
나라는 인간이 천국 갈 때 나의 어떤 기억 어떤 정보를 빼내어서 천국 가는 나와 연결시키겠습니까? 이걸 어떤 식으로 연결시키겠어요? 과연 이게 연결이 됩니까? 하나님께서 연결을 차단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며 교회 다니면서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이 땅에서 온갖 실패와 좌절이 있더라도 ‘내가 예수 믿으면 이 땅을 떠나 히브리서 12장에 나오는 것처럼 하늘에 있는 장자들의 총회에 가입하고, 온전케 된 의인들의 영과 합세할 수 있다’라는 희망으로 교회 나오잖아요.
그런데 그 정보가 언약의 피에 의해서 저지된다면요? 그게 실패로 끝난다면 도대체 언약의 피를 통과하지 못하는 자아가 과연 천국에 도착하겠습니까? 그런 거 생각해 본 적 있습니까? 그저 천국 간다는 막연한 기대치 그 하나에 미쳐서 정신없이 교회 다녔지만 그게 어디에 막히느냐 하면, 언약의 피에 막힙니다.
아벨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자아예요. 그런데 연결되어 있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형이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다. 세상이 그런 세상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하셨습니다. 18절에,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교회를 세울 텐데 이 교회는 음부의 권세 악령의 권세 악마의 권세 이 세상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거 진짜입니까? APEC 정상회의 할 때 교회 문제 나왔어요? 안 나왔죠. 누가 이겼습니까? 예수님하고 유대인하고 누가 이겼어요?
딱 깨놓고 말해서 누가 이겼습니까? 눈들이 있으면, 귀들이 있으면 한 번 보세요. 누가 이겼습니까? 죽은 자가 이겼습니까, 죽였던 자가 이겼습니까? 죽였던 자가 이겼어요. 마태복음 27장 39-40절에 보면, 지나가는 자들마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을 보며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만일입니다, 만일. 예수님은 패배자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데, 만약에 메시아라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네가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같이 달린 강도들도 그렇게 모독했고 장로들도 그렇게 희롱했습니다. 제사장도 희롱했습니다. 서기관들도 희롱했습니다. 대제사장, 장로, 서기관, 그 시대의 권세자들이었습니다. 권세가 교회를 이기지 못한다고요? 권세는 이 땅에서 항상 이겨요. 권세가 진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권세를 이긴 적이 없어요. 그게 바로 교회입니다. 각오하고 있습니까?
성경에서는, 말씀에서는 음부의 권세, 어떤 권세도 교회를 못 이긴다고 했는데 우리가 눈으로 보고 있는 실제 이 땅의 현실에서 예수님은 패배자예요. 교회는 패배한 집단이고요. 뭐 신천지나 이겼다고 하지, 다른 데는 졌어요.
사람들 다 권세 따라갑니다. 교회와도 권세 따라가요. 사람들이 갈수록 교회 안 옵니다. 돈도 안 내고요. 전도해도 먹히지도 않고요. 4대째 기독교 가정이라고요? 교회 가정? 5대째 안 나옵니다. ‘케데헌’ 그 노래나 부르고 있어요. ‘할로윈데이’ 행사나 가고 성경 안 봅니다. 몰라요. 도대체 누가 교회가 권세를 이겼다고 합니까?
성경에서나 이야기하지요. 성경의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에게 전혀 먹히지를 않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패배자가 되기 싫어하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 자신이, 우리 자아가 남한테 지기 싫어하거든요. 이 땅에서 남한테 지기 싫어하면서 어딜 가요? 천국엘 가요?
우리 자신이 우리의 구원을 방해하는 방해자입니다. 우리 자신은 태어날 때부터 이 말씀 내용 전체에 대해서 방해자의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어요. 주님을 모독하고, 같은 인간들끼리 합세해서 모독하고 권세 있는 자들끼리 합세해서 성경을 우습게 보는 그 일을 하기 위해서, 그 역할을 하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난 사람들이에요, 전부다!
성경이 이렇게 하늘나라가 나오고 그러니까 좋아 보이죠. 좋아 보이는데요, 24절에서는 언약의 피, 아벨의 피, 예수님의 피, 그것이 이 땅에서 하늘로 가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는 거예요. 땅에서 하늘이 안 보이니까 인간들은 자기가 갈 하늘나라를 성경을 통해 조립하고 상상하면서 이럴 것이라고 짐작해요. 이게 가짜 인간, 이게 엉터리에요. 그게 엉터리라고요.
교회에서는 성경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전지전능한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전지전능은 성경에 나오죠. 현실에서는요, 현실에 나타난 하나님은 전지전능이 아니고 아무것도 못 하는 하나님이에요. 인간에게 패배한 하나님이라고요. 전지전능하지 않은 하나님이 오셨어요.
성경을 믿은 유대인들은 전지전능해야 되는데, 이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막상 이 메시아라고 온 작자는 로마로부터의 해방은 언급도 없어요. 우리의 소원을 전혀 들어주지 않는 거예요. 제자들은 뭐 귀신 쫓아내고, 물 위를 걸을 때 얼추 일이 잘 풀리는 양 생각했죠. 열두 제자도 같이 “우리 선생님 최고! 우리 랍비 최고!” 이렇게 메시아라고 믿고 자부하며 그렇게 했죠.
그런데 예수님이 맥없이 정말 연약해서, 메시아가 아니었다면 더 좋을 뻔할 정도로 미미하기 짝이 없이 풀썩 주저앉듯이 권세 앞에 반항 하나 못 하고, 뺨까지 얻어맞고 옷까지 빼앗기면서도 아무 대항책도, 대책도 없으면서 그냥 맥없이 죽었어요.
인간에게, 우리자신에게 어떤 해답도 주지 않는 것이 성경입니다. 나에게 어떤 해답과 어떤 해결책을 일체 제공하지 않는 것이 성경이에요. 이런 것 기대하고 성경 보면 성경 잘 못 본 거예요. 교회 잘 못 오신 거예요. 우리의 고민? 주께서는 일체 들어줄 마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성경 볼 때의 그 선입관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의 마음가짐은 우리가 패배자 되기 싫다는 것이 전제로 깔려있기 때문에 그래요. ‘인생 뭐 있어? 한방이지. 남자로 태어나서 칼을 뺐으면 무라도 베야지.’ 어떤 식으로든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을 우리가 자진해서 철회한 적이 없습니다. 뭐라도 내 존재가 의미 있기를 바라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들이 생각하고 믿는 천국은 장벽 없는 천국만 생각했어요. 그러나 언약의 피는, 하나님께서는 그럴 줄 알고 장벽을 만들어버렸어요. 장벽 있는 천국이에요. 천국 가고자 하는 것은 다 못 가게 하는 든든한 장벽, 어느 인간도 천국에 가는 것에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장벽을 깔아놔 버린 거예요.
지난 시간에 이야기한 것처럼 낙타는 바늘구멍을 절대로 통과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성경에서 언급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아는 절대로 자아를 부정 못 하기에 그래요. 자아를 제끼고 천국, 자아를 제끼고 하나님, 자아를 제끼고 예수님, 절대로 그런 생각을 못 하는 게 인간이에요. 인간은 자아가 우선인 겁니다. 내가 우선인 거예요.
하나 예를 들겠습니다. 성경에서는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셨다’라고 되어 있어요. 그런데 인간들은 예수님이 죽었다고 여기고 다시 살았다고 믿습니다. 여러분, 이 둘은 엄청난 차이예요. 예수님은 실제로 죽었다가 부활했는데 인간들은 예수님은 죽은 적이 있는데 사흘 만에 살아난 적이 있다는 거예요.
이게 같은 말일까요, 다른 말일까요? 이게 엄청나게 다른 말입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은 예수님의 이야기이지만 우리는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을 누가 바라보고 믿느냐 하면, 여기 살아있는 내가 바라보고 내가 그런 것을 인정하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죽었는데 우리는 안 죽고 살아있는 채로 예수님의 죽음을 이해하고 해석하고 분석하는 거예요. 이게 틀려먹은 거예요. ‘내가 살아있다’를 전제하고 죽은 예수님을 다루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게 잘못된 거예요. 예수님의 죽음을 알려면 나도 예수와 함께 죽은 가운데서 예수님의 죽음을 이해해야 제대로 이해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니까 나는 죽을 마음이 없어요. 나는 자아를 살리고 싶어요. ‘살아있는 내가 저 예수님의 부활과 십자가 부활을 어떻게 이용해 먹을까?’ 이용해 먹을 생각을 하는 거예요. 왜? 내가 중요하니까. 무엇보다? 예수님의 죽음보다 내가 중요하니까요.
그래 놓고 우리는 히브리서 12장에,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군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총회를 탐내고 있어요. 언약의 피가 도대체 뭔지를, 왜 너희가 이른 곳은 언약의 피가 있는 곳이라는 24절의 말씀을, 이걸 제끼고, 이걸 빼놓고, 그걸 생각 안 하고 22절과 23절을 보고는 ‘야, 좋은 사람들 다 모여서 영원토록 행복 누리는 그곳에 나도 끼어들고 싶다.’ 그러한 장차의 행복이라는 탐욕? 이게 화근이고 이게 문제점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살아있는 채로 살아있는 내가 어떻게 천국과 십자가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우리 자신의 상상의 한계고, 우리 자신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살아있다는 그 개념 자체가 평소의 내가 나를 살리는 방식으로, ‘주님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라는 예수님의 죽음과 살아있음을 ‘내가 현재 기본으로 평소에 살아있다는 게 뭔지를 익히 알아. 난 안다고. 내가 죽은 것과 살아 있는 것도 구분 못 할 까봐? 이건 살아있고 이건 죽은 거야.’라고 아는 입장에서 예수님이 ‘죽었다’와 ‘살아났다’를 이해하는 것, 그것은 하나님께서 받아주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아까 하는 말 히브리서 12장 23절에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여기서 교회라고 하는 것은 아까 본 마태복음 16장 15절의 말씀처럼 음부의 권세를 통과한 적이 있는 교회, 음부의 권세를 이긴 그 교회를 두고 이야기합니다.
음부의 권세를 이긴 교회라면, 우리가 거기에 합류가 되려면 우리는 어떤 것이 기쁘고 즐거워야 되느냐? 어떤 경우라도 나는 이 세상의 권세를 이겨내지 못하고 패배한다는 것, 그걸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교회에 속합니다.
음부의 권세를 이기지 못한다고 예수님께서 정의를 내렸으면, 그 정의 안에, 그 문장 안에 우리가 뛰어 들어가면…, 그러니까 교회 좋아하지 말고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가 되려면 먼저 뭘 경험해야 하느냐? 먼저 음부의 권세, 세상의 권세가 얼마나 세고 센 지 온몸으로 체험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게 논리상 맞는 이야기 아니에요? 그 음부의 권세를 누가 어느 재주로 빠져나올 수 있습니까? 못 빠져나와요. 그 이유가 우리 자아 때문에 그래요.
마차가 뭐냐? 바퀴냐, 아니면 말이냐, 아니면 바퀴 위에 있는 상판이냐? 뭐가 마차냐? 그 전체를 마차라고 하느냐? 인간 세상에서 마차라고 하는 것은 앞에서 말이 끌고, 상판이 있고, 상판 위에 작은 방 하나 만들어 놓고, 그 밑에 바퀴가 달린 그걸 ‘마차’라고 하잖아요.
그게 마차를 볼 때 잘못된 개념이에요. 어떻게 바퀴가 저절로 굴러갑니까? 어떻게 말이 저절로 가요? 어떻게 상판이 저절로 가겠습니까? 마차는 마부예요. 마부가 목적하는 바에 의해 끌려가는 것이 마차입니다. 따라서 인간에게 인간은 뭐냐? 자아가 인간이에요. ‘마차’라고 이야기하는 그 자아가 마차가 되는 거예요. 내 의도와 내 목적대로 살아가는 것, 그 나는 때려죽여도 내 목적이 되는 바를 내가 포기 못 한다고요.
그렇다면 이런 예를 들 수 있어요. 손 들고 “저 손 들었습니다. 여러분도 손 들어 보세요.” 라고 하면 손들 거예요. 여러분들이 손 들었다고 치고 “제 팔은 제 팔인데 손 든 분 팔은 누구 팔입니까?” “내 팔입니다.” 그러니까 자아라고 하는 것은, 사람마다 자아가 다 달라요. 사람마다 다 다르니까 진리라는 것은 있을 수 없어요. 왜? 자기 팔 자기가 흔드니까요.
그러면 물어봅시다. “자기 팔 들고 그걸 자기 팔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 “예.” “그 팔을 두 배로 한 번 키워보세요.” 키운다고 두 배로 키워지는 게 아니죠. “당신 팔인데 당신 마음대로 왜 안 되죠? 당신 인생 당신 목적대로 이끈다면서요? 그런데 당신 팔인데 왜 두 배로 길어지지 않죠? 당신이 당신 말을 안 듣네, 그러면! 당신은 지금 누구한테 지배받고 있죠? 왜 당신 팔인데 팔이 두 배로 길어지지 않느냔 말이죠. 왜?”
자꾸 남이랑 비교하지 말고 본인의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본인에게 한 번 지배를 해보고 지시를 내려보세요, 뜻대로 되는지. 안 되죠? 마태복음 6장에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자아의 한계에 대해서 예수님이 이야기했어요. “염려한다고 키가 크냐?” “안 큽니다.” 염려한다고 키를 크게도 못하는 네 자아를 왜 아직까지도 붙들고 있느냔 말이죠, 왜? “네가 너를 붙들고 있으면서 어디를 가? 천국을 가? 키를 한자도 키우지 못하는 주제에 천국에 누가 넣어주는데? 네 마음대로 가?”
‘평소의 내 몸은 네게 아니고 내 거야. 내가 가진 것도 내 거고 이것도 내 거야.’라고 주장하면서 그 내 거라고 주장한 그 정보, 그 정신 상태나 마음 자세를 그대로 볼펜 심 갈듯이 천국 가면, 환경만 바뀌면 그 볼펜 정보가 그대로 바뀌어서 천국에 꽂힐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건 터무니없는 거짓말이에요.
그것은 교회가 교인들한테 사기 친 거예요. 교인들이 자기 욕망을 달성하기 원하니까, 목사가 장사하려면 그 짓밖에 더 있어요? 뭔가 장사하고자 하는 뜻대로 돼야 콩고물이라도 얻어먹잖아요. 예수님이 오신 것은 ‘말씀의 자아’로 오셨어요. 진짜 자아입니다.
이렇습니다. 내 뜻대로 내가 천국을 원한다고 해서 갈 수가 없어요. 오늘 본문에 시내산 언급을 한 이유가…, 시내산이 온 게 아니에요. 시내산에 들어갔다가 시내산에서 살아서 온 자가 있었어요. 이름이 모세예요. 모세는 산 밑에 있는 이스라엘에게는 외부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외부인이냐 하면, 죽었다가 살아났으니까 외부인이에요. 외부인이 그냥 홀로 온 게 아니에요. 말씀을 가지고 온 겁니다.
이 모세가 바늘이라면 홀로 바늘만 달랑 온 게 아니고 바늘에 뭐가 꿰었는가? 율법이라는 실을 끼운 채로 그 시내산에서 기어 내려온 거예요. 뭐 기어서 내려오지는 않았겠지만, 하여튼 온 겁니다. 들고 온 것이 십계명입니다. 율법이에요. 주님께서 천국에 넣어줄 사람은 기존에 세상 권세를 이기지 못한 우리가 아니에요.
우리 자아가 아니고 말씀에 의해서 새롭게 구성된 모든 새로운 정보, 정보라는 말을 하는 데 성경에 나온 용어대로 하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 정보, 말씀에 의해서 온전해진 정보, 그 정보를 가진 사람을 말씀으로 낚아서 땅에서 위로 올라가기 위해 모세같이 주님이 하늘에서 땅에 내려온 거예요.
말씀의 정보, 말씀의 자아. 그런데 이 말씀의 자아를 유대인들은 어떻게 오해했는가? 율법이 있으니까, 기존 자아가 있으니까, 자아라는 말이 어려우니까 self, 나,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순종하라”라고 하니까 ‘내가 그 말씀을 실천에 옮기면 난 구원 받는다’라고 생각한 게 유대인이에요.
그 말씀의 자아가 따로 있다는 생각은 못 하고 기존의 자아가 ‘하라, 하지 마라’하는 그 말씀을 지키면 나는 말씀 지킨 자가 되어서 천국에 간다고 생각한 거예요. 누가요? 유대인들이, 바리새인들이, 사두개인들이, 서기관들이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다는 거예요. 기존의 자아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부모로부터 태어난 것은 육이거든요. 육은 기존의 자아에요.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기 때문에 영이 될 수가 없습니다. 아무도 구원받을 수가 없다는 말이에요. ‘누가 키를 한 자를 더 할 수 있겠느냐’라는 말은, 자아의 한계, 나의 한계를 주께서 계속 지적하는 거예요.
세상에서는 이 자아를 어떤 식으로든 온전하게 다루기 위해서 온갖 상상과 아이디어를 다 끄집어냈습니다. 오늘 본문 히브리서 12장 23절 보면,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이라 하는데 ‘온전케 된 의인의 영’은 그 근원이 어디서 나오는가?
바로 24절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아벨도 온전해요, 아벨의 피도. 하지만 아벨보다 더 온전한 피는 예수님의 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온전한 것을 옛 자아가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피는 옛 자아의 한계, 경계를 지었기 때문에 그 옛 자아가 스스로 자기 경계를 넘어서서 예수님의 피, 십자가를 믿을 수가 없어요. 이게 우리의 한계입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받을 위인이 이 땅에는 있지를 않아요.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대구에 어떤 할머니가 살고 있는데 손자가 곧 수능이잖아요. 그 할머니가 손자한테 보탬이 되고자 갓바위에 올라갑니다. 갓바위에 올라가서 비는 거지요. 부처한테 배운 대로 하면 두 가지 업보가 있어요. 선한 업보가 있고 악한 업보가 있어요. 선한 업을 세우면 선한 업을 손자에게 나누어 줄 수가 있다는 거예요.
이것은 상속법에 위반됩니다. 여러분, 부모가 힘들게 노동해서 얻은 것을 아들이나 손자에게 주면서 ‘내 돈 내가 벌어서 내 예쁜 손자한테, 아들한테 상속해 준다’ 하지요. 예를 들어서 할머니가 공부하는데 고생했다고 손녀딸한테 500원 그냥 주면서 ‘내가 주고 싶어서 주는데 나라가 뭔데 세금을 떼느냐?’ 나라가 세금을 떼는 이유는 주는 자가 아니라 받는 자의 입장에서 노동 없이 소득이 왔기 때문에 소득세를 때리는 거예요.
내가 쌓은 이 선한 업보를 나눠준다고 할 때 아들이 세 명 있다고 합시다. 첫째 아들이 “어머니! 손자를 위해서 선한 업보 쌓는다고 해버리면 엄마는 손자를 위해서 애쓴 거지만 엄마를 친히 담당하는 이 큰아들 입장에서 볼 때 올라가다가 엎어지거나 자빠져서 깨지면 돈 다 나가고요, 완전히 자식 불효자로 만듭니다. 그냥 곱게 집에 계세요. 갓바위 같은 데 가지 말고 집에서나 기도하시고 날도 추우니 거기 올라가지 마세요. 자식 걱정도 좀 해야 하지 않습니까, 손자 수능 걱정만 하지 마시고요.” 이렇게 했어요. “손자를 위해서 맛있는 음식이나 만들어주시면 손자에게 힘이 됩니다.”
그때 둘째 아들이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엄마가 힘든 줄 알면서도 갓바위까지 올라가서 손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엄마 개인의 존재의 의미가 된다. 엄마가 하고 싶은 대로 냅둬야지 형이 뭔데 엄마 건강 걱정해서 못 하게 하느냐?’라고 했습니다. 누가 맞습니까?
지금 땅 밑의 이야기에요. 자아들만 있는 곳, 지금 멀쩡한 자아들만 있다고 자부하는 자들이 하는 짓들, 이걸 갓바위라고 하지 말고 교회라고 번역해서 대입해도 마찬가지예요. “추운데 새벽기도 가다가 음주 운전하는 차에 받혀서 죽지 말고, 추운데 그냥 집에 가만히 계세요.” 이렇게 말릴 수도 있는 문제에요.
자, 셋째 아들이 있습니다.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 둘 다 만만치 않죠? 논리의 타당성이나 근거가 딱 있죠? 셋째 아들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형님들! 엄마가 형님들에게 ‘나의 이런 행동이 옳은지 그른지 너희들이 평가해달라’라고 요청한 적도 없는데 왜 형님들이 주제넘게 나서십니까? 가만 계세요.” 이게 셋째 아들 의견입니다.
그리고 “큰형님! 지금 엄마 걱정하는데 그 심보가 어떤 심보냐? ‘엄마 돌아가실 때까지 큰아들로서 엄마를 얼마나 걱정했는지, 최선을 다해 효도했는지 아느냐, 이 동생들아?’ 이런 자기 선한 업보를 쌓기 위해서 그런 이야기 하는 거 아닙니까? 둘째 형님! 형님은 엄마의 선한 업보가 손자한테 전달된다고 생각하는데 엄마의 나쁜 업보는 왜 전달 안 될까요? 그거 납득 되게 설명해보세요.” 안 되죠.
‘업보’라는 게 불교 용어지만 교회 다니는 모든 인간이 불교 신자 아닙니까? 왜? 자기로부터 와서 자기로 말미암아 자기로 돌아가잖아요. 그래서 여기서 다시 한번 우리는 말씀 안에 주께서 온전한 자아,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골로새서 1장 15절에 그게 나와 있어요.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보다 먼저 나신 분이 어떤 정보를 보유하고 있느냐?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언약의 피라는 것은 뭐냐? 온전치 못한 자아들이 온전한 자아를 이 땅에서 없애버렸어요. 그게 음부의 권세입니다. ‘음부의 권세가 집중해서 예수님을 죽여서 예수님은 피를 흘렸다’라는 그 말입니다.
이것은 뭔가 땅과 하늘이 가로막혀 있어서 땅은 어떤 경우라도 하늘의 천국에 못 간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분명히, 뚜렷하게 보여준 거예요. 모두가 예수님 말씀의 방해자니까요. 그 예수님,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오늘 설교에서 정말 충격으로 다가왔으면 좋겠어요.
요한복음 6장 65절,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아니하시면’, ‘없다’. 두 개의 부정어를 사용했어요. 두 개의 부정어를 사용하는 것이 어떤 경우냐? 내게 오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왜 오지 못하느냐의 이유를 설명할 때 단어 두 개가 들어갑니다.
“오지 못하는데 잘만 하면, 애쓰면 그래도 들어갈 수 있어.” 그런 것을 사전에 차단시키는 뜻으로 부정의 단어가 두 개 들어간 거예요. 쉽게 말해서 누구든지 내게로 올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마땅하고 당연하다는 거예요. “너 인간이야?” “YES SIR! 인간입니다.” “그러면 천국에 못 오겠구먼.” “왜요?” “인간이거든!”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얼마나 인간이 질이 나쁜지, 음부의 권세, 악령의 권세 아래 있는지 자기가 천국에 가지 못하는 것을 그냥 수긍하고 ‘아, 못 가는구나’ 하면 되는데 가만있을 인간들이 아니에요. 못 간다는 것을 분명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갈 수 있는 수를 개발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두 자로 ‘종교’라는 겁니다. 천주교,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이런 종교라는 거예요.
그 방법은 뭐냐? 자아의 순수함을 장려해서 키우면 된다는 겁니다. 소위 성화론, 거룩한 삶을 살면 된다는 겁니다. 그걸 보고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웃겠습니까? “너희 이방인들이 거룩한 삶을 거론해? 너희에게 율법이 있기는 있어? 개코나 율법도 없으면서, 하나님의 법을 받은 적도 없으면서 뭐 거룩한 삶? 우리는 율법이 있어.” 이렇게 나온다고요.
그래서 로마서에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무릇 율법 없이 범죄 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 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롬 2:12). 무슨 뜻입니까? 율법 있어도 망하고, 율법이 없어도 망하고요. 그래서 이것이 저주의 보편성이에요, 저주의 보편성!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말씀 안에 있는 자아를 구원해요. 말씀 안에 있는 자아, 소위 하나님의 백성들, 말씀께서 예언한 백성들을 구성하는데 주께서 나섭니다. 하나님의 약속, 말씀 안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기에 있어요.
있는데 인간은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어떤 인간도 백성이 될 수 없어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말씀에 들어 있는 그 백성을 만들어내는 작업에 나서십니다. 그 만들어내는 작업을 하시면서 요한복음 6장 65절에서 하시는 말씀이 “아버지께서 내게 오라고 하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두 가지 내용을 담고 있어요. 아버지께서 보낸 자는 이 예수님이 거부할 수 없다는 이 한 가지, 그리고 두 번째가 더 중요해요. 어떤 인간이든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께 오는 인간은 단 한 명도 오지 못하도록 내가 막겠다는 거예요.
나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께 나오는 것을 예수님 쪽에서 막아 버려요. “아버지께서 보냈어, 안 보냈어?” “아니, 내가 알아서 구원받겠다는데. 내가 예수 믿겠습니다.” “오지 마. 내가 그걸 안 받아.” 왜 그렇습니까? 말씀 자체가 그러니까.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라고 하면 일단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보낸 자만 받지 그 외에는 안 받습니다.
그 말은, 내가 구원받고자 하는 자를 주께서는 구원하지 않습니다. 참, 이 말하는 게 그렇게 오래 걸렸나? 성경에 있는 이야기인데요. 요한복음 6장 39절에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이게 뭐냐 하면요, 우리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게 성경의 뜻이 아니에요. 주님께서는 우리를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보는 거예요. 여러분이 아침, 점심, 저녁 식사 때마다 곡물을 먹게 돼요. 밀, 쌀 같은 곡물을 먹고 고기도 먹잖아요.
우리가 곡물을 먹어야 할 이유가, 그 곡물의 운명과 우리의 운명을 일치시키기 위함인 거예요. 곡물은 우리 속에 와서 소화되면 소멸되고 에너지로 흩어져 버려요. 곡물을 먹어야 산다는 말은, 곡물을 먹는 우리도 곡물의 신세와 똑같이 소멸한다는 뜻입니다. 곡물을 먹는다는 것은, 우리가 죽어가고 있다는 뜻이에요.
이걸 누가 아느냐? 예수님은 아셔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6장에서 이런 말씀하십니다. “너희 조상 때 만나를 먹고 광야에서 살았다고 하는데 만나는 영생이 아니야. 만나를 먹었던 자는 죽었거니와 내가 주는 음식, 만나는, 떡은 생명의 떡이다. 내가 주는 그 떡의 운명과 네 운명이 일치될 때, 내가 주는 떡과 일치될 때 비로소 너희는 생명나무 열매를 따 먹은 효과, 생명의 효과를 얻는다.”라는 겁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요 6:48-51).
예수님께서 생명의 떡이니까 예수님께서 어떻게 그 떡을 보여줬느냐? 이 땅에 와서 죽었고 이 땅에 와서 사흘 만에 살아났어요. 그걸 바라보고 있는 우리 인간들은 ‘아, 저분은 죽었다가 살아났구나.’라고 하는데, 그거는 어떤 관점이냐? 내가 지금 안 죽고 살아 있는 관점에서 ‘저분은 죽었고, 저분은 또 살았다’라고 일방적으로 잘못된 해석을 하는 거예요.
곡물로 인하여, 음식으로 인하여 지금 죽어가고 있으면서 죽어가는 자기 신세에 대해서, 내가 왜 죽어가는지의 그 이유를 전혀 모른 채 전혀 모르는 채 자꾸 상상하는 거예요. ‘이생이 끝나면 저 생이 있겠지.’ 이생과 저 생이 정보 교환이 안 되는데요. 이생의 정보가 저쪽의 정보로 안 넘어갑니다.
왜냐? 말씀에 입각해 보면, 이생에서의 모든 정보는 이미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떻게 참하게 살고, 어떻게 바르게 살든 관계없이 그것은 다 죄라고 규정했어요. 누가? 예수님이요. 예수님이 누군데요? 말씀이에요. 말씀이 육신이 되었잖아요.
말씀 되시는 분이 육신으로 오셔서 육신의 모습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나 자기나 똑같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똑같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입니다. 그 사실을 모르고 인간들의 권세로 예수님을 처벌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죽었습니다.
인간은 죽어도 죽는 이유를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죽을 때 참된 인간으로서 죽기 때문에 그 죽음이 참된 의미입니다. 그 죽음이 뭐냐? 생명이에요. 언약의 피, 아벨 피보다 더 낫게 하는 언약의 피가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내 죽음의 말씀을 가지고 합류시키기 위해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게 뭐냐? 산, 땅이 아니고 산, 산 위에서 주신 말씀, 그 말씀을 산상 설교라고 이야기합니다.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말씀이죠.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마 5:1) 산상 설교로서 우리를 죽이는 방법은…, 우리의 몸은 곡물로 인하여 소멸하기 때문에 우리의 몸은 소용없어요.
어디를 집중공략 하느냐? 우리의 마음을 공략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5장 3절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첫 번째 복을 거론 하면서 마음을 공략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음이 텅텅 비어 있는 자가 복이 있나니 천국에 너의 것이니라.’
다시 말해서 마음 자체가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유지하라.’는 말입니다. 재산이 10억이 되고 20억이 되든 우리의 마음가짐은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의 선행을 받지 않습니다. 우리의 악행도 물론 받지 않습니다. 우리의 똑똑함도 받지 않고 어리석음도 받지 않아요.
왜 주께서는 우리의 것을 안 받는가? 그게 요한일서에 2장에 나옵니다. 요한일서 2장 15절에 보면 왜 안 받는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아버지의 사랑이 있지 않기 때문에 안 받는 거예요. 우리가 한것은 안 받습니다. 아버지가 받으시는 것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시는 거예요.
이 산상 설교를 통해서, 주께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죽이십니다.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마 5:29) 라는 이 말씀 돼, 안돼?” “못합니다.” “안돼? 저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마 6:31)는 말씀 돼, 안돼?” “못합니다.” “저주나 받아라!”
예수님이 죽었을 때 저주받고 죽었거든요. 말씀으로 하여금 그 저주를 우리에게 나누어 주는 겁니다. “네가 너한테 져. 네가 너한테 패배해. 그러면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괜히 착한 짓을 해서 좋게좋게 해서 너를 자꾸 건지려고 하지 마.”
말씀을 보게 되면 우리는 우리가 내세울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산상설교 같은 경우에. 그 말씀을 가지고 우리에게 찾아옴으로써 결국 말씀에 의해서 죽어버리면 우리의 옛사람이 죽어버려요. 그냥 옛사람이라 하지 말고, 우리 자아가 죽어버려요.
죽고 난 뒤에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의 자아가, 예수님의 자아, 예수님의 영이니까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고리도전서 2장에 보면 예수님의 깊은 마음(10절)이 우리 속에 들어오게 되면, 텅텅 비어 있는 우리 마음에 ‘다 이루었다’는 주님의 온전한 마음이 우리 마음을 차지해 버립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의 소유가 되고 예수님의 겉이 돼요.
예수님의 겉이 되면, 그때부터 우리는…, 이 영이 무슨 영이냐 하면, 아들의 영이죠. 아들의 영이라면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하라고 이미 기도를 규정했어요. 뭐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걸 경상도 버전으로 번역하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예!’ 이 뜻이라는 말이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그 이름만을 거룩히 여기면 참 좋겠습니다.” 그런 기도라는 말이죠. 아버지 하나님이 예수님의 아버지 된 것처럼 이젠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한 식구가 되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의 패밀리가 돼 버려요.
그러한 과정을 위해서는 우리에게 뭐가 필요하냐? 두껍지만 이 말씀이 날마다 살아서 우리로 하여금 이 자아를 못살게 굴죠. 이렇게 착했습니다, 이렇게 훌륭했습니다, 바르게 살았습니다, 믿음 좋습니다…, 그걸 자근자근, 그냥 낙엽 부수듯이 다 부숴버리는 그 작업, 내가 나한테 패배해서 나는 아무것도 아님을 아는 그 기쁨과 즐거움이 바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아들의 특징적인 모습이에요.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 이미 이 땅에서 예수 안에 있는 자는 하늘이고, 예수 밖에 있는 자는 땅입니다. 하늘에 속한 자는 언약의 피만, 피의 공로만 감사하고 고마워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문제였습니다. 좋은 것 있다면 다 내 것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이 고집스러운 우리의 마귀적인 품성, 이 사실을 우리가 알게 됐다는 것이 이미 합격한, 구원받은 주님의 식구라는 것을 깨닫고, 오직 모든 공로를 주께 감사드리며 같이 기뻐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