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하나님의 면접장

아빠와 함께 2025. 10. 26. 18:49

하나님의 면접장 

2025년 10월 26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2: 18-21

12:18 너희의 이른 곳은 만질 만한 불 붙는 산과 흑운과 흑암과 폭풍과
12:19 나팔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
12:20 이는 짐승이라도 산에 이르거든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을 저희가 견디지 못함이라
12:21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이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으나

모조리 불 속에 다 들어갑니다. 그것은 선악과 지식을 따먹은 인간들을 하나님께서 끝까지 추적하시는데 그 추적의 수단이 불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 3:14)

왜 하나님께서는 그냥 불 속에 죽도록 내어버려두지 않으시는 겁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실효성 때문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시는 나무 실과를 먹는 날에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창 2:17)이 그대로 현실이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하나님 말씀으로 구성된 새로운 현실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에게 없는 특이한 경험을 해야하는데 그것이 바로 시내산 당도입니다. “산이 불에 타며 캄캄한 가운데서 나오는 그 소리를 너희가 듣고 너희 지파의 두령과 장로들이 내게 나아와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영광과 위엄을 우리에게 보이시매 불 가운데서 나오는 음성을 우리가 들었고 하나님이 사람과 말씀하시되 그 사람이 생존하는 것을 오늘날 우리가 보았나이다

이제 우리가 죽을 까닭이 무엇이니이까 이 큰 불이 우리를 삼킬 것이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다시 들으면 죽을 것이라 무릇 육신을 가진 자가 우리처럼 사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불 가운데서 발함을 듣고 생존한 자가 누구니이까”(신 5:23-26) 즉 죽어라고 주신 불을 받고자 죽지 않고 살아있는 특이한 생존의 경험은 이스라엘 이전에 이미 모세에게도 주어졌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가로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는 동시에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2-5)

여기서 ‘신발을 벗는다’는 것은 더는 모세에게 ‘자기 존재’가 허락받지 못하는 겁니다. 즉 ‘자리’라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새롭게 배정받아야 가능한 겁니다. 달리 말해서 인간에게 있어 더는 ‘나’라는 것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버린 분의 ‘나’만이 하나님에게 인정받는 나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찾아온 불로 인해 이스라엘은 그 불로 완전히 연소되어 재가 되기 전에 불을 품은 숯으로 다루어집니다. 숯이란 말씀을 전하는 동시에 안에 품은 불도 같이 나오는 방식으로 다루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예를 들면, 다니엘 3:19-23에 보면, “ 느부갓네살이 분이 가득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향하여 낯빛을 변하고 명하여 이르되 그 풀무를 뜨겁게 하기를 평일보다 칠 배나 뜨겁게 하라 하고

군대 중 용사 몇 사람을 명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결박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지라 하니 이 사람들을 고의와 속옷과 겉옷과 별다른 옷을 입은 채 결박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질 때에 왕의 명령이 엄하고 풀무가 심히 뜨거우므로 불꽃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붙든 사람을 태워 죽였고 이 세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결박된 채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떨어졌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다니엘 세 친구는 모든 인류 역사 내내 인류가 밟고 있는 그 세계의 바닥을 말해주는 겁니다. 인류의 문명은 그 위에서 진행되며 그 진행되는 모든 결과물은 결국에 다 불에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학교, 교회, 병원, 군대, 노인정, 놀이동산, 아파트 단지, 산업체 등등 모든 것들은 다 불에 빠지게 됩니다.

이를 위해 주님께서 이 세상에 ‘불을 던지려 오셨다’고 했습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이 불지르시는 방식은 말씀을 전하시는 겁니다. 숯불 기능입니다.

세례 요한도 예외가 아닙니다. 말씀을 전하면서 최종적으로 불과 성령으로 그 바닥의 본색을 드러낸다는 겁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 3:11-12)

이처럼 불 심판 이전에 현재 인간 형편을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밝히셨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마 19:23-24)

이 막힌 것을 뚫어내는 것은 예수님과 아버지 하나님과의 성립된 관계입니다. 그 관계에는 탄식과 슬픔이 담겨 있습니다.

일단 성도의 자리를 빼앗습니다. 그리면 구원받은 강도 신세가 됩니다.

모아놓은 향수를 뿌리는 죄많은 여인을 통해서 주님의 사랑 적용을 나타내시고(눅 7:37-38),

그런 자는 주께서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는 자입니다.(마 8:9)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2:20에서는 사도 바울이 주님의 십자가에 박혀서 십자가 안에서 꼼짝 못합니다.

그 이유는 이미 이 세상은 불바다로 확정나 있는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어느 가정에서 “아빠는 내가 지옥가는 것을 왜 그냥 보고 있었어요”라고 절규하면서 항의한다면 이미 그 가정은 구원받은 가정입니다. 아내가 남편보다 “당신은 나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내가 저주의 대상인 것을 미리 말하지 않았어요”라고 한다면 이것도 이미 구원된 가정입니다.

고린도후서 3장에서 사도 바울은 모세가 시내 위에 들어갔다가 오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것은 성도들을 자유케 하기 위함이라는 겁니다. 이미 죽은 자이까요.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 3:13-17)

쉽게 사세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과 말씀을 통해 면접하는 이 면접장 밖이 매우 소란스러움을 알게 하옵소서. 주님께로 주신 모든 말씀을 주님 홀로 이루셨음을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90강-히브리서 12장 18-21절(하나님의 면접장) 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12장 18-21절입니다.

히브리서 12:18-21

“너희의 이른 곳은 만질만한 불 붙는 산과 흑운과 흑암과 폭풍과 나팔 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 이는 짐승이라도 산에 이르거든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을 저희가 견디지 못함이라 그 보이는바가 이렇듯이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으나.”

불붙는 산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십니다.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하고 차이 나는 것 중 하나가, 이스라엘은 인간 대 인간으로 말을 듣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불붙는 산에서 들었다는 그 집단 체험, 그들은 그것을 생생하게 받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받았던 십계명, 그 모든 말씀이 불 속에서 나온 겁니다.

신명기 5장 24-25절에 보면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영광과 위엄을 우리에게 보이시매” 그다음에 나온 말씀이 “불 가운데서 나오는 음성을 우리가 들었고.” 모든 말씀은 불 가운데서 나오는 음성입니다. 그다음에 25절 “이제 우리가 죽을 까닭이 무엇이니이까 이 큰 불이 우리를 삼킬 것이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다시 들으면 죽을 것이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불을 맞이하는 것이고, 이 불로 인하여 우리는 죽게 된다. 26절에 보면 “무릇 육신을 가진 자가 우리처럼 사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불 가운데서 발함을 듣고 생존한 자가 누구니이까.”

하나님께서 불을 보내고, 불 가운데 말씀을 주시는 이유는, 어떤 인간도 불에서 나오는 말씀을 듣고 생존할 자가 없다는 겁니다. 모세 같은 경우는 특이한 경우고요. 산에 올라가지 않은 모세 이외의 모든 사람들은 불의 음성을 듣는 순간 ‘이미 죽었습니다.’ 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불 속에서 나온 음성인 말씀을 듣고 “이미 죽었습니다.”라고 말을 하는 자체가 죽음 가운데서 살아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불 속에서 나온 말씀 없이 산 것 하고, 불에서 나오는 음성을 들음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는 것하고, 살아있다는 두 개념이 확연히 차이 나는 거예요. ‘뭐지? 우리는 뭐야?’

세상 사람들이야 철딱서니 없이 뭣도 모르고 그냥 살아있으니까 살아 있는 것으로 여기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체험한 것은, 우리를 소멸시키는 하나님 앞에서도 하나님의 불 속으로 들어갔는데 살아있는 모세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그 불을 받고서도 살아있으면서 “아, 우리는 정말 하나님의 불로 나온 음성을 온몸으로 체험했다.”라는 고백을 내뿜으면서 살아있다는 것, 이게 우리 이스라엘의 특이한 점이 아니고 뭐냔 말이죠.

실제로 신명기 4장 24절에도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인데 그 불이 나오는 성격, 취지, 그 이유가 뭐냐? 하나님은 대단히 분노하고 질투심으로 너희를 향하여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불로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불로서 자기를 드러내는 그 근거는 창세기 3장 24절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따먹지 말라고 한 것을 인간이 따먹었거든요? 인간은 도둑놈이죠. 하나님이 “이건 가져가면 안 돼. 따먹으면 안 돼.” 루브르 박물관의 보석을 도둑이 훔쳐간 것처럼 “이것을 훔쳐 가면 도둑놈이야.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 끝까지 따라갈 거야.”라고 한 그것을, 악마의 꾐에 빠져 선악과 지식을 따먹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너 그거 따먹었어? 너 이제 끝났어. 너희에게 이제 생명은 없는 거야.” 생명이 없다고 하면서 생명나무에서 추방시켰습니다. 이제 인간은 생명나무와 관련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추방되고 난 뒤에 막상 살아보니까 선악을 아는 지식보다 더 실질적이고 실속이 있는 것은 생명이라는 것을 쫓겨나고 난 뒤에 알게 되지 않겠습니까?

똑똑한 게 무슨 소용 있어요? 서울 대학 가는 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생명이 없는데, 영생이 없는데요. 그래서 그들은 영생을 얻기 위해서 다시 들어온단 말이죠. 들어오니까 창세기 3장 24절에서 천사들이 수비대로 포진합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천사)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화염검도 천사에요.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하나님이 일하시는 목적은 딱 하나에요. 생명나무를 지키는 것. “너희들은 생명을 얻으면 안 돼.” 이게 하나님 일의 목적입니다. “네가 생명이 없는 맛을 영원토록 맛봐야 해. 영원토록 내 저주가 얼마나 혹독한지를 경험해야 해.”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이미 확정 지었습니다.

그러고 난 뒤에 확정 지어진 그 사실, 이 창세기 내용이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특별하게 불속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전달했습니다. 불 속에서 나온 것이 바로 율법인데요. 창세기의 천지창조 이야기와 모든 게 모세의 율법으로서 들어가 있습니다.

그 내용이 들어가 있으면서 주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하나님의 말씀을 담았죠.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 입장에서는 무슨 이런 팔자가 다 있습니까? 살 수도 없는데 생명도 없으면서 ‘인간은 왜 생명이 없고, 영원한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지?’ 그 내력을 품고 살아가는 민족, 그게 이스라엘입니다.

그거 안다고 해서 영생 얻는 건 아닙니다. 단지 다른 민족이 모르는 내막, 하나님이 일하시는 그 내막을 유일하게 알고, 그 아는 대로 운명 지어지고 그렇게 역사가 이어져야만 하는 민족 이게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오늘 본문 히브리서 12장 18절에 “너희의 이른 곳은 만질만한 불 붙는 산과 흑운과 흑암과 폭풍과”, 그리고 19절에 “나팔 소리” 그런데 ‘그때의 그 나팔 소리가 아니라 이제는 더 확실한, 모호한 음성이 아니고 더 확실한 음성으로 너희에게 찾아왔다’라고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그 찾아온 내용은 이겁니다. ‘인간 세계는 이미 그 바닥이 불로 깔려 있다.’ 시내산에서 화산이 터져 용암이 저 아래쪽 마을까지 흘러넘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드러냈던 불의 죽음의 말씀이 이스라엘을 경유해서 온 세상 바닥에 이미 다 깔린 거예요. 지금 히브리서에서 다 깔려 있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바닥이 불로 되어 있다는 것을 투명하게 바라보는 유람선에 탄 입장에 속합니다. 불로 바닥을 보여주기 위해서 옛날에 이스라엘을 택했다면, 오늘날 성도를 통해서 인간이 사는 세상 그 바닥 자체가 불로 형성되어 있고 깔려 있다는 것을 우리를 사용해서 알려주죠.

그렇게 되면 우리 인간에게 있어 더 이상 비밀은 없습니다. 개인적인 비밀, 공적인 비밀 어떤 비밀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다 불 속에 들어가는 판이기 때문에. 그게 마지막 남은 유일한 비밀이지 그 비밀 앞에 인간적인 소소한 비밀은 비밀도 아니에요.

마을의 노인정, 국가, 그다음에 교회, 주식, 유치원, 코스트코, 놀이동산, 군대, 학교, 방송국, 비트코인, 금, 해, 달, 별까지 전부 다 불 속에 들어갑니다. 우리 아파트 단지까지 다 들어가요. 불에 녹아버립니다. 이것을 이스라엘을 통해 보여주기 위해서 다니엘 세 친구는 불 속에 들어갑니다.

다니엘 세 친구가 불 속에 들어간 이유는, 이미 불의 내용을 담고 있는 이스라엘을 뭣도 모르고 바빌론 나라가 덥석 물어버렸어요. 그들이 삼킨 민족 속에 하나님의 불덩어리가 들어 있다는 것을 바빌론 제국은 미처 몰랐어요. 먹으면 먹히는 줄 알고 있단 말이죠.

그런데 다니엘 3장 20-24절에 보면 분명히 자신들이 이겼다고 생각해서 자기 마음대로 다루는 불 속에서 ‘바빌론 제국에 인간이 알고 있는 현실 그게 전부가 아니라 그 안에 비밀이 있고 그 비밀은 바닥인데 그 바닥이 불로 깔려 있다’라는 사실을 다니엘 세 친구를 통해서 알려줍니다.

쉽게 말하면 이래요. 이슬람 사람들이, 무슬림들이 제일 싫어하는 우리나라 임금이 누구냐하면 세종대왕이에요. 무슬림이 세종대왕을 왜 싫어하느냐? 그 당시 우리나라에 와 있던 무슬림들의 복장과 금요일마다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것을 “이것은 전부 오랑캐 족의 풍습이다. 용납할 수 없다.”라고 해서 세종대왕이 전부 말살했어요.

그게 왕이에요. 왕은 그렇게 하는 거예요. 바빌론 제국의 느부갓네살이 “유대교? 여호와? 흥!”하고 전부 말살시켰습니다. 종교? 못하게 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잡혀 온 그 똑똑한 사람들, 요새 말로 다들 공무원들이지만 종교 생활을 못 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종교를 걷어내니까 그 안에 뭐가 들어 있었느냐? 다니엘 세 친구처럼 인간의 세상 바닥이 불로 깔려 있다는 것, 불 위에서 인간 세계의 역사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다니엘 세 친구를 통해 비로소 그들은 알게 된 겁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깜짝 놀랐죠. 느부갓네살 왕은, 인류가 끝나는 모든 제국의 시발점이에요. 느부갓네살이 신상을 만들었는데 바벨론, 바사, 헬라/마케도니아, 로마 나라 이렇게 네 개로 지층화 되어 있는 세계 역사의 시작점이 바빌론이에요. 느부갓네살이 신상을 만들었는데 신상은 둘 셋이 아니고 딱 하나로 시작해서 하나로 끝나버립니다.

그 신상의 끝,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하여 이 땅에서 완전히 가루가 되고 무너지게 되어 있어요. 모든 것은 무너지지만 이스라엘의 다니엘 세 친구가 보여주는 하나님의 말씀의 내막은 끝까지 갑니다. 끝까지 계속 가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망하고 난 뒤에 그 불에 대해서 언급된 그 내용을 예수님께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에 대해서 누가복음 12장 49절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가 오신 목적을 밝히고 있습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내가 땅에 불을 던지러 왔다. 불붙이러 왔다는 거예요. 지금 내가 불 붙이는 작업을 개시를 했는데 아직 멀었다, 계속해서 내가 끝까지 몽땅 다 불 싸질러버리겠다는 거예요. 주님께서 이렇게 이 세상에 불을 싸지르기 위해서…, 그러니까 싸지른다는 말은 시내산 그 현장을 전 세상으로 확산시키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유일한 곳인 불 가운데서 만났는데 주께서는 말씀을 주셨고 그 말씀이 이 땅에 전해지며 이 땅은 점점 불바다가 되어 간다, 이 말이죠. 주님께서는 모든 세계에 말씀이 있는 곳을 시내산 현장으로 만들겠다는 경우가 히브리서 12장이거든요. 우리가 그 본문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불을 던지러 왔다는 자신의 사명은 이미 하나님께서 모세에게도 언급을 하셨어요. 출애굽기 3장 2-5절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 만나는 그 접점,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때 어떻게 만나는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 가운데서 만났습니다. 그게 떨기나무 이야기에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불로 나타나면 인간은 타죽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두루 도는 화염검 때문에 정녕 죽으리라, 한 대상은 불 가운데서 완전히 죽어버려요. 그렇게 죽이는데도 불구하고, 상대가 죽는 것을 알면서도 주님이 찾아왔다는 것은 하나님의 완전한 불과 그리고 생명 사이의 중간 형태를 취하기 위해 그렇습니다.

그 중간 형태가 뭐냐? 숯이에요, 숯! 하나님께선 모세를 숯불로 만들어요. 여기서 숯과 재의 차이를 알아야 됩니다. 재는 완전 연소가 되어서 재에는 불을 붙여도 불이 안 붙어요. 그런데 숯은 의도적으로 타다 말았어요. 참나무 같은 것으로 숯을 제조하는데 그 숯이 타다 말았다는 말은, 불을 숯 안에 집어넣는 방식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숯이 돼요.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있는 것은, 하나님의 불이 만드시는 숯이 되는데 그 숯이 되는 존재는 어디에 가도 주께서 다루시고, 그래서 그들이 말씀을 전하면 그 안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나님이 집어넣은 불이 나오는 그러한 기능을 갖고 있어요.

떨기나무가 있는데 이상하게 불이 붙었는데도 타지 않았어요. 연소가 되지 않았어요. 모세도 어리둥절해서 “뭐지?” 이렇게 할 때 하나님의 뜻은 이겁니다. “야, 모세야! 뭐가 보이느냐?” “떨기나무입니다.” “네가 앞으로 떨기나무 해, 네가 해. 신발 벗어라.”

신발을 벗는다는 것, “그 자리는 거룩한 자리이니 신발을 벗어라.” 네가 딛는 자리를 이제는 네가 결정 하지 못하고 주님이 결정하는 거예요. 주님이 자리를 결정해버리고 그 결정에서 주님이 집어넣은 불, ‘숯불 되기’를 드러내는 자리로서 이제 모세는 다뤄집니다.

이 숯불 이야기가 의외로 구약 성경에 상당히 많이 나와요. 많이 나오는데 추려서 내용을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불로서 내려온다는 것, 불로서 내려와서 그동안 깔아놓은 말씀대로 그대로 실행에 옮긴다는 거예요. 이건 세례 요한도 마찬가지예요. 세례 요한도 숯이에요. 세례 요한이 말씀을 전하면 그 말씀이 현실이 되고요, 그 현실에서 두 가지의 결과를 보여줍니다.

마태복음 3장에서, 세례 요한이 세례를 그냥 주는 게 아니에요. 세례를 하기 전에 먼저 세례를 줘야 될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데 회개하라고 해놓고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 3:11-12).

내가 하는 말은 곧 불인데, 그 불의 기능은 ‘불에 태워질 쭉정이가 어떤 인간이고 어떤 인간이 불에서 튀어나오는, 불에서부터 건져내는 알곡이 되겠느냐?’는 그 지점에서 나는 너희에게 말씀을 전한다는 거예요. 그리고 물세례를 행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물세례보다 마지막 최종의 세례는 성령 세례라는 거예요.

그런 입장에서 예수님도 이 땅에 불을 지르러 왔죠. 그래서 불로서 말씀을 주신 하나님의 그다음 절차가 뭐냐? 숯이 되고 숯이 되면 마지막에 남는 것이 불과 성령으로 나눠집니다. 불부터 시작해서 숯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선지자는 숯이에요. 재가 아닙니다. 그 나머지는 재에요. 재는 더 탈 것도 없어요. 그냥 아무것도 없어요. 재는 불이 안 붙어요.

불이 붙는 상태에 불과 말씀이 같이 공유되어 있는 사람이 바로 구약의 선지자들이고 오늘날 성도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여도 괜찮아요. 그런데 말씀을 준 이상은 이제는 불을 함유하는 숯이 되어야 합니다.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성도는 이 세상의 바닥을 보여주기 위한 사명이 있는 사람이다.’

그러면 바닥을 왜 봐야 하는가? 더 이상 이 세상에는 비밀은 없다는 거예요. 역사가 어떻게 흘러가도 그것은 비밀이 아니에요. 비밀은 히브리서 12장에서 끝났어요. 히브리서 12장 29절에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끝! 그러니까 이미 끝난 거예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된 겁니다.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에요.

이 불은 창세기에서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을 때부터 이미 하나님께서는 딱 노리고 ‘한번 두고 봐.’ 하는 다짐을 가지고 주께서 일관되게 끝까지 밀어붙인 거예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다. 자, 예수님께서 불을 지피러 왔잖아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하실 일은 뭐냐? 예수님 자신이 숯의 원형이니까 나처럼 이렇게 불과 말씀이 같이 있으면서 그 기능을 다 할 수 있는 숯 같은 사람, 성도죠, 숯 같은 사람을 만드는 작업을 해내십니다.

그걸 해내시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초청장을 우리에게 보내죠. 보내면 사람들은 네 가지 타입이 있어요. 첫번째는, “예. 주님 앞에 가겠습니다.” ‘갈게.’가 있어요. 두 번째는, “나 안 갈래. 난 소 키워야 하고 장가 가야 하고, 밭도 샀기에 나는 안 갈래.”

세 번째는, 초청받은 적이 없는 타입, 한 번도 주님으로부터 오라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는 것. 1번, 2번, 3번은 다 소용없어요. 네 번째가 중요합니다. 모세처럼 갔다가 다시 오는 것, 갔다가 다시 오는 거예요. 만약 우리가 주님 초청을 받았다, ‘가겠습니다.’ 그래서 “주님! 여기 왔습니다.”

안 돼요. 이거 안 됩니다. 이건 숯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도 아니에요. 갔다가 다시 와야 돼요. 오늘 본문이 모세 이야기 아닙니까? 모세가 시내산 위로 올라간 이야기, 모세가 올라갈 때는 ‘내가 여기 있다.’ 이렇게 존재로 올라갔다가 내려올 때는 존재의 흔적으로 내려와요.

아, 나는 이미 죽었는데 다시 주님의 필요에 따라 내가 살던 데로 다시 오는 거예요. 이때 내 존재라는 것은 이제 없습니다. 나를 위한 나는 없습니다. 이제부터 ‘자기 생각 안 하기’입니다. 이 사실을 요한복음 5장 39절에서도 이미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줬어요.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모든 성경은‘내게 대해서 증거’하는 거예요. 예수님은 너에 대해서 증거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존재가 없어요. 나에 대해서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자신에 대해서 증거하는 거예요. 십자가는 십자가만을 증거해요. 우리 좋으라고 십자가를 증거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주님 좋으라고 증거하는 것이지 우리 좋으라고 증거하는 복음은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부채표가 없는 건 활명수가 아니에요. 그건 유사품입니다. 나를 위한 복음은 유사품이에요. 그런 복음은 없어요. 이 세상은 오직 예수님만, 그 예수님 나만 있다는 것, 예수님 자기의 세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그럼 너는 뭐야?” 나는 그 세계에 있다가 다시 온 흔적이죠. 예수님만의 세계인 것의 흔적인 거예요. 왜냐하면 주님만이 하나님의 저주와 분노를 유일하게 돌파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게 십자가입니다.

따라서 이제 모든 것은 옛날로 돌이킬 수가 없어요. 이미 십자가 사건이 끝났어요. 나에 대해서 증거하는 것이다. 모든 걸 다 이루었다. 이거거든요. 자, 예를 들어 봅시다. 마지막 심판하는 장소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적으로 면접하는 면접장이라고 봅시다.

“32번! 들어오세요.” “들어왔어요.” “문 닫고!” “예. 문 닫았습니다.” 이제 면접관이 묻습니다. “나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할 때 면접관이 “그 말씀을 네가 지켰느냐?” 주님이 묻는 거예요. 아무 소리 못 하죠. 여러분 배구는 세 번 만에 넘기게 되어 있어요. 태어났다, 죄 졌다, 죽었다. 이게 우리 인생에 주께서 주신 운명이고 비밀이에요.

탁! 탁! 탁! 세 번에 네트 너머로 공을 넘기듯이 태어나서 죄 짓고 죽음으로 넘어가야 됩니다. 면접관이 묻습니다. “너 성경 지켰어, 안 지켰어?” 못 지키죠. 주께서 말합니다. “모든 것은 나에 대해 증거하는 것이다.” 이것은 요한복음 5장 39절이고요, 그리고 요한복음 19장 30절 “다 이루었다.”

그리고 면접관이 “문을 한 번 열어봐라.” 문을 열어보니 “어때? 면접장 말고 바깥이 어때?” “전부다 엉망진창입니다.” “그렇지? 네가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 앞 이 자리에서 다시 ‘세상 인간들이 어떤 사고방식으로 돌아가는지를 세상의 매스컴, 방송국의 뉴스에서, 이 면접장 바깥에서 떠드는 소음의 소리를 한 번 들어봐라.”

뭐 무슨 비밀이 있다고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에요. “저게 바로 저주야. 그리고 네가 있는 자리가 바로 천국이고 영원한 복락이야.” 오늘 본문에서 왜 시내산 불붙는 이야기를 합니까? 이미 사도는 세상 전체의 비밀을 다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약에 면접관 만나고 난 뒤에 다시 그 면접관 만난 이야기를 여러분의 가정에서 한다면 부부간에 이런 대화가 될 수 있겠습니다. “당신은 나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내가 저주 대상인 것을 왜 혼자만 알고 있습니까?” 그리고 옆에 또 자식도 있죠. “아버지는 내가 처음부터 지옥 가는 것을 왜 그냥 보고 있습니까? 너무합니다! 아버지는 내가 지옥 간다는 것을 왜 이야기 해주지 않았습니까? 아버지는 너무 이기주의야. 하나님의 비밀을 혼자서만 알고 남은 몰라도 된다는 거예요? 그게 지금 자식 사랑이에요, 아버지?”

그러면 부모가 뭐라고 이야기해요? 비겁한 변명을 합니다. “사실은 나도 잘 몰라. 내 인생 행복 챙긴다고 급급했어. 내 인생 행복에 급했을 뿐 세상 비밀이 어떻게 돌아가고, 어떤 식으로 하나님께서 일하는지 난 몰랐어.”

여러분 가정의 자식이나 부부 사이에 방금 제가 언급한 이 대화만 주고받아도 여러분, 구원 받은 가정입니다. 이 대화조차 나오질 않아요. 왜냐? 세상이 소음으로 너무 시끄러워요. 과학? 불 속에 들어갑니다. 철학? 그거 불 속에 다 집어넣어야 해요. 신학이요? 그거 불 속에 다 들어가는 거예요. 생명도 아닌 거, 신학 해서 뭐하는데요? 그거 해서 목사질이나 할까요? 그게 뭔데요? 그게 생명입니까?

예수님께서 얼마나 답답하셨는지요, 마태복음 19장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23-24절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주님께서 무슨 취지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막혀있다는 거예요. 막혀있어요. 갈 수가 없어요! 인간 구원은 없어요. 인간에게 천국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들 동네가 너무 시끄러워서요. 마귀가 하는 이야기가 너무 시끄러운 거예요. 세상에 신앙이라는 건 사기입니다. 사기죠! 내가 존재한다는 자체가 사기꾼으로 태어난 거예요. 사기꾼으로 태어난 인간이 구원받기 위해서 신앙을 갖는다? 그 신앙은 사기가 아닙니까? 사기거든요.

주님의 방식을 한번 들어보세요. 주님의 방식은,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은 입장에서도 아버지한테 버림받았어요. 왜? 저주받았기 때문에. 갈라디아서 3장에 나와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저주받은 관계에요. 주께서 겟세마네에서 아주 탄식을 했어요.

“저주 안 받는 방법으로 아버지께 도로 돌아가는 방법이 없겠습니까?” 이게 거절당해요. 주님께서 그러한 탄식을 요한복음 11장에도 솔직하게 그대로 고백을 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너무 답답해서 우셨어요. 요한복음 11장 33-35절에,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너무 가슴 아프게)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예수께서 눈물 흘리는 이유가요, 인간이라는 것이 없잖아요. 인간에 ‘나’가 없어요. ‘나’가 없으면 인간은 자리도 없어요. 자리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새롭게 배정을 해줘야 그때 영생의 자리가 확립되는 거예요. 인간은 자리 자체도 가질 권한이 없습니다.

인간의 자리는 재에요. 죽음의 자리인데 무슨 자리가 있어요? 죽은 자를 위한 자리가 어디 있어요? 인간의 육신이요? 인간의 육신은 인정받지 못 해요. 왜냐하면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된 그 육신만이 의미 있는 육신이에요. 말씀이 들어있는 육신, 그건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이 탄식하며 우셨어요. 주제 파악도 못 하는 인간들. “나사로야 나오너라.”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죽은 나사로에게 자리를 새로 배정해 줄 때 나사로는 영생에 속한 사람이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의 저주를 유일하게 통과했던 그 능력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새로운 영생의 자리를 우리에게 마련해줬기 때문에 그래요.

그 과정에서 주님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인간이 막혀있는 곳을 어떻게 뚫어서 갈 수 있는지?’를 설명해 주는데 여기 등장인물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가 강도에요. 강도는 이미 십자가 달린 상태의 강도입니다. 강도짓을 해서 그 죄목으로 십자가 달린 채로 강도가 주님께서 배정한 그 자리에서 주님과 대화를 시도합니다.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께서 “네가 오늘밤에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이게 면접장이에요. 문 닫은 면접장 안에서 모든 말씀은 주께 속했으니까, 주께 속한 말씀으로 다시 면접하고 있는 그에게 미리 알려주는 거예요. 자기의 천국 백성이기 때문에 알려주는 거예요.

이게 초청하는 거예요. 그러고 난 뒤에 강도의 자리에 오기까지 향수 뿌리는 여인이 나옵니다. 울면서 자기의 모든 재산을 전부 주님 발 앞에 다 던지면서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하고 가슴 치는 여자, 그 여자를 보고 주께서는 “쟤는 사랑을 너무 많이 받았어”(눅 7:47). 사랑이라는 자리를 배정해 줬다는 그 결과로 “내가 살아온 자리는 죄인의 자리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거예요.

세 번째, 백부장이 나와요. 백부장은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마 8:9). 이것이 예수님의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나오는 대로 주께서 어떻게 막혀있는…, 도저히 천국 문은 바늘구멍처럼 막혀있어서 들어가지를 못 하잖아요.

‘막혀있음’ 그런데 어떤 식으로 자기 백성을 통과시키느냐의 그 절차, 알고리즘을 보여주는 거예요. ‘십자가 알고리즘’ 십자가에서 나오는 연속적인 동영상처럼 가지가지로 뻗어 막 튀어나오는 거예요. 이게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모든 것이 십자가로 깔려있는 겁니다.

네 번째가 뭐냐 하면, 사도 바울이에요. 여러분들이 혹시 양궁 경기하는 거 보셨습니까? 그거 보면서 저는 이걸 한 번 생각해 봤어요. 여자 선수가 활을 쏘는데 그때 그 경기장이 공간적으로 개방돼 있잖아요. 활을 쏠 때 마침 우연히 참새가 쭉 날아가고 있습니다.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나서 공중에 날고 참새는 뭣도 모르고 나풀나풀 날아가고 있습니다.

참새가 표적의 엑스트라 텐, 정중앙을 막 지나갈 때 날아온 화살과 수직으로 만나 그대로 참새와 함께 꽂혀버린다면 그 표적에 뭐가 남아 있느냐? 화살에 꽂힌 참새는 꼼짝도 못 하고 과녁에 박혀 있겠죠. 그게 갈라디아서 2장 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고 나를 꽂아놓은 십자가가 나를 꽂은 채 살아 있느니라. 그게 바로 네 번째입니다. 이게 사도 바울이에요. 존재가 십자가에 박히고 그 존재의 그림자는 노을에 따라서 그 그림자가 길어졌다가 짧아졌다가, 우리는 십자가에 박힌 주님의 존재를 말씀을 통해서 남은 생애로 보여주는 거예요.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어떤 사람은 ‘그렇게 십자가의 화살에 박혀버리면 나만 손해가 아니냐?’ 뭐 이렇게 구시렁거리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그러나 마태복음 16장 24절에 보면 주님께서 분명히 제자들에게 이와 같이 이야기했어요.

“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그다음에 자기 십자가를 지고, 세 번째는 나를 쫒아오너라. 이것은 어느 누구도 못해요. 못하니까 주님께서 화살처럼 십자가로 박아버리는 거예요. 박아버리면 주께서 우리한테 이제 이야기 설명해 주는 거예요.

“마태복음 16장 24절에서 분명히 이렇게 된다고 했지? 너 못했지? 나 되잖아. 내가 말씀으로 너를 이렇게 만들어줬잖아.”라고 말씀 안에서 그 성도가 주님을 같이 만나는 거예요. 만나면 어떻게 되는가? 마지막 다섯 번째, 요한계시록 11장 8-9절, “저희 시체가 큰 성길이 있으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 하고 애굽이라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으신 곳이라.”

이게 무슨 말이냐? 두 증인은 예수님의 두 감람나무를 이야기하거든요.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의 증인 두 감람나무 있고, 그 두 감람나무를 주님께서 어떻게 이 시대에, 끝장난 이 시대에 어떻게 활용하느냐?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 진 그 십자가의 현장을 애굽이라는 배경을 깔고 그 십자가-십자가-십자가…, 를 재현하는 그 기능에 우리를 집어넣는 거예요.

바깥에는 애굽이 되고요. 시끄러운 이 세상 모두가 애굽이에요. 그리고 소돔이 되고요. 제가 어느 강의 때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이 세상은 소돔에서 고모라로, 다시 고모라에서 소돔까지…, 보니 그 동네가 맨 그 동네에요.

여기 있다가 미국 이민 가고, 아니면 캐나다 가고, 캐나다 갔다가 다시 호주 가든지, 아님 태국에 가든지요. 그런데 캄보디아는 가지 마세요. 그런 데 가지 마세요. 괜히 신경 쓰이니까. 어디에 가든지 그거는 소돔에서 고모라, 고모라에서 소돔, 그 나물에 그 밥이에요, 그 나물에 그 밥!

중요한 것은 그 동네가 애굽이고 또 소돔과 고모라가 되는 이유는 어떤 경우냐 하면, 십자가에 참새처럼 박힌 자의 안목에서만 그게 보이는 거예요, 그게! 이런 모든 사실, 방금 죽 이야기한 이런 모든 사실이 고린도후서 3장으로 사도 바울이 정리를 해 놨어요.

고린도후서 3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이야기를 합니다. 제가 정리해 보면 “시내산이 무섭지?” “응, 무서워.” 무서운데 고린도후서 3장에서 정립한 것은, 시내산은 무서운데 거기에 들어갔다가 내려오니까 여기서는 뭐냐? 그 무서움이 자유로 바뀌었어요, 자유함, freedom, 자유로 바뀌었어요.

그 이야기가 고린도후서 3장에 나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궁금하죠. 그 무서운 주님을 만났는데 왜 이 세상에서는 자유가 되지? 고린도후서 3장 3절에 보면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오직 영으로 쓴 것이다. 이게 성령을 언급하고 있는 거예요. 성령에 속한 사람은 그 내가 죽었다는 자체가 그렇게 가볍고, 즐겁고 그 불이 자유롭다는 거예요. 왜? 더 이상 내가 신경 써서 간직해야 할 비밀은 없으니까요. 비밀에 푹 잠겨져서 나와서 비밀로 코팅된 탕후루, 뭐 이런 거? 비밀로 코팅이 된…, 소스가 비밀이에요, 소스가 비밀이라고요. 우리 성도 인생 전체가 비밀로 푹 젖어서 덮여 버렸어요. 불로써 불 처리 돼 있으니까요, 성령으로 처리됐으니까.

사람들은 모세가 화산속에 들어가서 죽은 줄로만 알았어요. 왜 분명히 화산이었으니까, 불 속이니까. 불 속에 들어간 인간이 살아나왔다는 증언 없었어요. 그런데 모세가 멀쩡하게 40일 만에 살아나왔거든요, 40일 만입니다.

그 내력에 대해서 고린도후서 3장에서는 성령으로 설명합니다. 성령으로 설명하는데 그 설명 설명을 드리기 전에 먼저 한 구절을 보고 설명 이어가겠습니다. 그게 로마서 8장 26절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성령이 우리에게 찾아올 때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친히 간구한다는 겁니다. 탄식은 뭐냐? 일종의 절규 같은 거예요. “아이고 답답해라, 아이고 답답해라. 생각하는 것을 영적으로 좀 못 해? 영적으로 생각이 그렇게 안 돼? 그 면접장 바깥은 전부 다 진짜 시끄러워! 말 같지도 않은 것들만 왔다 갔다 한다고!”

김건희가 어떻고, 뭐 기업이 어떻고, 우크라이나 전쟁…, 세상에는 주님의 탄식이 없어요. 주님의 아픔이, 아버지께 버림받은 저주받은 아픔이 그들 세계에 없습니다. 왜 이 세상의 신앙이 사기고 엉터리냐 하면, 악마 주님의 이 서러움, 주님의 서러움을 뺀 하나님을 외치고 있어요.

“아이고, 인간아, 인간아! 상담같은 소리하고 있네. 네가 상담받을 잽이 되냐?” 죽으면 되지 죄인이 무슨 상담을 받아요? 바닥이 불바다인데 불바다 속에서 무슨 상담이 있습니까? 불로 깔려 있다는 그 비밀만 증가하면 되지 ‘내 인생은 왜 이렇게 불행합니까? 내 인생은 왜 이렇게 이렇게 불쌍합니까?’

오빠가 죽은 걸 보고 울고 있는 마리아 마르다, 그걸 보고 주께서는 서러워서 우신다니까요. 그게 울 일도 아니다 그 말이죠. 그게 울 일입니까, 오빠 죽은 게? 아, 울 일은 맞구나. 인간적으로 봐서 울 일은 맞아요.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그건 울 일이 아니라고요.

말씀은 우리를 찔러 쪼갠다 하잖아요. 성령이 임했다 하는 것은 주님의 그 절규가 우리 속에 세미한 떨림으로, 떨림으로 우리에게 전달되었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죽으실 때 성령의 떨림이 예수님께 옴으로써 예수님은 ‘내 영혼을 받아주옵소서’가 가능했던 거예요. 성령 때문에! 말씀이 오게 되면 절규적이죠.

가슴을 데인 것 처럼 눈물에 베인 것 처럼
지워지지 않는 상처들이 괴롭다

임재범이 부른 <낙인>이라는 노래의 가사입니다.

내가 사는 것인지 세상이 나를 버린 건지
하루가 일 년처럼 길구나
그 언제나 아침이 올까

이 노래는 주로 이제 게걸스럽게 음식 먹을 때 배경음으로 나와요. 가슴을 데인 것처럼 눈물에 배인 것처럼 주께서는 주님의 이 상처를 가지고, 상처를 가지고 우리를 베어버림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자유케 해요. 육적으로 매여 있는 우리를 영적으로 전환시킨다는 그 말이에요.

그 방법이 뭐냐? 모세가 내려오는데 모세가 영적으로 경험한 그 세계와, 면접장 옆에 있는 그 육적인, 더러운 악마가 통솔하고 있는, 악마의 하수인이 경영하고 있는 그것을 볼 때 너무나, 너~무나 차이 나는 거예요. 시답지 않은 거 가지고 고민하고 걱정하고 불안하고 두려워하는 거, 그냥 공 한 번, 두 번, 세 번! 그렇게 공 넘기면 되잖아요, 배구 게임에서!

안 넘기고 자기를 자기가 쥐고 있어요. 넘겨주면 되는데! 자기 것도 아닌 게 반납을 못해요. 모세가 말씀을 전해야 하는데 불에서 나온 말씀이 감당이 안 되잖아요. 모세가 하는 것은 뭐냐? 수건으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립니다. 그게 신광타월인지 무슨 타월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려요.

“내 얼굴 보이냐, 안 보이냐?” “너무 무섭습니다!” 이제는 수건으로 얼굴을 딱 가렸습니다. “내 얼굴 보이나, 안 보이나?” “제는 살 만합니다.” “살 만하지? 이제 말씀 전한다.” 하고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말씀 전해서, 그 불 가운데서 나온 말씀을 듣고도 말씀 듣는 백성들이 모세 앞에서 안 죽고 살아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수건으로 우리를 가려서 예수님의 성령께서 우리에게 전하니까, 비로소 말씀은 말씀대로 숯불로서 우리 안에 들어오고, 우리는 이 땅에서 이미 화살에 박힌 참새처럼 더 이상 나에게 메이지 않는 사람으로서 다시 이 세상을 방문해서 남은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주께서 그렇게 해 주시고 계시는 겁니다.

이게 영적 사람이에요. 성령을 주실 때 주께서 “Are you ready?(준비됐어?) 자, 저주 갑니다! 불가마 들어갑니다!” 이게 오늘 본문이거든요. 오늘 본문에서 시내산 이야기할 때 “무섭고 무서운 거 들어갑니다!” 하는 거예요. “그 무서운 것을 이젠 감당할 수 있겠죠? 본인이 죽었으니까. 이제 말씀만 살아있습니다!” 하는 거예요.

끝으로 한 말씀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그냥 쉽게 사세요. 고민하지 말고 아~주 쉽게, 쉽게, 우리가 쉽게 갑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돌이킬 수 없는 상황, 이미 세상도, 인간도, 우주도 끝났다는 사실을 왜 우리가 진작 몰랐는지. 남아 있는 고민거리도 없고, 새로 생길 걱정거리도 없고, 주께서 쓰시는 대로 주님의 화살로써 쓰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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