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음행 보균자

아빠와 함께 2025. 11. 23. 17:13

음행 보균자  

2025년 11월 23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3:4

13:4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혼인제도도 하나님의 율법 안에 들어 있는 내용입니다. 율법은 인간의 죄를 추적하는 기능을 발산합니다. 인간 내부의 죄가 혼인 제도를 통해서 재규정됩니다. 즉 왜 인간은 죽어  마땅한가를 보여주는 현장이 혼인제도입니다. 인간들이 보는 혼인은 ‘행복 시작, 불행 끝’이해하려고 합니다. 

인간에게 있어 자기 행복보다 더 우선적인 가치는 없습니다. 자기 행복을 위하여 뭐라도 할 요량으로 삽니다. 그러나 정작 왜 자신이 행복해야 하느냐에 대해서 관심없습니다. 도리어 자기에게 행복하게 살 권한과 가치가 있다고 여깁니다. 즉 인간은 주제 파악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환상 속에서 태어나 환상과 더불어 살고 기존의 환상을 흉내내고 모방하다가 본인의 환상의 일부가 되어 죽게 됩니다. 이것이 인생 여정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오직 말씀, 곧 성경에만 나옵니다. 이 성경에는 진정한 혼인이 나옵니다. main(메인)급 혼인입니다. 반면에 인간들의 혼인제도는 sub(서브)에 해당됩니다. 부차적이지요. 보조적입니다.

자기 행복에 미쳐서 혼인을 생각하지 말고 성경에서 혼인을 어떻게 보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7:1-3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의 쓴 말에 대하여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여기서 보면 이미 인간은 ‘음행 바이러스 보균자’입니다. 즉 모든 인간은 이미 정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 비정상성은 악마로부터 주어진 겁니다. 악마에게 결속된 인간은 악마의 심성을 당해낼 재간이 없습니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창 6:1-3) 하늘의 천사에 의해서 인간들은 농락당하는 대상이요 노리개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은 곧 심판입니다. 전멸이었습니다. 이는 인간들에게는 그 어떤 것도 하늘나라에서 받을 만한 것이 나오지 않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뜻입니다. 고린도전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은 ‘할 수만 있다면 혼인하지 말고 홀로 살아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성도라면 온전히 주님만을 섬길 수 있는 마음 자세가 그러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점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고자’ 즉 성기능불구자에 대해서 언급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제자들이 가로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 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마 19:9-12)

즉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육을 가지고 천국 백성을 만들고자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천국 백성의 재료가 죄인입니다. 그런데 죄인되려면 말씀의 추적기능이 닿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주어지므로서 인간에게는 그 어떤 행복이나 지킬 가치가 없음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사람들이 혼인을 하든지 아니하 혼인을 하지 않든지 간에 어떤 식으로도 자신의 가치와 자존심을 지킬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마귀는 평소에 늘 인간에게 다음과 같이 속삭여 왔습니다. “차분하게 너의 자리를 찾아 지켜라”고 말압니다.

말씀과 더불어 계속 달리지 않으면 악마가 보낸 귀신들이 그 사람을 못살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에서 자아가 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게 삶의 고통이요 지옥입니다. 하짐반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가나 혼인 잔치의 핵심은 결혼식을 축복하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셀프self 축복이었습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하여 주님 자신을 영광스럽게 하신 겁니다. (요 2:11)

예수님의 말씀으로 성도는 늘 자신의 한계를 알아야 합니다. 또 알아야 할 것은 시공간의 한계도 알아야 합니다. 율법의 안식일은 숫자를 1,2,3,4,5,6,7에서 멈추게 합니다. 즉 인간은 주어진 모든 것이 주님께서 친히 마련하신 것을 알고 자신의 노동이 멈추고 주님께 감사하는 날을 따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들 내부에 자리잡은 ‘무한’의 개념은 7이라는 숫자에게 멈춥니다. 혼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식의 번성과 자기 가문의 연속을 기대하는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새로운 메인main이 되는 혼인제도를 소개합니다. 그것이 바로 ‘자식이 없는 혼인’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가정에 ‘자식이 없다’는 것은 부모에게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육적 부모의 한계를 보여주는 하나님의 개입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자식이 낳게 한 여인이 있지만(하갈) 그 여인은 정식 혼인 관계에서 탈락입니다. 자식이 있다는 바가 도리어 혼인의 주 의미에서 배제되게 합니다.
창세기 18:1-2에서 세 사람이 찾아옵니다. 하지만 여호와 한 분을 대동한 두명의 수행천사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한 ‘2’의 숫자 뒤에 인간이 나설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두 사람이 한 사람이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한 혼인생활을 해야 될 자는 하나님의 성령이 임한 사람에게만 국한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요 3:5-7)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이나 모두 하나님의 약속이 개입되어 새로운 자손이 낳습니다.

삼손의 부모 가정인 마노아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삿 13:2-4) 드디어 이사야 7:14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혼인도 하지도 않고 태어난 자식으로 인하여 죄인과 그리스도와 더불어 본래적인 혼인이 들어섰습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는 자가 아니라 일찍 자신을 심판해주신 그 심판주와 더불어 혼인에 들어간 겁니다.(계 21:2)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보내신 슬기로운 아내로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94강-히브리서 13장 4절(음행 보균자) 251123-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13장 4절입니다.

히브리서 13:4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결혼했는데 그 결혼의 귀한 요소를 알지 못하고 음행하고 간음하는 자들은, 그 이유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결혼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 가정에서 행복을 찾지 못하니까 바깥쪽에서 행복을 얻고자 하는 거예요. ‘자기의 가정보다 자기의 행복이 더 고귀하다. 가정은 나의 행복보다 상대적으로 고귀하지 않고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는 그 자체가 바로 엉뚱한 데 마음을 두고 있다. 자기중심적으로 세상을 보는 그 태도가 바로 죄가 된다는 것’ 그 사실을 들추어내는 수단으로써 혼인이라는 게 있습니다. 예수님께 계시를 받은 사도 바울도 같은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7장 1-3절에 보면 “너희의 쓴 말에 대하여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찌라.” 이렇게 돼 있어요.

혼인 제도라는 것은 무엇인가? 혼인 제도라는 것은 모든 인간을 ‘음행 바이러스 보균자’로 보는 겁니다. 이 보균자, 음행의 보균자를 최대한도로 주저앉히는 방법중 하나로, 혼인 제도를 통해서 음행을 남발하지 않도록 붙잡아두는 역할을 한다는 겁니다.

이 말이 굉장히 이게 좀 이게 난해한 말인데요. 인간이 음행하지 않더라도 이미 음행의 잠복적인 요소가 들어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혼인을 안 하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혼인을 안 하게 되면 결혼을 안 했으니 자동적으로 음행이 성립되지 않으니까 ‘음행하지 말라’는 말씀에 대해서 준수하고 그걸 지켜낸 사람이 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는데 그건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고린도전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혼인하지 않는 이유는 분명해야 된다’는 그게 뭐냐? 주를 위해서 살 때만 혼인하지 않은 이유가 명백해지고, 그렇지 않으면 여전히 자기는 자기 행복을 최우선적으로 여겨서 살아가는, 곧 자신이 갖고 있던 그 음행이라는 죄악 된 바이러스를 그 자체로 긍정하고 정당화하는 식으로 유지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9장에서 바리새인과 대화하면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찌니라”(5절)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이야기를 듣고 유대인들이 “그 이혼 증서 써주면 되잖아. 모세가 이혼 증서 줘서 내보내라 했으니 이혼 증서를 써준 조건하에 이혼도 정당화되지 않습니까?” 이렇게 반박하지요.

예수님께서 8-9절에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이렇게 돼 있어요. 이 이야기를 딱 들을 때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은 거예요.

‘음행 바이러스의 보균자로서 인간은 결혼하나 이혼하나, 결혼을 아예 안 하나 모조리 음행이라는 죄에 평생 시달리게 돼 있구나.’ 하는 것을 그들은 감 잡았어요. 그래서 유대인들이 이렇게 합니다. “그렇게 혼인해서 이혼도 한 번 못 할 것 같으면 차라리 결혼 안 하는 게 낫지 않습니까?”(마 19:10)라는 질문을 한 거예요.

주님께서 그걸 유도한 거예요. 무슨 뜻이냐 하면, ‘결혼이든 하나님의 뜻이든 율법이든 간에 인간에게는 행복이 최우선적이지 행복하지 않은 하나님의 지시에 대해서는 우리가 별로 따를 생각이 없습니다’ 하는 노골적인 자기의 본성을 드러낸 거예요.

“제자들이 가로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찐대 장가 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 예수님께서 거기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찌니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만한 자는 받을찌어다”(마 19:11-12).

이렇게 이 ‘고자’ 이야기가 갑자기 여기서 튀어나와 버려요. 성불능자의 이야기라는 말이지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야 돼요. 성불능자는 음행이 없느냐? 결국 어디서 문제냐? 결혼을 주위로부터 권유받고 본인도 그런 생각이 있다면 그 사람은 ‘이 혼인이, 자기가 어떤 음행적 보균자라는 사실을 들추어내기 위해서, 죄를 들추어 내기 위한 하나님의 제도라는 것, 그래서 인간은 행복을 유지할 어떤 권한과 명분도 애초부터 인간에게 없다는 사실’을 발견해야 됩니다.

혼인하면 행복하다는 것은 미끼예요. 미끼에 말려든 겁니다. 결혼이라는 우연, ‘내가 결혼 안 할 때보다 결혼하게 되면 더 행복해질 것이다.’ 결혼 안 한 상태가 기본인데 결혼한다는 그 우연적 사실, 어떤 좋은 사람을 우연히 만나서 결혼했다는 사실, 그 우연은 결국은 필연으로 이어지게 돼 있어요.

‘네가 결혼함으로써 네가 갖고 있던 죄의 정욕과 욕망이 이제는 본격적으로 네 속에서 작동해서 너를 불행하게 만들 것이다.’ 혼인이라는 것은 이처럼 죽음의 실습장, 결혼은 행복을 빙자한 자기 죽음입니다. 그 이유가 뭐냐? 인간은 자기 주제도 모르면서 행복을 끌어당긴 거예요.

그래서 결혼한다는 것이 일종의 부차적(sub)인 제도라면 메인(main)은, 성경에서 다른 결혼이 있어요.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혼인 제도를 두어서 그 죄의 권원을 추적해 들어가거든요. 이렇게 추적당하는 것, 혼인의 추적 기능, 그 추적 기능을 통해서 ‘인간은 성도냐, 성도 아니냐?’가 드러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혼인도 말씀에 속하니까, 혼인 제도 자체가 말씀의 추적 기능을 발휘하니까 그 추적 기능을 통해서 누가 성도인지 누가 성도 아닌지가 드러나는 겁니다. 어쨌든 간에 이 혼인 제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영적 열매는 일체 맺을 수가 없습니다.

그걸 가로막고 있는 것이, 자신의 주제도 모르면서, 내가 어떤 인간인 줄 모르면서 덜렁 행복한 여생을 얻고자 혼인에 나선 겁니다. 서로 좋아서 사랑해서 혼인하는 게 이게 이 세상에서는 정상적이잖아요. 우연히 눈 맞아서 서로 좋아서 사랑해서 혼인했다.

그 여정 속에서 내 죄는 어디서 발견됩니까? 죄 발견하려고 결혼한 사람 누가 있어요? 아무도 없지요. 성경에 혼인 제도가 있는데 그 혼인 제도를 덜렁 물은 거예요. “너 잘 물었어. 이제 도리어 잘 물렸다.” 하고, 주를 위해서 살아야 할 인간이 결혼이라는 그 속에 피신해서 자기 행복을 추진하면서 ‘사랑했으니까 행복할 만한 권한이 있잖아요?’라고 우기고 큰소리 치는데, 바로 그 죄를 들추어내는 방법으로 성경을 사용합니다.

성경에서 혼인한 자를 ‘메인’으로 보고 혼인 안 한 자를 부차적인 ‘서브’를 보는데 여기서 어려운 것은, 혼인한 것과 혼인하지 않은 것 둘 다를 합쳐서 하나의 서브로 보는 거예요. 그렇게 부차적으로 보고, 메인은 뭐냐? 성경 전체의 흐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게 메인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음행, 간음이라는 행위가 구약에서 점차적으로 뭐로 발전하느냐 하면, 주님을 섬기지 않는 이스라엘 전체를 음행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것에까지 계속 발전해서 말씀 기능으로 이끌어내는 거예요. 이스라엘 자체를 아예 간음한 집단이라 규정하는 쪽으로 성경은, 하나님의 사태는 몰아가고 있어요.

개인적인 행복, 이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배제한 채, 차단한 채 나오는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혼인 제도 안에다 여호와를 집어넣으려고, 여호와 하나님을 집어넣으려고 하는 거예요. 자신이 직접 들어가는 겁니다. 잠언서 19장 14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에게서 온다. 아내가 집 안에 들어오면 여호와가 따라 들어온다는 거예요. 그러면 여호와는 뭐냐? ‘누가 죽어야 누가 산다’는 게 여호와의 법칙이잖아요. 하나님이 죽어서 죽은 인간을 살려내겠다는 것이 여호와의 법칙이에요.

여기에 슬기로운 남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슬기로운 아내예요. 그게 창세기 3장에 나옵니다. 남자들이 백날 돈 벌어봐야 슬기로운 남편 아니에요. 슬기로운 것은 여자예요. 창세기 3장 19절에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남편은 실컷 고생하고 노동하고 고생하고 땀 흘리고, 그래서 흙으로 가야하고요, 생명은 어디에 속하는가? 여자한테 속했어요. 남자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고, 창세기 3장 20절에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여자 쪽이죠. 여자 쪽은 서브, 가정에서 메인이 아니고 서브예요. 메인은 남자예요. 그런데 서브 쪽에서 뭐가 들어오느냐? 생명이 들어오게 됩니다. 물론 슬기로운 아내에만 국한돼요. 잠언서에서 두 역할이 있는데 하나는 슬기로운 아내가 있는 반면에 또 하나는 잔소리하는 아내가 있어요.

“다투며 성내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잠 21:19). 잔소리하는 여자하고 살려면 차라리 밖에 광야에 나가서 혼자 살라는 식의 대목이 여러 군데 나옵니다. 슬기로운 아내의 특징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거예요.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잠 31:30). ‘얼굴 예쁜 것도 고운 것도 다 헛되지만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다. 그것도 성문에서, 율법이 쏟아지는 그 현장에서. 그 여자는 여호와와 한 통 속으로 여호와의 정신을 품고 있다. 생명을 가정에 나타내는 계기가 된다.’ 해서 이제 칭찬을 받는다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그 슬기로운 아내는, 그리고 생명을 나타내는 그 아내는 어떤 여자여야 되는가?’ 자식을 못 낳는 여자여야 된다는 겁니다. 충격입니다, 충격. 자식을 낳지 못하는 여자. 인간의 몸에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특히 남자의 몸에 문제가 있는데 곧 메인, 가정의 메인에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

그 문제가 창세기 6장 1-3절에 나옵니다. “사람이 땅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렇게 돼 있어요.

여기 ‘하나님의 아들’은 천사를 말합니다. 인간들은 이미 천사가 농락하는 대상으로 이미 전락했어요.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 인간 속에는 악마의 영혼과 정신이 삽입되어서 자식을 낳고 가정을 꾸려도 그 마귀의 정신, 악마의 정신은 가정 속에 초월적으로, 아주 권위적으로 작동을 해요.

인간은 이미 악마의 왕과 혼인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그 악마의 정신이 메인 되는 남자한테 속하고, 남자는 여자를 지배하게 돼 있고, ‘어디 하늘 같은 남편한테 잔소리하고 대들고 있어!’ 이러한 질서 체제, 여기서 하나님의 대안은 간단합니다.

‘인간은 창조주를 기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아닙니다. 인간의 존재 이유는 심판주를 기쁘게 하는 거예요. 나를 향하여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 그 심판을 정당화해 주는 게 인간의 존재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몸은, 인간은 이미 병들어서 손댈 수 없기 때문에 누군가 심판을 해줘야 돼요. 우리 자신을 심판해 주는데 그 심판의 장소가 이 결혼 생활입니다. 아주 멋져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결혼을 통해서 아무런 영적 열매도 맺히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결혼을 통해서 결국은 인간이 갖고 있던 그 죄의 보균성 때문에 혼자 죽는 게 아니고 같이 죽어요. 한 몸이니까 같이 죽어요. 결혼은 뭐냐? 나를 파괴하고, 나와 혼인한 그 사람도 같이 파괴하는 상호 파괴 공작의 현장이 결혼입니다.

그러면 결혼 안 한 사람은? 자기가 파괴되는 줄도 모르고 혼자 살아가는 것 그것이 독신이죠. 어쨌거나 저쨌거나, 혼인하나 혼인하지 않으나 주를 위해서 사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아요. 주를 기쁘게 하는 자는 없어요. 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사람은 많아요. 종교라는 게 그거거든요.

그러나 심판주를 기쁘게 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왜? 심판이 정당화 돼버리면 나는 행복할 권리마저 스스로 부정해야할 입장에 있기 때문에 자신해서 자기 행복마저 없앨 정도로 하나님을 찾을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종교라는 게 뭐냐? 종교라는 것은 자기가 잃어버린 자리에서 자기를 찾는 게 아니고, 잃어버리지 않는 밝은 데서 자기를 찾고자 시도하는 것이 바로 종교예요. 이것은 뭐 해프닝이죠. 이것은 말도 안 되는 거죠.

만약 여러분이 귀한 목걸이나 귀걸이를 잃어버렸다. 그때 우리의 상식은 이거예요. 잃어버린 자리에서 그 물건을 찾아야 되잖아요. 그런데 어디서 찾는가? 가로등 불빛 안에서 찾아요. 왜 거기서 찾는가? 거기가 밝으니까. 이게 얼마나 거짓된 겁니까?

인간은 자신의 행복을 찾기 위해서, 본인이 얼마나 얼마나 어두운 데 빠졌다는 사실은 아예 삭제시키고, 밝고 거룩하고 고상하고 의롭고 착하고 아름다운 종교 단체에 가서 ‘하나님, 저 여기 왔어요.’ 이러고 있다는 말이지요. 밝음 속에서 자기를 발견하면 자기도 밝아지는 줄 알고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본인은 어두우면서.

세상 사는 게 힘들다 보니까 교회에 와서 비는 거예요. 교회는 밝고, 힘들게 사는 내 인생은 어둡고. 그 어두운 데서 벗어나서 밝은 데서 내 인생의 본모습을 찾겠다는 거예요. 교회가 사실은 자기 가정보다 더 어두워야 됩니다. 더 어두워야 돼요. 교회가 좋게 좋게 해주니까, 같이 웃으면서 김장도 하고…, 이렇게 좋게 좋게 가니까 자기가 굉장히 남한테 가치 있는 존재인 줄 아는데 인간은 가치가 없습니다. 가치가 없으면서 행복은 또 그렇게도 좋아해요.

그래서 주를 위해서 섬기지 않는 이 자기 자신은 결혼을 하나 안 하나 아무 소용 없이 결국은 자기를 중심으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생지옥이에요. 이게 평생 고통입니다. 결혼 안 해도 고통이고 해도 고통이고, 빼도박도 못 해요. 이 고통, 지옥이라는 게!

그러면 이 결혼이라는 것을 왜 주님께서 허락했는가? 허락한 이유는, 죽음은 정지가 아니라 아니라 그 죽음 활동을 통해서 숨겨진 다른 활동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는 것이 이 세상 우리 인생이고 혼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의미 있는 용어를 이야기해요.

‘인간에게 몸이 있다’라는 말을 하지 않고, ‘몸이 있다’가 아니라 ‘육이 있다’라고 이야기해요. ‘몸’이 있다고 하면 되게 자기가 밝은 줄 알고 할 수 있으면 행복할 만한 어떤 자격이 된다는 기대나 희망을 갖지만 ‘육’이 돼버리면 이건 끝난 거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령을 통해서 ‘몸’이라고 생각하는 나를 ‘육’으로 바꿉니다. 바뀌어줘요. 몸은, 잘하면 살 수 있다가 되지만 육은, 이미 하나님 성령 안에서 죽은 걸로 필연적으로 확정된 것이 육입니다. 죽어 마땅하고, 저주받아 마땅하고, 심판받아 마땅한 게 그건 몸이 아니고 육이에요.

그래서 성령은 몸의 차원에서 보지 말고 육의 차원에서 너를 보라는 겁니다. 육의 이유는 뭐냐? 자기를 자아로부터 떼 내듯이 떼어 놓을 수 없는 처참한 형편이 있다는 거예요. 예수님도 이걸 감안했어요. 창세기 6장에서 이미 악마와 혼인한 상태에서 악마에 놀아났거든요.

악마와 혼인했다는 것은 호세야 2장 16절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먼저 호세아 2장 8절에서 9절에 보게 되면 분명히 여기 2장 8절에 보면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저에게 준 것이요 저희가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저에게 더하여 준 것이어늘 저가 알지 못하도다”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죠. 이스라엘에 그동안 주어진 모든 것은 여호와가 주신 거예요. 그런데 여호와가 이스라엘에 삽입되지 않고 이렇게 밀침을 당하고 그 자리에 누가 들어왔느냐? 여호와 있어야 할 자리에 바알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주께서는 바알을 빼내고 여호와 자신이 들어가시는 거예요. 빼낸다는 말은, 이미 인간은 마귀와, 바알이라는 우상 마귀와 이미 혼인한 상태에요. 그의 지배를 받고 있고, 그래서 마귀가 메인이고 서브가 본인 자아예요. 그 자아는 마귀가 시키는 대로 하는데, 그 마귀가 늘 우리에게 속삭이고 시킨 게 뭐냐?

‘빨리 차분하게 네 자리로 찾아가서 그 자리를 그냥 사수하며 살아라. 네 자아를 사수하라.’ 이게 마귀가 한시도 쉬지 않고 우리에게 가르치는 가르침이에요. 마귀의 가르침, ‘네 자리에 붙들고 그걸 지켜내라.’

여러분, 멈추면 일곱 귀신이 달라붙습니다. 멈추면 그래요. 말씀 트레인, 말씀의 기차가 멈추면 자아가 강력하게 느껴집니다. 내가 느껴지게 되면 그다음부터 나를 지키려고 하고, 바로 그런 식으로 인간은 자아 때문에, 자기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악마가 우리에게 원하는 바고 그런 식으로 악마가 우리를 훈련시키고 단련시킨 거예요.

말씀과 더불어 달려가야 하는 데 중간에 멈춰버려요. 멈추면 뭐냐? ‘너는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냐?’ 이렇게 나와요. 멈추면, 멈추면 그냥 지옥이 돼요. 연세 많은 사람들의 약간의 불행이라고 할까요? 연세 많은 사람이 일거리가 없잖아요.

일거리 멈춰버리면 그다음부터는 자기 것 사수하려고 하니까, 그 죽어가는 내내 고통스러워요. 그동안 못다한 지옥 경험을 혼자 다 하고 있는 거예요. 회사 다닐 때는 신나게 다녔지요. 서울에 자기 집 있겠다. 대기업의 부장이겠다. 신나게 일했는데 50 넘어서 구조조정을 당하니까 퇴직금 4억 5천 받은 것 사기당해서 한 방에 다 날아가고….

드라마 이야기입니다. 서울에 자기 집 있는 김 부장 이야기인데 실제로 사회에서 퇴직자를 노리는 이 사기꾼들의 몫으로 다 넘어가게 돼 있어요. 이게 왜 그러냐? 멈추니까, 그다음부터는 내가 어떤 존재냐에 신경 쓰다 보니까 마귀성이 나오는 겁니다.

오늘 설교는 두 가지로 말씀드립니다. 첫째는, 도저히 자아를 떼려야 뗄 수가 없어요. 요한복음 2장에 가나 혼인 잔치 있죠. 가나 혼인 잔치 이야기가 혼인 잔치를 축복한 게 아니에요. 예수님의 셀프 축복이에요. 예수님이 자기가 자기를 축복하는 이야기라니까요.

요한복음 2장 11절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물로 포도주를 만든 것은, 예수님 자신이 이 땅에서 같은 인간의 죄악된 몸을 지녔지만 이 몸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포도주로 변하는 셀프, 자기 이야기예요. ‘나만이 복 받을 자격이 있고 너희들은 어떤 존재든 복 받을 자격이 없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개입되지 않으면 어떤 것도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영광스러운 것은 나올 수 없습니다. 인간은 이미 출생부터가 육이었어요. 물론 결혼해서 행복한 것, 그런 것은 없어요. 그래서 오늘 설교 두 가지 말씀 중 하나는 뭐냐? 나에게서 나를 떼 내는 방법.

그 방법의 두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는, 자기에게서 자기를 떼는 방법은 예수님의 몸과 늘 대비시키면서 자기의 몸의 한계, 자기 몸의 한계를 느끼면 돼요. ‘아, 이거 안 되는구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아주 친절하기 짝이 없어요. “나는 의인을 부르는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 9:13).

그 말은 ‘네 마음이 지옥 같은 이유는 너의 의로움 때문에 그렇다. 네 의로움 때문에, 잘난 체하기 때문에, 그놈의 자존심 때문에, 그 자존심 때문에 네가 스스로 지옥을 만들고 있다.’ 뭔가 남들이 힘들게 하면 맨날 속으로 ‘복수할 거야’ 하는데 여러분, 복수의 여정, 복수하려면 미리 두 개의 무덤을 준비하세요.

하나는 뭐냐 하면, 복수할 그 인간 무덤과 복수하고자 하는데 내 무덤을 같이 만드세요. 우리가 남에게 복수할 그런 입장이 안 됩니다. 왜 복수하느냐? 자기 행복에 대해서 상실한 것을 메꾸기 위해서 복수하잖아요. 인간의 모든 행동은 복수심에서 나왔어요. 보란 듯이, 누구 보란 듯이, 누구 보란 듯이.

그러나 생각해 보세요. 세상의 모든 것은 사람이 마련해 준 게 아니고 주님이 마련해 줬어요. 이 세상은요, 사람 말을 듣고 움직이는 세상이 아니라 주님 말 듣고 움직이는 세상이에요 남이 뭐라 해도 신경 쓰지 마세요. 나에게 주어진 것, 마련된 모든 것은 주님이 직접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거예요. 왜 남 말에 그렇게 의식하고 신경 씁니까? 아무 능력도 없는 무능력한 말을 왜 그렇게 신경 써요?

예수님과 늘 비교하면서 비교하면서 자기의 한계를 아시면 자기에서 떨어져 나갑니다. ‘아, 내 일이 아니고 다 주께서 내 안에서 일을 벌이는, 이게 다 주의 일이구나.’ 코로나 걸리고, 마스크 쓰고, 교회도 못 나오고…, ‘이 모든 것은 내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이구나.’

왜 너의 일이 되면 안 되는데? 나의 일은 조금만 뭐하면 뭐든지 내 잘남이야, 뭐든지! 뭐든지 하면 ‘나 잘났지?’ 내 자존심 챙기기 위한 것, 이게 우리의, 나의 한계잖아요. ‘그래서 주께서는 죄인을 부르러 왔구나. 내가 죄인입니다.’ 내가 결혼해서 죄인인 줄 아는 것을 다행스럽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결혼 안 했으면 자기가 죄인인 걸 어떻게 알겠어요?

두 번째예요. 두 번째로 떼놓은 방법은 이거는 예수님과 비교하는 방법이 아니고, 평생 지켜온 시공간,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느끼는 겁니다. 내가 평생 늘 그렇게 있다고 여기는 시간과 공간, 이 대자연이 전부 다 베니아 합판으로 된 무대 세트장에 불과해서 나중에 이게 다 짜부라지는 거예요. 이게 지금 이게 다 무너지는 거예요. 시공간이, 해와 달과 별 전부 다 모조리 무너지는 거예요.

이것을 아셔야 됩니다. 율법에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숫자 헤아리는 방법을 알려줬어요. 숫자를 1, 2, 3, 4, 5, 6…, 10. 여기까지만 하지 말고, 또는 무한대로도 하지 말고 딱 요까지만 1, 2, 3, 4, 5, 6, 7. 그 일곱 숫자만 헤아리고 그 외에는 몰라라는 겁니다.

7이라는 숫자 안에서만 움직이라는 거예요. 그게 창세기 1장에 나오는데 7일 만에 천지를 창조한 거예요. 7 다음에 8은 다시 어디로 가느냐? 1로 바뀌어요. 7에서 8, 9, 10…, 이래 나가면 안 돼요. 이것은 인간의 시공간을 연속성 있게 바라보고 있는, 이미 마귀와 한통속이 된 무한을 추구하는 인간이 무한을 추구하는 그 마귀적 속성을 인간에게 대변해 주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악마가 무한을 추구한다는 걸 알고 거기서 그 연속성을 단절로 끊어내는 거예요. 1 2, 3, 4, 5, 6, 7! 다시 1 2 3, 4, 5, 6 7! 끊어내는 겁니다. 끊어질 때 자기의 노동도 같이 끊어져야 돼요. 인간이 노동을 끊는다는 말은 노동할 가치가 없고, 노동의 대가를 얻을 가치도 없고 곧 죽은 자가 되는 겁니다.

그 죽은 자의 날이 안식일이에요. 아 하나님께서는 7일만 살고 죽이고, 그다음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또 살아서 7일 동안 살게 하고…, 끊어버리고, 또 끊어버리고, 율법이 개입해서 이 잘난 자아의 무한한 연속을 중간중간 톰배기로 도마에서 칼질하듯이 하는 거예요, 우리 인생을!

칼질당한 그 몸, 그 몸은 아까 제가 말씀드린 대로 이제 ‘몸’이 아니고 ‘육’이 되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그러면 시간도 끊어지고요, 공간도 마지막 종말이 되면 같이 무너지게 돼 있어요. 이게 지난 겨울 수련회 다니엘 강의 『꿈과 현실』이라는 책에도 나와 있습니다마는 그 다니엘 그 책에 보면 이랬어요.

“시간은 길어지는 것이 아니고, 시간은 높아진다”라고 이야기했어요. 다니엘의 계시에 보면7이 7이 아니고 ‘7이레’가 하늘로 향하는 시간의 사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여주는 겁니다. 시간 자체를 영이 와서 다루게 되면 시간이 끊어지고, 하나님의 묵시 세계인 영원한 시간이 거기에 합류되는 계기가 이 말씀을 통해서 들어가 있는 겁니다.

끊어지는 계기는 혼인 제도를 통해서 이걸 보여주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에 관한 이야기를 해요. ‘혼인의 의미는 자기 자손 생식 또는 생산에 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규정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 15:5)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중간에 끊어야 돼요. 그렇게 끊어서 사라가 아기를 못 낳습니다. 혼인을 했는데 자식이 없어요. 창세기 16장 1-2절에 보면,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생산치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여기서 여종은 자식을 생산하게 됩니다. 이스마엘을 낳게 돼요. 그래서 이 여종은 이게 아브라함에게 서브가 돼요. 부차적인 것이 됩니다. 그런데 메인은? 메인은 자식이 없어요. 그런데 서브는 자식이 있습니다. 이 말은, 인간의 인간이 생산하는 모든 몸들은 육이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해야 될 이유를 보여주는 게 육이에요. 아까 본 창세기 6장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천사가 사람의 딸과 농락해서 자식을 낳았는데 네피림, 소위 거인이 생겼다는 거예요. 그 대목을 보고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그 거인은 비정상이고 우리는 정상이다. 우리는 거인이 아니니까.’ 이렇게 자꾸 오해하시는데 거인이 아니라도 다 비정상이에요. 거인이 아니라도 다 비정상입니다.

왜 노아 홍수 때 살아남은 자는 단 한 명도 없어요. 노아 식구도 살아남은 것 아닙니다. 방주가 살았죠. 언약이 살았지, 노아가 살아난 게 아니에요. 언약 안에, 노아 방주라는 언약 안에서 노아 식구를 살려서 살린 것이지, 어떤 인간도 이미 악마의 왕, 어둠의 왕과 혼인한 인상 살 수가 없어요.

호세아 2장 16절에서 세상에, 바알을 보고 자기 남편이라 했잖아요. 그것은 이미 혼인 관계에 들어간 거예요. 혼인 관계에 들어가 있다고요. 인간은 마귀의 서브고 메인은 마귀입니다. 이게 육이에요. 그 어떤 것도 선한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인간에게 나올 수 없습니다.

그게 로마서에 나와요. “육신에 속한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롬 8:8). 이미 필연적으로 확정을 지어놓은 거예요. 왜 기쁘시게 못 하는 지 제가 아까 말씀을 드렸습니다. 인간은 신을 좋아하지만 심판주는 안 좋아하니까. 진짜 하나님은 심판주인데 심판주를 안 좋아하니까 종교라는 걸 도입해서 밝고 귀한 단체 만들어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자아를 빼지 않는 한 그렇게 믿는 종교는 마치 매니큐어 같아요. 볼에 찍은 연지 같아요. 세수하면 다 탈색해서 없어져요. 자아가 자기에게서 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40년, 50년 예수 믿어봤자 점점 이게 엷어진다니까요. 예수 믿는 게 없어져요, 나중에는! 다 없어지고 자기 행복만 남아요. 행복할 자격도 없으면서, 자기 의만 남고 자존심만 남고 자기가치만 남아요. 그러니까 스스로 자기가 이제 지옥 되는 거죠.

이것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천국 백성을 만드는가? 끊어버립니다. 자식을 끊는다는 말은, 그 자식을 못 낳는 부부에게 근원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근원적으로 그 원판이 문제가 있어요, 우리 원판이! TV 광고에 보니까 어떤 미국의 셰프가 나와서 그 환풍기를 광고해요.

한국말도 잘 못해요. 그 사람은 APEC 행사때 요리 담당했던 그 사람인데 어눌한 한국말로 “공기가 다르네!” 그 CF 보고 느낀 점이 ‘원판이 다르네.’ 우리는 내가 원판인 줄 알고 있어요. 우리는 원판 아니에요. 내가 생각하는 원판하고 지금 원판 자체가 달라요.

원판은 어디서 나오는가? 원판은 바로 창세기 18장 1절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았다가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사람 셋이 왔다 했어요. 그런데 창세기 19장에 보면 두 천사가 있어요. “날이 저물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그러면 왜 세 천사가 아니고 왜 두 천사냐? 창세기 18장 1절에 ‘여호와께서 오셨다’, 여호와께서 오셨는데 여호와가 세 분은 아니잖아요. 여호와께서 오셨는데 두 천사를 수행자로 해서 왔다는 말이지요.

여러분, 인간은요 천국 가도 둘째 인간이에요. 첫째 인간 될 수 없습니다. 맏이는 안 돼요. 로마서 8장 29-30절에서 구원받는 자리가 어떤 자리냐? 맏아들의 형상, 맏아들을 아들답게 드러내는 자리에 우리가 끼어들어갑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 말은, 맏아들의 희생, 맏아들의 공로, 예수님이 맏아들인 것을 알지 못하는 자는 절대로 천국에 자리가 없다는 뜻이에요. 잘렸다는 겁니다. 너는 잘린 거예요. 따라서 맏아들을 생산하는 자리가 진짜 하나님께서 원하는 혼인의 원판, 메인이에요, 메인!

아까 본 마태복음 19장 10절의 말씀처럼 두 사람이 한 몸 되잖아요. 그 숫자가 2입니다. 혼인은 반드시 둘이 있어야 돼요. 창세기 2장에서 아담과 하와 둘이 있어야 돼요. 2라는 그 숫자 뒤로 인간은 빠집니다. 인간은 2의 숫자 안에 들어가면 안 돼요.

왜냐하면 인간의 2는 1이 될 수 없기 때문에. 혼인의 고통은, 아무리 평생동안 다정하게 잘해도 2가 1이 될 수 없다는 한계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혼인은 불행하니까 하지 말까?’ 또는 ‘행복하니 할까?’ 하지 마세요. ‘결혼은 후회할 수 없는 다행스러운 불행’이라고 보면 돼요.

결혼을 통해서 자기의 한계를 보여주는 거예요. 아무리 노력해도 상대방 마음과 내 마음이 일치될 수가 없어요. 성경에서 원칙은 뭐냐? 둘이 한 몸이에요. 그러나 둘이 한 몸이 될 수가 없습니다. 한 몸 될 수 없는 인간을 혼인시켜 놨어요. 눈 맞도록 해서 혼인을 시켰다고요.

이것은 그 간격이 있잖아요. 몇 번째 이야기합니다만 혼인을 통해서는 절대로 하나님이 원하는 영을 생산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환상과 거짓만 계속 낳을 뿐이죠. 불행하고 힘드니까 자꾸 환상을 생각하는 거예요. ‘행복해야 돼, 행복해야 돼….’

환상에서 태어나서 남의 환상을 흉내 내다가 자기가 환상의 일부가 되어서 결국 죽음이라는 실제 앞에서 환상으로 그냥 사라지는 것, 이게 인생이잖아요. 실상은 죽음 밖에 없어요. 죽음이 실상이에요. 그러니까 2라는 그 숫자는 하나님이 지정한 자리에 들어갈 자만 해당되어서 그 2는 그냥 2가 아니고 중간에 있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하나로 그 2가 1로, 하나로 뭉쳐지는 계시를 이삭의 출생을 통해서 보여주는 거예요.

자식을 못 낳아요. 자식을 못 낳는데 자식은 못 낳는 데서 덜렁 자식은 생겼어요. 누구 자식입니까? 여호와의 자식이죠. 여호와의 자식이에요. 이것은 아브라함뿐만 아니고 이삭도 마찬가지에요. 이삭도 아기 못 낳아요. 부인 리브가는 아기 못 낳습니다. 야곱도 아내 둘 다 아기를 못 낳아요.

아니 못 놓게 했지요. 놓지 못하게 했죠. 그러면 덜렁 낳은 그 자식은 무슨 자식이냐? 말씀이라는, 언약이라는, 약속이라는 자식을 낳았어요. 인간이 육인데 육에서 어떻게 약속이 나옵니까? 못 나오죠. 그러니까 언약이 언약을, 인간이라는 혼인제도를 통해서 언약이 자기 자식을 생산하는 작업에 나선 거예요. 하나님이 자기 자식을 낳은 거예요.

구체적인 것, 보다 구체적인 것이 드러나는데 사사기 13장 2절에 나옵니다. “소라 땅에 단 지파의 가족중 마노아라 이름하는 자가 있더라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생산치 못하더니.” 마노아의 아내는 잉태치 못함으로 생산하지 못했습니다.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에요. 3절에, “여호와의 사자가 그 여인에게 나타나시고” 보세요. 천사가 개입해요. 천사가 개입한다고요. 육인데 천사가 개입해요. 지난 시간에 얘기했잖아요. 천사 이야기.

“여호와의 사자가 그 여인에게 나타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가 본래 잉태하지 못하므로 생산치 못하였으나 이제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러므로 너는 삼가서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찌며 무릇 부정한 것을 먹지 말찌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삿 13:3~7).

하나님께 바치지 않을 인간은 하나님께서 태어나지도 못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인간만 하나님께서 받으십니다. 이걸 요한복음 3장 6절에서는 ‘육으로 난 것은 육이기 때문에 안 받습니다. 오직 영으로 난 것만 받습니다. 영으로 거듭난 사람만 하늘나라에서 받습니다.’ 그러니까 네가 어떤 음행의 보균자가 됐던, 바이러스를 갖고 있던, 결혼을 하든 안 하든 간에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불러서 자기 백성을 만드십니다.

그런데 인간은 어디에 빠졌는가? 결혼, 행복에 빠져 있어요. 그걸 말씀으로 추적하는 거예요. ‘누구 좋으라고 행복이냐? 너는 결국 행복할 만한 자기 의가 있다고 생각했지? 너한테 그만큼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지? 너는 네 원판을 알아, 몰라?’ 이렇게 나서는 겁니다.

이사야 7장 14절은 크리스마스 때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예요. 그 말씀이 뭐냐?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다.’ 전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때에도 혼인은 했는데, 혼인은 했는데 육이 잉태치 못했잖아요. 이것은 아예 결혼 자체도 안 했어, 결혼조차도 안 했어요. 처녀예요. 결혼도 안 했어요.

그러니까 이거는 뭐냐 하면, 인간들이 시공간 내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자연의 법칙 속에서, 사람이 태어나서 어른 돼서 눈 마주치고 사랑하면 혼인하고 자식 놓지요. ‘하나님이여, 이 원칙에 대해서는 손대지 마소서. 우리는 이런 소박한 행복으로 살겠습니다.’ 그 자체가, 이 자체가 육이라는 거예요, 이게!

성경은 지금 다른 노선을 이야기해요. 말씀 노선, 말씀 train, 기차, 멈추지 않아요. 멈추면 인간이 ‘자아 행복 찾기’가 생기니까, 내가 이거 사수할 거니까. 인간의 모든 행동 가운데서, 자기 행복에 관해서 ‘이것이 내게 이익이냐, 손실이냐?’ 그걸 계산 안 한 적이 있던가요?

‘처녀가 잉태해서 아들 낳는다.’ 성경에서 이런 소리 하니까 사람들은 성경을 밀어내는 거예요. ‘왜 내 행복과 관련 없는 엉뚱한 소리를 하느냐? 나 안 보련다.’ 이렇게 다 밀어내는 거예요. 여러분, 인간이 사는 것이 저주라는 사실을 생각해 본 적 있습니까?

자존심이 저주요, 자존심이 심판입니다. ‘난 자존심 챙긴다. 자존감 챙긴다’ 하는데, 그 자체가 ‘나 심판받고 있습니다’라는 뜻이에요. 좋게 지낼 때, 서로 친하게 지낼 때는 전혀 자존감, 자기 의 안 다쳐요. 그런데 뭔지 내 뜻대로 안 되면 왈칵, 하고 속에서 울분이 터져 나와요.

지난 금요일 날 목욕탕에 갔는데, 이거 뭐 집에 A4 용지도 없는지, 안 그러면 집에 뭐 빈 종이가 없는지 몸에다가 그림을 그렸네요, 몸에다가! 문신이라는 것은 내부 울분의 바깥 표현이거든요. ‘나 성질나서 못 살겠다.’ 그게 바깥으로 나오면 문신이 되는 겁니다.

나 좀 봐달라는 거예요. 나, 이렇게 센 사람이라는 걸 좀 봐달라는 거예요. 입대할 때, 10cm만 문신이 길어도 군에 못 가요. 제재받을 수도 있어요. 문신 좀 새기지 말고, 예수님 좀 새기지요. 내 자존심을 박살 낸 예수님! “나 너 죄인 만들 거야. 끝까지 죄인 만들 거야!” 그거 왜, 우리 마음에다가 문신을 안 새깁니까? 잘난 척하지 말고, 그냥 매니큐어 바르듯이 예수 믿지 마시라고요.

마리아, 신약에 와서 마리아까지 이어집니다. 마리아는 처녀인데 정혼한 사람이 있지만, 약혼한 사람이 있지만 처녀예요. 처녀인데 아기 예수를 낳았어요. 욕을 얼마나 얻어먹었겠습니까? 사랑하는, 눈맞아서 사랑했던 남자로부터 ‘종용히 내 떠나줄게.’ 왜? 너무 신사적이니까. 남자가 너무 신사적이죠. 믿음은 하나도 없는데 신사적이에요.

이처럼 주께서 영적으로 일으킨 사건은 모든 인간에게 단절입니다. 모든 이에게 단절이에요. 납득이 안 돼요, 납득이 안 돼요. 이해가 안 돼요. 주님과 혼인한다는 것은, 이미 성령의 열매가 맺히면 이미 주님과 혼인 관계에 들어갔어요. 성령의 열매는 남편, 메인 되시는 주께서, 서브 되는 우리에게 날마다 말씀으로 지적을 해줘요.

‘까불지 마라. 너의 모든 것은, 네 모든 것은 내 일이다.’ 주기도문에서 ‘시험 들지 말라’ 하는 그 내용 아닙니까? ‘너는 이미 자아가 떼어졌다.’ 용종 일곱 개 떼준 거예요, 일곱 개. 대장 내시경 할 때 용종 떼잖아요. 위도 마찬가지고. 이미 자아를 떼 낸 상태에서, 떼 내게 될 때, 우리의 몸이 뭐로 바뀌냐면 육으로 바뀌어요.

그 잘나고 잘난 내 자아가 주님의 성령의 강제 조치에 의해서 떼내졌기 때문에 이게 약해요. 이게 세상에 노출되잖아요. 그 노출된 것을 주께서 의도적으로 유도하죠. 하도 잘난 척하기 때문에 세상 만나는 모든 사건들이 나로 하여금 낮추게 만드는 일들, 내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게 만드는 일.

“주여, 이렇게 하다가 죽겠습니다.”
“너 원래 죽었어. 갑자기 네가 살 권한이 있는 것처럼 착각하지 마.”

이게 바로 온유와 자비와 양선과 형제 우애,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주께서 앞당겨서 나로 하여금 주와 더불어서 심판을, 주님의 심판을 이해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때 나는 죽고 주께서 나를 사용해서 예수 그리스도만 드러내는 쪽으로 계속 우리를 활용해 주셨습니다.’ 이걸 고백하는 거예요.

끝으로 한 말씀 하고 마치겠습니다. 주께서는 자기 사람에게 말씀만 사료로 먹입니다. 매일같이 만나,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주기도문이죠, 매일같이 말씀만 주셔서 말씀의 사람으로 만들어내는 작업에 우리의 육이 동원됐다는 것을 느긋하게 생각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에 있는 어떤 일도 주의 말씀에 입각해서 지적받지 않을 그런 것이 하나도 없듯이, 우리의 육의 몸도 평생 이 말씀에 의해서 늘 지적받으면서 우리는 행복할 자격도 없음을 도리어 다행스럽게 여길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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