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삼체 문제

아빠와 함께 2025. 10. 19. 19:42

삼체 문제

2025년 10월 19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2:15-17

12:15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12:16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12:17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음행한 자나 그리고 장자의 명분을 판 자나 모두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로 동격이라는 점을 기이합니다. 쉽게 말해서 평생 음행한 적도 없이 지옥 가는 경우가 얼마든지 일어난다는 겁니다. 문제는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리는 일과 음행이 어떤 식으로 관련되느냐를 규명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둘 다 은혜에서 떨어진 자라면 도대체 은혜의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장자의 몫입니다. 장자란 자리입니다. 이 장자의 자리에 대해서 오해한 자가 바로 에서입니다. 그는 일단 먼저 태어난 그것으로 장자의 자리는 고정된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에서가 몰랐던 것은 자기 장자의식이 제대로 된 장자가 아니라 그저 흉내내기에 불과했다는 겁니다.

장자라는 운명이 비고정적으로 에서를 통해서 나타난 이유는, 평소에 장자의 자리를 동생 야곱에게 넘기고자한 것이 아니라 너무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 되었을 때에, 즉 내 목숨이 중하냐 아니냐 아니면 장자의 자리가 중하냐를 드러나는 그 사태에서 그는 장자의 명분을 우습게 여겼습니다.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부터 돌아와서 심히 곤비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곤비하니 그 붉은 것을 나로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야곱이 가로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날 내게 팔라 에서가 가로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창 25:29-32)

사실 장자의 명분, 혹은 장자의 자리는 인간에게 애초부터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장자될ㅇ 자격 자체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태어남은 약속의 자식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음행의 자리에게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음행이란, ‘아무리 해도 본처가 될 수 없음’과 관련된 개념입니다.

창세기 16:4에 보면,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잉태하매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그 여주인을 멸시한지라”아브람의 여종이 아브라함 본처를 멸시한 이유는 사라에게 자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갈이 낳은 자식이 과연 약속의 자식인가요?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자식인가요? 아닙니다.

이미 생겨난 자식도 약속의 자식이 아닙니다. 곧 ‘장자의 명분’을 이어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본처인 사라는 아예 자식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 자손만이 복된 민족이 된다’는 내용입니다. 이것이 바로 전형적인 삼체(三體) 문제입니다.

너와 나의 상호 문제로 모든 해답과 해결점이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예상 못하게 등장한 제 3의 요소가 이자(二者) 관계를 흩뜨려버립니다. 해와 달과 지구에서 지구의 해와의 모든 물리적 법칙은 달의 등장으로 대단히 복잡해지고 해답을 낼 수 없는 혼돈이 찾아들게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는 ‘음행자’과 구원 문제는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긴’에서와 결부시킵니다. 음행의 문제는 율법과 관련되고 장자의 명분은 복음과 관련됩니다. 율법의 위반자는 복음의 죄사함으로 해결하면 되지 않을까요? 이러한 쌍방 둘의 관계로 제시하면 많은 사람들이 자기 죄의식을 안고 복음으로 나와서 천국갈 수 있는게 아닐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도리어 사람들을 지옥보내기에 작정했습니다. 말씀을 전해서 그들로 하여금 지옥 사람인 것을 명백하게 하면서 몰아붙입니다. 그럼에도 이 말씀을 반기고 사모한다면 그 사람은 천국 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은혜’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이 삼체문제가 들이닥친 자가 바로 구약에서 다윗입니다. 그는 살인한 자요 간음한 자입니다. 다윗은 율법과 그 적용할 기능에 대해서는 능통한 자입니다. 그에게 나단 선지자가 찾아았을 때, 그의 고백은 이러합니다. 내가 죄를 지른 것이 아니라 내 속의 죄가 그런 일을 발생했다는 겁니다.

어떤 일 말입니까? 은혜가 은혜로 나타나도록 조치되는 일말입니다. 자기 손으로 살해한 그 자는 다윗 자신에게 잠복된 죄를 사해주는 희생물이 되게 하나님이 하셨다는 겁니다. 반면에 영생을 얻겠다고, 혹은 하나님 보시기에 구원에 자신만만 자에 대한 평가는 ‘은혜로부터 거부당한 자’로 드러납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새인은 다음과 같이 자기를 하나님 앞에 소개합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눅 18:11-12)

또 어느 부자 청년은 자신이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잘 지켜왔다고 자부합니다. (마 19:18)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를 보내어 간음을 일반화하십니다. 이는 현 인간들의 자기 자리가 이미 잠재적 간음의 자리라는 겁니다. “ 여호와께서 비로소 호세아로 말씀하시니라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함이니라”(호 1:2)

그리고 간음의 내용을 충족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알아서 스스로 이스라엘의 남편으로 오신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호 2:16) 신약에 와서 예수님께서 간음(음행)을 일반화시키십니다. 그것이 바로 결혼 제도 안에 자리잡은 간음입니다.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마 5:32)  즉 ‘이혼 증서’를 염두에 두면서 혼인생활하는 것 자체가 이미 잠재적 간음이고 음행이라는 은혜에서 떨어져도 마땅하다는 겁니다.

율법과 복음으로 자기 죄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자는 자신이 이미 ‘죽은 자’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율법으로 인하는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어 있기 때문입니다.(롬 7:9) 해결은 은혜 곧, 사랑의 선물입니다. 사랑으로 움직이고 사랑으로 살고 사랑으로 죽습니다. 이는 우리가 사랑을 소지했다가 아니라 사랑의 결과로 다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창 밖에 빗물 같지만 주님은 우리를 지옥과 천국으로 나누는 창문으로 사용하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의 삶은 비록 모든 것이 고난이지만 장차 올 나라의 영광은 이 고난과 족히 비교도 되지 않음을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89강-히브리서 12장 15-17절(삼체 문제) 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12장 15-17절입니다.

히브리서 12:15-17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히브리서의 저자가 ‘사도바울’이라고 한다면, 사도바울이 사람을 지금 지옥으로 보내기 위해 아주 작정을 하셨습니다. “이래도 지옥 가는 사람이 아니냐?” 아주 몰아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이 말씀을 당해낸다면 그 사람은 천국 가는 사람이죠.

이 말씀의 내용에 대해서 계속 밀어붙일 때 ‘그래, 나 이제 말씀 안 듣겠어.’ 그러면 사도바울은 “그럴 줄 알았어.” 그런데 날 이렇게 지옥으로 몰아세우는 말씀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를 지옥 보내는 이 말씀 외에 다른 것은 아예 찾지도 않겠다.” 이렇게 나온다면 그것이 바로 천국 가는 백성입니다.

사도바울이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음행을 하더라도 여러분 죄 사함받으면 구원받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면 보다 많은 사람이 말씀 앞에 나오고 천국에 갈 것인데 그렇지 않고 “음행하는 자는 바로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진 자다.” 이렇게 단호하게 언급을 해버리면 잠정적 음행자, 잠재적 음행자 같은 경우에 3, 40년 교회 다니다가 35년째 음행해버리면 작살나는 거죠. 끝나버리는 문제에요. 은혜에서 떨어진 자가 되어버리죠. 이걸 누가 감당할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상당히 복잡한 문제가 있는데 세 개를 끄집어내 보겠습니다. 첫째는, 15절에 ‘은혜에 이르지 못한 자’ 은혜에서 끊어진 자, 또는 은혜에 도달하지 못한 자, 은혜 이야기가 나옵니다. 두 번째가, ‘음행하는 자는 천국에 못 간다’라는 음행에 관한 것.

세 번째가, 장자의 명분을 망령되게 여기고 우습게 보고 가볍게 보는 자,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보는 자, 그걸 아주 망령된 자라고 극한 표현을 하고 있는데 이 세 가지를 가지고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뭔가 장자의 기업을 우습게 보는 자한테는 회개할 수 있는 기회마저 비껴간다, 제공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해요. 다시 끄집어내게 되면 첫 번째 은혜. 두 번째, 음행이 뭐냐? 세 번째, 장자의 명분을 우습게 여기는 것. 이 세 가지가 어떻게 연결이 되느냐는 거죠.

여기서 기본적으로 우리가 세상 살면서 들었던 낯익은 문장은 뭐냐? ‘음행하는 자는 축복의 나라에 갈 수 없다’라는 것, 굉장히 익숙한 문장이죠. 그런데 ‘장자의 명분을 우습게 여기는 자도 역시 음행자와 더불어서 축복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라는 이것은 낯선 문장입니다. 음행하지 않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음행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음행한 적도 없으면서 지옥 가는 사람이 생깁니다. 뭘 빠뜨렸느냐? 장자의 명분을 빠뜨렸다는 거예요. 그러면 음행도 하지 않고, 장자의 명분도 빠뜨리지 않을 때 그것은 천국의 나라에, 축복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이 되느냐?

그것도 아니에요. 왜냐하면 은혜를 받지 못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에요. 지금 사람을 좋은 말로 설득해도 교회 나올까 말까, 인데 사도바울은 사람을 설득하는 게 아니고 계속 억압하는 거예요. 사도바울 본인은 알고 있는데, 사도는 알고 있는데 다른 사람은 모르는 이야기를, 알지 못하는 낯선 이야기를 계속 제공하고 그들을 향하여 계속 강요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보는 사람들은 사도가 전하는 깊은 내용에 대해서 추가적인 해설과 해석을 원하게 되는 겁니다. 어떤 점이 이상하냐 하면, ‘음행하는 자와, 그리고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기는 자가 어떻게 동격이 되느냐?’ 하는 거예요. 이게 어떻게 같이 통하는 거냐, 이 말이지요.

우리가 십계명 잘 알고 있죠. 십계명에 보면 도적질하는 자와 살인하는 자, 그리고 거짓 증거하는 자, 간음하는 자,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자, 여호와에 대해서 받아들이지 않고 우상을 섬기는 자, 안식일을 위반하는 자, 이것들이 열 가지 계명으로 되어 있는 거예요. 이 열 가지 계명을 한 가지 계명으로 단축시키면 어떤 계명이 되느냐에 대해서 인간들은 어떤 과제를 부여받은 셈이 돼요.

이것과 1계명과 2계명, 3계명과 7계명, 8계명과 9계명, 5계명과 십계명이 어떻게 동격으로 같은 본질로 연결되는가? 거기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알 길이 없어요. 알 길이 없으니까, 8계명을 지켰는데, 도둑질한 적은 없는데 십계명의 탐내라는 것에 위배 된다면 그 사람은 또 탈락이에요. 천국에 못 가요.

천국에 안 넣어주려고 주께서 작심을 한 것 같아요. 2계명은 계속 지켰는데 어느 날 9계명에 위반되면 3, 40년 교회 나간 거 완전히 헛수고 한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에 보면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의 그 말씀에 보게 되면, 사람들이 자기를 천국에 집어넣기 위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아왔다는 것을 유대인을 모델로 해서 보여주는 장면이 많이 있습니다.

한두 가지만 보게 되면요, 누가복음 18장 11절에, 성전에서 두 종류의 사람이 기도하는데 하나는 세리고 하나는 바리새인이에요. 11절에 보면 먼저 바리새인이 기도하는데 기도 내용에 이런 게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세리, 저 지옥 가는 인간과 나는 다르다’라는 그 말이지요.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것은 부정적으로 저 사람과 차이 나는 것, 뭔가를 하지 않았다는 것, 같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했고 이제는 자기가 한 걸 이야기해요.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 18:12).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어쨌든 간에 나는 스스로 완벽함을 추구했습니다. 저 어때요?’라고 성전에서 하나님 앞에 자기를 비출 때 거기에 가셨던 인자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 천국에서 잘렸어. 방금 한 네 고백이 천국에서 잘린 전형적인 사람의 고백이다.” 심지어 이 사람은 하나님한테 기도해요. 하나님한테 기도하는데 하나님한테 잘렸어요. 이게 바로 오늘 본문에 ‘은혜에서 끊어진 자, 은혜에 이르지 못한 자’에요.

은혜, 그다음에 인간의 음행, 그다음에 장자의 명분, 이게 마치 ‘삼체(三體)문제’를 푸는 것처럼 복잡한 문제에요. 삼체문제라고 하는 것이 뭐냐? 물리학자 뉴턴(Isaac Newton, 1643-1727)이 시작했는데 해와 달과 그리고 지구의 관계에 있어서의 문제입니다.

달이 빠지고 그냥 해와 지구의 관계만 있으면 모든 물리적 해답을 얻을 수 있는데 여기에 제3 자인 달이 끼어버리면 복잡해져요. 지구하고 달하고의 관계는 어떤 물리적 해답을 얻을 수 있는데 여기에 해가 끼어버리면 달과 지구 사이에서 어떤 해답을 얻을 수 없어요. 삼체문제가 해결이 안 되는 겁니다. 둘 사이의 상호 문제에 제3이 끼어들게 되면 둘 사이의 모든 문제가 다 헝클어져 버려요. 이게 바로 혼란입니다.

지금 인간은 혼란 상태에 빠졌어요. 이 삼체문제를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인간들은 바리새인처럼 ‘나 여기 있고 하나님이 저기 계시다.’ 그래서 둘의 문제만 해결하면 된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죄인인 세리가 들어갔을 때 나는 하나님 앞에서 완전과 완벽을 시도 때도 없이 추구하고 있는 이걸로 인하여 천국의 백성이라고 여겼던 그것에 혼란이 일어나서 결국은 천국 백성이 아니었음이 드러나는 거예요.

제3의 인물 세리가 끼어드니까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나는 하나님의 장자의 명분을 가졌고 주님의 은혜를 안다. 그래서 나는 구원 받는다.’ 여기 음행하는 자가 끼어들게 되면 이것도 역시 탈락이에요. 천국에서 탈락되는 겁니다.

이 삼체문제, 제3의 문제를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는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18절에 보면,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헐어버렸던 그 율법을 이제 와서 다시 율법에 비춰서 ‘내가 율법을 위반한 자냐, 지킨 자냐?’를 다시 생각한다면 나는 그동안 죄 용서받은 자가 아니라 다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죄짓는 자로, 죄의 용서가 무효가 되어버리는, 그래서 은혜에서 탈락한 자로 드러난다, 이 말입니다.

나와 하나님 사이에 십자가가 들어왔을 때 이처럼 나와 하나님 사이에서 내가 의도했던 거, ‘나 하나님 믿고 구원받을래, 천국 갈래.’ 하는 이 모든 계획이 십자가로 인하여 완전히 무산된다, 이 말입니다. 그런 시도 자체가 지옥 갈 사고방식을 다시 한번 들춰내는 결과를 낳는 거예요. 나는 하나님도 상대해야 되고, 나는 십자가 지신 예수님도 상대해야 되는데 그 관계가 나의 능력과 자질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거예요.

내가 아는 하나님과 예수님이 아시는 하나님이 모순되기 때문에요. 모순되게 되거든요. 여러분, 달에는 뒷면이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달의 앞면밖에 보지 못합니다. 그 뒷면이 앞면만 쳐다보고 있는 우리에게 어떤 혼란을 줄지를 상상도 못 하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 율법과 복음과 은혜, ‘장자의 명분’을 복음으로 봅시다. 율법과 복음과 은혜, 그 삼체문제를 끄집어내서 장자의 명분을 가진 장자 되시는 분이 우리 인간에게 뭘 제공하느냐? 율법을 제공합니다. 율법을 유발시켜요. 장자 역할은 율법을 먼저 유발시킵니다.

무슨 말이냐? 우리 인간들은 ‘내가 그냥 세상살이했는데 어느 날 교회를 오게 되었다. 교회에 왔는데 거기서 천국 이야기하더라.’ 그래서 사람들이 순서를 정해요. ‘나는 세상에 있었다-교회에 왔다-이렇게 천국을 간다.’ 이게 인간이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은 어떻게 되느냐? 천국 쪽에서 율법을 가지고 먼저 움직이지 않으면 우리는 천국에 갈 수가 없다는 거예요. 천국 쪽에서 움직여야 하는데 그냥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율법을 가지고 움직이게 되면 ‘내가 세상에 있다가, 교회 왔다가 천국 간다’라는 이 자체에 대해서 세상과 교회 전부가 천국 가는 반대 방향, 곧 지옥으로 가는 모양새가 된다는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내가 세상에 살았는데.” 성경은 말합니다. “아니. 넌 세상에 산 적이 없어. 넌 지옥에 살았어.” 그래서 “세상에 살았는데 어느 날 교회에 갔다.” “아니. 너는 지옥에 갔어. 교회 간 적 없어.” 그래서 “나는 천국에 간다.” “아니야. 넌 천국에 갈 수 없어. 왜? 네 쪽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네 쪽에서 움직이는 것은 천국에 갈 수가 없어요.

“그러면 천국에서 움직이면 구원받잖아.” 그게 은혜에요. 은혜인데 은혜는 그냥 오는 것이 아니고 장자와 더불어서 오는데 그 장자가 우리에게 뭘 던지느냐? 율법을 줘버려요. 율법을 주신다고요. 지금부터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의 장자께서 율법을 줄 때 그 율법은 오늘날 음행이라는 것의 문제에 대해 우리가 아는 익숙한 음행이 아니라 낯선, 장자 쪽에서 규정하는, 하늘나라 관점에서 말하는 음행이 우리가 아는 음행과 얼마나 차이 나는가를 제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창세기 16장 4절에 보면, 아브라함에게 아내 사라가 있는데 생산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한 여종이 있습니다. 그 이름은 하갈입니다. 약속의 자녀를 낳지 못하니까 아브라함이 여종과 함께 동침해서 아들을 낳았어요. 4절에 보면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잉태하매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그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주인을 멸시했다.’에요.

오늘 본문, 에서와 야곱 이야기에 있어서 지금 에서가 야곱의 무엇에 대해서, 뭔가는 야곱의 생각에 대해서 멸시를 하고 있는 거예요. 야곱의 입장에서는 장자의 명분이, 맏이의 명분이 중요한데 정작 장자라고 여겼던 에서는 자기의 장자 신분을 멸시하고 있는 거예요. 그걸 오늘 본문에서는 ‘망령되이 일컫는다.’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TV 광고에 보면 이런 게 있어요. “따라 할 수 있는 것은 딱 거기까지!” 콘드로이친 광고 문구에요. “이름값을 하는 것은 우리 제품입니다.” 이렇게 나와요. 지금 하갈은 본처가 아니에요. 본처가 아닌데 임신했다고 본처 행세를 하는 거예요. 따라 할 수 있는 건 딱 거기까지예요. 그렇다고 하갈이 본처가 될 수 없습니다.

창세기 16장에서 하나님의 언약이 있는 그 가정에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삼체문제를 들고 나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와서 아브라함에게 자손이 있고, 그 아브라함의 자손이 우리를 구원한다.’ 이러면 간단한 문제인데 그게 아니고,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우리를 구원하는데 본처인 사라에게 그 자식이 없어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식이 구원자라고 했는데 그 구원자가 없어요. 자식이 없습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은 천국 가고 싶은데 인간에게는 애초에 천국에 어떠한 자리가 없어요. 어떤 권한도 없고 권리도 없어요. 권한도 권리도 없으니까 딱 거기까지, 그래서 흉내 내기나 하는 거예요. 성경 보면서 흉내 내기 하는 거예요. 이게 음행이에요.

음행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본인의 자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게 음행이에요, 본인의 자리를. 내 자리가 이게 지옥 자리인 것을 파악하지 못하는 게 음행이에요. 본처 자리가 되려면 자식을 낳아야 되는데 사라는 자식이 없습니다. 따라서 본처 자리는 비어 있어요. 없어요.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장자가 되려면, 자식 있다고 장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왜 저쪽은 하나님의 언약이 포함되어 있는 장자가 될 수 없는가?’가 대조되는 삼체문제가 등장해야 합니다. ‘왜 저들은 지옥 갈 수밖에 없고, 저들은 왜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가?’ 그것을 밝혀내기 위해서 장자 되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게 율법이에요.

한 인물이 있었어요. 율법과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겹쳐있는 사람이 나중에 등장합니다. 그 사람이 다윗이에요. 시편 51편에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으로 하여금 살인자, 간음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고 난 뒤에 나단 선지자가 찾아와서 다윗에게 지적해요.

지적했을 때 다윗은 우리 인간들이 예상할 만한 고백을 안 해요. “제가 잘못되었습니다.” 이게 인간이 예상하는 말이에요. “제가 완전해야 하는데, 제가 율법대로 지켜야 하는데 못 지켜서 너무 죄송합니다. 하나님이 용서해 주신다면 앞으로 열심히 노력해서 이제 율법 잘 지키겠습니다.” 이게 인간들에게 익숙한, 낯익은 태도에요.

그런데 시편 51편 5절에서 다윗에게서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고백이 나와요.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내가 죄지은 게 아니고 죄가 나를 그렇게 사용했다는 겁니다. 이게 뻔뻔스러운 거예요, 아니면 뭐 막가자는 이야기입니까?

범죄 단체가 있는 캄보디아의 동네 아주머니와 인터뷰를 했어요. 캄보디아에 범죄 단체가 이렇게 많아도 한 번도 경찰이 온 적이 없다는 거예요. 신앙생활 60년 했는데 한 번도 나를 지적하는 성령님이 오신 적이 없어요. 한 번도 나를 지적한 적이 없어요.

그동안 뭐 했는가? 삼체문제가 아니라 ‘이체(二體)문제’죠. ‘하나님 잘 보세요. 교회 나왔습니다. 예배드렸습니다. 저 구원할 거죠?’ 하나님과 나 사이의 이체 문제에요. 십자가 왜 졌는지, 그런 것은 몰라요. 그냥 십자가 지신 걸 받아들이고, 예수 피 받아들이면 된다고 생각해요.

근본적으로 내가 어느 자리에 있는지를 성령님의 지적에 의해서 제대로 알게 된 그 순간이 없었던 겁니다. ‘있었다, 없었다’를 분간하는 방법이 뭐냐? 시편 51편이에요. 간음한 자, 살인한 자인데 성령님이 찾아왔어요. 시편 51편에는 ‘성신’으로 되어 있는데 성신님이 찾아왔어요.

찾아와서 다윗으로 하여금 사태를 파악하게 만들었습니다. ‘내가 죽인 우리야가 나를 살리는 희생물’이라는 3번째의 요소를 다윗은 입으로 고백하는 겁니다. 충격적이지 않습니까? 다윗은 여호와를 믿어요. 이체 문제에요. ‘나 여기 있고 하나님 저기 있고, 나는 하나님 은혜로 살았습니다.’ 이렇게 다 아는 거예요.

다윗이 율법도 잘 알아요. 율법도 잘 안다고요. 그래서 나단 선지자와 이야기하면서 “임금님 나라에 부자가 있고 그의 하인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부자에게 손님이 왔지요. 그런데 세상에 그 부자가 자기의 양은 놔두고 하인의 하나밖에 없는 양을 잡아서 하인을 아프게 했습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할 때 “내 나라에 그렇게 못된 자가 있어? 그건 사형시켜야 돼. 율법대로 하면 네 배를 갚아야 되고!” 이미 이렇게 다윗이 율법을 알아요.

아니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게 내 문제라는 사실을 몰랐는데요. 율법은 지적하기 위함이에요. 율법이 우리를 지적해 주는 거예요. 마태복음 19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부자 청년이 나옵니다. 19장 16절에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면서 자기가 해왔던 것을 그대로 제시해요.

계명을 지키라고 하니까 “나 계명 지켰습니다.” 하는 거지요. 마태복음 19장 18-20절에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지금 이 청년은 자기가 가진 것에 대해서, 쉬지 않고 자기 의를 쌓아놓은 그것에 대해 완전히 몰빵하고 있습니다, 몰입하고 있습니다. 인간은요, 한순간도 쉬지 않고 자기 의를 쌓고 있는 중이에요. 거기다가 하나님까지 믿으니까 그 의가 얼마나 대단한 의겠습니까?

창세기 25장 32절에…, 제가 여러분께 질문할 타이밍이 하나 왔어요. 창세기 25장 32절에 보면 형이 사냥 갔다가 배가 고팠어요. 야곱이 거기서 한참 노렸죠. 형이 좋아하는 팥죽 냄새를 피워가면서 형이 오기를 기다렸는데 마침 형이 들에서 돌아옵니다.

창세기 25장 30-33절에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곤비하니 그 붉은 것을 나로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야곱이 가로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날 내게 팔라 에서가 가로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야곱이 가로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자, 여기서 제가 여러분에게 질문 해보겠습니다. 굳이 말로 답변할 필요는 없고요. 여러분, 형인 에서의 마음이 이해됩니까, 아니면 야곱의 마음이 심정이 이해됩니까? 어느 쪽이 이해가 쉬워요? 에서는 장자입니다. 이미 장자가 되었어요. 태어날 때부터 먼저 태어나서 장자가 된 겁니다.

장자가 되었는데 동생이 자꾸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는 거예요. 장자 입장에서는 ‘배고프다, 팥죽 있다, 저 팥죽 먹으면 난 배부르다.’ 그래서 “팥죽 다오!” 했다는 말이죠. 그런데 동생이 도대체 납득이 되지 않는 말을 해요. “형, 팥죽 줄게.” “고맙네. 어서 다오.” “팥죽 줄 테니까 형이 그 장자의 명분을 내게 팔래?”

동생이 말하는 그 취지 자체가 납득이 안 되는 이야기에요. 이미 끝났어요. 먼저 태어난 자체는 변동이 안 돼요. 고칠 수가 없어요. 우리가 도대체 야곱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이해 안 되는 이유가, 이것은 끝난 게임 아닙니까? 그런데 야곱은 이 장자의 명분이 끝나지 않았다는 거예요. 야곱이 ‘장자라고 할지라도, 먼저 태어난 운명이라 할지라도 내 운명 네가 가져가고 네 운명을 내가 가져올 수 있다’라는 그런 생각을 갖고 있어요. 이건 진짜 웃을 일밖에 안 돼요. 억지도 그런 억지가 없습니다.

동생 야곱이 팥죽을 쑤었다. 형인 에서는 야곱이 쑨 팥죽을 먹고 싶다. 이것은 이체 관계죠. 너와 나의 상호작용으로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거예요. 팥죽 주고 그 팥죽을 먹으면 그것으로 해결 돼요. 그런데 여기에 장자라는 삼체문제, 제3의 문제가 끼어들었을 때, 왜 야곱 쪽에서 엉뚱한 소리를 하는지 에서는 지금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그 이해 안 되는 걸 가지고 오늘 본문에서는 “너 은혜에서 잘렸어.”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다윗이 자기가 간음하고 자기가 살인 해놓고 ‘이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고 내 속의, 부모로부터 받은 내 죄가 그렇게 만들었다.’라고 할 때 어느 누가 여기에 동의합니까?

아무도 동의할 사람 없어요. 동의할 사람 없습니다! “괜히 문제를 혼란스럽게 만들지 말고 간단하게 가자. 너 간음했잖아. 그리고 살인했잖아. 그러니 죽어라. 넌 은혜에서 잘렸어. 지옥에나 가라. 너에겐 복음도 아까워.” 이렇게 간단한 문제잖아요. 간단한 문제라고요. 장자 문제를 왜 여기에 결부시키냐, 이 말입니다.

그것이 구약 호세아에 나옵니다. 호세아 1장 2절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비로소 호세아에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비로소 호세아로 말씀하시니라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삼체문제죠. 십계명이 있잖아요. 십계명이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한 걸로 알고 있는데 십계명을 가지고 안 된다는 거예요. 여기 십계명 말고 음란한 자식을 낳아야 될 선지자가 필요하고, 그 선지자가 하는 그 계시가 나중에 장자의 본질, 진짜 장자의 정체와 관련되어 있다는 겁니다.

오실 장자, 오실 메시아는 이 호세아의 음란과 관련되어 있는 인물로만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인간에게 보냈지, 다른 메시아를 보낸 적이 없다는 거예요. “음란한 자식을 낳아라.” 그런데 음란한 자식이 어떻게 되느냐? 나중에 이스라엘 돼요. 하나님 백성 됩니다.

말이 됩니까? 음란한 자식을 낳고 그다음 절차가 뭐냐? 그 자식과 아내를 호세아가 값을 주고 자기 자식으로 등록시켜요. 호적에 등록시킨다고요. 이 말은, 삼체문제에 있어서 복음과 그리고 율법에서 ‘우리는 율법으로 구원받지 못하니까 복음으로 구원받자’ 이게 이체 문제거든요. 이걸로 충분하지 않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은혜가 와야된다는 겁니다. ‘아, 율법으로 우리는 죄를 아니까, 그래 맞아. 나는 날 때부터 죄인이었어. 율법으로 구원받을 수 없어. 무슨 대책이 없을까? 아, 감사하게도 굿 뉴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주셨구나. 오, 십자가! 십자가 믿지.’ “하나님 됐죠, 이제? 나 죄인임을 고백하고 십자가 믿습니다. 이제 끝났습니다. 저 구원 받은 거 맞죠?”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따라 하는 것은 거기까지’ 딱 거기까지 하고 있는 거예요.

호세아 2장 16절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음행의 문제를 개인 문제에서 이스라엘 전체 운명으로 확대시킵니다. 확대시키면서 하나님 자신을 본 남편으로 나타내게 하시는 거예요.

언제부터 남편이냐? 애굽에서 나올 때 원래부터 남편이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애굽에서 나올 때 출애굽기 4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남편이라고 하지는 않았어요. ‘이스라엘은 아들, 내 자식’(출 4:22)이라고 했어요. 하나님을 남편, 신부로 보는 것은 호세아가 처음입니다. 그 전에 이야기 한 적이 없어요.

삼체문제, 제3의 문제가 신약으로 올 때 점점 더 윤곽이 더 뚜렷하게 등장합니다. 남편으로 등장하면서 ‘너희들은 내 남편인 여호와를 믿지 않은 다른 남자를 사귀었던 간음한 자고 음행한 자, 집단적으로 음행한 자’라고 규정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친히 남편으로 등장하는 거예요, 호세아에서.

특히 예수님이 오셔서 이 음행 문제를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삼체로서, 제3의 존재로서 음행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마태복음 5장 27-28절에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간음을 이미 한 거예요. 평생토록 독신남 독신녀로 살아가서 어떤 남녀와 동침한 적도 없는데 이미 그 사람은 음행한 자로 태어나는 거예요. 간음한 자로 태어나요. 하나님의 은혜에서 끊어진 자로 태어나는 겁니다. 천국과 무관한 자로 태어나는 거예요. 출생 자체가 그래요.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이 이상한 장자를 가볍게 여기지 않을 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에, 우리의 출생 자체가 장자, 하나님, 메시아에 대해서 왜곡된 생각을 지니고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는 한순간도 자기 의를 쌓는데 쉬는 법이 없어요. 자기 정당성과 자기의 잘남을 철통같이 사수하는 데에 마음이 긴장을 늦춘 적이 없습니다.

왜 그런가? 이거는 자리 문제거든요. 내 자리는 내가 지킨다는 거예요. ‘내가 그동안 쌓아온 내 자리는 내가 지킨다.’ 이게 간음이고 음행이었던 겁니다. 수녀보고 간음했다고 하면 기가 찰 일이에요. 그리고 난 뒤에 주님께서 통쾌하게 모든 인간이 간음자에 해당한다는 사례를 듭니다.

마태복음 5장 31-32절에 나옵니다.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이게 뭐냐 하면, 유대인들이 자기 몸속에 이미 잠재적 간음성이 들어있는 것을 애써 억누르면서 외부로서는 간음하지 않은 자가 됨으로써 십계명을 준수한 자로서 아까 부자 청년 같이 영생을 얻고자 하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던 거예요. 그러면서도 그들은 혼인 생활을 통해 혼인의 순결성을 지키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음행을 키우는 자리를 네가 못 벗어나고 있다”라고 한 거예요. 네가 자기 정당화를 위해서 뭘 요구하느냐? 이혼 증서를 얻고자 하는 그 마음 자세 자체를 이미 간음이 네 안에 들어 있다는 증거로 본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나는 이혼 증서 받고 이혼했어.” 이게 이미 간음했다는 거예요.

“아니 그것은 ‘누가 이혼할 때는 이혼 증서를 줘라.’라고 모세 율법에 나오는데?”라고 하겠지요. “‘나는 네가 싫어’하고 내보낼 때 여자한테 이혼 증서를 써줘서 ‘나는 내가 나온 게 아니고 남편이 나를 일방적으로 쫓아냈기 때문에 나는 다른 남자하고 다시 재혼인할 수 있습니다.’라는 그러한 정서만 있으면 된다는 그런 식으로 너희들이 모세 율법을 이해했는데 모세 율법은 인간들이 이혼 증서를 원하는 그 자체가 간음죄 그 자체임을, 속에 있던 간음죄를 바깥으로 들추어내는 사회적 제도의 정당성이다.” 이 말입니다.

에서가 이런 고백을 했어요. 에서의 그 고백이 중요한데 그게 뭐냐? “에서가 가로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창 25:32). 그러니까 팥죽을 먹지 않으면 내가 죽을 것 같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평소에 야곱과 에서가 편하게 식사하면서 “형! 그 장자 명분 나에게 줄래?” “미쳤나? 나는 장자고 맏이야. 너는 동생이야. 까불지 마, 이건 내 거야.” 충분히 이럴 수 있어요.

그런데 지금 에서가 어떤 입장이냐? 지금 배가 고파요. 에서의 고백입니다. 본인이 한 고백이에요. 내가 죽을 지경이라는 거예요. 죽을 지경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통해서, 에서와 야곱을 통해서, 그 두 인물을 가지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죽음을 운반하는 채로, 죽음을 품고 태어났다는 사실’, 그리고 그 죽음의 원인은 그 모든 십계명을 하나도 지킨 게 없이 그냥 죄 덩어리로 태어났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추가적으로 율법을 시내산에서 준 거예요.

그 전에 있었던 에서와 야곱은 율법이 오기 전까지는 그것까지는 몰랐어요. 사람이 굶어 죽을 때 되니까 하나님의 언약이고 말씀이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죽느냐, 사느냐’ 이게 중요하다는 거예요. 하나님 보시기에 이 세상은 이미 혼돈에 빠진 거예요.

밥을 먹는데 손자가 하도 밥 안 먹고 돌아다니니까 할머니가 “다섯 번만 먹자, 다섯 번만!” 손자가 상당히 논리적이고 이성적이에요. 대번 메모지와 볼펜 하나를 딱 들고 옵니다. 이것은 계약이죠. 내가 옆에서 보니까 이거 반칙 같아.

보통 우리는 한번 먹고 난 뒤에 ‘한 번!’ 곧 ‘1’ 이렇게 쓰잖아요. 그런데 내 손자는 “다섯 번만 먹자” 할 때부터 벌써 ‘1’을 써요. 한 번 먹고 난 뒤에는 ‘2’라고 써버려요. 이상하게 반칙 같은 느낌이 막 드는 거예요. 왜 그럴까? 그 이유가 창세기 1장에 나오는 거예요.

창세기에서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 1:5). 이게 그 첫째 날의 특징인데, ‘저녁’은 빛이 없는 거예요. 저녁이 제거되고 난 뒤에 규정하는 것이 첫째 날이에요. 손자 말이 맞아요. 모든 것은 다 없어져요. 즉 어두움을 경유하지 않으면 빛의 세계에 들어가지 못하는 거예요.

창조한 것은 없어지라고 창조한 거예요. 인간이 태어난 것은 죽으라고 태어난 거예요. 이게 삼체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죽은 것은 ‘너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죽은 존재’라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이유를 모르죠. ‘내가 멀쩡하게 살았는데 왜 내가 죽은 존재야?’

그 이유를 장자 쪽에서, 주님 쪽에서 율법을 발생시켜서 율법으로 우리에게 계속해서 책임 추궁 들어가는 거예요. ‘율법이 없을 때는 너는 살았지만 율법이 주어진 이후에 너는 죽어 있다’라는 겁니다. 로마서 7장 9절에 나온 말씀이에요.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죄는 살아나고 나도 살아났다.’ 이게 없어요. ‘죄가 살아나면 나는 죽은 존재’가 되는 거예요. 죄가 득세해야 하고, 죄가 나를 대체하고 대신해야 하니까. 그게 바로 율법이 우리에게 제공된 이유입니다. 죄가 살아났기 때문에 그때부터는 우리가 음행하는 자가 아니라 그냥 죄인이 되는 거예요. 음행하는 자가 아니라 죄인이 되는 겁니다.

죄인은 마땅히 이 은혜에서 잘려야 되죠. 그리고 천국에서 기업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사도는 사람들을 지옥 보내기 위해서 아주 작심했어요, 작정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체(二體)’ 문제’라고 한다면 그걸로 우리는 끝났어요. 구원도 없고 그냥 지옥 가야 돼요. 끝났는데 그것이 아니고 ‘삼체(三體)’ 문제입니다.

은혜의 문제가 있습니다. 이 은혜 문제는 이렇게 돼요. ‘사랑에 의해서 움직이고, 사랑 안에서 먹고 살고, 감히 나는 그 사랑에 끼어들 수 없다.’ 이게 은혜입니다. 이게 은혜예요! 여러분이 장례식에 가면 조의금(弔意金)이 있고 부의금(賻儀金) 있죠?

조의금과 부의금의 차이는 뭐냐? 부의금은 유족들이 생계에 보탬 주라고 주는 것은 부의금이에요. 조의금은 고인이 죽었음을 확실히 하면서 고인을 애도해서 주는 것이 바로 조의금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은혜는 뭐냐? 부의금이 아니에요. 조의금입니다. “너는 확실하게 내가 보냈다는 거야. 네가 죽었다는 거야. 네 속에는 이제 내 사랑만 있다.”

삼체지요. 세 번째, 사랑만 있어서 사랑을 먹고 살고, 사랑을 마시고 살고, 모든 움직임이 사랑 아닌 것이 아무것도 없는 거, 그게 바로 은혜입니다. 그 은혜를 누가 방해하느냐? 이체(二體)가 방해해요. 내가 방해하는 거예요.

쉽게 간추리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당신은 어디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나 여기 있잖아요.” “그러면 당신은 장자와 더불어 있습니까?” “아니요. 나는 나한테 여기 있는데요.” “그러면 당신은 없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거예요. ‘장자 앞에 없으면 그 사람은 있어도 없는 거고, 살아도 죽은 존재’예요.

시편 51편에서 다윗이 비로소 은혜를 이야기해요. 내가 완벽하고 완전해지고 나의 의를 쌓는 것, 이것은 내가 있을때나 하는 짓이에요. 그러나 이제 간음죄와 살인죄를 거쳐서 비로소 내 안에 내 죄가 살아 있을 때, 내가 죄로 만들어진 것을 알았을 때 그 죄를 이길 수 있는 것은 주님의 은혜, 시편 51편의 용어대로 하면 ‘예루살렘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 그 은혜가 내 안에 살아 있으면 이것은 바로 은혜에 이미 들어온 사람이에요. 그리고 천국 백성입니다.

지금 그 이야기를 오늘 본문에서 하고 있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장자의 명분과 음행을 이렇게 연관시키는 거예요. 음행을 생각하는 자체가 추잡하고 더러운 짓이라니까요. ‘음행했다, 안 했다’가 성립이 안 되는 거예요, 그 사랑 안에서는!

사랑에 대해서 아주 간결하게 묘사한 표현이 있습니다. “사랑은 창밖에 빗물 같아요~” 사랑은 창밖의 빗물 같아요. 심심하거든 양 수경의 노래를 들어보면 알아요. 한번 보세요. 사랑은 ‘창밖에 빗물’이죠. 내가 창 안에 있으면 어떤 노력도 해도 사랑은 나한테 오지 않습니다.

올 수가 없어요. ‘창밖에 빗물’이기 때문에 사랑을 퍼부어도 내가 만든 성경 지식과, 이성과, 논리와, 나의 윤리, 도덕에 가로막혀서 사랑은 나한테 오지를 않습니다. 저쪽 자리는 본체의 자리예요. 이쪽 자리는 본체도 아니면서 딱 여기까지, 본체도 아니면서 신앙인도 아니면서 신앙인 척하는, 모방하고 흉내 내는 그 자리가 이 자리예요. 은혜가 끊어진 자리예요.

그런데 어느 날 사랑이, 사랑이 여기에 왔어요. 문제 하나 내겠습니다. 자, 사랑은 창을 못 투과하고 창밖에 빗물같이 있는데 그 빗물이 내 가슴에 이렇게 맺혀버렸다. 질문은 뭐냐? ‘어떻게 바깥에 있는 사랑이 내 안에 들어왔습니까?’ 이게 질문입니다.

정답은,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성도 자체를 창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내가 창밖에 나간 것도 아니고, 사랑이 창 안으로 들어와서 나한테 맺힌 것도 아닙니다. 주께서는 성도를 죽이고 말씀대로 주님의 은혜, 지옥과 천국을 가름하는 십자가 속의 인물로 우리를 만들어버렸어요.

그게 바로 갈라디아서 2장에 나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1절에 성도를 주께서 어떻게 사용하는가가 나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요 계시 있잖아요. 사도바울의 고백 또는 계시를 사도바울만 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 받는 모든 성도들로 하여금 매일 삶 속에서 ‘내가 의롭게 되려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를 헛되이 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나를 십자가 선상의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거예요. 십자가 증가하는 선상의 존재로.

그러니까 성도는 뭐냐? 삼체(三體), 제3의 존재예요. 이것은 이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다윗이 있을 수 없듯이, 사도 바울이 있을 수 없듯이, 사도 바울이 새로 만들어졌듯이 오늘날 성도라는 것은 인간이 교회에 나와서 기대하는 성과가 아니라, 성도는 주님 쪽에서 장자가 움직여서 나를 사랑으로 품을 때 새롭게 없던 데서 생긴 것이 성도예요.

성도는 숫자로 헤아리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 + 성도는 = 몇 명이다.’ 두 명? 아니에요. 예수님 하나 그리고 성도 하나, 예수님 하나 안에 성도가 다 포함된 하나가 되는 거예요. “너희 교회 교인 몇 명이야?” 그런 건 잘못된 거예요.

끝으로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바로 갈라디아서 4장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두 언약에 대해서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26절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그런데 어머니가 뭐냐? 27절에 “기록된바 잉태치 못한 자여” 잉태치 못했어요. 자식은 없는데 어머니가 있는 거예요.

잉태하지 않은 자, 잉태하지 않은 자의 어머니만이 하나님의 백성의 어머니가 된다는 거예요. 결국은 뭐냐? 음행이란 원래 하늘나라에 자리가 없는 모든 자가 음행자가 되는 거예요. 하늘나라의 자리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본처, 그 자리에 들어설 수 없는 자, 그러면서도 엉터리 자리, 은혜에서 잘린 자리를 그냥 쥐고 있는 자들이 바로 이게 음행자입니다. 장자의 명분과 결부돼서 규정된 음행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성도는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로마서 8장 18절에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왜? 이 자리는 우리가 떠날 자리이기 때문에. 현재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든지 우리는 그냥 방랑자예요. 그냥 떠나야 될 자리예요.

이 자리가 우리 자리가 아닙니다. 우리 자리는 장차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이 있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 누가 가느냐? 로마서 8장 15절에 보면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우리가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고 이제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그 자리, 양자의 명분을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 귀하게 여기게 된, 이것은 죽고 난 뒤에 다시 살아야 가능한 자리, 내가 만들지 않았지만 주께서 하나로 품어준 자리, 주님 자리에 함께 동반하게 만든 그 자리, 그 아들에게만 그 장차 올 영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을 여러분 당하십니까? 어떤 일을 당해도 상관없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이곳을 떠나는 즐거움이 있고, 영원한 영광의 자리에 들어갈 날만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하신 내력을 얼마나 우리가 방해하고 핍박을 했는지. 내 잘남만 고수하면서 살아왔던 그것, 뭐가 은혜인지도 모르고 살아온 저희의 모습이었던 것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일방적인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장자의 명분이 되게 하셨다는 이 기쁨을 유지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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