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으로 남은 자
2025년 11월 5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19:15-18
19:15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로 말미암아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19:16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19:17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19:18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사람들은 자신이 말한 것으로 그대로 미래에 실현되기를 원합니다. 내일에는 내게 좋은 일, 유리한 일이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반면에 선지자에게 있어 내일은 선지자에게 내뱉아진 예언에 의해 조성되는 내일입니다. 그것은 현실 사태는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지어져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약속과 무관한 일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인간들에게 있어 땅은 그냥 자기 생존을 위한 땅입니다. 해외 여행가서 만나는 모든 현지민이나 여행자들 모두 다 땅의 의미는 생계와 목숨 부지를 위한 땅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데려다가 옮겨놓으신 땅은 그냥 ‘땅’이 아니라 ‘약속의 땅’입니다.
‘약속의 땅’은 ‘약속’이 구현된다는 조건 하에 사람들이 거주하게 되어 있습니다. 즉 사람들에게 중요한 생존이나 생계가 우선이 아니라 약속이 우선인 땅이 ‘약속의 땅’입니다. 따라서 ‘약속의 땅’에서 살 수 없다면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천국이란 약속이 구현된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속의 땅’에서 ‘약속’이 사라졌습니다. 이는 권세자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권세로 덮혀버렸기 때문입니다. 백성들도 ‘약속 없는 삶’을 그다지 싫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약속 있는 하나님’ 대신 ‘약속 없는 신’이 국가적으로 대유행이 되었고 정책이 되었고 헌법이 되었고 대세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약속 없는 신’은 바알과 아세라 신입니다. 이들 신의 본질은 ‘인간 욕망의 구현’입니다. 인간들의 욕구와 욕망은 자기 목숨 부지 본능에서 비롯된 겁니다. 즉 신의 본질을 그 신에게 비는 자신들의 욕망으로 채워놓은 겁니다. 가나안 원주민들이 줄곧 믿어왔던 남신과 여신은 종족의 번성과 번영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너, 나 할 것 없이 이 신에 대해서 거부감이 일어날 리가 없습니다. 인간들 자기네들 끼리라도 소통이 잘되고 이 신 중심으로 단합이 자연스럽게 형성됩니다. 자신의 욕망을 달성해줄 수호신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은 인간들에게 행복감을 안겨줍니다. 신은 인간에게 있어 마치 반려동물 같은 가치로 다루어집니다.
신에게 전적으로 매달릴 필요는 없고, 아쉽다든지 다급할 때나 신을 찾아 기적으로 도움을 받으면 그만이라는 겁니다. 반면에 선지자는 달랐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제시한 예언 안에는 폭력성이 들어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왕상 19:17)
즉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이 이해는 ‘생존의 땅’이 아니라 ‘생명의 땅’으로서 약속의 땅을 정립하시고자 합니다. ‘목숨’과 ‘생명’의 차이를 모르는 자는 ‘약속의 땅’에 살 자격이 없습니다. 인간의 목숨은 자신에게 더욱 매달리게 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은 인간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임을 알리십니다.
‘동충하초’가 있습니다. 겨울에서는 벌레 같지만 여름되면 풀이라는 겁니다. 개미에 곰팡이균이 감염되면 개미는 곰팡이의 지시가 개미 근육에 스며들어 개미를 조종합니다. 그리고 감염된 개미로 하여금 지상 25cm위 나무 줄기에 이 꽉깨물고 매달리게 하고 그 죽어가는 개미 머리에 곰팡이 포자줄기가 길게 나와 포자를 사방으로 퍼뜨리게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생명은 인간의 죽음을 요구하고 그 요구된 죽음을 통해서 생명이 피어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이 원리에 따릅니다. 이 세상은 생명은 오로지 예수님 죽음에서 피어납니다.(요 6:55-56) 이처럼 선지자의 예언을 통해 칼을 쓰는 폭력자가 오늘 본문가운데 세 명 등장합니다.
하나는 하사엘, 하나는 예후, 하나는 엘리사입니다. 하사엘은 이방나라 아람 왕입니다. 예후는 북이스라엘 군대장관이었다가 기존의 왕을 죽이고 왕이 된 사람입니다. 소위 이 두 사람은 권세자입니다. 약속을 억누르고 있는 권세자에 대해서 더 잔혹한 권세자로 기존 권세자를 거둬냅니다.
반면에 엘리사는 선지자입니다. 인간의 권세자는 하나님의 약속을 덮고 드러나지 못하게 하는 반면에 예언자가 내뱉은 말씀의 권세는 약속을 작용시켜 내일, 혹은 미래의 현실을 만들어 냅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착각은 바로 이 대목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엘리야 그는 자신의 말씀의 권세를 기존의 세상 권세와 같은 성질을 발휘하는 것으로 오해했습니다.
즉 내가 예언의 말씀은 세상을 향하여 외치면 세상은 기존 권세의 효과처럼 동일한 효과로서 하나님의 일을 하리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세미한 말씀으로 찾아오신 주님 앞에 다음과 같이 변명합니다.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왕상 19:14)
그러나 하나님의 준비된 예언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왕상 19:18) 여기서 ‘남은 자’의 등장이 중요합니다. ‘남은 자’의 특징이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겨우 구원받은 자가 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남은 자 될 자 주변에 있는 권세자들을 알아서 폭력으로 처리해주신 그 활동의 결과로 인해 남게 된 자들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이 구원된 것에 대해서 일체 자기 공로를 말할 수 없음을 아는 자입니다. 일방적으로 남아 있게 된 자들인데 신약에 와서 이들이 바로 ‘구원받기로 창세 전에 선택된 자’가 됩니다.
로마서 11:4-6에 보면, “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예언이 예언으로 진행되면 그 나타난 현상이 곧 나타나고 또 나타나는 현실입니다. 따라서 성도만이 압니다. 세상 사람보기에 미쳤다고 할지 몰라도 이 미쳤음을 능가하는 미쳤음입니다.(고후 5:13) 하나님의 선물로 구원이 된 줄 아는 그들이 오늘날 선지자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목숨보다 주님의 생명을 지키는 자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55강-열왕기상 19장 15-18절(예언으로 남은자) 251105-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 열왕기상 19장 15-18절입니다.
열왕기상 19:15-18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로 말미암아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흘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지금 이 말씀의 상황이 어떤 상황이냐? 하나님의 공로로 주어졌던 땅이 있어요. 그 땅이 현재 이스라엘 땅인데 그 땅을 성경에서는 ‘약속의 땅’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사는 땅은 그냥 땅이에요. 그냥 땅, 대구에 떨어지나 화천에 떨어지나 인간에게는 거기에 땅이 있죠.
화천이 약속의 땅입니까? 그러면 대구가 약속의 땅이에요? 서울이 약속의 땅입니까? 이 땅에는 그저 땅뿐이에요. 땅에다가 ‘약속’을 붙일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그 사건이 덮일 때 그 땅은 그냥 일반적인 땅이 아니고 약속의 땅이 되는 겁니다.
인간들이 사는 땅은 사람이 밥 먹고 살기 위해서 기거하는 땅이에요. 캐나다 이민 간다, 미국 간다, 유럽에 놀러 간다, 동남아에 관광 간다…, 돈 들여서 비행기 타고 한번 가 보세요. 거기 가서 보면 만나는 것은 사람만 만나요. 약속을 안 만나요. 그걸 반대로 생각해서 베트남에 살다가 다시 고향 대구로 왔다.
이 대구에 오면 그게 약속입니까? 아니죠. 역시 베트남에 살아도 사람 만나고, 대구에 살아도 사람 만납니다. 이것은 사람의 땅이에요. 사람의 땅의 특징은 사람의 노력과, 애씀과, 희생과, 인간의 지혜로 문명을 이룬 땅 그게 사람의 땅이에요. 사람의 땅에는 천국이 없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그 이유가 오늘 본문 이야기예요. 사람의 땅은 천국이 없고 하늘나라도 없는 이유가, 사람의 특징은 그 권세로 하나님의 예언을 감추는 기능이 있어요. 감춰 버립니다. 권력으로 억눌러서 예언을 감춥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엘리야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냐?
“사람의 땅에서 너희들 행복하게 살아라.” 그걸 이야기한 게 아니고, “하나님이 남겨준 약속을 너희 어떻게 했어?” 쉽게 말해서 하나님은 그 땅에 약속을 남겼는데 인간들이, 권세자들이 그 약속을 덮어 버렸어요. 감춰 버리고 말았던 겁니다. 약속을 감추니까 약속은 밑으로 들어가고 위로는 뭐가 덮치느냐? 인간의 권세가, 권력이 덮치고 만 거예요.
권력이 덮치니깐 그 약속의 땅에 있던 이스라엘의 일반백성, 하나님의 약속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던 그들은 하나님을 보는 게 아니고 권세자의 비위를 맞추려고, 높은 사람의 그 화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벌벌 떨면서, 벌벌 떨면서 살고 있었어요.
그런데 하나님 보기엔 기가 차지요. “너희들이 인간 권세자 앞에서, 왕 앞에서 벌벌 떨면서, 폭군 앞에서 떨면서 사는데 그 땅 자체는 누가 준 거냐?” 하나님이 준 거예요. 하나님이 주신 땅인데 그 땅의 왕은 뭘 믿느냐? 하나님을 믿지 않고 바알 신을 믿어요.
바알 신의 부인이 ‘아세라’인데요. 둘 다 우상인데 바알이 남편이고 아세라는 그 부인이에요. 때로는 엄마도 되고 부인도 되고 그래요. 때로는 여동생도 되고요. 우상의 특징은 뭐냐? 남자 신 따로 있고 여자 신 따로 있는데, 신이 남성성 신과 여성성이 있다는 것은, 옛날 사람들이 신을 섬길 때는 신을 섬기는 데서 오는 이익을 얻기 위해서 신을 섬겼거든요.
그 이익이 뭐냐? 자식 잘 낳아서, 그저 튼튼하게 낳아서 대대로 우리 가문이 번창하기 위해서 그들은 신을 믿었습니다. 그건 뭐냐 하면, 자기의 소망이죠. 나의 소망을, 신이라는 껍질에다가 자기 욕망과 소망을 담아요. 그렇게 담아서 신에게 빌 때는 거기에 담겨 있는 내 욕망이 속히 이루어지기를 고대하면서 신의 이름을 부른 겁니다.
쉽게 말해서 ‘신이시어, 내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시죠? 신이 정말 자비롭다면 내가 정성을 다하여 빌 테니까, 신께서 원하는 걸 내가 해줄 테니까 신에게 담겨 있는 내 소망도 빨리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그렇게 빌었던 거죠.
사람들이 평소에는 자기가 믿는 신을 그렇게 열심히 안 찾아요. 왜 평소에는 안 찾느냐 하면 답답한 게 없으니까요. 답답한 게 없으니까! 아까 제가 기도 제목을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님은 애완견이 아니라’ 했죠. 반려동물 아니에요.
그런데 인간들에게 있어서 신은 이미 자기 욕망이 우선이기 때문에 예수가 됐든 하나님이 됐든 뭐 삼위일체가 됐든 어려울 때만 찾아요. 어려울 때만 신을 찾는데 평소에는 안 찾아요. 왜? 하나님은 내 옆의 개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필요할 때만 찾는 인형 같은 존재니까 필요할 때만 써먹고 나머지는 자기가 주인공이니까.
‘신이시여, 나를 위해서 필요한 신이 되어달라.’는 이런 식이 이스라엘의 종교 분위기였습니다. 그게 그 당시 종교 분위기인데 그것이 자기 본성에 맞고, 인간은 모두 욕심이 있잖아요. 인간은 자기뿐이니까, 나도 너도 그것이 본성에 맞으니까 온 국민 99%가 여호와를 버리고 바로 자기의 욕망을 추구하는 그 남신과 여신,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데 조금도 주저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전부 다 같은 마음으로 우상을 섬기기 때문에 누가 여기서 잘못됐다 탓할 수도 없었습니다. 특히 이 종교, 자기의 원하는 것을 빌면 들어주는 종교를 수입한 자가 있어요. 그게 누구냐 하면, 바로 ‘이세벨’이라는 아합의 부인이었습니다.
통치자의, 권세자의 부인이었어요. 윤석열이 있다면 그 옆에 김건희가 있는 것, 예를 들면, 예를 들면 그렇습니다. 실제로 그렇다는 말은 아니고요, 예를 들면 윤석열 옆에 있는 김건희같은 거지요. 하나님의 약속이 빠지니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상당히 말이 잘 통하고 단결이, 결집이 잘 되는 거예요. 서로 알아듣는 이야기를 하니까.
그런데 그 틈을 비집고 ‘인간의 욕망과 관계없이 하나님은 일하신다’라는 그러한 자가 등장했습니다. 엘리야입니다. 엘리야는 바알과 아세라와는 질이 다른 하나님을 믿었어요. 그게 여호와 하나님이었습니다. 자, 여호와 하나님의 특징은 뭐냐?
여호와 하나님은 약속의 땅을 천국 가는 땅으로 만들기 위해서 인간이 욕망하는 거 말고 하나님의 뜻을 인간에게 제시하는데 그 일을 하는 선지자가 엘리야 선지자였습니다. 그 엘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 약속을 전하니까 먹히던가요, 안 먹히던가요? 전혀 먹히질 않았어요.
왜? 사람들에게 신이라 하는 것은 필요할 때만 잠시 이용할 뿐이지, 나를 위해서 신이 있지 신을 위해서 내가 있다는 생각이, 그들은 전혀 그런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엘리야의 말을 듣지를 않는 거예요. 엘리야의 말은, 그것이 예언입니다.
엘리야는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엘리야의 말을 이렇게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말을 하고 또 신에게 빈다고 해서 그게 현실이 됩니까? 안 되지요.” 엘리야는 그걸 이야기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의 말은 현실화되지 않습니다. 현실로 전환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만이 현실로 전환됩니다.”
바로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현실, 하나님의 약속을 이렇게 전합니다. 오늘 본문 열왕기상 19장 15절에,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여기서 ‘저’는 엘리야입니다.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로 말미암아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라고 되어 있어요.
하나님 등장했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던 엘리야 등장했죠. 엘리야 등장하고 난 뒤 엘리야의 약속된 그 내용에 누가 등장하느냐? ‘하사엘’이 나옵니다. 그다음에 16절에 보면,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여기에 ‘예후’가 나옵니다. 여호와 나오고, 엘리야 나오고, 하사엘 나오고, 그다음에 예후 나오죠.
그다음에 또 한 사람 더 나옵니다. 16절 계속 보면 “…또 아벨므흘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이게 약속이었어요. 누가 등장했는가? 하사엘 등장하고, 예후 등장하고, 엘리사 등장합니다.
왜 등장하는가? 등장하는 이유가 17절부터 나옵니다. 17절,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폭력적이죠. 하나님의 약속인데 하나님의 약속의 특징은 뭐냐? 폭력적이죠.
“너 딱 기다려! 이 하나님이 너를 죽여 줄게.” 이게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사람들이 여호와의 약속을 안 믿는 이유를 아시겠죠? 사람들은 살고 싶어요. 그냥 살고 싶은 게 아니라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사람의 행복은 뭡니까? 내 욕구와 욕망을 충족하는 것을 행복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자기 능력으로 뭔가 잘 안됐다, 싶을 때는 누구한테 의지하는가? 전지전능한 하나님께 내 소원을 들어달라고 비는 거, 이게 인간들이 채택할 수 있는 종교, 신앙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하느냐? “그것은 약속이 아니야. 그것은 네 약속이지 내 약속이 아니야.”
하나님에게서 인간에게 나오는 약속이 아니고, 인간에게서 억지를 부리면서 “하나님께서 내 소망을 들어주소서”하고 인간들이 지어낸 약속, 그 약속은 하나님의 계약서에 포함이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계약한 게 아니에요. 위에서 온 것이 아니고 아래에서 위로 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거부합니다.
인간과 인간의 계약은 소용없습니다. 인간과 인간의 말도 소용없습니다. 왜 저희끼리 잘 통하기 때문에. 그 틈새 사이에 여호와의 말씀이 들어가면서 하나님께서는 ‘죽인다’라는 이야기를 해요. 여러분, 죽는다는 것이 과연 이게 섭섭한 이야기입니까? 아주 화나는 이야기고 기분 나쁜 이야기예요. 죽는다는 게!
개미가 있는데요. 개미에 어떤 그 곰팡이가 들어가면 그 개미는 자기 집에서 기어 나와서 지상에서 딱 25cm 되는 그런 나무의 풀잎 위에서 그 풀잎을 자기가 이빨로 꽉 깨물고 거꾸로 뒤집혀 서요. 그 개미가 미쳤죠. 완전히 미친 거예요. 미친 개미예요.
그 미친 개미의 몸이 서서히 곰팡이로 썩어갑니다. 개미 머리로부터 곰팡이 포자가 25cm 아래로 쫙 내려오면서 퍼지는데 그걸 가지고 ‘동충하초’라고 이야기합니다. ‘겨울에는 벌레 같은데 여름 되면 풀 같은 것’ 한의학 의학에서는 그게 상당히 보약이 된다는 거예요.
여기서 기이한 게 뭐냐? 그것은 개미가 곰팡이의 균에 감염된 거잖아요. 곰팡이는 죽은 자한테 붙어야 살아요. 곰팡이가 개미를 죽여놓고 곰팡이는 거기서 살아서 번식을 하게 돼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특징은, 그 사람이 산 채로 계약하지 않아요. 그 사람을 멀쩡하게 놔둔 채로 약속은 오지 않습니다.
약속은 그 사람을 동충하초처럼 죽여놓고, 죽여가면서 약속은 약속대로 생생하게 뽑아냅니다. 아까 집사님께서 월요일 대구 성경 공부한 것을 요약해서 저한테 들려줬잖아요. 요약한 것 가운데서 굉장히 중요한 대목이 하나 있었어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목숨보다 생명을 더 소중히 여긴다”라는 말이에요.
인간의 세계에서는 목숨이 생명이고 생명이 목숨이죠.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 앞에서는 우리의 목숨은 쓰러질 개미 목숨이고, 하나님의 생명은 ‘인간의 목숨보다 예수님의 생명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를 죽여가면서 주님의 생명과 그 약속은 죽은 우리를 통해서 발현’되는 겁니다.
그렇게 발현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이 세상 인간들의 생각과 권세로 꽁꽁 감춰졌는데 하나님의 약속은 그 권세를 뜯어내고 그 안에서 그걸 드러내는 거예요. 또 쉬운 예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일란성 쌍둥이, DNA가 거의 100% 동일해요. 처음 낳았을 때는 부모도 못 알아봐요.
‘둘이 똑같네!’ 왜? DNA가 똑같으니까, 카피가 돼 있으니까 거의 100%로 같아요. 그런데 커가면서 “어? 일란성 쌍둥이인데도 다르네?” 이러거든요. 시작은 DNA인데 살아가면서 단백질의 입체적 구조가 달라져요. 환경의 영향 때문에 단백질의 입체적 구조가 달라집니다.
이를테면 예언은 DNA, 그 나타난 현상은 단백질. 단백질의 결합 정도, 구조가 다 달라지니까 딴 사람 되는 거예요. 단백질이 달라지는 것은 환경 요인 때문에 달라지겠죠. 동일한 DNA인데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그걸 두고 ‘같은 데서 나온 다양성’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모든 인간은 아담에서 DNA를 받아요. 아담과 하와, 아담에서 나왔는데 아담에서 나온 85억 가까이 되는 모든 인간이 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환경 자체로 하여금 인간 쪽에서 다시 처음으로, 인간이 범죄해서 죽게 된 그 전의 상태로 다시 되돌아가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차단시켜 놓은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인간이 기도하고 애쓴다고 처음에 하나님과 아담이 만났던 그 여호와 하나님을 찾아가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막아 놓은 거예요. 인간은 구원이 안 됩니다. 왜? 본인의 노력으로 구분 안 되는 이유는 차단했기 때문에. 자기 노력으로 천국 가는 것을 못 가게 만들어버렸습니다.
그 이야기가 마태복음 6장에서 우리에게 친근한 말씀으로 열리고 있습니다. 33절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했잖아요. 천국에 대해서 언급을 했어요. 그의 나라, 하나님 나라.
그런데 뭐가 문제냐 하면, 34절에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이게 무슨 말이냐? ‘오늘의 내가 내일의 뜻을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의 예언과 약속과 말씀에 의해서 차단되어 있다’ 그 말이죠.
그러면 내일의 내용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예언의 말씀과 약속의 말씀으로 마련되는 거예요, 장만되는 거예요. 내가 기대하고 희망한다고 내가 원하는 내일, 모레가 생겨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이런 거 한번 생각해 보신 적 있습니까?
사람들에게 물어보세요. “내일 어떤 일이 있었으면 좋겠습니까?”라고 물으면 백 퍼센트입니다. “나한테 종일 유리한 일만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너한테 말고 나한테. 이게 모든 사람의 희망이거든요? 그런데 선지자한테 물어봅시다, 엘리야나 엘리사한테. “내일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백 퍼센트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일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일어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말씀대로 염려하지 말고 믿으면 될 게 아니겠습니까? “하나님 말씀대로 믿겠습니다”하고 나서잖아요. 그게 인간은 안 돼요. 왜 안 되느냐 하면, 대부분의 사회생활은 자기한테 딱 필요한 만큼만 알아요. 꼭 필요한 만큼만 알고 그만큼만 상대에게 다가가게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배고픈 사람이 빵을 먹고 싶은데 마침 빵집이 있단 말이죠. 반가워서 돈을 주고 빵을 사면 되잖아요. 그런데 빵집 주인이 “잠깐만! 좌파입니까, 우파입니까?” 배고프면 빵 사 먹고 밥 사 먹으면 되지 그걸 왜 물어요? 물을 필요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병원에 환자가 왔습니다. “기침이 나는데 진찰 좀 해주세요.” “그래요? 잠깐만! 당신 경상도 사람이요, 전라도 사람이요?” 혹은 “당신 흑인이요, 백인이요?” 아니면 “당신 공산주의 사람이요, 자본주의 사람이요?” 그걸 의사가 물을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전혀 없죠. “당신은 절에 갑니까, 교회에 갑니까?” 그걸 물을 필요가 없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 주님은 묻습니다. “내가 너한테 넘겨준 약속이 무슨 뜻인지를 네가 아느냐?”를 물어요. 왜냐하면 약속의 땅에는 약속의 사람만 와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하나님의 일관성과 하나님의 애씀과 노력을 우리가 이해하세요. 약속의 땅 천국은…, 제가 아까 인간은 구원받지 못한다고 했죠. 인간은 천국에 못 갑니다. 천국에 못 가는데 천국을 만들었다는 것은 약속을 아는 사람만 그 천국에 가게 되어 있어요.
어떤 사람이 영어와 수학 학원을 차렸는데 애들이 100명이나 돼요. 원장이 신이 나서 이번 해에 대학 들어간 애들 명단을 다 붙여놨어요. 명단 보니까 꽤 되겠지요. 그런데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 학원이 뭐예요. 학원이 대학 당국입니까? 아니죠. 교육 당국 아니죠.
학원은, 입시 준비하는 고등학생이 대학에 들어가는 데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곳입니다. 그렇잖아요. 학원이 대학교가 아니잖아요. “대학교 들어가기 위해서 이렇게 준비하시면 됩니다.” 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늘나라를 봅시다. 어떤 교회가 하늘나라 들어가는데 사람을 끌어모으는 학원을 자처한다고 봅시다.
“우리 교회 나오시면 백 프로 천국 보내줍니다.” 우리 교인 가운데 어느 집사, 어느 집사… 합격했다고 복도에 명단 붙여 놓으면, 목사가 천국 가는 그 명단 붙여 놓으면 하늘나라까지 통합니까, 안 통합니까? 하늘나라에 안 통합니다. 왜냐하면 하늘나라는 성적 좋다고 가는 것이 아니고 대조를 해요.
하늘나라는 이미 수급제에요.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교회라는 이름으로 수만 사람을 자기들끼리 믿음 좋다고 복도에 명단 붙여 놓고 그렇게 해도 막상 하늘나라에서는 “명단 대조 들어갑니다. 어느 교회 출신입니까?” “우리 교회 출신입니다.” “그래요? 가만있어 보자, 성함이?” “김건희가 아니고 이건희입니다.” 주님이 “이건희, 이건희 집사라…, 천사야! 명단에 있나?” “없는 것 같은데요?” “지옥 보내라.”
죽고 난 뒤에 천국 가는 것도 인간이 만들어낸 욕망이에요. 인간이 만들어낸 욕망이라는 말은, 그 욕망이 살아있는 한 ‘나는 죽기 싫다’ 이 말이거든요. ‘내 목숨이 붙어있을 때 내가 잘해서 죽고 난 뒤에는 천국 가겠다’라는 그 욕망도 내가 사는 보람과 이유와 의미와 근거로 장착되어 있어요.
따라서 엘리야가 말하는 약속은 뭐냐? ‘네가 살아있는 이유를 네 쪽에서 만들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제공되게 되면 그게 네가 존재하는 이유가 된다’라는 겁니다. 그 이유를 받은 자가 누구냐? 선지자예요. 그러면 여기서 여러분들이 이렇게 생각하면 간단합니다.
“목사님, 엘리야는 구원받았습니까?” 물을 수 있죠. 엘리야도 명단에 없으면 탈락이잖아요. “엘리야 구원받았습니까?” 물을 수 있단 말이죠. 마태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산에 올라갔어요. 이스라엘 가서 그 산에 저도 올라가 봤어요.
그 산 이름이 변화산인데 올라가 봤어요. 걸어서 가지 않고 차를 타고 꼭대기까지 올라가면 큰 예배당이 있어요. 예수님과 제자들 몇이 함께 변화산에 올라갔는데 그때 갑자기 예수님의 얼굴이 해 같이 빛나고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어요.
그때 누가 나타났는가?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더불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이야기를 하는 내용이 뭐냐? 마태복음 17장 바로 앞에 있는 16장 28절에 보면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너희 중에서 다는 아니고 세 명 정도는 하늘나라를 볼 것이다’하고 마태복음 17장으로 넘어가니까 거기에 누가 합격되어 있습니까? 엘리야 합격되어 있죠, 모세 합격되어 있죠. 여러분 부럽지 않습니까? 모세가 고생하고 엘리야가 고생한 건 다 알아요.
이 땅에서 고생했지만 forever, 영원히 확정된, 영원히 살 거주지가 확정된 곳은 천국입니다. 이 땅은 임시처에요. 왜 임시처인가? 이 땅은 약속의 땅이 아니에요. 약속이 빠져있는 땅이고 창세기 3장 17절에 보면 저주받은 땅이에요. 저주받은 땅에서 인간은 발생해서 그중에서 한쪽은 영원히 지옥 가고, 한쪽은 영원히 천국 갑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6장에서 ‘너희는 그 나라 의를 구하라’고 한 거예요. 그 나라 의를 구하면 갈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선 아니라는 거예요. ‘네가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는 거예요. ‘천국이 없다.’가 아니라 있어요. 모세도 갔고 엘리야도 갔어요. 우리 선배들 갔습니다, 예수님 거기 계시고.
가고 싶은데 주님의 천국에 조건이 있어요.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마 6:34). 또는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마 6:31-32). 이런 것들은 지옥 갈 자들이, 불신자들이 걱정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 이게 예수님께서 산 위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보고 가라는 이야기입니까, 못 간다는 이야기에요? 현재 우리 상태로서는 갈 수가 없다는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먼저 합니다. 그런데 이 점에 대해서 우리가 굉장히 섭섭하게 여기면 안 돼요. 주께서 ‘넌 너의 노력으로 못 간다’라는 말은 네 노력을 너에게서 빼면 된다는 거예요.
너의 애씀과 너의 안타까움과 그리고 너의 노력, 이런 것이 너의 인생을 온전히 새로운 인생으로 달라지지 않게 만드는 조건이에요. 우리를 새롭게 하지를 못합니다. 괜히 힘 빼지 마시고 용쓰지 마세요. 주께서는, 우리가 애쓴다고 해서 우리를 구원하는 게 아닙니다.
자, 이제 여러분들이 궁금해하는 것, ‘우리가 애써도 안 되고, 우리는 이미 욕망이 있는데 이것도 용납이 안 되고 힘써도 안 된다면 그렇다면 누가 들어갈 수 있습니까?’ 당연히 그런 질문이 나와야 되죠. 그 질문이 오늘 본문 열왕기상 19장에 나옵니다.
18-19절에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라고 되어 있어요. 이 대목을 다시 읽어드리고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인을 남기리니”라는 말을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했어요.
왜냐하면 엘리야가 열왕기상 19장 10절에서 “아무도 없고 나만 남았습니다.”라고 이야기해요. 나만 남았다. 엘리야는 자기만 여호와 믿고 아무도 믿는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14절에도 “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오직 나만 남았다는 거예요. 지금 엘리야가 실수하고 있어요. 엘리야는 하나님의 예언자로서 선지자로서 열심히 하다 보니까 열심히 하는 자기는 내 열심으로 구원이 되는 줄 오해했습니다. 왜? 하나님을 위해서 목숨까지 내놨으니까 나 같은 인간만 구원되지 다른 사람 누가 구원되겠어요? 그런데 이건 착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 주변에 3인을 두었어요. 세 사람을 두었는데 하나는 바로 하사엘, 또 한 사람은 예후고, 또 한 사람은 엘리사를 두었어요. 엘리야가 중간에 있다면 세 명의 사람이 하나님의 예언에 의해서 말씀대로 미래에, 내일에 등장합니다. 이 세 명 등장의 공통적인 특징이 뭐냐? 폭력적이에요. 폭력적입니다. 죽이는 거예요. 바알과 아세라를 죽이는 거예요.
이 말씀이 이런 뜻이에요. “엘리야야. 네 열심으로 신앙생활을 하느냐, 아니면 천국 못 갈 사람을 폭력적으로 다루었기 때문에 너만 남았느냐?” ‘remnant’, 남은자, “네가 남겨져서 구원받느냐, 네가 애씀으로 하늘나라에 가느냐?” 이걸 묻는 겁니다, 이걸 묻는 거예요.
어떤 분은 이런 질문을 할 거예요.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엘리야에게 이야기했고, 또 엘리야 보고 예후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예언했고,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예언을 했는데 엘리야가 과연 시킨 대로 했는지 하사엘과 예후와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었는지 뒤에 찾아보니까 엘리야가 기름 부은 자가 아무도 없어요.
엘리야가 하나님이 시킨 대로 그들에게 기름 부은 공로로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이것은 엘리야의 행함보다 엘리야에게 준 말씀이 엘리야의 행함을 덮어 버린 거예요. 엘리야에게 찾아온 말씀이 엘리야를 덮고, 또 하나님께서 새롭게 뽑아낸 자로 하여금 그 듣게 하는 방법이 폭력적으로 덮어버려요. 바알과 아세라를 믿는 자들을 죽여버려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떤 사람은 또 이렇게 이야기할 거예요. “목사님 말씀대로 하면 하나님께서 천국 가는 백성들을 남기기 위해서 지옥 가는 인간들을 폭력적으로 다 조져버리고 죽인다는, 그게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말이죠? 그런 뜻이죠?”라고 말할 거예요.
그 말은 ‘나는 예수 믿으니까 됐고,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지진이든 뭐든 일으키고 해서 전체를 다 죽여버리는 그런 현상을 내가 목격하고 싶다’ 이 말이죠. ‘우리 애 건드리는 애들 다 병들고 망해 버려라.’ 이런 거예요.
그런데 그에 대한 답변이 창세기 15장 16절에 나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어딜 가느냐? 아브라함의 자손이 이삭이고, 이삭 자손이 야곱이고, 야곱 자손이 요셉이잖아요. 아브라함의 자손 야곱을 하나님께서 가뭄을 일으켜서 어디로 가게 하느냐? 애굽으로 가게 해요.
애굽 나라에 가게 되면, 거기에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구원받아야 할 약속에 속한 약속의 사람도 애굽에 살고, 대부분은 구원받지 못할 애굽 나라 사람들도 애굽 나라에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애굽에서 키웁니다.
무려 400년 동안, 그 당시 인간 수명이 120살이니까, 4대 동안 거기서 하나님이 히브리인, 아브라함 자손의 숫자를 늘렸어요. 늘이는 가운데서 악한 자들, 하나님의 약속을 모르는 자들이 굉장히 심하게 폭력적인 권세로 하나님의 약속을 억눌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뭘 하시냐, 이렇게 하겠죠?
거기에 대한 답변이 창세기 15장 16절에 나옵니다. “네 자손은 사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 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이 말은 “하나님이여, 왜 예수 안 믿는 사람이 이렇게 많습니까? 빨리 그들을 불바다 만들어 주세요.” 하면 하나님의 답변이 이렇습니다.
“아직까지 그들의 죄악이 숙성되지 않았다.” 지옥도 지옥의 열매가 되어야 갈 수 있거든요. “지옥 갈 열매로 여물지 않았다, 그러니까 참아라. 내가 반드시 말씀대로…” 십자가의 동충하초, 예수님 자신의 죽음에서 나오는 생명, 예수님 자신이 죽지 않으면 생명이 안 나와요, 그 생명을 알게 될, 약속을 알게 될 사람들을 보호하되 나머지 사람을 지옥 보내는데 보낼 그때가 되지 않았던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들은 참아야 하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그러면 분명히 우리는 우리의 욕심과 탐욕 때문에, 우리 자신에 대한 기대 때문에 구원받지 못합니다. 뭘 해봐야 안 돼요. 그럼 어떻게 하는가? 하나님께서 구원할 자를, 천국의 생명책 명단에 있는 사람들을 따로 뽑아내기 위해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선물로, 은혜로 남은 자 된 자격으로만 천국 간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로마서 11장 3절에 보면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전에 열왕기상 19장에서 했던 엘리야의 고백을 로마서 11장에서 사도 바울이 딱 거론하죠. 4절에도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이게 이제 열왕기상 19장에서 그렇게 되어 있으니 그다음에 로마서 11장 5절에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하늘나라 명단을 보고 ‘그 명단에 해당되는 자가 있느니라.’
그런데 그 명단에 있는 자는 우리와 똑같아서 자기 욕망, 야심 있을 거 다 있고요, 자기밖에 모르고요, 자기 사적인 것만 생각하고, 아까 이야기한 대로 ‘대부분의 인간들이 자기에게 필요한 만큼만 알고, 그만큼만 인간을 상대하고, 이 땅에서 밥 먹고 사는 데만 신경 쓰는 사람’ 똑같아요, 다를 거 없어요.
그런데 그런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명단에 있으니까 그런 자에게만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집니다. 선물이 주어져요. 하나님의 생명,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던 예수님의 그 피 피의 능력이 그들에게 동충하초같이, 곰팡이 같이 찾아갑니다. 찾아가게 되면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 되느냐?
인간이 생각하는 미친 것을 능가하는 미친 사람이 돼요. 미친 것을 능가하는 사람은 정신이 말짱합니다. 말짱한데 남들이 보기에 미쳤어요. 정신이 말짱하다는 것은 “난 남들과 똑같아. 다를 바 없어.” 이것이고, 정신이 말짱한데 미쳤다는 것은, 너희와 똑같은데 주님의 은혜가 어느 날 찾아왔어요.
그 십자가에 죽었다는 이야기, “십자가 죽으신 그 분이 내 대신 모든 죄를 씻어줘서 그분이 흘린 피로 말미암아 내 죄가 사했어”라는 그 이야기를 여러분이 아는 친구에게, 고등학교 동창에게 한번 이야기해 보세요. “네가 미쳤구나.”
고린도후서 5장 13-14절에서 사도 바울이 한 이야기에요.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너희가 나를 미쳤다고 하는데 난 온전해. 온전하지만 너희가 미쳤다고 하는 것은 너희가 모르는 것, 악마가 권세로 눌러서 그동안 몰랐던 것, 감췄던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비로소 하나님께서 일을 어떻게 하는지 나에게 알게 했다’라는 거예요.
그거 하나 추가했다는 거예요. 내가 착한 것도 아니고, 훌륭한 것도 아니고 애쓰고 노력한 것도 없고, 죄 잘 짓고, 이기주의고, 욕심쟁이고… 다 맞는데 딱 너하고 차이점은 인간들에게 나올 수 없는 인간들이 모르는 이야기, 십자가 은혜 이야기가, 용서 이야기가 나한테 찾아왔다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무슨 자요? 남은 자.
엘리야 시대에 하나님께서 남게 하는 능력을 줘서 그들로 하여금, 그들이 착한 것이 아니고, 그들로 하여금 엘리야뿐만이 아니라 이 남은 자가 그 시대에 천국의 백성으로 생겨났던 겁니다. 엘리야는 이걸 몰랐어요. 나만 남았다고, 직사하게 고생했다고 구원되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그 7,000명의 남은 자가 누굴 가르칩니까? 엘리야를 가르쳐요. “엘리야야! 네가 그게 한계다.” 하나님의 은혜는 선지자라고 해서 특혜 주는 것이 아니고 장차 오실 예수님의 죄 용서하심의 능력이 그 시대에 작렬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아는 사람, 행함이 아니고 선물로, 하나님의 선물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사람, 그 사람이 그 시대에 생명책의 명단대로 천국 합격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제대로 알게 하옵소서. 우리가 얼마나 무식하고, 얼마나 나에게만 관심 두고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나 예수님에게 관심도 없는 우리를 때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아, 내가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인 것’을 드디어 감사하고 모든 일에 범사에 고마워하는,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는, 그 나라 의를 구하는 성도로 날마다 태어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