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예언으로 노출

아빠와 함께 2025. 10. 15. 21:52

예언으로 노출 

2025년 10월 15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18:41-46
   
18:41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올라가서 먹고 마시소서 큰 비의 소리가 있나이다
18:42 아합이 먹고 마시러 올라가니라 엘리야가 갈멜 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18:43 그 사환에게 이르되 올라가 바다 편을 바라보라 저가 올라가 바라보고 고하되 아무 것도 없나이다 가로되 일곱번까지 다시 가라
18:44 일곱번째 이르러서는 저가 고하되 바다에서 사람의 손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나이다 가로되 올라가 아합에게 고하기를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소서 하라 하니라
18:45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하여지며 큰 비가 내리는지라 아합이 마차를 타고 이스르엘로 가니
18:46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저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

인간이 요구하는 대로 마땅함이란 없습니다. 당연함이라는 것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그동안 자연과 벗하면서 자연으로 둘려 쳐진 이 자연 시스템에 익숙해졌습니다. 친숙해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스템을 자신의 생존의 환경으로 충분히 활용하고 적응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스템에 고장이라도 난 걸까요?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습니다. 원인을 두고 각자 다른 신을 부르기로 했습니다. 바알, 아세라 선지자의 숫자는 무려 850명이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편에 오직 엘리야 한 사람 뿐입니다.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오십 인이로다”(왕상 18:22)

바알의 선지자들은 열심히 내어 신에게 부르짖습니다. 하지만 엘리야는 물음 자체를 바꿉니다. “비를 내리소서”가 아니라 “과연 지금 이스라엘 형편이 비를 내리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비를 받을 상황인가?”를 묻습니다. 즉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과연 비를 받을 자격이 되느냐를 따져봐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오랫 동안 여호와 선지자들로부터 많은 계시와 예언을 들었습니다. 과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어떤 일을 하셨는가를 너무나도 잘 압니다. 하지만 그러한 하나님의 일하심이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들에게 한갖 지식으로 축적이 되어버립니다. 이 축적된 지식들은 자신을 지켜내는 용도로 쓰려고 시도하게 됩니다.

예언이 직접 일을 하신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예언을 알고 있는 나에게 나를 살리려는 힘이 된다고 믿고 있는 겁니다. 즉 하나님과 자신을 직접 상대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이미 자연 밑에서 요령을 다하며 생존해 왔던 자입니다. “자연아, 나를 살려내라!”는  이 방식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엘리야 선지자를 통해서 알려진 예언의 위력은 자연과 더불어 그 자연에 의지해서 사는 자들을 한 묶음으로 뜯어내는 식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자연이 있고, 그동안 인간들은 그 자연의 안정성 덕분에 자신들이 생존해오고 있었는데 이런 방식은 당연하고 마땅히 인간들이 누릴 권리처럼 여겨왔던 겁니다.

어디서 잘못되었을까요? 그것은 이 자연마저 그저 예언의 말씀을 드러내는 표적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간들은 몰랐습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에서 일어남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남풍이 붊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눅 12:54-56)

또한 요한복음 6:26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갑작스럽게 현재 행복을 상실하면 스스로 다음과 같이 다짐하면서 빠른 자기 위로를 하게 됩니다.

“나, 이제부터 돈도 많이 벌 것이요, 여행도 많이 다닐 것이고, 바쁘게 살 것이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간도 얻어낼거야”라고 합니다. 바로 이런 태도가 세상을 ‘인간-인간’의 군집으로 보는 태도입니다. 이런 인간들의 집단에서 유독 예외적인 인간이 있다면 그것은 권세자일 겁니다.

권세의 최정점에 있는 자는 인간들이 여망하는 힘의 집결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동적으로 타인을 다스릴 자격이 있다고 자부하고 남들로부터 그 권한을 인정받는 위치에 있습니다. 바로 엘리야 시대도 예외가 아닙니다. 아합이 엘리야를 만나면서 대뜸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왕상 18:17)

이것이 권세자-예언자의 만남입니다. 즉 아합은 엘리야에게 명령할 수 있는 높은 위치에 있다고 자부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후반부에 가면 아합왕은 엘리야의 지시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 이유는 엘리야의 기도에 의해서 비가 실제로 내려왔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현실의 관계는 ‘권세자+예언자+자연’이 됩니다.

이 결합조건으로 인하여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도리어 심판의 대상이 됨이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자연은 스스로 무언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그 예가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그 사환에게 이르되 올라가 바다 편을 바라보라 저가 올라가 바라보고 고하되 아무 것도 없나이다 가로되 일곱번까지 다시 가라”(왕상 18:43)

여기에 보면, ‘없나이다’가 일곱 차례로 확인됩니다. 이것은 원래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들 때, 하나님의 취지를 얹어서 창조했습니다. 그 취지가 바로 ‘없는 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 데서 살려내셨다’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예언의 능력, 곧 언약의 능력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이 힘들다고 해서 마땅히 해줄 것은 없습니다. 권세자는 인간을 대표해서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 이게 다섯 번째 수위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 표적 앞에서 도리어 ‘없어지는 것이 마땅함’을 견지하고 유지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비 내림’이란 자연을 통한 하나님의 자기 표현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권세자 아합+예언자 엘리야+ 비 내림’ 전체가 ‘예언’을 만나게 됩니다. 이것이 예언을 드러내는 여섯 번 째 수준입니다.

마지막 일곱 번째 수준은 신약에 와서 드러납니다. 그것은 바로 ‘예언-예언’의 만남입니다. ‘하나님-하나님’의 관계입니다. 그 어떤 인간도 해내지 못하는데 그것은 인간이 하는 모든 것 중에 옳은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6:30에 보면, “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2:37-38에 보면,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즉 모든 인간은 가짜 인간입니다. 이 가짜 인간에게 예언이 달라붙어 뜯겨지면 그 안에 죄가 보입니다.

이런 관점이 바로 하나님의 관점이고 이 하나님의 관점에 의존하는 자만이 ‘예언-예언’의 관계 속에 들어간 진짜 이스라엘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지키는 것이 세상 사는 이유가 아님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52강-열왕기상 18장 41-46절(예언으로 노출) 251015-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 열왕기상 18장 41-46절입니다.

열왕기상 18:41-45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올라가서 먹고 마시소서 큰 비의 소리가 있나이다 아합이 먹고 마시러 올라가니라 엘리야가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엎드려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그 사환에게 이르되 올라가 바다편을 바라보라 저가 올라가 바라보고 고하되 아무것도 없나이다 가로되 일곱번까지 다시 가라 일곱번째 이르러서는 저가 고하되 바다에서 사람의 손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나이다 가로되 올라가 아합에게 고하기를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소서 하라 하니라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하여지며 큰 비가 내리는지라 아합이 마차를 타고 이스르엘로 가니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저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

여기에 순서가 나오는데 그 순서가 이어지고 이어지는 그 과정속에서 인간이 끼어드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비가 내리고 내린 그 비가 나중에 개울가를 넘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엘리야나 아합왕의 그 태도는 너무나도 수동적이에요. 자신이 이렇게 해달라, 저렇게 해달라고 전혀 요청할 입장이 못 됩니다.

그리고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그 자연의 변화,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다가 다시 비가 오게 된 이 자연적인 현상에서는 그 전체가 하나님의,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손바닥, 하나님의 넓은 손바닥, 하나님이 그냥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덮쳐지는 거예요.

야구장이 보통 지붕이 없잖아요. 그런데 돔 야구장 같은 경우에는 야구장인데 거기에 지붕이 있어요. 홈런 쳐봐야 공이 지붕 밖으로 못 벗어나잖아요. 그처럼 비가 온다는 이것은 하나님의 손바닥으로 이렇게 덮치는 겁니다. 평소에 인간들은 하늘 아래 있는 이 모든 것을 뭐라고 표현하느냐 하면, 자연이라고 이야기해요.

그러니까 ‘인간 세계는 자연이 덮인 채로 자연 안에서 자신이 살고 있다’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어떤 관계냐? 인간은 철저하게 자연에 종속된 관계죠. 인간은 자연에 매여 있는 관계입니다. 만약에 자연이 자기의 뜻대로,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면 인간은 더 이상 이 땅에서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인간은 자연만 쳐다보고 있다 이 말이죠. 자연만 쳐다보고 있으니까, 인간은 자연 덕분에 살아가니까 누가 빠졌느냐 하면, 하나님은 빠져버리죠.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자연이 끼어드니까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봤자 이 자연에 가로막혀서 ‘하나님의 뜻이 뭔지, 하나님이 계시는지?’에 대해서 인간은 알 길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이 자연에 비가 온다든지 비가 안 온다든지 이렇게 돼버리면, 사는 게 불편하게 되면 자연에 대해서 ‘어떻게 신께서 좀 도와달라’라고 막연하게, 막연하게 신에게 이제 빕니다. ‘그동안 자연에 따라서 우리가 적응을 잘했으니 농사지을 수 있는 많은 비를 주셔서 여전히 자연과 더불어, 함께 살게 해달라’라고 신에게 요청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이 자연을 걷어내요. 자연을 걷어내 버리면 남는 게 뭐냐? 하나님의 예언입니다, 하나님의 예언이에요. 그러니까 인간들은 생각을 바꿔야 돼요. 그동안 ‘우리가 자연 속에서 자연 덕분에 살아간다.’ 이 생각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하나님의 예언, 하나님의 말씀 따라, 예언 따라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나서 그동안 살아왔다.’ 그걸로 이렇게 바뀌어져야 돼요.

사람들은 스스로 바뀔 수가 없습니다. 안 바뀌죠.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에 나와서 뭐 하느냐 하면, 하나님에 대한 그 지식 또는 성경의 지식을 자기에게 축적을 해요. 축적하게 되면 그것은, ‘내가 아는 지식으로 내가 살겠다’라는 시도에 해당되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내 소유가 되면 그게 나한테 큰 짐이 됩니다. 우리에게 축적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아무 쓸모 짝이 없어요. 왜 쓸모 짝이 없냐 하면, 하나님의 성경 지식 또는 이런 상식, 이것은 내가 살겠다고 성경 연구를 했고, 살겠다고 성경 말씀을 들은 거니까 이건 아무 소용 없습니다.

그리고 그 지식은 자기한테 짐이 되고 부담이 돼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는가? 내가 알고 있는 이 성경 지식,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 그리고 세상 지식을 하나님의 예언이 찾아와서 뜯어내요. 뜯어내서 들추어내는 겁니다, 뜯어낸다고요. 그래야 새살이 나오니까.

상처 나면 그 위에 딱지가 붙지요. 그 딱지가 굳어지게 되고 그다음에 딱지 자체가 뜯겨지게 되면, 그 안에서 하얀, 아직 제대로 굳어지지 않은, 여린 피부가 하얗게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옛날 피부가 뜯겨 나가니까. 하나님의 예언은 우리가 아는 성경 지식을 덮쳐가지고 그 성경 지식이 우리 삶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밝히시고, 그 성경 지식을 뜯어내요.

그렇게 뜯겨 나가면 어떻게 되느냐? 종교가 뜯겨 나가죠. 종교가 뜯겨 나가면 우리는 그냥 노출돼요. 우리의 욕심과 탐욕이 그대로 하나님의 예언 앞에 노출됩니다. 어떻게 노출되는가? ‘인간이 하는 모든 일 중에서 옳은 일은 하나도 없었다.’ 하나도 없었다는 겁니다.

우리 피부 안에 있는 세포를 덮을 수 있는 그 피부 자체가 뜯겨 나가니까 그 피부밑에 있던 날 것이 그대로 노출되는 거예요. 노출되면 그 안에서 우리 인간 자체에서 할 수 있는 것, 생각하는 것, 행동하는 것 그 어떤 것 하나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긍정할 만한 것은 일체 아무것도 없었던 거예요.

그러면 그동안 인간들은 뭐 했는가? 자연 안에서 자기가 살 노력과 살 궁리만 했던 겁니다. 어떤 식으로 살았느냐? 비가 오면 그 비 가지고 모내기하고, 그런 식으로 살았던 거예요. 곡식을 재배해서 곡식 먹고 살아온 겁니다. 그렇게 살아올 때 자기가 자연에 대해서 굉장히 고맙게 여기면서 어떤 잘못된 생각을 하느냐?

‘나는 이 자연 안에서 살 만한 자격이 있다’라는 생각을 계속해서 고수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살아도 될 만한 존재다.’ 하나님 보시기에 실제로는 옳은 일이 하나도 없는데 ‘나는 살 만하니까 사는 것’이라 생각한 겁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오늘 본문에서 누가 등장합니까? 예언자가 등장하죠. 예언자가 등장해요.

예언자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나름대로 갖고 있던 하나님의 지식, 이게 충돌을 일으킵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데요. 말씀에 의해서 움직이는 사람과, ‘아, 이게 성경 말씀인데 공부할까? 성경을 공부해서 내 인생에 유리하게, 내가 나중에 잘못된 길로 가지 않고, 또 이 말씀을 통해서 내가 점점 더 훌륭한 인간이 돼 보겠다.’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완전히 큰 차이가 나는 겁니다. 그게 전혀 같지 않아요.

엘리야가 등장합니다. 열왕기상 18장 쭉 보니까 엘리야가 했던 일은 뭐냐? 엘리야가 했던 일은 이런 겁니다. 인간 세계를 말씀으로 폭격을 한 거죠. 폭격입니다. 후티 반군을 이스라엘이 폭격하지요. ‘이 세상에 어떤 것이 합당하고 정당하냐?’ 물으면 모든 것이 황폐해야 그것이 예언 보기에 합당하다는 것이에요.

모든 인간은 옳지 않고, 옳은 것이 항상 없기 때문에 살 가치도 없고 이유도 없고, 황폐해 야, 황무지가 되어야 이것이 극히 인간에 대한, 인간 세계에 대한 정상적이고도 합당한 조치라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인간들은, 우리에게 자연의 비를 달라는 거예요. 이렇게 가뭄 오니까, 3년 6개월 동안 비가 안 왔으니 비를 내려 달라는 거예요.

잘 들어보세요. “비가 오지 않았으니까 신이시여, 비를 주세요.”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 정당성이 있습니까? 이게 정당한 거예요? 엘리야를 통해서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이 요청한다고 비 오고 요청 안 한다고 비 안 오고 이게 아니라, 무엇과 이렇게 연관돼 있느냐? 하나님의 예언과 연관돼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언!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 예언이라 하는 그 말씀을 내가 나한테 유리하도록 내 지식으로 변질시켰어요. ‘내가 말씀으로 무장하면 내 인생에 무척 도움이 된다’라고 생각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있었던 겁니다. 특히 이스라엘 같은 경우가 그렇죠. 여러분, 이스라엘에 많은 선지자가 있었어요.

열왕기상 18장 4절에 보면,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오바댜가 선지자 일백인을 가져 오십인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었더라.” 오바댜라는 궁예 대신이 그 당시 여호와 선지자 백 명을 50명씩 나누어서 동굴에다가 보호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잖아요. 바알과 아세라가 득세하는 시절에 여호와의 선지자를 보호했던 겁니다.

선지자가 하는 일이 그동안 있었던 하나님의 그 말씀을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알리는 그 역할을 한 겁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열왕기상 18장 22절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 오십인이로다.”

여호와의 선지자는 오직 나만 있다는 거예요. 나만 남은 거예요. 저 100명 있는 거, 저걸 선지자로 취급을 안 합니다. 지금 선지자는 자기 혼자 있다는 거예요. 그 근거가 뭐냐? 그 이유가 뭐냐? 선지자는 ‘자연 속에서 인간을 어떻게 살리느냐?’가 선지자 역할이 아니고 그 자연을 뜯어내요.

자연을 뜯어내면 ‘인간은 왜 황폐화되고, 비 없이 굶어 죽어야 마땅하냐?’ 이것이 예언하신 하나님의 진짜 취지가 담겨 있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엘리야는 구원하자는 게 아니에요. 엘리야는 현재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그 심판 취지를 알려주는 겁니다.

심판을 하시는 거예요. 살 가치 없다고, 살아도 소용없다고요. 뜯겨져 나가야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와서 인간으로 하여금 ‘나는 심판 안 받아도 돼. 내가 사는 것은 당연한 거야. 내가 살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썼는데!’ 하고 노력하는 이 모든 것은 뜯어낼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예언이 와야 뜯겨져 나갑니다. 왜냐하면 자꾸 말씀이 우리한테 오면 지식이 되니까 자기방어, 자기 사수의 용도로 말씀이 자꾸 누적이 돼요. 식자우환(識字憂患)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아는 게 화가 되었다는 말이에요.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 속살이, 내 더러운 속살이 다 노출돼야 하는데 말씀이 오면 올수록 ‘나는 성경 말씀을 안다. 그만큼, 나는 그 양만큼 훌륭하다.’ 이런 식으로 이상하게 되어 가는 거예요.

그것은 진짜 예언자, 진짜 예언의 진수를, 그 맛을 못 봐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겁니다. 엘리야의 시대가 그만큼 심판받기에 합당하다는 거예요. 열왕기상 18장을 보면서 우리가 기본적으로 이런 생각을 가져야 돼요. ‘왜 3년여 동안 비가 안 왔는가?’ 이 질문, 왜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는가? 왜? 그 질문이 중요합니다.

왜 그 질문이 중요하냐? ‘왜 그동안 비가 왔느냐?’라는 질문으로 사람들은 안 바뀌어서 문제예요. ‘왜 비가 오지? 왜 비가 와야 해? 안 와도 되잖아?’ 질문을 ‘왜 3년여 동안 비가 안 오지?’라는 질문에서 ‘왜 그동안 비가 왔지?’ 요새는 8월부터 9월, 10월까지 계속 비 오잖아요.

‘왜 비가 오지? 이거 이상한 일이네.’ 올해 강릉이 가물었잖아요. ‘온 나라가 강릉처럼 비 안 와야 되잖아. 안 와야 하는 데 비가 왜 오지?’ 이 질문. 같은 질문입니다. ‘내가 어제부로 죽어야 되는데 오늘 왜 살아있지? 어제부로 죽어야 되는데 오늘 왜 살아있지?’

며칠 전에 모기 물렸잖아요. 그러면 ‘오늘은 왜 모기 안 물리지?’ 질문 자체가, 질문 자체가 내 입장 생각하지 말고 주님 입장을 생각하게 되면 이게 나와요. 도대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게 뭐냐?’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질문이 어떤 질문이냐?’를 그동안 우리가 생각을 안 했던 것은, 늘 우리는 하루하루 살면서 나 기뻐하는 쪽으로, 내가 기쁜 쪽으로 자꾸 모든 생각을 그렇게 가져서 문제예요.

내게 필요한 건 뭐냐, 내가 즐거운 게 뭐냐, 내가 행복한 건 뭐냐, 내가 기뻐한 건 뭐냐, 항상 질문할 때 ‘내가 나한테 좋아지는 상황은 어떤 상황이냐?’를 계속 그 질문하는 거예요. 어떤 드라마에 보면 여자가 남자하고 사귀다가 헤어졌어요. ‘우주’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가 사귀던 여자와 결혼할 것처럼 하다가 그만 다른 여자하고 결혼을 해버렸어요.

남아 있는 주인공 여자가 스스로 위로한다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래, 가! 떠나가 버려! 나 돈도 많이 벌 거고, 앞으로 바쁘게 살 거고 나는 여행도 많이 다닐 거고, 나는 너 없이도 당당하게 산다.”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이게 뭐냐 하면, 나의 행복을 표현할 때 돈 많은 것, 바쁘게 사는 것, 그리고 여행 많이 다니는 것, 그리고 나 좋다는 남자가 많이 생기는 걸 행복의 번역본, ‘나에게 행복은 이렇고 이런 조건으로 꽉 차 있는 게 행복이야’ 이 번역본으로 떠나버린 사랑으로 인해 허한 마음을 보상하는 거예요. 스스로 자기에게 보상하는 겁니다.

사귀던 남자가 그 주인공 여자를 떠났을 때 ‘앞으로 나는 더 잘될 것’이라고 했는데 진짜 잘 됐어요. 56억짜리 집을 당첨받았어요. 그 드라마 2회째부터 잘 되긴 잘 되는데 문제는, ‘지금 이 세상, 자연은 멀쩡하고 이 자연 세계 아래서 내가 행복할 일만 남아 있으니까 거기 매진하면 된다.’라는 거예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예언? 없죠. 하나님의 지식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나는 행복해야 되고, 나는 반드시 잘 살아야 된다’라는 그런 고정관념으로 무장되어 있습니다. 베네수엘라의 차베스(Hugo Chavez, 1954-2013), 1999년도에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됐는데 그 사람 4선 했어요.

4선 대통령인데 2013년 3월에 암으로 사망했습니다. 그다음에 제툴리우 바르가스(Getúlio Dornelles Vargas, 1882-1954)라는 1930년대 브라질의 정치인, 임시 대통령을 했는데 중앙 집권하고, 반란도 잠재우고, 좌익 폭동도 진압했고, 1934년에 정식으로 대통령이 됐습니다. 노동자에게 사회 보장 제도, 최저 임금 제도 실시했고요, 주 6일 노동제도 도입했고, 하루 8시간 근무제 같은 포퓰리즘 정책을 폈습니다. 1945년 10월 군부 쿠데타도 일으켰어요. 그런데 그 사람 자살했습니다.

후안 도밍고 페론(Juan Domingo Perón, 1895-1974), 아르헨티나 전 대통령입니다. 1943년 군사 쿠데타 참여했습니다. 노동 조건 개선과 임금 인상으로 노동자에게 큰 인기가 있었어요. 1946년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독재했습니다. 1955년 군사 쿠데타로 추방됐습니다. 1973년 귀국했습니다. 심장병으로 급사했어요. 그의 부인 에바 페론(Eva Peron, 1919-1952)은 외국 자본을 배제하고 산업을 국유화했고, 복지 정책을 확대했습니다. 임금을 인상해 줬습니다. 33세에 자궁암으로 사망했습니다. <아르헨티나여 울지 말아라>(Don't cry for me Argentina) 그 노래 주인공이에요.

자, 그 시대 사람들의 관심사는 대통령에게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열왕기상의 관심사는 아합왕에게 있습니다. ‘아합왕이 우리 북이스라엘을 어떻게 잘 먹고 잘살게 할 것인가?’ 그것이 백성들의 생각이고 그 백성들이나 아합왕이나 생각이 똑같아요.

지금 아합왕과 백성들에게 문제가 뭐냐 하면, 비가 오지 않는다는 거예요. 비가 오지 않는다. 비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잘못은 없다는 거예요. ‘비가 오게 되면 다시 옛날처럼 우리나라는 잘 살 텐데 3년 6개월 동안 비가 안 와서 우리가 지금 힘들게 되었다.’ 그러니까 여기에 뭐가 필요한가? 종교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종교가 뭡니까? 나의 행복을 위해서 종교가 필요하잖아요.

그 사람들은 ‘예언’이 필요한 게 아니에요. 예언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개입하지 못하고 이미 확정된 걸 예언이라고 해요. 내 신세 좋아지고, 나 행복하라고 예언을 뜯어고칠 수는 없어요. 그냥 세상은 예언대로, 확정된 대로 진행될 뿐이지 ‘하나님, 나 좀 잘 봐주소.’ 이런 것은요, 그건 성경 지식이지 예언이 아닙니다.

여기서 바로 엘리야가 등장해요. 엘리야가 이야기하는 것은 “너희들부터, ‘내가 반드시 살아야 하고, 이왕 사는 거 행복해야 한다’라는 그 생각 자체를 하나님의 예언이 뜯어낸다”라는 거예요. 뜯어내기 위해서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던 겁니다.

3년 동안 비 오지 않을 때 사람들은 이제 감을 잡아요. ‘아, 우리나라에 뭔가 문제가 있다. 우리가 하늘을 쳐다봤는데 그 하늘은 누구 손에 의해 조종되지?’ 하늘은 하나님의 예언에 의해서 조종됩니다, 하나님의 예언에 의해서! 하늘이 뭐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게 아니에요. 물리 법칙에 의해 움직이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확정된 예언을 표현하기 위해서 자연 현상이라는 게 있는 겁니다.

이제는 누가 필요하냐? 그걸 설명해 줄 사람이 필요하죠. 그걸 설명해 줄 사람이 누구냐 하면, 엘리야입니다. 자, 엘리야가 이제 어떻게 설명하는가 보세요. 열왕기상 18장 43절 “그 사환에게 이르되 올라가 바다편을 바라보라 저가 올라가 바라보고 고하되 아무것도 없나이다 가로되 일곱번까지 다시 가라.”

실제로 아무것도 없어요. 다시 말해서 비 올 기색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뭐 구름이 있어야 비가 오지 전혀 아무것도 없어요. “뭐가 있나?” “아무것도 없습니다.” 한 번! “뭐 있나?” “아무것도 없습니다.” “뭐 있나?” “아무것도 없습니다.” 물론 엘리야 하고 사환하고 그런 식으로 주고받고 한 건 아니지만 예언자인 엘리야는 미리 알고 있어요. “일곱 번까지 아무것도 아닌 것을 끝까지 인내하고 봐라.” 아무것도 아닌 것을 보라는 거예요.

자, 이게 무슨 말이냐? 하나님 예언에 왜 여섯 번 아니고, 여덟 번 아니고, 아홉 번 아니고, ‘일곱 번까지만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유지하냐?’ 하는 겁니다. 이걸 알려면요, 하나님의 예언이 뽑혀져 나오는 원래 하나님의 취지가 있어요.

사람들이 농사를 지을 때 저수지나 댐에서 물이 흘러나오잖아요. 우리 교회 화장실 보세요. 잡아당기는 옛날식 아닙니까? 누르는 게 아니고 잡아당기잖아요. 물통이 위에 있고 잡아당기면 물이 쏟아지잖아요. 하나님의 뜻이 고여 있는 댐이 있단 말이죠.

그 댐에서 하나님께서 솔솔 예언을 개시하게 되면 그 예언이 전개되면서 자연 현상이 거기에 맞춰서 벌어지고 움직이는 거예요. 그런데 그 댐이 뭐냐 하면, 7이에요. 7에서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7는 뭐냐? ‘없음에서 있음’으로 갈 때 하나님이 7일을 소비했습니다. 그게 천지창조에요. 세상을 만들 때 7일 동안 다 만들었거든요.

7일 동안 만들었을 때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 7일 동안 만들었구나.’ 이래요. 뭘 빠뜨렸느냐 하면, ‘없는 데서 만들었다’라는 걸 빠뜨린 겁니다. 없는 데서 만드는 거예요. 그러면 만들어진 곳에 뭐가 있느냐 하면,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있게 하셨다’라는 것, 없음을 늘 전제로 유지를 해줘야 하고, 있음은 하나님이 있게 하심으로써만 있는 거예요.

그 ‘없음’과 ‘있음’을 합쳐서 예언이라고 합니다. ‘없는 데서 있게 하고 그다음에 죽은 데서 살게 하는 것’ 이것이 예언이고, 이걸 성경에서는 언약이라고 해요.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없음’과 ‘죽었다’라는 것을 늘 유지를 해줘야 거기서 언약의 존재가, 그 감이 나와요. 언약의 존재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티 낼 수 있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신약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그걸 ‘표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영어로 하면 ‘싸인(Sign)’ 예수님께선 우리에게 뭘 보여줬느냐? 표적을 보여줬어요. 요한복음 20장 30절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 26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자, 표적이 아닌 건 뭐냐? 나부터 출발하는 건 표적이 아닙니다.

표적은 뭐냐? 그 댐에 고였던 하나님의 정보, 하나님의 뜻이 펼쳐지는 것이 표적이에요. 관점이 하나님 관점으로 돌아가야 이 표적으로 느껴지는 거예요. 그런데 떡을 먹고 배부른 이 군중들은 예수님을 찾는 이유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고 출발점이 자기로부터 출발한 거예요.

배고팠는데 배불렀다. ‘야, 그렇다면 예수님은 우리한테 유용하고 필요한 존재다. 믿자. 악착같이 믿자. 믿으면 우리한테 이익이 온다.’ 이게 바로 표적이 아니고 자기의 야심을 드러낸 겁니다. 그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네가 나를 찾는 것은, 네 의도가 네 심보가 표적이 아니고 너 배부르고 좋으려고 나 예수를 찾았구나.”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표적이 되는 사람, 이게 진짜 사람이고 표적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가짜 사람이에요. 오늘 본문에서 엘리야에 의해서 비 내림은 뭐냐? 진짜 이스라엘과 가짜 이스라엘, 비 내림을 통해서 비 내림을 표적으로 보는 사람은 진짜 이스라엘이고 그 비 옴을 두고 “야, 이제 우리는 살았다.” 이렇게 하면 그건 비를 흠뻑 맞고도, 흠뻑 쇼를 벌여도 가짜 인간이 되는 겁니다.

이제 우리가 궁금한 것은 가짜에서 진짜로 어떻게 바뀌느냐 그거죠. 바뀌려면 우리가 자연을 바라보고 나를 바라보는 그것이 하나님의 예언에 의해 뜯겨져 나가면 돼요. 아까 제가 이야기했죠. 뜯겨져 나가면 피부에 갇혀 있던, 피부밑에 있던 하얀, 미성숙된 속살이 나온다고 했죠?

그것처럼 미성숙된 속살의 특징은요, 본인이 스스로의 힘으로 살길이 없는 삶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예언대로 따라가는 사람에 해당돼요. 다시 한번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내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가짜 인간이에요. 진짜 인간은 이 세상에 없었는데 주님의 예언이 와서 나의 뚜껑을 강제로 뜯어내 버려요.

강제로 뜯어내는 그것, 어릴 때 여러분들이 놀이 하면서 많이 했을 거예요. 저도 많이 했어요. 숨바꼭질하는데 어디 숨었느냐? 이불 밑에 숨었어요. 이불 밑에 숨으니까 형이 와서 하는 말이 “꼭꼭 숨어라, 꼭꼭 숨어라…” 하면서 뭘 들춰내느냐?

이불을 통째로 확 뜯어내니까 숨어 있던 내가 얼마나 민망한지, 당황스러운지. 나는 이불 밑에서 ‘가만히 이렇게 있으니 설마 들킬까’ 싶었는데 이불 자체를 들추니까 그 앞에 완전히 내가 노출되죠. 하나님의 예언에 노출되니까 나는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가? 나밖에 모르면서 살아온 거예요.

이게 진짜 인간입니다. 들킨 인간이에요. 나는 나밖에 모르는, ‘남보다도 행복하고 돈 많이 벌고 여행 많이 다니고, 그리고 바쁘게 살고. 이게 인간 사는 것이다. 하나님이고 뭐고 필요 없어. 이렇게 살면 나는 대만족!’ 바로 이게 뜯겨져 나가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이 바뀌었습니까? 인간은 바뀌는 게 아니고 노출된다니까요? 나는 이기주의자고 나밖에 모른다는 것이 노출되는 거죠.

여기서 열왕기상 18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40절에, “엘리야가 저희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저희를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 바알 선지자 450명을 죽였습니다.

자, 여기서 제가 여러분에게 질문해 보겠습니다. 이 바알 선지자가 꼭 죽어야 될 사람들입니까? 정말 그 사람들은 살 가치가 없는 겁니까? 이 질문이 중요한 질문이에요. 여러분들이 성경 하나도 모른다고 치고, 교회 한 번도 다녀 본 적이 없다고 칩시다.

그런데 소식이 들렸어요. 북한에서 목사 450명을 다 죽였다, 안 그러면 캄보디아인데 캄보디아 빼고 북한으로 합시다. 북한에서 450명을 다 죽였다는 소식이 들릴 때 여러분 생각이 어떻습니까? ‘그 목사란 사람들이 꼭 죽어야만 할 그 정도로 나쁜 짓을 한 사람들이고 그 정도 가치밖에 안 되는가?’

그들은 가족이 없어요? 목사들도 애들 다 있잖아요. 아빠가 죽어버리면 그 애들은 고아인데 그럼 걔들은 어떻게 살라고? 갑자기 어떤 생각이 듭니까? 인간 대 인간으로 측은한 생각이 들겠죠. ‘누가 누구를 죽이면 안 돼. 하여튼 사형 제도는 없애버려야 해.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인간이 인간을 죽인다는 것은 성립되지 않아.’

그런데 오늘 성경에 열왕기상 18장 40절에 보면,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 도망하지 못하게 하고 450명을 다 죽였어요. 엘리야가 뭐 킬러에요? 이게 뭐, 엘리야가 폭군입니까? 예언자면 다예요? 예언자면 사람 죽여도 되는 007 같은 살인 면허가 있는 겁니까? 갑자기 부아가 막 올라오지 않습니까? 아무리 성경이지만, 예언자이지만 사람을 함부로 죽일 수 있어요? 이런 생각 들죠? 그 생각부터 출발해 보자, 이 말이죠

어떻게 하는가? 총 일곱 단계가 있습니다. 시간 관계상 제가 빨리 갑니다.

 

첫째 단계가, 인간 대 인간으로 세상을 보는 것. ‘너나 나나 똑같은 인간이다. 우리 다 같이 행복하자.’ 이 단계.
두 번째 단계가, 인간 중에서 권세자가 있다. ‘대통령과 우리는 달라. 그 사람은 권력이 있어.’ 내가 군에 안 간다? 대통령이 와서 “너 빨리 군에 가.” 할 수 있어요. 나보다 힘이 더 세요, 권력이 더 세요. 그래서 직장에서 날 쫓아낼 수 있어요. 그러니까 ‘같은 인간이지만 대통령은 특별하게 봐주자.’ 이게 두 번째 단계입니다.
세 번째 단계가 뭐냐? 그 권세자가 예언자를 만나요. 아합이 엘리야를 만난다고요. 만나면서 하는 말이 “엘리야, 내가 왕이야. 내 말 안 들으면 너도 죽어.” 이렇게 했다는 말이지요. “엘리야를 볼 때에 저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네냐” 열왕기상 18장 17절에 나오죠? “나는 권세자고 넌 내 밑이야. 뭐든 내 말 안 들으면 네가 아무리 예언자라도 나한테 죽어.” 그게 세 번째입니다. 세 번째 하니까 첫 번째는 잊어버리죠. 첫 번째, 인간 대 인간. 두 번째는, 인간 대 권세자. 세 번째는, 그 권세자와 예언자의 만남.
네 번째 만남은, 권세자와 예언과 자연과의 만남. 오늘 본문에 비가 왔으니까요. 일곱 번 기도하고 난 뒤에 비가 왔으니까요.
다섯 번째, 권세자와 비 내림과의 만남. 아, 이게 바로 표적입니다. 표적 단계에 들어가요. 권세자와 비 내림의 단계. 인간을 대표하는 권세자는 비 내림에 의해서 심판을 받아야 돼요. 이제 권세자는 자연 앞에서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합니다. 그 증거가 뭐냐 하면, 엘리야가 아합왕에게 조언을 합니다. “곧 비가 오는데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당신 길 막힙니다. 그러니까 비가 너무 오기 전에 마차 타고 이스라엘 광야로 빨리 피신하소서.” 그러면 누가 명령을 내리고 누가 명령을 받습니까? 지금 엘리야가 명령을 내리고 권세자인 아합이 명령을 받죠. 이게 다섯째 단계에요.

첫 번째 단계, 인간 대 인간.
두 번째 만남은, 인간 대 권세자의 만남. 인간들은 다 그렇게 알고 있어요.
세 번째, 권세자와 예언자의 만남. 예언자를 시시하게 보죠.
네 번째, 권세자와 예언자와 자연의 만남.
다섯 번째, 권세자는 그 자연에 의해서 심판받는 대상이 됨.
여섯 번째, 이제는 자연 세계 그러니까 엘리야, 아합, 이스라엘 백성, 그리고 비 내림. 이 전체가 무엇의 만남? 하나님 예언의 만남.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예언자, 자연, 그리고 아합,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의 예언의 실효성, 예언의 해석으로서 그 시대의 현실로 나타나는 겁니다. 이게 여섯 번째에요.

마지막 또 하나 있어야 합니까? 있어야 돼요. 뭐냐 하면, 예언과 예언의 만남. 예수님이 갖고 있었던 표적과, 그리고 하나님의 예언, 언약의 만남. 예수님께서는 예언에 해당되기 때문에 인간의 예언자, 자연, 인간의 권세자, 인간들, 그 네 요소가 이루지 못한 그 예언을 예수님이, 하나님 되시는 분이 직접 이 땅에 개입하셔서 직접 자기에게 주어진 예언을 본인이 다 이루었단 말이죠. 그게 일곱 번째 단계에요. 그게 바로 예수님이 보여주는 표적입니다.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요한복음 12장 36-38절에 보면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예수님은 표적을 행하셨어요. 왜 예수님은 표적을 행할까요? 모든 인간은 주님 보시기에 가짜이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이 표적을 행할 때 그 표적에 대한 해석은 제자들도 몰랐어요. 나중에 성령이 오니까 예수님의 그 표적이, 모든 예언이 예수님 안에서 완성이 되었다는 사실, 누구든지 예수님이 모든 걸 이뤘다는 걸 믿는 자에게만 주님께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영생을 주신다는 사실을 비로소 성령을 통해서 알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 이 땅의 이야기에요. 하늘의 이야기가 아니었던 거예요. 그런데 엘리야를 통해서 비 내림을 통해서 이 땅을 하나님께서 심판하면서 “너희는 이 땅에 사는 가짜 인간 될래, 아니면 하늘나라에서 사는 진짜 인간이 될래?”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의 예언적 차원에서 비 오지 않음과 비 내림을 이야기한 거예요.

그게 바로 일곱 번째에요. 없는 것을 주께서 만들어 주시듯이 이제는 하나님의 영생이 없는 자를 없는 데서, 7!, 일곱 번 기도하고 난 뒤에 비로소 비 내림을 통해, 비 내림이 영생이라는 말이 아니고, ‘비 내림이 하나님 자신의 뜻을 제대로 전했다는 하나님의 표적이 된다’라는 그 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살면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그냥 세상에서 오는 한계 안에서 이루어졌고 움직였던 그 모든 것의 집합인 줄 압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처럼 살면 잘 된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며 진짜 예언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통해서 우리가 죄인으로 노출될 때 그게 영생이 채워지는 계기인 것을 우리가 놓치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수요설교(251015) 요약 열왕기상 18장 41-46절(예언으로 노출)

수요 설교 잠시 요약해드리겠습니다. 수요설교에서 애초에 제가 준비한대로 설교를 못했어요. 왜냐 하면, 열왕기상 17장, 18장의 내용을 잘 모르는 분들이 참석을 해서 본격적으로 바로 못 들어가고, 18장을 설명해 줄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그게 ‘현장 우선주의’라는 건데, 듣는 사람보다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중요하거든요.

18장을 설명할 때 자칫하면 반복이 되고 지루해지기 때문에, 하면서 18장을 하기는 해야 되는데 왜냐 하면, 본문을 하려면 18장이 반드시 설명이 되어야 돼요. 그런데 바로 들어갈 수는 없고, 그래서 낸 아이디어가 그거였습니다. 1,2,3,4,5,6,7.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 바알 선지자는 450명, 450명을 그렇게 몰살시켜야할 정도로 그 사람들이 그렇게 나쁘냐는 걸 한 번 따져보자는 말이죠. 엘리야 네가 뭔데, 이 사람들을 죽이느냐? 그때, 아합은 뭐 하고 있었느냐? “이건 내 사람이다. 우리 이세벨 상에서 먹던 사람들이다. 네가 뭔데 사형 집행을 명령하느냐?”이렇게 아합은 왜 대들지 않았느냐는 겁니다.

그런 것을 설명하다 보니까 이것은 하나의 규칙을, 도표 같은 것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첫 번째가 나와 나의관계, 인간 대 인간의 관계인데, 18장은 뭐냐 하면 인간을 통솔할 수 있는 권세자가 있어야 되죠.

그게 아합이 엘리야가 왔을 때, 엘리야에게 뭐라고 하느냐?‘너는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라.’했죠.(왕상18:17-엘리야를 볼 때에 저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네냐) 보세요, 아합이 ‘나를 괴롭게 하는 자’라 했습니까? 아니죠.‘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라 했죠.

그러니까 아합은 지금 어떤 책임감을 갖고 있어요. ‘이 이스라엘을 내가 책임지고, 보호하고, 지켜야 되는데, 엘리야 네가 헛소리하는 이것이 이스라엘이 단결하는데 전혀 보탬이 안 된다.’는 거예요. 안 돼죠. 그게 뭐냐?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서 두 번째 관계가 뭐냐 하면, 인간을 대표하는 권세자의 관계가 되면서 이 인간 집단이 권세자 안에 예속돼 있는데 그걸 방해하는 자가 누구다? 예언자가 등장하는 거예요. 예언이 아니고, 예언자가 등장하는 거예요.

예언자가 등장하니까 아합은 뭐라고 해요? 엘리야를 보통 인간으로 취급한 겁니다. “너는 내 밑에 있어. 다른 선지자 봤지? 너도 마찬가지야. 너, 내 손에 잡히면 죽어. 나는 너보다 높아. 그래서 나는 너한테 명령한다. 너는 죽어야 돼.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자여, 너냐? 너였어? 이제는 체포될 일만 남았지. 넌 나한테 체포돼서 죽어야 돼.”라고 했던 아합이 비 오고 난 뒤에 어떻게 됐죠?

누가 누구한테 명령하죠? 엘리야가 명령해요. ‘올라오소서’하면 올라가고, ‘내려가소서’하면 내려가고, 마차 타고 가라 하면 마차 타고 가고, 이거 누가 명령해요? 선지자가, 예언자가 명령을 하죠. 그러면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서 두 번째가 인간과 권세자의 관계가 되고, 인간과 권세자의 관계에 누가 끼어듭니까? 예언자가 끼어들죠. 그게 세 번째에요.

네 번째는 뭐냐? 예언자가 끼어들면서 거기에 비가 내리잖아요. 비가 내림으로써 450명이 죽었잖아요. 이것은 심판하는 거죠. 죽었던 바알 선지자는 누구에게 예속돼 있었습니까? 아합의 권력 아래 있던 자들이죠. 아합의 권력 아래 있던 자들을 아합보다 권세가 없는 엘리야가 지시해서 죽여 버렸죠.

그러면 비 내림은 뭐가 포함되어 있는가? 심판이 들어있는 거예요. 그래서 어제 시간 관계상 설명을 못한 게 있는데, 무지개 안에는 노아 홍수의 심판의 기억이 들어있어요. 노아 홍수의 심판이.. 그래서 비가 없다가 그냥 비오는 거는 관계없고, 가뭄이 되었다가 비를 내릴 때는 반드시 가뭄들만큼 심판받을 만 했고, 그 심판 받을 자의 주동자를 색출하고 찾아내는 방식의 비 내림이 되는 거예요.

그걸 어제는‘표적’이라고 했죠. 표적은 반드시 ‘인간은 심판의 대상’이라는 것, 그걸 구체화하는 방법은 뭐냐? 엘리야가 사환에게 지시할 때 일곱 번을 했어요. 어제 찾지 않은 본문이 있는데, 노아 홍수 때,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고 난 뒤에 바로 비가 오지 않았어요. 며칠 뒤에 비가 왔느냐? 딱 일주일 뒤에 비가 왔습니다. (창7:9,10-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하신 대로 암수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더니, 칠 일 후에 홍수가 땅에 덮이니)

그런데 어제 엘리야 본문에서는 비가 오냐고 물어요. “저기 비구름이 보여?”“없나이다.” 일곱 번 ‘없나이다, 없나이다, 없나이다..’ 하고 “있습니다!”이게 원래 창조의 원리인데, 너희들이 이 창조의 원리를 완전히 엉망 만들어버리니까 창조의 원리에 의해서 심판 받아 마땅한 거예요. 심판 받아 마땅한 거예요.

그래서 450명 바알 선지자가 엘리야의 지시에 의해서 죽임을 당합니다. 그럼, 죽임을 당하면, 어제 수요 설교에서도 얘기했지만, 그 가족들은요? 그 자식들은? 막 유치원에 들어간 자식들은 어떻게 됩니까? 성경에 있으니까 그냥 이런 뜻이라 하지 말고, 우리의 상황과 연결시킬 줄 알아야 돼요.

‘그래, 복음, 그 말씀이야, 그 말씀이야.’라고 백날 해도 소용없어요. 그것 때문에 어제 얘기했죠. 어떤 성경 지식이 아무 짝에도 소용이 없다고요. 아무 짝에도 소용이 없어요. 오히려 자꾸 짐만 되는 거예요. ‘이거 다 지켜야, 얼마나 지켜야 돼, 몇 퍼센트 지켜야 돼.’짐만 되지, 안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가 거기서 예언자와 예언을 구분한 거예요. 그래서 그것이 바로 7단계예요. 6단계는 전체, 아합 그리고 엘리야까지 포함해서 백성, 이스라엘, 비 내림, 다 포함해서 누구 앞에 서 있다? 예언 앞에 서 있는 거예요. 예언자라 할지라도 예언이 시키는 그 무대 장치의 소품이라 했죠. 하나의 소품이에요.

예언자가 설치고 다닌다고 해서 예언자가 비 내리고 하는 게 아닙니다. 반드시 보이지 않는 예언 앞에서 그들은 한 뭉텅이로 동일하게 예언 받아야 돼요. 그게 표적입니다. 구약 때 표적의 실체는 뭐냐? 신약 때 오죠. 그게 예언과 예언, 바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어느 누구도 말씀을 지킬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는 거예요.

그러면 이 세상은 뭐냐? 심판 받아 마땅하죠. 그 심판을 예언자가 아니라, 예언 되신 하나님이 그 심판을 가져가죠. 그러면 구약에서 말씀이 와서 우리의 모든 걸 뜯어내는 것처럼 똑같은 원칙으로 예수님의 다 이루심이 우리를 뜯어 가버리면 뜯겨 가면서 우리는 뜯겨간 입장에서 어디로 환원되느냐? 어디로 귀환되느냐 하면, 예언을 주신 그 장소로 우리가 돌아가면서 구원되는 겁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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