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선지자의 겉옷

아빠와 함께 2025. 10. 29. 22:32

선지자의 겉옷

2025년 10월 29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19:9-14

19:9 엘리야가 그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유하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9:10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19:1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19:12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19:13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있어 저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9:14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선지자는 자체적으로 자신에게 한계가 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선지자가 틀렸다는 말이 아니라 제한적입니다. 이 제한의 구약 시대의 제한인 동시에 아직 온전한 자연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제한입니다. 신약에서는 자연에서 벗어난 것을 ‘영’, 혹은 ‘영의 세계’입니다. 구약에서는 아직 이런 세계로 전환되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 경계면에 있습니다. 이 경계면을 오늘 본문 엘리야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몸소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물이 넘쳐나는 젖어있는 송아지 제물에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는 것도 경험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바알과 아세아 선지자들을 다수 제거하는 것에도 성공했습니다.

하늘에서 비가 흡족하게 내려서 가뭄이 해소되는 것도 경험했습니다. 이로 인해 권력자인 아합의 기세까지 굴복시켰습니다. 하지만 바알교의 중추 권력이 되는 이세벨의 분노를 더욱 자극하게 해서 충분히 승리에 도취되어 있는 엘리야 선지자 자신의 목숨을 정통적으로 노리는데 권력이 집중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엘리야는 누가 뭐래도 분명히 하나님과 함께 있는 선지자라는 자부심에 치명적인 상처를 받게 되었습니다. 자존심이 무너지고 여기서 오는 수치심을 엘리야는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목숨을 잃을지언정 자신의 상처를 안고 계속 살아갈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목숨 잃는 것보다 더 아픈 것이 마음의 상처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사명감이 무너지는 것을 견딜 수 없는 그는 브엘세바 근처 광야에 있는 로뎀나무 밑에서 홀로 죽을려고 했습니다. 이때 기적적으로 천사가 도와주니 엘리사는 선지자로의 사명을 하나님께 재시도하는 것으로 이해해서 모세의 사명받았던 호렙산으로 부리나깨 달려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계시를 다시 받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엘리야의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습니다. 도리어 책망이었습니다. “엘리야야, 네가 왜 이곳이 있느냐”는 겁니다. 즉 이곳이 있지 말고 북이스라엘에서 계속 선지자 노릇을 해야 될 네가 왜 호렙산끼지 도망쳤느냐는 겁니다. 여기에서 엘리야는 나름대로 자신을 변명하는 여러 가지 견해를 제시합니다. 소위 남 탓하는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엘리야의 이런 변명을 받아주지 않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자연을 능가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 엘리야는 미처 알지 못한 겁니다. 산의 바위를 부수는 강한 힘에서는 하나님께서는 거기 계시지 않고 지진과 불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거기 계시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동안 엘리야의 ‘하나님의 나타남’의 환경이 자연 현상을 동반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겁니다. 바로 이점을 감안해서 하나님께서는 ‘자연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계시’를 알려주시고자 하십니다. 구약의 선지자 입장에서는 자연과 더불어 주어지는 하나님의 계시를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 수준이었습니다.

신약에서의 계시는 ‘예수 안’과 ‘예수 밖’으로 계시의 온전함을 나타냅니다. 자연이라는 틀을 벗어나는 식으로 계시가 성취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자리를 찾아온 엘리야는 모세의 자리가 아니라 아담의 자리를 재현하십니다. 창세기 3:7-10에 보면,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라고 되어 있습니다.

‘옷’이라는 것을 인위적으로 만들었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등장에서 숨을 수밖에 없는 의식이 새로이 생겼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엘리야도 마찬가지입니다. 막상 세미한 소리 가운데 하나님께서 나타나니 엘리야는 겉옷 안에 자신의 얼굴을 숨기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엘리야에게 있어 겉옷이란 인간 한계성의 표현방식이 됩니다.

자기 인생이 세상 권력에 쫓겨 수치스러운 결말이 되었음을 비관하여 스스로 죽을려고 하는 그 오만함과 자기 의 덩어리를 도리어 하나님께서 그 선지자의 겉옷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선지자 사명을 감당토록 하십니다. 열왕기하 1:8에 보면, “저희가 대답하되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더이다 왕이 가로되 그는 디셉 사람 엘리야로다”라고 인상을 외부에 주었습니다.

열왕기하 2:13-14에 보면,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주워가지고 돌아와서 요단 언덕에 서서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그 겉옷을 가지고 물을 치며 가로되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 하고 저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엘리사가 건너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옷 자체의 선지자의 능력이 담겨 있음을 알았습니다. 마치 아론 대제사장의 속한 능력이 옷을 통해서 아들 엘르아살에게 그대로 활용되는 것과 같습니다.(출 28:2/민 20:26,28) 아론의 비록 죽더라도 아들 엘르아살을 통해서 대제사장 기능이 이어지게 됩니다.  오늘날의 모든 성도들도 한곁같이 아담의 자손들입니다.

스스로 자신의 수치성과 자기 의와 자존감을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로마서 1:16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자연에서 벗어난 ‘예수 안’으로 형성된 하나님의 의로서 인간의 의로서 나타난 죄를 덮습니다.

이것을 ‘옷 입는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계 3:4) 이 흰 옷은 예수님의 피로 씻는 경우에만 가능합니다.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계 7:14)

보통 허리를 또바로 세우고 가슴을 펴면 신체적으로 건강하다고 말들합니다. 신체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도 그리스도의 의로 덮힌 옷을 입고 이 세상에서 허리를 똑바로 세우고 가슴을 펴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 시대의 선지자, 곧 성도의 당당함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자존심으로 인하여 예수님의 의를 훼방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54강-열왕기상 19장 9-14절(선지자의 겉옷) 251029-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 열왕기상 19장 9-14절입니다.

열왕기상 19:9-14

“엘리야가 그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유하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있어 저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굴에 들어갔던 엘리야, 그 굴이 어디에 있는 굴이냐? 그 굴은 여호와의 신 호렙산에 있는 굴이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계시를 받았던 그 장소까지 엘리야가 오게 되었습니다. 엘리야는 브엘세바 근처 광야에 홀로 나가서 로뎀나무 아래에 누워서 거기서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엘리야가 그 로뎀나무 아래서 그만 죽으려고 했는데, 이것은 본인이 생각하기에 자기자신의 처지가 참으로 수치스럽다, 라고 여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가운데서 여전히 제거되지 않고 있는 게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자기가 하나님의 일에 이르는 그 모든 과정에서 ‘자기 하는 일이 정당하고, 옳고, 의롭다’라는 그것을 자기 몫으로 챙기려고 했던 겁니다.

‘나’라는 것, 나 엘리야는 어떤 존재냐? ‘하나님께서 나에게 일을 시켰으니 내가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일이다’라는 그런 생각이 자기 자신을 확고하게 지켜줄 줄로 알았던 겁니다. ‘주의 일을 하는 주의 사람을 주께서 친히 지켜주지 않으면 누구를 지키겠는가?’ 하나님이 나를 들어 사용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어떤 경우에도 지켜줄 줄로 알았어요.

자신이 아합의 의도를 꺾어버리고 바울과 아세라 선지자를 죽임으로써 이제는 엘리야 자신의 시대가 열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합은 꺾었는데 아합의 부인 이세벨은 꺾지 못하고 도리어 이세벨의 마음을 자극하고 분노를 유발시킨 일로 인하여 이세벨로 하여금 만천하에 다음과 같이 공포하게 만들었어요.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이세벨이 주장하는 것은 “이제 내게 남은 최종적인 일은 하나밖에 없다. 저 엘리야를 죽이는 것이다. 나의 모든 앞으로의 계획은 모든 역량을 동원해서 엘리야를 잡아 죽이는 것이다”라고 했고, 그것이 이스라엘 전체에 권력으로 먹혀 들어간 것을 엘리야가 알았습니다.

여기서 엘리야는 좌절했습니다. ‘적의 손에 잡혀서, 아주 그야말로 초라하게 맥없이 죽기보다는 내가 알아서 나를 죽이는 것이 더 낫지 아니하냐?’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인간적으로 봐서는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언제든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엘리야가 자기 스스로 죽기를 원하는 것 대목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어요. ‘이 세상에서 목숨 목숨이 제일 중요하다. 목숨보다 더 귀한 건 없다’라는 이것이 우리네 상식인데 인간에게는 피보다 더 센 게 있었어요. 그것은 마음의 상처였습니다. 인간의 육보다 더 센 것은 자기의 의, 자기의 자존심이었어요, 자존심이었습니다.

엘리야는 불안감을 느꼈고, 요즘 식으로 하면 적에게 겨눴던 총구를 자기를 향하여 겨누어서 적을 쏴야 할 그 총으로 자기를 쏘는 것과 마찬가지인 그러한 마음의 결심을 하고 인생을 끝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의 천사가 와서 도와주니까 ‘역시 하나님은 나를 그냥 방치하지 않고 살리시는구나. 그렇다면 나는 모세처럼 다시 한번 힘을 내어서 하나님의 종이 되리라.’

선지자가 되었던 그 모세가 은혜받았던 그 자리로 부리나케 달려갔습니다. 40일 동안을 주저하지 않고 열심히 행해서 호렙산에 당도했습니다. 왜? 거기서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것처럼…, 모세가 시내산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을 만났잖아요. 시내산에서 자신도 제2의 모세로서 하나님을 직접 만나기 위해서 비장한 각오로 갔던 겁니다. 다시 한번 자기에게 하나님의 선지자의 사명을 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자기 생각이고 오늘 본문 열왕기상 19장 9절에 보면 “엘리야가 그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유하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아…, “잘 왔다 엘리야. 안 그래도 기다렸어. 역시 내 뜻을 잘 아는구먼. 그래 우리 새로 시작하자.” 뭐 이런 하나님의 반응을 기대했는데 도리어 책망하는 것처럼 “너 왜 왔지? 내가 오라고 했어? 네가 왔는데 온 의도가 뭐야?”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엘리야가 이 호렙산까지 와서 단독으로 하나님과 독대해서 사명을 일으키겠다는 그 정당성을 주저리주저리 언급합니다. “나만 남았습니다, 나는 하나님에 대해서 ‘특심’, 아주 유명한 말이죠, 그냥 열심이 아니고 특심, 아주 특별한 열심을 가지고 일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아시다시피 이스라엘의 여호와 선지자를 다 죽였으며 나만 남았는데 이제 마지막 남아 있는 나의 목숨까지 찾고 있으니까 내 목숨을 부지해야, 하나님의 선지자의 불씨라도 이렇게 있어 줘야 다시 일을 할 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 만나서 제대로 일을 한번 해보려고 제가 여기서 호렙산까지 왔습니다”라고 하나님 앞에 이야기했어요.

엘리야가 그런 이야기를 한 이유는 “잘했어. 역시 내 뜻을 잘 아는구먼. 우리 손 잡고 새로 하자.” 뭐 이런 이야기를 들을 줄 알았는데 책망만 있어요. “엘리야야 네가 왜 왔지? 내가 부르지도 않는데 네가 왜 왔어?” 쉽게 말해서 “네가 여기 있다고 내가 자동적으로 너한테 응답 해 줄 의무가 있어? 없어! 너는 왜 내가 시키지 않은 엉뚱한 짓을 했어?” 하는 조로 그다음부터는 하나님께서 입을 다물었어요.

그다음에는 응답이 없어요. 응답이 없는 대신에 뭐가 있느냐? 여호와께서 그냥 존재로 지나가는데 강한 바람이 확 불었어요. 엘리야가 ‘아, 바람 속에서 주께서 응답하시는구나.’ 산을 가르고 바위까지 부수니 바위를 부순다는 것은 그 부수는 에너지를 제공한 어떤 분이 거기에 있다는 거예요.

있는데 그분이 아무 말씀이 없고 그냥 산이 깨지고 바위만 부서졌어요. 계시기는 분명히 계신 데 엘리야가 요구하는 데 대해서는 응답이 없어요. 주께서 아무 반응이 없습니다. 열왕기상 19장 11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지진이 일어난 건 맞는데, 주님이 지진을 일으킨 것은 맞는데 거기에 계시지는 않았다는 거예요. 바람이 불어서 산이 깨어지는 것, 바위가 깨어지는 것, 그리고 지진이 일어나는 것, 그럼에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다음에 불 가운데 있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않았습니다(왕상 19:12).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지금 엘리야가 자기의 한계를 알아야 하는 거예요. 지금 엘리야가 틀렸다는 말이 아니고 제한적이다, 엘리야의 존재가 제한적이라는 겁니다. 어떤 점이 제한적이냐? 지금 바람, 지진, 불은, ‘이것은 하나님만이 하신다. 하나님이 인간이 못하는 큰 일을 친히 해내신다.’라고 하나님 그 일하심을 감을 잡는 하나의 재료가 돼요.

재료가 되는 이 자연 현상, 곧 ‘엘리야가 기도했더니만 비가 오지 않았고 다시 기도했더니만 비가 내렸다.’ 비가 내린다는 것도 이 자연 현상이잖아요. 그래서 엘리야는 철석같이 믿었지요. ‘하나님께서는 자연을 통해서 일하시고, 더 중요한 것은 자연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다’라고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단독으로 하나님과 만나서 새롭게 경험한 것은, 특이하고 기이한 자연 현상은 일어났지만 하나님의 계시는 거기에 없다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들이 짐작하고 인간들이 뭔가 낌새를 가지려고 애쓰는 그 자체와 단절된 그러한 새로운 영역에 하나님의 계시가 따로 계시는 거예요.

그런데 엘리야는 이 자연 속에서 하나님을 찾으려고 하니까 엘리야는 지금 진짜 하나님이 계시는 곳으로 넘어가지 못하는 한계성을 보여주는 겁니다. 신약에서는 자연을 능가하는 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영(靈)’이라고 이야기해요, 영.

그런데 지금 엘리야는 구약 사람입니다. 아직까지는 영이 아니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단 이겁니다. “자연은 하나님의 계시와 단절돼 있다.” 자연은 하나님의 계시와 단절돼 있는 거예요. 지금껏 엘리야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와 850 대 1로 붙으면서 자기가 바친 송아지 제물에 불이 내리면서 자기 자신은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 ‘하나님과 하나가 됐다’라는 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통해서 일할뿐더러 자기가 하는 일에 하나님은 100% 도와준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엘리야가 미처 알지 못하는 것,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 있는 자아는 뭘 넘어서야 되느냐? 하나님께서 나를 수치스럽게 만들 수도 있는 분이라는 사실, 하지만 엘리야는 그 자기의 수치를 자기 힘으로 넘어설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이 그동안 하나님과 함께 있음에서 오는 자기 의라는 사실, 본인이 스스로 그 자기 의를 갖다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동안 하나님이 했던 의를 버리는 것이라면 차라리 자기는 죽는 게 더 낫다는 겁니다. “그동안 열심히 했으니까, 이만하면 하면 됐으니까 그냥 죽겠습니다.” 하는 겁니다. 엘리야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온전한 계시의 영역에 들어서지 못하고 자연 안에서, 기껏 자연 안에서 이해되는 하나님이 계시와 그 자체로 단절된 영역이라는 사실을 본인이 깨닫지를 못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통해서 엘리야의 한계를 알려주고 이것이 장차, 장차 신약 시대에 오실 예수님이 바로 엘리야보다 더 월등한, 그걸 능가하는 다른 영역을 동원해서 신약의 성도에게 일방적으로 찾아온다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그게 뭐냐? 자연을 능가한 것, 그것이 ‘예수 안’으로 들어오는 겁니다. 예수 안으로 들어오는 거예요. 엘리야는 자연 안에서 자연 밖으로 넘어가 간다는 것을 상상도 못 했어요. 자연 안에 하나님이 계시고, 자연 안에 계신 하나님과 만나면 그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이고 온전하고 그게 최종적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여러분, 그것이 바로 이 간증 집회라는 거거든요. 간증 집회의 한계나 오늘 보는 엘리야의 한계나 똑같은 겁니다. 사람이 간증이라는 것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떤 심리가 깔려 있느냐? ‘나는 그다지 내 자신이 그렇게 수치스럽지 않다’라고 본인이 자기를 방어하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내놓는데 주님 보시기에는 그거 뭐냐 하면, 자기 의예요.

하나님이 안 받아주는 자기 의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세벨로 하여금 ‘엘리야를 잡아 죽인다’는 것을 왜 허용을 했느냐? 엘리야가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한계가 엘리야에게 들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이 엘리야가 ‘나도 할 만큼 했으니까 여기쯤에서 죽자’라고 자살 시도를 한 거예요.

그렇게 해서 이제는 엘리야가 자기의 뜻대로, 의도대로 선지자 노릇을 해보겠다든지 어떻게 하겠다는 것은 전부 다 당연히 좌절되었습니다. 절단된 거죠. 엘리야 입장에서는 초반에는 굉장히 빛났지만 후반에는 어두움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 나라에 가기 위해서 문을 열려고 하는데 그 손잡이가 안 보이는 거예요. 마지막 문의 손잡이가 안 보이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자연으로부터 국정감사를 받는가,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 국정감사를 받는가? 하나님으로부터 국정감사를 받는 중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가? 열왕기상 19장 12절에 보면,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그다음에 뭐라고 했느지 중요한 게 나와요. 13절에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겉옷으로 얼굴을 가렸다는 것. 엘리야는 모세의 호렙산까지만 와도 선지자의 사명감을 다시 충족하고 채워서 이 악한 바알신과 싸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께서는 모세부터 출발하려는 그 엘리야를 호렙산이 아니라 거기서 더 근원적으로 나가 버려요.
그게 창세기 3장에 나옵니다. 범죄하고 처음 하나님을 대했던 아담과 하와의 자리입니다. 9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할 그때 처음에 창조하신 것 말고 아담과 하와에게 인위적인 요소가 첨가되었습니다.

그것은 뭐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창 3:7). 옷의 등장입니다. 옷이 등장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처음에 인간을 만들 때는 옷 없는 채로 이야기했던 그 하나님께서 이제는 인간들이 스스로, self, 스스로 자기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서 옷이 만들어진 상태 이후에 하나님께서 아담을 찾아온 거예요, 아담과 하와를 찾아온 겁니다.

그럴 때 인간의 조상이 하는 행동이 뭐냐? 그냥 숨는 거죠, 숨은 거예요. 인간이 신체에 옷을 해 입었다는 그 마음가짐과 똑같은 마음가짐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숨는다는 것은 이제는 자기 얼굴을 드러낼 수 없을 정도로 이미 수치스럽다는 것을 고백하는 거예요.

이것은 뭐냐? 단절이에요. 하나님과 인간의 단절. 엘리야는 인간과 인간을 상대하면서 마음껏 하나님의 뜻을 펼쳤지만, 정작 그렇게 뜻을 펼친 나는 하나님과 단절돼 있는 상태인 것을 감히 엘리야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세미한 음성 가운데서 나타났는데 그 전에 대단하게 나타날 때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어요.

‘아, 신난다. 지진이구나, 불이구나, 바람이구나! 하나님이 나타날 때, 나는 여기 있습니다, 하고 나설 만반의 준비를 해야지.’라고 했는데, 그런 대단한 자연 현상 말고 세미한 음성이 나올 때 그때는 엘리야가 자기 겉옷을 가지고 자기 얼굴을 가리는 모습은, 아담이 하나님과 만났을 때 숨는 모습에서 한 치도 벗어난 적이 없는 그 죄악의 단절된 본성을 엘리야가 유감없이 그대로 다 보여준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또 책망합니다.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있어 저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왕상 19:13). 즉 ‘왜 여기 있어? 너는 이스라엘 그쪽으로 가야지 왜 여기 호렙산에 있느냐?’하는 거예요.

마치 “너는 여기 있어서는 안 되는데 네가 해야 할 일을 버리고 여기 왜 있느냐?”라고 책망하는 투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열왕기상 19장 14절에서 엘리야는 또 여기까지 오게 된 자기의 정당성, 자기가 여기 올 수밖에 없는 이유를 주저리주저리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하나님한테 통하지 않는 핑계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엘리야를 다시 북이스라엘로 보내시는데 보낼 때 엘리야에게 어떤 요소, 엘리야의 한계, 엘리야의 한계를 겪게 함으로써 이제 제대로 선지자 노릇을 하게 하는 겁니다. 그때는 적들인 바알과 아세라, 그리고 자기 자신 ‘야! 너희 나와! 나는 하나님의 쪽이야. 너희들은 바알쪽이지? 하나님이 나를 세웠고 나를 보냈다고. 너희들이 날 당할 수 있겠어?’라는 이런 태도였다면 지금부터는 뭐냐?

지금 엘리야가 저쪽과 자기와의 싸움이 아니고, 나 엘리야에게마저도 지적해 주시는, 엘리야가 속한 세계 그 한계 넘어 절단된 세계, 그 너머에 있는 분이 나 엘리야를 보내서 이제는 북이스라엘에게 남은 선지자 사명을 감당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엘리야가 이제 엘리야가 보여줄 수 있는 사명은 뭐로 나타나는가? 옷입니다. 옷, 그 부끄러운 옷, 하나님이 나타났을 때 그 속에 자기를 숨겼던 자기의 나약함, 자기의 상처, 자기의 자기 자존심, 그걸로 자기가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여기게 했던 그 요소가 바로 옷과 더불어서 새로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계시를 전하는 그 현장에 재현하는, 하나님과 엘리야가 만난 그 현장, 세미한 소리에서 만난 그 현장을 재현하는 식으로 하나님의 일을 엘리야가 계속하게 됩니다.

열왕기하 2장 14절에 보면, 엘리사가 나오는데 엘리야의 후계자지요.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그 겉옷을 가지고 물을 치며 가로되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 하고 저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엘리사가 건너니라.”

이때부터 엘리야의 옷은 어떤 옷이냐? 전형적인 선지자의 기능을 담고 있는 옷으로 전환됩니다. 예수님도 그 점을 언급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7-8절에 보게 되면 이렇게 돼 있어요. 세례 요한에 대해서 언급하는 겁니다.

“저희가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열왕기하 1장 8절에는 엘리야를 묘사한 대목이 나오는데요. “저희가 대답하되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더이다 왕이 가로되 그는 디셉 사람 엘리야로다.”

가죽옷을 입는다? 세례요한도 이 엘리야를 본받아서 털옷을 입었어요. 이게 무슨 뜻이냐? 그동안 엘리야에게 일했던 하나님의 능력이 옷으로 대변된다는 것을 엘리사가 간파했어요. 그 옷은 뭐냐?

자기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 세미한 소리를 통해서 그 옷, 자기 한계, ‘나는 육이야. 나는 내 자존심뿐이야. 나는 내가 상처받는 것이 목숨 잃는 것보다 더 싫어. 상처받느니 차라리 자살하는 게 나아.’하는 그러한 엘리야의 모든 체험이 엘리야가 입고 있는 그 겉옷 안에 그게 합류가 되고 포함되어 있어요.

인간의 연약함과 한계와 단절성이 포함된 그 옷을 앞장세워서 하나님께서는 제대로 일을 하시는 겁니다. 엘리야는 이제 하나님과 단절케 했던 자기 의를 능가하는, 그 두터운 하나님의 의로 무장된 채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했다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입니다. 지진? 아닙니다. 불? 아니에요. 산이 깨지는 게 아니에요.

진짜 하나님께서 신약 시대에 성도에게, 자기 백성에게 최종적으로 주시려고 하는 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의로 옷 입는 거예요, 하나님의 의로! 어떤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해요. “구부정하게 하지 말고 허리 똑바로 하고 가슴을 펴세요!” 그걸 귀담아듣죠.

허리 똑바로 세우고 가슴 펴면 모든 인간이 건강해져요. 나이 많다고 구부정한 게 꼴보기 싫다, 이 말이거든요. “엘리야야! 허리 곧게 세우고 가슴을 펴! 왜? 넌 죄인이기 때문에. 넌 죄인이거든. 넌 자기의 밖에 모르고, 이세벨이 잡으러 오니까 ‘하나님이 나를 안 도와주고 쫓기게 했으니 내 처지가 부끄러워서, 내가 내 상처를 용납하지 못해서 하나님, 차라리 죽겠습니다.’라고 할 정도로 부들부들 자기의나 붙들고 살아가는 이 엘리야야!”

그 못난 엘리야가 천사가 도와주니까 이제 하나님이 내 편인줄 알고 그 못난 모습 가지고 하나님께 은혜받겠다고 호렙산까지 왔지요. 하나님께서는 호렙산이 아니고 처음 창세기 3장에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에 있던 그 지점까지 엘리야를 데려와서 “이 옷 입은 인간아, 내가 옷 입은 인간 채로 인간의 의가 아니라 그걸 능가하는 하나님의 의를 죄인인 너를 앞장세워서 하나님의 의를 전파하겠다.이것이 신약 시대에 오게 되면 자연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의가 됩니다.

허리 세우고 가슴을 펴라는 이건 육신적으로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정신적으로 허리 곧게 세우고 가슴 펴고 주님의 의로 당당하게 사세요, 주님의 의로! 그것도 털 옷이니까, 주님의 의가 두껍게, 뭐 죄 몇 개 지으면 날아가는 그런 요만한 주님의 의 말고, 어떤 죄도 돌파할 수 없는, 겨울의 아주 두꺼운 털 옷같은 그런 풍성한, 깊이도 다 헤아릴 수 없는 무한한 하나님의 의로 당당하게 사세요. 마음 같아서는 설교 여기서 끝내고 싶어요.

로마서 1장 16절에 보면 그것을 가지고 복음이라고 합니다, 복음. 로마서 1장 16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할 때 엘리야는 자연을 다루시는 하나님, 비가 오게 하고, 가뭄 들게 하고, 지진이 일어나고, 산이 깨어지는 일들, 바람, 지진, 불같은 그런 한계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생각했는데 신약에 오니까 그게 아니고 생각도 못 한, 어떤 일을 해도 정신적으로 허리 펴고 가슴 펼 수 있을 만한 하나님의 의를 바로 복음으로, 최종적인 하나님의 능력으로 신약에 주께서 단단히 준비해 주셨습니다.

그때부터 신약 성경에 보면 여러 군데에 나오는데요, 예수님의 옷을 입으라고 되어 있어요. 예수님의 옷을 입으라고 하는 그 사례가 이미 구약에 벌써 나옵니다. 구약 출애굽기 28장 2절에 보면 “네 형 아론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지어서 영화롭고 아름답게 할찌니”라고 했습니

아론이 입는 옷은 아름답고 영화로운데 왜냐하면 거룩이 묻어있기 때문에, 거룩으로 짜여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옷이고 그리고 영광스러운 옷이에요. 그런데 이 옷이 민수기 20장 25-28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너는 아론과 그 아들 엘르아살을 데리고 호르산에 올라 아론의 옷을 벗겨 그 아들 엘르아살에게 입히라 아론은 거기서 죽어 그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라 모세가 여호와의 명을 좇아 그들과 함께 회중의 목전에서 호르산에 오르니라 모세가 아론의 옷을 벗겨 그 아들 엘르아살에게 입히매 아론이 그 산꼭대기에서 죽으니라 모세와 엘르아살이 산에서 내려오니.”

아론이 죽었어요. 아론은 죽었지만 그 옷의 능력은 살아있어요. 그 살아있는 옷의 능력이 아론이 죽고 난 뒤 후대 이스라엘을 주께서 언약으로 지배하기 위해서는 아들인 제사장 엘르아살에게 아버지가 입었던 그 거룩하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옷을 입히니까 엘르아살이 아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아론 대하듯이 아론과의 관계를 아들과의 관계로 계속 이어지게 하는 겁니다.

‘성도에게 예수님의 옷을 입힘으로써 예수님이 죽고 난 뒤에 예수님에게 있었던 그 거룩한 관계, 똑같은 효과와 효력을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고스란히 준비해 두셨다.’ 이게 복음이에요. 이게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옷 외에는 안 돼요. 자기가 백화점에서 사 입은 200만 원짜리 옷 가지고는 안 된다니까요? 명품 잠바를 물려 입는다고 애가 거룩한 애가 되는 건 아니거든요. 애 옷이 그렇게 예쁘다는데 아직 그런 예쁜 옷을 못 봤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뭘 주느냐 하면, 거룩한 옷을 입혀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그게 무슨 옷이냐? 흰옷이라고 되어 있어요. 요한계시록 3장부터 나옵니다. 3장 4-5절에 보면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되어 있어요.

요한계시록 4장 4절에도 24장로가 있는데 이 장로들이 흰옷을 입었어요. “또 보좌에 둘려 이십 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 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

그래서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야, 이 장로들이 주님의 옷이라고 빨기는 열심히 빨았구나.’ 빤 게 아니에요. 자기가 자기 힘으로 빤 게 아니고 요한계시록 7장 14절에 보면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그렇게 해서 희게 되었다는 거예요.

어린 양의 희생의 효과, 효력이 묻은 옷이 바로 예수님의 옷이고 그 옷은 소위 아담으로부터 내려오는 그 죄 성…, 다시 말해서 자존감, 자존심, 수치스럽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그런 생각들, 남한테 기죽지 않으려는 생각, 그것 때문에 겉으로는 허세 있게 굴지만 정신적으로서는 허리를 펴지 못하고 정신적으로 가슴 졸이면서 ‘혹시 나 욕하는 사람은 없나, 비난하는 사람은 없나, 누가 나 못생겼다고 뒷담화하는 사람은 없나?’ 하고 졸아서 살아가는 우리의 이 모습.

실컷 주의 일을 했는데 세상에서는 경찰 보내서 “그 아무개 목사를 체포해라. 죽인다.” 할 때 교회에 있지도 못하고 저 제주도 어디 굴에 숨어서 “주여, 그동안 주의 일을 얼마나 했습니까? 강의도 하고 책도 냈습니다.” 주께서는 “이리 와. 너 그동안 주의 일 한 거 네 잘남이고 네 의였어. 뭐 하나님이 네 편 돼 가지고 같이 하나님이 오냐오냐, 해 줄 줄 알았지? 이게 네 한계잖아.”

사람을 의식하는 데서 오는 한계, 남들이 어떻게 나를 평가하는지에서 오는 한계, 겉으로는 주의 종이다, 나한테 덤비면 저주받는다고 큰소리는 쳤지만 막상 세상이, 현실이 나를 알아주지 않을 때 우리는 얼마나 졸았고 기죽어 살고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 해서 산 위에 올라가서 바위 위에 누워서 ‘참, 그동안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데, 죽어버릴까…’ 하면서 죽고자 하는 거, 기껏 우리의 자존감을, 기껏 그런 식으로나 채워야 되겠습니까?

뜻대로, 맘대로 안 된다고 하면서 권총을 가지고 자기 머리에 대면서 ‘차라리 내가 죽는 게 낫지 아니하냐?’ <부세미>라는 드라마에 나오죠. ‘이렇게 적들한테 지다니,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이렇게 자존심이 상할 것 같으면 차라리 내가 죽는 게 낫지.’

이런 일이 지금 얼마나 허다하게 일어납니까?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보면, 피로 씻은 그리스도의 옷, 하나님이 그것만 주시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깜빡 잊어버리고 놓친 겁니다. 주께서 우리의 옷 벗기고, 가죽옷으로 입힌 그 일관된 하나님의 복음이,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의’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끝으로 고린도후서 5장에 방금 그 이야기가 나옵니다.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21절,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의 덩어리’가 되게 하심이니라. 예수님의 그 십자가 앞에서 이제는 스스로 움츠리지 마시고, 얼마든지 당당해도 괜찮아요. 당당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쓸데없는 자존심 경쟁에서 졌다고 좌절하지 말고, 그동안 하나님의 일을 했는데 왜 하나님이 안 도와주냐고 원망할 것이 아니라 그 못난 인간이라도 예수님의, 하나님의 옷으로 입혀주신 그것으로 인하여 이제는 그 누구 앞에서도 허리 펴고, 가슴 펴고, 정신적으로 당당하게 그리스도 의만 증거케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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