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수치를 통한 영생

아빠와 함께 2025. 11. 20. 09:03

수치를 통한 영생 

2025년 11월 19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20:1-7

20:1 아람 왕 벤하닷이 그 군대를 다 모으니 왕 삼십이 인이 저와 함께 있고 또 말과 병거들이 있더라 이에 올라가서 사마리아를 에워싸고 치며
20:2 사자들을 성 중 이스라엘 왕 아합에게 보내어 이르기를 벤하닷은 이르노니
20:3 네 은금은 내 것이요 네 처들과 네 자녀들의 아름다운 자도 내 것이니라 하매
20:4 이스라엘 왕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내 주 왕이여 왕의 말씀 같이 나와 나의 것은 다 왕의 것이니이다 하였더니
20:5 사자가 다시 와서 이르기를 벤하닷은 이르노라 내가 이미 네게 보내어 말하기를 너는 네 은금과 처들과 자녀들을 내게 붙이라 하였거니와
20:6 내일 이맘때에 내가 내 신복을 네게 보내리니 저희가 네 집과 네 신복의 집을 수탐하여 무릇 네 눈이 기뻐하는 것을 그 손으로 잡아 가져가리라 한지라
20:7 이에 이스라엘 왕이 나라의 장로를 다 불러 이르되 너희는 이 사람이 잔해하려고 구하는 줄을 자세히 알라 저가 나의 처들과 자녀들과 은금을 취하려고 사람을 내게 보내었으나 내가 거절치 못하였노라

이방 민족과 이스라엘과의 전쟁은 어느 쪽이 훌륭한가에 달려 있는 전쟁이 아닙니다. 이방민족을 의도적으로 움직여서 이스라엘을 침략케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는

■이스라엘을 쪼개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을 쪼개보면,

■그 안에 하나님이 주신 계시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계시는 결국 온 세상의 현실을 대체하게 됩니다.

겉으로 나타난 ‘하나님 섬김’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쪼개진 내부의 본 모습과는 전혀 판이합니다. 북이스라엘은 명목상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요 아람 나라는 명목상 바알신을 섬기는 나라입니다. ‘신을 섬긴다는 점’에 별 차이가 없어보입니다. 문제는 그 신의 본질이 무엇이냐는 겁니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두 진영 간에 본질적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짐작됩니다. 그러나 아람 나라를 통해서 이스라엘과 전쟁을 붙이는 것은 본질적 차이가 분명 있어야하는데 그 차이성을 어느새 없어졌음을 나타내려 합니다. 두 민족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마음 자세로서 세상에 임하고 있었습니다.

동질의 사고방식의 대표적 발언은 아람 나라 벤하닷 왕이 제대로 보여줍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집중 조명하는 계층이 일반 서민이 아니라 권력이 집약된 층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일반 서민들은 세상 권력이 어디서 나오고 있는지는 그다지 관심없습니다. 그저 자신의 소박한 가족의 안녕과 건강과 행복이 주어진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식입니다.

“오늘도 무사히!” 옛날 시대 버스 안에 걸려 있는 ‘기도하는 소녀’ 그림의 새겨진 글귀입니다. 나만 무사하고 행복하다면 더는 소원이 없이 살겠다는 것이 일반 서민들의 생각입니다. 하지만 권력이 집중되는 고위층의 그렇지 않습니다. 권력 서열에 의한 질서잡기에 매진하게 됩니다.

확실하게 체계가 잡힌 사회만이 보다 굳건하고 안정적이며 일반 서민들이 희망하는 행복 보장에 유리한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권력층은 그 체계를 확대해 나가려고 전쟁을 일으킵니다. 즉 ‘인간이란 힘없이는 못살고 힘이 있더라도 보다 더 많은 힘 가진 자에게 순응하고 순종하는 것이 본인의 행복 유지에 유리하다는 것’을 진리처럼 통용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벤하닷’이라는 아람 왕은 ‘하닷’이라는 아람 나라의 신의 아들로 자처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전능한 신의 지시에 충실한 아들이 본인이라는 것을 나라 전체에 덮게 하므로서 나라의 질서를 세우는 근본 힘의 토대가 됩니다. 그렇다면 벤하닷을 통해서 나타난 바알 신(하닷신의 변형체)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너도 알고 나도 아는 힘이 있어야 사람 대우받는다는 원칙을 말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인간 내부에 인간이 감히 통제할 수 없는 게 들어 있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정욕’ 곧 ‘욕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롬 1:24)

이 말씀에서 ‘정욕대로 내어버려 두신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 내부에는 인간에게 신으로 행세하는 것이 있답니다. 그것은 정욕, 곧 욕망입니다. 욕심입니다. 인간들이 신을 고를 때는 자신의 욕망의 허가를 난 상태입니다. “힘을 주세요 신이시여. 힘이 있어야 우리는 삽니다.
우리가 원하는 행복입니다. 행복도 힘의 바탕 위에 주어집니다. 신이시여!”

따라서 아람왕 벤하닷은 북이스라엘 아합왕에게 다음과 같이 윽박지릅니다. “내가 사신을 보낼터니 그의 처와 너의 자식과 너의 금은 보화는 너의 것이 아니라 내 것이다. O.K?” 여기에 대해서 북이스라엘의 아합왕은 벤하닷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하여 조심스러워하면서 강자가 제시한 서열에 동의합니다. 그리고 아부합니다.

상당히 굴욕적인 처우를 북이스라엘 아합왕이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연한 결과라고 인정합니다. ‘힘의 논리로 운영되는 세상 질서’ 이 원칙에 대해서 그 어느 누구도 이의를 달 수 없을 정도로 명백한 진리처럼 인정받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섬기든 우상을 섬기든 한결같이 인정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아니다’라고 말할 수 없는 사실에 이스라엘은 놓여 있습니다. 즉 결코 틀리지 않는 말을 한 것이 벤하닷이라는 이방나라 통치자인데 거기에 반박할 여호와의 내용은 평소의 그들의 형편에서는 존재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모든 인간의 삶의 원리를 하나님은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마 26:52) 힘을 쓰는 자는 힘으로 망하고,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하고, 행함을 내세우는 자는 행함으로 망합니다. 그 이유는 자기 내부의 욕망이 바로 그런 힘과 칼과 행함을 통해서 자아를 도리어 관리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5,000명을 먹이셨기 때문입니다. 큰 힘 가진 자 밑으로 들어가면 자신들의 행복 영위에 필요한 힘을 얻을 수 있을리라는 기대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6:66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요 6:66) 무슨 이유로 그들은 다시는 예수님과 결별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다음의 말씀이 그들의 지성에 손상을 안겨주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 6:53)

그들은 각자 자기 의가 갖고 있었고 그것이 자신을 지탱하게 하는 최후의 힘의 보루로 여겼던 겁니다. 즉 그들은 스스로 수치스러운 존재가 되기를 원치 않았던 겁니다. 진정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인간들의 욕망에 충족하는 힘을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힘을 쏙 빼신 하나님입니다.

그런 십자가 자리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사람 만날 이유없습니다. 누가복음 5:8-11에 보면, 베드로는 자진해서 자신이 죄인이라고 자복합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과거를 관리할 자신이 없었던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베드로는 ‘사람 낚는 사람’이 되게 하므로서 베드로의 미래까지 확정지어버렸습니다.

즉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의 앞에서 인간의 의는 너무나도 보잘 것처럼 초라한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힘 가짐의 욕망이 얼마나 문제가 있는지 십자가 앞에서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57강-열왕기상 20장 1-7절(수치를 통한 영생) 251119-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 열왕기상 20장 1-7절입니다.

열왕기상 20:1-7

“아람 왕 벤하닷이 그 군대를 다 모으니 왕 삼십 이인이 저와 함께 있고 또 말과 병거들이 있더라 이에 올라가서 사마리아를 에워싸고 치며 사자들을 성중 이스라엘 왕 아합에게 보내어 이르기를 벤하닷은 이르노니 네 은금은 내 것이요 네 처들과 네 자녀들의 아름다운 자도 내 것이니라 하매 이스라엘 왕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내 주 왕이여 왕의 말씀 같이 나와 나의 것은 다 왕의 것이니이다 하였더니 사자가 다시 와서 이르기를 벤하닷은 이르노라 내가 이미 네게 보내어 말하기를 너는 네 은금과 처들과 자녀들을 내게 붙이라 하였거니와 내일 이맘때에 내가 내 신복을 네게 보내리니 저희가 네 집과 네 신복의 집을 수탐하여 무릇 네 눈이 기뻐하는 것을 그 손으로 잡아 가져가리라 한지라 이에 이스라엘 왕이 나라의 장로를 다 불러 이르되 너희는 이 사람이 잔해하려고 구하는 줄을 자세히 알라 저가 나의 처들과 자녀들과 은금을 취하려고 사람을 내게 보내었으나 내가 거절치 못하였노라.”

두 나라가 지금 전쟁 중입니다. 한 나라는 아람 나라입니다. 아람 나라는 지금의 시리아예요. 시리아는 지금도 이스라엘 북쪽에 있는 나라인데 이스라엘에 딱 붙어 있는 접경 지역이죠. 그 시리아의 왕이 있는데 그가 ‘벤하닷’입니다. 벤하닷 왕 밑에 지방의 영주들이 있어요. 본문에서 ‘왕’으로 돼 있는데 몇 명이냐? 32인이 그 벤하닷과 더불어서 그 말과 병거를 가지고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입니다, 사마리아를 에워싸고 드디어 공격해 들어왔던 이야기입니다.

성경에서 이렇게 두 나라가 전쟁할 때 우리가 비중을 두는 게 ‘일반 서민들 이야기는 왜 성경에서 안 나오느냐?’ 하는 거죠. 왜 주로 왕 이야기가 성경에 왜 나오느냐? 그것은, 인간 사회에서 일반 서민이 사적으로 발산하고 있는 그 영향력보다 왕의 영향력이 훨씬 더 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왕 중심, 왕에 집중해서 성경을 기록하는데, 일반 서민들은 그 왕 밑에서 그 권세에 눌려 있는 상태인 거예요. 일반 서민들 입장에서는 뭐만 생각하느냐? ‘왕의 안정적인 통치 밑에서 소박하나마 내 작은 행복이라도 건졌으면 그것으로 만족하게 살겠다.’ 그런 입장에서 살아가고 있죠.

그런데 성경에서는 바로 그게 안일함이라, 뭔가 세상을 크게 볼 줄 모르고, 세상을 전체로 봐야 하는데 전체를 볼 줄 모르고 ‘소박한 나의 행복만 챙기면 뭐 얼추 잘 사는 게 아닌가?’ 이렇게 생각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도 ‘왕의 입장에서 보느냐, 아니면 서민의 입장에서 보느냐?’에서 차이가 나요.

먼저 서민의 입장에서 보게 되면, ‘내가 얼마나 행복하고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가?’에 신경 쓰면서 성경을 보게 됩니다. 옛날에 제가 국민학교 다닐 때 버스를 탔고요, 중학교나 고등학교 다닐 때도 버스를 탔던 것 같은데요, 그럴 때 버스를 타게 되면 운전석 위쪽에 옥색 원피스를 입은 서양 소녀가 위를 쳐다보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무릎을 꿇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위를 향하는 자세를 잡고 있고, 위에서는 햇살이 쏟아지고 있는데 거기에 “오늘도 무사히”라고 적혀 있었어요. 오늘도 무사히. 서민으로 태어나서 갖고 있던 우리 마음의 본모습을 그대로 보여준 거예요. ‘나 하나 무사히 살게 되면 그냥 그것만으로도 난 행복하겠습니다.’ 그런 자세를 갖고 있어요.

그런데 그런 자세로 우리가 성경을 본다면 성경을 완전히 오산하고 있는 거예요. 잘못 보고 있는 겁니다. ‘오늘도 무사히, 무탈하게, 안 아프고, 가정에 문제없고, 그러면 됐지’라고 하고 있는데요, 그럴 때 더 위에 있는 권력, 우리보다 더 많은 영향력을 제공하는 그 권력의 성격, 그 힘의 성격이 좋은지 나쁜지에 대해서 전혀 우리는 모르고 있는 상태입니다.

힘이라는 것이 나쁜 힘이 있고 좋은 힘이 있다는 사실, 그런 것은 나는 모르겠고, 그냥 오늘도 무사히 나만 행복하게 되면 그냥 고맙겠습니다’라는 생각, 이게 바로 성경을 엉뚱하게 보는 태도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보면 안 된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방금 제가 이야기한 그것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아람 나라 왕의 의식이었습니다. 이방 민족들의 의식이었어요. 지금 싸움을 아람 나라하고 누구하고 하느냐? 이스라엘하고 해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방금 이야기한 ‘오늘도 무사히’ 그런 태도를 절대로 가지면 안 돼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법과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그 힘에 의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힘에 의해서 살아가는 민족이거든요. 그런데 이스라엘에 쳐들어오는 아람 나라, 이방 나라는 어떠냐? 그 백성들이 ‘오늘도 무사히, 무탈하게 그냥 우리 가족끼리 소박하게, 행복하게 잘 살면 그걸로 족합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일하심이 없는 그런 이방 나라의 특징이에요. 다시 말씀드려서 오늘 본문은 싸움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방 민족과 이스라엘 간에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겁니다. 싸움을 벌인 그 내용에 대해서 먼저 소개된 ‘벤하닷’이라는 왕은, 방금 제가 제시한 인간들의 의식, ‘소박하게 자기 몸 안 아프고 편안하게, 행복하게 살면, 가족끼리 오순도순 살면 좋겠다’라는 인식을 가지고 어디를 공격하느냐?

하나님이 계시는 이스라엘을 공격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땅에서 성경의 뜻도 모르고 그냥 조용하게 사는 것은 그 자체가 뭐냐 하면, 바로 천국을 공격하는 이방 나라의 태도를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나만 행복하면 되잖아요, 하나님!’ 이런 식이에요.

그래서 이방 나라의 특징을 한마디로 말하면 뭐냐? ‘힘이 있으면 행복해지고 힘이 없으면 불행해진다.’ 이 원리입니다. 다시 말씀드릴까요? ‘뭐든지 힘이 있으면, 여유의 힘이 있으면 그만큼 행복을 많이 누릴 수 있고 힘이 없으면 행복이 없어진다.’ 보통 사람들은 그 원리에 대해서 하등 이의를 걸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너무나 합당하고 상식에 부합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상식에 대해서 성경은 뭐라고 하느냐? 그게 하나님을 공격하는 자세, 태도라고 규정해요. 그런 마음 자세가 하나님을 공격 해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아람 나라, 이방 나라가 이스라엘을 공격할 때 이렇게 공격합니다. “너 나보다 세, 안 세? 우리나라보다 힘이 많아, 적어?”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이 “아이고, 우리 아람 나라 임금님! 우리는 힘이 없습니다.” 이렇게 나오면 아람 나라가 뭐라고 하느냐? “그러면 내가 너를 서열로 매겨줄게. 이제부터 너는 나의 종이 된다.” 그게 오늘 본문에 열왕기상 20장 2-4절에 나옵니다.

“사자들을 성중 이스라엘 왕 아합에게 보내어 이르기를 벤하닷은 이르노니 네 은금은 내 것이요 네 처들과 네 자녀들의 아름다운 자도 내 것이니라 하매 이스라엘 왕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내 주 왕이여 왕의 말씀 같이 나와 나의 것은 다 왕의 것이니이다.” 이렇게 답변을 했어요.

그러니까 이 말은 이거예요. 중국의 아시아 국장이 아래 주머니에 두 손 넣고 일본 국장한테 이야기합니다. “일본 국장! 우리가 대만을 치든 말든 왜 당신들이 관여해?” 주머니에 손 넣고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같은 급의 일본의 국장은 이렇게 합니다. 손을 공손에 모으고 “스미마생! 스미마생!” 물론 실제로 그런 말은 하지는 않았겠지만요, 하여튼 아주 공손한 태도로 굴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서열화예요. “꿇어! 내 밑에 꿇어!” 그 말이에요. 이게 무슨 세계다? 이게 바로 아람 나라, 이방 민족이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에요. ‘세상은 이렇게 힘의 서열로 층층이 계급화되어 있다. 이게 우리가 보는 현실 모습이다. 뭐 기분 나빠?’ 이런 식이에요.

“내가 세상을 볼 때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지배하는 이 구조에 대해서 네가 뭐가 섭섭해? 개기고 싶어? 내 말이 틀렸어? 틀리면 틀렸다고 이야기해. 내가 손 좀 봐줄 테니까.” 이겁니다. 그러면 힘 약한 사람은 어떻게 나오겠어요? “아이고, 어르신들께서 그리 나오시는 것은 극구 지당한 말씀이죠. 나는 자진해서 당신의 종이 되겠습니다. 그저 우리 가정 소박하고 무탈하게, 행복하게 살게만 해준다면 더는 소원이 없습니다.” 이렇게 나오죠.

그럴 때 지배하는 자의 사고방식과 지배받는 사고방식이 모두 다 한통속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 세상에 유일하게 통하는 진리예요. 힘의 균형에 의해서 서열화되는 그 상태가 유일한 체제고, 구조고, 진리입니다. 이거 아니라고 하는 사람 혹시 있습니까?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어요? 다른 의견 없습니다.

왜 이렇게 전혀 하나님에 대해서 무서워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고, ‘하나님 뜻 그딴 것은 몰라도 괜찮고, 중요한 것은 내가 어느 정도의 돈을 가지고 힘을 가지고 어느 정도의 남을 지배할 수 있는 그러한 영향력이 있느냐? 그게 진리고, 그게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는 체제인 것이 맞다’라고 주장하는 것, 성경에서는 그런 예를 아람 왕 벤하닷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렇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이렇게 알려주는 것은, 우리에게 반응을 묻는 거예요. “벤하닷이라는 왕이 이런 식으로 여러분에게 치고 들어오는 데 여기에 대해서 여러분들은 어떤 마음가짐과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합니까?”라고 묻는 겁니다.

그렇게 물으면 우리의 답변은 유구무언이에요. 입은 있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왜 할 말이 없는가? 벤 하닷이라는 힘의 질서를 논하는 그 이야기가 너무나, 너무나 오늘날 우리들에게 합당하기 때문에 그래요. 다른 대안이 없어요.

‘그래 그렇지, 그렇지! 그렇지!’라고 동의할 수밖에 없는 것은, 벤하닷뿐만 아니고 어느새 우리도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런 방식 외에는 다른 방식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그러면 여기서 하나님의 뜻을 제가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우리 인간들의 의견은 이미 다 들통났다고 돼 있으니까요.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은 이렇습니다. “십자가에서 만나지 아니하면 너희를 상대하지 않는다.” 이게 하나님 뜻이에요.

십자가,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십자가 지신 그 자리가 아니면 나한테 말 걸 생각하지 마라. 나는 십자가 외의 자리에서는 너희를 만날 생각이 없다.” 보통 사람들이 카페에서 만나잖아요. 약속을 카페에서 만나기로 잡았으면 다른 데서 백날 기다려도 만나야 할 그 사람이 안 나타나요.

주님께서 만나기로 한 카페의 장소가 뭐냐? 십자가예요. “십자가에서 만나자.” 십자가에서 만나자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기시고 고집부리는 이유가 뭐냐? 십자가 지신 예수님은 힘이 하나도 없습니다. 일체의 힘이 없는 분이에요.

지금껏 제가 이야기한 아랍 나라 사람 벤하닷에 대해서 소위, 소위 하나님 믿는다고 여겼던 이스라엘 민족도 아무 소리도 못 하고 “맞습니다, 맞습니다!” 본문 열왕기상 20장 4절에서 이스라엘 아합왕이 아람나라 왕 벤하닷을 부르는 호칭이 뭐냐? “내 주 왕이여!”

‘내 주 왕’이라는 말은 뭐냐 하면, “나는 당신의 충성스러운 종입니다. 딸랑딸랑! 나는 당신의 종에 불과합니다.” 다시 말해서 “힘에 밀리기 때문에 우리 대왕님께서 오셔서 ‘네 처나 자식이나 은금과 보화를 내 가져가도 할 말 없지?’ 할 때 ‘예! 할 말 없습니다. 극히 지당합니다.’라는 이런 답변 외에는 다른 답변이 없습니다”라는 거예요. 그게 바로 힘의 논리 때문에 그렇습니다, 힘의 논리.

그렇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성경은 왜 있는 거예요? 성경이 하나님 뜻이다. 성경은 왜 있는가? 보통 사람들에게 이렇게 물었을 때 ‘성경 내용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면 이렇게 어렵게 살아가는 우리 가정과 내가 더 행복해지고, 무탈하게, 행복하게 인생을 마감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좋으시고 사랑 많으신 하나님께 한 수 배우기 위해서 성경을 봅니다.’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벤하닷이 믿는 거짓된 하나님이에요.

하나님 자체가 잘못된 겁니다. 근데 벤하닷 뜻이 뭐냐? ‘하닷(הדד)’은 그 아랍 나라의 신 이름이에요. ‘림몬’이라는 우상도 있는데 림몬이라고 하든, 하닷이라도 하든 그걸 포괄적으로 이야기하면 ‘바알’입니다. ‘바알’신의 여러 가지 변형체가 하닷이고 림몬이고 그런 거예요.

그러면 ‘벤(בן)’은 뭐냐? 그 하닷의 아들이 벤이에요. ‘벤(Ben)’이라는 팝송이 있어요.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 1958-2009) 이 부른 벤이라는 노래, 그게 ‘아들’이라는 뜻이거든요. 성경에 나오는 벤(בן)이 ‘아들’이라는 뜻이에요.

‘하닷’이라는 신의 아들이기 때문에, 다른 말로 하면 신을 내 아버지로 여기고 ‘보이지 않는 신이 낳은 인간적인 모양새가 나 벤 하닷이다.’라는 겁니다. 그래서 ‘나의 논리, 이 모든 세상의 인식은 바로 내가 즐겨 믿고 순종하는 하닷, 또는 바알이라는 신의 성격을 대변해주고 있’는 겁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아람 나라에서 왕이 그런 식으로 자기가 믿고 싶은 신을 믿으라는 그 말이죠. 그런데 명목상 여호와 믿고, 대외적으로 여호와 믿는다는 이스라엘의 왕 아합은 왜 거기에 동조하는 거예요? 교회 바깥사람들이 “힘이 있어야, 돈이 있어야 사람 구실한다.” “OK!” 그렇게들 이야기해요. 그들은 그렇게 살아가니까요.

성경에서는 예수님이 “복음이 없는 사람들의 신을 욕망”(24절)이라고 했어요, 욕망! 그게 로마서 1장에 보면 나옵니다. 세상 사람들이 혼자 사는 게 아니에요. 그들에게 어떤 신이 있는데 그 신 이름이 뭐냐? 성경에서는 신약에서 분명하게 규정해 줬어요. 그들은 욕망을 섬기며 살아요. 그들이 이야기하는 신은 욕망의 화신이에요. 구약의 모든 우상들이 자기 욕망의 구현체인 것처럼요.

로마서 1장 24절에는 그것을 욕망 또는 정욕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들 속에 정욕이 있고, 그 정욕이 시키는 대로 살아가는 것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OK! 네가 섬기는 정욕대로 마음대로 살아 봐.” 이렇게 규정을 했습니다.

그러면 소위 예수님 믿고 하나님 믿는 우리가 성경을 볼 때는 어떤 자세냐 하면, ‘우리에게 욕망이 있고 정욕이 있더라도 나의 욕망과 정욕을 다스려 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성경을 봐야 한다는 그 말이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온 능력으로 감히 통제가 되지 않는 우리의 욕망과 정욕까지 다스려주시는 분인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무엇을 뜻하는가? ‘힘없는 하나님’을 말합니다. 왜 그런가? 하나님이 택하지 않은 이스라엘 바깥의 모든 이방민족들은 ‘어떤 신을 섬기든 간에 힘 있는 신이어야 믿을 만하다’ 이러한 마음 자세를 가지고 믿게 된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 속에는 정욕이 있고, 욕망이 있고, 인간의 욕망을 달성하는 것은 인간의 욕망보다 더 큰 욕망을 가진 그 신의 여유분이 있으니까, ‘내 욕망과 신의 욕망을 일치시킬 때 내 욕망의 소원이 이뤄진다’는 그러한 희망, 비전, 소망, 그 소망 때문에 간절한 마음으로 통성 기도하면서 그들은 자기의 욕망의 신에게 빌잖아요.

빌 때의 그 마음가짐이 뭐냐, ‘신이시여, 하나님이시여!’ 또는 뭐 ‘부처님이여’ 또는 ‘예수님이여! 이 세상에서 내가 사람답게 살려면 하나님이여,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내가 절실하게 느낍니다. 그러니까 내가 이 땅에서 제발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내 욕망이 원하는 힘을 좀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렇게 비는 거예요.

제가 이런 이야기할 때요, 그냥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복음이 진리고, 그 복음이 맞다’라고 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어요. ‘십자가 복음이 옳다’라고 했던 사람들이 결국은 어디로 가느냐? 십자가 복음이 전혀 힘이 안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십자가 복음을 포기하는 길로 갔습니다. 다 갔어요.

여러분들이 인생을 덜 살았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을 적게 만난 것 같은데 앞으로 인생을 더 살아보세요. 십자가 복음 운운하는 사람들이 결국은 어디로 가느냐? 십자가 보다는 돈, 십자가 보다는 나의 힘, 이게 내 행복에 즉각적인 효과를 준다는 것, 그걸 그들은 믿어요.

내가 지금까지 알았던 십자가는 관념이었고 성경 내용은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이지만 내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돈 없고 힘없는 것은 생생하고 실감 나는 거예요. “이 세상에 산다는 것은 힘으로 살고 돈으로 사는 것이지 그 외에 다른 소리 다른 이야기를 나에게 하지 마라. 난 딱 듣기 싫어. 난 마음 굳혔어. 난 돈으로 살고 힘으로 사는 게 내 행복이라는 것, 지금껏 인생 경험하고 살아오면서 누누이 다시 확인하고, 다짐하고 또 확인해도 이것은 너무나 분명하고 부정할 수 없는 정확한 진리다. 나의 행복은 힘에서 나온다. 내 앞에서 딴 소리하지 마. 십자가 이야기하지 마.” 이런 식으로 정리하고 십자가 복음과 ‘빠이빠이’ 한 사람들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묻습니다. “아직도 왜 안 가고 있어요? 세상 사람들이 돈으로, 힘으로 행복하다고 하는데 당신들은 왜 아직도 십자가 붙들고 있어요?” 그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어요. 성경은 우리에게 행복을 주는 게 아니라는 것. 뭘 주느냐? 수치심을 준다는 거예요, 수치심을.

수치심을 극복하지 못하면 영생은 없습니다. 수치심을 넘어서지 않으면 영생은 없어요. 자기 자신의 그 잘남과 자기의 의로움, 그것이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수치스러운 짓이라는 것, 자신의 의가 하나님의 십자가 의에 비해서 하잘것없다는 것을 아는 것, 이게 바로 영생이고 천국입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아람왕 벤하닷이 와서 “야, 꿇어!” 하니까 아합이 어떻게 했습니까? “예. 잘못됐습니다. 그냥 봐주시고 소박한 행복이나 주시면 저는 만족하겠습니다.” 하고 무릎 꿇었잖아요. 이게 뭐냐? 북이스라엘 아합왕이에요. 이건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왜 그 아람 나라를 통해서 진짜 하나님이 계시는 이스라엘에게 이러한 수모와 수치를 주느냐? 모든 인간은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면 제대로 십자가 예수님의 수치를 알 길이 없어요. 남들이 가진 만큼, 남들 행복한 만큼 행복하려고 다들 지금 눈 부릅뜨고 설치는 이 세상 판국에 어느 인간이 자진해서, ‘나 망해야 돼. 나는 내가 봐도 참 지저분하고 부끄러워.’ 이걸 자진해서 고백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이 말은, 아무도 천국 갈 사람 없다는 이 말과 똑같은 말이에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어요. 힘에 환장한 인간이 무슨 천국을 가요. 사람이 수치를 느끼지 않을 때는, 나에게 아직도 배 열두 척이 남아있다고 여기기 때문이에요.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제가 두 가지 상황을 이야기해 드리고 설교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한 가지 상황은, 요한복음 6장 66절입니다.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제자들이에요,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오천 명을 먹일 때 사람들은 이 예수님에게서 자기를 행복하게 만들 힘이 나온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따라서 자진해서 제자가 되겠다고, 저분을 따라가면 우리에게 행복이 보장된다고 따라왔어요. 산 넘고 물 건너서 따라왔어요.

그게 요한복음 6장 1절부터였는데 66절에 뭐라고 하느냐? 예수님께서 무슨 이야기를 하니까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많이 물러갔어요. ‘그래도 몇몇은 따라다니겠지.’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그런 게 아니에요.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다 갔어요. 그냥 다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열두 제자 보고 “너희들은 왜 남아있지?” 묻는 거예요. “너희는 왜 안 가지?” 67절에서 물어요. “너희는 왜 내 옆에 붙어 있어?” 그러니까 예수님의 입장에서 예수님의 모든 말은요, 절대로 사람은, 기존의 세상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은 절대로 예수님과 붙어 있을 수가 없도록 주께서 말씀하신 거예요.

행복요? 소박한 뭐 화목함? 그건 예수님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주님이 하신 말씀은 “너 아직도 나에게 붙어 있어? 붙어 있을 이유가 없는데 왜 붙어 있지? 떨어져 나가! 너희들은 나한테 붙어 있을 위인들이 아니야. 내가 너희들 사고방식을 너무 잘 알거든.” 이런 식이에요. 그래서 물어요. “너희는 왜 안 안가지?”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베드로가 말하기를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요 6:68).

자, 그 많던 제자들이 왜 떠났습니까? 예수님께서 한 말씀을 해서 다 떠났어요.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영생이 없다’(요 6:68)고 했거든요. 이것은 그들이 그동안 쌓아온 지성에 흠집을 낸 거예요, 그들의 지성에. 인간들의 ‘자기 의’라는 것은 뭐냐?

자기가 누구 앞에 나서도 자기는 지성적인 존재라는 것이 자기 의의 주 내용이 되어 있습니다. ‘나도 알 만큼 알고 사람 대접받을 만큼 예의범절 할 줄 압니다. 그러니까 제발 내 지성을 건드리지 않는 조건이라면 따를 의사가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스스로 자기를 수치스럽게 만들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고 몸부림치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내가 남들 앞에서 수치스럽지 않은 존재가 되느냐?’ 이게 삶의 목표가 되고 말았습니다.

“너 공부 안 할 거야? 유치원 갔다 와서 공부해야지.” 왜 손자 손녀에게 공부 가르칩니까? “너 공부 못 하면 나중에 인간 대접 못 받아. 수치스러운 인간이 된다고.” 이 땅에서는요, 힘이 없으면 아는 힘이든 돈의 힘이든 힘이 없으면 사람대우를 못 받아요. 수치스럽다고요. 힘이 있어야 돼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힘 쭉 빼고 돌아가셨어요. 힘 있는 신들을 섬기기 때문에 그 신과 대립이 되고 대조가 되는, 아무 얻을 것이 없는 것, 힘을 다 빼고 주님은 이야기합니다. “힘 하나도 없는 나를 네가 따라올래? 네가 나를 따라올래?”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마태복음 26장 52절에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다른 말로 하면 ‘힘을 쓰는 자는 힘으로 망한다’는 거예요. ‘자기 선한 행위를 주장한다면 선한 행위로 지옥에 간다.’

왜? 선한 행위가 모이면 자기 잘남이 되고 자기 의로움이 되거든요. “나 이렇게 착실하다. 나 이렇게 훌륭하다. 남한테 지금까지 나쁜 소리한 적 없다.” 지옥 가서 그런 소리 하세요. 그게 당신 안에서 당신의 힘이 되고, 그 힘이 나를 덜 수치스럽게, 수치스럽지 않은 존재로 만드는 데 재료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진짜 천국 가신 분은 에수님인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어떤 인간도 가지 못하는 수치스러운 길로 갔습니다. 이게 빌립보서 2장에 나와요. 아무도 가지 않는 길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누가 따랍니까? 말로는 십자가, 십자가인데 따라갈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갈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자, 결국 제 말은 뭐냐? 구원받을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구원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데 그게 어떻게…, 천국에서는 그런 게 용납 안 되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천국을 갈 수 있느냐? 그게 누가복음 5장 8절에서 11절에 나옵니다. 사람이 칼 쓰는 자는 칼로 망하고, 힘을 쓰는 자는 힘으로 망하고 행함으로 사는 자는 행함으로 망하는 이유가요, 그걸 평소에 믿고 의지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그래요.

나는 내 착함을 믿고 내 힘을 믿고 내 칼을 믿는 것, 그건 예수를 믿는 게 아니고 자기를 믿는 거예요. 자기의 성과를 믿는 겁니다. 그래 놓고 천국을 가요? 주께서는 그런 인간에게 속아 넘어가지 않습니다. “잘난 체하는 나라 가세요.” 지옥에 그런 사람 다 모여 있잖아요.

그러면 아무도 갈 수 없는 천국에 어떻게 가는가? 그 방법이 누가복음 5장 8-11절에 나오는데 약간 길지만 제가 쭉 읽어보겠습니다. 시므온이 어부거든요. 예수님께서 시므온에게 찾아왔어요. 찾아와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4-7절까지 먼저 보면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마ㅊ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베드로가 자기 동료의 협력까지 구해서 그물을 끌어 올렸어요.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두 배에 고기로 가득 채웠습니다. 그때 8절에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게 뭐냐 하면, “주님, 나의 과거를 내가 없앨 수가 없습니다. 잘난 체하고, 내가 이렇게 어부로써 잘나간다는 과거 정리, 과거에 대한 관리를 제힘으로는 해내지 못합니다. 꾸준히 이런 식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과거 청산을 못 하는 입장에서 차라리 이 자리에서 저는 죄 많은 어부로 남을 테니 주님은 주님 하시는 대로 그냥 가세요.” 그렇게 베드로가 이야기했어요.

그럴 때 주의 답변은 이겁니다. “너의 과거 청산? 내가 해주고…” 내가 너의 과거를 청산 해준다는 말은 “…너의 미래도 내가 정해줄게.” 베드로는 ‘어떻게 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나를 수치스럽게 하지 않고 자랑스러운 것’으로 되어 있는데 전문 어부도 아닌 내(주님)가 와서 한 소리 할 때 비로소 베드로는 전문가로서의 수치를 느낀 거예요.

내가 어부지만 잡지 못했는데 저분이 오른편에 던지라고 하니까 고기가 많이 잡혔잖아요. 주님은 어떤 식으로 고기를 잡았어요? 간단하죠. 물고기가 주님 말씀을 들으니까요. 베드로가 그물 던질 때 갈릴리 바다의 고기에게 총집합령을 내려서 고기들이 그물로 들어갔죠. 주의 말씀을 들으니까요.

여기서 베드로의 이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말에서 중요한 점이 뭐냐? ‘내가 주님 보시기에 부끄럽습니다.’ 이것조차도 자기 자존심이에요. 이게 자존심이라고요. “주님, 제가 이렇게 못난 인간입니다.” 남들 보기에 굉장히 겸손해 보이죠. 이거 ‘자기의’입니다. 이 ‘자기의’ 인간 힘으로 청산 안 됩니다.

‘반성하는 내가 못났다. 너는 인간도 아니야. 나는 엉망이야’라는 그 고백조차도 결국은 이게 ‘자기 의’로 모아집니다. 온전히 수치스러운 인간이 아니에요, 인간은. 끝까지 배 12척 남아있고, 끝까지 마지막 한 척이 남아있습니다. 이것은 이방 민족이에요. 아랍 나라 백성하고 똑같아요. 전혀 천국 백성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그 뒤에 나와요. 누가복음 5장 10절에,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그다음에 나오는 말씀이 뭐냐? 그다음 말씀이 오늘의 결정타입니다. “무서워 말라.” 너의 의(義)를 네가 포기하는 것, 마지막 남은 네 의를 포기하게 되면 자기는 의가 하나도 없어요.

그러면 자기는 무슨 일을 해도, 수치스러운 깡통에 자기의 모든 것이 ‘수치에 수치를 더하는 일’만 계속해서 앞으로 행하게 될 거예요. 그게 과거의 관점에서는 무섭고 무서운 일입니다. 왜? 남 앞에 그럴싸하게 내세울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그런데 그게 무서운 일이거든요. 주님께서 그걸 알아요.

베드로가 “나는 죄인입니다. 떠나소서.” 그게 무서움 속에서 나오는 고백이에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무서워 말라. 이후로는 내가 너를 취해서 너로 하여금 사람을 낚는, 네가 지금껏 고기를 잡았지만, 이제부터는 사람을 취하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미래를 주께서 보장했다는 것은, 베드로가 스스로 정리, 관리할 수 없는 과거도 일방적으로 주님께서 알아서 다 처리를 해주신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베드로가 칼 들고 설치니까 “칼을 버려라. 칼이 없는 나라인데 쓸데없이 고생한다”라고 일러주시는 거죠.

“칼 의지 안 해도 되고, 행함 의지 안 해도 되고, 자기의, 자기 힘 의지하지 않아도 되는, 영원히 영생을 얻는 나라에 가게 해줄게”라고 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 앞에서,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자기 의를, 기존에 정리 안 되는 나의 의를 덮을 때 우리는 영생 얻은 자, 구원받은 자, 참된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이 수치스러운 모습, 수치를 통해서 영생을 얻는 이 방식을 오늘 본문에서는 바로 아합왕을 통해서, 수치스러운 아합왕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비록 엉망이지만 이스라엘을 엉망으로 만드는 가운데서, 오늘날 우리가 이런 똑같은 처지에 있다’라는 것을 구약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수치를 무서워하지 않게 하옵소서. 그 이유는,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의 의가 우리 자신의 의보다 더 세기 때문에 그런 줄 압니다. 이제는 십자가 예수님의 ‘피의 의’ 앞에서 나의 의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지를 깨닫는 기쁨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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