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무권력 세계

아빠와 함께 2025. 10. 23. 09:17

무권력 세계

2025년 10월 22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19:1-8

19:1 아합이 엘리야의 무릇 행한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인 것을 이세벨에게 고하니
19:2 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19:3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
19:4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 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19:5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19:6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19:7 여호와의 사자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19:8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현실은 권력으로 짜여지고 그 권력은 어두움에 근거를 나타납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이 권력을 무시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미 권력을 맛보면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는 이유는 이미 권력의 맛을 조금이라도 보았기에 거기에 의존해서 사는 방식 외에는 다른 방식을 생각을 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점에 있어 엘리야 선지자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편이 되어 우상의 선지자 850명을 대결했을 때에 엘리야 선지자는 하나님을 든든한 권력자라고 여겼습니다. 이제 권력 투쟁에서 종결자가 되었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세상 권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추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내십니다.

즉 하나님의 본 뜻과 하나님께서 대결하시는 세상의 본질도 동반해서 같이 드러내십니다. 엘리야 시대의 하나님의 최종 적은 권력이 집중되는 그 중앙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 권력 중심체에서 뻗어나와 모든 서민들과 백성들과 이스라엘 전체가 권력의 조각들을 맛보면서 열심히 세상 살이를 하고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실을 나타내시면서 왜 다들 당연하고 마땅하다고 여기는 이런 현실이 하나님의 적이 되는지를 우선 선지자를 통해서 나타내시려 하십니다. 그 당시 최고의 권력자는 아합왕이 아니었습니다. 배후에 꿈쩍도 하지 않는 권력자가 있었습니다. 이 권력자에 의해서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이 그 권력으로 보호 받고 있었습니다.(왕상 18:19)

이런 거센 권력에 대해서 초라하나마 여호와 선지자를 간신히 보호했던 자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궁내대신이었던 오바댜였습니다. 100명의 여호와 선지자를 50명과 50명으로 나누어서 최소한의 양식으로 보호했습니다.(왕상 18:4) 그런데 엘리야 선지자가 먼저 움직이면서 소극적으로 여호와 선지자를 돌봤던 그 작은 권력마저 한계를 맞이하게 됩니다.

선지자 엘리야는 하나님에 의해서 권력의 중추 자체를 파괴하는 방식을 펼치게 됩니다. 그것으로 북이스라엘에게 있어 여호와의 권력이 본격적으로 우세를 취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엘리야에 꺽였던 아합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아합마저 꼼짝 못하는 최종권력자가 따로 있었고 이제 하나님께서는 기존의 권력맛을 보았던 그 권력은 하나님께 대적이 되는 권력임을 알리시게 됩니다.

사람들의 현실 이해는 이처럼 광택이 나는 권력의 표면 위에서 일과를 보내게 됩니다. 그렇게 얻게 된 권력이 가정을 지탱하는 작은 권력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국가라는 최종 권력에서 일부를 백성을 할당받고 사는 겁니다. 이게 바로 ‘눈에 보이는 현실’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은 잘 살고 못 살고를 구별합니다.

그리고 행복하냐 불행하냐를 구별합니다. 바로 이 구별에 인간들은 목매고 하루하루를 삽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눈에 보이는 현실을 뜯어내십니다. 그러면 그 바탕에 하나님의 구원작업이 나타납니다. 일평생 맛보고 있는 권력이 전혀 필요치 않는 현실을 하나님께서 구성하고 오셨던 겁니다.

보통 성경은 현실을 이해하고 설명하고 해석한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현실을 하나님과 함께 하게 된 자들에 의해서 늘 새롭게 만들어지고 퍼집니다. 따라서 기존의 세상 권력과 격리된 새로운 현실을 시작합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이세벨을 자극하고 충돌질했습니다.

자신의 신을 거론했으며(왕상 19:2) 신을 거론한다는 최종적으로 권력을 갈데까지 부여버리겠다는 겁니다. 엘리야를 사로잡아 기존의 인간 현실을 장악했던 그 권세 밑으로 굴복시키겠다는 불같은 다짐을 하게 됩니다. 이로서 기존 인간 세계의 권력의 질을 그 최종 모습을 모조리 다 드러내게 됩니다.

기존의 권력만 알던 엘리야의 입장에서 그 위세에 도망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왕상 19:6) 도망 정도가 아니라 자신이 기존 세상 권력에 매이지 않으면서 이 땅을 뜰 장소를 찾았습니다. 그곳이 바로 브엘세바 근처 광야였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없었던 자기 곁에 어느새 천사가 찾아왔고 기력을 도울 숯불에 구운 떡과 물병이 머리맡에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생각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계속 나를 살리려 하시는가? 그것은 선지자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자리에서 새롭게 시작토록 하신다고 이해했습니다. 모세의 특징은 범죄한 백성들과 함께 있지 않고 하나님에 의해서 따로 분리되었다는 점을 엘리야는 자기에게 적용했습니다.

그는 천사가 제공한 양식으로 기력을 얻어서 모세가 선지자로 시작한 그 현상을 찾아갑니다. 그곳이 바로 호렙산이었습니다. 일주일만에 갈수 있는 거리이지만 모세가 산 밑의 백성들이 헤어진 40일을 감안해서 엘리야도 40일 기간을 채우고 호렙산에 당도합니다. 이 40일이란 기존 권력층을 뜯어내시는 하나님의 작업을 시간으로 표현한 겁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도 기존 세계를 뜯어내시는 성령의 독촉에 따라 40일을 금식하고 난 뒤, 실질적으로 세상 최종 권력자인 악마를 만나게 됩니다. 서로 질이 다른 두 극단의 만남으로서 기존의 현실과는 전혀 다른 현실이 하나님에 의해서 조성되어지는 겁니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오늘날의 성도들입니다.

성도가 세상에서 찾고자하는 이상적인 인물은 더는 기존의 인물에서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엘리야를 통해서 알게 되는 무권력자의 권력입니다. 이 효과가 요한계시록 11:6에 나옵니다. “저희가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세를 가지고 물을 변하여 피 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여기에서 예언을 하는 동안 비 오지 못하게 했다는 대목은 엘리야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작업이요 예언할 때에 물이 변하여 피가 되게 하는 것은 모세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작업입니다.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에게 명하기를 네 지팡이를 잡고 네 팔을 애굽의 물들과 하수들과 운하와 못과 모든 호수 위에 펴라 하라 그것들이 피가 되리니 애굽 온 땅에와 나무 그릇에와 돌 그릇에 모두 피가 있으리라”

이는 곧 성도는 현실 속에 사는 자가 아니라 현실을 만드는 자입니다. 몸이 아파 약을 나중에 먹는 것이 선지자가 아니라 약을 미리 먹고 난 뒤, ‘왜 세상은 이 약이 필요한가’를 나중에 말해주는 기능자입니다. 오늘날 성도도 이 하나님의 작업을 이어받았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다른 현실을 맛보면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53강-열왕기상 19장 1-8절(무권력세계) 251022-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 열왕기상 19장 1-8절입니다.

열왕기상 19:1-8

“아합이 엘리야의 무릇 행한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인 것을 이세벨에게 고하니 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여호와의 사자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주 사십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오늘 본문에서 엘리야는 하나님이 자기를 도와줄 줄로 알았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나를 도와준다, 또는 나를 지켜준다, 나를 보호한다고 할 때 엘리야가 뭔가 오해한 게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나를 힘으로, 권세로, 권력으로 나를 지켜줄 것이라고 이렇게 생각을 했어요.

왜냐하면 자기가 850 대 1로 붙어서, 17대 1 정도가 아니에요, 850 대 1로 붙어서 그 바알 선지자들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죽였잖아요. 성경에는 바알 선지자 450명을 죽였다고 돼 있는데 그렇게 죽였을 때 ‘이제는 정말 하나님이 이 세상 못지않은 권세와 권력을 나에게 부여했다’라고 엘리야는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오해였죠. 그리고 엘리야의 오해는 뭐냐? ‘하나님이 주신 권력 안에 있으면 세상의 권력에 대해서도 내가 밑가지 않고 그들 위에서 내가 힘깨나 쓸 수 있겠다’라고 생각한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바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를 이겼으니까, 그리고 약속대로 그들을 다 죽였으니까 엘리야는 더 이상 두려울 게 없다고 한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권력을 사용하시는 이유는요, 최종 권력을 오히려 더 세게 하기 위해서, 최종 권력을 뚜렷하게 눈에 띄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권력을 사용하신 겁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칠 때 진짜 귀신 나갔어요.

그럴 때 마태, 마가, 누가복음의 그 성경을 보는 사람들은 ‘아, 예수님만 함께 있으면,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병도 낳을뿐더러 그 권세 면에 있어서 우리가 세상에서 어떤 일을 할 때 하나님이 직접 우리를 도와준다’라는 그런 안도감 같은 것, 안정감 같은 것을 아울러서 기대하게 됩니다.

귀신을 쫓아내니까, 귀신까지 쫓아냈다고 한다면 뭐 이제 무서울 게 없죠. 그런데 이상하게 하나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을 가지고 ‘너희는 마귀의 자식’이라고 하시면서 마귀의 자식이라고 했던 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은 주님께서 안 건드려요. 건드리지 않습니다.

잔챙이들은 건드리는데, 비리비리한 부하들은 건드렸는데 우두머리는 건드리질 않아요. 그리고 결국 예수님은 최종 담판에서 패배자가 됩니다, 자진해서. 분명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보고 ‘너희들은 악마의 자식’이라 해놓고 귀신을 쫓아내는 그 주님께서 마귀도 쫓아내면 되잖아요.

제자들도 그랬잖아요.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눅 10:17). 그건 다 예수님의 권력에서 나왔잖아요. 그만한 권력이 있는 분이면 자기가 비참하게 비극을 맞이하지 않고서도 진짜 이참에 그냥 불도우저처럼 밀어붙여가지고 그 악마를 정복하면 되잖아요.

그게 바로 인간들이 생각하는 구원 아닙니까? ‘역시 하나님은 초장부터 밀어붙이더니만 그만 끝까지 악마를 정복해 버리는구나. 역시 우리 예수님은 최고야.’ 왜 이런 방법을 사용 안 하죠? 성경을 그렇게 많이 보고 교회를 오래 다녀도…, ‘왜 예수님이 패배하는 모습으로 생애를 마감하고 끝내느냐?’ 하는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이미 인간이 권력의 맛을 봤어요. 그리고 인간이 맛을 본 그 권력이 바로 죄악의, 죄의 권세였다는 겁니다. 국가 권세, 역시 세지요. 최종적인 것은 국가 권세예요. 바리새인이 예수님 보고 시비 거기를 “너는 세금 낼 거야, 안 낼 거야?” 할 때 예수님께서 “동전 가져와 봐. 이 동전의 형상 누구지?” “지금의 로마 황제다.” “그러면 황제한테 줄 건 주고 하나님께 줄 거 주면 되잖아”(마 22:21) 라고 했어요.

예수님이 이 말씀하는 것은, 두 개의 권세가 서로 질이 달라요. 한쪽은 뭐냐 하면, 보이는 권세예요. 그 보이는 권세에 맛들린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반길 때 이것은 100% 메시아에 대해서 오해를 하는 거예요. 이 세상의 권력보다 더 센 권력, 그걸 영어로 하면 뭡니까? The King of Kings, 왕들 중에 왕? 주님의 복음의 취지가 잘 나타나지 않아요.

더 센 권력을 지녔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에요. “더 센 놈 나와!” 이런 식의 이것은 인간들이 원하는 거예요. 그거 아니에요 하나님은 기존에 맛본 권력을 싸그리 그걸 제거하는 방식으로 구원을 해 주시는 겁니다. 제거하는 방식으로.

국가 권력만 권력이 아니에요. 가정의 권력도 권력이고, 교회 권력도 권력이고, 직장 권력도 권력이고 인간들이 권력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생존하고 있습니다. 누구한테 들러붙어야 예 좋은 자리 하나 얻는가, 누구한테 들러붙어야 하는가, 누구한테 붙어야 캄보디아 대사 자리에 앉을 수가 있느냐? 이미 자신이 권력의 맛을 본 거예요.

심지어 집안에 있는 식구들도 그 권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나에게 안정감을 주고, 나를 지켜주고, 내게 사는 보람을 준다는 것을 가정을 통해서도 그걸 온몸으로 느끼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힘을 빼요. 힘을 쫙 빼는데 여기에서 누구도 예외가 되지 않느냐? 엘리야가 느꼈던 하나님의 보호, 힘의 보호막도 같이 날아가 버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세벨의 권력을 그냥 손대지 않았어요, 손대지 않았습니다. 이거 비슷한 예가 마태복음 2장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2장에서 동방 박사가 함부로 말을 했어요. 지금 헤롯이 왕이잖아요. 이쪽 사정 전혀 모르고 왕 앞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2장 2절에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말을 분위기 해야지요. 지금 유대인의 왕 앞에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헤롯은 자기 아들을 왕으로 삼아요. 헤롯은 분봉왕이니까. 재벌 2세가 이미 그 땅 지분, 주식 지분을 다 갖고 왕으로 내정돼 있어요. 헤롯왕은, 내가 지정한 내 아들이 왕 되는게 당연하지요. 나이가 그때 많았거든요.

그 헤롯 왕이 있는데 왜 엉뚱하게, 엉뚱하게 외부에서 이 나라의 권세, 권력을 노리는 왕이 등장했느냐는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했어요? 헤롯 왕은 가만히 있습니까? 자기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줄 건데요. 킬러 고용해가지고 무창 마을에 보내야 될 거 아닙니까?

‘부세미’라고 그 유치원 선생님을 죽여야 돼. 그래서 드라마 내용처럼 마태복음 2장 16절에 보면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 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라고 했어요.

다 죽였습니다. 뭐 누구누구, 이렇게 찾아가는 거 귀찮아요. 아예 베들레 상공에 미사일을 터뜨려 가지고 두 살 밑의 애들 다 죽게 하는 그런 방법. 경찰력을 동원하죠. 킬러 고용하고요. 한 사람 찾는데 1억씩 준다고 계약 맺고, 찾아가서 죽이는 거예요.

이게 세상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사람들이 울고불고 뭐 안타까워하고 섭섭해해요? 그렇게 섭섭해하지 말고 너도 권력이라 가져라는 그 말이지요. 이 세상은 권력의 세계고, 권력 없으면 권력 있는 자에게 잡아먹히는 세계예요, 잡아먹히는 세계.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권력이 약한 사람에 대처하는 방식은 뭡니까?

작은 권력이나마 이것을 끝까지 쥐려고 애를 쓰겠죠, 작은 권력이지만. 국가 권력이나 왕의 권력만큼은 안 되지만 그래도 회사 임원이다, 뭐 그 정도, 직장에서 안 쫓겨나려고 비비면서 ‘60일까지는 버티자’ 나와봐야 지금 할 게 없거든요. ‘원장님한테 잘 보이도록 비비자.’ 왜? 권력의 맛을 봤거든요.

아무리 예수 좋고, 하나님이 좋지만 이미 본 권력의 맛보다 더 생생하게 실감나는 게 없는 거예요. 엘리야는 도박을 했습니다. 전에 갈멜산에서 도박을 했고, 거기서 하나님이 나를 지켜준다고 생각한 거예요. 어떻게 지켜주는가? ‘세상 권력도 대단하지만, 아합 권력도 대단하지만 아합 권력보다 더 센 권력이 우리 여호와의 권력이다. 하나님은 권력으로 인간들의 권력을 완전히 짓밟는 식으로 통치하고 일하신다.’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엘리아의 오해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세벨의 권력은 오히려 강도가 더 셌어요. 괜히 잠자는 여자 사자의 코털을 건드렸어요. 지난번에 열왕기상 18장을 언급했는데 18장 19절을 보면, “그런즉 보내어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 오십인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인을 갈멜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오게 하소서.”라고 했지요.

여기서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다’는 말은, 그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은 권력의 녹을 먹으면서 권력을 지탱하고 유지하는 그 업무를 부여받은 하청업자죠. 그걸 외주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선지자는 각각 그 민중들 속에, 백성들 속에 스며들잖아요. 이세벨의 권력을 분배받아서, 일반 대중들 속에 스며들어서 ‘이 권력이 안정적으로 모여줘야 우리가 밥이라도 먹고 잘 산다’라고 선전원으로 부렸던 거예요.

돈 줄 때는 뭐 그냥 공짜로 준 게 아닙니다. 그런데 이쪽 패 말고요, 열왕기상 18장 4절에 보면,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오바댜가 선지자 일백인을 가져 오십인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었더라.”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게 진짜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는데 북한의 지하 교회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이쪽에서 김정은이가 완전히 예수 믿는 사람들과 목사들 다 죽일 때 그 지하 교회에 숫자 얼마 안 돼요. 50명씩 100명인데 100명 다 숨길 동굴이 마땅히 없었던 모양이죠.

100명이 다 들어갈 동굴이 없어서 50명씩 나누어서 나름대로 힘들게, 그걸 음성적으로 했거든요. 가만히 숨어서 했다고요. 지명 수배 떨어졌으니까. 그런데 엘리야가 이거는 뭐 공개 수배당한 엘리야가, 이건 음성이 아니고 양성으로 권력층 중심으로 저벅저벅 걸어 나오니까 오바댜가 기절한 거예요.

좀 숨어 계시지, 누구 입장 난처하게 만들면 안 되잖아요. “난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당신 때문에 내가 이제 들켜서 죽게 되었다. 이거 책임져라.” 이렇게 나온 겁니다. 그때 엘리야가 “걱정하지 마. 내가 직접 만난다.” 직접 만났는데, 직접 만나서 그냥 좋게 협상하는 게 아니고, “한번 붙자. 누가 센지 붙자.” 붙었는데 엘리야가 하나님의 도움으로 이겼다고 생각한 거예요. 엘리야는 이세벨 자체도 주께서 제거하기를 원했어요.

이제는 자기 패 선지자들이 다 죽었으니까 아합왕이 자기 아내한테 가서 “여보, 여보! 이제 우리 시대는 끝났어, 끝났어. 우리 정권 내놔야 돼. 이제 권세는 엘리야가 더 세. 우리는 이제 꼼짝 못 해.” 뭐 이런 식으로 빌빌거리면서 자기 아내한테 고자질했겠죠.

그럴 때 아내가 “그래? 그러면 이제 나는 친정으로 갈래. 이제 당신이 알아서 해라.” 이렇게 나올 줄 알았지롱! 아니에요. 괜히 건드렸어, 괜히. 괜히 건드린 거예요. 열왕기상 19장 2절에, “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이런 식으로 아주 강력한 의지를 드러냈고, 엘리야는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왕상 19:3)라고 되어 있어요. 엘리야가 가는 그 장소, 어디로 이렇게 가고, 또 이렇게 가고 저렇게 갔는데, 그걸 우리가 지금 그림으로 그려야 되거든요.

이스라엘에 농토가 크게 있지만 사막은 빼놓고 사람 사는 동네의 면적이 경상남도와 경상북도 합친 경상도만 해요. 그 정도 크기라는 말입니다. 처음에 엘리야가 있었던 데가 그릿 시냇가잖아요? 그릿 시냇가를 경주로 봅시다. 그릿 시냇가에서 주님의 지시를 받고 사르밧 과부에게 갔거든요. 엘리야가 경주에서 출발했다면 사르밧 과부의 벡터, 거리와 위치상 문경입니다. 그릿 시냇가에서 사르밧까지 직선으로 130km쯤 되는데 경주에서 문경까지 100에서 110km정도 나와요.

그런데 위치는 어디쯤인가? 문경에서 방향상 영천이 돼요. 문경에서 영천까지 120에서 130km쯤 됩니다. 얼추 비슷하지요. 그렇게 가서 아합을 만나서 갈멜산으로 가자는 거예요. 그 갈멜산이 위치상 어디쯤 되느냐? 위치상 영천에서 구미쯤 되는데 거리가 80에서 90km입니다. 사마리아에서 갈멜산까지는 80km에요. 한 2-3일 가야 될 거리입니다.

그다음에 갈멜산에서 이기고 난 뒤에 드디어 지명 수배당해서 죽인다는 이세벨의 소리를 듣고 후다닥 보따리 쌀 정신도 없이 그냥 도망을 쳤는데 어디까지 갔느냐? 브엘세바까지 갔어요. 거리가 150에서 160km입니다. 브엘세바는 위치상 현재 경상북도 구미에서 경상남도 진주입니다. 거기까지 갔습니다. 아주 급했어, 급했어요!

현재 북이스라엘의 수도가 어디라고 했죠? 영천이라고 했죠. 이세벨은 영천에 있는데 그 영천에서 피한다고 진주까지 갔어요. 진주, 그러니까 브엘세바에서 엘리야가 죽으려고 했습니다. 죽으려고 했을 때 희한한 일이 생겼어요. 여기에 천사가 나타났어요.

이 대목을 보면서 참 이상했어요. 열왕기상 19장 4절에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이제는 난 권력도 없으니까 권력이 있는 하나님이 알아서 하세요. 여기서 조기 은퇴합니다.’ 뭐 이렇게 은퇴를 선언해서 자살하려고 한거죠. 그런데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여기서 제가 신기한 게 그 500ml짜리 물병 누가 줬습니까? 그리고 거의 있는 떡도 그냥 떡이 아니고 숯불에 구운 떡이에요. 이거 누가 줬죠? 아니 천사가 엘리야에게 떡과 물을 줘도 그냥 준 게 아니라 요리를 하네요? 요리를 하고요, 물도 증발하지 말라고 접시에 담아주는 게 아니고 병에 담아줘요. 아, 치밀하게 참 친절한 천사님, 아주 친절하고 요령 있게 행동합니다.

이것은 뭐냐? “내가 이렇게 친절을 베푸는데도 네가 내 친절을 모르고 넌 무책임하게 자살이나 하려고 하고 그냥 죽을 날만 기다리느냐? 힘내! 아직 할 일 남았어.” 그때 엘리야가 생각한 게 뭐냐? 권세 없을 때도 하나님의 일을 했다면 이 권세 없는 원래 원형, 원래 인물은 누구였을까를 생각했어요. 이 지상에서 권세가 전혀 없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을 했던 진짜 모델, 모델 되는 분은 누구냐를 생각한 겁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권세의 맛을 보면서 살아가잖아요. 살아가면서 치명적으로 우리에게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게 뭐냐 하면, 이 세상에서 내가 저렇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그 모델 나의 이상형을, 만나는 사람에게 마다 은근히 기대를 해요. ‘나 저 사람처럼 되면 괜찮은 삶일까? 아니면 이 사람이 될까?’ 이렇게 찾고 있다고요. 권력의 맛을 봤기 때문에. ‘내가 저 사람처럼 힘을 가진 사람이라면 여생이 얼마나 편할까’를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엘리야는 권세가 없는 상태에서 ‘내가 어떠한 사람이 될 때 선지자로서의 가장 이상적인 모델이 되겠는가?’ ‘왔다, 장보리.’가 아니고 “맞다, 이거!”’ 그게 뭐냐 하면, 모세 코스프레를 한 거예요. 모세 흉내를 내게 된 겁니다. 그래서 브엘세바에서 힘을 내서 어딜 가느냐?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주 사십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왕상 19:8) 40주(晝) 40야(夜), 40주는 40주간이 아니고 40일입니다. 하나님의 산 호렙은 시내산이죠. 40일 동안 시내산에 갔다는 말은, 모세가 시내산 꼭대기에 올라간 기간이 바로 40일입니다. 모세가 시내산 꼭대기에 가서, 권력을 맛본 백성과 헤어졌던 그 기간이 40일이에요.

다시 말해서 “오케이, 하나님 뜻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있는 권력도 빼는 것으로 자기의 선지자를 활용하시는 하나님인 것을 이제는 내가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선지자직의 원형, 그 원형의 장소는 뭐냐? 모세부터 개시하자. 모세부터 시작하자.’

엘리야가 그렇게 모세의 자리에 참여하는데, 애굽에서 왔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세 없을 때 무슨 행악질을 했습니까? 우상 섬겼잖아요. 겉으로는 여호와 섬기죠. 그래서 황소 만들어 놓고 여호와의 축제로 했잖아요. 그럴 때 하나님의 선지자직은 인간들이 애굽에서 맛봤던 것 그 권력의 맛, 권력의 맛을 토대로 해서 그들과 섞이지 않은 모세…, 안 섞였죠.

모세는 40일 동안 시내산 꼭대기로 사라져 버렸으니까. 그 사라진 분이 산 밑에 있는, 아무것도 모르는, 그냥 애굽의 신, 권력을 상징하는 ‘힘센 황소처럼 하나님이여, 그 힘으로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호 해달라’는, 권력 맛에 들어서 자기를 지켜주는 신이라면 누구나 믿겠다는 그런 자세를 공격합니다. 무엇으로? 하나님의 계시로, 말씀으로 공격합니다.

그것을 엘리야가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시내산 꼭대기에는 가지 않고, 다만 시내산 꼭대기에서 타락한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그쪽 방향을 향하듯이 자기는 하나님의 천사를 만난 브엘세바로부터 공격 방향을 잡고 드디어 호렙산까지 가는데 호렙산 가는 거리가 몇 킬로냐면 이게 300km입니다, 250에서 300km에요.

브엘세바가 진주쯤이라 했죠. 경남까지는 이스라엘 사람이 사는 동네에요 그 밑에는 사막 지대에요. 쭉 내려가니까 진주에서 350km가 어디냐? 제주도입니다. 제주도까지 가버렸어요. 이게 바로 모세 코스프레입니다, 모세 흉내 내기.

‘하나님의 뜻은 권력을 없애는 하나님부터 새로 시작되어야 된다. 이런 취지에서 하나님께서 죽으려고 하는 나를, 죽은 나를 살려내는 방식으로 또 사용해 주셨다. 따라서 나는 이제는 권력이 없는 상태에서 제2의 모세 같이 남은 선지자 직을 수행하라는 뜻으로 알겠습니다.’ 해서 40일 동안 밤낮으로 달려서…, 이제 뜻을 알았으니까요. ‘아, 이거다!’ 하고 알았으니까 시내산에 갔습니다.

자, 여기서 권력의 맛을 안 우리 인간들 입장에서 뭘 지키고 싶은 겁니까? 우리 자신은 도대체 뭘 지키고 싶은 거예요? 권력을 지키고 싶은 거예요, 권력을! 그래서 있는 권력이라도 애써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릴 때 이런 체험을 했어요. 어릴 때라고 하는 것은 중학교나 국민학교 시절 그때인데, 집안에 책걸상이 있으면 좀 사는 집이에요. 집안에 책걸상이 없습니다. 밥 먹던 알루미늄 접이식 상 거기에서 책 읽고 공부하고 하는데 그때 공부하다 보면 집안의 제2의 권력자가 들이닥칩니다. 할머니와 엄마가 와서 방 청소를 해줘요. 추울 때는 방석 깔고 공부하는데 “비켜, 비켜, 비켜!” 한다고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은 권력에 맛을 들였기 때문에 어디에 광택을 내느냐 하면, 권력의 그 표면을 갈고 닦아서 그걸 지켜내고 유지하고 키우는 데 인간의 모든 일상을 거기에 다 소모합니다. 이세벨이 엘리야를 공격하는 것이 뭐냐? 이세벨에게 있어서 엘리야의 모습이 선지자가 아니에요.

‘너는 어느 정도 권력이 있고 나도 있는데 네가 850 대 1로 이겼다고? 그러면 네가 권력이 좀 있는 모양인데 내가 더 권력 세다. 우리 남편은 쫄아서 너에게 빌빌 기었지만 나는 안 그래. 나 누구? 이세벨이야. 난 권력자야. 이 나라 권력을 내가 쥐고 있어. 850명을 다 내가 먹여 살려.’

이세벨의 사고방식은 뭐냐? 권력을 갖고 있는 그것이 자기 삶의 본분이고 유일한 생존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남을 볼 때에 ‘난 이 정도로 권력 있는데 넌 어느 정도로 있지?’ 가진 권력 가지고 더 권력을 보탤 것이냐, 뺄 것이냐, 하는 그런 인식을 가지고 이 모든 세상이 살아가고 있었던 거예요.

제가 국민학교 때 방석 깔고 공부 좀 한다고 그러고 있으면 할머니가 와서 비키라는 거예요. “비켜!” 이것은 뭘 의미하느냐? 하나님은 그 권력을 뜯어냅니다. 그 권력을 뜯어내요. 주님은 권력을 뜯어내는 분입니다. 바로 엘리야를 통해서 지상에 있는 권력층을 뜯어내죠.

뜯어내게 되면 국가 권력뿐이 아니고 그 국가 권력을 부러워하고, 국가 권력의 녹을 먹고 국가 권력 안에서 자기 생존을 도모하는 일반적인 서민들, 백성들 맘속에 뭐가 형성되어 있는가? 권력의 지층대가 형성되어 있어요, 권력의 지층대. 지질대 알죠? 고생대 중생대 하는 지층 단위.

그러니까 엘리야는 발굴 팀장이에요. 인간 개인이 갖고 있던, ‘30대에는 이만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40대에는 이만한 권력, 50대에는 이만한 권력이 있는데 이걸 난 더욱더 간직해서 앞으로 더 큰 권력 가져야지.’ 하는 이것을,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엘리야는 있던 권력도 날아 가버렸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남아 있는 것은 뭐냐? 권력을 뜯어내시고, 권력을 무의미하게 만드시는 하나님, 하나님 쪽으로 엘리야는 건너온 겁니다. 건너갔어요. 이게 바로 성도의 본질입니다. 이제 제가 남은 시간을, 신약에서 권력이 뜯겨 나가는 일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엘리야처럼 신약 성도들을 사용하는지 그걸 말씀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금식을 하는데 며칠 금식하는가? 40일 금식을 해요. 40일 금식을 하는 것은 모세가 40일 동안 시내산에 올라감으로써, 다시 말해서 보이지 않는 세계로 가버리는 거예요. 보이는 세계는 뭐냐? 잘 살고 못 사는 게 구분되는 세계, 행복하고 행복하지 않은 게 구분되는 세계가 보이는 세계에요.

안 보이는 세계는 뭐냐?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보이는 세계로부터 구출되는 그 작업이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세계, 하나님과 함께 있는 세계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잖아요? 보이는 것들의 지층대를 뜯어내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소개하고 알리는 그 역할에 오늘날 우리 성도님들이 이미 구원받은 상태에서 참여하고 있습니다.

권력층이 뜯겨져 나갈 때 “넌 무슨 재미로 살래?”라고 우리에게 날마다 물으면서 “너는 어느 편에 속하냐? 권력 편에 속하느냐, 아니면 권력을 뜯어내는 여호와의 편에 속하느냐?” 묻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마귀와 있으면서 이 세상의 지층대는 악마가 준 권력의 맛에 의해서 적금 붓듯이 고이고이 쌓아서 인간의 정신 자체가 적금 통장, 하나의 펀드 통장이에요, 인간의 몸이.

왜? 권력의 맛으로 차곡차곡 채워져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우리가 마귀를 이길 수가 없죠. 마귀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엘리야 같은 경우에는 40일 동안 홀라당 다 뺏기고 이제는 빈 몸으로 “그냥 모세처럼 사용해 주세요.” 하고 호렙산에 올라간 거죠.

요한계시록 11장 6절에 보면, 오늘날 우리 성도가 얼마나 엘리야적인지 나옵니다. “저희가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세를 가지고 물을 변하여 피 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예언할 때 비가 오지 않은 것은 엘리야에요. 그리고 예언할 때 물이 변하여 피가 되는 것은 모세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같은 노선에 속한 사람이에요. 같은 노선의 선배와 후배 격이죠. 같은 계열에 있는 거죠. 그러니까 엘리야가 모세 코스프레를 하는 것은 엘리야 입장에선 너무나 제대로 된 행위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성도는 어떻게 되는가? 그렇게 증거를 마치고 난 뒤에는 어떻게 되는가? 이것도 엘리야적이죠. 850명에게 승리하고 난 뒤에 하나님은 엘리야로 하여금 자진해서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난처한 환경에 처했다는 것을 느끼게 만듭니다.

쉽게 말해서 이렇습니다. 보통 여러분 병이 나면 뭘 먹습니까? 약을 먹죠. 엘리야는 병나고 난 뒤에 나중에 처방하는 약이 아니라, 엘리야 자체가 먼저 먹는 약입니다. 이것은 모든 현실이 엘리야의 움직임에서 새로 나오는 거예요. 성경은 우리 현실을 이해하는 책이 아니고, 이 현실 말고 다른 현실이 성경에서 새록새록 뽑혀 구성되어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가는 곳에서 새로운 현실이 만들어지듯이 요한계시록 11장의 두 감람나무, 11장 6절의 말씀은 성도가 있는 곳에서 새로운 현실이 성도 중심으로 새로 만들어지는 겁니다. 자부심을 가지세요. 성도가 만약에 어떤 회사에 취직했다. 회사가 달라져요.

권력적이 아니고, ‘이런 눈에 보이는 그까짓 잘 살고 못 살고, 행복하고 불행한 것 이것은 파멸의 세계고 다른 세계가 있음’이라는 새로운 현실성을, 구구절절 절실하게 느끼는 실감나는 현실을 성도를 살려 그 자리에 보내게 되면 성도는 그 시대의 엘리야 선지자요, 주와 함께 동행하는 하나님의 증인으로서 주가 만들어가는 현실 속에 참여자가 되는 그러한 보이지 않는 세계, 구원의 세계의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어디에 맛들려 있는지, 정말 그동안 내가 한 것에 대해서, 권력을 가진 것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지는 것이 얼마나 악마적인지, 마귀적인지를 깨닫게 해주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권력을 깨뜨려서 없는 자 되는 자유를 누리게 하시는 주님, 새롭게 그 주님을 이해하는, 현실을 이해하는 성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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