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지 않는 권세
2025년 11월 12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19:19-21
19:19 엘리야가 거기서 떠나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나니 저가 열두 겨리 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자기는 열둘째 겨리와 함께 있더라 엘리야가 그리로 건너가서 겉옷을 그의 위에 던졌더니
19:20 저가 소를 버리고 엘리야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청컨대 나로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그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돌아가라 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19:21 엘리사가 저를 떠나 돌아가서 소 한 겨리를 취하여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 먹게 하고 일어나 가서 엘리야를 좇으며 수종들었더라
엘리야가 찾아가서 행한 일은 두 종류의 권세자를 각각 뽑는 일이었습니다. 하사엘과 예후는 기존의 권세자에 해당됩니다. 반면에 엘리사는 이 세상 권세가 아니라 하늘 권세의 그 당시 대표선수에 해당됩니다. 현실을 말하는데 있어 권세가 작렬하는 마당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왜냐하면 단순히 개인이 모여서 집단을 이루는 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그들 사이에 작용하는 관계의 힘을 빼놓는 설명에 해당됩니다. 인간들은 살아가면서 자기쪽으로 힘을 끌어모으려고 합니다. 그것은 이 현실 세계에서 패배하거나 낙오하는 존재가 되기 싫기 때문입니다. 이기고 싶은 겁니다.
이길 때에 비로소 자신의 존재 가치나 의미가 생긴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 세상은 상호 게임하고 시합하는 전투장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인간들은 저주가 가득 찬 세상에 새로 등장하는 바가 됩니다. 마치 K-1격투기 경기장처럼 링 위에 철망이 쳐져 있는 가운데 선수마다 승자가 되기 위해 피 터지는 시합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이겨본 들 저주에 갇혀 있는 입장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권세에 중심을 형성하게 하셨습니다. 원자 구조를 연구하던 과학자 러더포더는 라듐에서 나오는 α(알파)입자, 곧 +입자를 원자를 향하여 쏘는 실험을 1909년에 했습니다. 그랬더니면 대부분의 α입자는 그냥 통과했으나 1% 정도는 +입자가 되튕겨나왔습니다.
이것은 원자 한 가운데 + 전기를 띠는 입자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원자가 대부분이 텅텅 비워있지만 그 한가운데는 + 전기를 띤 핵이 있으며 바깥에는 –전기를 띤 전자가 돌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처럼 권력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세기 12:3에 보면,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하나님께서 세상 만물을 권세로서 다스린다고 말들하지만 특정 인물에서 그 권세의 내막을 알려주기 위해 집중되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신기합니다. 이 신기함으로 인해 기존의 인간을 신과 하나님을 말하는 것을 다 엉터리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모릅니다. 나타나신 하나님은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참된 하나님은 그 예수님의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입니다. 즉 예수님을 모르는 자는 참된 하나님을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을 아는 것은 예수님의 영이 임한 자에게만 국한됩니다. 바로 이러한 성령의 임함을 구약의 방식으로 미리 주어진 자들은 구약의 선지자들입니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벧전 1:10-11) 즉 마지막 때에 하늘의 권세가 예수님이라는 특정 인물이 국한 해서 집중되므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이 현실 세계의 핵이요 심지입니다.
기존 권세는 인간들로 하여금 자신을 패배자가 아니라 승자로 나타내기 위해 부지런히 권세와 힘들을 모으려고 하지만 선지자에게 허락하신 하늘의 권세는 선지자를 살리는 권세가 아니라 도리어 죽이는 권세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애굽 나라에게 이스라엘 나라가 분리되어 나올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집에서 키운 어린양을 껴안고 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 집안의 장자를 살려두지 않습니다.
출애굽하면서 이스라엘 집단에 공통적으로 죽은 존재는 사람이 아니라 ‘어린양, 곧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입니다. 하늘의 권세, 혹은 선지자의 예언과 그 성취는 이 ‘죽음의 권세’로부터 나오는 겁니다. 사회를 개혁하고 이 어두움의 권세를 변화시켜려는 노력하는 모든 시도가 다 허사로 끝나는 이유는 그 어느 누구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의 역할을 온전히 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모든 왕들이 온전한 개혁에 실패한 것은 ‘있음에서 있음으로’ 개혁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없음에서 있음’을 개혁하려는 에스라, 느헤미야도 실패했습니다. 참된 성공은 에스더 4:16에 나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즉 왕비 에스더는 진정한 하늘의 권세가 임하고 나니 기존에 지속되는 지상의 권세에 눌리지 않았습니다.
실제적인 실권자는 아하수에로 왕이 아니라 왕비 에스더였습니다. ‘죽음의 권세’ 안에 있는 자가 모든 기존 권세의 실력자는 이기는 겁니다. 바르고 하고 옳게 한다고 해서 개혁되는 것이 아니라, 내일의 죽음을 위해 오늘을 사는, 주님의 지시에 따르는 자가 예언의 진수를 보이는 겁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부름을 받고 부모에게 작별인사를 허락해달라고 하지만 엘리야는 전달된 하늘의 권세다운 면모를 보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엘리사를 어태껏 권세를 모아온 소를 잡아 주님들에게 주고 본인은 아무 것도 없이 엘리야를 따를 때, 그는 너무나도 신나 있고 감격스러워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압니다. 인류는 결국 멸망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선지자가 받은 하늘의 권세는 ‘멸망 이후’에 하나님의 백성을 건지기 위한 예언의 형식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니 기존 어두움의 권세 안에 있는 자들은 ‘멸망 이후의 사태’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릅니다. 야고보서 4:14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내일 일을 모른다는 말은 곧 현재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인간들은 막연하게 기대를 갖고 삽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소망은 인간에게 나온 소망이 아닙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롬 8:24) 즉 소망이 도리어 자신의 소망을 버린 자를 기다립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매일같이 우리의 삶을 말씀 자체가 바꾸어야 합니다. 마치 화폐개혁이 단행되고 난 뒤에 장롱속에서 있는 옛날 돈을 은행에 가서 새 돈을 바꾸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바로 이런 모습을 보이는 자가 벌써 하늘의 권세에 속한 오늘날의 선지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속지 않으려는 자가 속는 것처럼 차라리 자신의 무지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56강-열왕기상 19장 19-21절(멈추지 않는 권세) 251112-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 열왕기상 19장 19-21절입니다.
열왕기상 19:19-21
“엘리야가 거기서 떠나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나니 저가 열두 겨리 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자기는 열둘째 겨리와 함께 있더라 엘리야가 그리로 건너가서 겉옷을 그의 위에 던졌더니 저가 소를 버리고 엘리야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청컨대 나로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그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돌아가라 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엘리사가 저를 떠나 돌아가서 소 한 겨리를 취하여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 먹게 하고 일어나 가서 엘리야를 좇으며 수종 들었더라.”
처음으로 엘리야가 하나님의 후계자 엘리사를 만나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밀어붙인 일입니다. 엘리야 본인의 일이 아니고, 엘리야는 선지자니까 하나님께서 추진하는 일에 그냥 순종하는 식으로 엘리사를 만났습니다. 엘리야가 엘리사를 만나서 입고 있던 겉옷을 그에게 던졌습니다.
겉옷이라는 것은 그 사람이 해야 할 그 사명, 앞으로 될 역할, 임무를 옷의 모양으로써 보여주는 거죠. 겉옷이니까 자기 몸을 온전히 완벽하게 감싸게 될 겁니다. 둘러치게 돼 있죠. 자기의 생각, 자기 몸의 모든 감정 같은 것은 자기에게 덮쳐진 겉옷의 두께를 통과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겉옷은 자기가 홈쇼핑에서 구입한 게 아니에요. 엘리야로부터 주어졌기 때문에 엘리사는 엘리야로부터 하나님의 뜻에 따라 모든 것을 인수인계 받는 그런 입장에 있습니다. 그러면 엘리사가 엘리야한테 받았던 그것은 무엇이냐? 겉옷 형식으로 뭐를 인수인계 받았느냐?
쉬지 않는 하나님의 권세를 부여받았습니다. 멈추지 않는 권세, 한시도 쉴 틈이 없는 능력, 늘 작용하고 있는, 늘 활동하고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엘리야를 통해서 엘리사가 받게 되는 겁니다. 물론 세상의 모든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활동하고 있지요.
그런데 신기하고 놀라운 것은 그 하나님의 권력이 어떤 인물, 특정 인물에 집중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굉장히 신기하고 특이하고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했다. 얼마나 이게 신기하고 놀라운 거예요. 하나님은 이 모든 산천초목에 대해서도 일하는 거 맞아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일하는 권세를 한 인물에게 집중했다. 곧 아브라함에게 집중했다는 말은, 하나님의 일에는 심지가 있다, 핵이 있다, 중심 부위가 따로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러더퍼드(Ernest Rutherford, 1871-1937)라는 사람이 물리학자인데 그 사람은 1909년에 세계 역사상 최초로 원자의 핵을 발견한 것입니다.
라듐에서 방사선이 나오는데 그 방사선에서 두 개의 알파 입자가 나와요. 그런데 알파 입자가 플러스 전하를 띄고 있었습니다. 그전에 톰슨(Joseph John Thomson, 1856-1940)이라는 사람이 또 있어요. 마이너스(-) 입자인 전자를 발견했는데 원자라는 것은 마치 식빵에 전자들이 건포도처럼 흩어져 있고, 원자 자체는 중성이어야 하기 때문에 나머지 모든 것은 플러스(+)라고 생각을 했어요.
근데 이 러더퍼드가 진짜 그런가 싶어서 금박으로 실험하다가 두 가지를 발견했어요. 하나는 뭐냐? 플러스(+)알파 입자가 금박을 대부분 통과 해요. 이것은 원자 내부가 텅텅 비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어떤 것은 튕겨져 나왔어요. 플러스(+)가 플러스(+)를 만나면 튕겨져 나오잖아요.
‘아하, 원자 안에 텅텅 비어 있지만 그 가운데는 플러스(+) 입자가 있구나. 그렇다면 바깥에는 마이너스(-) 안쪽에는 플러스(+), 마치 지구가 태양을 돌 듯이, 태양이 플러스(+)의 핵이라면 바깥에서 지구처럼 마이너스(-) 전자가 돈다.’ 그러한 원자의 구조를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핵이 있다, 또는 심이 있다. 심지부인 특별한 공간이 따로 있다.’ 그걸 발견한 것처럼 이 세상에 중추적인 인물이 따로 있다는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발견입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 12:3). 이렇게 돼 있거든요.
이미 성경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핵 부분, 심지 부분, 하나님의 권세가 집중돼 있는 인물이 등장함으로써 갓바위는 아무 의미가 없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라는 것은 다 의미가 없는 거예요. 그것은 다 인간이 만들어낸 하나님이죠.
하나님이 일하는 것은 특정 인물을 통해서 일하는데 인간은 본인이 중심인물도 아니면서 자기가 아쉬울 때마다 하나님을 찾으니 본인도 우상이요, 그 찾는 신도 우상이고 everybody 전부 다 우상, 종교 단체에서 말하는 게 전부 다 우상의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은 특정 인물에게 권력을 집중시켜서, 집중적인 권력이 그 인격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펼쳐지는 겁니다. 이게 너무 신기해서, 너무 신기해서 사람들은 그 사실을 믿지 않는 겁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히브리인들의 국가가 만들어져서 애굽에서 나올 때 데모를 하자, 시위를 하자, 우리를 노예에서 해방시켜 달라, 이런 정치적인 건의를 바로 왕에게 하자, 뭐 여러 가지 있을 수 있잖아요. 여러 가지 할 수 있는 게 많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일은 그냥 인간들의 일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일하실 때 애굽에서 탈출하는 그 힘을 어디에다가 집중했느냐? 어린 양, 어린 양에다 집중해서 어린 양의 피를 받으면 빠져나오게 돼 있어요. 그 양이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의 힘이 어린 양이라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통해서 히브리인을 애굽에서 탈출시키고 구원해서, 언약을 이루는 중심 중심축을 하나님께 친히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나라가 이스라엘이에요. 그 어린 양이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엘리야가 무슨 힘이 있고, 엘리사가 무슨 힘이 있습니까?
엘리사나 엘리야라는 그 인물을 보지 말고,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그 인물에 집중되어서 활동한다는 것, 이게 굉장히 중요한 뜻이죠. 이렇게 되면 여러분들이 당장 물어야 돼요. 그러면 오늘날 그 힘은 어디 있습니까? 1번) 하나님. 2번) 예수님. 어디입니까?
하나님이 아니고 예수님에게 있어요. 그러면 하나님은 왜 안 됩니까, 라고 물으면 인간은 하나님을 몰라요.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은 없다’라고 하는 그런 주장도 있고, ‘내가 믿는 하나님이 하나님이니 하나님은 있다’라고 믿는 주장도 있는데 둘 다 다 엉터리입니다.
진짜 하나님은 예수님의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지 않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이 있다고 해도 그건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이 없는 사람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지 않은 사람이 되고, 그러면 예수님을 만나면 되지 않겠느냐?
예수님 만나는 것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아요. 예수님의 영, 성령이 오지 않으면 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그 출생 자체가 저주가 대기하고 있는 세상에 태어났거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하는 모든 생각이 결국 저주 안에 갇혀 있다’라는 걸 알리기 위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성령이 아니고서야…, 심지어 제자들도 성령이 오지 않았다면 몰랐어요. 어떤 인간도 예수님에 대해서 아는 바 없도록 그렇게 했습니다.
K1 격투기, 이종 격투기, 유도를 하든, 태권도를 하든, 뭘 하든 무조건 이기면 되는 그런 격투기할 때 새장같이 둥글게 투명하게 링을 만들어놓고 두 사람이 들어가서 격투를 하잖아요. 거기서 누가 승자가 되고 패자가 되든지 상관없이 그들은 이미 갇혀 있어요.
저주 안에 갇혀 있는 거예요. 인간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데 이미 저주 안에 들어온 거예요. 저주 안에 갇힌 채 태어난 겁니다. 그때부터 이 저주의 왕인 사탄이 인간에게 뭘 시키느냐? 게임을 시켜요. 시합을 시킨다고요. 그러면 돈 좀 벌었다고 ‘이겼다!’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돈 없다고 ‘졌다!’ 음매 기죽어, 음매 기 살아, 모든 하루하루의 삶이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내가 설정한 그 게임에서 내가 승자가 될 수 있느냐?’ 여기에 정말 몸 바치고, 정신 바치고, 생각 다 바치고, 그렇게 게임에 매일 울고 게임에 매일 웃고 합니다.
이렇게 저주에 갇혀 있거든요. 이걸 어둠의 권세라 하는데 어둠의 권세에 갇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과학을 객관적이고 중립적이라고 하는데, 어떤 과학이나 어떤 철학이나 인간의 어떤 지혜나 그 모든 것은 그 게임에서 벗어날 수 없어서 중립적이 아니고 주관적이에요. 객관적이 아니고 주관적입니다.
‘내가 뭘 알겠다’라는 것은 앎으로써 패배자가 되지 않고 승자가 되겠다는 거예요. 아, 저희끼리 경쟁이 치열해요. 남자들 여섯, 여자들 여섯 모아놓고 솔로 탈출하는 것을 보면 이것은 순전히 게임이에요, 게임. 자기의 장점을 어필해서 만남에서 낙오되지 않고 승자가 되기 위해서, 선택받기 위해서 애쓰는 그 모든 것, 신경을 거기다 쓰지요.
기존의 권세가 이렇게 흘러가고 있어요. 악마가 실시한 게임의 법칙, 승자와 패자로 나누어지는 게임의 법칙이 인간 역사를 이루었고, 그 인간 역사에서 왕들이 권세의 핵이 되고 제일 권세가 많은 인물로 간주되어서 사람들의 모든 관심사가 거기에 집중돼 있잖아요.
뉴스 보세요. 뉴스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게 뭡니까? 권력이 집중된 그들의 게임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대장금인가, 대장동인가 재판 이야기, 계엄 재판 이야기 등등, 그리고 트럼프 이야기, 이런 것이 다 뭐냐? 이 세상을 구성하는 것은 권세고, 그 권세가 어떤 특정 인물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바라보면서 그 권세의 콩고물이라도 얻어먹으려고 ‘나 어디에 줄을 서야 해?’ 지금 이 생각하고 있다고요.
그런데 지금 엘리야가 엘리사한테 겉옷을 던지니까 엘리사가 뭐라고 하느냐? “예! 제가 엘리야의 후계자가 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기는 받아들이는데 부모님께 인사는 하고 가겠습니다.”라고 합니다. “저가 소를 버리고 엘리야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청컨대 나로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그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라고 오늘 본문 열왕기상 19장 20절에 돼 있잖아요.
그런데 엘리야가 하는 말이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돌아가라 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 하니라”(왕상 19:20). ‘네가 그렇게 생각하면 그것은 아니다.’ 나를 따르는 모습은 그렇게 인사하고 하는 그런 게 아니라는 거예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저주 아래 있으면서 남한테 지기 싫어서 나름대로 권세를 끌어모으는 데 애를 썼어요. 그래서 이 가정도 하나의 권세니까요. 국가도 권세지만, 사회도 권세지만 가정도 하나의 권세예요. 이 권세에서 힘을 합쳐서 다른 가정에 밀리지 않고 다른 가정보다 우세한 멋들어진 가정이 되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습니까?
이런 권세가 커지면 어떻게 되는가? 예후의 권세가 되는 겁니다. 열왕기상 19장 15절에 보면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사엘은 이스라엘이 아니고 이방 민족의 권세자예요. 그다음 두 번째 엘리야에게 한 한 지시가,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왕상 19:17).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는 예후가 죽일 것이고,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하사엘과 에후는 어디에 속하느냐? 기존에 흐르고 있는 어두움의 세상 권세의 핵심이 되는 인물이 바로 이 두 인물이에요. 거기에 대해서 엘리사는 뭐냐? 기존에 있는 권세가 아니라, 엘리야를 통해서 나타난 권세, 기존 권세와는 대비가 되는 나타난 권세입니다.
이 권세에 걸맞게, “이 권세로 옮겨 타는 걸맞은 그러한 모습을 엘리사 네가 보여 봐라.” 이렇게 하니까 엘리사가 보인 것이 뭐냐? 소부터 잡아요. 소부터 잡아버리면 소는 누가 키울 거예요? 소 키우면서 깨나 사는 집이었지요. 열두 번째 겨리, 한 겨리가 두 마리니까 24번째 소 곁에 있던 엘리사가 자기가 키우던 소를 잡아버립니다.
고기를 삶아서 백성들에게 주고, 이제는 그 기구도 불살라 버려요. 그러고 난 뒤에 빈털터리 돼서 지금 엘리야를 좇습니다. 엘리사는 지금 신이 났어요. 그 신이 난 게 뭐냐? 지금까지 내가 살아오면서 나를 둘러쌌던 그 어둠의 권세에서 벗어나, 죽음의 권세, 죽음의 권세에 들어오게 된 것에 아주 감격하고 있습니다.
내가 살아 있어서 이루어지는 권세가 아니라, 날마다 나를 죽여 주는 그 권세 안으로의 이전이 너무나 감사하고, 신바람 나고, 고마워서 이런 식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어요. 그동안 나를 살릴 수 있는 어떤 여건 같은 것을 자진해서 전부 다 불살라버렸어요.
그러면 기존의 권세 안에서 살았던 엘리사는 그 기존의 권세가 없어지면 그것은 뭐냐? 죽은 자예요. 하나님의 권세는 뭐냐? 아까도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하나님의 권세는 유월절 어린 양에 집중한다고요. 그러면 유월절 어린 양은 그냥 이 땅에서 살아 있는 모습이 아니고 죽으면서 그 권세의 절정이 나타나거든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 되신 예수님이 언제, 언제 “다 이루었다!”(요 19:30) 하셨습니까? 자기를 죽이는 권세로 십자가에 죽을 때 진정한, 실제적인 하나님이 통치하는 권세로서 자기에게 집중돼 있어요. 하나의 핵심이 되는 거예요.
하사엘 예후가 그전에 저쪽에 있던 어둠의 권세의 하나의 대표격으로 등장한 선수라면 이쪽에 죽음의 권세, 이제 새롭게 나타난 하나님 권세의 대표 선수는 누가 되느냐? 엘리사가 되는 겁니다. 그냥 죽는다고 하지 않고 이렇게 권세라는 말을 하느냐 하면, 기존 세계가 이미 마귀의, 어둠의 권세에 놀아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말씀을 좀 쉽게하기 위해서 꿈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제가 오늘 새벽 3시에 자다가 꿈 때문에 잠자다 끊고 강제로 잠에서 깨어나야 했습니다. 그 꿈이 너무나 생생한데요, 그 꿈 이야기를 잠시 하면요. 제 나이는 50대 초반쯤으로 보이고, 인구 20만쯤 되는 소도시의 한 200평쯤 되는 큰 교회에 당회장으로 제가 뽑혀 갔어요.
설교하던 원로 목사가 아직도 건재한 교회입니다. 제가 거기 가서 수요 설교를 하게 됐습니다. 수요 설교의 본문은 꿈에 안 나와서 모르겠고요, 내용은 ‘기도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거였습니다. 제가 서울에 갔을 때 어느 교회에서 기도를 이렇게 했다고 예화를 들었단 말이에요.
설교를 다 마쳤어요. 갈 사람들 다 가고 당회장 실에서 교회 중직들 하고 잠시 모였는데 그때 나이가 70 초반 된 원로 목사가 소파에 턱 앉아요. 저는 그 옆 일반 의자에 앉아 있는데 중직자 하나가 나한테는 물어보지도 않고 원로 목사한테 “목사님! 오늘도 2부 순서로 2차, 3차 있지요?” 이러는 거예요.
지금 꿈 이야기 중입니다. “그럼 있지!” 보니까 원로 목사가 반짝거리는 구두를 신고 왔어요. 2차가 뭐냐면 카바레 가는 것이고 3차가 노래방 가는 거예요. 수요 예배는 아무것도 아니고 그냥 절차고, 본 게임은 수요일마다 카바레에 가고 노래방에 가는 거였어요. 작은 도시의 독점적인 교회에서 줄곧 관행으로 해왔던 모양이에요.
그리고 나보고 하는 말이 “목사님도 가죠?” 딱 이렇게 해요. 그러니까 기존의 권세가 나한테 답을 요청하는 거예요. 제가 잠에서 깰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생생한 압박감, 현장이 주는 압박감에 할 말을 잃었어요. 딱 묻는 거예요. “갈 겁니까, 안 갈 겁니까?”
방금 수요 설교를 하면서 ‘저는 이런 식으로 목회할 예정이다’라고 설교 내용에 포함시켜서 이야기를 다 했는데 그런 거 다 치우고 “카바레에 갈 거예요, 안 갈 거예요?” 딱 묻는 거예요. 벌써 원로 목사는 반짝이는 구두를 신고, 반짝반짝 빛나요, “가야지!” 이러고 있고요.
꿈속인데 답변을 해야 하잖아요, 답변을. 답변을 못 하겠는 거예요. 그래서 꿈에서는 깨버렸고 잠에서 깨어나서 답변을 준비했습니다. 이런 압박감, 정면에서 오는 압박감이죠. 그들은 막 신났어요. 중직들 보니까 한 50대 후반에서 60대 초반, 2차 3차 가는 게 수십 년 관행이었어요.
그럴 때 뭐라고 답변해야 하는가? 아, 이게…, 어느 누구도, 어떤 시간 어떤 공간에서도 권세라는 것을 벗어날 존재는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기존의 권세가 나한테 답을 요구하는 거예요. “목사님은 뭐, 놔두고 우리끼리나 가지.”가 아니라 “갈래, 안 갈래?”라고 묻는 거예요. 만약에 안 간다면? 설교는 한 번 했잖아요? 하지만 이것은 계약제가 되어서 이대로 잘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쪽에서 중직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만만한 거예요. “당신 가족 밥 먹여 주기 위해서 취직 시켜줬으니까 이제부터 우리 식으로 굴러가는 겁니다. 답변 제대로 하세요. 갈 거예요, 말 거예요?” 딱 한단 말이죠. 꿈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아요. 너무나 생생했어요. 그 현장감, 항상 그 현장감이 주는 압박감은 교회라고 해서 비켜나가지 않는다는 겁니다. 교회 자체가 권세니까요.
그래서 잠에서 깨어나 잠시 ‘어떤 답변을 할 것인가?’ 하고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래서 이런 답변은 꽝이에요. 앞으로 제가 이야기할 답변은 진짜 꽝, 이게 바로 잘못된 거예요. 잘못된 예시를 먼저 드릴게요.
“제가 이 교회 온 것은 말씀으로 바른 교회로 만들기 위해 하나님께서 이 교회 목사로 세운 겁니다. 지난날 동안 우리 원로 목사님이 목회를 잘하셨겠지만 저는 제 계획이 있습니다. 그건 주의 말씀에 순종해서 교회다운 교회를 해보는 것이 제 뜻입니다. 그래서 이런 2차나 3차는 안 갈뿐더러 아주 폐지되어야 될 겁니다.”
이런 답변을 만약에 한다면 그 목사는 주께서 보낸 목사 아닙니다. 저도 똑같아요. 저도 똑같은 인간이에요. 그 이유가 있어요. 개혁을 한다면 급진적인 개혁과, 포용적인 개혁 두 종류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만약에 내 취지를 밝히면서 “기존 체제에 대해서 선전포고를 하기 위해 이 교회에 왔습니다. 바른 목회 할 거예요.” 이렇게 하면 그건 누구냐 하면 예후에요. 성경에서 그 예후입니다.
‘그렇게 개혁해서는 안 된다’를 보여주는 예시가 예후에요. 바알 선지자를 죽여놓고 자기도 잘리는 예후. 하나님의 계획은 있는 데서 있는 데로 절대 개혁이 안 된다는 것, 있는 데서 있는 데로 개혁이 안 되는 그 예가 여호사밧, 아사, 히스기야, 그리고 요시야 왕, 다 실패했잖아요.
성경이 이스라엘 역사의 그 왕들을 왜 거론해요? 인간의 개혁은 실패한다는 거예요. 어둠의 권세에 대해서 하나님 뜻에 따라 사는 사람이 그 어둠의 권세를 개혁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건 거짓말입니다. 그것은 엉터리예요. 인간은 개혁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본인이 개혁되지 않기 때문에요. 인간은 개혁할 수도 없어요.
그러면 개혁을 어떻게 하느냐? 그게 에스더에 나옵니다. 에스더 4장 16절에 이런 말씀이 나와요. 유명한 말씀 나옵니다. 간단해요. “죽으면 죽으리이다.” 지금 에스더가 느끼는 권세, 아까 제가 말씀드린 대로 엘리야나 엘리사에게 나타난 권세, 자기 가정의 권세에서 쭉 살아왔던 그 소를 죽여 버리고 아주 신바람 나서 아무것도 없이 엘리야를 따르는 그 권세, 그게 바로 에스더의 권세와 마찬가지예요.
‘죽으면 죽으리라.’ 이 에스더 왕비의 권세가 아하수에로 왕을 2인자로 돌려 세워버려요. 1인자는 누구냐? 여자예요, 여자 에스더에요. 아하수에로는 네가 나보다 더 세다는 그 말을 못 해서 ‘내가 나라의 반을 주겠다’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그것을 안 받죠. 이쪽이 권세가 더 센데 그거 받아서 뭐 할 거예요?
나라의 반도 필요 없이 ‘하나님이 나를 죽이는 그 권세 안에서 나를 사용한다’라는 이 권세가 이 세상에 있는 어둠의 권세를 유일하게 이길 수 있는 권세에요. 이 권세에 있는 엘리야나 엘리사의 공통점은, 오늘 자기가 살아있다는 것은 내일 죽을 수 있는 것 때문에 오늘 살아있는 것, 내일 죽음의 권세가 날 기다리고 있다는 그 이유 때문에 오늘 살아가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3년 동안 계신 것은, 십자가에 죽는다는 것을 목표로 해서 살아있으면서 아버지의 일을 한 거예요. 살아있을 때 아버지 일을 한 것은 예수님이 죽었을 때 한 일에 대한 전초적인 예비 단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꿈에서 깨서 일어나서 그 꿈의 생생한 현장감…, 그 꿈속에서는 실제에요.
꿈이라는 생각이 안 들고 실제로 내가 그 자리에 있고 실제로 내가 그 질문을 받은 거예요. 거기에 대한 답변으로 저는 이렇게 결론 내렸습니다. 생긋이 웃으면서 “갑시다! 갈게요.” 왜냐하면 그게 바로 내가 살 자리가 아니고, 내가 죽을 자리이기 때문에. 죽을 자리를 주께서 세상 어둠 권세로 나한테 맡겨준 거예요.
‘나 이렇게 해서 내일도 설교해야지.’ 이런 내일이 없어요. 내일은 죽는 날이에요. 내일은 없어요. 지금 주께서 요구하는 것은 “너 죽을래? 죽을 거야, 살 거야?”를 물으면 살겠다는 것도 답변이 아니고 죽겠다는 것도 답변이 아니에요. 답변은 “주께서 시킨 대로 하겠습니다.” 이게 엘리사에요. “주께서 시킨 대로 하겠습니다.” 이게 에스더에요. “주께서 시킨 대로 하겠습니다.” 이게 엘리야입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신약에 와서 굉장히 깊이를 가지고 표현한 말씀이 있어요. 로마서 8장 24절에 보면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이게 무슨 뜻이냐면요, 25절에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 이렇게 되어 있는데요.
여기 24절에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라는 말이 무슨 뜻이냔 말이죠. 그것은, ‘내가 구원을 받는다’가 아니라 소망이 나를 이용해서 소망이 소망 되게 말씀이 성취성을, 말씀이 이렇게 성취된다는 그 성취성이 나를 사용해서 그것이 먼저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내가 보는 것, 내가 바라는 것을 움켜쥐고 가지고 있거든요. 따라서 소망을 살리고 나를 죽이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겁니다. 내가 원치 않는 소망, 그걸 위해서 내가 원하는 소망은 제거해 버리는 그 방식, 오늘 구약에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되어있죠.
그래서 엘리사에게 나타난 이 권세의 구조를 한번 공식화를 시키면 이렇습니다. 엘리사, 엘리야는 예언을 한다, 예언을 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세상의 어두움의 권세는 반응을 나타내요. 첫 번째 예언을 한다. 두 번째 반응을 나타낸다. 세 번째는 고자질입니다.
선지자는 고자질 대장입니다. 이 고자질을 어떻게 하느냐? 세상 어두움의 권세는요, 앞으로 이 게임에서, 이 권세 속에서 내가 잘 될것이라는 것을 기대해요. 내가 잘 된다는 것은, 내가 잘 된 상태로 살아있다는 것을 기대해요.
그런데 예언은 뭐냐? 멸망 후, 이 저주만 가득 차 있는 이 세상이 멸망되고 난 후의 이야기를 예언으로 하는 거예요. 선지자들도 말씀 전할 때 아주 용을 썼어요. 예레미야 같은 경우에는 아주 짜증이 넘쳐났습니다. 이야기만 하면 욕한다고 하니까 이야기를 하고 싶지가 않은 거예요.
예언이라는 것은, 이 세상이 멸망하고 난 뒤의, 그다음의 이야기에요. 멸망하고 난 뒤의 이야기, 바로 베드로전서 1장에 보면 선지자 속에 예수님의 영이 들어있다(벧전 1:11)고 했다 이 말이죠.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말씀은, 이 세상이 저주로 완전히 멸망했다고 할 때 그때 과연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은 누가 남은 자로서 구원될 수 있느냐, 은혜받을 자가 나오느냐?’ 그걸 겨냥해서 예언한 겁니다. 멸망 이후의 사태예요.
그러니까 사망 이후의 권세라는 말이 적절하죠. 모든 인간이 죽고 난 뒤에 말씀만 그 사람 안에 살아있다면 그 사람은 죽어도 그 말씀의 능력으로 인하여 죽은 데서 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유월절 어린 양을 봅시다. 유월절 어린 양은 살아서 양을 품고 있다고 천사가 그 맏이를 안 죽이는 게 아니에요. 유월절 양은 죽어야 돼요.
그런데 유월절 양을 죽이고 피를 바르는 그 히브리인들은 안 죽었어요. 지금 살아있다고요. 그렇잖아요! 양 잡은 자는 살아있고, 정작 죽은 자는 유월절 어린 양인데 그 유월절 어린 양이 문에 자기 피를 바르니까 그때부터 계약이 성립된 거예요. 유월절 어린 양의 피가 있으면 용서하겠다는 계약이 성립되면서 유월절 어린양이 그다음부터는 율법의 제사법으로 매일 드리는 상번제에 들어간단 말이죠.
살아있는 양이 아니고 이미 죽은 양에 관해 언급된 그 이야기가 이스라엘을 살리는 하나의 권세, 아까 말한 대로 나타난 권세, 죽음의 권세 속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의해 살아있는 민족이 되고 나머지는 다 죽은 민족이 되는 거예요. 이걸 쉽게 이야기해 봅시다.
이 세상 어두움의 권세의 특징이 뭐냐? 내일 일을 알지 못해요. 내일 일을 모릅니다. 그래서 항상 게임에 열중해서 자기 자신을 승자로, 살아남는 자로 애쓰는 그런 노력을 매일같이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서 4장 1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볼 때 어떻게 규정하는가? “내일 일도 모르는 이 멍청이, 이 바보 멍청이야. 소망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도 모르는 이 바보 멍청이들아.” 네가 내일 일도 모르기 때문에 누구도 모른다? 너 자신이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에 불과한 것도 모른다는 거예요.
네 일도 몰라서 바보, 내가 누군지도 몰라서 바보, 그 바보를 좋아하는 것은 어둠의 권세 악마밖에 더 있습니까? 마귀만 대따 좋아하죠. 그래서 인간들은 자기 자신은 모르는 가운데서 자기가 어떤 승자가 되려고 애쓰는데 거기서 자꾸 상실감을 느끼는 거예요. 상실감을 느끼니까 자꾸 상실감을 메꿀 수 있는 어떤 위로, 보상 또는 애도의 절차, 슬퍼하는 절차, 이런 식으로 자기의 상실을 메꾸려고 그렇게 하는 거예요.
여러분 잘 아시는 말씀, 누가복음 23장 28절,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도대체 인간들은 자기 자신이 누군지를 모르니까 예수님이 십자가 지고 가시는 걸 보고, 안 됐다고 막 우는 거예요.
우니까 예수님이 휙 돌아보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정말 코미디 같아요. “너네 방금 지금 누구를 보고 울었어? 나 보고 울었어? 아이고~ 이 아줌마들아! 네 딸이나 보고 울어! 진짜 누가 울어야 하는지를 네가 몰라. 지금 나 보고 울 입장이 아니야. 너희들, 너 자신을 위해서 울어!”
내일 일도 몰라, 내일 일도 모르니까 자기 자신도 몰라, 내일 일도 모르니까 오늘도 몰라, 뭐 아는 게 있어야죠.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데요? 이게 뭐냐? 자꾸 어두움의 권세가 권세의 전부인 줄 알고, 그 권세에 의해서 쪼가리 권세라도 있어야 이 힘든 인생에서 내게 보상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AI 학자는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AI 시대가 되면 인간은 자신의 노동의 가치를 상실한다.” AI보다 인간이 더 모르니까, 그래서 바보니까. 그때 인간들은 그 AI한테 자기 존재의 가치가 완전히 묵사발된 그 보상을 어떤 식으로 표현할까요?
그걸 마구마구 소비하면서 표현한다고 해요, 소비하면서. 백화점에서 물건 사고, 여행 다니면서 계속 자기의 그 허함을, 텅 비어 있음을, 소비해서…, 소비한다는 게 뭐냐? 소비한다는 것은 일단 물건을 모으잖아요. 빼앗긴 힘을, 힘이 없는 빈터에 뭐라도 건져서 바로 메꾸려고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전에는 어떻게 했는가? 전에는 누가 위로했는가? 아버지가 위로했고, 가족이 위로했어요. 그러나 이미 인간이 자기 가치에 대한 독립 선언을 해버린 이상은 사회에 나와서 AI한테 밀리니까 이제는 아버지도 가족들도 없어요. 자기 문제는 자기가 해결한다고 이미 가출한 상태이기 때문에 고독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이 깊은 근원적인 우울증, 깊은 우울증에 빠져서 계속 갈증을 느껴가지고, 소비 또 소비하고 그저 놀러 다니고, 그런 거 하면서 살아갈 뿐이죠. 자꾸 이렇게 시간만 지연하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악착같이 사기를 쳐서라도, 캄보디아 가서라도 돈만 벌면 된다, 돈만 벌면 되는 거예요.
가을 되면, 나이 많은 분들이 할 일이 없으니까 벤치에 앉아 있고, 또는 아침에 운동하고, 저녁에 운동하고, 낮에도 운동한다고 돌아다니거든요. 사람이 서글퍼요. 자기가 할 일도 없고, 써주지도 않으니까 돈벌이도 할 수 없을 때 제일 서글픈 이유가 뭐냐 하면, 더 이상 죄지을 기회가 없다는 거예요.
돈 버는 게 죄짓는 거잖아요. 그게 보상이니까. 내 허함을 돈 벌어서 메꿀 수 있다는 이게 내가 승자로서 승리자가 되는 유일한 방법, 이 세상은 그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어요. 그래서 돈이나 벌라고 한 거예요. 그런데 나이 들면 그 돈을 벌 수도 없어요.
그러니까 이거는 자기가 밟는 낙엽 같은 존재, 아무 희망이 없어요. 그것은 바로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그 내가 멸망 대상이라는 것, 멸망 대상이 되고 그 이후의 일은 ‘말씀’이 우리에게 찾아온다는 겁니다. 이제 이 말씀 하고 마치겠습니다.
어떤 말씀이냐? 매일같이 여러분, 이 ‘말씀’과 내 목숨을 맞바꾸세요! 내 삶과 말씀을 늘 이렇게 바꾸면 돼요. 화폐 개혁하고 난 뒤에 옛날 돈, 장롱에 있던 옛날 돈을 끄집어내서 매일같이 은행 가서 개혁한 새 돈과 바꿔야 되잖아요. 왜? 못 쓰니까.
내일 일을 아는 사람들은 지금 내 삶을 뭘로 바꿔놔야 돼요? 코인? 코인하지 마세요. 코인 말고 말씀과 늘 바꾸면서 점점 더 예언의 말씀, 예언의 사람, 말씀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거, 그게 유월절 어린 양의 피의 능력의 권세 안에 이미 들어온 하나님의 성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선지자가 아무것도 없이 살게 된 것을 아주 신바람 내면서, 감격하면서, 하나님의 권세, 아무것도 없어도 그 권세 안에만 있으면 좋다고 외치는 그 외침, 예언의 말씀, 소망의 말씀, 우리가 그 말씀을 코앞에 보고 있으면서 우리는 이 말씀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게 하옵소서. 이 땅에서 승자와 패자가 없는 세계, 주님의 은혜와 사랑과 용서만 있는 세계의 권세 안에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수요설교(251112) 요약 열왕기상 19장 19-21절(멈추지 않는 권세)
어제 수요 설교 핵심 부분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강의 시간에 더러 나왔기 때문에. 제가 주안점을 둔 곳은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자기의 사명을 넘겨주면서 먼저 넘겨준 게 있었어요. 그게 하사엘과 예후였습니다. 그 사람들은 선지자가 아니고 세상 권력자예요. 세상 권력자와 선지자가 만나서“너한테 권력을 집중시킬 거야. 넌 그렇게 해.”라고 먼저 맡긴 이유가 뭐냐는 거예요.
그것은 두 이질적인 권력이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하사엘은 이스라엘 권력자가 아니고, 이스라엘 옆에 있는 아람 나라 권력자예요. 그리고 예후는 북이스라엘 권력자입니다. 그 다음 나오는 엘리사는 북이스라엘 선지자죠. 이 세 사람 사이에 연관관계가 있다는 거예요. 공통점은 앞에 둘 다 권력을 집중하고 있다는 거예요.
기존 권력을 새로운 권력을 가진 자가 뒤엎어버린다는 거예요. 뒤엎어버릴 때 칼이라는 말을 했다는 거죠. 칼, 처벌하기 위해서 권력이 있는 거죠. 그런데 예후를 피하는 자는 엘리사가 죽인다고 되어 있어요. 엘리사가 죽인다. 그러면 엘리사가 왕이 된다는 말인가? 그건 또 아니거든요.
그러면 세 사람을 둘로 분류한다면, 왕 두 명, 선지자 한 명이에요. 이 두 부류로 나뉨으로써 권력의 질이 두 분류로 나누어진다는 뜻입니다. 이쪽은 기존의 세속 권력이라면, 엘리사의 권력은 세속적인 권력이 아니고, 엘리야가 받았던 하늘의 권력이란 말이죠. 하늘의 권력인데, 그러면 생각을 해보세요.
권력자에게 하나님께서 “야, 너 권력자지?” “예” “똑바로 말씀대로 해.” “예, 알겠습니다.” 그러면 끝날 문제예요. “앞으로 잘 하겠습니다.” 이러면 끝나는데 왜 선지자에게 하늘의 권세가 따로 필요하냐 이 말입니다. 왜 따로 필요하냐? 그것은 바로 하늘의 권세의 특징은 이 세상 권세에 대해서 해체하기 때문에, 해체시키는 권력입니다.
해체를 어떻게 하느냐? 다 끝나고 멸망당한 후에 나오는 것이 예언, 말씀이에요. 이 세상이 멸망당하고 난 뒤에 엘리사가 예언을 해버려요. 그러면 엘리사의 예언을 권력 안에 예속된 사람은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없지요, 없어요. 왜냐하면 기존의 권력에서 자진해서 나갈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러면 그 멸망 후의 예언이 실효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알아들어야 뭐 회개하고 그런데, 실효성이 없어요. 실효성이 없어야 멸망시키는 조치의 정당성이 보장이 돼요. “멸망 받을 만하지, 그치? 예언의 말 안 들었잖아, 그치?”라고 하는 거예요. 어제는 얘기 안했지만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나아만 장군 같은 경우에, 나아만 장군은 이방민족의 문둥병자입니다. 그런데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부터 만난 게 아니고, 누구를 먼저 만났는가? 그 당시 북이스라엘 왕부터 먼저 만났어요. 왕을 만나니까, 왕은 이것을 자기 나라를 치려는 핑계라고 여겼어요.“뭘 또 갖다 바쳐야하나, 겁난다.”이렇게 된 겁니다.
만나고 난 뒤에, 그러니까 기존의 북이스라엘의 권세는 기존의 더 센 권세에 예속되어서 그들은 이미 구원의 희망이 없다고 여기고 난 뒤에 나아만 장군은 새로운 권세를 만나죠. 엘리사의 권세를 만나는데,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 만나기 전에 이랬어요.
“너보다 힘 센 나라 군대 장관이 왔으니까 좋게 알아서 나한테 기어라. 코빼기도 안보이고 이런 모독적인 대우가 어디 있느냐? 그냥 전갈만 보내서 요단강에 일곱 번 들어가라고? 치워라, 나 그냥 집에 간다. 내가 문둥병 걸렸다고 나를 무시해?”했지만, 나중에 요단강에 들어가서 나았잖아요.
그 순간 내가 갖고 있는 모든 권세가 그리고 내 권세에 벌벌 떠는 북이스라엘의 권세가 예언에 의하면 멸망당해도 마땅한 권세였어요. 그게 열왕기하 5장에 나오잖아요. 열왕기하 1장에 보면 엘리야가 살아있을 때 그 권세 주장하다가 그 중대장하고 부대원 100명 죽고, 150명 죽을 뻔 했죠. 엘리야가 봐줘서 살았죠.
그러면 선지자는 뭐냐? 하늘의 나라를 이야기할 때, 반응을 살피는 거예요. 살피고, 그 반응에 호응 못하는 것에 대해서 선지자는 고자질을 하는 거예요. 고자질하면 하나님께서는 “알았어, 알았어, 다 들었어. 그래, 내가 멸망 준비할게.”라고 하는 겁니다. 바로 이러한 선지자가 등장하는 일관된 원칙은 뭐냐?
어제 이런 이야기했죠. 히브리인들에게 양 잡으라 할 때, 양을 포근히 안고 있으면 어떻습니까? 구원받습니까? 안되지요. 이쁜 양 키운다고 하나님이 안 받습니다. 일단 양이 죽어야 되는데, 그게 뭐냐? 먼저 죽어야 돼요, 먼저. 어린 양이 먼저 죽으면 뭐가 나오죠? 피가 나오죠.
그 피를 바르면서 유월절은 뭐냐? 이 사람들은 양 죽음을 통해서 ‘이 사람들은 벌써 멸망당했습니다, 이미 심판 받았습니다.’ 라는 그 토대, 그 바닥을 쥐고 있는 자만이 구원이 돼요. ‘나 죽었습니다.’하는 자만이 구원이 되고, 왜냐하면 하나님이 멸망시킨 그 정당성이 내 안에 펄펄 살아있으니까.
“너, 내가 죽여도 할 말 없지?” “할 말 없습니다.”할 때, 그 사람은 이미 구원받은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사는 것은 뭐냐? 죽어도 마땅함을 보여주는 자료들을 이렇게 바나나, 떡, 빵을 통해서, 죽어도 마땅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늘 먹고 힘내야 그런 고백이 나올 게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살아있는 것은, 내가 은혜로 살아있다는 것, 내 힘으로 사는 게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계속 살려주고 있는 거예요.
우리 때문에 우리 속에 있는 유월절의 그 죄사함을 살려내기 위해서 한 거예요. 그래서 부산강의에서 얘기했죠. 부활이라 하는 것은 사망을 죽여 버리는 거예요. 우리 속에서 사망 문제는 끝난 문제예요. 그것이 우리 안에 있을 때, 부활의 영으로서 죽는 것도 우습게 볼 능력이 바로 부활의 능력이죠.
권세 이야기는 꿈 이야기로 대체하면 돼요. 어제 설교하면서 ‘유월절 어린양이 살아있는 원칙이 계속해서 이미 멸망당해 마땅한 그 원칙에서 주께서는 새로운 이스라엘을 선지자를 통해서 예수님 오실 때까지 계속 이어나간다.’ 그게 바로 수요 설교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