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저주의 금잔

아빠와 함께 2025. 11. 2. 18:41

저주의 금잔  

2025년 11월 2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51:5-10

51:5 대저 이스라엘과 유다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거역하므로 죄과가 땅에 가득하나 그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에게 버림을 입지 아니하였나니
51:6 바벨론 가운데서 도망하여 나와서 각기 생명을 구원하고 그의 죄악으로 인하여 끊침을 보지 말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보수의 때니 그에게 보복하시리라
51:7 바벨론은 여호와의 수중의 온 세계로 취케 하는 금잔이라 열방이 그 포도주를 마시고 인하여 미쳤도다
51:8 바벨론이 졸지에 넘어져 파멸되니 이로 인하여 울라 그 창상을 인하여 유향을 구하라 혹 나으리로다
51:9 우리가 바벨론을 치료하려 하여도 낫지 아니한즉 버리고 각기 고토로 돌아가자 그 화가 하늘에 미쳤고 궁창에 달하였음이로다
51:10 여호와께서 우리 의를 드러내셨으니 오라 시온에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일을 선포하자

세상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있어 인간은 일어난 일에 대한 이해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해석과 계시는 없는 데서 일을 만들어내십니다. 그 일을 만들어내는 원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창 3:17) 여기서 ‘너’는 바로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에 해당됩니다.

즉 인간이 주변에 저주를 유발하게 됩니다. 이는 인간 있음에 저주는 떠날 날이 없습니다. 문제는 인간들이 삶의 환경이 저주인 줄을 모른다는 겁니다. 모든 애로사항을 본인들이 버텨내기에 인간들은 더욱 더 자신들의 대처방식에 자신감을 갖게 된 겁니다. 이로 인해 교만과 건방짐이 하늘을 찌를 정도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인간 세계의 전통을 후대까지 계속 전수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금잔 ㅈ돌리기’입니다. 곧 하나님의 해석에 의하면 ‘저주 돌리기’입니다. 사실 인간들의 문명은 자연으로부터 주어지는 저주를 줄이기 위한 지혜를 모은 결과입니다. 이 ‘저주 줄이기’에는 종교도 동원됩니다.

인간들의 이러한 자체적인 노고에는 왜 본인들이 이렇게 힘든 생활을 해야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무지합니다. 그저 최선을 다하면 좋은 결과가 얻어지겠지라는 경험치에 의존하며 삽니다. 이러다보니 인류의 세계는 권력집중화를 보이면서 그 중심으로 운영되게 되었습니다. 바벨론이 그 대표적 국가입니다.

‘바벨론이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바벨론이 무엇 때문에 거기에 있는지에 대해서 사람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는 현실이 하나님의 법칙에 의해서 나타남을 인간들이 강력하게 부정하고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세계는 ‘국가 있다’에 머물지 않고 물리학자들은 분자, 원자가 있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면 ‘양초가 연소하는 것’은 ‘분자의 재구성’으로 이해하는 겁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도 분자, 원자로 축소시켜 측정합니다. 즉 이제는 인간이 기계로 보다 완벽한 인간을 제작하려고 합니다. 물리학에서 이렇게 세상을 만드는 이유는, ‘저주’라든지 ‘복’이라든지 하는 모호하고 실체없는 의미를 제거하고 오직 자연을 인간의 필요에 따라 써먹기 위함입니다.

더는 자연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서 일관된 법칙을 찾아내어 그 법칙으로 인간들과 다른 피조물 것들을 제조해내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해서 등장된 것이 물리학에서 말하는 ‘대칭성’이라는 겁니다. 일률적인 법칙은 공간이나 시간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자연에 대한 활용영역이 넓어진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세 또한 바벨론 제국에 나타난 ‘짐승의 모습’입니다. 짐승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 세계는 짐승의 세계 밖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그 안에서 모두 동일한 짐승의 마음으로 소통하고 단합됩니다. 짐승의 마음이란 다른 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없이 우리 같은 인간들로 힘으로 살아낼 수가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사도 바울은 압니다. 이 세상 전체 거대한 하나의 감옥인 것을!

즉 이 세상에 감옥이 없으면 우리 세상 자체가 감옥인 것을 금방 알았을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네 속이 따로 감옥을 만들므로서 감옥에 있는 자와 감옥에 들어가지 않는 자들의 구별을 통해 저주받은 세계가 따로 있을 것이라고 여기고 싶어했습니다. 자신들은 쏙 빠지고요.

여기서 대해서 하나님의 저주가 멈추지를 않습니다. 출애굽기 12:1-3에 보면,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 달로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 너희는 이스라엘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이 달 열흘에 너희 매인이 어린 양을 취할지니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어린 양을 취하되”라고 되어 있습니다.

달의 시작, 곧 새로운 시간의 시작이 이스라엘의 등장으로 개시됩니다. 이 이스라엘이란 새로운 민족은 등장은 자연에 대한 저주가 10번씩이나 일어나는 결과입니다. 물리학에 있어 ‘자연의 있음’은 곧 ‘법칙의 있음’으로 대체될 수가 있습니다. 자연의 변화들이 인간의 세운 공식에 맞아떨어지는 원리가 ‘대칭성’의 원리입니다.

즉 물리학에서 대칭성이란 시간적으로 어느 시간대에서 모든 법칙이 맞아떨어지는 것을 의미하고 공간적으로 그 어디에서는 동일한 물리법칙이 적용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은 인간이 있는 곳에 필히 저주도 있으며 그 저주로 인해 자연법칙은 망가진다는 점을 그들은 알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애굽에 내린 10가지 재앙은 인간들이 나름대로 예측한 모든 것이 무너지고 그 심판의 끝 모습은 하나님께서 집안의 맏이를 직접 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자연이 무너져내리는 것은 인간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게 제국이라는 짐승을 거쳐서 모든 인류에서 ‘저주의 금잔’이 돌아다니게 되는 이유가 됩니다.

시간과 공간의 끊어지게 되면 거기서 새로운 시간에 적용을 받는 민족이 등장하는데 이 이스라엘은 공간과 시간에 따로 동일한 하늘의 원리로 다루어집니다. 즉 광야 40년동안 그들은 매일같이 하늘로부터 양식을 공급받았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대동하신 새로운 시공간에 그들도 같이 속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일관성은 물로서 저주내리는 방식은 불로서 저주를 내리십니다. 노아 방주가 심판의 물 위에 어디에 갈 필요가 없이 물이 빠지면 저절로 그 기능이 드러나듯이, 불로서 심판받아 마땅한 이 세상은 온전한 이스라엘의 등장으로 그들의 멸망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 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벧후 3:6-7)

오늘날 성도의 삶은 예수님의 시공간을 같이 하면서 하늘에 적용되는 동일한 원칙을 이 지상에서 펼치는 삶이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주의 잔에 대해서 모든 인류가 반기고 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도리어 하나님의 원칙이 한결같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78강-예레미야 51장 5~10절(저주의 금잔)251102-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51장 5~10절입니다. 구약성경 1137페이지입니다.

“대저 이스라엘과 유다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거역하므로 죄과가 땅에 가득하나 그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에게 버림을 입지 아니하였나니, 바벨론 가운데서 도망하여 나와서 각기 생명을 구원하고 그의 죄악으로 인하여 끊침을 보지 말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보수의 때니 그에게 보복하시리라, 바벨론은 여호와의 수중의 온 세계로 취케 하는 금잔이라 열방이 그 포도주를 마시고 인하여 미쳤도다, 바벨론이 졸지에 넘어져 파멸되니 이로 인하여 울라 그 창상을 인하여 유향을 구하라 혹 나으리로다, 우리가 바벨론을 치료하려 하여도 낫지 아니한즉 버리고 각기 고토로 돌아가자 그 화가 하늘에 미쳤고 궁창에 달하였음이로다, 여호와께서 우리 의를 드러내셨으니 오라 시온에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일을 선포하자”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가 성경에 나옵니다. 성경에 나오기 때문에, 성경은 무조건, 이것은 거짓이고, 신화고, 지어낸 이야기고, 우리는 성경 몰라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범죄 함으로 바벨론에 잡혀갔다’라는 그 이야기를 일반인들이나 심지어 이스라엘 사람들도 그것을 거부합니다.

자기에게 싫은 소리 한 것은 무조건 거부하죠. 그런데, 바벨론에 잡혀갔다는 거, ‘바벨론’, 이거는 실제로 그 나라가 있지 않습니까? 지금 이라크에서 옛날부터 바벨론에 대한 고고학적 유적들이 발굴되고 있습니다. ‘바벨론’이라는 나라는 분명히 역사책에도 나오고 분명히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이스라엘도 있어요.

이스라엘도 있고, 바벨론도 있고, 바벨론 다음에 페르사(바사나라)도 있고, 알렉산더 대왕의 헬라국도 있고, 그다음에 로마도 있어요. ‘이 성경 갖다 버리자. 필요 없어. 성경 없어도 살 수 있어’라고 하면서 실제로 성경을 갖다 버리면, 실제로 있는 나라도 같이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바벨론이 있고 이스라엘이 있잖아요. 그런데 ‘그 나라를 갖다 버리자. 그 나라를 우리가 생각하지 말자’라는 이게 말이 안 되잖아요.

말이 안 되죠. 조선 이전에 고려가 있고, 고려 이전에 통일신라시대가 있다. 그런데 ‘지금은 대한민국이기 때문에, 그런 역사는 몰라도 돼’라고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왜냐 하면, 땅을 파면 유물이 나오니까요. 금관도 나오고 다 나온단 말이죠. 그렇게 버릴 것 같으면요, 명절날에 조상 묘지도 찾아가지 말아야 하겠죠. 당연히 제사도 없을 거고.

점점 생활하면서, 자기 뿌리를 자기가 스스로 삭제해버리면, 톱으로 자기 하반신을 자꾸 끊어내는 경우가 되는 겁니다. 나중에는 부모도 없다고 이렇게 됩니다. ‘나에게는 엄마도 없고 아빠도 없고 나만 있다’라는 식이 됩니다. 물론 노골적으로 그런 주장을 하지는 않지만, 행동하는 것은 다 그 주장입니다. ‘부모는 없고, 난 부모는 잊어버렸다’라는 식이 된단 말이죠.

그래서 이 성경을 우리가 대하면서, 바벨론 나오고, 여러 가지 나라가 나올 때, ‘이건 우리가 몰라도 돼. 이건 우리가 안 들어도 돼’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은, 그 바벨론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루시냐에 따라서, 사람이 바벨론을 보는 것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현실을 어떻게 다루시는 가를 알아서, 앞으로의 현실, 과거의 현실은 그동안 어떤 뜻에서 현실 세계를 그동안 이끌어 왔는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분명한 현실이죠.

여기서 제가 여러분에게 어려운 이야기를 잠시 해드리겠습니다. 바벨론 나라 있습니다. 그리고 바사 나라 있습니다. 로마 나라 있습니다. 로마 나라 때,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로마 바깥에는 세상이 없다고 했습니다. 정확한 말이에요. 로마 바깥에는 세상이 없다는 말은, 로마가 그 주변 나라를 다 먹었기 때문에, 로마 바깥에 들이 있고 풀이 있고 산 노루가 뛰고 하겠지만, 있으나 마나 그건 의미가 없어요.

권력이 로마 나라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로마 나라가 있다고 하지 말고, 말을 바꾸어서 로마라는 제국의 권력이 있다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인간의 권력에 대해서 문제 삼고 있습니다. 그냥 있는 것은 있으나 마나 한, 그 돌멩이 있는 것과 인간이 있는 것과 똑같아요. 돌멩이 있는 것은 그냥 그 자리에 있지만, 어떻게 인간들을 모아서 제국이라는 것이, 꿈틀거리면서 무엇을 뿜어내느냐 하면, ‘짐승 됨’을 뿜어냅니다.

짐승 됨이라 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지배 아래에 현실이 있다는 것을 거부하고, 현실은 우리들에 의해서 일구어 나가기 나름이라는 것이 짐승입니다. 그 짐승 중 하나가 ‘APEC 정상회의’, 경주에서 있었죠. 미국, 뉴질랜드, 캐나다, 중국, 한국, 일본, 태국, 등등의 나라가 모여서 회의한 것인지 노는 것인지 저는 구분이 안 됩니다만, 어쨌든 경주에 경치 좋은 곳에서 놀았잖아요. 같이 모였잖아요.

짐승들의 모임입니다. 짐승들의 모임. 그들이 나쁘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그들로 하여금 있게 하셨나를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걸 보는 사람이 여기에 진짜 이스라엘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아요. 세상이 로마 제국에서 못 벗어나니까 짐승인 것은 맞는데, 무엇이 있느냐는 건데, 무엇이 있느냐 하면, 로마 바깥에는 없고 로마만 있다는 거죠.

이런 것처럼 오늘날 물리학자들은 ‘분자, 원자, 전자만 있다. 나머지는 없다’라고 하는 거죠. 인간까지 분해해서 인간을 로봇화하려고 합니다. 인간을 기계로 분해해서, 쓸모없는 기계 빼내고 제대로 돌아가는 줄기세포로 만든 새로운 기계, 생물학적 기질을 집어넣어서 인간에 의해서 인간을 만들어 보는 겁니다. 왜? 그게 있음이니까. 있다는 거예요.

인간이 있음에, 인간 같은 인간, 발전된 인간도 있다. 그걸 누가 허락했는가. 하나님께서 허락했습니다. 그래서 이 물리학의 입장에서, 나무, 꽃, 동물, 식물, 하늘의 해와 별, 모든 것도 물리학에서는 위치와 운동으로써 모조리 다 설명이 가능한 거예요. 그래서 물리학자들은 이런 생각을 가지고 계속 물리학에 정진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왜 세상은 우리 물리법칙에 맞아떨어지느냐.

발상이 참 재미있어요. ‘세상은 이런 법칙이 있다’라는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고, 왜 세상은 우리 인간이 만든 물리법칙에, 저 먼 안드로메다까지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지, 그게 신기하다는 겁니다. 그것은 뭐냐. 이 세상에 인간만 있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에요. 우리 인간만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고 신이고 그런 거 믿지 말자. 그런 것은 없다. 오직 인간만 있다고 할 때는 하나님은 없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그것은 보지 말고 듣지 말자. 그 시간에 우리는 인간에 대해서 발전할 그것만 탐구하고 연구하자. 그거 연구하면 돈 준다. 그 돈 있으면 너는 행복하고 여유 있게 잘 산다. 어때? 우리 생각들이 동의가 돼? 오케이가 돼? 동의하십니까? 이것을 가지고 오늘 본문에서는 7절에 “바벨론의 금잔”이라고 돼 있어요.

금잔의 특징은 뭐냐 하면, 모든 세상을 바벨론 짐승의 생각으로 동질화시키는 것이 금잔이에요. 이번에 APEC 정상회의 할 때, 경주에서 막걸리를 줬다는 겁니다. 막걸리를 줬는데, 시진핑(중국 국가주석)은 ‘이게 무슨 맛이지? 구미가 당기는데’라고 하면서 먹었단 말이죠. 막걸리를 주고 잔을 돌릴 때, 거기에서 막걸리를 마신 모든 사람들은 그 금잔에 담긴 술을 전부 다 흔쾌히 마셨어요.

이건 뭐냐 하면, 인간들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만 있고, 짐승들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짐승만 있고, 짐승만 점점 더 구체화 되는 거예요. 제가 대전강의 할 때,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그 이야기를 지금 세 번째 이야기하는데,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이, 내가 누구냐가 자꾸 명확해지는 것은 도구를 사용할 때, 자기 정체가 드러나는 거예요.

엄마 안 아프고 아빠 안 아플 때, 나는 이렇다는 생각이 들잖아요. 그런데 엄마 괴롭히고 아빠 괴롭히면, 엄마 아빠의 그 만남은 하나의 나 자신이 더욱 구체화 되고 뚜렷이 드러나는 하나의 도구적 환경이 되는 겁니다. 도구적 환경이 돼요. ‘내가 누구냐?’ 성경을 보면서 성경에 나오는 성도를 나라고 억지를 부르고 갖다가 일치시키는데,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고, 성경 대로 우리를 이 세상에 보냅니다.

지난 시간에는 면접장이라고 했는데, 이제는

우리를 실습장에 보냅니다. 실습을 시켜요. 실습을 시키면 거기에서 나오는 모든 마주침의 모든 일을 통해서,

내가 짐승이며, 나는 남들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똑같다는 거예요. 이미 우리는 막걸리에 취했어요. 짐승이 내민, 권력이 내민 막걸리에 이미 취해 있는데, 아직 젊은 사람은 덜 취하고 나이 많은 사람은 많이 취하고 그렇습니다.

한번 예를 들어볼게요. 만약에 우리에게 욕심이 없다고 한다면, 상대가 뭘 해도 우리는 화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내가 만약에 배부른 상태라면, 상대가 내 허락 없이 내 음식을 가져가도 별로 성내지 않아요. 왜 그러냐 하면, 이미 배고픔의 탐욕이 배부른 나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밉지 않아요. ‘가져가. 가져가’라고 되죠. 그런데 누군가 만나기만 하면 딱 짜증 나고, 싫고, 증오가 튀어나오는 것은 내가 그만큼 뭔가 내 위주로 살아가는 욕심이 상대로 인하여 들켰기 때문에 그래요.

내 위주로 나만 편하면 되고 나만 행복하면 된다고 꼬깃꼬깃 숨겼던, 그렇게 다짐했던 그 다짐이 그 상대의 돌발적인 출연으로 인하여 이게 들킨 거예요. 들키니까 그 화풀이로, 상대를 향하여 화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손녀는 국어도 잘해야 하고 다른 과목도 잘해야 해요. 그런데 뭐 공부시키면 ‘피곤한 것 같아요, 할머니’라고 핑계를 대면서 공부를 안 해요.

그때 ‘이게 감히 내가 신경 쓰고 시간 내서 가르치는데, 이 은덕을 모르고 이게 내 말 안 들어?’라고 분노와 증오가 일어났을 때, 그것은 바로 그 손녀의 만남을 통해서 내가 몰랐던 나의 본색이 들추어진 거예요. 뭐가 들춰지는가. ‘나는 참 욕심도 많다. 참 욕심이 많아’ 만나기 전까지는 전혀 욕심이 없어요. 내가 무슨 욕심이 있어? 나는 있는 것만 자족한다.

이렇게 했더니만, 새로운 사태가 발생할 때, 참, 나는 이렇게 나 홀로 완전함을 즐기려고 하는 이러한 욕심쟁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건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대해서 우리는 극구 그걸 안 들으려고 하고, 내가 나를 해석한 그걸로 스스로 만족하고 자족하려는 이 심보, 하나님께서는 그걸 그냥 두지 않습니다.

인간들이 신을 믿는 것은 자기가 잘났기 때문에 신을 믿는 거잖아요. 그런데 하나님 쪽에서 멈추지 않고 신이 먼저 우리에게 작업에 나서버립니다. 작업에 나서면 우리의 속에는 탐심이 그득한데, 이 탐심을 우리가 어떻게 조정할 수 없을 정도로 그냥 탐심 덩어리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런 현실을 통해서, 그 현실을 성경 속에 담고, 현실은 자기 해석을 못 해요.

현실이 성경 속에 담길 때, 성경 가운데로 현실이 들어올 때, 사건이 들어올 때, 하나님에 의해서 되는 해석, 현실과 그 해석이 만나면서 우리에게 진리가 전달되는 겁니다. 그 진리가 뭐냐. 하나님은 십자가로부터 하나님께 찾아가는 진리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네가 나 찾아오면 나는 안 받는다. 그러나 네가 십자가의 자리에 있으면 그게 바로 네가 하나님과 만나고 하나님과 영원히 살 수 있는 공간이 된다는 거죠.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결국 우리의 죄를 지목하고 찾아다니면서 우리를 긁어내면서, 무슨 사건을 만드는가. 십자가 사건을 이렇게 만들어 내요. 십자가 사건을 만들어 내면서 우리는 여기서 물리학과 관련을 한번 시켜야 합니다. 물리학은 법칙이 있어요. 그 법칙은 일어나는 모든 현상, 운동, 위치, 힘, 이런 것들과 변화 같은 것을 공식으로 만들고, 그 공식에다가 시간 요소를 집어넣습니다.

시간 요소를 집어넣어서, 지금 말고 그다음 시간, 그다음 시간에도 이 법칙이 그대로 되는지를 항상 측정하고 확인해 가면서, 이 진리는 진리라고, 이런 식으로 물리학에서 하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뭐라고 표현하느냐면, ‘공식에다가 시간을 미분한다’라고 이렇게 이야기해요. 미분(微分)은 수학 용어입니다. 미분이라 하는 것은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잘게 쪼개는 걸 미분이라고 하는 겁니다.

쪼개면 하나의 변화가 나오는데, 그 변화가 법칙 따라서 그렇게 나타나는 거예요. 그렇게 시간을 쪼개버리면 거기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진리가 될 때 상수(常數)가 나와요. 상수는 숫자인데, 상수가 나오면 이건 불변(不變)항 이고 이 상수를 미분하면 이게 ‘0’이 돼 버려요. 그 ‘0’이 되는 그 현상을 물리학에서는 대칭성이라고 합니다.

대칭성이라고 하는 것은 이 시간대에 통하는 법칙이 미래나 과거에도 동일하게 똑같이 통했다는 그 대칭성이죠. 그다음에 이 지점에서 통하는 법칙은 안드로메다나 태양이나 저 은하계 바깥에도 동일하게 통한다는 이게 바로 대칭성이라 하는 겁니다. 그래서 물리학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뭐냐? 대칭성이 깨어지는 거예요. 대칭성이 깨어지게 되면, 우리가 맞다고 여겼던 모든 물리법칙이 소용없게 돼요.

이게 불안불안한 겁니다. 언제 이것이 깨어질지 모르고 그 허점이 드러나는 겁니다. 그러면 그 대칭성이 깨어지는 거, 그걸 오늘 본문 예레미야에서는 뭐라고 하느냐면, 저주를 퍼붓는 거예요. 짐승 같은 바벨론의 속성이 귀한 금잔에 담겨서 APEC 정상들에게 돌리듯이, 전 세계에, 그리고 오고 오는 세대에 다 전합니다. 전할 때, 이거는 물리적으로 법칙이에요.

바벨론 제국이, 하나의 국가가 국가답게, 국가에서의 그 원칙, 그 원칙은 짐승인 바벨론 제국에서 이미 다지고 다진 것인데, 이것은 그 후배들에게 똑같은 어느 공간이나, 어느 시간대나, 똑같은 법칙으로 통하는 법칙이 금잔에 담긴 통치 원리입니다. 그 통치 원리를 하나님은 해석하기를,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돌렸다’라고 하시는 겁니다.

창세기 3장 17절에 하나님의 원칙은 따로 있습니다. 인간이 에덴동산에 쫓겨나고 난 뒤에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라는 이 대목이에요.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인간의 존재, 범죄 한 존재가 있으면, 땅은 저주라는 환경을 조성하게 돼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어떤 법칙이 여기서 깨지느냐 하면, 나만 착하면 상대방이 나한테 잘해준다는 법칙이 깨져버려요.

나는 착한데 상대방이 괴롭힌다면, 그건 내 탓이 아니고 남 탓이에요. 그런데 내가 남을 탓해야 하고 너 때문에 내 인생 조졌다고 하는 그것이 새로운 나로 가입이 돼요. 이게 끌어모아진다고요. 너만 죽어버리면 내가 소원이 없겠다는 이거. 그런 사람들 많지요. 김정은만 죽으면 우리나라 태극기 부대가 소원이 없어요. 자기 자신을 규정하기 위해서는 나의 적이 누구냐를 알아서, 그 적이 신의 벌을 받아서 저주받으면 자동으로 나는 신의 복 받는 사람 되는 거거든요.

그런데 이런 생각 자체가 이미 저주받은 상태예요. 하나님께서 지정해서 적을 줬는데, 이거는 ‘저 적을 왜 내 앞에 두십니까? 이건 하나님이 행정 조치 잘못한 겁니다’라고 결국 하나님 탓하는 거예요. 소돔과 고모라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잘못된 거예요. 어떤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정말 바른 이야기를 했어요. ‘이 땅에 감옥이 없으면, 우리 세상 자체가 감옥인 것을 금방 알아봤을 것이다’

말이 좀 어렵죠. 이 세상에 교도소가 없다면, 우리가 태어나서 살았다는 이 세상 자체가 거대한 하나의 교도소인 것을, 감옥인 것을 금방 알아챘는데, 우리가 감옥을 만듦으로 말미암아, 감옥 들어간 사람은 나쁜 사람이고, 감옥에 안 간 우리는 마땅히 존재해야 할 착한 사람이라고 착각한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의 저주를 내리니까, 사람들은 뭐라고 오해하느냐 하면, 소돔과 고모라만 저주받을 만하고 거기에 끼어들지 않은 우리는 구원받을 만하다고 우기는 겁니다.

그랬던 그들이, 이스라엘을 통합해서 그들은 몽땅 다 저주받았어요. 왜? 바벨론이 제시한, 인간에 의한 세상만이 현실이라는 그 금잔, 그 저주의 잔을 너도나도 할 거 없이 좋다고 그걸, 오늘도 그걸 마시고 있습니다. 왜 마시는가? 성경 해석 자체를 안 들으려고 하기 때문에. 성경 자체를 자꾸 밀어내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하는데, 그것도 바르게 하는데, 바르게 하면 복 오게 돼 있어. 성경 안 봐도 돼. 알고 있어’라고 이러거든요. 과연 성경을 밀어내도 됩니까? 고린도전서 15장 10절, 사도 바울이 한 말을, 저나 여러분들이 늘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이런 말을 했어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사도 바울이 이 말을 왜 합니까?

이 교도소에서, 저주가 가득한, 금잔의 저주가 가득한 이 세상에서, 은혜 없이는 누가 과연 빠져나와서 천국에 가겠느냐. 사도 바울이 은혜를 이야기할 때,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부터 시작했어요. 십자가는 해석 중의 해석이에요.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만들 때, 그들은 그 대칭성이 깨졌어요.

왜? 10가지 재앙이에요. 10가지 재앙에서 마지막 재앙이 뭐냐 하면은, 모든 인간을 죽여버리는 재앙이었습니다. 맏이가 죽는다는 것은, 한 집안에서 맏이한테 모든 권력이 다 대대로 이어지게 돼 있어요. 둘째, 셋째, 이거는 뭐 인간도 아니에요. 없어도 그만이에요. 첫째가 있어야 해요. 그 첫째가 그 집안에 가문의 명예와 전통, 문화와 문명을 이어가는 것이 첫째입니다.
첫째 아들이에요.

첫째 아들을 주께서 집중해서 손댔다는 말은, 인간은 계속해서 저주를 대대로 이어주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걸 끊어버렸죠. 모든 인간이 죽고 난 뒤에, 모든 시간과 공간이 끊어져서 대칭성이 깨졌습니다. 공간 대칭성이 깨졌어요. 다른 법칙이 그 깨어진 법칙 속에 나오는데, 유월절 어린 양의 죽음 안에서 새로운 시공간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시공간입니다.

예수님의 시공간은 그다음부터는 뭐냐. 불기둥으로 40년 동안 계속 끌어도, 그건 순간순간이 돼요. 40년 동안 매 순간이 동일한 시공간이 됩니다. 왜 매일 같이 만나가 오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기 때문에, 말씀 안에는 저주를 대체한 저주를 통과한 복이 항상 있어요.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돼도, 동일한 법칙은, 땅에 저주 내리는 법칙과 하늘에 복이 되는 법칙이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예수님의 죽음의 법칙에 의해서, 둘 다 대칭성으로 적용받는 거예요.

이걸 물리학자는 몰라요. 소돔과 고모라가 있었지요? 불바다 되었습니다. 애굽 있었지요? 실제로 있었어요. 10가지 재앙 받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끝으로, 베드로후서 3장 5~7절에 보면,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전에는 물로 심판이 있었지만 지금은 불로 심판받는다. 재미나는 것은, 여러분 방주가 어디로 갑니까? 여러분, 노아의 방주는 물 심판 속에 있으면서 갈 곳이 없어요. 왜? 안 가도 돼요. 방주 자체가 주님의 새로운 시공간이기 때문에 안 가도 됩니다. 방주의 용도는 물이 빠질 때, 저주가 빠질 때, 방주 안에 있는 정결한 짐승의 피가 노아 식구를 살리잖아요.

이게 바로 영원한 시공간을 초월한 영원한 십자가 원리예요. 그 십자가 원리 안을 위해서, 이 모든 세상 바벨론 후손들은 저주의 금전을 받아서, 그들은 유황불로 소돔과 고모라처럼 멸망 당해야 마땅합니다. 이 사실을 성경 밀지 말고, 치우지 말고, 안 들려고 하지 마시고, 이 해석으로 이 감옥 같은 세상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확고한 진리를 주었는데, 법칙을 줬는데, 우리가 무슨 이유로 그걸 안 들으려고 애를 쓰는지. 따로 내 인생을 살리는 법칙이 있다고 주장하고 우기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인 줄 압니다. 주여, 우리가 이미 세상과 다를 바 없는 저주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게 해주시고, 주님의 십자가만이 우리를 살리는 것도 아울러 전파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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