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분의 세상
2025년 10월 26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50:41-46
50:41 보라 한 족속이 북방에서 오고 큰 나라와 여러 왕이 격동을 받아 땅끝에서 오나니
50:42 그들은 활과 창을 가진 자라 잔인하며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며 그 목소리는 파도가 흉용함 같도다 딸 바벨론아 그들이 말을 타고 무사 같이 각기 항오를 벌여 너를 칠 것이라
50:43 바벨론 왕이 그 소문을 듣고 손이 약하여지며 고통에 잡혀 해산하는 여인의 구로함 같도다
50:44 보라 사자가 요단의 수풀에서 올라오는 것 같이 그가 와서 견고한 처소를 칠 것이라 내가 즉시 그들을 거기서 쫓아내고 택한 자를 내가 그 위에 세우리니 나와 같은 자 누구며 나로 더불어 다툴 자 누구며 내 앞에 설 목자가 누구뇨
50:45 그런즉 바벨론에 대한 나 여호와의 도모와 갈대아인의 땅에 대하여 경영한 나 여호와의 뜻을 들으라 양떼의 어린 것들을 그들이 반드시 끌어가고 그 처소로 황무케 하리니
50:46 바벨론의 함락하는 소리에 땅이 진동하며 그 부르짖음이 열방 중에 들리리라 하시도다
이스라엘 예언자인 예레미야가 왜 남의 민족의 미래에 대해서 언급하는 걸까요? 그것은 이제 그들만의 역사 아니라 이스라엘의 순수성이 타인의 민족 안에서 다른 모습으로 활동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벌써 망해버린 상태에서, 새로운 이스라엘의 등장은 기존의 바벨론 제국도 이스라엘 신세처럼 망해야 하는 겁니다.
여기서 ‘바벨론 제국’의 신세란 바벨론 제국을 덮친 후대의 제국도 같은 처지에 놓이게 마련인 자리를 하나님께서 친히 장만하시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적용했던 원칙이 그대로 바벨론에게도 주어지는 데 그것은 뭣도 모르고 그들이 삼킨 자들이 장차 온전한 이스라엘의 씨앗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저주를 이스라엘을 삼킨 그 제국도 같이 받아야 하고 그 제국을 삼킨 다른 제국도 줄을 이어받아야 합니다. 번성했던 그 바벨론의 터는 ‘황무한 처소’가 됩니다. ‘황무한 처소’가 필히 발생해야 될 이유가 뭔지요? 인간의 손으로 일구어낸 것은 그 어떤 것도 하나님께서 거부한다는 겁니다.
뭐든지 황무하게 만들어내는 것으로 시작하는 일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은 실상을 나타내게 됩니다. 그만큼 이스라엘은 평소에 자기 나라와 잘 사는 외부 민족과는 늘 비교해 왔고 동경해 오고 있었다는 겁니다. 무엇을 부러워했을까요? 그것은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권력 확보를 부러워한 겁니다.
이사야 37:36에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 앗수르 진 중에서 십팔만 오천 인을 쳤으므로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본즉 시체뿐이라” 즉 이방민족이 고용한 용병들은 그 자체로 권력의 가현체입니다. 조그만한 성곽 하나 겨우 버티고 있는 유다나라 입장에서 185,000 군사는 위협적이고 그 실제성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진퇴양난입니다. 함락되기는 싫고 함락되어야만 합니다. 마치 이스라엘에게 맨 처음 함락당한 여리고성 주민의 입장이 그대로 이스라에게 복제된 지경입니다. 이는 권력 앞에서 인간은 비로소 자기 자리의 한계가 뚜렷해진다는 말입니다. 믿음보다 막강한 권력의 보호를 받고 싶은 인간의 본심이 현실로 전개되어 나타난 겁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황무입니다. 가나안 땅도 황무하고 이스라엘 포로를 잡아갔던 바벨론 제국의 땅도 황무하게 됩니다. 즉 아무 것도 남아 있는 게 없게 합니다. 마치 앗수르 용병 185,000이 함성을 질러댄 그 현장이 황무하게 되듯이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관여의 일광성 있는 남은 광경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창 6:5-7)
이는 하나님께서 진정한 원하는 사람들이 기거할 곳은 기존의 인간들이 살던 그 자리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자꾸 인간 삶의 터전과 인간을 없애고자 하는지 그 이유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미리 알려주고 계십니다. 어항에 있는 금붕어의 예를 들어 봅시다. 어느 집에 어린 소녀가 카페트 위에 금붕어를 밟아죽였습니다.
과연 이 여자 아이에게 잘못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잘못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금붕어가 원래 있어야 할 자리는 카페트 위가 아니라 어항 안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도 이와 같은 입장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우상 섬기는 이방민족에게 짓밝혀서는 생활 터전이 황무하게 된 것은 이방민족의 신이 더 나아보였기 때문입니다.
자기에게 더 많은 자율과 자유를 허용하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어김없이 이방민족의 우상을 더 선호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점을 하나님께서도 모를 리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치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맹세하사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여 우리에게 주마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그들로 보지 못하게 하리라 하시매 애굽에서 나온 족속 곧 군사들이 다 멸절하기까지 사십 년 동안을 광야에 행하였더니”(수 5:6)
곧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약속의 땅’이란 인간의 본심이 얼마나 하나님을 거부하는지를 들추어내시는 제안이었습니다. 즉 인간이 신과 관계 맺음을 성사시키는 방식으로 맺어지는 신은 무조건 참된 신이 아니라 우상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우상과 진짜 하나님의 차이는, 인간이 지켜주려는 신은 무조건 우상입니다.
참된 하나님께서 도리어 자기 백성을 지켜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가짐으로는 결코 참된 하나님에게로 오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간 세계의 권력은 실은 흙에 불과한 인간에 그럴사한 맛을 입히는 것에 해당됩니다. 죽어가는 주제에 살아 있다는 흉내내기에 투입되는 것이 ‘권력’이라는 MSG 곧 감미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맛내기 효과의 실상을 드러내기 위해 이스라엘이 권력에 의해 핍박받는 그 이유에 집중시킵니다. 추가적인 권력이 산을 이루게 합니다. 그리고 그 집중된 권력의 최종 의도는 예수님의 죽으심이 그 본색이 드러나게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버림 받은 돌’의 등장입니다.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벧전 2:6-8)
이 ‘버려진 돌’이 직접 움직여서 이 ‘버림받은 이유와 내력을 아는 친 백성’을 직접 형성하십니다. 광야에서 어떤 인물이 총을 맞고 쓰려진 바 있는데 사흘 뒤에 가 보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면 여러분은 그 다음 내용으로 어떤 식으로 이어보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에게 납득되는 내용으로 채울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분은 도리어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행함과 정신을 ‘행함’으로 간주하여 파괴시키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십자가 사건이 친히 움직여서 자신이 자신으로부터 단절되어 있음을 아는 자들을 참된 백성으로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계시 완성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엮어보는 우리 자신의 이야기가 다 엉망인 것을 받아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77강-예레미야 50장 41~46절(버려진 분의 세상)251026-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50장 41~46절입니다. 구약성경 1136페이지입니다.
“보라 한 족속이 북방에서 오고 큰 나라와 여러 왕이 격동을 받아 땅 끝에서 오나니, 그들은 활과 창을 가진 자라 잔인하여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며 그 목소리는 파도가 흉용함 같도다 딸 바벨론아 그들이 말을 타고 무사 같이 각기 항오를 벌여 너를 칠 것이라, 바벨론 왕이 그 소문을 듣고 손이 약하여지며 고통에 잡혀 해산하는 여인의 구로함 같도다, 보라 사자가 요단의 수풀에서 올라오는 것 같이 그가 와서 견고한 처소를 칠 것이라 내가 즉시 그들을 거기서 쫓아내고 택한 자를 내가 그 위에 세우리니 나와 같은 자 누구며 나로 더불어 다툴 자 누구며 내 앞에 설 목자가 누구뇨, 그런즉 바벨론에 대한 나 여호와의 도모와 갈대아인의 땅에 대하여 경영한 나 여호와의 뜻을 들으라 양떼의 어린 것들을 그들이 반드시 끌어가고 그 처소로 황무케 하리니, 바벨론의 함락하는 소리에 땅이 진동하며 그 부르짖음이 열방 중에 들리리라 하시도다”
이스라엘 이야기 언급하면서 바벨론을 동반해서 같이 거론하시는 이유는 주님 오시고 난 뒤에, 마지막 때에, 새로운 형식의 바벨론이 등장하면서 새로운 형식의 이스라엘이 정립됨을 미리 보여주는 겁니다. 황무한 땅, 이스라엘이 범죄하고 난 뒤에 가나안 땅은 황무했습니다.
황무한 그 땅에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씨앗 같은 거, 이스라엘을 다시 연장시키기 위해서, 버리지 않기 위해서, 씨앗 같은 존재, 다니엘 같은 사람들이죠, 그런 사람들을 황무하지 않고 너무나 잘 사는 바벨론 땅으로 이주를 시켰어요. 모종을 옮겨놓는 겁니다. 가나안 땅, 황무한 가나안 땅 말고, 전혀 황무하지 않은 살만한 땅으로 옮겨놓습니다.
옮겨 놓았는데 그 바벨론 땅도 이제 황무해졌어요. 갈 곳이 없어요. 이 세상에 갈 곳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 수 있는 적당한 땅은 하나님께서 더는 제공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 땅에서 살 곳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어떻게 영원한 천국 백성의 약속대로 나타날 수 있느냐.
그거는 이 바벨론이라는 제국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조정하느냐 하면, ‘바벨론 땅이 황무하다’에서 황무해 질 수 있는 지구의 모든 세계를 바벨론화로 전환시킵니다. 바벨론 땅이 황무하다는 거기에서, 이제는 ‘세상에 어느 곳도 황무하지 않은 땅이 없다’라고 이렇게 바꿉니다. 바꾸게 되면 어떤 점이 여기서 본문 예언과 맞아떨어지느냐 하면은 바로 41절입니다.
“보라 한 족속이 북방에서 오고 큰 나라와 여러 왕이 격동을 받아 땅 끝에서 오나니”라고 돼 있거든요. 이 땅 끝에서 온다는 말은 현재 바벨론 입장에서는, 바벨론 나라가 지구의 중심이에요. 최고로 잘 사니까, 모든 힘은 거기에 다 모아져 있으니까, 그만큼 힘들을 끌어모은 거예요.
힘들을 끌어모았는데, 끌어모으면 그 바벨론 사는 동네가 볼록 렌즈처럼 이렇게 중앙이 평평하다가 나중에 지평선 너머로는 끝을 모르는 거예요. 왜냐하면 모든 관심사가 바벨론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그 주변에 있는 것은 있으나 마나예요. 근데 있으나 마나 하는 그 지평선 너머에서 계속 다른 민족과 다른 여러 종족이 계속 출연되는 거예요.
무대에서 연극이 끝났다 싶은데, 무대 뒤에서 새로운 출연진들이 계속 나와서, 이제 무대 중심이 되는 하나님께서 이야기하고 싶은 이 지역에, 다른 민족들로 교체가 일어나면서 권력체들이 여기에 계속 넘쳐나는 겁니다. 계속 나오는 거예요. 엎친 데 덮치고, 덮친 데 또 덮쳐서.
그래서 이 세상에는 권력과 권력의 중첩된 세계에 계속 중첩되는 식으로 남은 인류의 역사가 진행된단 말이죠. 그렇다면 이스라엘 역시 그렇다 할지라도 그럼 이스라엘은 어디서 찾느냐 하는 그 문제가 계속 남아 있습니다. 깔린 데다 또 깔려 버렸으니, 이스라엘은 더 깔리게 되니까 흔적도 없이 없어지지 않느냐. 맞습니다. 이스라엘은 흔적도 없이 없어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준비한 게 있어요. 그 준비된 하나님의 말씀을 제가 베드로전서 2장 7절에서 단어를 언급해 드리겠습니다. 그게 뭐냐면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에요. 건축자들의 버린 돌.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시편 118편 22절에도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무슨 뜻일까? 건축자들의 버린 돌, 세상의 권력자들은 ‘이거는 벌써 끝났어. 저거는 뭐 손댈 필요 없어. 이거는 이미 버려진 거야’라고 그렇게 버렸어요.
권력자들이 ‘이제는 뭐 더 빼먹을 게 없어’라고 쓰레기장에 버린 그 쓰레기장에서 이스라엘의 모퉁이 돌의 시작이 개시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동안 권력자들이 바벨론을 쳤고 바벨론은 이스라엘을 쳤던 그 의식, 그 인식 자체가 이제는 하늘나라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는 원리 원칙이 되고 말았어요. 전혀 통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니까, 이건 버려졌다는 거예요.
그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그러면 누구냐? 그 질문은 그다음에 반드시 나와야 해요. 사람에 의해서, 건축자들에 의해서 버려진 돌이 누구냐? 이스라엘이냐? 아니에요. 이스라엘에 의해서도 버려진 돌이에요. 왜냐하면 이스라엘 유다 나라가 이미 권력의 맛이 들었기 때문에. 하여튼 그 권력이라는 것이 뭔가 허한 거예요. 이건 아무 소용 없는 거예요. 그래서 권력을 저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권력은 뭐냐? MSG다. 그냥 맛 내는 것이다. 맛 내는 거. 그러면 권력은 맛 내는 건데 그럼 맛이 없는 곳에 맛을 낸다는데, 맛이 없는 게 뭐냐. 그거는 흙덩어리죠. 인간은 흙덩어리인데 권력이라는 것을, MSG 조미료를 이렇게 처 가지고,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그렇게 행세하는 겁니다.
이 실상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들춰낼 수 있는 그러한 입장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러면 이 말은, 이 세상은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망하게 돼 있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망해요. MSG 그거 다 걷어내면, 바람에 날리면, 흙은 흙이니까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마땅하죠. 그렇다면 이 예레미야의 예언도 소용없잖아. 가만히 있어도 망하는데, 예레미야가 왜 필요하며, 신약 성경이 왜 필요하냐.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혈을 모으고 힘을 모아서 한쪽을 힘이 집중되게 모아서, 모인 힘의 그 방향이 어디를 향하여 나가는가를 하나님의 성경을 통해서 그 방향의 목적이 나옵니다. 인류가 망하기는 망하는데 그 망하는 이유, 망하는 목적, 망하는 도착 지점에서 만나는 새로운 계시는 뭐냐. 그거는 일종의 망하면서 그 자국을 따라가 보면 그때 드러나는 거예요.
그 ‘킬 빌2(Kill Bill 2부, 2004년 개봉)’라는 영화가 있는데요. 그 영화에 보면 주인공 여자가 다른 킬러한테 잡혀서 당장 죽지 않고 사막 광야 한복판에 관 속에 넣어서 흙을 덮고 무덤을 만들었어요. 여자는 산 채로 무덤 안에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이거 큰일 났다. 주인공이 이제 조기에, 시작한 지 몇 분도 안 돼서 이렇게 죽어버리면 영화 자체가 안 되는데’라고 걱정하죠.
도저히 관속에 갇힌 채, 묻혀서 그 여자주인공은 나갈 수가 없어요. 제목은 뭐냐? 킬 빌. 빌 이라는 자를 죽이라는 건데, 뭐 죽이기도 전에 이미 그 여자는 흙 속에 묻혔어요. 그래서 이 감독은 그 여자주인공을 어떻게 살려내는가를 지켜보니까, 이 여자가 중국의 권법을 배웠어요. 이 권법이 뭐냐 하면 모든 힘을 손가락 끝에 모으는 권법을 써서, 그 관을 손가락 끝을 모아서 쑤시니까, 그 관의 궤짝이 모아진 힘에 의해서 깨지고, 묻혔던 흙도 관 속에 쏟아지고, 그렇게 빠져나와서 복수에 성공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뭐 그렇게 성공한 거죠. 세상은 권력보다 더 센 게 없습니다. 권력보다 더 센 게 없어요. 이사야 37장 36절에 보면, 바벨론 이전에 앗수르의 산해립이 유다나라를 지배하겠다고 찝쩍대면서 잡아먹으려고 보낸 앗수르의 용병들이 몇 명이냐 하면, 18만 5천 명이었어요. 18만 5천 명인데, 어떻게 몰살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천사가 와서 기(氣)를 모아 한꺼번에 18만 5천 명이라는 그걸 다 죽여버렸어요.
이것은 하나님한테 누가 대적하냐는 그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권력은 권력대로 허용하면서, 심지어 유다 나라도, 히스기야도 꼼짝 못 하고 이제 죽었다고 하고 있는데, 천사가 와서 기를 모아서 숨통을 터줄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제가 어떤 상황을 설명할 테니까, 여러분들 그 상황의 해결점을 여러분 마음속으로, 여러분들 나름대로 영화감독이라고 생각하고 풀이해 보세요.
어떤 사람이 총을 맞고 광야에 쓰러졌어요. 쓰러졌는데 사흘 뒤에 가 보니까 그 시체가 없어졌습니다. 여러분들이 감독이라 하고 시나리오에 시놉시스(Synopsis), 이야기를 연결하는 걸 시놉시스라고 하거든요. 여러분들이 감독이라고 생각하고 이야기를 이어가 보세요. 아직 영화가 끝나지도 않은데, 총 맞고 누워서 시체 됐는데, 시체 되고 사흘만에 가 보니까 그 시체가 없어졌어요.
어디로 갔죠? 그 시체. 그 시체 어디로 갔습니까? 그 시체에 대해서 베드로전서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세상에서 버린 돌이 새로운 하늘나라의 모퉁이 돌이 되었다고,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뭐냐. 나한테는 어떤 신앙도 없고 나는 불신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인해 주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에 의해서 버려진 자가 되지 아니하면, 나는 나를 버릴 수가 없습니다.
사흘 전에 총에 맞아 죽은 시체는 광야에 그 자리에 있었으면 그 자리에 있어야 해요. 그런데 그 자리에 없어요. 감독은 말합니다. 부활 됐다는 거예요. 영화 같으면 믿죠. ‘야 멋있다. 재밌다’라고 하겠는데 이게 영화가 아니고 실제라고 하면요? 실제라면, 우리가 평생 학교에서 공부하고, 대학 나오고, 뭐 어떻게 취직하고 결혼했던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시놉시스, 우리의 영화 시나리오가 전부 다 엉망이고 허망한 거예요.
우리는 지금 내 이야기를 잘못 꾸미고 있고, 잘못 연결해 주고 있습니다. 그 ‘킬 빌’이라는 그 영화가 얼마나 대단한 영화인지, 감독이 쿠엔틴 타란티노(Quentin Tarantino)라는 감독인데, 기생충을 만든 우리나라의 봉준호 감독이 아주 존경하는 감독이에요. 그 감독이 영화의 뒷부분에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 이야기를 지금 이 자리에서 하고 싶어요.
어떤 아이가 있었는데 아이가 카펫 위를 지나다가 금붕어를 밟아 죽였다. 자, 그렇다면 그 아이의 잘못일까, 아니면 금붕어가 어항에서 나온 게 잘못일까? 감독은 그 영화에서 그걸 물어요. 어항에 있는 금붕어는 아무리 철없는 아이지만 그걸 밟아 죽일 이유가 없습니다. 현재 우상을 섬긴 이스라엘에게 본래 하나님에 의해 지정된 자리는 여호와의 언약과 함께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율법 안에서 자기 자리를 잡아야 해요. 자리 잡았는데 그게 이스라엘의 어항이에요. 그런데 어항이 귀중한 것도 모르고, 소중한 것도 모르고, 어항 바깥 세계가 그렇게 탐이 나고 좋았던 거예요. 그래서 어항 바깥을 보면서 ‘저들의 자리는 뭘로 구성되어 있을까, 저들은 어떻게 하루하루 일과를 재미나게 살까?’라고 하면서 그들의 행복이 탐이 나서 여호와 하나님이 지정하신 자리를 벗어나서 어항 밖으로 나온 물고기가 되니까, 이놈도 밟고, 저놈도 밟고, 밟은 데 또 밟고, 밟고 하는 거예요.
그 자리, 어항 밖의 자리, 인간은 자기의 자리를 벗어나면 안 돼요. 대구에서 어릴 때를 보냈던 대구 토박이들이 바깥에 시집가고, 장가가고, 뭐 취직하러 가잖아요. 그들이 대구 오면 꼭 사는 게 있어요. 딱 두 가지 있어요. 뭘까요? 하나는 납작만두, 또 하나는 콩 이파리 삭힌 거. 이거는 대구에서만 토속음식으로 먹고 다른 데서는 먹지를 않았어요.
서문시장 가면 그 납작만두 팔아요. 주께서 주시는 양식은, 양식이 아닙니다. 말씀을 줘서 생명을 그 안에 실어 나르게 돼 있고, 바깥에서 주는 양식은 우리의 목숨을 재촉하는 총알 같아요. 매일 양식을 먹으면서 총알은 매일 같이 우리를 죽음으로 데려가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어항 안에 있는 이스라엘은 그걸 간파해 줘야 하는 거예요.
얼마나 선지자들이 그걸 많이 이야기했어요. “여호와를 버리지 마라.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딴 건 다 좋은데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면 내가 가만두지 않는다”라고 그 이야기를 굉장히 많이 했습니다. 여기서 간단하게 정리 들어가 봅시다. 우상은 뭐냐? 여호와는 뭐냐? 이렇습니다. 우상은 인간이 신을 보호하는 게 우상이고요, 하나님의 신은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는 게 하나님이에요.
내가 신을 간수 하는 게 우상이에요. 내가 예수님 걱정하고, 성령 걱정하는 게, 이게 우상 숭배자가 하는 짓이에요. 왜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할 수 있느냐. 이 세상에 유일하게 복수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를 지닌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인간들이 하나님 죽이기예요.
킬 빌(Kill Bill)이 아니고 킬 예수(Kill Jesus)예요. 예수를 죽이는 쪽으로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그런 식으로 이끌어왔고, 역사를 이끌어 왔어요. 결국 이 역사의 중심은 그 혈이, 권력의 중심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죽게 하는 데 있습니다. ‘죽어버려라. 하나님이 찾아오는 그런 하나님은 필요 없고, 우리가 만드는 하나님만 믿습니다’라고 하고 나는 그 하나님과 거래하고 계약 맺겠다.
배후에 악마가 그렇게 한 거예요. 따라서 어느 누구도 어느 누구를 복수할 권한이 없습니다. 가롯 유다의 잘못은 본인이 본인의 인생에 대해서 복수한 거예요. 그 가롯 유다의 후예들이 누구냐면 오늘날 현대인입니다. 걸핏하면 막 죽는데. ‘나 죽어버릴까’라는 식으로 걸핏하면 죽는다고 하는데, 우리는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자격이 없어요. 그동안 얻어먹은 은혜가 너무 많아서, 내 인생을 내가 키워온 게 아니기 때문에, 내가 나에 대해서 잘했다, 잘못했다는 판정 내릴 권한도 없습니다.
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자꾸 탓합니까? 제가 물리학 문제를 하나 낼 테니까 여러분 알아맞혀 보세요. 안드로메다는 지구로부터 250만 광년(光年) 떨어져 있다고 합니다. 광년(光年)이라는 것은 빛이 1년 동안 가는 거리가 1광년입니다. 따라서 안드로메다는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느냐? 빛이 250만 년 떨어진 광년에 안드로메다가 있습니다.
자, 문제 나갑니다. 우리가 안드로메다에 가려면 몇 년 걸립니까? 여기서 안드로메다까지 몇 년 걸릴까요? 정답 말씀드립니다. 정답은 제로(zero)입니다. 동시(同時)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입장에서 빛의 속도로 가면 250만 년 걸린다고 생각하죠.
그러나 현실은 뭐냐. 하나님께서 우리 입장은 아예 고려를 안 해요. 빛의 입장에서 보게 되면 빛이 달려버리면 상대성 원리에 의해서 공간이 수축 돼요. 멀리 있는 공간이 저 떨어져 있는 공간이 가면 갈수록 이게 가까이에 딱 붙어 있어요. 여기가 거기고 거기가 여기고, 동시성이죠. 동시에 공간이 수축 돼서 동시에 있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이 자리는 하나님의 버림받은 돌을 위한 자리이지,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시공간을 조작할 그런 권리나 자격이 우리에게는 없는 자리예요. 이 자리는. 그러면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뭘 해야 하는가. 그게 바로 로마서 9장에 나옵니다. 로마서 9장에 보면, 여기 9장 33절부터 먼저 읽어드립니다.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라고 되어 있거든요. 이것은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누구를 믿어야 되지, 어디 가면 되지, 어떻게 믿으면 되지, 어떻게 내가 소유하면 될까?’라는 이걸, 시작을 내 쪽에서 생각하는 거예요.
안드로메다를 내 쪽에서 가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나 이미 예수님은 이 모든 인간으로부터 버림받은 모퉁이 돌, 버림받은 돌이에요. 이제는 움직여도 돌이 움직여야 해요. 돌이 움직여서 찾아오게 되면, 내 쪽에서 구원받기 위해서 뭘 하는 것이 아니고, 그 버림받은 돌이 나의 모든 행함을 쭉쭉 다 깨 부습니다. 모든 우리의 행함을. 그게 30~32절에 나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이스라엘은 탈락이요, 이방인들은 구원받게 되는데,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믿음의 결과, 버림받은 돌이 왜 버림받은 돌인 것을 그들은 모르고, ‘나는 버림받지 않을래’라는 식으로 자기 행함으로 주님 앞에 접근하려고 하니까 이게 구원의 실패하는 거예요. 지난 수요일 날 끝부분에 한 이야기를 다시 하겠습니다. 보통 병에 걸리면 병 걸리고 난 뒤에 약을 먹이잖아요. 그런데 주님은 그 약부터 먼저 주고, 이 약이 어떤 효능이 있는가를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서 행함의 병에 걸리게 하신 겁니다.
‘우리가 버렸구나. 우리는 내 구원을 받아야 하니, 말아야 하니 할 자격조차 되지를 않는구나’라는 그게 바로 진짜 이스라엘, 주님에 의해서 축약된 새로운 공간에 합류된 자로, 다시 세상을 그리고 성경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다시 보시게 되면, 주께서 우리를 보호하지, 우리가 예수를 보호하고 지키고 하는 이것은 터무니없는 바로 예수라는 이름의 가짜 신, 가짜 구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어떻게 일하시는가에 관심을 둬야 하는데, 내가 얼마나 대단하게 훌륭한 사람이며, 얼마나 열심히 완벽하게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가를 내세우는 이 모든 것이, 행함에 입각한 우상의 버릇인 것을 이제는 발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