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세상의 끝

아빠와 함께 2025. 11. 16. 18:32

세상의 끝 

2025년 11월 16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51:33-37

51:33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딸 바벨론은 때가 이른 타작마당과 같은지라 미구에 추수 때가 이르리라 하시도다
51:34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나를 먹으며 나를 멸하며 나로 빈 그릇이 되게 하며 같이 나를 삼키며 나의 좋은 음식으로 그 배를 채우고 나를 쫓아내

51:35 나와 내 육체에 대한 잔학이 바벨론에 돌아가기를 원한다고 시온 거민이 말할 것이요 내 피 흘린 죄가 갈대아 거민에게로 돌아가기를 원한다고 예루살렘이 말하리라
51:36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네 송사를 듣고 너를 위하여 보수하여 그 바다를 말리며 그 샘을 말리리니
51:37 바벨론이 황폐한 무더기가 되어서 시랑의 거처와 놀람과 치솟거리가 되고 거민이 없으리라

사람들은 자신이 세상에서 밀려나서 산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언제든지 사람들이 움집해 있는 그곳에 참여하면 한통속이 된다고 자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타인들과 자신이 차이난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마치 바벨론 사람들이 보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른 사람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듯이 말입니다.

문제는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이 바벨론 사람과 완전히 다른 종류의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저 그들은 그들의 신을 섬기고 자신들은 여호와 섬기는 정도의 차이라고 여겼습니다. 곧 자신의 존재 자체가 차이난다는 것을 도무지 생각하지를 못한 겁니다.

이런 경향은 여호와께서 어떤 분이라는 점을 전혀 고려하지 못하고 자신의 생존이 우선되기 때문입니다. 즉 여유롭게 살게만 하면서 어떤 신을 섬기든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고 여깁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단단히 모시고 산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은 같은 인간이 아니라 ‘용’이었습니다. 용은 사람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포섭해서 안아 줍니다. 보호해줍니다. 자기 편으로 삼아버립니다. 지켜줍니다. 용이 공격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곧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이는 곧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못 알아보고, 바벨론 사람들도 여호와를 못 알아보지만 용은 여호와를 알아봅니다.

바벨론 사람들조차 용을 통제할 수 없고 도리어 용이 바벨론 사람을 통제합니다. 여호와 이름이 있는 곳을 공격하도록 용이 촉구시킨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이렇게 나옵니다. “51:34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나를 먹으며 나를 멸하며 나로 빈 그릇이 되게 하며 용 같이 나를 삼키며 나의 좋은 음식으로 그 배를 채우고 나를 쫓아내었으니”(렘 51:34)

인간 대 인간의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용과 하나님의 이름의 대결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싸움의 결과는 어떻게 끝날까요? 예레미야 51:63-64에 보면, “ 너는 이 책 읽기를 다한 후에 책에 돌을 매어 유브라데 하수 속에 던지며 말하기를 바벨론이 나의 재앙 내림을 인하여 이같이 침륜하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니 그들이 쇠패하리라 하라 하니라 예레미야의 말이 이에 마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유브라데’라는 지정된 공간의 등장은 애초부터 하나님께서 인간의 공간으로 지정된 그 끝지점을 말합니다.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에 둘렸으며 그 땅의 금은 정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에 둘렸고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1-17)

이 유브라데 강까지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허락된 땅의 경계입니다. “너희의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다 너희 소유가 되리니 너희의 경계는 곧 광야에서부터 레바논까지와 유브라데 하수라 하는 하수에서 서해까지라”(신 11:24) 이 영토는 애초부터 아브라함에 약속하신 후손의 땅입니다. (창 15:18)

따라서 여호수아가 차지할 땅도 이 유브라데까지입니다.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하수 유브라데에 이르는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편 대해까지 너희 지경이 되리라”(수 1:4) 그런데 유브라데에 위치한 민족이 바로 바벨론 민족입니다. 즉 땅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땅, 그 경계를 위치한 민족이 바벨론입니다.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접수해서 자기 영토로 데려갔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지정해 놓은 땅의 중심부가 용에 의해서 사라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세계 경영이 용에 의해서 표적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의 지정하심이 용에 의해서 무시당한 겁니다. 용은 하나님의 계획을 짓밟은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좌시하시지 않고 그들의 처소를 멸망의 자리로 만들어버리십니다. “나팔 가진 여섯째 천사에게 말하기를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 주라 하매 네 천사가 놓였으니 그들은 그 년 월 일 시에 이르러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예비한 자들이더라 마병대의 수는 이만 만이니 내가 그들의 수를 들었노라”(계 9:14-16)

즉 인류가 사는 땅 전체가 하나님에 의해서 저주 쪽으로 끝까지 밀려나갔습니다. 그렇게 해서 드러나는 것은 새로운 중심지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다시 고향인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천국의 중심지를 제대로 회복하는 겁니까? 아닙니다. 이사야 43:10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로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사 43:10-11) 여기에 ‘선택’이 나옵니다.

‘선택’이란 단순한 택함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선택한 겁니다. 그런데 사랑은 어디서 나올까요? 사랑은 강력하고 지독한 질투심에서 나옵니다.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신 5:9)

질투란 창세 전부터 찜해 놓은 관계라는 겁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쪽에서 일방적으로 사랑합니다. 그 어떤 영적 세계도 하나님께서 찜 해놓은 것을 가져갈 수가 없도록 철저한 사랑으로 돌보십니다. 이 관계는 인간들이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질투란 대상이 되는 것을 받지 않겠다는 겁니다. 일방적으로 사랑을 퍼부어주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이름과 중심이 되는 세계를 구성하기 위해 준비된 내용물은 무엇일까요? 마태복음 23:34-35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피에 참여된 것 자체가 하나님의 질투로 형성된 사랑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우리의 고귀한 신분을 무시하지 않게 하옵소서. 관심을 세상에 빼앗기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80강-예레미야 51장 33~37절(세상의 끝)251116-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51장 33~37절입니다. 구약성경 1139페이지입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딸 바벨론은 때가 이른 타작마당과 같은지라 미구에 추수 때가 이르리라 하시도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나를 먹으며 나를 멸하며 나로 빈 그릇이 되게 하며 용 같이 나를 삼키며 나의 좋은 음식으로 그 배를 채우고 나를 쫓아내었으니, 나와 내 육체에 대한 잔학이 바벨론에 돌아가기를 원한다고 시온 거민이 말할 것이요 내 피 흘린 죄가 갈대아 거민에게로 돌아가기를 원한다고 예루살렘이 말하리라,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네 송사를 듣고 너를 위하여 보수하여 그 바다를 말리며 그 샘을 말리리니, 바벨론이 황폐한 무더기가 되어서 시랑의 거처와 놀람과 치솟거리가 되고 거민이 없으리라”

바벨론과 하나님과 싸우는데, 하나님을 대하는 바벨론을 뭐라고 표현하느냐 하면, 34절에 ‘용(龍)’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용 같이 나를 삼키며” 불길하지요. 용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뱀입니다. 뱀과 하나님이 싸운다. 어떻게 창조주가 창조된 용과 싸울 리가 있느냐고 생각하는데,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이에요.

하나님의 이름은 사람과 동고동락하고 이스라엘과 함께하면서, 인간의 연약함과 나약함, 인간의 속성을 몸으로 같이 체득하면서 택한 자를 대변하는 모습으로 주의 이름, 하나님의 이름이 그들과 함께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의 입장에서는 너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이고, 힘센 쪽이 승리하는 게임을 하자고 하지만, 34절에 말한 것처럼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그냥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안에는 뱀이 들어 있습니다. 여기서 뱀은 바로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옛 뱀, 마귀를 말합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 모습이 전부가 아니라, “네 안에는 뭐가 들어 있어? 뱀이 들어 있어, 아니면 주님의 이름이 들어 있어?”라는 식으로 성경은 사건, 사건들을 일으켜 가고 있습니다. 성경이 세상을 보는 그 관점에서, 이스라엘은 그조차도 본인들이 그걸 잘 몰랐어요.

모르고, 여호와 하나님의 그 독특함을 알지 못하고, 그냥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준다고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갖고 있는 그 본질과 속성을 자기 내부의 것으로 전환을 시켜야 하는데, 다른 민족은 신이 도와준 것처럼 우리 민족은 여호와가 도와준다고 이렇게 생각한 겁니다. 여기 보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라고 이렇게 돼 있거든요.

그런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언급할 때는 반드시 거기에 전제가 붙습니다. 이사야 43장 10절에 보게 되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라고 여호와 나오지요,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라고 벌써 이런 서술이 들어가잖아요. 조건이 들어간다고요. 하나님이 네가 필요한 것을 제공하는 하나님이 아니고, “너는 나의 종으로” 그다음에 나오는 말이 뭐냐, “택함을 입었다”라는 선택이라는 게 들어갑니다.

여러분 선택이라는 게 들어오려면, 이미 선택당한 자는 그 존재감이 이 세상으로 국한되는 게 아니에요. 영원과 통하는 겁니다. 선택이라 하는 건, 영원에서 선택한 거예요. 선택된 자는 눈에 보이는 세상이 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선택했던 그 시점, 하나님과 아들의 관계 속에 그들이 이미 내포되어 있었던 존재입니다. 보통 존재가 아니죠. 택했다는 거, 골라내는 거죠.

택했다는 것은 “너 아니고, 아니고, 아니고, 그래, 너다”라고 딱 집는 거, 이게 선택이에요. 그렇게 선택된 사람에게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의 증인이고 나의 종”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 선택된 사람들은 철저하게 자아, 독자적인 자아는 용납될 수가 없습니다. 그건 되지를 않아요.
되지를 않고, 그다음에 하나님의 종으로 사는데 그것을 이사야 43장 11절에서는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그렇게 언급하십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약간 궁금한 게, 이사야가 예언했던 그것이 신약에 왔을 때, 그 택한 자가 과연 어디에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 거예요. 누가복음 9장 35절에 보면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벌써 이 기운이 보통 기운이 아니잖아요. 구름 속에서 햇빛이 나는 정도가 아니고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고”라고 이렇게 돼 있어요.

이건 예수님에 대해서 언급하는 겁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택함을 받은 자”라고 구름 속에서 나온 말씀이죠.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창세 전부터 택함을 받은 자를, 택함을 받았다는 그 상황을 그대로 쑥 이 세상에 집어넣습니다. 집어넣으면, 이 세상에 흐르는 시간은 완전히 무의미하죠. 이 세상의 공간, 그것도 이제 무의미하죠. 아무 의미 없습니다.

이게 쑥 집어 들어온 게 있거든요.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님이 오실 때 달랑 몸 하나 들고 온 게 아니고, 아버지가 예수님을 선택한 그 선택으로 구성된 관계도 동반해서 예수님과 함께 이 세상에 들어온 겁니다. 들어왔는데, 뭐 아시다시피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주님의 이름이 선택되었고, 하나님의 이름이 선택되었고, 다른 사람은 그 사실을 모를 때, 우리 인간들은 어떻게, 어디에서 출발하느냐. 간단합니다.

우리는 매일 이단(異端)에서부터 고고(Go, Go)!! 이단부터 출발하면 아주 쉬워요. 이단부터 출발하게 되면, 주님과 우리와 어떤 점에서 다른가 하는 것을 매일 확인하는 거, 그게 바로 주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주의 종이 되고 증인이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단의 특징이, 구약적으로 하면 다른 신을 우상으로 만드는 특징이, 본인이 정상이라고 자부하는 인간들이거든요.

나는 아무 문제 없는데, ‘하나님, 저 아무 문제 없지요?’라고 이렇게 나온다 이 말이죠. 문제 있는데, 그 문제를 우리가 미처 알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름과 이스라엘과 섞여서 이렇게 광야 생활도 하시고, 이스라엘과 이렇게 이었는데, 결국 이스라엘은 오늘 본문에 의하면, 바벨론으로 잡혀갔어요. 바벨론에 잡혀갔을 때,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다시 약속의 땅으로 가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말씀처럼 바벨론에 갔을 때, 바벨론이 바벨론이 아니고 용이라는 점을 감안하고 들어와야 해요. 용이라는 점. 오늘 34절에 보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나를 먹으며 나를 멸하며 나로 빈 그릇이 되게 하며 용 같이 나를 삼키며 나의 좋은 음식으로 그 배를 채우고”라는 이게 바벨론에 포로 잡힌 사람한테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재해석해야 해요.

뭐냐 하면, 내가 다시 약속의 땅에 가고 이스라엘 땅에 가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바벨론에게 당한 것이 아니고, 용이 노리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분을 용이 주목하고 노리면서 공격했던 사건이 바로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공격한 그거예요. 이스라엘의 잡힌 사람들에게 예레미야가 했던 이야기를 다시 한번 여러분에게 상기시켜 드리겠습니다.

뭐냐? ‘네가 바벨론에 가거든 거기서 잘 먹고 잘살아’(렘29:4~7)라는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이 말은 열심히 노력해서 다시 약속의 땅으로 오도록 노력하라는 그 말이 아니고, 지금 마귀가 상대할 자는 네가 아니야. 너는 벌써 끝났어. 너는 지금 악마하고 싸울 잽이 못 된다. 악마가 노리는 것은 나야, 너와 함께 있는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이 틀렸다는 것 때문에 이스라엘은 다시 바벨론으로 포로 잡혀간 거예요. 쉽게 가겠습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이 생각한 믿음직한 하나님이 있잖아요. 인간이 생각하는 신이라는 거, 하나님이 절대적인 신이잖아요. 그것과 달라도 너무 다른 분, 인간이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하나님이 누구냐, 바로 이스라엘과 함께 했던 그 하나님이십니다.

아주 특이한 하나님이에요. 따라서 우리는 여호와 믿고 예수 믿는다고 우리를 정상으로 보지 말고, 아예 하나님이 자신을 제대로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를 항상 이단에서 출발하게 한다는 사실, 잘못된 것으로 출발하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단으로 출발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여기에 황무지라는 말이 나와요.

오늘 본문에, 황무지가 될 것이오. 이게 예레미야 51장 26절에 보면 “너는 영영히 황무지가 될 것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라고 그렇게 돼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37절에도 “바벨론이 황폐한 무더기가 되어서”라고 이렇게 돼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여러분이 좀 어렵더라도 제가 설명을 해 드려야 되겠습니다. 이 설명을 위해서 예레미야 51장 끝부분에 가 보겠습니다.

63절에 보면, 이게 좀 어렵습니다. 예레미야 51장 63~64절을 볼 때, 마지막 잠 오는 것을 깨우시고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너는 이 책 읽기를 다한 후에 책에 돌을 매어 유브라데 하수 속에 던지며 말하기를 바벨론이 나의 재앙 내림을 인하여 이같이 침륜하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니”라고 나옵니다. 상당히 어렵죠. 여기에 바벨론 나옵니다. 바벨론은 우리가 알고 있어요.

그다음에 유브라데 하수, 유브라데라는 강 나옵니다. 이게 왜 성경에 나오느냐. 그거는 우리 자신이 지금 어디에 기거하고 있는지를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주 쉽게 말씀드리겠다. 아주 쉽게. 지금 오후 시간이라서 잠을 청하시는데, 아주 쉽게 말씀드리면, 서문시장에서 쌀을 팔 때, 상인들에게 ‘쌀 한 되 주세요’라고 하면 쌀 됫박에다가 위로 불룩하게 올라오도록 부어 줘요.

그걸 보고 있던 손님이 봉오리로 올라온 쌀을 다 주는 줄 알고 좋다고 하는데, 상인이 작대기를 가지고 위로 올라온 봉오리진 쌀을 확 밀어버립니다. 매끈하게 확 밀어버리죠. 이게 굉장히 중요한 건데요. 주님께서는 이 땅을, 인간이 사는 땅을 쭉 밀어버리면, 인간이 중심이 된 인간, 이 인간만 밀리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사는 땅도 밀리게 돼 있어요.

이 고봉으로 된 땅이 밀리면 어디까지 밀리는가. 유브라데까지 밀리게 되어 있어요. 유브라데까지. 그겡 창세기 2장 14절에 나옵니다. “세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며 네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마지막 넷째 강이 유브라데예요. 유브라데 강까지. 에덴동산이 유브라데까지를 중심점으로 삼아 놓았다는 겁니다.

선악과와 생명나무를 중심지에 딱 심어 놓았는데, 그 중심을, 인간이 범죄 함으로 하나님은 새로운 중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 중심이라고 하는 이 세상을 유브라데강까지 쫙 밀어버리는 거예요. 밀어버리는 거예요. 장정들이 논산훈련소 들어가면서 머리를 깎을 때, 머리를 확 밀어버리잖아요. 확 밀어버리면 기존의 인간들이 알고 있던 세상, 인간들의 문명을 발달시켰던 이 세상은 어디까지 밀리는가. 유브라데까지 밀려요.

유프라테스강까지 밀린다면, 그것은 뭐냐 하면, 이 땅은 거기서 멸망하게 되어 있어요. 그게 요한계시록에 나옵니다. 9장 14절. 제발 몰라도 된다는 그런 생각을 좀 안 해줬으면 좋겠어요. ‘이런 거 몰라도 되는 거 아닙니까?’라고 그렇게 하지 마세요. 요한계시록 9장 14~15절에 “나팔 가진 여섯째 천사에게 말하기를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 주라 하매, 네 천사가 놓였으니 그들은 그 년 월 일 시에 이르러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예비한 자들이더라”

그러니까 이거는 낭떠러지까지 몰아붙인다고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인간들아, 지옥이나 가라. 이 세상의 중심지가 변동이 일어나는 거예요. 중심지를 주님이 인간에게 양보한 적이 없습니다. 중심은 항상 하나님의 이름이 중심이 될 자리에, 인간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죽이고 ‘우리가 이 세상의 중심이다. 중앙이다’라고 이렇게 우기고 있는 겁니다. 그게 바로 민주주의 제도 아닙니까?

땅 있겠다. 인간 있겠다. 우리 세계다. 그건 뭐 상식이죠. ‘여러분, 어디로 가십니까?’라는 그런 질문을 사람들은 안 해요. ‘여러분은 어느 도시에 삽니까? 어디 사십니까? 서울 삽니까? 강원도 사십니까? 전라도 사십니까?’라고 이렇게 묻죠. 그 물음 자체를 주님께서 용납을 안 한 거예요. 너는 지금 어디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대구에 있고, 서울에 있는 게 아니라, 너는 어디로 가는데, 내가 보낼 거야. 내가 작심하고 보낼 거야.

어디로 갑니까? 유브라데로 보낼 거야. 그게 뭡니까? 거기가 바로 쓰레기장이지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모든 복에서 배제되게 하신 장소, 유브라데가 그 장소예요. 거기 가면 너하고 한패가 있을 거다. 누구? 마귀가 한패로 기다리고 있지요. 천사가 집중해서 그쪽으로 밀어붙이지요. 밀어붙인다고요. 천사가 노는 게 아니니까요. 마지막 심판은 천사 담당이니까요.

마태복음 13장 41절에 보면, 추수꾼을 보내서 분간해서 밀어붙인다고요. 지금 이 택함이라는 것이 하나님 관점에서, 하나님 입장에서, 이 택함이라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몰라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어떻게 됩니까?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예요. 이스라엘도 약속의 땅에 오니까, 이게 자기 땅인 줄 알고 착각을 해버리네요. 원래 그 신명기 12장에 보면 그 약속의 땅은요, 이스라엘이 있는 땅이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이 계신 땅이에요.

신명기 12장 5절에 보면,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자기 이름을 두겠다는 거예요. 땅? 인간들 차지가 아니죠. 땅? 누구 차지? 하나님의 이름이, 주의 이름이 차지하는 이게 땅이에요. 그러면 유브라데 강 넘어는 그건 땅도 아니죠. 그건 지옥이 되는 거예요. 땅이라는 그 공간을 통해서 주님께서 천국과 지옥이 어떻게 결정되느냐를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서 바벨론에 보내지면서 그걸 설명해 주는 겁니다.

바벨론이 바벨론 땅에 살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 땅에 용들이 살고 있는, 악마가 살고 있는 거주지가 바로 바벨론이에요. 바벨론 그들은 그냥 이스라엘이라는 소국, 작은 나라를 침범한다고 했잖아요. 작은 나라가 아닙니다. 중심된 나라예요. 택한 나라이고 택한 민족입니다. 성도들에게 이제 문제점이 바로 이런 데 있어요. 자기 자신이 얼마나 고귀한 신분인지를 본인이 망각해요.

본인이 자신에 대해서 개무시하고 있다고요. 굉장히 중요합니다. 나에게 필요해서 주님이 계신 게 아니고, 그건 일반 갓바위의 신이고 우상이고, 주님에게 필요해서 우리로 하여금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을 알게 하시는 거예요. 그게 바로 질투심입니다. 하나님의 질투심이에요. 신명기 5장 9절에,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사랑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질투하는 데서 나옵니다. 사랑은요, 내가 주님한테 사랑받기 위해서 어떤 행동을 하는 게 사랑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하나의 이미 사랑의 대상으로 택하여 놓고, 다른 데서 나를 찜 찍어서 나를 데려가서 그쪽에 관심을 두고 그쪽을 좋아할까봐서, 누가 질투하느냐 하면 미리 찜 찍어 놓은 분이 우리를 질투하는 거예요. 그걸 사랑이라고 하는 거예요. 아주 분노해요.

너는 내 사람이라고 왜 말을 못 해? 내 여자라고 왜 말을 못 해? 이런 식이에요. 질투가 먼저고 사랑은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질투한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면, 일체 하나님께서 나를 믿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네가 똑바로 행동하면 내가 너를 구원할게’라는 이런 하나님이 아니세요. 여러분, 하나님이신 주님이 먼저 찾아왔다는 걸 생각해 보세요.

주님이 먼저 찾아왔어요. 왜 찾아왔냐 하면, 그냥 빈손으로 찾아온 게 아니고 질투심을 가지고 찾아온 거예요. 너는 내 사람이다. 내 사랑의 대상이라는 말이죠. 네게 필요한 거는 네가 몰라. 네가 천국 가기 위해서 네가 뭘 준비해야 할지를 너는 몰라. 우리가 뭐 서울에 간다, 또 일본에 간다고 할 때, 만약 서울로 여행 간다고 하면, 커다란 캐리어(suitcase)에다가 서울에서 2박 할 준비 하면서 다 넣잖아요.

그 넣는 내용물은 누가 골라요? 서울 가는 내가 고르잖아요. 아이들 한복도 집어넣어야 하고 여러 가지를 많이 집어넣는단 말이죠. 그런데 우리가 지금 갈 나라가 유브라데가 아닙니다. 그리고 이스라엘도 아니에요. 지금 우리는 하늘나라 가는 겁니다. 하늘나라에 대해서 뭐 아는 게 있어요? 캐리어에 뭘 집어넣어야 합니까? 우리는 몰라요. 모르니까 주님께서 질투하는 사람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천국 가는 사람으로 적합하게 준비하도록 하시는 거예요.

유브라데로 밀어내고. 유브라데로 밀어내게 되면 이제 이제 마지막으로, 밀어내면 그 안에 뭐가 있습니까? 뭐가 있느냐 하면 피가 있어요. 오늘 본문 35절에 “나와 내 육체에 대한 잔학이 바벨론에 돌아가기를 원한다고” 바벨론아, 용아, 이스라엘이 아니고 나, 주의 이름을 네가 공격했잖아. 그런데 거기서 생긴 게 뭔 줄 알아? 그게 바로 야.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말씀인데요. 마태복음 23장 34~35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이거는 구박받고 피 흘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고 채찍질을 당하는 사람이, 그걸 당했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그들은 지금 주의 이름으로 이런 수모를 당하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어떤 성도가 세상에서 핍박받는다고 해서, 당사자가 핍박받았기 때문에 구원받는 건 아니고, 그들의 핍박의 요인, 그 원인, 그 원인 제공자는 누구냐? 아벨의 죽음의 원인 제공자는 하나님이고, 사가랴가 죽었던 그 원인 제공자는 하나님이십니다.

마찬가지로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핍박을 받게 된 이 세상 자체가, 주의 이름을 겨냥해서 공격하는 용의 세계, 사탄의 세계라는 이 말이에요. 그 사탄의 세계에서 그들은 예수님과 더불어서,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과 더불어서 핍박을 받고 욕을 얻어먹는 겁니다. 그게 바로 이 세상에서 천국으로 가져갈 캐리어(suitcase)에 담길 내용이에요.

그리고 그 천국이 심판하는 중앙지가 중심지가 되는 겁니다. 이 핍박을 받을 때 이것은 지독한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사랑 말고 주님이 생각했던 그 사랑이 지독하게 우리와 우리의 인생을 지배하고 있고, 통솔하고 통제하고 있다는 이것을 사랑으로 느끼면서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과 더불어서 함께 웃고 울고 하지 말게 하옵소서. 달리 보게 하옵소서. 다르게 생각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이 죽었던 이 땅이 어떤 속성을 가지고 있고, 악마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그런 관점에서 지금 우리가 머무는 세상을 다시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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