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하나님의 함정

아빠와 함께 2025. 10. 12. 18:51

하나님의 함정 

2025년 10월 12일          본문 말씀 :  예레미야 50:11-16

50:11 나의 산업을 노략하는 자여 너희가 즐거워하며 기뻐하며 곡식을 가는 송아지 같이 뛰며 힘센 말 같이 울도다

50:12 그러므로 너희의 어미가 온전히 수치를 당하리라 너희를 낳은 자가 치욕을 당하리라 보라 그가 열방의 말째와 광야와 마른 땅과 사막이 될 것이며

50:13 여호와의 진노로 인하여 거민이 없는 온전한 황무지가 될 것이라 바벨론으로 지나는 자마다 그 모든 재앙을 놀라며 비웃으리로다

50:14 바벨론을 둘러 항오를 벌이고 활을 당기는 모든 자여 화살을 아끼지 말고 쏘라 그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니라

50:15 그 사면에서 소리질러 칠지어다 그가 항복하였고 그 보장은 무너졌고 그 성벽은 훼파되었으니 이는 여호와의 보수하시는 것이라 그의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하여 보수하라

50:16 파종하는 자와 추수 때에 낫을 잡은 자를 바벨론에서 끊어버리라 사람들이 그 압박하는 칼을 두려워하여 각기 동족에게로 돌아가며 고향으로 도망하리라

이스라엘과 바벨론의 만남이란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 나라는 그냥 ‘권세 덩어리’입니다. 힘들이 정점에 집결되어 있는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받는 대상입니다. 하나님의 보호 아래에 있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입니다.

오늘 본문이 이 세상 나라의 대표격이 되는 바벨론의 운명에 대해서 예언한 내용입니다. 쉽게 말해서 어느 마을에 큰 부잣집이 있는데 그 집에 네 식구가 살고 있습니다. 어느 날 밤에 온 가적이 출타했다가 교통 사고가 있어서 온 식구가 몰살했습니다. 갑작스럽게 그 부잣집에는 주인이 없어진 셈이 되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 소식을 듣고 무단으로 부잣집 안으로 침입해서 온갖 귀한 귀금속과 호화로운 가구들과 값나가는 물건들을 강탈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되면 며칠 안 가서 그 부잣집은 황량한 몰골을 드러낼 겁니다. 이처럼 강탈이 성립되는 이유는, 사람들에 있어 그 귀한 물건은 탐심의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즉 바벨론 제국은 인간들의 모든 욕망이 구현된 집결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는 그 어느 인간도 이 바벨론 제국을 ‘싫다’할 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또한 모든 인간들이 자의적이고 자발적으로 이끌림을 받아 바벨론 제국의 중력 안에 갇혀 있는 형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벨론 제국에서 못 빠져 나간다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안 빠져나갈려고 혼신의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생의 기쁨과 보람과 즐거움과 행복거리가 다 바벨론 제국이라는 창고 안에 들어 있는 것들입니다. 이는 곧 인간들의 망상한 그 현실 외에는 다른 현실은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에게 있어 망상이고 뭐고 간에 다른 현실 자체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망상의 현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함정으로 사용하십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이방민족과의 전쟁에서 사용하시는 방식입니다. 여호수아 8:19-20에 보면, “그 손을 드는 순간에 복병이 그 처소에서 급히 일어나 성읍에 달려 들어가서 점령하고 곧 성읍에 불을 놓았더라 아이 사람이 뒤를 돌아본즉 그 성읍에 연기가 하늘에 닿은 것이 보이니 이 길로도 저 길로도 도망할 수 없이 되었고 광야로 도망하던 이스라엘 백성은 그 따르던 자에게로 돌이켰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아이성의 입장에서 볼 때, 이스라엘은 비겁한 겁니다. 치졸한 전쟁 방식입니다. 마치 군사들이 몇 명 안되는 것처럼 위장해서 상대방의 건방지게 만드는 방법을 이스라엘이 취한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힘과 힘의 대결로 이해하는 이방민족 자체가 죄가 됩니다.

죄란 자기 안에 찾아온 두려움에 대한 대응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사람들에게 두려움이 발생되는 것에 대해서 인간들은 충분한 권세 확보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넉넉한 권세가 자신에게 안정감을 준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런 마음 자세가 곧 권력에 사로잡힌 모습입니다. 이는 매복작전은 상대방의 우쭐됨을 충분히 이용한 작전입니다.

하지만 이 매복작전을 하나님이 함께 계시지 않는 이방민족이 사용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매목작전을 사전에 알게 만들어주십니다. 역으로 공격하게 만들어버립니다. 그것은 이방민족의 전쟁 목적인 이미 권세 확보로 확정 나 있기에 하나님께서는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십니다.

“때에 아람 왕이 이스라엘로 더불어 싸우며 그 신복들과 의논하여 이르기를 우리가 아무데 아무데 진을 치리라 하였더니 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왕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왕은 삼가 아무 곳으로 지나가지 마소서 아람 사람이 그곳으로 나오나이다 이스라엘 왕이 하나님의 사람의 자기에게 고하여 경계한 곳으로 사람을 보내어 방비하기가 한두 번이 아닌지라

이러므로 아람 왕의 마음이 번뇌하여 그 신복들을 불러 이르되 우리 중에 누가 이스라엘 왕의 내응이 된 것을 내게 고하지 아니하느냐 그 신복 중에 하나가 가로되 우리 주 왕이여 아니로소이다 오직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가 왕이 침실에서 하신 말씀이라도 이스라엘 왕에게 고하나이다”(왕하 6:8-12)

어쨌든 인간은 이 권세를 탐하는 본성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6:12에는,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분명 권세면에 이스라엘은 바벨론 제국 앞에 내놓은 것은 없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세상 나라처럼 권세를 탐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악의 권세 안에 빠지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건드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건드림을 통해서 바벨론은 산산조각 무너지게 됩니다. 이것은 바로 일관되게 하나님께서 택한 민족을 구원하시는 방식입니다.

이 미약한 권세로 인하여 세상 나라에 잡혀버리는 그 절차를 생략하면 안 됩니다. 이 절차에 충실해야 주님의 권세가 세상의 그 어떤 권세의 질과 다르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마태복음 12:28-29, 32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 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즉 성령이 임한다는 것은 주님의 권세 안으로 들어오고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주님의 권세 없이는 앞의 세대에서도 분명히 멸망합니다. 이 성령 안에서는 필히 자기 자신에게 문제 있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떤 환자가 병원에 찾아와서 자기 몸에 여러 군데 아픔을 호소합니다.

손으로 여기도 눌러 저도도 눌러보고, 다리를 눌러보면 다리가 아프고, 가슴을 눌러 보면 가슴이 아프고, 머리도 눌러 보면 머리도 아픕니다. 진찰을 해 본 의사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조언해 줍니다. “환자분은 지금 손가락이 아프군요”라고 말입니다. 우리 자체가 세상의 덫에 빠짐을 아는 것은 구원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절차입니다.

이 절차를 통해서 비로소 왜 주님께서 극한 고통의 순간을 경과해야 되었는지를 압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성도가 힘을 놓고 세상과 정면으로 대결하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75강-예레미야 50장 11~16절(하나님의 함정)251012-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50장 11~16절입니다. 구약성경 1134페이지입니다.

“나의 산업을 노략하는 자여 너희가 즐거워하며 기뻐하며 곡식을 가는 송아지 같이 뛰며 힘센 말 같이 울도다, 그러므로 너희의 어미가 온전히 수치를 당하리라 너희를 낳은 자가 치욕을 당하리라 보라 그가 열방의 말째와 광야와 마른 땅과 사막이 될 것이며, 여호와의 진노로 인하여 거민이 없는 온전한 황무지가 될 것이라 바벨론으로 지나는 자마다 그 모든 재앙을 놀라며 비웃으리로다, 바벨론을 둘러 항오를 벌이고 활을 당기는 모든 자여 화살을 아끼지 말고 쏘라 그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니라, 그 사면에서 소리질러 칠찌어다 그가 항복하였고 그 보장은 무너졌고 그 성벽은 훼파되었으니 이는 여호와의 보수하시는 것이라 그의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하여 보수하라, 파종하는 자와 추수 때에 낫을 잡은 자를 바벨론에서 끊어버리라 사람들이 그 압박하는 칼을 두려워하여 각기 동족에게로 돌아가며 고향으로 도망하리라”

바벨론에 관한 예언입니다. 자기 행한 대로 갚음을 갚아준다는 하나님의 일관된 심판에 대한 하나의 샘플로써, 견본으로써 이 세상에 등장해서, 처참하게 황무지가 되는 그러한 시범자의 위치가 바벨론이라는 겁니다. 요즘 이 바벨론에 대해서 대충 적용되는 나라가 있다면 미국이겠지요. 이 세상에서 최고의 강대국이 현재 미국이라면, 그 당시에는 이 바벨론이 최고의 강대국이었습니다.

강대국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거기에 권세가 집중해서 모여있는 것을 강대국이라고 합니다. 권세와 권력이 집중적으로 모여있을 때, 사람들은 상당히 부러워해요. ‘우리는 언제 저 나라처럼 힘이 세고, 안정적으로 우리의 삶을 보장해 주는 나라가 될까. 그 대구 안에서 있는 국민들은 얼마나 편안하고 안정적인 여생을 살게 될까. 부럽다’라고 이렇게 우리는 이 권세에 대해서 선망하는 그런 본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에서는 그 권세 가진 자를 뭐로 보느냐 하면은 함정에 빠진 걸로 그렇게 간주합니다. 왜냐하면 세상 권세에 집중하다 보니까, 그것을 남하고 비교한다고 하면서 자기 자기보다 못한 권세를 가진 자를 늘 이렇게 내려다보면서 자기 자신을 느긋하고 흐뭇하게 생각하는 거예요. ‘이만하면 됐다. 내 영혼아, 걱정하지 말아라’라고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진짜 권세, 보이지 않는 권세에 대해서 아무런 감각이 없는 겁니다. 그런데 그들을 이 바벨론이 권세, 권세로 이렇게 집중하다 보니까 건들지 말아야 할 대상을 건드렸어요. 하나님의 권세와 직통해서 연결해 있는 유일한 민족, 이스라엘을 건들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어떤 나라입니까?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 지나가면서, 거기에 하나님의 직접적인 관리를 받는 그 증거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들이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보호를 받았던 적이 있는 민족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 관리 대상이 되었던 겁니다.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그런데 바벨론은 그런 기둥과 그 불기둥이 없어요.

없으면서 자꾸 이 권세가 본인의 나라에 집결하고 집중되어 있습니다. 힘이 모여지고 있죠. 바벨론은 이것이 자기가 자꾸 권력이 모여지고 힘이 세니까, 스스로 만족하면서 이게 정상이라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노력한 대가와 보상을 받고 있다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봐도 이 바벨론은 하나님에 의해서 함정에 빠진 걸로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들이 오늘 본문 10절에 보면 “갈대아가 약탈을 당할 것이라”라고 이렇게 돼 있어요. 약탈을 당할 것이다. 그리고 약탈하는 사람만이 만족을 얻을 것이라고 돼 있어요. 뭐 쉬운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떤 부잣집이 있어서, 그 마을의 최고 부잣집인데, 세상에 가장 귀한 보물과 가장 귀한 것들이 그 집에 다 있다는 소문이 있었어요. 그런데 졸지에 그 가족 4명이 놀러 갔다가 갑자기 자동차 사고를 당해서 4명 다 몰살했습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그 부자에 대해서 별로 안 좋은 감정이 있었던 사람들은 슬그머니 어디를 가보느냐. 온 식구 다 사라졌기 때문에 그 집은 분명히 빈 집이라고 여기고 그 집에 가서 지가 원하는 것을 약탈하게 되겠죠. 그러면 그 보물을 빼앗긴 부자나, 그 부자의 보물이 탐나서 당하는 자나, 부잣집이라는 그 장소가 이거는 하나님이 파놓은 함정이고, 함정에 빠진 게 돼요.

‘너 은근히 네 마음속에 하나님의 돌보심보다도 너 스스로 풍족한 삶을 은근히 원하고 있었지, 그지? 그걸 내가 역사적으로 시범을 보여주겠어’라고 이렇게 되는 거예요. 성경에서는 이런 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허상이 비로소 실상을 보여주게 하는 역할을 다했다’라고 그렇게 말합니다. 허상이 또는 인간의 망상이, 권력을 추구하는 그 망상이, 그동안 망상으로 가려져 보이지 않던 실상을 보여주는 그 역할을 하나님께서 함정을 만들어서 다 보여주는 거예요.

여기서 제가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서, ‘좀 이상하다. 이거는 왜 이렇게 했을까?’ 여러분들이 성경을 보면서 아주 어렵게 느껴지는 대목이 있을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매복 작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매복 작전을 하게 만들어요. 여호수아 8장, 사사기 20장, 그리고 사무엘 5장에 그것이 대표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이 세 가지 매복 작전을 제가 지금부터 언급을 해드립니다. 언급하기 전에 이 매복 작전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오늘날 성도로 하여금 이런 이야기를 해주시는 겁니다.‘제발 세상 살면서 좀 비겁하게 살아라. 좀 비겁하게 살아라’ 이 말은 ‘정면으로, 권세 가지고 정면으로 대결하지 마라. 비겁하게 살아라’ 이걸 노골적으로 이야기해서 뭐냐 하면 ‘얍삽하게 살아라’

얍삽하게, 치졸하게. ‘야, 너 좀 용감하게 나서 봐. 누가 힘이 센지, 누가 권세를 많이 모았는지, 누가 돈을 모았는지, 우리 돈 가지고 한번 내기해 볼까, 누가 더 센지?’ 그런 게임은요. 어디서 하느냐 하면은 인간의 망상에서 나온 현실 세계 속에서, 인간들이 권세를 추구하면서 그런 짓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 권세 자랑의 최종점이 누구냐 하면, 바벨론에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함정인 줄, 하나님이 파놓은 함정인 걸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결국 인간 역사의 저 끝장, 인간성의 끝장은 이 세상의 전부가, 이 권세가 다 무너지는 게 그 현상이잖아요. 그 무너짐의 현상을 이스라엘 속에 미리 앞당겨서 이스라엘 속에 집어넣고, 하나님의 마지막 때의 전쟁 양상을 이스라엘 속에 품고, 이스라엘로 하여금 권세에 미쳐있는 세상 나라와 전쟁을 하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매복 작전이 통하는 거예요. 우선 여호수아 8장에 나오는 아이성과 전쟁할 때, 8장 12~13절에 보면, “그가 오천명 가량을 택하여 성읍 서편 벧엘과 아이 사이에 또 매복시키니, 이와 같이 성읍 북편에는 온 군대가 있고 성읍 서편에는 복병이 있었더라”라고 나오죠. 여호수아가 군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예 군대가 없는 것처럼 이렇게 위장해서 전쟁에 나섭니다.

그 군대가 없다는 말은 뭐냐 하면 내가 내세울 변변한 힘이 없다는 말이에요. 남에게 힘이 없는 것으로 보이는 겁니다. 비겁하죠. 아주 치사하지요. 그러니까 누가 우쭐대냐 하면 아이 성이 이제 우쭐댄 거예요. 왜냐 하면 한 번 이겼기 때문에, 삼세판이라는 걸 모르고, 이번에도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고, 온 군대를 동원해서 그 몇 되지도 않는 그 군대를 공격하니까, 매복 해있는 자들이 나와서 성문을 땄어요.

아이성 군대는 나중에 공격하다 보니까 자기 성문이 열리고 성이 불타고 있는 것이 보였어요. 19~20절 보면 “급히 일어나 성읍에 달려 들어가서 점령하고 곧 성읍에 불을 놓았더라, 아이 사람이 뒤를 돌아 본즉 그 성읍에 연기가 하늘에 닿은 것이 보이니” 뭔가 자기들은 용감했어요. 그래서 용감한 것은 선한 일이고 정의로운 일이고 남성다운 일이고, 권세가 있는 이 세상에서 용감해야 살아남는다는 그 객기, 부질없는 오기로 이 세상을 산 자들이 바로 이 불신자들의 세계입니다.

자기 망상에, 자기 욕망에서 나온 망상에 자기가 환장해서 살아가는 겁니다. 그런 것들이, 저는 잘 안 해봤는데, 그런 것들이 어디에서 나오느냐 하면은, 도박, 내기 화투, 내기 골프, 내기 바둑, 그런 곳을 보게 되면, 저는 뭐 현장을 안 봤습니다마는, 폭주하는 거예요. 정신이 폭주하는 거예요. 여러분은, 여러분들이 성도니까 그런 일은 일체 없다고 저는 믿습니다.

상주(경상북도)의 한 경로당에서 할머니들이 10원 내기 화투를 치는데, 한 할머니가 돈을 잃기 시작했죠. 나중에 드디어 폭주합니다. 10원 내기에서, ‘야, 치우고 100원 내기로 가자’그래서 그날 그 할머니는 아들이 준 용돈 10만 원, 다 날아갔어요. ‘현찰 박치기하자’ 해서 10만 원 다 날아갔어요. 이게 폭주하는 겁니다. 내 인생이 내 인생입니까? 우리가 폭주할 권한과 자격이 우리한테 있습니까?

우리한테는 폭주할 권한이 없습니다. 제발 좀 치사하게 사시고요. 좀 비겁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교황이 바티칸에 가면, 거기에 이상한 볼록 소매에 짧은 몸빼바지 비슷한 그런 복장을 한 스위스 용병들이 근위병으로 서 있어요. 2년 동안 근무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원하면 계속 근무를 연장할 수도 있는데, 월급은 한 달에 220만 원 받아요. 제가 알아봤어요.

그런데 스위스에 보통 직장에서 일하면 700~800만 원 사이로 받아요. 그거 치우고 교황에게 봉사한다는 정신으로 220만 원 받고 젊은 청춘을 바칩니다. 그때 그 근위병에게 교황이 하는 중요한 말이 있어요. ‘신입들, 신입이들 다 이리 모여라’라고 해놓고 이런 말을 합니다.

‘여러분들이 있음은 나의 명함입니다. 여러분의 이름은 떼세요. 각자 이름들은 떼세요. 여러분 자신의 이름을 위해서 여기에 보초 서는 거 아닙니다. 교황의 이름을 위해서 섭니다’라는 그런 말을 하면서 사명감을 고취 시킵니다. 우리 성도가 이 땅에 살면서 치사하고 더럽고 진짜 졸장부로 비겁하게 살아가는 거요? 그거 주님의 이름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서 그렇게 살았어요.

에베소서 6장에 보면 우리의 싸움은 사람이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12절) 사람하고 싸울 군번이 아니라는 겁니다. 왜 시시하게 인간하고 싸웁니까? 인간은 권세에 미쳐 환장하는 거예요. ‘내가 끌어모은 권세는 어느 정도인가? 내가 모든 힘으로 나는 얼마나 편안하게 살 수 있는가?’

그것에 인간은 몰두하고 있습니다. ‘권세 좀 밝히면 어떠냐?’라고 사람들은 그렇게 이해해요. ‘내가 나 스스로 편하게 살려고 권세 좀 이렇게 탐을 내면 어떠냐?’라고 이렇게 이해하는데, 모든 범죄는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대응하는 방식이 범죄예요. 왜 죄를 짓는가? 무섭기 때문에 그래요. 권세가 없을까 봐, 내가 용감하고 당당하게 남들 앞에 나설 수 없을까 봐, 상실에 대한 욕구가 자동적으로 나오는 것이 바로 범죄입니다.

‘그러면 뭐, 그렇게 살면 다 교도소 가게’라고 보통 이렇게 이야기하잖아요. 그런데 교도소 안 가도, 인간의 언어, 상실에 대한 욕구를 반영하는 게 인간의 언어예요. 예를 들어서 지금 날씨가 흐리지만, 만약에 개였다고 하면 ‘아, 날씨 좋~다’ 이 말을 글로 쓰면 다 똑같아요. ‘날씨 참 좋다’ 이걸 사랑하는 사람에게 ‘날씨 참~ 좋다’라는 이거 하고 조폭이 길거리에 힘없는 상인들 앞에서 ‘날씨 참 좋다!’라는 이 말은 ‘세금 내라’는 말이죠.

‘날씨 좋은데~ 날씨 꾸리꾸리하면 안 되죠’라는 이거는 협박이죠. 이 모든 범죄는 자기 속에 찾아온 그 두려움, 아 도대체 원인도 모르는 그 두려움을 메꾸기 위해서 남한테 겁박하고, 윽박지르는 식으로 언어를 난사하게 돼 있어요. 뽑아내게 돼 있어요. 그러면 세상에서는 그에 대해서 뭐라고 하느냐. ‘당신은 왜 비겁하게 정면 대결하지 않는가?’

거기에 대해서 답변을 해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세상이 좋아하는 권세에 갇혀있기 때문에 그래요. 갇혔기 때문에 누가 끄집어내 주지 아니하면 우리는 이 권세라는 막강한 협박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게 마태복음 12장에서는 방금 이야기한 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12장 28절부터 보면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한다고 했거든요.

이게 뭐냐 하면, 주님이 정해놓은 절차예요. 구원의 절차를 우리가 정한 게 아니고 주님이 정해놓은 절차입니다. 우리는 그 절차를 따라줘야 해요. 일단 갇히세요. 우리가 스스로 빠져나오지 말고, 예수 믿고 기도해서 빠져나온다고 하지 말고, 일단 갇히세요. 갇히고, 이 권세, 이 악마의 권세, 악령의 권세를 우리는 우리 힘으로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당신이 빠져나왔는지 아닌지, 당신이 뭔데 그렇게 함부로 단정 짓느냐? 단정 짓는 증거는 제가 방금 이야기를 했습니다. 방금 말씀드렸어요. 인간은 말 한마디, 단어 하나에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에요. 이 권세에 대해서 국가 바벨론은 이스라엘을, 구름 기둥과 불기둥을 건드린 게 잘못이에요. 그런데 세상 권세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이것도 뭐 제가 옛날 사람 아니라서 못 봤는데, 드라마나 영화 보면 나오는 거예요. 시어머니가 자기 새댁 며느리를 이렇게 맞이해서 시집살이하는데, 한 25년 동안 살아요. 고추 맵고 뭐 맵다고 하지만 시집살이가 가장 맵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다 살아놓고, 마지막에 시어머니가 그 며느리를 인정할 때 하는 멘트, 말이 있어요.

‘아가야, 이리 오너라’ 하고 뒤에서 뭔가 끄집어냅니다. ‘이게 뭔 줄 아느냐? 어머님 이게 뭡니까? 이게 곳간 열쇠다. 이제 이 집 안에 열쇠를 내가 너한테 인수인계하마’ 여러분, 곳간 열쇠가 뭡니까? 권세 아닙니까? 이게 권세거든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렇지 않아요. 이스라엘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고, 신명기 10장 6절에 보면 이렇게 돼 있어요.

“이스라엘 자손이 브에롯 브네야아간에서 발행하여 모세라에 이르러서는 아론이 거기서 죽고 거기 장사 되었고 그 아들 엘르아살이 그를 이어 제사장의 직임을 행하였으며”라고 이렇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아론이 죽고 난 뒤에 아론의 죽음을 짊어진 그게 뭐냐 하면 옷이에요. 옷. 제사장 옷을 엘르아살한테 입히면 그 아들이 제사장 직위, 직분을 맡아서 계속하게 돼 있습니다.

이거는 권세가 아니에요. 그리고 그 제사장 직분을 멜기세덱의 반열에 따라서 마지막에 누가 오느냐.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뭐냐? 주님이 갖고 있는 그 천국의 열쇠를 우리한테 인수인계하는 거예요. 이게 성령이 오심이에요. 주님이 악마에게 사로잡힌 이것을 열쇠로 열고, 악마 악령에 사로잡힌 우리를 열고, 세상 말로 다시 할게요.

세상 권세에 매몰된 우리를 열쇠로 열고, 그 열쇠를 우리에게 주신다는 이야기가 마태복음 12장 32절에 나옵니다.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주께서 주시는 것은 권세가 아니고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는 거예요.

성령은 예수님의 구원하는 권세입니다. 그 구원하는 권세가 구약에서는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자기 이스라엘을 보호한 거예요. 그러면 마지막으로,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바벨론에 이렇게 패배하도록 했는가. 그게 패배한 게 아니고 매복 작전이었어요. 매복 작전. 패배한 게 아니고 함정에 빠진 거예요. 만만하니까 이스라엘을 삼킨 겁니다.

물론 그때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겨서 만만할 수밖에 없었어요. 뭐 내놓을 게 없었어요. 하지만 우상을 섬기든 뭘 섬기든 하나님의 말씀이, 약속이 있는 백성을 건드렸기 때문에 그들은 매복 작전에 말려든 거예요. 오늘날 우리 성도는 세상적으로, 권세적으로 내세울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세울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세상적으로 말하면 육신은, 우리들도 두려움에 벌벌 떱니다.

‘빨리 아버지 돌아가셔야 하는데, 빨리 우리 어머니 돌아가셔야 하는데, 그래 내가 좀 편하겠는데’라고 벌벌 떨어요. 그게 언어 속에 막 섞여 나오지요. 그러나 좀 치사하게, 좀 비겁하게 삽시다. 이 세상이 살 만한 세상 아니라는 거, 이제 이 일만 해결되면 될 거 같지만 또 다른 일이 또 기다려요. 두려울 일이 또 기다린다고요.

하지만 주께서 넘겨준 열쇠는 이미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 사람과 싸우지 말고, 흉내 내지 말고, 우리는 보이지 않는 마귀가 영적 싸움에서 이미 주님이 함께 우리를 도구로 사용해서, 우리로 하여금 싸우는 거예요. 싸워주시는 겁니다. 이 말씀 하고 마치겠습니다.

어떤 환자가 의사한테 찾아와서, ‘의사 선생님, 이 손으로 눌러보니까 다리도 아프고, 손으로 가슴 누르니까 가슴도 아프고, 손으로 머리 대니까 머리도 아프고, 손으로 팔을 대니까 팔도 아프고, 도대체 내가 어디가 아픕니까?’라고 하니까 그 의사 선생님이 말을 참 제대로 했어요. ‘당신 손가락이 아프네요’

이 아픈 손가락 가지고 이 세상 살려고 하니까, 주님 가신 나라는 생각하지 않고, ‘Yonder’, 저편 세상은 생각 안 하고, 이 땅에서 권세 있는 자가 자꾸 밉대. 자기도 권세 좋아하면서. 바로 우리 안에 성령이 함께 있어서 내가 아프다는 것을 늘 깨우치시는 그것이 주의 말씀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문제가 우리한테 있는데 자꾸 환경만 좋아지기를 바라는 망상 속에 우리가 놓여있지는 않았습니까? 망상 속에서 이 세상이 어떻게 끝장나는 지를 말씀을 통해 알아서, 바람처럼 움직이지만 결국은 주님만 보여주는 주님의 증인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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