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기이한 죄사함

아빠와 함께 2025. 10. 19. 19:43

기이한 죄사함

2025년 10월 19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50:17-20

50:17 이스라엘은 흩어진 양이라 사자들이 그를 따르도다 처음에는 앗수르 왕이 먹었고 다음에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그 뼈를 꺾도다
50:18 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앗수르 왕을 벌한 것 같이 바벨론 왕과 그 땅을 벌하고
50:19 이스라엘을 다시 그 목장으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가 갈멜과 바산에서 먹을 것이며 그 마음이 에브라임과 길르앗 산에서 만족하리라
50:20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 그 때에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찾을지라도 없겠고 유다의 죄를 찾을지라도 발견치 못하리니 이는 내가 나의 남긴 자를 사할 것임이니라

이방민족의 존재는 그들 자체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위하여 있는 것으로 봅니다. 그들 민족과 이스라엘의 차이점은 그들은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죄 용서 받았다’고 경솔하게 나오면 안 됩니다. ‘나 죄 용서 받았다’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너는 죄가 뭐라고 생각하느냐”에 대한 답변이 있어야 합니다. 죄가 뭔지도 모르면서 “죄 용서받았다”고 날뛰는 것이 이방 민족과 조금도 다를 바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바로 이런 입장에 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지적하니 그게 무슨 말인지를 모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름대로 자신의 죄를 안다고 자부합니다. 하지만 정작 하나님께서 염두에 두시고 죄사함을 해주신 그 ‘죄’는 그 어떤 인간도 알지 못하는 개념의 죄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일하심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그 죄에 대해서 죄 사해주시는 작업이 아니라 인간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죄에 대해서 죄사함해 주시는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사항에만 알고 있으면 된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입장에서 보면, 죄를 모르면 모든 것을 전혀 모르는 바가 됩니다. 그 죄의 결과는 필연적으로 멸망이니 인간들은 자신이 멸망하는 이유도 모르면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마치 리튬베터리를 건드린 개 같습니다.

미국의 어느 집에 개는 홀로 남아 놀다가 리튬베터리가 장난감이라도 되는 양 물어 뜯었습니다. 그랬더니 갑자기 폭발이 일어나면서 집안에 불이 났습니다. 다행히 이 광경을 지켜 본 집주인이 소방관이라서 후딱 껐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모든 활동은 리튬 베터리와 같습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점잖고 훌륭한 인격을 지녔다고 자부하면서 세상의 일이나 하나님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분노를 유발하는 일입니다. 하나님만이 아시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에 주제넘게 건방지게 자신이 안다고 끼어드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분노만 살 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자신들이 추구하는 출구 찾기의 유혹이 어떤 것인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소위 ‘출구의 유혹’입니다. 이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벗어나 행복하기 그지없는 세계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출구를 알아보는 시도 말입니다. 기원전 2000년부터 서기 17세기까지 형성했던 마야 문명이 있습니다. 위치는 멕시코 남동부에 있습니다. 차크몰이라는 여신의 제단이 차려지고 거기에는 사람의 심장이 바쳐집니다. 머리부분은 잘라져 계단 아래로 굴렸습니다.

신에게 용서를 비는 행위이자 신의 노여움을 풀어 줌으로써 풍요를 기원하는 제사입니다. 그리고 이 의식은 신의 노여움이 거두워질 때까지 멈추지 않았습니다. 즉 비가 내릴 때까지 계속해서 이어졌습니다. 이 의식을 위하여 펠로타Pelota라는 경우를 합니다. 마야인들의 공놀이입니다.

길이 168m, 폭 70m에 달하는 대형 공간입니다. 높은 벽 위에 링 모양의 구멍을 만들어놓고 그 안으로 공을 넣는 식으로 겨우었습니다. 그런데 이 경기는 그냥 즐기는 게임이 아닙니다. 목숨이 오갈 정도로 치열한 혈투를 벌렸습니다. 그것은 경기가 끝난 후 곧바로 이어지는 제물 의식 때문입니다.

뜨거운 심장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서입니다. 제물로 바쳐지는 이들은 경기에서 패배한 팀이 아닙니다. 마야인들에게 있어 신에게 목숨을 바칠 수 있다는 것은 인생의 최고의 영예로운 일입니다. 따라서 펠로타에서 승리한 팀의 주장 역할을 맡은 사람은 스스로 제물대 위에 올랐습니다. 자신의 튼튼하고 건강한 심장을 신에게 드릴 수 있는다 데 감사한 마음으로 말입니다.

그만큼 이들의 진지하고 성스러움에 참석한 자체를 뿌듯하게 여겼습니다. 진 팀은 불명예스러움을 안고 모두 사형에 처해집니다. 바로 이런 자세로 인하여 그들은 문명은 수 천년간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즉 그들이 이해하는 신은 인간들 마음 속에 품은 신성함을 기꺼이 받아주는 신입니다.

대의를 위하여 자기 한 몸을 바치는 것을 모든 구성원들이 다 경이로움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이런 종교성을 중심으로 하여 그들의 민족은 결집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원하고 있는 지도자상이 이런 겁니다. 자기 한 몸을 바쳐다 다른 이들을 살리는 그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본성이라고 동의합니다.

그런데 이게 악마의 마음입니다. 인간들은 그저 악마가 다루는 AI(인공지능체)에 불과합니다. 오늘날 AI가 사람들의 그동안 모아놓은 정보나 자료의 뭉치라면 인간 자체가 악마가 그동안 인간들에게 안겨준 지혜대로 움직여 온 겁니다. 이게 가능한 것은 인간들에게 진리란 그저 ‘살고 싶은 것’입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히 2:14-15)

즉 내가 살고 싶으니까 누구 대단한 신성함을 지닌 자가 내 대신 고생하고 희생해서 나를 평온하게 만들어주면 좋겠다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0장에서 다른 방식으로 자기 양을 모으십니다. 인간들이 찾는 출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출구입니다.

그 출구됨을 나타나면서 비로소 ‘죄’와 ‘죄사함’이 새롭게 전달됩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자신만이 아는 죄와 그 해결을 위하여 스스로 죽으신 겁니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 10:18)

따라서 이 ‘스스로’의 능력이 활동하면서 자신의 양을 모집하십니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요 10:3-5)

조건이 맞아야 구원됩니다. 이 조건에 대해서 인간은 아무도 아는 바 없습니다. 성도는 말입니다. “나는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받았느니라” 이 사랑이 성도 주변에 기이함을 낳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죄사함에 대해 일체 나의 행함이 들어가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76강-예레미야 50장 17~20절(기이한 죄사함)251019-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50장 17~20절입니다. 구약성경 1135페이지입니다.

“이스라엘은 흩어진 양이라 사자들이 그를 따르도다 처음에는 앗수르 왕이 먹었고 다음에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그 뼈를 꺾도다, 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앗수르 왕을 벌한 것 같이 바벨론 왕과 그 땅을 벌하고, 이스라엘을 다시 그 목장으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가 갈멜과 바산에서 먹을 것이며 그 마음이 에브라임과 길르앗산에서 만족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 그 때에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찾을찌라도 없겠고 유다의 죄를 찾을찌라도 발견치 못하리니 이는 내가 나의 남긴 자를 사할 것임이니라”

이 본문을 보면서 사람들은 자기가 죄를 용서받은 사람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나, 죄 용서받았다. 나는 그런 존재다’라는 것이 아니라, “네가 죄가 뭔지 알기는 아냐?”라는 그걸 묻는 겁니다. 죄 용서라는 그 결과보다도, 몰랐던 죄를 새롭게 발견하게 된 기쁨, 그것이 죄를 용서받은 자에게만 주어지는 혜택입니다.

여기에 세 민족이 나오는데, 앗수르, 바벨론, 그리고 이스라엘. 이스라엘을 유다와 같이 보게 되면 여기에 세 민족이 이렇게 형성되어 있습니다. 바벨론과 앗수르는 동일한 민족으로 봐야 합니다. 왜냐 하면, 그들은 이스라엘을 징벌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치기 위해서 준비된 몽둥이에 해당됩니다.

그러면 바벨론과 앗수르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고, 이스라엘(유다)을 제대로인 이스라엘이 되게 하려고 동원된 그러한 막대기라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본문을 보는 이스라엘은 얼마나 희망을 크게 생각하겠습니까. ‘역시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을 줄 알았지. 고생은 고생대로 했지만, 고생은 그만한 효과를 우리에게 제공하는 거야. 정말 하나님께 감사합니다’라고 생각하는데,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네가 죄를 지어서 벌 받았냐?” ‘예, 죄지어서 벌 받았습니다’라고 이스라엘이 대답하면, “그 죄가 뭐지? 죄가 뭔데?”라고 하면 또 몰라요. 벌은 받았는데, 무슨 죄 때문에 받은 벌인지를, 벌은 받으면서도 자기 마음에 고생이 좀 덜하고 이제는 살만하다는 그곳으로 곧장 돌아서 버립니다. 이게 바로 갇힌 자의 문제점이에요.

자유를 잃어버린 자의 문제점은, ‘내가 여기서 벗어나기만 하면, 내가 마음껏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리라’라고 하는데, 왜 잡혀있는지, 왜 갇혔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전혀 모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죠. 우리가 죄에 갇혀있는 이유는 우리가 천국 조건에 부합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가 멀쩡하다고 수영장에 수영하러 간다.

그런데 멀쩡하게 수영하려고 들어가니까, 그 수영장 관리하는 사람이 풀(pool)장으로 못 들어가게 합니다. “들어가지 마세요” ‘왜요?’ “당신은 수영복을 안 입었습니다” ‘나는 훌륭한 사람이에요’ “여기는 훌륭한 것과 아무 관계 없습니다” 정말로 죄는, 그리고 죄뿐만 아니고 용서도, 제가 분명히 단언합니다,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분명히, 지금까지 여러분이 복음을 하면서 이 점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죄, 의, 천국, 구원, 이런 게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거예요. 주님의 일이지 나의 일이 아닌 겁니다. 그걸 추수(秋收)라고 하는 겁니다. 추수 안 되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어요. 그러나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추수할 사람을 주님이 아시지, ‘나 추수되고 싶어요’라는 것은 지금 착각하고 오해하는 겁니다.

모든 것이 주의 일이지 나의 일은 없습니다. 해외 토픽에 보니까, 얼마 전에 미국에서 일어난 일인데, 제가 많은 것을 느꼈어요. 집에 갑자기 불이 났습니다. 안에 장착된 CCTV를 틀어보니까, 불이 난 이유가 개 때문에 불이 났는데, 개가 리튬배터리를 장난감이나 먹잇감이나 되는 줄 알고 물어뜯었어요. 물어뜯으니까 리튬배터리가 폭발해서 개는 화들짝 놀라서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그것을 우연히 지켜봤던 집주인이 마침 소방관이었어요.

그 소방관이 자기 집 불난 것을 알고 와서 불을 껐어요. 그것을 보고서 제가 느낀 것은 그겁니다. 리튬 배터리는 개가 건드리나, 고양이가 건드리나, 인간이 건드리나, 전혀 그걸 묻지 않는다는 겁니다. 누구든지 무슨 물건이든지, 리튬배터리를 건드리면 폭발해요. 리튬배터리처럼 주님의 언약을 건드리면, 그냥 폭발해 버려요.

‘이건 죄니까 죄지으면 하나님이 화를 내겠지’라고 하는데, 아닙니다. 인간은 죄가 뭔지를 몰라요. 내가 뭐를 건드리면 주께서 화내는지도 인간은 모릅니다. 알 수 없어요. 그 이유가 인간 자체가 주의 뜻에 막혀있기에 그렇습니다. 막혀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내가 나중에 내 백성, 내 남긴 자를 데려온다. 이스라엘을 내가 돌아오게 하고, 돌아오게 하는데, 17절에 보면 그걸 양(sheep)이라고 되어 있어요.

16절에 “각기 동족에게로 돌아가며 고향으로 도망하리라”라고 하면서 17절에 보면, “이스라엘은 흩어진 양이라”라고 나오는데, 자기 양을 데리고 올 때, 온다는 이 말씀을 이스라엘이 듣게 되면, 자기는 양이 되고 싶죠. 그것도 돌아온 양, 그리고 주님이 죄 사함을 해 준, 죄악을 찾을지라도 없다고 했으니까, 죄 사함을 받은 양이 되고 싶을 거예요.

그러나 이 대목을 보면서, 그 당시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생각합니다. 출발지와 도착 지점을 자기가 나름대로 정리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인간은 어떤 유혹이 있느냐 하면, 이게 출구의 유혹이 있습니다. 출구의 유혹. 지금 힘든 인생에서, 이 난처한 지경에서 다시 내가 이것을 벗어나면 행복이 기다릴 것 같은, 나의 번영과 나의 기쁨을 주는 그런 세계가 있을 것같은 그러한 유혹이 있어요.

그래서 지금 여기 힘든 인생과 행복이라는 그쪽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출구를 내가 찾기만 한다면, 나는 내 인생 성공한 것이라는 그런 생각, 저는 그것을 뭐라고 보느냐면, 유혹(誘惑)이라고 봅니다. 이게 사탄의 유혹이고 악마의 유혹이에요. 인간은 악마가 다루는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이고 인간이 기계예요. 이미 인간은 누가 시키는 대로만 움직이는 겁니다.

인공지능(AI)이 뭐냐 하면, 인간이 준 자료를 집대성한 것이 인공지능이잖아요. 악마가 준 모든 생각이 차곡차곡 집대성된 것이 인간이고, 인간은 악마의 앞잡이고, 그래서 악마가 시키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에요. 어떤 자율, 자유라는 이것은 인간에게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희망이 있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이 있는 세계로의 탈출을 시도하게 됩니다.

그런데 제가 아까 이야기했듯이, 여기 성경 말씀대로 한다면, 죄를 사한다고 하는데, 문제는 죄가 뭔지도 모른 채, 자기 신세 편한 것만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것, 이것이 잘못된 겁니다. 제가 예를 하나 드릴테니까, 여러분이 한번 생각해 보세요.

다음 셋 중에서 누가 평안한지 한번 보세요.
첫 번째, 총을 든 자가 평안하다.
두 번째, 총이 없는 자가 평안하다.
세 번째, 총 든 사람 옆에 있는 게 평안하다.

사람은 어느 게 제일 평안할까요? 든든한 보디가드가 있는 것이 평안하겠죠. 왜냐하면 총을 쏘면 내가 안 저질렀어요. 하지만 혜택은 내가 받아요. 맞아요. 우리의 평안과 안식은 예수님 때문에 평안한 건 맞아요. 근데 예수님이 누구냐를 알려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준 죄부터 알아야 해요. 문제는 이겁니다. 인간은 죄에 대해서 모르는데, 죄에 대해서 아시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그러면 일단은 예수님 본인은 죄를 어떻게 알았고, 두 번째는 그 죄를 어떻게 본인이 떠안았고, 세 번째는 어떻게 그 죄에서 출구를 발견했는가, 탈출했는가 하는 이거는 순전히 인간의 문제가 아니고 예수님 본인의 문제이고 아버지와 아들의 문제예요. 성경 볼 때 거기에다가 집중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그 죄를 탈출했는가. 이것은 창세기 1장에서 보면 이 세상은 혼돈돼 있습니다.

혼돈된 것에 대해서 질서를 잡기 위해서 하나님은 아들을 이 땅에 보내었습니다. 그런데 그 질서라고 하는 것은 어디서 나온 질서냐 하면, 실패를 떠안은 질서예요. 실패를 당연한 걸로 받아들이는 데서 오는 질서입니다. 그게 바로 리셋(reset)이에요. 재설정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간단해요. 성도가 예수님이 알고 있는 죄를 같이 안다는 것은, 우리는 매일 같이 실패의 실패를 반복해서, 매일 같이 리셋되고 리셋되고 리셋되고, 날마다 말씀으로 새롭게 주님의 은혜로 리셋되는 그 모습으로써 우리는 주님이 알았던 그 죄를 알죠.

주님이 알았던 그 죄만 알면 우리는 평온합니다. 왜냐 그 죄는 내가 노력해서 아는 게 아니라 바로 총을 쥔 분, 죄 문제를, 죄 사함을 해결했던 그 분의 하신 일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는 그 옆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이거 말로 하면 여러분 다 아는 이야기라고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렇다면 인간으로서 이런 성경을 모르는 다른 이방 민족 출구의 유혹을 어떤 식으로 느꼈는지 제가 예를 하나 들 테니까, 이 예를 들으시고 우리에게는 제가 예를 드는 이 민족의 그 심보가 없는지 있는지를, 여러분들이 스스로 한번 체크를 해 보시길 바랍니다.

기원전 2천 년부터 17세기까지, 그러니까 서기 16세기까지 현재 멕시코 남부에 거주했던 민족이 있습니다. 마야 민족입니다. 그 마야 민족이 출구를 만들기 위해서 그들이 제사를 드리는데, 차크몰((chacmol-마야의 비의 신)이라는 여신 앞에 제사를 드렸습니다. 차크몰을 위한 제단을 만들고, 그 제단을 이렇게 쌓고 난 뒤에, 사람의 심장을 바칩니다.

사람의 심장을 바치고, 심장 빼놓고 나머지는 쓸데없잖아요. 목 위부터 얼굴 부분, 이런 것. 지금도 그곳에 재단이 높은 피라미드식으로 계단 위에 있는데, 멕시코 당국에서 지금은 계단을 못 올라가게 하고 있어요. 그 계단 아래로 인간의 심장을 바친 자의 쓸데없는 그 몸뚱아리와 얼굴을 밑으로 다 굴려서 버립니다. 왜? 심장만 받으니까.

왜 그렇게 하느냐. 그래야 신의 노여움을 풀고 다시 풍요로운 기후를 우리 마야 민족에게 제공한다는 거예요. 좀 끔찍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끔찍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고, 이게 신이 주신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작은 것 하나 희생해서 나머지 모든 사람을 살리는 이것이 신의 뜻이라고 본 거죠.

자, 그러면 여러분 생각에는 ‘야, 그 심장 바친 사람은 참 재수 더럽게도 없다. 어떻게 그 젊은 나이에 그 심장을 바치고, 그 가족들을 얼마나 비통하고 애통하겠느냐’라고 여러분 그렇게 생각되죠. 그렇지 않습니다. 심장 바칠 그 남자를 정하기 위한 게임에 들어갑니다. 그 게임의 장소가 지금도 마야 유적에 보면 있어요.

그게 펠로타(pelota) 게임인데요. 펠로타 게임에서 두 팀이 죽으라고 그 게임을 합니다. 어떤 게임을 하느냐 하면, 공을 가지고 하는데, 보통 축구 골대는 평지에다가 사각 모양으로 해서 뒤에 그물망을 설치하고 그 안으로 공이 들어가면 골인이잖아요. 그 펠로타 게임에서는 벽 위에, 반지 모양으로 동그란 모양을 한 돌을 높이 달아놨어요.

그 돌 안으로 공을 먼저 통과시킨 팀이 이깁니다. 그게 펠로타 게임이에요. 죽으라고 그 게임을 결사적으로 이기려고 하는 이유가, 이게 여기서 지면 내 심장 날아가니까 그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입니다. 이긴 팀의 주장이 영광스럽게도 자기 심장을 차크몰 여신에게 바칠 수 있습니다. 이거 미친 거 아니에요?

진짜 이건 완전히 미친 거예요. 여러분이 지금 생각하면 미친 거라고 하지만, 그 당시 사람, 그 당시 마야 문명에서는 미친 게 아니고요, 진지해요. 성스럽고 진지합니다. 왜? 네 한 몸 바쳐서, 이 몸 바쳐서, 논개도 아니고, 몸 바쳐서 우리 민족이 가뭄에 들지 않고 후손들을 풍요롭게 하는 이 영광국 거룩산의 이 위기의 시점에, 신에게 하나의 전령이 된다는 그 영광스러움.

내가 희생물이 된다는 그 영광스러운 그 명예,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 그것도 아무나 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 펠로타라는 게임 일종의 축구나 럭비 비슷한 게임에서 이겨서, 주장이 심장을 바칩니다. 현재 경기장이 남아 있는데, 길이가 168m, 폭이 70m예요. 이긴 팀의 주장이 돼야만 신에게 바칠 제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 팀은 어떠냐? 진 팀은 신에 의해서 졌다는 뜻으로 몽땅 사형시킵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고. 그렇다면 그 펠로타 게임에 참석하는 선수들의 마음가짐은 어떠냐. 가능성이 있어요. 심장을 바칠 가능성 때문에 그들은 그 선수로 뽑힌 것만 해도 굉장히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쉽게 말해서 국회의원 떨어져도, 입후보한 것만 해도, 우리 집안의 영광이 되는 거하고 똑같은 거예요. 왜 그 문화가 일시적인 게 아니고 수천 년 동안 내려오는가. 이겁니다.현대 정치인들이 배워야 해요. 민족의 지도자는 이래야 합당하다는 거예요. 술 먹으려고 군함 7척 동원하는 그게 지도자의 자세가 아니고, 지도자 자신은, ‘보라, 여러분 잘살기 위해서 나는 이렇게 신의 뜻으로 장렬하게 죽노라. 좀 말리지 말라.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라는 이거.

그야말로 이순신 장군 같은 자세가 마야 문화를 그렇게 오랫동안, 수천 년 동안 이어오게 한 것은 바로 보이는 메시아를, 희생물을, 짐승이 아니고 다들 귀하게 여기는 자기 목숨을 그 차크몰 여신의 제단 앞에 바쳤다는 거. 이 이방 민족의 종교를 보고 뭔가 배울 점 없습니까? 여러분의 가정은 어떻게 다 안녕하십니까? 그렇게 살아갑니까?

하나의 가정, 어떤 교회 집단, 국가 속에서, 인간들이 바보 같지만, 그들 속에 이러한 차크몰 여신에 비례하는 그 정신이, 영적 정신이 들어 있어요. 변변치 않은 우리를 위해서 대신 몸 바쳐 준다면, 우리는 아주 고맙게 여기고 대대로 그 가문에 대해서, 그 영광에 대해서, 기리 칭찬할, 존경할 용의가 되어 있습니다. 그게 인간의 마음속에 신성이라는 이름으로, 거룩한 마음으로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숭고한 악마의 마음이에요. 숭고한 악마의 마음. 쉽게 말해서 이런 겁니다. 출구의 유혹. 출발점과 도착 지점은 이미 인간들이 악마의 마음으로 정해 놓았어요.그런데 주님께서는 그걸 뒤집어 버립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리튬배터리이기 때문에. 그게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3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여러분, 출구의 유혹이라는 게 악마로부터 와서 우리 속에 누구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합시다. 누구든지 뭔가를 상상해서 끄집어내는 거예요.

젊은 사람이든, 20대든, 30대든, 과거의 모든 고전 문학에 나오고, 영화 드라마에 나오는 모든 것은 위대한 영웅이 희생해서 우리는 그 덕을 본다는 거, 이게 악마로부터 나온 거예요.그러니까 이게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과 바리새인에게도 예외가 아니에요. 그들도 나름대로 출구의 유혹을 갖고 있습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메시아의 용감한 행위로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들은 그런 아이디어 자체가 악마로부터 온 죄라는 사실을 그들은 몰랐던 겁니다.요한복음 10장 3절에 보면 이렇게 돼 있습니다. 1절부터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거는 인간이 생각한 입구와 출구, 그 출구와 입국 사이에 있던 경로 자체를, 모든 것을, 주님께서는 인간의 생각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그 생각과 접합되지 않는, 공통점이 없는 방식으로 주께서 일하십니다. 왜냐하면 리셋되어야 하니까. 이 혼란에서 생각 못 한 새로운 질서를 주께서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주님께서는 인간의 허점을, 악마의 허점을 알아요.

그들은 뭐냐? 살고 싶다는 거예요. 출구고 입구고 간에, 그들 인간의 숨길 수 없는 본성은 살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요한복음 10장에서 주님이 친히 문지기가 되시고 목자가 되셨는데, 이 목자의 특징은 여러분 잘 알다시피 10장 15~17절에 보면,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목숨을 얻기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고 할 때, 이 목숨은 우리 목숨이 아니고 주님 자신의 목숨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백 번, 천 번 목숨 잃어도 새로 얻어봐야 그건 생명 아닙니다.그거는 마귀가 우리를 속인 거예요. 진짜 생명은 우리가 살고자 하는 데서는 상상도 못 하고 예상도 못 한 예수님의 목숨이 우리에게 들어와야 우리는 영생을 얻는 겁니다.

이 예수님 목숨에 대해서는 어떻게 표현할 길이 없어요. 왜? 우리는 항상 우리 목숨에 매여 있기 때문에. 우리 집에 냉장고는 은혜의 냉장고예요. 왜냐 하면은 아내가 사지 않은 것은 일체 못 들어갑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살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예수를 믿는다든지, 죄 용서를 받아들이는 것은, 주님은 은혜의 냉장고이기 때문에 그걸 받지 않습니다. 받지 않아요.

마지막으로 이거 예로 들고 마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육지와 연락은 되는데 무인도에 갇힌 꼴이 되었어요. 연락은 되니까, 무인도에서 무선으로 해서, 바깥 육지에 자기 은행 잔고가 있는데, 그 돈을 줄 테니까 구조해달라고 요청을 보냈어요. 무인도에 갇혀서. 그 돈 다 줬는데 구조 온다고 했는데, 아무도 안 왔습니다.

이게 인간의 신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돈을 지불하고, 우리가 구원 요청을 했기 때문에, 전부 다 돈만 챙기고, 더구나 구원할 재주도 없고, 우리는 출구의 유혹은 있지만 출고될 길은 없습니다. 그러면 주님의 방법은 뭐냐. ‘나는 사랑한다’가 아니라 ‘나는 사랑을 받았다’라는 사람으로 리셋하는 것, 이걸 재설정하는 거예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싶다’라는 그거 죄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기이하게도 ‘나는 이미 사랑을 받았다’라는 거, 그러면 그것은 내 쪽의 것이 이런 결과를 낳는데 모든 것이 연결이 안 돼요. 연결될 수가 없습니다. 그게 바로 요한복음 6장에서 말한 예수님이 주신 생명이에요.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40절) 라고 돼 있거든요.

요한복음 17장에는 그렇게 돼 있고 6장도 마찬가지고. 그러니까 마지막 제가 하실 말씀은 여러분이 하루하루 살면서 제발 기이한 것을 좀 찾으시길 바랍니다. 내가 하지도 않았는데 일어난 일을 한번 찾아보세요. 의외로 많습니다. 굉장히 많아요.

이게 ‘나는 사랑받고 싶다’가 아니라 그냥 ‘이런 사랑을 받고 있구나’라는 걸 알 때, 그 사람이 예수님이 말한, 이미 출구를 벗어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성경 말씀 그대로, 오늘 말씀 그대로 이루어진, 내 백성을 죄 용서 이미 받은 자로 만드는 작업은, 우리 일이 아니었고 주님의 일이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알게 하옵소서. 우리가 얼마나 음흉하고, 하나님께 노리는 바도 많고, 요령 피우고, 나의 이익이 된다면 무엇이라도 다 하는, 그러한 이방인에 불과한 것을 깨닫게 해 주시고, 이미 사랑받은 자의 입장에서, 이 귀한 사랑 입장에서, 바로 그런 것들이 죄였음을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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