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대리모

아빠와 함께 2025. 10. 5. 16:17

대리모  

2025년 10월 5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50:4-7

50:4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 그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오며 그와 함께 유다 자손이 돌아오되 그들이 울며 그 길을 행하며 그 하나님 여호와께 구할 것이며
50:5 그들이 그 얼굴을 시온으로 향하여 그 길을 물으며 말하기를 너희는 오라 잊어 버리지 아니할 영영한 언약으로 여호와와 연합하자 하리라
50:6 내 백성은 잃어 버린 양떼로다 그 목자들이 그들을 곁길로 가게하여 산으로 돌이키게 하였으므로 그들이 산에서 작은 산으로 돌아다니며 쉴 곳을 잊었도다
50:7 그들을 만나는 자들은 그들을 삼키며 그 대적은 말하기를 그들은 여호와 곧 의로운 처소시며 그 열조의 소망이신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인즉 우리는 무죄하다 하였느니라

사람 대 사람의 관계가 위험하고 위태롭습니다. 그것은 타인을 만나면서 자기에게 유리한 면을 바깥으로 드러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자부했습니다. 설마 하나님께서 우리를 멸망하도록 방치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맞이할 역사는 처참했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은 절규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양’이라든지, ‘목자’라는 단어는 이스라엘에게 참으로 익숙한 단어들이고 개념들이었습니다. 이 개념을 받아들이면서 이스라엘은 자기쪽으로 유리하게 적용될 것이라고 짐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은 완전히 어긋났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돌아온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돌아온다’가 성립되려면, 여전히 이스라엘과 하나님 관계가 안 끊어지고 이어졌을 때나 가능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입장에서 보면 처참하고 이방민족에 의해서 할 수 있는 극한치의 말살이 벌어진 겁니다. 도저히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회생 불가 수준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원래 여호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양’과 ‘목자’ 수준은 그 과정을 겪여야 합니다. 바로 이점을 이스라엘 입장에서 납득이 되지 않는 겁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준수하면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에 합류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것이 인간들 입장에서 극히 정상적으로 보입니다.

즉 인간에게 옳고 그른 일 정도도 인간이 구분할 줄 알았던 겁니다. 선과 악 정도는 알아서 행하고 피할 것은 피할 줄도 해낼 줄 알았습니다. 자신의 선한 행함으로 하나님과의 합류가 성사되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양으로 인정해줄 줄 알았던 겁니다. 하지만 이것이 오해했던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대적’까지 동원시키십니다. 하나님의 적들을 동원시켜서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 철저히 망하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본디 하나님이 원하시는 ‘양’과 ‘목자’ 개념에 대해서 이스라엘이 아는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자신이 하나님께서 지시한 ‘옛 언약’ 범주 안에 갇혀 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옛 언약’을 알려면 ‘새 언약’의 등장으로만 성립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멸망토록 하시고 난 뒤, 비로소 ‘새 언약 시대’를 여십니다. 예레미야 31:29-33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 때에 그들이 다시는 이르기를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 하지 아니하겠고

신 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 이가 심 같이 각기 자기 죄악으로만 죽으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즉 하나님께서는 개인들이 각자 마음 속에 지니고 있는 원리의 한계를 들추어내십니다. 내가 행한 것으로 타인을 살려낼 수 없습니다. 이는 곧 더나아가 내가 행한 것으로 타인마저 살려내 방식의 새로운 언약이 준비되어 있다는 겁니다. Surrogate Mother, 곧 ‘대리모’의 원리가 새 언약에 담겨 있습니다. 

기존의 선과 악의 판단, 소위 ‘양심’에 준해서 천국과 지옥을 따지는 그 원칙을 부정하는 언약입니다. 선과 악을 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겁니다.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찾으면서 여전히 선과 악을 아는 지식에 준해서 관계를 맺고자 한 겁니다. 이러한 인간 쪽에서 시도 자체를 하나님께서 거부하십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언약이란 선과 악에 준해서 내세우는 인간들의 판단을 대리모 입장에서 받아내는 방식을 작용시키십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혹독한 서러움과 절망에 빠져도 끝까지 붙들고 있는 바는 바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음’입니다. 이런 생각마저 녹여 없애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간들은 자꾸만 자신이 가짜인줄 모르고 그 가짜 자아를 버릴 생각을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따로 준비해두신 다른 자아를 모르고 있습니다. 가짜를 진짜와 연결시키고 결합시키는 능력은 ‘새언약’을 홀로 이루어내시는 주님 외에는 없습니다. 주님의 이러한 실시로 인하여 인간들은 ‘새로운 타인관계’에 놓이게 됩니다.

주님과의 새로운 관계인 겁니다. ‘양과 목자’의 관계입니다. 그동안 이스라엘에 있었던 소위 목자들은 새로운 방식으로 구원해내시는 주님과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지 않았기에 양을 자신 쪽으로 돌려서 소유하려 했습니다. 따라서 양들은 당연히 길을 잃어버린 겁니다. 양도 문제가 엄청납니다.
주님쪽으로 온다고 하면서 여전히 자기 잘남을 포기할 줄도 모르고 자신이 가짜 양이라는 사실을 알지를 못했습니다. 주님께서 자기 양의 죄를 자기쪽으로 흡수하고 자신의 운명에 통합시켰습니다. 이렇게 되면 목자에 의해서 발생되는 새로운 양들이 생산됩니다. 사도행전 2:21에 보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10:12-13에 보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속설에 의하면 타인의 명찰을 챙기는 자는 언젠가는 그 명찰의 주인공으로부터 사랑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그동안 인간들의 ‘자기 이름’에 목숨 걸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이름말고 주의 이름에 준해서,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사는 자로 바뀌어지는 것이 새언약의 효과요 능력입니다. 더는 자신이 행한 선과 악을 판단에 의해서 자신의 구원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자아는 주님의 이름으로 이미 만들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하여 여전히 자신의 이름에 입각해서 행위에 나서는 모든 것은 주님의 이름에 의해서 파괴당합니다. 성도도 수시로 자기 자신에게 실망하고 때로는 세상을 원망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것마저 새언약 안에서 일어나는 당연하고 정당한 현상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74강-예레미야 50장 4~7절(대리모)251005-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50장 4~7절입니다. 구약성경 1134페이지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 그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오며 그와 함께 유다 자손이 돌아오되 그들이 울며 그 길을 행하며 그 하나님 여호와께 구할 것이며, 그들이 그 얼굴을 시온으로 향하여 그 길을 물으며 말하기를 너희는 오라 잊어버리지 아니할 영영한 언약으로 여호와와 연합하자 하리라, 내 백성은 잃어버린 양떼로다 그 목자들이 그들을 곁길로 가게 하여 산으로 돌이키게 하였으므로 그들이 산에서 작은 산으로 돌아다니며 쉴 곳을 잊었도다, 그들을 만나는 자들은 그들을 삼키며 그 대적은 말하기를 그들은 여호와 곧 의로운 처소시며 그 열조의 소망이신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인즉 우리는 무죄하다 하였느니라”

방금 읽었던 이 내용을 파악하려면, 전체 위에서 내려다보는 구조를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돌아온다는 말은 자기 인생을 열심히 살면 되는 그런 인생이 아니고, 어느 이쪽에서 이곳으로 방향을 정해서 그쪽에 집합해야, 그것이 잘산다는, 제대로 산다는 겁니다. 돌아온다는 말은, 이곳은 떠나야 하고 저쪽은 거기에 도달해야 할 지점이 하나님에 의해서 이미 지정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 지정된 입장에서 주께서 먼저 가 계시면, 돌아오라는 이 원칙이 성립이 됩니다. 그런데 주께서 지정된 장소도 모르고 주님도 모르게 되면, 뭐가 성립이 안 되느냐 하면, 굳이 돌아오라는 것이 성립이 안 됩니다. 내 인생이니 내가 그냥 살면 되지, 어느 이쪽에서 어느 이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갈 이유가 전혀 성립되지 않는 겁니다.

한국의 학교 교육에서 가르치는 지침은 이렇습니다. ‘네 인생을 네가 독자적으로 독립해서 자아의식을 가지고 사세요’라는 이거예요. 왜냐 하면,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모든 주권은 인민에게서 나오거든요. ‘주권은 인민에게서 나와서 인민에게로 돌아간다’라는 이게 민주주의입니다. 민주주의라 하는 것은 내가 나에게 돌아오면 됩니다.

나에게로 돌아오면서 우리는 남들을 만날 때 항상 이런 이야기 합니다. ‘나는 이렇게 살았습니다. 나는 이렇게 열심히 살았습니다. 어떻습니까? 나는 내 방식대로 살았습니다’ My Way! 나는 내 방식대로 살았습니다. 잘했지요? 그게 자기에게 해답이 되어버려요. 인생에서. 너는 너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살고, 너는 네 팔 흔들고 나는 내 팔 흔들고. 내가 번 돈 내가 쓰는데, 네가 왜?

이런 식으로 학교 교육이 이루어진다면, 성경에서는 네 자리, 네가 생각한 그 자리 말고 오히려 그 자리를 떠나라는 겁니다. 떠나고 하나님이 너를 만나기 위한 만남의 장소가 따로 있는데, 그쪽으로 돌아오라고 이렇게 되는 겁니다. ‘Come back, home!’ 돌아갈 집이 있어야 한다는 거죠. 그러면 돌아가려면 여기로 돌아가라고 누가 그걸 이끌어 줘야 되느냐 하면은 여기에 목자가 있어야 돼요.

본문 6절에 보면 “내 백성은 잃어버린 양 떼로다” 양 떼는 반드시 목자가 있잖아요. 근데 “양 떼로다”라는 말씀 그 뒤에 “그 목자들이”라고 목자가 나와요. 목자가 하나님께서 기다리는 그 장소로 양들을 몰고 가야 하고, 데려가야 하는데, 이 목자 자체가 이게 전부 다 사기꾼들입니다. 목자가 사기꾼들이라서 그들은 양 자체가 탐이 나기 때문에 내 양이 되지 않으면 그들은 화를 내는 자들이에요.

어떤 양이 있는데 그 양이 내 양이 아니고 주님의 양이라면, ‘주님 저기 계십니다. 저쪽으로 가세요’라고 이러면 될 텐데 주님을 알려주지 않고 자신의 목자 됨을 알려주면서, ‘내 말 잘 들어야 당신은 구원받습니다’라는 이런 쪽으로, 목자가 자기 쪽으로 방향을 휙 틀어서 자기한테 신경 쓰도록 그렇게 만든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하나님께서 누구를 보냈느냐 하면은 여기 7절에 나와요.
“그들을 만나는 자들은 그들을 삼키며 그 대적은 말하기를”

여기 대적이 나와요. 대적이 나와서 하나님께서 양들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는 방법을, 목자 보내서 자기 쪽으로 당기는 그 프로젝트, 그 작업을 취소하시고 이번에는 생각도 못 한 하나님의 적을 보내 가지고 적들로 하여금 양들이 완전히 좌절하고, 파괴되도록, 주저앉도록 만드는 방법을 사용했어요. 하나님께 복을 받기 위해서 왔다가 오히려 하나님이 보낸 적에 의해서 복은커녕 좌절 속에 빠지는 방법을 누가 사용하신다?

적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자기 양들을 새롭게 모집하는 코스 잡는 것을 그런 식으로 코스를 잡은 거예요. 뭉크(Edvard Munch, 1863~1944, 노르웨이 화가)라는 화가의 유명한 그 그림이 있습니다. 절규라는 그림인데, 그림이 이래 생겼어요. 자기 두 손으로 자기 얼굴을 감싸고 있습니다. 그러면 얼굴이 길쭉해지면서 나오는데, 제목이 절규. 절규가 뭐냐 하면은 다 잃어버렸다. 이제는 끝났다. 나로서는 끝났다. 나는 희망 없다. 그게 절규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절규를 격려하도록 해서 자기 양 떼의 방향을 틀게 하십니다. 목자도 문제지만 양도 문제거든요. 양이 자기의 행복과 자기 사는 데 유리하도록 하나님을 이용했던 겁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에서 우상을 섬겼던 방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기는 것을 어떻게 했느냐 하면 적들에게 포위되게 해서, 적들이 사정 봐주지 않고 그 이스라엘을 공격하게 했어요. 1992년도 4월에 사라예보라는 도시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 도시에서 보스니아를 이슬람 국가로 세우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누가 반대했느냐. 보스니아는 이슬람 계통이거든요.

그런데 그 사라예보 주민의 70%가 이슬람교도들이고 30%가 그리스정교회 출신들이에요. 70%가 숫자 쪽수가 많으니까, 우리가 이슬람 율법에 의해서, 코란에 의해서 나라를 세우겠다고 하니까 여기에 누가 대드느냐 하면 30%에 해당하는 세르비아 민병대들이 거기에 반대해서 내전이 일어났어요. 70% 대 30%. 누가 이기느냐 하면, 이거는 70%가 이긴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유고 연방의 모든 무기가 세르비아 민병대에게 다 쏠렸거든요. 유고 연방은 이슬람 계통이 아니기 때문에 그 무기가 저쪽에 세르비아 민병대에 다 돌아가 가지고 전쟁에서 유리하게 작용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라예보라는 그 동네의 이슬람 지역을 완전히 포위해서, 주변 산에서 전부 다 무기를 가지고 그들을 완전히 포위한 상태에서 길을 막아버리고, 공항도 차단시키고 해서, 거기서 그들의 포위된 그 주민들을 다 죽여버리려고 했습니다. 포위시켰으니까.

근데 그냥 죽이려고 하니까 재미가 없어서, 서구의 유명한 부자들에게 재미있는 게임을 하라고 하면서 막대한 돈을 받고 게임을 하게 했어요. 그 게임이 뭐냐. 사라예보를 포위해서 사람을 사냥하는 게임을 하게 했습니다. 그게 바로 ‘사라예보 사파리’예요. ‘사파리’(safari) 아프리카에서 야생 동물 구경하듯이 포위에서 그냥 몰살시켰습니다.

그 일을 누가 했느냐?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누구를 향하여? 이스라엘이 멸망하도록 그렇게 하셨습니다. 거기에 동원된 것은 바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는 바벨론 제국이 그리고 다른 족속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다른 족속으로 하나님 여호와를 믿는 민족을 완전히 몰살시키는 작업을 주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 방법이 하나님께서 양들을 하나님에게로 구원하는 방식입니다.
슬렁슬렁 시간 남아서 교회 나와서 천당 가는 거 그거 아니죠? 그건 엉터리죠. 다 몰살시켜요. 그럼 몰살시켜 버리면 그러면 그 천국 가는 사람 없지 않으냐.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하나님 믿는 사람 다 죽여버리면 천국은 누가 가느냐.

서로게이트 마더(Surrogate mother)라는 게 있습니다. 대리모가 등장해요. 이미 죽은 자식 말고 대리모를 따로 마련해서 그 대리모 자식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천국에 필요한 사람들을 구원하는 방식이 등장합니다. 굉장히 복잡하지요. 교회 나와서 예수님 말씀 듣고 천당 가고 이 방식 아니죠? 그냥 그 방식 전혀 아닙니다. 전혀 다른 방식이에요.

그러면 여기서 양에 된, 자기가 서로게이트 마더, 대리모에 의해서 내가 새롭게 창조된 사람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단 말이죠. 확인하는 방법이 뭐냐?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예레미야 31장 30~32절에 보면, 서로 전에 있는 언약과 지금 언약이 어떤 차이가 나는 것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신 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 이(이빨)가 심 같이 각기 자기 죄악으로만 죽으리라” 이게 옛날 계약, 옛날 언약이었어요. 무슨 말이냐 하면은 어떤 인간이 있는데 그 인간이 천국 가려면 바르게 살아야 구원받는다는 방식이에요. 이게 옛날 언약 방식입니다. 만약에 죄를 지었다 하면 그 죗값을 치러서 천국에 오지 못하고 지옥 보내는 방식이 옛날 언약 방식이에요. 여러분, 옛날 언약 방식이 여러분 앞에 친근합니까? 아니면 그 방식 외에 또 다른 방식을 원하십니까?

유치원에서, 우리 손자가 다니는 유치원에서 학부모마다 선물을 유치원에서 줬어요. 한우를 줬습니다. 한우 한 팩을 가져왔어요. 그래 가지고 할머니도 기뻐하고, 할아버지도 기뻐하고, ‘야, 이 유치원 돈 많다 이 비싼 한우를 이렇게 주다니’라고 하면서 비닐 포장을 뜯어내고 보니까, 그 안에 휴지 심 위에 벽지로 말아서 만든, 무늬만 한우예요.

그거 4개를 돌돌 감아서 보내 줬어요. 이미테이션(imitation) 한우 가짜, 한우였습니다.근데 받는 사람은 기분이 추석 기분이 났지요. 지금 유치원은 그 기분 살리기 위해서 부모한테 그걸 보냈지만, 하나님께서는 왜 진짜 구원받는 언약이 따로 있으면서도 왜 먼저 언약, 이미테이션 가짜 구원 방식을 우리에게 제시했는가. 이미 우리의 영혼이 마음이요, 자기 잘난 맛에 천국 가는 것이 이미 악마로부터 익숙해졌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태어나면서 받은 것은 자기 잘난 맛에 자기가 천국 가겠다는 그런 아이디어, 그 생각 외에는 다른 아무 생각이 없어요. 그걸 두 자로 ‘양심’이라고 하는 겁니다. 양심상 바르게 살면 양심 없이 인간보다, 그 인간들은 지옥 가지만 양심대로 산 나는 천국 간다. 그게 이 사회생활에서 인간이 인간의 만남에서 악을 줄이고 선을 크게 팽창시키는 하나의 동기부여가 되는 식으로 인간은 인간 사회를 만든 거예요.

그게 다 엉터리라는 생각은 인간 가운데 어느 인간도 그게 엉터리고 그게 가짜고, 이미테이션 한우가 가짜 한우라는 사실을 아무도 거기에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한 사람 빼놓고요. 전유성(故 코미디언)이 빼놓고요. 전유성이는 살아있을 때 이런 말을 했어요. ‘하지 말라는 것이 재밌다’ 얼마나 제대로 세상을 이야기했어요. 하지 말라는 것은 무조건 재미있어요.

한번 여러분 인생 돌아보세요. 하여튼 이 사회에서 하지 말라는 건 다 재미있어요. 술 먹고 오줌 누지 말라는 이런 것들 다 재미있어요. 뭔가 하지 말라고 하면 또 하고 싶어요. 엄마가 선반에다가 떡 숨겨놓고 먹지 말라 하면 그다음부터는 그 떡은 벌써 날아갔습니다. 그냥 떡 먹으라고 하면 떡 안 먹어요. 근데 숨겨놓고 떡 먹지 말라고 하면, 그 떡은 이 의자 놓고 해서 벌써 없어졌어요.

도대체 무슨 떡이 그렇게 맛있길래 엄마가 먹지 말라고 하지. 하여튼 하지 말라 하는 것은 다 재미있어. 담배 피우지 마라. 술 먹지 마라. 학생들은 그거 다 재미있어요. 왜? 인간은 선을 행하는 이유가 정작 하고 싶은 것을 꼬깃꼬깃 그걸 억누르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게 정신병 되죠. 정신병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 정신병을 달래기 위해서 술 먹고 딴짓하고 있어요. 속에 불이 나서.

그러면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주님께서 그다음에 예레미야 31장 30절, 그게 옛날 언약이고 31~32절에 새 언약이 주어집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새 언약은 옛 언약과 전혀 관계없어요. 옛 언약에 있는 사람은 새 언약을 상상도 못 해요. 왜냐 하면 천국은 좋은 곳이고, 좋은 곳은 착한 사람만 간다는 게 모든 인간이 동의한 바이기 때문에.

‘그러면 악한 놈이 천국 가나?’ ‘그래’ 이게 말이 돼요? 이게? 말 같은 말을 해야지, 말도 안 되잖아요. ‘그러면 천국 가기 위해서 내가 죄만 짓겠다’라는 대번 이러한 논리가 탁 튀어나온단 말이죠. 세상에 어느 종교단체나 어디에도 ‘바르게 사세요’가 이게 주류 아닙니까? 그러니까 종교단체 다니면서 어디 가느냐? 지옥 가고 있는 거예요. 그 외에 다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러나 성경은 새 언약이 있습니다.

새 언약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가 새 언약을 세우리니” 그 새 언약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알파시디’라는 것이 있어요. 알파시디가 뭐냐 하면 이거예요. 이걸 먹기만 하면, 홈쇼핑에서 두 포에 23만 원 하는데, 먹기만 하면 내부에서 지방만 쏙쏙 딱 들러붙어서 이게 녹여주니까, 삼겹살을 먹고 자기 먹고 싶은 고기 실컷 먹었는데 뱃살이 빠져요.

왜 그런가? 알파시디가 우리 속에 있는 지방질을 딱 들러붙게 해서 자체적으로 녹여버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제품 선전하는 거 아닙니다. 이런 선전은 꼭 이런 말이 나오게 되어있어요. ‘이거는 체질에 따라 다릅니다’가 꼭 붙어있어요. 그런데 이 새 언약이 뭐냐 하면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희생물로 오셨거든요. 알파시디입니다.

우리가 양심으로 ‘나는 착합니다’라고 하는 것은, ‘내가 이렇게 최선을 다하여 바르게 삽니다’라고 하는 것은, 그 양만큼 우리 내부에는 마음적으로 이미 악한 일을 탐내는 마음으로 우리는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거든요.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었으니까. 선악과를 따먹은 자체가 죄거든요. 여기서 대리모, 써로게이트 마더, 대리모가 등장합니다.

너 안 되지? 넌 안 돼! 아무리 네가 바르게 살라고 할지라도 너의 착함은 네 힘으로 버릴 수가 없다. 이게 바로 네 진짜 모습이다. 근데 그게 가짜 한우거든. 내가 보기에는 진짜 착하게 사는 진짜인데 주님 보시기에는 100% 가짜예요. 그 인간은 안 봐도 천국에서 안 받습니다. 받지를 않아요.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주께서 이 알파 시대로 오셔서 그 죄를 지남철을 당기듯이 주님이 대신 우리 속에 들어가서 그 죄를 주님이 자신의 죄로 가져가 버려요.

가져가고, 가져가는 대신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정신 분석하는 사람들, 쉽게 말하면 정신 분석 의사들이 환자를 대할 때 그 법칙이 하나 있는데, 그거는 뭐냐 하면 그 환자의 얼굴과 표정을 안 봅니다. 왜냐 하면 인간의 모든 표정과 얼굴은 자체적으로 조작해서 연출한 것이기 때문에 그거 안 믿어요. 믿지를 않아요.

‘제가 아픕니다’라고 찡그려도 전부 다 그거는 조작으로 보기 때문에 안 봅니다. 뭘 하느냐, ‘말해 보세요’ 얼굴은 안 보고, 환자는 침대 비슷한 곳에 누워있고 의사는 딴 데 보면서, 그 사람의 말만 듣되 얼굴은 안 봐요. 그 사람이 말을 하기 시작해요. 그럼 그 의사는 말을 들어요. 정신과 의사는 그 말을 말을 하게 함으로써 그 말 속에서 스스로 자기 말에 모순되는 점을 찾아줍니다.

자기 말에 앞뒤가 안 맞고 길을 잃어버린 것을 정신과 의사는 그 대목을 찾아내요.횡설수설 다 난리도 아니에요. 횡설수설. 멀쩡한 사람도 마찬가지인데 뭐 스스로 환자가 찾아온 것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그 횡설수설하는 그 말들을 다 듣고 난 뒤에 정신과 의사가 ‘당신의 이 문장과 이 문장이 이렇게 연결됩니다’라고 연결만 되면 그 사람은 치료가 된 거예요.

정신과에서 치료하는 것은 ‘아, 내가 이렇구나’라고 환자가 알면 치료가 끝난 거예요. ‘내가, 이 인간이 바로 나구나’ 알면, 치료는 끝나는 겁니다. 그런데 정신과 안 찾아가도 일반인들도 지금 정신병자들 아닙니까? 그 사람은 매일같이 주어지는 사건 사태를 감당을 못해서, 이쪽에서 이런 소리 하면 이 문장 하나 알고 있고 저쪽에서 저런 문장 하면 그거 알고 있는 거예요.

예를 들면 어떤 영화인데, 옛날 오래된 한국 영화인데 석유 파동이 일어났어요. 석유 파동이 일어나서 전부 회사마다 난리가 나고, 그게 IMF 터진 것과 비슷해요. 터졌는데 어떤 사람들은 둘이 선을 보고 있습니다. 두 집안에서 선을 보고 있어요. 그게 우리 보기에는 뭐 문제없어 보이잖아요. 근데 정신과 의사가 보기에는 그게 문제가 있는 거예요.

왜냐 하면은 선을 봐야 결혼하기 때문에, 집안끼리 선을 보고 있는데 바깥에는 지금 경제적으로 난리 났어요. 회사가 부도나고 지금 석유 파동과 금융 파동과 그리고 IMF 그런 사태가 터졌는데, 그건 그거고 우선 선부터 볼 건 보자 이런 식이에요. 나중에 선보고 난 뒤에 ‘아이고, 직장 좋은 데 다니네’라고 했는데 벌써 IMF 터져서 그 좋은 직장에서 쫓겨났대요.

그러니까 인간은 이 세상을 감당 못 해요. 우선순위를 정할 수가 없어요. 그냥 대대기는 대로, 그냥 닥치는 대로 허겁지겁 살아갈 뿐이에요. 내가 알던 어떤 사실과 이 사실이 이게 꼬여서 연결이 안 돼요. 정리가 안 돼 인생이 정리가 안 됩니다. 혼란스러워요. 그래서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인간은 길을 잃어버렸어요. 주님께서는 새 언약을 제시해 놓고 새 언약을 지키는 게 아닙니다.

옛 언약은, 하나님의 말씀이 오면 내가 지켜야 해요. 그러나 새 언약은 우리가 이미 지켜봤자 정신병자라 하는 것은 이미 들통난 상황에서 어떤 말씀도 지킬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지킬 수 없으면 어떻게 하느냐. 지킬 수 없으면, 주께서 혼자 다 지켜요. 혼자 다 지키고 그거 다 지킨 이름이 주의 이름이 돼요. 따라서 사도행전 2장이나 로마서 10장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누구든지 내 이름을 믿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돼 있습니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그 사람의 명찰을 간직하게 되면, 언젠가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된다는 그런 영화의 한 대사가 나와요. 그 영화 이름이 ‘어린 신부’라는 영화인데 어린 신부에 보면, 좋아하는 상대방의 명찰을 내가 간직하고 있으면 언젠가는 이 이름대로 사랑이 꽃핀다는 겁니다.

영화니까 뭐 그렇게 낭만적으로 할 수 있잖아요. 실제로 성경은 말합니다. 주의 이름을, 그 명찰을 쥐게 되면, 그 순간부터 내 이름을 상실해도 상관없습니다. 내가 평생 살았던 것이 어디에 모여 있느냐? 내 명예, 내 자존심, 내 이름에 모여 있어요. 따라서 내 이름을 백날 쥐고 있어 봐야 거기에 양심 또는 착하면 천당 간다는 옛 언약의 규제를 받아요.

그래서 주님께서 새 언약을 주시되 그 새 언약이 완성된 것이 뭐냐 하면은 주의 이름입니다.바로 네가 못하는, 네 이름으로 못하는 그것을 내 이름으로 아버지하고 이미 계약이 끝났다. 따라서 내가 목자고, 내 이름으로 다 이루었다는 것을 아는 자가 진짜 내 양이며, 그 양만은 목자 있는 곳에 돌아오게 돼 있다. 이게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의 내용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제대로 알게 하고 파악하게 하옵소서. 백날 살아봐야 자기 챙기는 것 외에 아무 의미도 없는 무의미한 인생인 것을, 왜 우리가 진작 그걸 모르고 있습니까? 주여, 나를 위해 살지 말고 주님의 이름이 하는 의미와 주님이 하시는 일과 만나서, 내가 하는 일보다 주의 일이 우리 앞에 늘 앞서서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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