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죄인 호송 차량

아빠와 함께 2025. 10. 5. 16:16

죄인 호송 차량

2025년 10월 5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2:11-13

12: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12:12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12:13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히브리서 11장부터 줄곧 실상과 허상의 대립으로 세상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실상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겁니다. 반면에 나타나는 모든 것들을 나타나게 하는 것은 보이는 것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실상으로 되어집니다. 이는 마치 예수님께서 보이는 분으로 오심에도 본질은 보이지 않는 실상에 속한 일을 하시는 원칙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 보이는 세상에 전부라고 여기면서 여기에 전력을 다하여 ‘자리잡기’에 나섭니다. 부모들은 자식에게 인생 선배로서 조언해주고자 하여도 별로 조언해줄 것도 없습니다. 본인도 아는게 없기 때문입니다. 그냥 일평생 동안 이 지옥 속에 자리잡는 것에 혼신의 노력을 다할 뿐입니다.

즉 이 모든 것이 ‘자기를 위한 자리잡기’에 해당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자리잡기에 필히 찾아드는 것은 허무입니다. 허무쪽으로 구멍이 나서 사는 것 자체가 몽땅 허무가 쏟아지기 마련입니다. 열심히 살았는 것, 고생한 것, 소위 신앙생활한 것, 자식 잘 키운 것, 그 전부가 다 허무합니다.

허무가 솟구쳐 올라오는 구멍을 메울 방법이 없습니다. 중독되듯이 행복함으로 메울려고 합니다. 어떤 이들은 건강에 신경쓰면서, 어떤 이들은 화초를 가꾸면서, 어떤 이들은 음악에 빠지고, 어떤 이들은 독서와 종교활동과 성경공부에 빠져서 허무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칩니다. 하지만 그것이 자기 행복에 중독된 모습입니다. 하면할수록 허무의 강도는 더 셉니다.

성경은 이 문제점을 이렇게 지적합니다. “너를 위한 너의 구원을 이 하나님은 거부한다”입니다. 즉 인간은 자기 문제에서 자신이 빠져나갈 길이 없습니다. 그 예가 마태복음 7:21-23에 나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자기 인식에서 자신이 벗어날 길이 없는 자들은 매사를 스스로 다음과 같이 점검입니다. “나는 이번 일이 완벽했을까 실수했을까?”라고 말입니다. 이런 형편에 있는 이 허망한 세계를 향하여 사도 바울은 대범한 발언을 내어놓습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엡 2:4-7)

성도는 이미 주님과 더불어 하늘에 앉아 있다는 겁니다. 이러한 발언은 세례요한이 말한 다음과 발언과 비교가 됩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무리가 물어 가로되 그러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대답하여 가로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 하고 군병들도 물어 가로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눅 3:8-14)

개인이 책임지는 개인 구원은 신약 십자가 이후에는 없습니다. 그 좋은 예가 누가복음 7장에 나옵니다.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눅 7:37-38)

이 죄인인 여인에 왜 울지요? 그것은 자신을 위하여 산 것에 대해서 수치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즉 주님은 이미 나를 알고 계신 데 나는 그런 주님을 알지 못하고 살아온 겁니다. 주님의 준비는 사랑과 은혜를 몰랐던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허상의 세계, 곧 지옥이지요. 이 지옥까지 내려오셔야 하는 이유는 죄인들을 따로 호송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죄인들은 예수님의 몸이란 ‘죄인 호송차량’에 실려 바깥 지옥풍경을 구경하면서 일생을 보내게 되는데 그들의 손은 결박되어 있습니다. ‘사랑의 밧줄’로 꽁꽁 묶인 채 말입니다. 이러한 호송이 가능한 것은 예수님께서 헤드Head, 곧 ‘머리’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 1:22-23)

헤드, 사령실에서 보는 풍경은 도저히 하늘 나라에서 받아줄 수 없는 열매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러한 사령실은 집단 열매관은 성도도 같이 공유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호수아 7:1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친 물건을 인하여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바친 물건을 취하였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

이 아간을 처형하는데 있어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참여합니다. 각기 돌을 들고서 말입니다. 훔친 물건 반납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수아가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를 괴롭게 하였느뇨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를 괴롭게 하시리라 하니 온 이스라엘이 그를 돌로 치고 그것들도 돌로 치고 불사르고”(수 7:25)

이 세상은 지옥입니다. 샤브샤브처럼 모든 것이 불의 진노 속으로 녹아들어갑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는 ‘저절로 맺는’ 열매 뿐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4-5)

이 열매에 해당되는 자는 자신도 예상 못한 기쁨으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주님은 저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주의 일이 되게 하옵소서. 아예 나의 일은 없게 하옵소서” 이것이 기쁨으로 외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천국이 먼저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마 13:44)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도저히 예상 못한 기쁨으로 이 시대에 주님의 은혜만을 드러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87강-히브리서 12장 11-13절(죄인호송차량) 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12장 11-13절입니다.

히브리서 12:11-13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히브리서 12장에 나오는 이 내용은 11장부터 연속됩니다. 11장에 ‘실상’과 ‘허상’의 대립된 개념이 나오죠. “‘실상’은 보이지 않는 거고, ‘허상’은 보이는 건데 그 실상이 나타난 것, 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것을 뒤에서 받쳐주고 결과물로 나타나게 했다. 그래서 이 보이지 않는 ‘실상’과 보이는 이 ‘허상’과의 관계는 ‘믿음’이라는 것으로 연결된다.” 그게 11장에서 계속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이 ‘믿음’이라는 것은, 보이는 것도 물론 보고 있고, 그다음에 믿음이 없는 사람과의 차이점이 뭐냐? 믿음이 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파악이 돼야 하는 겁니다. 그래야 그 중간 연결고리의 노릇을 톡톡히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 히브리서 12장에 넘어와서 믿음이 계속 있어야 하는데, 믿음-믿음-믿음…, 믿음이 계속 있어야 하는데, 이 믿음이 도중에 옅어지고 약해져 버리면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가 되고 보이지 않는 이 실상의 세계는 이게 옅어지게 돼 있어요. ‘실상’과 ‘허상’ 그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이 성경에서는 이 세상 속에 천국의 윤곽, 천국의 그림자가 어떻게 비추는가를 나타내고자 하는 겁니다.

콩을 물에 푹 불린 다음 콩과 물이 섞여 있는 거기에 소쿠리를 집어넣으면 물속에 들어간 이상 소쿠리는 안 보입니다. 안 보이지만 굳어진 콩을 건져내면서 비로소 그 두부의 원재료가 보이지요. ‘실상’으로 오신 분이 ‘허상’밖에 없는 인간 세계에, 이 지옥의 세계에 굳이 오셔야 할 이유가, ‘실상’으로 오신 분이 소쿠리 역할을 해서 푹 담갔다가 끄집어내게 되면 거기에서 천국 백성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럴 때 그 예수님은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믿음’으로 그 일을 하셨어요. 그럴 때 우리는 그걸 뭐라고 묘사할 수 있느냐? 성경에서 묘사하기를 ‘성도는 주님의 믿음의 열매’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목이 뭐냐 하면, ‘징계와 열매’로 일단 정해 놨어요. 물론 이 제목은 바뀝니다. 바뀌지만 일단은 ‘징계와 열매’에요.

하나님께서 열매라는 것을 이 땅에 투명함, 보이지 않는 쪽으로 줬는데 인간은 육신이 너무 약해서 눈에 보이는 게 다예요. 눈에 보이는 거, 눈에 보이는 게 다니까 그 징계를 통해서 이걸 끄집어내는 거예요. 징계를 통해서 그걸 끄집어내는데 왜 징계가 동원되느냐, 징계가 왜 필요하냐 하는 거지요.

징계라고 하는 것은 기분 나쁜 거잖아요. 잘못했으니까 맴매하는 게 징계 아닙니까? 도대체 그동안 하나님의 징계가 없이 ‘우리가 이 땅에서 그냥 예수님 믿습니다, 하고 교회 나와서 착실히 하고 이 세상에서 바르게 살면 그러면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열매가 아니냐?’ 생각하는데 열매는 그런 식으로 건져 올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거 백날 해봐야 육의 열매죠. 제가 그 문제를 하나 낼 테니까요, 여러분이 한번 속으로 답변해 보세요. 지금 생중계가 안 된다고 분주하기 때문에 문제를 하나 내는 겁니다. 성경 공부 열심히 했는데 그게 허무하다고 느껴질 때는 어떻게 하면 되죠? 기도했는데 기도가 허무하다고 느껴질 때, 전도했는데 나중에는 지쳐서 허무하다고 느껴질 때, 헌금하는 것도 허무하고, 찬송하는 것도 허무하고, 이게 다 허무하다면 여러분에게 어떤 돌파구가 나올 수 있느냐? 생중계도 허무하거든요.

문제 다시 내겠습니다. 우리가 사는 것이 허무하다면, 웃는 것도 허무하다면 어떤 대책이 있어요? 우는 것도 허무하다면, 신나게 노는 것도 허무하다면, 열심히 살면서 고생하는 것도 허무하다면 여러분 무슨 대책이 있습니까? 아무 대책 없어요.

인생의 선배 격인 여러분의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지금도 연로하신 부모들이 우리한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명절 됐으니까 자식들이 집에 올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아들딸들아, 내 말 잘 들어라. 내가 평생 살아보니까 이 세상 해답은 모르겠다. 어떤 해결책도 없다. 세상살이 정확한 방법도 나는 모르겠다. 지금껏 70, 80 살아보니까 뭐가 뭔지를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하나 너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빨리 자리 잡아라.’”

곧 ‘내가 살아보니까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떤 기술을 배워야 할지 여전히 나는 혼란스럽다. 그러나 내가 한 가지 한 것은, 최선을 다하여 자립하는 거 그것밖에 없다. 따라서 내가 다 모르기 때문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내 탓, 부모 탓하지 마라. 나는 죄가 없다. 나한테 책임 못 지운다. 나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몰라. 하지만 그동안 아는 척하면서 너희에게 권위를 세웠어. 아무것도 정확한 것은 없는 데 그러나 아는 척하는 이 권위만큼은 계속 이렇게 발휘하련다. 왜? 그래야 책임감이 없기때문에.’

어른들이 하는 그 이야기를 똑같이 밟아 갑니다. 20대, 30대가. 정확한 게 뭔지 몰라요. 무엇이 정답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오로지 하나는 뭐냐? 빨리 자리 잡고, 이 땅에 자리 잡고 버티는 거예요. 어디서 자리 잡는가? 지옥에서 자리 잡아요. 근데 성경에서 이 세상, 이 지옥 은 어느 정도냐?

하면은 샤브샤브 수준입니다. 들어가면 다 녹아요. 들어가면 불에 다 녹습니다. 모든 의미 있는 것이 지옥 가면 다 녹아버려요. 선배 격인 부모나 자식이나 평생 노력한 것이 지옥 가서 흐물흐물해지기 위해서 평생동안 살아온 거예요. 아마 다른 답변은 없습니다.

제가 이렇게 하게 되면 ‘성경대로 살면 어떻게 뭐 정답이 안 나오겠습니까?’ 그렇게 사람들이 또 생각을 해요. 그게 정답이 아닙니다. 성경대로 살았던 사람이 결국은 주님을 피해서 도망간 일이 마태복음 19장에 나옵니다. 부자 청년이죠. 20절에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부자 청년이 ‘제가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열심히 지켰습니다. 또 무엇이 부족합니까?’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질문 자체가 ‘이제 더 이상 부족할 게 없을 건데요?’라는 질문을 한 거지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네 부족한 거 한번 끄집어내 봐?” 부족한 게 있다면 정답에서 완료가 되지 않는 상태라는 뜻이에요.

정답이 되기 위해서 모아놓은 모든 정보가 온전하지 못한, 구멍이 뚫린 허접한 정답은 일시적 정답에 불과하다 이 말입니다. “내가 네 인생 구멍 한번 뚫어봐? 이 모든 걸 팔아 가난한 사람한테 주었느냐?” 이렇게 물어요. 화가 난 그 부자 청년은 되돌아섰습니다.

정답이라는 것, 성경조차도 정답을 주지 않습니다. 성경 공부도 정답이 안 된다니까요! 성경 공부 오래 하면요, 나중에 사람이 허무해져요. ‘뭐야, 이거? 아무것도 아니잖아. 결국 이거였었어?’ 이렇게 끝나버려요. 지금 뭐가 문제냐 하면요,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그 ‘육’이라는 것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 못 해서 그래요.

‘육’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 공부를 하든, 전도하든, 예배 참석을 하든, 뭐 하든지 간에 ‘나를 위해서’가 모토가 돼 있는 게 바로 육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네가 징계를 받으면 열매를 얻는다.” 할 때에 이 본문을 본 사람 전부 다 무슨 생각을 하느냐?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주께서 원하는 열매를, 내 열매를 가지면 되잖아.’라는 생각을 하는 데 인간의 사적이고 개인적인, 독자적인 열매는 하나님께서 안 받습니다.

받지를 않아요. 육체의 열매 말고 성령의 열매 맺으라고 갈라디아서 5장에 그렇게 줄줄이 쫙 조항들이 나오거든요. 육체의 열매는 이런 것이 육체의 열매고, 이런 것은 성령의 열매라고.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19-23).

그 열매는 누가 가졌지요? 본인이 가지지요. 그러면 그거는 샤브샤브 속에 빠지지요. 개인적 열매는 하나님이 인정한 적이 없습니다. 나를 위해서 성경 공부하고 예수를 믿는 것, 독자적이고 개인적인 자기 생각을 못 버린 이상 성경을 거기다가 마구마구 구겨 집어넣는 결과에요.

사람이 개인적으로 살아가게 되면 모든 타인은 매니저가 됩니다. 매니저의 특징은 뭐냐? ‘당신의 존재는 나를 위해서 있다’라는 생각이에요. 이게 매니저예요. 예수님도 매니저고, 모든 선지자 사도 바울도 매니저처럼 “날 구원하면 상응하는 보답을 해드리겠습니다.”

이게 바로 매니저를 찾는 거예요, 인간관계에서! 자기를 버리는 게 아니고. 심지어 결혼도 마찬가지예요. ‘여필종부(女必從夫)’라는 말 혹시 들어봤습니까? 옛날은 농경시대라서 일꾼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 집안 일손 도우라고 색싯감 구하고요, 밥이나 먹고 살아가고 그냥 시집에다가 여자를 팔아먹었어요. 농경시대니까, 집단적으로 농사를 지어야 하니까 그런 겁니다.

그때 나온 게 여필종부에요. 여자는 무조건 남편 말을 따라야 한다. 그래서 여자는 그 집안 일손 돕고 또 일꾼이 될 자식까지 낳기 위해서는 20대에 결혼해야 해요. 그러면 요즘은? ‘여필종부’ 하면 ‘이게 필기도구인가? 그게 무슨 말이지?’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요즘 아가씨들 결혼할 때는 자기 매니저를 구해요, 남편감으로. 내가 하는 일은 무조건 다 해주는 거, 그냥 무조건, “무조건 무조건이야~” 무조건 다 해주는 남자를 찾아요. 뭔가 그 업무에 좀 소홀하다? 그러면 항상 내치죠. 뭐, 내치는 거예요.

성경은 참 친절하게도 독자적인 자기 자신을 위해서 찾아온 자들을 주님께서 어떻게 내치느냐, 그것까지 친절하게 알려줍니다. 누가복음 12장에서, 어떤 형제 중에 동생이 찾아와서 예수님을 보고 하는 말이, “예수님 고민거리가 있습니다.” “뭐냐?” “형이 내 아버지 유산을 다 가져갔습니다.”

그럴 때 그 동생은 예수님이 자기 문제를 해결해 줄 줄 알았어요. 예수님이 매니저라도 되는 줄 알았죠. 그때 누가복음 12장 14절에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소유가 없는데 무슨 존재감이 있어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소유를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존재감 자체를 제거하려고 하시는 겁니다. 왜냐하면 허상, 이 눈에 보이는 허상 세계에서 나오는 열매가 제거되어야 실상, 하나님 나라에서 나오는, 그 진짜 하늘나라 가는 열매를 주께서 얻어낼 수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두부를 만들 듯이,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을 건져낼 때 그것이 뭉쳐지게 되면 그게 열매가 되는 거죠. 그러면 그 과정, 이렇게 허무할 수밖에 없는 이것을 실상으로 옮기는 그 과정에서 주께서 주목하는 것은 뭐냐? 독자적인 생각, 개별적인 생각, 개인적인 생각 그것을 제거하는 겁니다.

여호수아 7장에 보면 ‘아간’이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집단적으로 아이 성을 칠 때 그 사람이 사적으로 챙길 것을 챙겼습니다. 돈으로 하면 얼마 되지 않아요. 외투 한 벌하고 은 2백 세겔, 그리고 금덩어리 하나, 그 금덩어리는 값이 좀 나갑니다. 그렇게 금덩어리를 탐냈다고 그 사람을 처벌 하는데, 그걸 다시 원상태로 한 정도가 아니고 온 집단이 돌을 들고 그 사람 죽이는 데 같이 합세했어요.

개인적으로 사형 집행관이 몰래 죽이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제비뽑기해서 그 사람을 뽑아냈고, 모든 사람이 돌을 들고 그 뽑아낸 사람을 돌로 쳐 죽였다는 그 말입니다. “이 개인주의야! 이 이기주의야! 지금 이 전쟁이 개인의 영달을 위한 전쟁이 아닌데 왜 너만 생각하느냐?”라고 돌로 쳐 죽인 것으로 주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진척시킨 거예요, 진행시킨 겁니다.

그러니까 이 열매도 마찬가지로 그게 징계라면, 신약에 오게 되면 매일 같이 우리 자신을 징계해 준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징계의 대상이 된다는 그 자체가 복인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게 감사할 일이에요. 왜? 우리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사적인 계산을 하기 때문에 주께서 원하는 열매에 우리가 초를 쳐요. 매일 같이 초 칩니다. 매일 같이, 허무하지 않기 위해서.

그렇다면 여기서 뭐가 중요하냐? 개인에서 집단으로 바뀔 때 그 경계선, 그 과정에 있는 사람의 사례, 그 샘플이 대단히 중요하죠. 누가복음 7장에 보면 그게 나옵니다. 38절에 보면 거기에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은 여자가 나옵니다.

그 여자는 어떤 여자냐? 37절에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그냥 여자가 아니고 ‘죄를 짓는 것으로 업을 삼는 여자가 하나 있어’라고 시작을 그렇게 했죠. 그런데 그 여자가 자기가 노동해서 얻었던 그것을…, 그 당시에 향수는 재테크 수단입니다. 그 향수 담은 옥합을 일거에 예수님 발 앞에 다 쏟아부으면서 울면서 발을 씻었습니다.

여기서 왜 우느냐 하는 거죠. 이 여자가 왜 우느냐? 그동안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몰랐다는 것에 대해서 스스로 지금 수치스러워하는 겁니다. 죄지으면서, 죄짓는 걸 업으로 사는 것은 전혀 수치스럽지 않아요. 예수님을 몰랐던 것이 수치스러운 거예요, 예수님을 몰랐던 것, 예수님이 주신 은혜와 사랑, 예수님이 준비하신 은혜와 사랑을 몰랐던 것이 수치스러운 겁니다.

울고 또 울어도 모자라요. 그동안, 도대체 그동안…, 주님은 나를 아는데 내가 주님에 대해서 관심은 있었나, 이 말입니다. 주님을 몰랐던 거예요. 이 여자는 주변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습니다. 주님만 알면 ‘오케이!’입니다. 끝났습니다. 이것이 뭐냐? 허무를 빵꾸낸 거예요. 내게 끼어 있던 허무, 눈에 보이는 대로 살아가던 그 허무, 그 막장에 구멍을 뚫은 겁니다. 인간은 허무하죠. 허무한데 그 허무한 것을 지켜보시는 분이 실상의 존재, 우리 주님이 저걸 지켜보고 있었던 겁니다.

그동안 저 여자는 죄지으면서 살아왔다고 비아냥거리고, 자기보다 질이 떨어지는 존재라고 놀렸던 그 바리새인들이 이제는 예수님을 싸잡아서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 7:47).

이 말은, 주님께서 지옥에 와서 자기 백성을 주님 자체의 열매로서 데려갈 때 어디에다 데려가느냐 하면, 죄인 호송 차량에 담아서 데려가요. 죄인 호송 차량 알죠? 시커먼 거 있잖아요. 안에서 바깥은 보여도 바깥쪽에서는 안에 누가 탔는지 안 보이는 차, 죄인의 프라이버시가 살아 있는 차량.

그 안에서 죄인들은 포박되어 있습니다. 뭐로 포박되어 있는가? 주님의 사랑으로 포박돼 있어요. 노래도 그런 노래 있잖아요. 사랑으로 꽁꽁 묶어 달라는 노래 있잖아요. 사랑에 포박되어 있는 거예요, 결박되어 있는 겁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결박되게 되면 더 이상 개인적인 행복은 그 사랑에 낄 수가 없습니다. 들어올 수가 없어요.

개인적인 행복을 위해서 인간들이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바로 취미 생활, 그리고 종교 생활, 독서, 뭘 수집하는 거, 건강에 신경 쓰는 거, 어떤 사람은 또 음악에 빠지는 사람이 있어요. 왜, 왜 그런 짓을 합니까? 인간이 허무한 것을 본인이 알거든요. 아무리 평생을 살아도 자기가 정답을 모르겠거든요.

정답을 모르니까, 정답이 없으니까 그 구멍을, 허무가 들이닥치는 그 구멍을 메꾸기 위해서 열성적인 취미 생활로 틀어막는데 그게 바로 행복에 중독된 겁니다. 이것을 성경은 한마디로 ‘육’이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신약 성경에 비해서 이 구약은 비교가 안 돼요.
신약 성경에서는 확연하게 모든 말씀 내용이 달라져요. 누가복음 3장에 보면 세례 요한도 역시 구약에 속한 사람이라서 이런 소리를 합니다. 세례 요한이 분명히 열매에 대해서 언급했어요.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눅 3:9). 즉 ‘지금 열매 찾고 있다. 열매 찾고 있는데 이게 알곡이 아니면 이 불에 사른다.’

샤브샤브로 들어가는 거죠. ‘그런데 알곡은 모아 창고에 들인다.’라고 세례 요한이 분명히 예수님의 뜻에 합당한 말을 했어요. 그때 듣는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듣는 사람들이 궁금한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우리 육을 가지고 어떤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까?”라고 이야기를 하지요.

그때부터 세례 요한은, 아직 예수님이 십자가 전이기 때문에, 진짜 영적 세계에 대해서 완전하게 모르기 때문에 자기 나름대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누가복음 3장 11-14절에 “대답하여 가로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것이니라 하고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하여 와서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하고 군병들도 물어 가로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이 말대로 이렇게 하면 영생 얻습니까? 이게 세례 요한의 한계예요. 신약의 어린아이는 세례 요한보다 더 많은 걸 알고 있다(마 11:11)고 했습니다. 지금 세례 요한이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세례 요한의 한계가 뭐냐? 이것도 개인적이에요. 사적인 열매입니다. 자기 구원을 포기 못 한 거예요. 자기 구원을 포기 못 한 거예요. 오늘날 교회처럼.

본인 구원을 노리고, 본인 구원, 천국 가는 걸 노리고 보험 들듯이 교회를 이용하려는 거예요. 적어도 세례 요한이 생각하는 것을 능가해야 하거든요. 능가하면 어떻게 되는가? 사도 바울은요, 세례 요한하고 달라요. 아주 대범한 발언을 했어요. 어느 정도로 대범한지 제가 그 구절을 설명하면 여러분 깜짝 놀랄 겁니다.

어느 정도로 대범하냐? 아까 본대로 죄인인 여자에게 주께서 죄 사함의 사랑을 해줬잖아요.그 사랑부터 시작한 거예요. 에베소서 2장 4-7절에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아, 어렵지요?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또 함께 일으키사…” ‘함께’입니다, ‘함께’, 집단이에요. 개인이 아니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이걸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이미 하늘에 앉히는 거예요. 제가 대범한 발언이라고 한 것이 무슨 뜻이냐? 이 땅에 있는 어떤 인간의 아이디어에서도 이미 우리가 하늘에 도착했다는 발언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열심히 교회 생활 잘하고, 말씀 잘 지키면 죽어서 천국 갑니다.” 이런 이야기는 모든 종교에서도 다 하고 있어요.

심지어 불교에서도 하고 있어요. 그런 수준이 아닙니다. 이미 하늘의 사랑의 속박을 받은 사람은, 죄수 호송 차량에 이미 거기에 감금되어서 사랑으로 꽁꽁 묶인다면 그 사람은 이미 하늘에 앉은 사람이라는 거예요. ‘앉을 것이다’가 아니라 이미 하나님과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앉아 있다는 거예요.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그러면 우리 눈에 보이는 이 육신, 이 육신은 이것은 뭐냐? 이것은 주께서 이미 하늘에 앉혔다는 그 천국의 그 윤곽…, 육신이 있는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일할 때 실상으로서 허상 속에서 일했잖아요. 똑같은 시스템을 작동해서 눈에 보이는 우리의 허접한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오는 세대마다, 오는 세대 지나면 지난 세대가 있고요, 그렇게 오는 세대마다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 죄 사함의 풍성함을 뿌리기 위해서, 증거하기 위해서 이렇게 연약한 육신을 사용한다는 거예요.

우리 육신이 어느 정도 연약하냐? 50대하고 60대가 달라요. 50대는 삶은 계란을 까도 그 껍질이 바닥에 잘 안 떨어져요. 그런데 60대 넘고, 70대가 되면 삶은 계란이나 새우깡을 주면 계란껍질이나 새우깡을 바닥에 다 흘려요. 노인석에 많이 흘려져 있어요.

왜냐하면 미세 근육이 생각대로 말을 안 들어요. 손을 벌벌 떨어요. 벌벌 떨면서 계란 껍질 깐다고요. 50대가 60대 되면 또 마찬가지예요. 도대체 내 마음이 내 통제를 안 받습니다. 사도 바울이 엄청난 파격적인 발언을 할 때 그 근거가 있어요.

그 근거가 에베소서 1장 22절에 나옵니다.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헤드(head), 머리, 머리가 따로 있어요. 머리는 따로 있어서 보이지 않는 곳에 이미 설정돼 있고 그 지부, 그 지체가 눈에 보이는 이 허상의 세계에서 이 연약한 육신, 죽어가는 육신을 가지고 실상을 보이기 위해서 용도로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는 거예요. 사도 바울의, 인간에게 나올 수 없는 아이디어입니다.

이 머리 부분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기억하고 있는 이미지가 있어요. 제가 그 국민학교 때 진짜 즐겨 봤던 만화가 있습니다. 김산호라는 분이 그렸던 만화 ‘라이파이’입니다. 70대는 알아요. 흰 두 건을 쓰고 뒤에 나풀거리는 망토 둘렀습니다. 라이파이니까 두건에 ‘ㄹ’자 붙이고요, 안경 시커먼 거, 3D 영생 볼 때 쓰는 그 안경 있죠, 그거 썼습니다.

그리고 가슴에 커다란 ‘V’자 해 놓고 거기에도 ‘ㄹ’자 붙였어요. 그리고 길다란 봉을 손에 쥐고 있는데 이 봉은 던지면 다시 손에 들어오는 봉입니다. 그래서 녹색 옷을 입은 이상한 여왕이 있어요. 눈가가 쫙 올라간 사람이 있어요. 아주 무섭게 생긴 여왕과 한바탕 싸우는데 그 본부가 어디냐? 태백산에 있어요.

태백산에 큰 바위의 얼굴처럼 돼 있어요. 바위에 눈이 뚫려 있어서 거기서 바라보고 있고, 바위에 뚫려 있는 입은 자가용 비행기인 제비기가 있는데 거기서 나와요. 옆에 보조자로 제비양이 있는데 약혼자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 태백산의 머리 부분에 소나무가 몇 개 있는데 듬성듬성 머리 빠진 사람 비슷하지요.

이렇게 큰 바위 얼굴, 지금 얼굴들 보니까 그 라이파이 만화 본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 한번 찾아보세요. 잘하면 찾을 겁니다. 1959년도에서 1962년도에 나왔던 ‘라이파이’ 그 만화에 나온 큰 바위 얼굴, 그게 헤드에요, 헤드. 거기서 세상의 모든 것을 조정합니다. 주님 자신의 열매의 근거는 육이 아니에요. 오직 영적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그분이 헤드다. 모든 것의 머리다”(엡 1:22). 헤드가 되고 그 헤드에서 나온 것이 어떤 상태냐? ‘그 헤드와 더불어서 성도는 이미 하늘에 앉아 있다’라고 이야기했어요. 이 말은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하느냐? “구원받기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마. 구원받기 위해서 네가 할 건 아무것도 없어.”

왜냐하면 사람이 행하고 되면 또 사적인, 개인적인 욕구가 거기서 또 시작이 돼요. 시작이 되면 어떤 심리가 되느냐? ‘완벽했는가? 혹시 또 실수하지 않았는가?’ 이 둘입니다. 완벽했을까, 또 실수하지 않았을까, 계속해서 매일 같이 이걸 반복하면서 자신이 정신적으로 힘들어져요. ‘그때 좀 더 완벽해야 될 텐데…’

여기서 이제 어려운 거 하나 해보겠습니다. ‘그 헤드, 머리 되시는 분이 이 땅에서 어떤 일을 하시는가?’ 질문 자체가 다르죠. ‘그분이 어떤 일을 하시는가?’입니다. 그분이 어떤 일을 하시는가.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는 거 아닙니다. 그분이 어떤 일을 하시는가?

마태복음 12장에 안식일에 예수님이 이런 말씀하십니다. 10-11절에 “한편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물어 가로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안식일이라는 것을 구약적으로 보면 ‘개인적으로 안식일 율법을 지켜야 복을 받는다’라고 돼 있는 게 구약입니다. 신약은 상상도 못 해요. 세례 요한도 상상도 못 한 그 이야기를 신약에서 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면 복 받아요. 그 복 받는 것이 열매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복 받는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복이 되도록 중간에 누가 그 행위를 하느냐?’가 문제예요. 신약은 그렇습니다. 쉽지요, 대단히 쉽지요. 안식일 날 어떤 사람이 구덩이에 빠졌어요. 구덩이 빠진 그 사람이 자기가 안식일을 지켜서 구덩이에서 기어 나올 수 있느냐는 그 말입니다. 그런 것은 없다는 거예요.

그 정도로 인간은 무능하지요. 이 무능에 대해서 주께서 내린 조치는 뭐냐? 불가피성입니다. 이 불가피성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불가능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불가능은 ‘우리는 못한다. 주께서 하기를 기다리자’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래, 나는 못해. 주께서 하시는 일만 기다려.’ 이래 되면 그럼 안 오면 어떻게 할 건데요. 그것도 마찬가지로 개인적인, 사적인 개인 구원을 은근히 노린다는 뜻이잖아요.

그게 아니고 불가피성, 불가피성이라는 것은 ‘주께서 일을 우리 개인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저쪽에서 이미 시작해서 은혜의 풍성함을 우리가 사는 2025년도에 알리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일을 주께서 하셨다’라는 거예요. 주께서 하셨다는 겁니다!

이게 안식일 계명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고 사도 바울에 나오는 모든 성경 말씀에 다 해당 됩니다. 여러분들 표정 보니까 이해하시는 듯 해요. 그렇다면 여러분들에게 더 어려운 대목을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7장 22-23절에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이 말씀, 이 대목만 딱 놓고 보게 되면 어떤 인간도 자기 구원에 대해서 장담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내가 주의 일을 하고, 내가 주의 말씀을 전하고, 선지자 노릇을 했다.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했다.’라고 하는 것이 바로 사적인, 너의 개인적인 의견에 불과하다”라는 평을 안 받을 사람 누가 있습니까? 다 받지요, 다 받습니다.

“실컷 전도하고, 목사 되어서 실컷 설교하고 강의했는데 그건 너 좋으라고 했잖아. 너 구원 받으려고 그 짓 했잖아.” 그러면 그 소리 듣는 우리가 뭐라 합니까? “아닙니다, 아닙니다! 오직 주를 위해서 했습니다.” “주를 위해서 했다는 증거 내놓아라.” “주를 위해서 했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네 생각이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네 생각이죠.

그 이해를 참고하기 위해서 제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소련군이 우크라이나 지역을 일시 점령했어요. 어떤 나이 많은 할머니가 완전무장한 러시아 군인에게 다가옵니다. 군인이 “당신 쏜다! 빨리 집에 들어가!” 이렇게 하니까 할머니가 길거리에 나와서 당당하게 서서 “너희들 빨리 너희 나라 돌아가라!”

할머니가 무장한 러시아 군인에게 다가와서 해바라기씨를 그 러시아 군인 주머니에 쓱 넣어줘요. “나도 너도 죽고 난 뒤에 이 해바라기의 씨가 비로소 열매를 맺을 것이다. 네가 보기에 눈에 보이는 이곳을 점령하는 것으로 전쟁이 끝나는 줄 알지? 이 전쟁은 네가 죽고 난 뒤에 본격적으로 승부가 가려진다.”라는 거예요. “너는 결국 죽지만 내(우크라이나 이 할머니)가 집어넣은 해바라기씨는 죽은 이 시체 위에서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때 승부는 끝났다.”

마태복음 7장에서 “나는 열심히 목사로서 주의 일을 했습니다.” 하는 이 모든 것을 아무리 “진심으로, 진심으로~” 백날 진심으로, 진심으로 해봤자 그 ‘진심’이라는 그 심리적 파악을 누가 알고 있어요? 본인이 알고 있는 이상은 본인으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네요. 자기가 아는 자기 심리는 여전히 자기 안에 갇혀 있다는 그러한 논리가 성립되는 겁니다.

“나는 믿습니다, 주님을 믿습니다!” 그 ‘믿습니다.’를 본인이 알고 있잖아요. 그러면 그거는 주님 믿음이 아니고 자기 믿음이죠. 그 한계를 인간이 무슨 수로 벗어납니까? 못 벗어나요, 그 한계를! 그래서 그 전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마태복음 7장 15절에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라고 되어 있고요.

마태복음 17장 16-20절에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이 말씀을 주께서 우리한테 딱 던져주는 이유는, 이 말씀을 듣고 어떤 인간도 나쁜 나무, 나쁜 열매 되려고 할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거예요. 어떤 인간도 이 말씀을 듣고 ‘그래, 맺어야지 좋은 열매’ 이거는 뭐 당연히 나오잖아요. 당연히, 마땅히 나온다고요.

피아노 치는 음악계에 이런 속설이 있답니다. “이순신 독주회”라는 게 있다는 거예요. 음대 교수가 독주회를 열기는 해야 하는데 실력은 안 돼요. 독주회를 열어야 정 교수까지 올라가니까 자기 아는 사람 끌어모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순신 독주회가 뭐냐 하면, “나의 독주회를 아무도 알게 하지 마라.”는 거지요.

자기가 자기 돈 내고 사람들 끌어모아서 조그마한 홀에서 독주회 하는 거, 이순신 독주이잖아요. ‘자기만 알면, 그래서 자기만 찾는 천국 가면 된다.’라는 이것이 왜 하나님께서 안 받는 열매인가? 왜 그 열매를 안 받는가? 그것은, 인간이 태어나 죽을 때까지 인간의 소망하는 건 오로지 하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이 세상에 자리 잡기, 자기 존재의 자리 잡기.’ 모든 의지와 열성은 이거 하나밖에 없습니다. 명절 되면 자식한테 전화해서 “야, 너 자리 잡았나?” 이 ‘자리 잡기’ 하는 것.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영적 자리는 그런 자리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영적 자리, 제가 말씀드릴 테니까 여러분이 거기에 한 자리 잡았는지 확인해 보세요.

이사야 11장 6-9절,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이 자리에 여러분 들어갔습니까? 들어가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들어갔다는 거예요.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이미 하늘나라에 너희들이 도착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정신을 어디 팔고 있습니까? “‘나 개인적으로 구원받았습니까, 안 받았습니까?’ 그것 때문에 열매가 있어야 한다고요? 그럼 열매 맺죠. 열매 맺기 위해서 열심히 전도하고 복음 전하겠습니다.” 주께서 하는 말이, “야, 너 누구고? 나, 너 모르는데…”

이 문제, 이 문제 어떻게 해결하실 겁니까? 이제 설교도 끝나가는데, 문제가 해결돼야 뭐 끝나도 기분이 좋은데, 이 문제 어떻게 해결할 거예요? 평생 자기 심리에서 못 빠져나오는데요. 두 가지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첫째는, 그 ‘헤드’에 관한 문제예요. 요한복음 15장 4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내게 속하면’ 그다음에 나오는 말이 있어요. 아주 절묘한 말이 나와요. ‘절로, 절로 열매가 맺힌다.’ 절로, 절로, 동화사 이런 절 말고요, ‘절로’ 열매가 맺혀요, 절로. 근데 나하고 같이 있지 아니하면 억지로, 억지로 천국 보내기 위해서 자기가 열매를 만들어 낸다는 거예요.

여러분, 그동안 신앙생활을 어떻게 했습니까? ‘억지’였습니까? ‘절로’였습니까? 뭐 목사 시키는 거 그거 따라 하고 이랬습니까? ‘절로’ 맺히지 않는 열매는 바깥 어두운 데서 불에 사르게 된다는 거예요. 마태복음 15장 7절에 아주 무시무시합니다. 주님은 각오를 단단히 했습니다. ‘절로’ 맺혀야 돼요.

그렇다면 글쎄, 그 절로 맺힌다는 그 ‘절로’가 어떤 식으로 되느냐, 하는 거예요. 마태복음 13장 44절,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이렇게 돼 있어요.

‘절로’라는 말, ‘절로’라는 말은 뭐냐 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미리 예상하지 못했다.’ 내가 미리 예상하지 못했다는 거예요. 사도 바울을 통해서 주께서 대담한 발언을 하게 했어요. “너는 이미 천국에 왔다. 주와 함께 있다. 네가 지금 2020년에 살아 있는 것은, 네가 육신으로 죄지은 것을, 풍성한 은혜와 사랑으로 용서받은 것을, 네가 사는 지금의 이 시대에 토해 놓으라고 네가 살고 있는 거다.”

얼마나 대담한 발언이에요, 이게! 그런데 그것을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말하지 말라는 거예요. 이것은 ‘발견한 기쁨’이라고, 마태복음 13장 44절, 이걸 발견한 후에 기뻐했다, 기뻐한 거예요. 싱글벙글한 거예요, 이걸 발견한 후에.

아까도 했지만, 사람이 이런 믿음이 없으면, 뭣 때문에 싱글벙글하냐면, “어머님, 저 제 자리 잡았어요, 이제!” 이제 이것 때문에 싱글벙글한다고. “중소기업 아니고 대기업이에요.” 이런 거 있잖아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 만났어요. 기뻐하세요. 내년에는 시집가도 될 것 같아요.” 이런 거 있잖아요.

전부 다 개인적인 것과 관련해서 뭔가 허무를 땜질하는, 그때그때 찾아오는 허무를 땜질하려고 하는 거예요. ‘이거는 내 자리다.’ 다시 말씀드릴게요. 정말 매일 같이 감사하십니까, 아니면 경계하십니까? 남이 내 자리 잡은 곳에 쳐들어올까 봐 밀어내십니까, 아니면 그 죄 많은 여인처럼 감사하십니까? 남의 눈치 안 보고 그냥 감사하는 거예요? 어느 쪽이에요?

자기가 농사 일할 때 갑자기 챙그랑~ 하고 막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이상하다, 왜 갑자기 이런 소리가 들리지? 한번 파볼까?’ 파보니 거기에 엄청난 많은 보화가 있었어요. 자, 여러분들이 그 현장의 농부라고 칩시다. 여러분들이 제일 먼저 하는 행동은 무엇입니까? 경계죠.

혹시 여기 CCTV 있는가, 쳐다볼 거예요. 왜? 전혀 예상 못 했기 때문에. 이런 횡재는, 이것은 내 아이디어에서 나온 횡재 아니고, 내가 고등 교육받는다고 나온 횡재 아니고, 예상 못한 횡재예요. 이건 AI가 가르쳐주지 않은 횡재예요. 생각지도 못한 횡재를 받은 거예요.

주님은 나를 아는데 나는 그동안 뭐 하고 살았어요? 기껏 나만 챙기고, 나만 알면 된다고 생각했잖아요. 이미 주께서 시작한 영적인 세계에 우리가 죄인으로, 호송 차량에 이미 실려서 이 지옥을 빠져나오고 있다는 데서 오는 그 횡재감, 그 복! 그 호송 차량 타보니까 우리가 안식일 법을 이미 다 지켰어요!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벌써 그것을 다 지킨 사람이에요. 그게 오늘 본문에 ‘의’라고 돼 있어요. 오늘 히브리서 12장 11절에서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의의 평강한 열매, 이거는 주님의 의예요, 우리의 의가 아니고. 우리는 의를 모르니까 이 세상에서 내 자리 잡는 데 실패했다고, 아직까지 주저앉아 있잖아요.

주저앉았으니까,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우리의 겨드랑이를 끄집어 당기면서 “힘내, 힘내, 힘내라고! 너는 이미 의인이야. 이미 용서받았어! 언제까지 이 지옥에서 네 자리 잡을 거야?!” 끄집어 올릴 때 갑자기 여기서 발에, 팔에 힘이 생기고 다리에 힘이 생겨서, 아들이 아들답게 살아갈 수 있다, 이 말이죠. 우리가 2025년도의 이 땅에서 주님의 증인 노릇을 할 수 있다, 이 말이거든요. 이게 오늘 본문 내용이에요. 우리 자체가 열매에요. 주님의 열매입니다.

마태복음 13장 44절을 조금만 더 말씀드리면,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그다음에 뭐라 하냐면,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서 그 밭을 샀다.” 자기의 소유, ‘그 죄 많은 여인이 자기가 모아놓았던, 재테크하려고 모아놨던 향수를 전부 다 예수의 발아래 다 쏟아붓는다.’라는 그 말이 뭔 뜻이냐?

“주님, 이제부터 나의 모든 일이 주의 일이 되게 해주시고 일체 나의 일은 없애 주세요. 매 순간에 나의 일이라는 것 자체가 떠오르지 않도록 해주시옵소서. 교회를 나오든, 찬송을 하든, 헌금을 하든, 전도를 하든 이게 나의 일이 아니고 주께서 나에게 시킨 일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자리를 찾거나 결혼을 하거나, 애를 둘 놓거나 셋 놓거나 남의 눈치 보지 않고 주의 일이 되게 하옵소서.”

이게 바로 ‘경계’ 대신 감사, 세상과의 관계가 아니고, 그것은 육의 열매고 그거 말고, 주를 바라보는 그러한 주님과의 관계 자체가 주님의 열매입니다. 이미 구원받은 자는, 비로소 모든 일에서 내가 주의 종이 된 게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셨다는 것을 늘 기뻐하시기 바라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보이는 것이 전부인 줄 알고, 심지어 보이는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가 전부인 줄 알고 세상에 자리 잡는 데 매진했습니다. 잡힌 자리를 든든하게 하기 위해서 온 힘을 다했습니다. 주여, 그것이 지옥 갈 열매인 것을 깨닫게 해 주시고, 이제는 예상 밖으로 찾아오신 사랑에 꽁꽁 묶여서 모든 것이 사랑 아닌 것이 없음을 깨닫는 저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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