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어린양 구현

아빠와 함께 2025. 10. 12. 18:50

어린양 구현 

2025년 10월 12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2:14

12:14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좆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주님이 있지도 않는데 어떻게 만남이 성사되지요? 사람들은 예수님이 없다고 여기면서 일상 생활에 집중하며 삽니다. 주님이 없으니 주님을 만날 일도 없다고 여깁니다. 따라서 주님을 만날려면 일단 주님이 계심이 선행되어야 할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주님이 없다’고 자부하는 이유는 오로지 ‘자기가 있기’때문입니다.

여기, 살아 있는 것은 오로지 자신 뿐입니다. 따라서 사나 죽으나 오직 엄연히 살아 있는 자신에 집중해서 몰입하는 식으로 삶을 살아 갑니다. 주님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는 겁니다. 주님이 계신지 아니계신지조차도 불명확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당연히 모든 일을 내가 결정하고, 내가 판단하고, 내가 책임지고, 내 짐으로 떠 안고 살아갑니다.

이렇게 살면살수록 더욱더 강화되는 것은 자아입니다. 곧 ‘자기라는 주체성’입니다. 우리 성도가 세상에 나가서 불신자들을 만나야 될 이유는, 그들이 자기를 구축하기 위해서 어떤 요소들을 자기에게 집중시키는데 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해서 ‘주님을 만나지 못하는 요건’들로 그들은 자아가 단단히 구축합니다.

쉽게 말해서 ‘주님은 안 만나도 된다’는 겁니다. ‘주님 없는 삶’을 위하여 평생을 매진합니다. 그렇다면 신자라면 이런 불신자와 어떤 차이를 보여줄 수 있는 겁니까? 불신자들은 타인을 대하면서 자신이 필요한 사람을 고르게 됩니다. 반면에 신자는 ‘하나님에게 필요해서 찾음을 당한 자’로서 자신을 정립합니다.

세상은 말합니다. “하나님, 예수님 보여주면 믿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성도는, 지금 보고 있는 자신이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죽은 존재로 바라봅니다. 이미 자신은 죽었기에, 자아가 죽은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성경을 통해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 표준이 바로 ‘어린 양’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만나고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성도는 자신의 자아가 죽고 난 뒤에 벌어지는 상황은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의 일부로 활동기능을 나타낸다는 겁니다.

유월절 어린양이 죽고 난 뒤에 그 어린양의 취지는 그 뒤에 주어지는 율법 안에서 제사의 제물로 살아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죄를 위하여 계속해서 제사법 안에서 하나님에게 바쳐져야 합니다. 이것이 ‘말씀 완성을 위한 용도’입니다. 성도의 죽음이 이런 식으로 활용됩니다.

문제는 ‘나 밖에 모르는 나’가 어떻게 유월절 어린양의 문턱을 넘어 하나님의 말씀 완성 상태, 곧 생명의 세계에 합류되느냐 하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두 가지 원리가 나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성도를 어떤 식으로 어린양을 증거하는데 사용하느냐와 관련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러합니다.

어떤 분이 주소에 착오를 일으켜서 애완견 옷을 두 벌 택배로 보내왔습니다. 우리 집에는 개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그 옷 보내준 분에게 돌려주면 되겠지요. 그런데 이러한 나의 구원은 안됩니다. 구원이 되려면 그 작은 개 옷을 입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집에는 개도 없고 개 옷을 주문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 말씀은 이런 겁니다. 나의 존재가 먼저고 제대로 살아 있는 나 뿐이기에 평생에 걸쳐서 오로지 나에게 충성하면 그만이다는 자에게 있어 성경은 외계어입니다. 도무지 이해 못합니다.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살아 있는 우리는 결단코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마치 애완 개 옷이 단연코 우리 집에는 필요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그 옷만 주인에게 돌려주면 우리는 주님과 상관없이 결국 만나지 못하는 존재가 됩니다. 그 낯설고 거북한 개옷을 입은 채로 택배상자 안에 내가 들어가서 주님에게 탁송되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7)

이 작업을 위해 히브리서 10:9에 보면, 첫 번 것, 곧 율법이 와서 우리와 결합하여 우리 자아를 우리 몸에서 떼냅니다. 이미 우리 자신이‘죽은 자’로 간주되어야 말입니다. 율법이 달라붙어 우리가 죄인임을 규정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자아로부터 떨어지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10:9에서는 그 율법이 ‘찢어졌다’고 말합니다.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히 10:9) 그리고 난 뒤에 두 번째 것 안에서 우리는 거룩을 ‘얻었노라’가 됩니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 10:10)

즉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우리를 ‘죽은 자’로 간주해서 율법이 달라붙도록 하셨습니다. 이제 율법을 완성해서 대체하는 세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의 세계입니다. 복음의 세계에 대해서 ‘달고나’제작 과정을 통해서 소개하면 이러합니다. 설탕을 불에 녹입니다. 그리고 충분히 녹은 다음에 소다를 그 쪽자 속에 탑니다.

그러면 점차 설탕 녹은 물은 색깔이 변합니다. 그리고 쪽자를 탁 치면 굳어진 달고나가 하나의 새로운 개체로서 세상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13:33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누룩은 보이지 않지만 바깥에 누룩이 효능은 나타납니다. 성령을 받은 성도라면 십자가 복음의 효능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런 경험을 역사적으로 미리 한 자들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세와 다윗입니다. 이들의 직업은 모두 목자들입니다. 목자는 양을 거느리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목자의 직업에 직접 참여 하시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목자의 목자다움은 양이 양다워야 하는 것이 조건으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목자됨을 제대로 아는 양은 양 자신을 다음과 같이 규정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즉 우리 자아로 한 것은 이 세상에서 죄지은 것 밖에 없음을 인지하는 자만이 세상 죄를 지고 가서 죽으신 그 목자를 제대로 아는 자요 이미 그것이 거룩 활동 속에 놓여 있는 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더는 우리 자신의 잘남과 구원을 위해 살지 않게 하옵소서. 그냥 구원자에 의해서 쓰여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88강-히브리서 12장 14절(어린양 구현) 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12장 14절입니다.

히브리서 12:14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오늘 성경에 ‘주를 보지 못한다’라고 되어 있는데 주님이 계시기는 계시는 겁니까? 주님이 있어야 만나죠. 여기 성경에서 만난다고 되어 있는데, ‘만난다’가 성립 되려면 일단 주님이 계셔야 되는 겁니다. 주님이 계셔야 ‘주님과 만날 사람’과, ‘아무리 해도 주님과 못 만날 사람’이 나뉘어지잖아요?

그런데 주님은 이 말씀으로 ‘내가 있다. 있는데 이런 사람은 나를 만나지 못할 것이다.’라고 이야기 하시는 겁니다. 말의 순서가 이거에요. 주님이 먼저 계시고, 그다음에 계신다고 아무나 만나주는 게 아니고 만날 사람과 못 만날 사람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순서가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 땅에 사는 우리들은, 누가 있느냐 하면 주님이 있는 게 아니고 내가 있어요. 내가 있기 때문에, 우선순위가 내가 있기 때문에 그다음부터는 주님이 있거나 말거나 그것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주님이 있다’고 주장을 하지만 실생활에서는 주님이 없어요. 빠져 있습니다.

주님이 없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살고, 주님이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을 내가 결정하고, 주님이 없기 때문에 내가 나를 판단하고, 주님이 없기 때문에 내가 나를 책임지고, 주님이 없기 때문에 평생의 모든 짐을 내가 떠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평소에 우리가 살아온 모습이 나밖에 없기 때문에, 심지어 교회 나오고 안 나오고도 내가 결정해요. 우선순위가, 삶의 태도 자체가 주님이 없다고 치고 그때부터 출발하는 겁니다. 초등학교 가도 그렇게 가르치고,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가도 그렇게 가르치고, 직장 생활과 사회의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부동산 중개인 만나도 그런 이야기 하고요, 정치인 만나도 그런 이야기 하고, 모든 것이 주님이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KBS, MBC 뉴스 전부다, 유튜브 방송도 전부 다 주님이 없다는 걸 전제로 해서 모든 소식이 들려옵니다.

그런 것을 여러분들이 듣고 보면서 ‘저 사람은 주님 못 만났지 싶다.’ 이걸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사람, 그 사람에게는 주님이 계신 사람이고 주님을 만날 사람입니다. 대인관계에서 대화를 주고받는 데, 중국집에 가서 음식을 시키는데 “짬뽕으로 할래, 짜장면 할래?” 이렇게 할 때 보통 사람은 짬뽕이냐 짜장면이냐냐를 본인이 결정하잖아요.

그런데 이런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상당히 우스꽝스러운 모습인데 “잠깐 가만있어 봐. 주님이 먼저 계시니까 주님께 한번 물어보고 하겠습니다.” 그리고는 ‘주님이여, 짬뽕입니까, 아니면 이번에는 짜장면을 주시겠습니까?’ 이렇게 기도한다면 상대방이 “너 이상해.” 그 정도가 아니고 측은하게 봅니다. “너 왜 그렇게 불편하게 사냐. 그런 건 네 소관이야. 주님은 바빠. 짬뽕이나 짜장면까지 너에게 이야기 하지 않아.”라고 아마 측은해하고 나무랄 겁니다.

그러면 이제 문제를 확대해 보겠습니다. “주님이여, 오늘도 제가 살 겁니까? 오늘로 해서 주께서 저를 마감시킬 겁니까?”라는 기도를 한다면 ‘살고 죽고의 주도권이 살아있는 나한테 있지 않다’라는 것이 그 사람의 평소 삶의 태도에 녹아져 있죠. 짬뽕이나 짜장면이 좀 심했다 싶으면, ‘살고 죽는 것’, 이것은 모든 일의 주도권이 나에게 있지 않다는 거예요.

심지어 내가 하나님 믿는 것조차도 ‘뭐 계시니까 믿지.’ 이게 아니고, 믿고 안 믿고도 믿음을 주셔야 된다는, 주도권이 주님 앞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 그 사람은 출발점을 자기로부터 하지를 않습니다. 제가 이렇게 하면 이런 반발이 있을 수 있어요.

‘나도 엔간히 주님 계신지 안 계신지, 주님이 살아 계신지 없는지, 일을 하는지 안 하는지 궁금했는데 그 궁금한 것은 일단 내가 죽어보고, 죽어봐서 진짜 천국이 있는지 가 보고 그때 결정하고 싶다.’ 이런 생각이 들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왜 있냐면요, 내가 죽고 난 뒤에, 내가 없어지고 난 뒤에 일어날 일이 성경의 내용이에요. ‘내가 죽고 난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나지?’ 여기에 대해 성경은 이야기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죽지 않으면 자꾸 내가 있다는 것이 주님이 성경대로 하는 일을 가리거든요. 방해가 된다고요. 주께서 뭐라고 뭐라고 해도 잔소리처럼 들려서 “시끄럽습니다. 나는 살아있고 살아있는 내가 뭘 할 것인가, 이게 내 인생의 모토입니다. 난 이렇게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성경 덮어버리고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내가 하는 일이나 쭉쭉 도와주소.” 이렇게 된단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일이 하나님의 일대로, 현실이 하나님의 말씀에 전제해서 만들어지려면 일단 내가 죽었다고 치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봐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보다 먼저 선배 격으로 하나님의 계시와 말씀을 받은 사람들이 있어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세와 다윗, 이 사람들이 우리하고 같은 아담의 후손으로서 자기 생존에 급급하며 살아왔던 것이 성경에 쭉 나와 있어요. 우리하고 똑같아요. 내 생존이 우선입니다. 생존이 우선인데 하나님은 말씀으로 그들을 가만두지 않았거든요.

그들에게 어떤 계시를 주는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세와 다윗이 그 계시를 만나서, 자기 성깔대로 자기 사는 게 우선이니까 그걸로 나서다가 여지없이 깨지죠. 여지없이 깨지면서 그들이 느낀 것이 뭐냐? 내가 죽고 난 뒤라도,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일은 스톱이 되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나는 뭐냐? 하나님의 계시가, 하나님의 일이 왔다가는 버스 정류소, 정류장 역할을 하는 겁니다. 다녀가는 거예요. 주의 말씀이 다녀가는 거예요. 그러면 내 인생의 주도권이 나한테 있지 않고 말씀에 종속되는 겁니다. 주께서 터치하고, 그다음 사람에게 터치하고, 또 터치하고 넘어가는 겁니다.

이것을 하나의 묶음으로 제대로 묶어서 이야기 하시는 사건이 있는데 그 사건이 뭐냐? 어린양 피 발라서 이스라엘이 만들어지는데 그 어린양이 죽는 유월절 사건이에요. 그 유월절 사건에서 유월절 양을 우리가 주시하고 주목해 봐야 돼요.

양이 죽고 난 뒤에 그 유월절 양이 그대로 사라졌을까요, 아니면 제사 율법 안에 녹아져 들어갔습니까? 양은 죽었는데 그 양의 죽음이 제사법이라는 새로운 율법이 제공되면서 율법 안에 어린양의 죽음 자체가 살아있어요. 어린양이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어린양의 죽음이라는 그 취지 자체가 율법 안에 녹아 들어가 있다 그 말이죠. 그게 바로 오늘날 성도의 운명이에요.

성도가 죽게 되면 성도는 하나님의 율법의 완성, 천국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완성, 거룩의 완성 안에 성도의 모든 취지가 속속들이 퍼져 있어요. 그러니까 이 말은 한마디로 말해서 ‘말씀이 살아있으면 말씀 안에 하나의 부분으로서 저와 여러분들이 살아있는’ 겁니다. 더 줄이면 ‘살아있어요.’ 뭐로? ‘말씀으로 전환되어서 살아있어요.’

그러니까 여기서 중요한 관건은 뭐냐? 어떻게 나밖에 모르는 내가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으로 전환되는가? 이게 관건이에요. 유월절 어린 양으로 위치 변동이 일어나지 아니하면, 말씀의 완성 안에 살아있지 아니하면 생명이 없고요, 그건 저주밖에 없어요.

야, 이거 고집 센 나, 내가 최고고 나밖에 모르면서 내가 살아있다는 게 너무 강렬해서 주님 같은 건 생각해 보지도 않는 이 나를 어떻게 내 방법으로 죽일 수가 있는 거예요? 그러면 자살할까요? 자살해도 소용없어요. 자살해도 자기 죽음이지 어린 양의 죽음은 아니잖아요.

어차피 늙어 죽게 되어 있는데, 늙어 죽기 전에 찬스가 왔는데 어떤 찬스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줘요. 율법을 줘서 율법과 결합이 되면 율법이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가면서 내가 나에게 떨어져 나가요. 히브리서 10장 9절의 말씀입니다.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첫 것을 찢어버린다, 폐한다’라는 말, 여기서 첫 것이 뭐냐하면 율법입니다. 율법은 인간의 몸이 있는 곳을 다 노리고 쳐들어오는 게 율법이에요. 율법은 ‘하라, 하지 말라.’라는 지시와 명령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들의 마음이 있고, 의지가 있고, 감정이 있고, 몸이 있는 인간에게 요구를 하는 거예요. “너 십계명 지켰어? 부모를 공경했어? 도둑질했어, 안 했어?”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주시는 이유는, 율법이 우리한테 달라붙어요. 달라붙는데 히브리서 10장 9절에 보면 달라붙으면서 “너 제대로 못 했잖아. 저주나 받아라, 이것아!” 하고 율법에 우리를 붙여서 같이 떼어내는 거예요. 붙여서 떼 낸다고요. 떼어내면 율법이 떨어져 나가면서 그동안 우리를 통제하고 총괄했던 자아라는 것도 죄인의 모습으로 율법과 더불어서 떨어져 나가요. 우리 몸에서 떨어져 나간다고요.

떨어져 나가는 것을 히브리서 10장 9절에서는 ‘첫 것을 폐한다.’라고 해요. ‘찢어버린다.’에요. 율법을 찢어버린다, 이 말은요 골로새서 2장에도 나와 있어요. 골로새서 2장의 말씀은 이 말씀보다 훨씬 더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골로새서 2장 14절에 보면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이 ‘도말한다’라는 것은 찢어버린다는 거예요. 어떤 자에게 그렇게 되느냐? 골래서서 2장 11절에 보면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게 얼마나 어려운 말입니까? 단순히 하나의 문자로 들리잖아요. 이게 문자가 아니고 십자가를 통해서 실제로 현실화시켰다는 겁니다.

분명히 성경에 나와 있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이야기가 일상의 언어에 속하지 않는 외계어,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무슨 말인지를 몰라요. 차라리 불경처럼 이슬람의 코란처럼 ‘이거 해라, 복 받는다. 그리고 이것은 하지 마라’ 이게 얼마나 수월합니까?

성경은 전혀 수월하지 않아요.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이 엉뚱한 이야기를 가지고 이걸 믿는다? 이것은 믿지 말라는 이야기랑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네가 이걸 믿을 재간이 있어?” 뭐 이런 식이란 말이죠.

그래서 제가 쉽게 두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어제 어떤 집사님께서 저한테 택배를 하나 보냈어요. 열어보니까 꼬마 개한테 입히는 옷을 부쳐 왔어요. 개 옷, 개 옷 두 개를 부쳤어요. 우리 집에는 개 없습니다. 그런데 저한테 개 옷을 보냈단 말이죠. 이것은 외계어지요? 분명히 저한테 해당 사항이 없어요.

보내신 분한테 연락을 해보니 본인한테 배달할 것인데 주소를 잘 못 써서 저한테 보내진 거예요. 그래서 제 아내와 아주 심사숙고 의논을 해서 “보내드리자” 했어요. 그랬는데 이게 잘못이에요. 보내주면 안 돼요.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 개 옷을 내가 입고 내가 택배로 보내져야 돼요. 이게 복음입니다.

나랑 전혀 상관없는 옷이에요. 양복도 아니고 넥타이도 없어요. 내가 필요로 하지 않는데 보내신 분이 필요한 거예요. 그러면 ‘나한테 필요 없으니까 보내드리자.’ 이것은 말씀과 내가 남남이 되는 거예요. 영원히 ‘빠이빠이’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히브리서 10장 10절에 보면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라고 되어 있어요. 우리가 꼬마 개의 옷을 얻은 거예요. 이것은 예상도 못 한 거예요.

그래서 저는 개 옷을 입고 내가 택배 안에 들어가서, 내 몸무게가 조금 나가지만, CJ 택배 회사 통해서 갔을 때 그 집사님이 뜯어보면 개 옷을 받기는 받는데 무슨 덩치 하나가 그 옷 입고 등장을 하겠죠. 이게 주의 뜻입니다. 이게 주의 뜻이에요!

먼저 연락이 와야 돼요, 먼저. 내가 주문하지 않은 하나님의 연락. 내가 주문한 하나님은 우상입니다. 내가 주문한 예수, 성령 다 사기에요. 주문하지도 않고 왔는데, 과연 주문하지 않는 값을 한다고 내가 원치 않는 그것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내가 천국 가기 위해 내가 필요로 한 말씀이 아니고, ‘우리가 자기중심으로 살았기 때문에 말씀을 천 독을 해도 천국 못 간다’를 알려주는 말씀이 이 말씀이에요. 우리는 하나님 없이 살기 때문에. 주 만날 생각으로 두근두근 그런 거 없습니다. 우리는 내 소원대로 하면 두근거려요.

자, 그럴 때 이 말씀이 과연 성경에 있는가?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27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그리스도로 옷 입고 세례를 받은 자는 그동안 내가 주도적으로 꾸렸던 내 인생의 옷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가 이 땅에 와서 평생 고생한 모든 결과물을 옷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덮어씌우면서 성령을 통해 우리를 반송합니다. 그래서 제 아내와 의논하기를 반송하기로 했고, 그래서 반송합니다.

그런데 이것 가지고도 하나님의 구원을 설명하는 데 좀 미흡한 점이 있어요. 옷 입는다는 취지는 창세기 3장 21절에서 하나님께서 아담의 옷을 벗기고 가죽옷을 입히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옷을 통해서 나는 너를 다루겠다는 거예요. 그 옷이 뭐냐? 그리스도 십자가죠. 십자가를 통해서 다루겠다. “너 돈이 좋아, 십자가가 좋아?” 너한테 늘 이렇게 택배로 보내겠다는 겁니다. 우리는 돈이 좋지 십자가는 밀어놓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강제 조치를 해서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로 옷 입고 주님 앞에 같이 만날 수 있도록 해주는 거예요.

이스라엘에게 어린 양을 주신 이유는 어린 양의 죽음에 참여를 해야 ‘내가 살았다’가 아니라, 새로운 율법의 완성, 하나님이 원하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의 제사, 그 제사에 네가 일부로서 녹아져 있고, 거기에 포함되어 있고 가담되어 있을 때 그게 ‘거룩함을 얻었다’가 되는 거예요. 윤리, 도덕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거룩함을 얻었다는 것은 우리 인간에게 생소한 겁니다.

그런데 이것 가지고도 뭔가 미흡한 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두 번째 예를 들 텐데 이 두 번째 예를 통해서 앞에 있는 애견 옷과 한번 결합시켜 보세요. 두 번째 예가 뭐냐하면 달고나입니다. 자, 달고나 만들 때 설탕을 이렇게 종지 하나에 놓고 슬슬 녹입니다.

설탕이 그냥 녹아봐야 그것은 달고나가 아닙니다. 거기에 소다를 집어넣어야 돼요. 소다를 집어넣으면 그다음부터는 소다의 성질에 의해서 설탕 색깔이 변해요. 이것은 소다가 없을 때와 있을 때의 차이를 보여주는 겁니다. 주님께서 우리 자아를 설탕 녹이듯이 녹여버립니다. 녹인다고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가룟 유다도 녹아졌고, 이 세상의 많은 불신자들 다 죽습니다. 죽는데 죽는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뭔가 다른 요소, 인간이 ‘정녕 죽으리라’ 해서 죽는 것은 기본이고요, 죽는데 이 죽음의 색깔이 다른 색깔의 죽음으로 변화되기 위해서는 다른 요소를 집어넣는데 그게 달고나에 소다 집어넣는 거예요.

소다를 집어넣으면 색이 노릇노릇하게 되면 그 국자를 탁탁, 칩니다. 치면 툭 떨어지겠죠. 손녀가 그 달고나를 먹으면서 이런 훌륭한 고백을 해요. “할머니! 설탕이 다 안 녹았네요.” ‘아, 바로 저거다.’ 설탕이 다 안 녹았네요. 설탕이 다 안 녹아서 소다의 효과보다도 설탕, 자아의 효과가 강렬한 거예요.

소다라는 것은 십자가의 피입니다. “제발 좀 죽어 줘!” 이거거든요. ‘제발 좀 죽어 줘.’라고 하면서 주께서는 우리 안에 율법을 완성한 십자가로서 복음을 줬는데 소다의 효과가 너무 급하게 만들었는지 설탕 덩어리가 있단 말이죠.

손녀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 단면을 딱 깨서 저보고 보라는 거예요. 손녀가 하는 말이 “설탕 덩어리 보이죠?” ‘나는 눈이 나빠서 안 보이는데?’ 율법을 폐했다는 말은, 율법을 찢어버렸다는 말로 해야 돼요. ‘율법을 찢어버렸다’라는 말은 이런 겁니다.

자기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내가 존재하는 인간의 그 성깔, 성질, 못 돼먹은 버릇, 이 모든 것의 용도가 주님의 소다라는 소스 그것을 위해서 필요했던 거예요. 베드로의 성격, 요한의 성격, 열두 제자의 모든 못난 그 자질들, ‘이런 인간도 생명의 요소가 될 수 있다’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열두 제자를 그 의미를 가지고 다 뽑은 거죠.

마태복음 13장 33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은 달고나보다 더 확실하게 잘 보여주고 계십니다. 34절에 보면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누룩의 특징은, 가루 서 말을 부풀게 하는 현상은 나타냈는데 그렇더라도 누룩 자체는 전혀 보이질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아는 사람에게 전도할 때 하나님 믿어라, 예수님 믿어라, 하면 “보여주면 믿을게.” 하잖아요. “나도 죽어서 지옥 가기 진짜 싫어. 믿고 싶은데 하나님을 보여주면, 예수님이 구름 속에 나타나든지 꿈에 나타나든지 그런 식으로 보여주면 내가 믿을게.” 하잖아요. 이 누룩은 안 보여요.

왜 안 보이는가? 보이는 시기는 예수님 공생애 3년이 전부였습니다. 3년 이후에는 보고 믿는 게 아니고 보지 않고 구원을 시키는 방법이에요. 그게 성령에 의해서 되는 겁니다. 그 말은 ‘본다고 하니 소경’(요 9:39) 되게 만드는 거예요. 보는 자들은, 이미 본다는 자들은 보는 주체가 누구냐? 내가 여기 있음이 보는 주체잖아요. 내 주체가 엄연히 살아있는 것, 설탕이 녹지를 않았어요. 설탕이 녹지 않는 한 누룩의 가치와 의미는 방해받고, 훼방되는 겁니다.

“너희 교인 수 몇 명이야?” 이 말이 성립이 되려면 보이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숫자화가 되어야 하잖아요? 그러면 그것은 보이는 거잖아요. 너희 교회 헌금 얼마나 나오는데, 너희 교회 의사 몇 명 나와, 이런 거요. 너희 교회 건평 몇 평이야, 이런 거 전부 다 보이는 거예요.

왜 보이는 것이 그렇게 관심사가 되느냐 하면, 본인이 누가 뭐래도 보이기 때문에 그래요. 보이니까 자기가 우선순위에요. 내가 어떻게 남들처럼 좋은 차 타고, 넓은 아파트 살고 어떻게 하고…, 자꾸 모든 인생사 우선순위가 보이는 나한테 집중되어 있습니다.

지난 낮 설교한 것처럼 부부가 자식한테 이야기하는 것은 “너도 빨리 자리 잡아야지. 자리 잡아서 좋은 남편 만나 시집가야지.” 이런 거. 결혼식 할 때 신랑이 투명 인간입니까? 보이잖아요. 자기만 보는 게 아니고 남들 다 보잖아요. “야, 남편 허우대 멋지다. 인물 봐.” 그 멋진 남편이 거룩입니까? 멋진 남편이 거룩 아니죠? 그런데 거룩보다 더 기분 좋은 이유가 뭐예요? 나라는 설탕이 그대로 살아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태복음 22장에 천국 잔치를 베풀 때 주님께서 마구잡이로 데려갔던 사람에게 쓴 용어가 있어요. 그 용어가 이렇습니다. 22장 12절인데요, 초청한 손님이 아무도 안 오니까 길거리에서 아무나 만나서 천국 잔치 자리를 채우라고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해요.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여기 호칭이 뭐냐면 ‘친구’예요. 친구라고 하면 관계가 이미 정상적으로 끝난 걸로 아는데 그게 아니에요. 13-14절에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택함을 입으려면 먼저 청함이라는 절차부터 거쳐서 택함이 그 뒤에 느껴지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아무나 구원받는다, 기분이 얼마나 좋은 말이에요. “아무나 구원받는다, 아무나 오라.” 정말 기분 좋은 말이죠. 그러나 택함은 네 마음대로 안 된다는 거예요. 아무나 오라는 방식으로는 택함이 성립이 안 된다, 이 말이에요. 아무나 오라고 하는 것은, ‘어차피 만나지 못할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이라는 것을 구분하기 위해서 오라고 하는 거죠.

그러니까 제가 여러분께 당부하고 싶은 것은 제발 좀 불신자와 사귀시고 불신자와 사세요. 불신자를 통해서 뭘 알 수 있느냐? 자아를 설정하기 위해 그들이 어떤 조건을 정신없이 끌어모으는지 눈으로 한번 목격하세요. 내가 남 앞에 인정받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 이런 스펙을 쌓고, 이런 조건을 갖고, 이렇게 돈을 모으고…, 하는 열정적인 노력들을 한번 눈으로 보세요.

‘아, 저게 불신자구나. 저게 불신자들이 가는 길이구나. 저게 바로 주를 만나지 못할 사람들의 전형적인 보편적인 특징이구나.’ 그걸 보시면 되잖아요. 그걸 보시면서 그다음의 질문은 ‘그럼 나는? 저게 불신자의 모습이라면 나는?’ 나는 그들과 같이 안 살아요?

제가 지금은 안 가지만 옛날 한 수십 년 전에 이발하러 미장원에 몇 번 간 적이 있습니다. 미장원에 가면서 굉장히 궁금했던 게 있어요. 미용사하고 손님하고 주로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그게 궁금했어요. 지금 가는 이발소는 묵언 수행입니다. 아무 말이 없어요. “앉으세요.” “구천 원입니다.” 요새 같으면 “만 원입니다” 하면 끝나는 거예요.

그런데 드라마 같은 데 보면 미장원에서 이야기를 많이 하잖아요. 그 이야기를 듣고 정리하고 종합해 보면, 생존에 관한 겁니다. 세상 죄를 지는 유월절 어린 양 속에 참여하는 이야기가 없어요. 그게 바로 불신자의 세계입니다.

자, 여기서 우리가 이러한 원칙, 그 달고나와 애견 옷가지고 하나님께서 나밖에 모르는 인간, 고집불통인 우리를 어린 양의 죽음에 집어넣는데 그 작업에 대해서 “네가 어린 양의 죽음에 참여하라.” 이런 지시를 내리지 않아요. 그렇게 하지 않고 주께서 택한 자가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에요. 그리고 모세와 다윗입니다.

이 다섯 명, 성경에 많습니다만, 이 다섯 명의 직업이 뭘까요? 객관식 문제입니다. 1) 부동산 투기 2) 해외 사업가 3) 교사 뭐 여러 가지 있을 수 있어요. 정답은 목자입니다. 목자예요. 모세가 양 치는 사람이었어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었지만 지명 수배받고 애굽을 빠져나와서 시내산에서 양을 쳤던 목자예요.

다윗은 직업이 뭐냐? 목자였습니다. 그 집안 자체가 목축하는 집안, 그것도 여덟 번째 아들이 다윗이었어요. 시편 23편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되어있죠? 목자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 당시에는 뭐 직업이 대장장이라든지 특수한 직업이 아니고서는 그냥 목축업을 했어요.

목축, 그 직업을 통해서 주께서는 뭘 정립하느냐? 무엇이 양이고, 무엇이 목자고, 양은 어떠해야 하고, 목자는 어떠해야 한다는 그것을 그들에게 알려줬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목자, 모세도 목자, 다윗도 목자라는 말은 장차 그들에게 주님께서 개 옷을 입힐 때 주께서 그 목자의 옷을 입고 우리에게 오시는 거예요.

이렇게 한번 정리해 봅시다. 우리가 주님을 필요로 합니까? 이건 지난 울산강의에서 그런 조로 이야기했는데요. 우리는 주님이 필요 없어요. 우리 평소의 삶은요, 주의 사랑도 필요 없어요. 그냥 날 안 건드렸으면 좋겠어요. 내가 무슨 짓을 하든 간에 잘했다, 잘했다고 해주면 그게 우리의 본성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원하는 것은 내가 필요한 사람을 내가 고르는 방식이에요, 이 땅의 삶은. 내가 주님이 필요할 때는 당신이 쫓아오라는 거예요. 그러나 내가 주님을 필요로 해서 필요하다는 그 생각 때문에 내가 누구의 필요가 되었다는 생각은 거의 안 하고 있습니다.

지금 주님한테는 죄인이 필요해요.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의 순교,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의 죽음, 자신의 죽음을 위해서 죄인이 필요해서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주께서 목자가 되시기 위해서 목자와 양의 개념으로 일상의 직업을 삼고 있는 사람, 그들을 주께서는 택하여 그들의 삶에 그냥 동행하죠.

같이 탑승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들은 ‘목자는 이러이러해야 되고, 양은 이러이러해야 된다는 것’으로 기존의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그런데 주님이 그들의 인생 속에 낯선 목자로 탑승하면서 그들의 인생이 꼬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 점은 국가가 되고 난 뒤에 이스라엘에게도 마찬가지거든요.

에스겔 34장 12절에서 16절에 길게 나와 있는데 제가 줄여서 말씀드리면 2절에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을 쳐서 예언하라.” 지적하는 거죠. “그들 곧 목자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자기만 먹이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찐저.”

목자가 틀려먹었다는 거예요. 목자를 지적한다는 것은 장차 오실 메시아께서 자기가 목자 역할을 하기 위해서, 목자 기능을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찾아오겠다는 것을 미리 예언을 통해 말씀해 주는 거예요. 그러면 양은 어떤 양이어야 되는가?

이사야 53장 6절에 보면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양의 특징은 뭐냐? 그릇 행하는 거, 잘못 사는 거예요. 잘못 사는데 어느 정도로 잘못 사는가, 잘 못사는 그 모습이 뭐냐? 각기 제 길로 가는 거예요. 각기 제 길로 가니까 오늘 히브리서 본문에서 ‘거룩함을 얻으라’고 하니 거룩함도 각기 자기가 스스로 자기한테 목자 노릇을 하는 거예요.

목자가 따로 있는데, 자기는 기껏해야 그릇 행하는 양 주제에 자기가 주도적으로 자기를 선한 길로 인도하려고 환장하고 있습니다. 성경대로 사세요. 각기 제 갈 길로 가고, 우리가 할 것은 죄밖에 지을 게 없습니다. 양이 양다워야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 욕구와 욕망밖에 모르는데 그걸 자기가 컨트롤하는 목자 되겠다고요. 있을 수가 없는 일이죠. 지그 그릇 행하는 ‘양’이라는 작자들이 없어요. 전부 다 나름대로는 거룩하고, 나름대로는 착하게 산다고 전부 다 우기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찬송가, 개정되기 전 찬송가죠 168장에 보면 그 제목이 “하나님의 나팔소리”로 돼 있어요. 이게 미국의 가스펠송인데 원래 제목이 뭐냐? “When the roll is called up yonder.” 입니다.

‘yonder’이라 하는 것은 ‘저편에서’, 이쪽 인간편 말고 저편에서. ‘roll’이라는 이 단어가 둘둘 마는 ‘두루마리’라는 단어거든요. 어떤 해석해 보면 이걸 뭐라고 했느냐 하면, ‘명부’라고 했어요. ‘명부’라 하면 여러분 기분이 싸~하지 않습니까? ‘명부’ 하면 주로 뭘 연상하면 돼요?
‘죽은 자의 명부’ 그리고 ‘called up yonder.’ call, 너를 불러주는 거예요. call, 부른다.

그런데 명부에 적힌 사람만 주께서 불러주셔서 yonder, 인간이 상상도 못 한, 주님만이 계시는 그쪽으로 불러주시는 그 부르심의 능력, 그 부르심의 능력으로… “이미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할 때 그 부르심의 능력으로, 소리의 능력으로 저쪽 세계에 훌쩍 넘어간다는 그 찬송이에요.

그런데 이 제목에 대해서 너무나 마음에 드는 해석이 있습니다. ‘call up’ 우리가 보통 ‘부른다’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어떤 해석 보니까 이걸 ‘점호한다’는 거예요, 점호한다. 군에 안 가 본 여자분들은 몰라요. 군대에서 밤에 제일 견디기 힘든 시간이 점호시간입니다.

누가 탈영 안 했는지, 누가 외박해서 안 들어왔는지, 안 그러면 다른 데서 와서 친구라고 끼어들어서 누워 있지 않은지, 제 자리에 그리고 제 이름에 해당되는 병사가 딱 있어서 ‘그래, 너는 이 자리가 맞아, 내가 확인했으니 넘어가’ 하는 이게 점호 시간입니다. “번호!” “하나! 둘! 셋! … 번호 끝!” 이게 점호하는 거예요.

어디서? yonder, 저쪽 편에서. 그런데 이 좋은 제목을 두고 우리 찬송가에서는 그냥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돼 있어요. 아, 마음에 안 들어요. “하나님의 나팔 소리 천지 진동할 때에 예수 영광중에 구름 타시고~” 이렇게 해놨는데요. 영어 가사에 보면 뭐라고 고백하고 있는가? “I will be there~” 언젠가 내가 거기에, 거기에 be, 존재한다. ‘나는 거기에 존재할 겁니다.’ yonder, ‘그쪽 세계에 내가 존재합니다.’ 이렇게 돼 있는 거예요.

듣기만 해도 기분 좋지요. 그런데 이 찬송가 보고 기분 좋은 건 좋은 거고요. 문제는 그 절차, yonder, 이쪽 세계 말고 저쪽 세계, 저편의 세계에 가려면 그 절차, 그 절차를 위해서 주님께서 친히 목자가 되셔야 하죠. 목자가 보면 양 같은 양은 아무도 없어요. 목자를 이해하는 양은 없다 이 말이죠.

나를 구원하려는 목자, 사기꾼 목자들은 한둘이 아니라 많죠. 넘쳐났죠. 그런데 에스겔 34장에 보니까 이 목자들이, 자기를 구원해 달라는 양들은 많으니까 그 양들의 구원 욕구를 채워 채워주는 척하면서 그들에게서 빼먹을 거 다 빼먹는 목자들이 있더라는 그 말이죠.

에스겔 34장 보면, ‘엉터리 목자들 때문에 진짜 하나님이 yonder에서 점호, ’call up’, 부르심을 받을 ‘roll’, 그 명단, 생명체 이름이 명단에 있는 사람을 모으는데 그 양들이 흩어졌다고 하는 겁니다(겔 34:5-6). 흩어졌어요. 목자가 있어야 목자를 찾지요, 그냥 흩어져서 자기밖에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럴 때 주께서의 조치는 에스겔 34장 23절에 보면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찌라.” 다윗입니다, 다윗. 좀 복잡하죠. 그냥 저쪽으로 갈 수 없습니다. 먼저 다윗이 와야 돼요.

다윗이 온다고 했는데 실제로 오신 분은 다윗의 자손이 오셨어요. 메시아가 온 거예요. 죽은 다윗이 온 건 아니고요. 메시아가 왔는데 ‘그들의 목자가 된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목자가 와서 우리를 건지면 되지 않느냐?’ 이렇게 하거든요. 그런데 에스겔 36장 26-27절에 보면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찌라.”

다윗이 오시면서 흩어진 양이니까 그냥 데려가는 것이 아니고 그들에게 무슨 새로운, 그들의 마음 말고, 내 중심으로 사는 마음 말고, ‘예수님 중심으로 모든 게 돌아간다, 든 것은 예수님 일하심의 하나의 부속품’이라는 인식을 하는 그러한 새로운 마음을 우리 속에 집어넣는 거예요.

집어넣는 이것을 저는 두자로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납치’, 납치예요. 알아서 주님께 오질 않아요. 주님이 납치를 해야 돼요. 강제 납치예요. 말씀으로 살살 꼬인다고 교회 나오고 뭐 예수 믿고, 인간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아요. 그런 것은 이미 사기꾼 목자들이 지금 하고 있어요.

“당신이 이렇게 하시면 구원받고, 이러면 복 받습니다.” 그 이야기는 사기꾼들이 지금 교회라는 이름으로 다 하고 있어요. 그렇지 않아요. 진짜 목자는 우리에게 성령을 주십니다. 성령을 안 받은 상태와 성령 받은 상태의 차이는 뭐냐? 성령을 안 받은 상태는 ‘불신자가 교회 와서 구원받겠다고 노력하는 거’ 그게 바로 그게 성령 안 받은 상태예요.

계속해서 자기가 자기에게 입힌 그 옷을 자꾸 내세우게 됩니다. ‘내가 교회 와서 이렇게 충성하고 봉사합니다.’ 자기가 만든 옷 있잖아요, 자기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서 입은 옷. 애완견 옷 말고요, 택배로 온 그 옷 말고 자기가 입은 옷을 자꾸 주장하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의 새 영은 주문하지도 않는데 우리에게 택배가 날아와 버렸어요. 그 영은 뭐냐? ‘십자가 앞에서 내가 뭘 해도 죄인 중에 괴수’라는 그 마음입니다. 죄인 중에 괴수에요. 다만 ‘내가 예상도 못 하는 죄의 깊이와 넓이를 죽을 때까지 계속 끄집어내는 그 모습’이 우리 일평생 할 일로 남아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이라는 그 이사야 53장 6절의 말씀이 우리를 통해서 그대로 재현되기 때문이에요. 복잡한 말로 할 것도 없이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벌써부터 우리는 말씀이 기록된 대로 보여주는, 말씀이 기록된 대로 표현해야 할 도구로 다루어지고 있다는 거예요.

내 인생 속에 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말씀 속에서, 말씀에서 하지 말라고 지적된 그 죄의 모습을 보여주는 그러한 관계속에 들어간 거예요. 목자께서 없는 양을 새로 만들어내시는 거예요. 목자가 오셔서 성령으로 “너는 양이야”라고 만들어내는 겁니다.

열두 제자의 예를 들면, 열두 제자는 ‘주께서 자기를 선택했기 때문에 주님은 목자고 자기는 양’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 양, 김 양, 이 양, 최 양 전부 다 그 양들은 십자가 때 다 도망갔습니다. 그 달고나도 아니고요. 여전히 자기 옷 입고 ‘참, 그때 그 추억이 좋았지. 예수님이 너무 보고 싶다.’ 이걸로 끝나요.

‘그래. 돌아가신 분은 돌아가신 거고 살아 있는 나는 어쨌든 간에 살아야 할 거 아니냐.’ 이렇게 된다고요. ‘어쨌든 간에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즉 ‘주일 날 교회 가는 교회 가는 거고,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내 바쁘게 해야 할 일 해야지.’ 그 똑같은 겁니다.

얼마 전에 제가 봤던 드라마, 충실히 보지는 않습니다만, 대충 봅니다만, <폭군의 셰프>라는 그 드라마 제일 마지막 장면에서 제가 감동받았어요. 배경이 연희군 시대, 연산군 시대죠. 현대의 어느 호텔에서 아주 요리가 잘하는 여자 셰프가 타임 루프를 타고 조선시대로 돌아갔어요.

요리를 잘하니까 왕실의 주방을 책임지는 대령숙수가 되었습니다. ‘연’씨라서 때문에 ‘연숙수’입니다. 연숙수가 폭군하고 사랑에 빠졌어요. 그 폭군은 나중에 실정하고 셰프는 다시 자기 시대로 넘어왔는데 그 마지막 넘어오는 장면이 있어요.

연숙수, 대령 숙수가 그 사랑하던 폭군과 헤어지면서 폭군의 일기장에 글씨가 있었는데 그폭군이 죽으면서 글씨가 같이 다 날아가요. 그러니까 말씀이 뭉쳐져서 연숙수가 된 거예요. 이건 드라마를 봤어야 하는데요. 우리의 모든 것이 말씀에 기록된 대로 ‘roll’ 말씀에 기록된 대로, 나중에 죽어보니까 이 땅에 언제 태어나고, 언제 죽고, 그것이 전부 다 말씀에 기록된 대로 그렇게 되어야 할 수밖에 없는 긴긴 세월을 살아온 거예요.

죽고 난 뒤에 십자가 안에 들어가 보니까, 성령을 받고 보니까 이 모든 것이 나의 인생이 아니고 주의 인생이라는 것을 그제야 발견을 하는 겁니다. 나는 철저하게 그릇 행하여 제 갈 길로 가야 하는 그것조차도 목자가 목자 되기 위한, 주님을 위한 하나의 배경이었다, 배치였고 무대 장치였다는 사실. 그게 말씀의 세계고, 히브리서에 의하면 그게 허상의 세계가 아니라 실상의 세계입니다.

그 실상의 세계 그 공간 전체가 뭐다? 거룩이고, 히브리서 10장 10절에서는 우리가 거룩한 게 아니고,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거룩 안에 놓여서 지금 벌써 살고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 말씀이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고, 도리어 성경 말씀이 우리를 덮쳐서 우리가 어린 양과 더불어서 동행하고 있음을, 나는 죽고 주 안에 새로 살고 있음을, 우리가 살아있는 생애를 통해서 온몸으로 느끼면서 주께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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