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세계의 한계
2025년 10월 1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18:16-19
18:16 오바댜가 가서 아합을 만나 고하매 아합이 엘리야를 만나려 하여 가다가
18:17 엘리야를 볼 때에 저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네냐
18:18 저가 대답하되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비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좇았음이라
18:19 그런즉 보내어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 인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인을 갈멜 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오게 하소서
18:20 아합이 이에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로 보내어 선지자들을 갈멜 산으로 모으니라
아합이 엘리야를 만나면서 먼저 말을 건넵니다. 이는 자신이 이스라엘의 군주이니까 엘리야에게 명령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여긴 겁니다. 명령을 하는 이유는 자신에 내뱉는 말의 위세가 엘리야를 장악할 수 있다고 자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군주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과 인간들 사이에서도 작용합니다.
사람이 다른 이들에게 말을 건네는 것은 상대가 나의 세력권 안에서 소속시키려는 의도가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군주가 엘리야에게 명령쪼로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서 다른 이들은 하등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겁니다. 특히 군주(=왕)은 한 나라를 운영하기 위해 법을 세우는 자입니다.
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군주가 만든 법에 따를 때, 비로소 그 나라는 군주의 권위가 살아 있는 나라가 되고 이점에 대해서 모든 백성들이 안정적으로 국가 체제를 받아들이게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군주가 권력의 최정점에서 법을 만드는 취지는 자신의 나라가 진리로서 다스려지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아합이 엘리야에 지명수배를 내리고 체포를 지시한 것은 그 지시를 내린 왕은 진리의 최정점에 자신이 자리잡고 있음에 흠집이 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반면에 엘리야가 아합을 찾아가는 것은 이러한 ‘말의 세계’에 한계가 있음을 지적하기 위함입니다. ‘말의 세계의 한계’란 인간의 말로서 자연마저 통제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극도의 가뭄에 놓여 있습니다. 자연에 대해서 철저하게 예속되어진 상황입니다. 아무리 인간들끼리 법을 만들어 놓아봤자 가뭄과 기근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비가 내리지 않는 상황’은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북이스라엘은 그런 식으로 다루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다른 사람과는 달리 ‘말’을 하는 자가 아니라 ‘말씀’을 내어놓는 자입니다. 이는 엘리야가 ‘말의 세계’에 속한 자가 아니라 ‘말씀의 세계’에 속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엘리야의 입장에서 보면, 그 당시 이스라엘은 전체가 ‘말의 세계’에 속합니다. 이 ‘말의 세계’로서는 가뭄과 기근에 대해서 해결책을 내어놓지 못합니다.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형편입니다. 창세기 3:17에 보면,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2:17에서 하나님께서 언급한 벌칙은 당장 죽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이는 인간이 출생해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일상 자체도 죽음의 표현이라는 말입니다. 바로 이러한 불변의 원칙을 위해 자연세계로 협조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가뭄이요 기근입니다. 즉 ‘말의 세계’에 속한 자들과 군주는 이 사실을 모릅니다. 그들 세계의 한계를 지적하기 위해서 엘리야는 아합과 만나는 말씀을 건네는 겁니다.
그들과 싸우고 경쟁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도리어 말씀에 입각해서 확인해주기 위함입니다. 말에 속한 사람들과 싸우거나 화를 낼 이유가 없는 겁니다. ‘말의 세계’에서는 인간들은 자신이 ‘말을 한다’고 하지만 실은 말이 인간을 통해서 나타나는 겁니다. 이 원리는 엘리야가 속한 ‘말씀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의 세계’에서는 세상 돌아가는 것이 자기 뜻대로 안되면 화가 나고 분개하지만 ‘말씀의 세계’에 속한 사람들의 현실을 대하는 자세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서 4:13-16에 보면, “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인간의 기분이나 감정에 따라 대자연에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도리어 인간 자체가 ‘있다가도 없어지는 안개’ 곧 ‘자연의 일부’의 일부에 해당됩니다. 이점은 다른 짐승이나 피조세계와 마찬가지 처지입니다. 그러나 말씀의 세계에 속하게 되면 성도는 ‘말씀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다루어집니다. 따라서 ‘말의 세계’와 분명히 차이가 나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6장에는 이에 관련된 예가 나와 있습니다.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고전 6:6-7) 즉 ‘말의 세계’에 대한 사람에게 ‘말씀의 세계’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판단이나 재판받을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말씀의 세계’에서 ‘말씀의 세계’로 옮길려면 반드시 ‘자신이 죽어 있음’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죽은 자가 무슨 말씀을 지킵니까? 도리어 말씀이 그 사람을 사용하게 됩니다. 엘리야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신약에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전도하는 12제자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하셨습니다.
“아무 성이나 촌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마 10:11-14)
여기서 ‘말의 세계’ 안에서 ‘말씀의 세계’가 어떤 식으로 확인되는 지를 보여줍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표적’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 6:26)
표적이란 ‘말의 세계’과 ‘말씀의 세계’의 차이를 확인해주는 현상을 말합니다.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리라’는 것은 ‘말의 세계’에 떨어지는 그 확정된 저주는 ‘말씀의 세계’에 속하는 나와는 상관없다는 겁니다. 이런 사실을 보여주는 표적으로서의 행동이 바로 ‘먼지를 떠는 일’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증인이 이런 모습을 보여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대해서 포괄적으로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50강-열왕기상 18장 16-19(말의 세계의 한계) 251001-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 열왕기상 18장 16-19절입니다.
열왕기상 18:16-19
“오바댜가 가서 아합을 만나 고하매 아합이 엘리야를 만나려 하여 가다가 엘리야를 볼 때에 저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네냐 저가 대답하되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비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좇았음이라 그런즉 보내어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 오십인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인을 갈멜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오게 하소서.”
두 사람이 만납니다. 사람이 만날 때 그냥 뻔히 쳐다보고 지나가면 그냥 아무 일도 없겠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서 서로가 서로를 향하여 말을 던집니다. 아합이 엘리야에게 던진 것은 말이고, 엘리야가 아합에게 던진 것은 ‘말’이 아니고 ‘말씀’이었습니다. ‘말’속에 갇혀 있는 인간과 ‘말씀’에 의해서 움직이는 사람이 같은 장소에서 만나도 서로 상반된 세계, 상반된 영역으로 구분됩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엘리야는 하나님의 세계에 함께 있고, 아합은 인간세계 속에 속한 사람입니다. 아합은 왕인데 자기가 ‘말’을 한다고 이야기하잖아요. ‘말’의 세계의 특징은 뭐냐? 내가 말을 해요. ‘나’가 주어가 됩니다. 그러나 말씀의 세계에서는, 인간은 말씀을 못 합니다. 말씀이 인간을 통해서 나오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말씀이 인간을 통해서 말씀대로 나온다면, 저쪽 곧 아합 쪽에 있는, 말을 하는 그 인간들은 자꾸 ‘본인이 말을 한다.’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고 말씀이 아닌 말이 그 인간을 통해서 말의 세계를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똑같은 말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다’라는 똑같은 뜻을 서로 주고받았지만 그것이 일치되지 않습니다.
아합이 말하기를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할 때 아합은 자기가 이스라엘의 군주라고 생각합니다. 군주라는 것은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한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서 법을 제정하는데 그 법을 제정하는 자가 군주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군주, 왕이지요, 군주는 자기가 제정한 법을 지킬까요, 안 지킬까요? 안 지킵니다.
자기가 법을 만들었기 때문에, 자기가 법의 창조자기 때문에 창조자는 자기가 만든 법에 매이지 않아요. 그래 놓고 이렇게 백성들에게 이야기하지요. “내가 만든 법은 내 나라 이스라엘에서 진리다. 그리고 진실되다.”라고 언급합니다. 진리라고 외치면서 법을 만들고 그 법 중에 뭐가 포함돼 있느냐 하면, “엘리야를 체포하라”가 포함돼 있습니다. 엘리야를 지명 수배 때려버리죠.
그런데 여기서 군주, 아합왕이 만든 지명 수배자 엘리야를 체포하는 법에 군주 본인은 해당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군주는 법을 능가하는 ‘초법(超法)’이기 때문이에요. 자기 빼놓고는 전부 다 법 아래 있고 자기만은 법 바깥에 나가 있습니다. 왜 그러냐고 물으면 “내가 곧 법이다.” 다른 말로 하면 ‘내가 곧 진리’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말의 세계예요. 왕이 법을 만들고 법은 백성들을 지배하는 수단이 되고 방법이 되고. 만약 백성들이 법을 어기면 ‘너는 진리를 어겼다’라는 판결을 받으면서 대법원, 고등법원 지방법원에서 ‘법을 어겼다’라고 하면서 처벌을 받게 돼 있어요. 처벌을 누가 내리느냐? 임금의 이름으로, 아합의 이름으로, 법의 이름으로 처벌을 내립니다.
왜? 군주는 존재 자체가 곧 진리고 법이기 때문에. 그 법에 의한 체포 명령의 대상이 누구냐? 엘리야입니다. 그 엘리야가 오니까 “이 이스라엘이라는 이 나라를 힘들게 하고 괴롭게 한 것이 바로 너다!”라고 아합은 자기가 만든, 자기가 알고 있는 말의 세계를 엘리야에게 나타냅니다, 말의 세계. 자기가 말의 세계에 속하거든요.
그러니까 여기에 대해서 엘리야는 이렇게 합니다. “내가 당신을 만나러 온 이유는 그 말의 세계의 한계를 들춰내기 위해서 온 거”예요. “너희들은 말이 진리라고 하지만 군주인 당신은 진리인 척할 뿐이다.” 진리인 ‘척’, 진리는 아니에요. 엘리야 보기는 진리가 아니에요. 진리인 척, 행세를 하고 있는 거예요. ‘척’이라는 그 글자 하나.
너희들이 법을 만들 때 진리라고 우기는 근거가 뭐냐? 그동안 군주가 내린 법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잘 되었고 잘 풀렸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잘되고 있는 이스라엘을 힘들게 하고 괴롭게 한 것은 바로 너’라는 거예요. 엘리야 너라는 겁니다. “엘리야 너는 뭔데 내가 만든 범위 안에 안 들어오느냐?” 이렇게 이제 따지는 거죠.
모든 것은 내 법안에 있게 되면 진리는 누가 진리가 되느냐? 아합왕 군주 본인이 진리가 되는데 엘리야는 이런 체제의 바깥으로 빠져나가 있으니까 아합왕 입장에서는 자기가 만든 법이 얼마나 실용성 있는지 빨리 체포해서 엘리야의 목을 치든지 해서 ‘거 봐.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는 내가 처단했기 때문에 이제 괴로워하는 일이 없을 거야.’ 이렇게 본때를 보이려고 엘리야가 체포되기를 단단히 기다렸던 거예요.
그런데 그 점에 대해서, 그게 인간들이 기껏 아이디어로 생각하는 국가의 한계, 인간 체제의 한계라는 겁니다. 진리가 뭔지도 모르고 진리인 척을 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엘리야가 의도적으로 아합왕을 만나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그 한계를 벗어나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벗어난 근거가 뭐냐? “이스라엘아! 너희들이 법을 만들었는데, 너희들이 법을 만들고 인간의 말을 사용하는데 인간의 말과 법으로 비가 오지 않은 자연을 통제할 수 있느냐? 자연에게 명령해서 비 오게 할 수 있느냐? 못하지? 못 하지 그치? 그러면 진리가 아니잖아. 그러면 진리가 아닌 거야. 너희들은 지금 인간이 인간을 갖고 놀고 있어. 인간이 인간을 상대하고 있어. 그러나 진리가 되려면 인간은 인간이 자연의 지배를 받고 있는 상태에서 명령과 지시를 통해서 자연도 움직일 수 있어야 그 자연마저 모든 것을 통할할 수 있는 진리라고 할 수 있잖아.”라는 조로 지금 엘리야는 아합을 찾아온 거예요.
지금 엘리야가 말씀의 세계로 대변자로서 아합에게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아합이 만든 이스라엘의 그 한계가 어디까지에 머물러 있고, 그 바깥으로 못 넘어간다는 사실을 지금 이 말의 세계 앞에 나타나서 보여 주는 겁니다. 지금 아합은 누가 미우냐? ‘괴롭게 한다’라는 그 자체가 밉다는 뜻이에요. “엘리야, 네가 밉다!”라는 겁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지금 아합왕이 미운 게 아니에요. 미운 게 아니고 뭐냐 하면, 모르고 있는 거예요. ‘왜 지금 3년째, 3년 넘어서까지 비가 오지 않는지? 그 내막도 모르면서 왕이 법을 앞장세워서 이 나라를 자기 뜻대로, 제멋대로 통제하려고 하더라’는 그 말이죠. ‘이 자연 세계에 대해서 너는 왜 그렇게 무능하냐?’ 그 말입니다.
무능하면서 거기서 무슨 진리값이 나와요? 무능이 무슨 진리입니까? 자연마저 다스릴 수 있어야, 자연마저 움직일 수 있어야 그게 진리죠. 진리는 자연을 포함하고, 그래서 자연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진리에서 나오는 겁니다. 이렇습니다. 말씀의 세계라는 것은 말씀으로 자연을 지시하니까 자연이 그 말씀을 따라가는 거예요. 이게 말씀의 세계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어때요? 지금 하나의 대통령으로서, 하나의 왕으로서, 군주로서 법을 만들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잘 다스리기 위해서 법을 제정했는데 여기에 대해서 시비를 걸고 있는 엘리야를 체포해야 하겠다는 이 아합의 이 주장에 대해서 어떻게, 납득이 됩니까?100% 이해하죠, 100%, 백퍼입니다.
충분히 이해하죠. 충분히 이해한다는 말은 뭔 뜻이냐? 우리가 지금 말씀의 세계에 있지 않고 말의 세계에서 자기 몸의 안위, 자기 몸, 자기 인생만 추스르려고 하는 그것에 너무 성급하게 앞장서고 있지 않은가 하는 거예요.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괴로울 때 헌법에, 이 세상 법에 호소하잖아요.
그런데 고린도전서를 보면, 참 너무 어처구니없는 놀라운 말을 해요. 고린도서 6장 1-6절에, “너희 중에 누가 다른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요, ‘성도는 말의 세계에 속한 게 아니고 말씀의 세계에 속한다’라는 말이에요. 그러면 성도 A, 성도 B가 둘 다 말씀의 세계에 속한 자라면 그들의 문제, 그게 뭐 사소하든지 아니든지 어떤 문제가 있다면 그것을 말씀 앞에 다시 돌아와서 말씀으로 받아들이면 된다는 거예요.
이런 뜻입니다. 말씀으로 재판받으라는 뜻이 아니고요. ‘아하, 말씀의 주가 되신 주께서 우리 둘 사이에 이런 사건을 일으켜서 이런 일이 벌어졌구나. 우리 둘 다 미처 몰랐던 말씀의 내용을 깊이 있게 알게 하시려고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둘이 다 관여되는 이 사태를 일으켰구나.’
그래서 “집사님! 이번 기회를 통해서 말씀의 깊이, 우리가 몰랐던 이런 깊이가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우리 웃으면서 주께 다시 한번 감사합시다.” 이러면 아무 문제가 없다는 그 말이죠. 아무 문제가 없어요. 예를 들어 집사님이 저한테 돈 100만 원 빌려줬어요. “목사님, 일주일 내로 갚아야 합니다.” 했는데 일주일 후에 목사 하는 말이 “돈 빌린 적이 없는데요?”
‘돈이 자그만치 100만 원인데, 10원도 아니고 500원도 아니고 얼마나 많은 돈인데 이걸 빌려놓고는 모른다고 하지?’라고 할 때 문득 뭐가 생각나느냐?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 6:8). 그 말씀 생각이 딱 나면서 ‘이 돈이 내 돈도 아니고, 돈 빌려 간 저 목사가 잊어버린 것도 주의 뜻이고, 그렇게 잊어버릴 줄도 모르고 돈 빌려 간 그것도 주께서 다 하셨구나. 주의 말씀의 깊이가 이렇게 깊을 수가…’ 하고 둘 다 기뻐하면서 일을 마무리 지으면 끝난다는 그 말입니다.
‘말씀의 세계’ 속에 있는 성도가 ‘말의 세계’ 속에 사는 이유가 있어요. 말씀의 세계에 있다고 자부하면서 말씀 자체가 그렇게 가치 있고, 내 목숨보다 귀하다는 것을 우리는 수시로 잊어버려요. 어떤 분은 저한테 이런 고백을 했어요. ‘차를 새로 사는 일에 신경을 썼더니만 주일날 설교가 안 들어오더라’라는 거예요.
‘현대의 코나를 살 거냐, 쌍용의 티볼리를 살 것이냐? 그거 신경 썼더니 말씀이 전혀 안 들리더라.’라는 고백을 한 거예요. 2천만 원짜리인데 그것도 깡통(옵션 없는 최저가 모델)으로 산다는 거, 충분히 이해하죠, 충분히. ‘아하, 우리 성도의 육신은 이 말의 세계에 걸쳐 있고 우리의 영혼은 말씀의 세계에 있구나.’
그러면 말씀의 세계가 우리를 가만두지 않고 날마다 사태, 사건을 일으켜서 육신의 세계, 말의 세계의 한계를 더욱더 깊이 있게 깨닫게 하는 거예요, 더 깊이 있게. 그러면 차 산다고 신경 너무 쓰다가 말씀이 제대로 안 들렸다면, 그런 것을 알게 하는 것도 말씀의 위력 아닙니까?
‘아, 차 사는 게 이게 진리가 아니구나. 진리는 차 사는 것보다 월등하게 더 가치 있다.’ 이걸 아는 계기를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만들어 주시니 그분은 하나님께 큰 은혜를 받은 겁니다. 이처럼 말씀의 세계가 가만히 있지 않고 이렇게 파도치듯이, 밀물과 썰물이 이쪽저쪽으로 밀리듯이 말의 세계에 육신을 두고 있는 우리에게 엘리야와 아합의 만남 같은 사태를 매일의 일상에 일으키시는 거예요.
여기서 아합은 말하기를 “내가 만든 법에 너는 체포 대상이야. 왜 너를 체포하는지 그 이유를 말해줘? 너는 이스라엘을 괴롭게 했다고!” 이스라엘을 괴롭게 했다는 말이지요.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이유가 뭐냐?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않아서 가뭄이 왔다.’
자연은 말이 아니고 말씀을 지키는 거예요. 자연은 말씀대로 움직이거든요. 말씀대로 움직이는 입장에서 볼 때, 가뭄이 든다는 말은, 너희들이 만든 그 헌법이라는 것, 선거라는 것을 통해서 대통령을 뽑고 섬긴다는 것, 일상생활을 한다는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는 말씀의 세계 앞에서는 완전히 무산시키는 겁니다.
“너희들이 백날 열심히 해봐라. 비 안 오면 너희는 다 죽은 목숨이야.” 이것을 말씀의 세계로 알려주는 거예요. 창세기 3장 17절의 그 원칙은 계속되는 겁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세기 3장 17절에는 분명히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라고 되어 있거든요. 창세기 2장 17절에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했다 이 말이지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내가 먹지 말라고 한 열매를 먹었으니 너는 정녕 죽으리라” 이렇게 이야기하시면 되는데 그게 아니고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이런 어떤 부가적인 설명을 해요.
그래서 죽음이라는 것은 뭐냐? 하루아침에 꼴까닥, 죽는 죽음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죽음의 내용을 확장시킵니다. 죽을 때 죽더라도 ‘땅의 저주를 온몸으로 받으면서, 자연의 저주를 받으면서 죽어가는 그것도 죽음에 포함된다.’ 그 말입니다. 태어나서 숙제하는 것부터 해서 그 모든 것도 죽음에 포함되는 거예요.
보통 예배 시간에 교회 오면 앉아서 묵상하며 ‘오늘도 주의 말씀을 깨닫게 해주시고…’ 이렇게 해야 이게 성도의 도리 아닙니까? 아까 예배 시작 전에 제가 속으로 웃었던 건, 오자마자 주스를 달라는 거예요. 그거 받아서 엄마한테 갔어요. ‘아, 저게 성도의 도리인가?’ 조용히 묵상하는 게 아니고?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부터 먼저 챙기는 것. 물론 유치원생의 행동이지만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에요? 우리도 마찬가지잖아요. 왜? ‘말의 세계’는 이미 저주 아래 있기 때문에요.
지금 엘리야는 우리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고 분명히 상황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뭐 미워하고, 시합해서 누가 이기고…,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본문 보면서 사람들이 ‘엘리야는 이기고 아합은 졌다’ 그런 식으로 해석하면 안 돼요. 엘리야가 아합을 이겨서 무슨 낙을 본다고요? 이겨서 뭐 하는데요? 죽은 자인데.
엘리야의 뜻은 이거에요. “네가 말의 세계에 있으니 산 것처럼 보이지만 말씀 앞에서 너는 죽은 자야.” ‘말의 세계에서는 네가 산 것 같지만 말씀의 세계에서 죽었다’라는 말은, ‘말씀의 세계에서는 죽은 자도 살 수 있다’라는 것, 그런 상황으로 하나님께서 엘리야 나를 보내서 너에게 다가가고 있다는 거예요.
왜? 엘리야는 말씀의 세계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에. 엘리야가 온다는 것은, ‘군주인 너는 말의 세계의 대표자이지만 엘리야 나는 이 시대에 말씀 세계의 대표자로 이스라엘 속에 있는 거’예요. 그래서 엘리야의 뜻은 뭐냐? ‘이스라엘을 없앰으로써 이스라엘을 나타나게 하는 거’예요.
아합은 자기 나라 이스라엘을 어떻게든 살려내 보려고 애를 쓰는 거예요. 그런데 자꾸 엘리야가 엉뚱한 소리를 한다는 거예요. 이 어려운 가뭄 지역에서 단결해도 모자랄 판에 초치는 말을 하니까 “엘리야를 체포해 입을 다물게 하라.” 언론의 자유를 완전히 봉쇄하는 거지요. 유-튜브 다 차단시켜서 자칫하면 데모 일어날 판이라 이 말이죠.
그런데 엘리야 입장에서는 지금 너하고 ‘누가 옳은가?’ 그 싸움하는 게 아니에요. ‘여호와가 진짜냐, 바알신이 진짜냐?’ 그 시합을 하는 게 아니에요. 그건 시합 대상 자체가 안 됩니다. 괴롭다는 것은 ‘슬프다, 불행하다.’ 그런 뜻이잖아요. “네가 나를 괴롭게 한다.” 그럴 때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고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 집이 이스라엘을 괴롭게 했다”(왕상 18:18)라는 거예요.
동일한 이스라엘을 두고도 이스라엘 개념이 갑자기 두 개가 생겼어요. 법안에 있는 이스라엘, 인간이 끄집어내는 말 안의 이스라엘과 하나님이 말씀으로 미리 다져놓은 그 이스라엘과 다른 거예요. 다르다는 사실, 차이 난다는 그 사실을 그대로 전하겠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보낸 이유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궁금한 것은 ‘인간 육신의 고통 그리고 그 고통에서 면제되면 그게 진리’ 이렇게 생각하는 건 ‘말의 세계’에요. 고통의 이유를 알아야지 ‘이 고통만 지나간다면 난 행복하다.’ 이것은 여전히 하나님께서 고통을 면제한다 해도 말씀의 세계로 넘어오지 못하고 말의 세계에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말의 세계’는요, ‘말씀의 세계’ 입장에서 볼 때 ‘말의 세계’에서 아무리 행복하고 넉넉해도 그것은 죽음이에요. 인간이 말하는 게 아니고, 죽음이 말을 통해서 인간 속에서 튀어나오는 거예요. 서울 이태원에 가면 재벌 집들이 그 동네에 다 있어요.
이태원 남산 올라가는 쪽에 우리나라 재벌 집은 거기 다 모여 사는 정도로 많이 있어요. 500평, 600평씩 하는 집에 사람이 산다고 하잖아요. 사람이 사는 게 아니고 ‘말’이 살아요, 말이. 그러니까 넓은 집에 그렇게 사는 것이 굉장히 행복해 보이지만 말씀의 세계에 있는 엘리야 입장에서 볼 때는 그건 죽음이 사는 거예요.
말씀을 전해야 이 사실이 알려지기 때문에 지금 엘리야는 말씀을 들고 나옵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질문해 볼 것은, “이 ‘말의 세계’에서 ‘말씀의 세계’로 넘어왔다는 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아, 난 ‘말의 세계’에 있지 않아. 이제는 영원히 ‘말씀의 세계’에 있어. 이걸 어떻게 단정하느냐?” 그게 말씀에 보면 쭉 나와 있어요.
‘말의 세계’에는 자기 육체의 ‘먹고 사는 것, 힘든 것, 고통 이것만 빨리 벗어났으면 좋겠다’ 하는 인간 육신의 기본적인 삶의 본능과 충동이 있잖아요. 거기서 벗어나 편안하면 그걸로 난 행복하겠다고 하지만 ‘말씀의 세계’에서는 그걸 용납하지 않습니다.
아까 이야기했지만 그렇게 되어도 역시 ‘말의 세계’에요. ‘말씀의 세계’에 옮길 때에는 내가 얼마나 행복하냐, 또는 내 뜻대로 되어서 즐거우냐, 이 두 개 자체에서 벗어납니다. 그 예가 야고보서 4장 13-16절에 있어요.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뭐가 행복이고 불행인지, 그걸 따질 수 있는 상황인지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아무 도시라는 것은 여기서 부산을 의미해도 괜찮겠죠?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내 기분 따라 살지 말라는 거예요. 내 기분 따라 살지 않으려면 우리는 ‘말씀의 세계’에서 어떤 위치에 있어야 하느냐 하면, 해, 달, 별, 꽃, 그리고 참새, 까마귀 그쪽 수준에 있어야 하는 거예요. ‘창세기 1장 천지창조, 만들어진 그 식물과 동물과 같이 놓여 있는 자리다’ 이렇게 보시면 돼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은 선악과 따먹고 날아갔기 때문에, 인간의 형상은 그대로 있는데 하나님의 형상은 날아갔잖아요? 이 하나님의 형상이 이미 파괴된 이상은 다른 짐승 다루듯이 주께서 그렇게 다룬들 우리는 아무 소리 하면 안 돼요. 야고보서 4장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우리는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뭐 바퀴벌레, 코끼리, 꽃, 장미 우리가 이것들보다 더 나은 게 없어요. 시편에 보면 우리가 짐승보다 더 못하다고 했어요. 또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사 41:14)라고 했고요. 뭔가 말씀이 없으니까 자꾸 착각하는 거예요, 이 아합왕같이. 자기가 군주인 척을 하잖아요. 그 밑에 백성들은 뭐냐? 백성인 척해요. 그걸 합하면 ‘죽은 인간이 인간인 척’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말의 세계’의 현상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아합이 말의 세계…, 쉽게 생각합시다. 여러분, “아합의 말, 그 주장에 대해서 우리가 납득을 합니까, 안 합니까?” 제가 물었잖아요. “무슨 뜻으로 이야기하는지 이해됩니까, 안 됩니까?”를 제가 물은 거예요. 백 프로 이해되죠.
왜? 우리가 사는 육신의 세계가 ‘말씀의 세계’가 아니고 ‘말의 세계’기 때문에 ‘어느 것이 이 나라에 이익이 되느냐?’ 그것이 먼저 확 와닿는단 말이죠. 그 무리들이 누구인지가 열왕기상 18장 19절에 나옵니다. 엘리야가 제안합니다. “그런즉 사람을 보내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 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명을 갈멜 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아오게 하소서.”라고 되어있죠.
여기 무슨 단어가 나오냐면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명.” ‘이세벨의 상에서.’ 실권자는 이세벨이에요. 남편 되는 아합이 아니고 이방나라에서 수입한 왕비 이세벨이에요. 이세벨은 두로 지방의 잘 사는 동네의 딸이에요. 작심하고 북이스라엘에 시집왔어요.
어떤 작심으로 혼인했느냐? 이세벨은 그냥 보통 여성이 아니고 바알의 전도사입니다. 바알과 아세라를 전도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시돈, 두로 이 지방의 왕이, 이세벨의 아버지가 딸을 북이스라엘로 보내는데 사상적으로, 이념적으로, 종교적으로 북이스라엘을 통합하려는 의도로 이세벨을 아합에게 시집보낸 거예요.
그러니까 북이스라엘은 처갓집이 더 세니까 눈치 보죠. 눈치를 보면서 자기 마누라가 시키는 대로 온 나라를 바알 신으로 국교를 삼을 지경이 되어줘야 강한 나라로부터 침범을 받지 않고 우호적인 관계가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인간적인 말의 세계에서 정치적으로, 외교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이게 최선이다.’ 생각해서 그렇게 한 거고, 거기에 대해서 선지자가 초를 치니까 자기 법에 의해 현상 수배 때린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아합의 정치적인 발언에 대해서 우리가 무슨 뜻인지를 뼛속까지 잘 납득을 해요, 이해를 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만약 왕이라도 그런 짓을 안 하겠어요? 어쩔 수가 없죠. 그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 합해서 850명이 이세벨한테 월급을 받고 있었던 거예요. 월급인지 주급인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만 하여튼 간에 그쪽 종교를 양성한 거예요.
바알 종교, 아세라 종교를 금전적으로 후원하는데 거기에서 누가 빠져있냐면 엘리야는 빠져있거든요. 그 850명은 가뭄이 일어나도 괜찮아요. 왜? 엘리트 집안이고 귀족 집안이기 때문에 나라의 국고를 통해서 가뭄이라는 상황에서도 넉넉했지만 엘리야는 누가 먹여 살렸습니까?
지난번에 봤잖아요. 하나님께서 까마귀를 통해서 고기와 떡을 보내줘서 그릿 시냇가의 엘리야를 보호했어요. 왜 그렇게 하느냐? ‘가뭄이라는 자연의 저주에서는 어떤 인간도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엘리야는 그 자연의 저주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보호를 받아서 살았다는 것은, 말씀은 자연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말씀을 굳건히 지키고 보호한다.’라는 하나님의 일관된 취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당부합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1-33).
‘엘리야처럼 보호해 줄 것이다.’ 물론 그게 넉넉하진 않아요. 주기도문의 말씀처럼 일용할 양식만 주지만, 어쨌든 간에 여러분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씀이 여러분 안에서 계속 전달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친히 보호를 해주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이겁니다. “어떻게 우리의 육신이, 그야말로 아합 같은 사고방식으로 평생을 살아왔고 ‘내 육신 편한 게 최고다. 종교고 뭐고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런 식으로 살아온 내가 이 ‘말의 세계’에서 어떻게 ‘말씀의 세계’로 옮겨질 수 있느냐,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대책은 무엇이냐?”
먼저 그동안 인간들이 실패한 이유에 대해서 누가복음 18장 21절에 나옵니다. 누가복음 18장 21절에 보면,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영생 얻으려고 왔다 이 말이죠. 육에서 영으로 옮기려고 왔을 때 예수님께서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20절)라고 하니까 부자 청년이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21절) 이렇게 했어요.
그러니까 이 ‘말’에서 ‘말씀’으로 가려면요, 주체가 죽은 자라는 것을 인정해야 하고, 죽은 자는 말씀을 못지킵니다. 죽은 자는 말씀을 못지켜요. 왜? ‘말씀’이 ‘말’의 세계의 인간을 미리 죽여주기 때문에, 죽은 자이기 때문에 죽은 자는 말씀을 못지켜요. 말씀을 지키는 것은 엘리야처럼 말씀이 우리를 통과하면 그게 말씀이 지켜지는 겁니다.
내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나를 사용하면 그게 말씀이 지켜지는 현상이 되는 겁니다. 그것을 뭐라고 하느냐?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표적’이라고 이야기해요, 표적, 사인. 요한복음 6장 26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주님께서 ‘오병이어’ 사건에서 인간에 대한 태도를 둘로 나눴습니다. 하나는, 떡을 먹고 나를 찾는 태도와 ‘이건 표적이야. 떡이 중요한 것이 아니야. 떡은 나한테 중요하지.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예수님이 더 중요해.’ 이건 표적이거든요?
표적이라고 하는 것은, 나를 죽은 것으로 간주했을 때 죽은 나에게 굳이 주께서 찾아온 이유가 뭐냐? 예수 그리스도의 그 증인, 예수님이 이런 분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죽은 나를 들어 사용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 표적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오병이어 먹은 사람들은 여전히 자기 살 궁리만 하는 거예요.
살아있다고 자부하는 인간을 말이 통과하면 살아있어요. 그러나 말씀이 찾아오면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죽어 있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말씀을 통해 죽어 있다는 그 자체가 이미 내가 말씀 안에서 새롭게 산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에요, 그게! 쉽게 말해서 나보다 말씀이 더 중요하다 이 말입니다. 말씀이 중요해서 나를 사용하는 것이지, 내가 중요해서 나를 사용하는 게 아니라 이 말입니다. 그게 표적이에요.
엘리야는 표적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가뭄도 표적이에요. 3년 6개월 동안 비 안 오는 것도 표적이에요. 그건 ‘너희들이 아무리 법을 만들고 이스라엘이 어떻고, 뭐 다른 나라하고 결혼하고 합치를 해봤자 이미 선악과 따먹은 이상은 그 자체가 저주’에요.
그렇다면 그 저주받은 세상에 대해서 우리 주님께서는 어떤 식으로 육에 속한 인간, ‘말의 세계’의 인간을 ‘말씀의 세계’로 옮기는가?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전도하면서 하는 방식이 마태복음 10장 14절에 나옵니다. 11-12절부터 보면 “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가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다음에 13-14절에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
여기 ‘먼지를 떨어버리라.’ 하는 거예요. ‘먼지를 떨어버린다’라는 것은 그 당시에 유대인들이 이방 민족한테 자신의 우월감을 드러내기 위해서, 특별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했던 상투적인 모습이었거든요. 그걸 예수님이 사용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면 잘 지은 집이나 뭘 거창하게 하는 것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게 재가 되어버려요. 마치 예루살렘이 재가 되듯이, 성전이 재가 되듯이 재가 되어버립니다. 그러니까 열두 제자가 전하는 천국의 복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시대가 바뀌었다. 너는 기존 시대에 있지 말고 너는 예수님 시대로 옮겨 와야 해.’라는 이 복음의 말을 전할 때 그걸 영접하고 안 받아들인다면 너희는 이미 재가 되어 있다는 거예요. “먼지가 되어…” 벌써 먼지가 되었어요. 저주받아서 먼지가 되어 있어요.
그 먼지를 어떻게 하느냐? 그 먼지, “너희가 받은 저주는 나한테는 상관없다!” 하고 떨어 버리는 거예요. 제자들의 이런 행동 하나하나가 뭐냐? ‘너는 지고 난 이겼다.’ 이런 개개인이 들어가는 게 아니고 하나의 표적, 상징이에요, 사인이에요. 하나님이 오셔서 하는 그것을 모션으로, 하나의 행위로써 보여 주는 겁니다. 판토마임 같은 거죠.
그러니까 이 열두 제자가 어떤 특징을 갖고 있었는가 하면, 누구하고 안 싸워요. 싸울 필요가 없다니까요? 다만 말씀 안에 들어있는 이 세상의 마지막 상황을 그냥 외치고 전하고, 개나 돼지가 돼서 안 받아들이면 ‘여기는 유월절 양의 피를 바를 필요가 없는 모양이다.’ 하고 그 집에서 나오면 돼요. 이게 엘리야잖아요. 이게 말씀의 세계에 속한 전형이잖아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엘리야는 지금 누구하고 싸우는 게 아닙니다. 싸우는 게 아니고 가뭄이 든 이유에 대해서, 자연에 의해 온 이스라엘이 통채로 저주받는 그 이유에 대해서 “너희들의 말로서는 알 수가 없고 내가 전하는 말씀을 통해서, 이제 표적을 통해 너희에게 나타날 것이다.”
그 표적이 바로 다음에 나오는 내용이에요. 제단 쌓고, 소 잡고 기도하니까 불이 떨어지는 것. 따라서 오늘의 이 본문은 우리 성도로 하여금 제발 세상을 부러워하지도 말고, 싸우지도 말고, 성질 낼 필요도 없고 그 나라 의를 전하는 표적으로서 주께서 시키는 대로 말씀의 세계에 속한 사람으로 사시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는 그 말씀이 빈말이 아닌 것처럼 주께서 주신 말씀으로 오신 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가 영생을 얻었다는 것도 결코 빈말이 아닌 것을, 우리를 통해서 세상에 나타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