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엘리야의 제단

아빠와 함께 2025. 10. 9. 09:20

엘리야의 제단

2025년 10월 8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18:21-24

18:21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하니 백성이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

18:22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오십 인이로다

18:23 그런즉 두 송아지를 우리에게 가져오게 하고 저희는 한 송아지를 택하여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놓지 말며 나도 한 송아지를 잡아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놓지 말고

18:24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엘리야가 만난 아합은 북이스라엘에서 권력에 최종 정점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의 권력 적용에는 엘리야를 살해하는 목표도 담겨 있습니다. 뿐만아니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850명의 받알과 아세라 선지자의 입장에 아합의 권세 아래에 있습니다. 따라서 아합의 입장에서 엘리야의 제안에 수긍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엘리야를 없애야 한다는 일관된 목표로 통하는 경로가 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엘리야의 입장에서는, 왜 하나님께서 3년 6개월 동안 이스라엘 땅에 비가 오지 않는지 그 이유를 제시할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비 오지 않음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가 있다는 겁니다. 엘리야는 혼자가 아합의 손을 죽을 수는 없습니다. 자기 죽음에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끌고 들어갑니다.

그리고 문제가 하나 출제합니다. 불씨가 전혀 없고 송아지만 있는데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게 하는 문제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바알과 아세아 선지자는 동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권세자인 아합이 이 문제에 흥미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이 문제의 답을 얻는데 선뜻 나서게 된 이유는, 그들에게 ‘다수가 갖는 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의 다수의 힘이란, 그 다수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인간성으로 일치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과 인간들과의 만남에는 필연적으로 각자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성격을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성(人間性)’입니다. 이 인간성에서 우상이 나옵니다. 인간들은 자신들에게 선과 악을 구별짓는 능력이 있다고 여기고 그것을 내재되어 있는 신성(神性)이라고 자부합니다.

이 신성에서 우상이 나오는 겁니다. 사람이 감히 하나님에 이름을 지어 붙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자칭 자신의 순수함을 신이 집어넣어준 신성함이라고 여겨서 그 신성함에 맞는 이름을 신의 이름이라고 간주해서 불러댑니다. 그러면 신쪽에서 호응이 있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반면에 엘리야의 하나님은 인간을 죽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마르다,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는 죽었다가 살아납니다. 이때 예수님은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하시면서 나사로의 이름을 부르십니다.(요 11:43) 이로부터 나사로는 더는 자기 이름을 살리기 위해 살지를 않게 됩니다. 이제 사나 죽으나 주의 이름을 위하여 살게 됩니다.

즉 ‘내가 산다’는 성립되지 않고 ‘주님이 살아계시다’를 드러내시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필히 인간은 주님의 활동으로 인하여 죽어야 하는 겁니다. 즉 이 세상의 중심은 ‘죽음’인 겁니다. 이 중심에서 보면 인간은 그저 ‘덩치 큰 죽음/ 덩치 작은 죽음/ 남자라는 죽음/ 여자라는 죽음/ 젊은 죽음/ 늙은 죽음’일 뿐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전역에 3년 6개월 동안 비 오지 않는 것도 하나님 입장에서 참으로 당연하고 정당한 조치입니다. 엘리야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그도 그동안 그릿 시내에서 겨우 시내물 먹으면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있을 뿐이었습니다.(열상 17:3) 그러다가 얼마 안 있어 그 기릿 시내까지 말랐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앞장 세워, 왜 의도적으로 이스라엘 전역에 가뭄과 기근을 들게 하셨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시려고 합니다. 그것은 결코 인간은 하나님의 조치를  조절하거나 변경을 시도할 수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의 진행은 오로지 하나님의 언약을 수행하시는 하나님 자신 뿐입니다.

즉 하나님과 하나님 내에서 해결 지을 문제인 겁니다. 인간이 감히 하나님을 조종하려는 시도하는 것은 인간들 자신들이 계속 지상에 살 권한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생각이 그동안 하나님의 언약을 방해하고 훼손한 겁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지금껏 자신에게 주어진 난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이런 전통으로 인해 인간들은 신에 대해서는 자신들이 요구대로 움직일 수 있다고 믿고 왔던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배제한 채 일을 하십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죽였고 이삭의 하나님은 이삭을 죽였습니다. 야곱의 하나님은 야곱을 죽였고 예수님의 아버지는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을 죽여서 ‘언약의 이스라엘’을 따로 살리려 하십니다. 엘리야마저 이 과정에서 빠지고 이제 남은 것은 제물과 하나님과의 관계뿐입니다. 창세기 15:17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차려놓은 제물을 스스로 처리하십니다.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창세기 22:7에서 아브라함은 나무과 불을 준비하게 되는데 제물은 없습니다. 이는 새로운 제물의 등장 앞에서 아브라함은 본인의 모든 행함은 제물과 더불어 소멸되어야 함을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의 죽음 자리에, 이삭의 죽음 자리에, 야곱의 죽음 자리에 이제 엘리야가 합류되어 마지막 때에 나타나실 하나님의 죽음에 미리 참여하게 됩니다.

엘리야를 통해서 보여주는 것은 물에 넘치도록 덮힌 제물의 모습이었습니다. 송아지를 놓은 제물은 물로 가득합니다. 이것은 그동안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을 드러내기 위해 단비를 맞는 은혜를 누려왔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 단비가 열왕기하 18:38에 보면, 하나없이 핥음을 당합니다.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즉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내릴 것은 일체 물이 없이 살아야 될 저주의 모습일 뿐입니다. 그동안 언약에 준해서 주신 단비와 햇빛과 젖과 꿀에 대해서 이 이스라엘은 바알과 아세라 신에게 향했던 겁니다.

즉 자신이 죽어 마땅함을 도무지 않지 못했기에 계속해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 활동을 가리고 방해해온 겁니다. 이제 그런 ‘인간들’말고 오직 홀로 남은 인간(18:22), 즉 엘리야를 통해서 언약만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알려주십니다. 오늘날도 예외가 아닙니다. 내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살아있습니다. 그 살아 있는 말씀으로 인해 불편한 지적을 받는 것이 ‘죽었다가 다시 산’ 나사로의 모습입니다.

선과 악의 지식으로 사는 자가 이스라엘이 아니라 죽었다가 사신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자가 참된 이스라엘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의 인간성이 어떤 모습인지를 알고 예수님의 죽음을 이해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51강-열왕기상 18장 21-24(엘리야의 제단) 251008-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 열왕기상 18장 21-24절입니다.

열왕기상 18:21-24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찌니라 하니 백성이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 오십인이로다 그런즉 두 송아지를 우리에게 가져오게 하고 저희는 한 송아지를 택하여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놓지 말며 나도 한 송아지를 잡아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놓지 말고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여기 오늘 본문 21절에 보면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라고 되어 있어요. ‘하나님인데 그 이름이 바알이다. 바알 하나님이 과연 성립하느냐?’ 하는 그 문제를 그 엘리야가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다 이름을 붙이는 것, 인간들 입장에서는 그냥 이름을 쉽게 갖다 붙이면 된다고 생각하는 데 하나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위치에 인간이 놓여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이름을 부를 수는 있어도 인간이 하나님의 이름을 지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부를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에요. 그래서 성경 전체를 보게 되면, 하나님의 구원은 주님이 우리 이름을 불러줄 때에 그 부름을 받은 우리 자신의 이름, 그리고 그렇게 불러주고 난 뒤에 알게 되는 하나님의 이름은 두 개 다 성립이 안 됩니다.

하나는 삭제돼야 돼요. 예수님께서 “나사로야 나오너라”(요 11:43) 이렇게 했잖아요. 주께서 나사로 이름을 불러줬잖아요. 그래서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아났는데 나사로가 기억해야 할 이름은 자기 이름이 아닙니다. 오직 나사로는 주의 이름만 기억하면 돼요. 주의 이름만!

이유가 뭐냐? ‘나사로’라는 이름은, 주님이 그 이름을 사용하고 그 나사로를 이용함으로써 나사로는 주의 이름 안에서 쓰이면서 그 의미가 삭제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나사로의 남은 인생에는 나사로의 지난날, 나사로 개인이 기억하는 자기 이름의 역사는 없어지고 주께서 자기에게 하신 일만 남아 있는 것 곧 주의 일만, 주의 이름으로 하신 일만 나사로로 하여금 계속해서 살게 하시는 겁니다.

그 개입의 순간, 내 이름이 여지없이 삭제되는 그 순간에서 그 내 노선이 없어지고 주님의 노선으로 갈아타기가 성립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바알 선지자들은 자기 이름이 따로 있고 하나님이 저기 있으니까 자기 이름 가지고 하나님을 ‘바알’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는 거예요.

그렇게 부름으로써 그들은 ‘저 하나님이 살아 있는 것처럼 계속 꾸준하게 본인도 계속 살아있다-살아있다’의 연속으로 이어지리라는 것을 전제해요. 그렇다면 엘리야가 알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은, 하나님이 하신 그 일로 인하여 인간의 모든 존재를 하나님이 받지 않는 어떤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는 공간을 엘리야에게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게 뭐냐? 바로 오늘 설교 제목에 나와 있는데 “엘리야의 제단”입니다. 엘리야의 제단은 인간의 역사 속에서, 인간의 일상, 인간의 생활 속에서 그 중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말해줍니다. 그 중심은 어디에 있는가? 인간 중심은 죽음에 있습니다. 죽음이 살아 있는 것, 네가 살아 있는 게 아니고 죽음이 살아 있다는 것, 그게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 다룸, 인간을 만나는 방식이에요.

덩치 좀 큰 사람 있잖아요. 몸무게 90kg이나 100kg이면 그것은 덩치 큰 죽음, 한 40kg 되면, 아니 한 15kg이나 25kg은 작은 죽음. 남자나 여자는 없습니다. 남자 모습을 한 죽음, 그리고 여자 모습을 한 죽음, 안경 낀 젊은 죽음, 70대 늙은 죽음, 죽음으로 통일하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죽음으로 통일합니다.

통일함으로써 이스라엘 전체에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는 것이 얼마나 정당한 조치인가를, 인간을 물이 없어 못 살게 한다는 그것이 인간에게 합법한, 합당한 하나님의 제대로 된 다스림의 방식이라는 것, 가뭄을 통해서 자신의 진위를 그대로 보여줬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일관되게 알려주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보는 그 죽음을 연출하는데 있어서 엘리아는 850명을 모읍니다. 바알 선지자 450명, 아세라 선지자 400명을 갈멜산에 모이게 했습니다. 열왕기상 18장 21절에 “너희가 어느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라고 이야기함으로써 여기서 어떤 게임처럼 느껴지는 사건을 제시하는데요.

이것은 게임이 아닙니다. 이것은 문제를 제출하는 거예요. 어떤 문제냐 하면, ‘인간들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역량이 있는가?’를 묻는 겁니다. 인간들은 선악 지식으로 완전무장 돼 있어요. 인간에게는 선악 지식이 있기에 인간들은 그걸 뭐로 보느냐? 자기 안에 있는 신성, 신의 품성이라고 그들은 자부합니다. 그게 우상이에요. 인간 속에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는 신성이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엘리야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은 ‘그것은 신성이 아니고 그게 바로 저주받아 마땅한 인간성’이라고 하는 겁니다. 열왕기상 18장 22절에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나만 남았다 1이죠, 1.

그런데 열왕기상 18장 19절에 보면, “바알의 선지자 사백 오십인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인”이니까 ‘450+400=850명’이에요. 엘리아는 ‘인간’입니다. 그러면 850명은 뭐냐 하면, ‘인간들’이에요. ‘인간’과 ‘인간들’의 싸움입니다. 인간들 속에는 뭐가 있느냐? 인간성이 있습니다.

850명을 모아놓았는데 그 850명이 하나같이 동일한 생각을 한다는 것은, 850명 사이가 똑같은 성질로 통합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 통합된 인간성이 나타내는 표현하는 것, 재현한다는 말인데 나타내는 그 모습은 뭐냐? 어떤 문제에 직면했을 때 선과 악이라는, 자기 딴에는 하나님의 성격, 또는 신성함 그 신성함을 끄집어내서 출제된 문제를 풀어나가는 과정, 주님께서는 강제로 엘리야를 통해서 그 과정을 들추어내는 사태를 만들었어요, 사건을 만든 겁니다. 강제로 들춰내는 사건.

이렇게 되면 엘리야의 850 대 1의 싸움은 없어요. 엘리야도 마찬가지고 850도 마찬가지고요, 여기서 인간을 초월하는, 인간을 초과하는 능력이 뭔가를 제가 말씀드릴까요? 제단 위에각자 공평하게 송아지 한 마리씩 놓는 겁니다. 송아지 한 마리씩 올려놓고 그다음 조건이 뭐냐?

“불은 놓지 말자. 불은 놓지 말고 각자의 송아지를 하나씩 제단에 올려놓자.” 지금 문제를 출제한 거예요. 하나님의 문제를 출제하는데 ‘제단에 송아지 놓고, 불은 붙이지 않는다. 그리고 어느 쪽에 불이 점화되는지를 보자. 점화 되는 그쪽이 진짜 하나님이라고 정하자.’라고 문제를 출제했습니다. 그 문제에 인간들을 끌어모은 거예요.

850명. 그런데 엘리야는 한 명입니다. 엘리야도 마찬가지로 보통 인간들 속의 똑같은 인간이에요. 인간의 속성이 그대로 있습니다. 우리가 이 결과를 모른다 치고요, 그 현장에 우리가 가 있다면 사람들은 이렇게 합니다. ‘850명 저들은 그들이 신을 믿기 때문에…’ 여기서 신을 믿는다고 할 때 그들은 인간 능력을 초월하는 능력을 신의 능력이라고 보는 거예요.

‘인간의 어떤 동작으로, 행위로 신을 움직여서 인간에게서 나올 수 없는, 곧 신에게서만 나오는 능력을 이 현장에 나타나게 만드느냐?’ 여기에 대한 문제예요. 출제된 문제가 이 문제입니다. 어떻게 여러분이 한번 해볼래요? 여러분이 한번 해보시겠습니까? 여러분, 이런 문제 출제에 850명이 동의했다는 것을 보면,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의 믿음이 얼마나 좋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그러니까 850명, 그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의 믿음은 요즘 한국 교회가 주장하는 것처럼 그냥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 그 정도 믿음이 아니에요. 그걸 훨씬 뛰어넘는 믿음이에요. ‘하나님 믿고 돈이나 벌자.’ 이런 식이 아니라니까요. ‘속임수를 썼다?’ 여기 무슨 속임수가 있습니까?

자기가 마술사 카퍼필드(David Copperfield, 1956~)도 아니고요. 지금 불씨는 뺀다니까요! 서울대학교하고 카이스트에 있는 학생들 다 데려와요. 어제 3명이 노벨물리학상 받고, 생리의학상도 받고 죽 발표하고 있는데 노벨상 받은 사람들 다 오라 해요.

‘불씨가 일체 없는데, 송아지만 덜렁 있는데 네가 어떤 인간적인 방법을 써서 여기서 불이 점화되도록 해 봐라.’ 이 문제, IQ가 뭐 150, 200이고 다 소용없습니다. 이 내기는요, 이 문제는 자기가 지금껏 살아왔고 애지중지했던 그 목숨을 건 출제였습니다.

여기에 바울과 선지자가 언뜻 동의했다는 거, 그 동의했다는 것이 굉장히 저로서는 신기해요. 이게 안 되는데, 이게 말이 안 되잖아요. 안 되는 걸 그들은 왜 동의했는가? 무슨 꿍꿍이냐? 그 이유가 열왕기상 18장 19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런즉 보내어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 오십인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인을 갈멜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오게 하소서.”

이들이 누구냐 하면,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자’예요,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자. 그러니까 이 문제 출제, ‘불은 없고 송아지만 있는데 오늘 내로 불이 점화되게 해라’라는 이 문제를 단지 엘리야하고 자기들 보는 데서 실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온 이스라엘 백성들, 그리고 그동안 자기들에게 월급을 줬던, 생활비를 제공하고 숙소를 제공했던, 복지를 제공했던 이세벨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서, 이세벨이라는 최고의 권력자까지 다 쳐다보고 있는 데서 이 문제가 출제되었다는 말은, 이것은 이미 아합왕 쪽, 즉 권력의 당국자가 이 문제에 대해서 동의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아합은 바알 편이 아니에요. 아합은 여호와 편도 아니에요. 아합왕은 본인이 하나님 편이고 싶은 거예요. 살아계신 하나님 편이고 싶은 거예요. 하나님이 되려면 인간에서 ‘얼추 이 정도 하면 하나님이 움직인다.’ 하는 그 모든 가능성을 차단한 문제가 출제돼야 돼요. 지금까지 모의고사에 안 나온 문제, 지금까지 수능에 한 번도 나온 적 없는 문제를 풀어줘야 돼요. 이판사판이다. 정말! 이판사판!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은 공개적으로 사기꾼이 되기 싫은 거예요. 나중에 끝나고 난 뒤 그들은 다 죽어요. 나중에 그들을 다 죽입니다. 그걸 누가 용인했는가? 아합, 권력자가 용인했어요. ‘저 인간들 사기꾼이었구나.’ 이게 뭐냐? 엘리야가 존재한다는 것은 엘리야와 함께 있는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뜻이고, 이 말은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말씀이 존재한다는 뜻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찾아오고 존재하느냐 하면, 우리를 지적하는 거예요. 우리의 허점을, 남한테 들키지 않는 허점을 늘 지적하는 식으로 오는 겁니다. 왜 이렇게 지적을 하느냐? 인간은 평소에 내가 여기에 살아 있어야 할, 굳이 살아야 할 그것을 늘 증명하는 식으로, 남들에게 보여주는 식으로 살아가요.

‘나 이 사회에 필요해. 나 이 교회에 꼭 필요한 사람이야. 나 하늘나라에 필요한 사람이다.’ 이런 식으로 자기의 존재를 당연시하고, 그걸 합당히 여기면서 증명하는 식으로 서로 그걸 어필을 하면서 살아가거든요. 그런데 주의 말씀은 이겁니다.

인간이 자기의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것은 죽음 앞에 멈춰야 된다는 것, 죽음 앞에서 멈춰야 돼요. 남자 죽음, 늙은 죽음 주제에 ‘내가 살아있어서 이렇게 하는 게 나한테 가치 있다’라는 것이 다른 사람한테는 그 구라가 통할지 모르지만 주의 말씀 앞에서는 일체 통하지 않습니다.

“빨리 죽어, 인간아!” 이게 얼마나 불편한 지적이에요? 그런데 신약의 성령이 하시는 일이 이렇게 우리를 지적하고 책망하는 거예요. ‘의에 대해서 죄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책망’(요 16:8)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말씀 앞에 나오는 것을 굉장히 거북스럽게 여기는 이유는, 말씀 앞에 나오면 굳이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틀리거든요. 그게 다 날아가 버려요.

중요한 것은, 주님이 살아있으면 되지 굳이 나까지 지금껏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거예요. 이게 정답이에요. 주님께서 말씀을 주시는 것은 “제발 부탁하는데 사람하고 상대하지 마라.” 여러분, 모든 고민과 걱정이 어디서 옵니까? 두려움이 어디서 옵니까? 사람하고 상대하기 때문에 그래요.

사람하고 상대하는 게 뭐 어떠냐? “나하고 상대하면 돼.” 이 하나님하고 상대하라는 거예요. “넌 왜 자꾸 나와 상대하는 것을 피하느냐?” 피하는 이유는 뭐냐? 주님 쪽에서는 말씀이 나오기 때문에,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말씀이 나오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 상대하는 것을 굉장히 난처하게 여기는 겁니다.

이것은 엘리야에게도 적용되는 거예요. 그래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에게도 난처한 질문이지만 특히 우리가 빼먹지 말아야 할 것은, 엘리야 본인에게도 하나님께서 난처한 문제를 가지고 대중 앞에 나서라 했다는 그 말이에요. 나중에 850명이 다 죽었지만 이것은 여차하면 엘리야 본인이 아합한테 사기꾼으로 잘릴 수가 있습니다.

지금 문제가 뭐냐? ‘3년 6개월 동안 비가 왜 오지 않았느냐?’ 하는 그 문제와 관련되어 있어요. 3년 6개월 동안 비가 왜 안 왔느냐? 강릉은 한 달 동안 비 안 온다고 난리도 아니었잖아요. 3년 6개월 동안 비가 안 온다고 했을 때 그 원인에 대해서 누군가 해명해야 하고 설명을 해줘야 돼요.

여기에서 엘리야가 발을 뺄 수가 없습니다. 엘리야부터 먼저 당해야 돼요. 850명한테 이기는 것, 그것을 생각하면 안 돼요. 그것은 이 본문을 잘못 해석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엘리야가 곤궁에 빠졌어요, 엘리야가! 문제 출제를 누가 했는데요? 본인 입에서 문제가 나왔잖아요. 남 치다가 자기가 당하는 수가 있어요, 남 치다가! 엘리야는 아무것도 몰라요. 어떻게 하면 이긴다는 것도 없어요.

다시 말해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선악 체계 안에서 타인을 이길 수 있는 모든 무기를 강탈했습니다. 선악 체계 속에서, 인간성 속이죠, 인간성 속에서 타인을 보기 좋게 굴복시키고 이길 수 있는 어떤 무기도 주께서 뺏어버렸습니다. 이제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완전히 야자 타임이에요. 누가 이기고 지고 없어요. 공평해요. 똑같이 공평합니다.

이쯤에서 여호와의 제단, 하나님께서 문제 출제한 그 핵심 부분을 여러분들이 궁금해할 거예요. 궁금한 그것을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논리가 복잡할 때는 결론부터 먼저 딱 알아채는 게 중요하거든요. 여기 열왕기상 18장 38절에 보면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지금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아요. 인간은 물 없으면 못 삽니다. 그런데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단 말이에요. 이것은 ‘이 자연을 통해서 현재 있는 물도 핥아버리는 작업이 어느 하나님에 의해서 실시되었느냐? 있는 물도 핥아서 모든 백성이 굶어 죽게, 다시 시체로 만드는 그 작업을 애초부터 의도하시고 개시하신 그 하나님이 바알의 하나님이냐, 아니면 여호와 하나님이냐?’ 그걸 결정하자는 거예요.

그 근거는 열왕기상 17장 3-4절에 나옵니다. “너는 여기서 떠나 동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을 명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엘리야는 겨우겨우 시냇가의 물을 마시면서 가뭄을 해소했습니다.

그런데 그릿 시냇가까지 물이 말랐어요. 그게 열왕기상 17장 6-7절에 나옵니다.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저가 시내를 마셨더니 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얼마 후에 그 시내가 마르니라.”

이제는 엘리야마저 죽을 지경이에요. 시냇물이 마르는 그 타이밍에 ‘진짜 하나님을 이스라엘에게 설명할 타이밍’이라고 여기시고 하나님은 엘리야를 보낸 겁니다. 엘리야를 보내서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모이게 해서 그들에게 문제를 출제한 거예요.

지금 시합하는 게 아니고 문제 출제입니다, 문제를 출제한 거예요. 열왕기상 18장 25절에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많으니” 너희가 숫자가 많다는 겁니다. ‘많다’는 것은, 북이스라엘 전체의 백성들이나 임금이나 선지자가 동일한 인간성으로 똘똘 뭉쳐있는 거예요.

이 말은, 그들이 바알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 안에서 하나로 집단화되어 있다는 말이에요. 집단화된다면 그 안에서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있는 충분한 힘이 비축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이걸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들이 어느 교회에 가니까 수요 모임에 850명이 모여 있다 칩시다.

수요 모임에 850명이 모였다면 어느 누가 “이 가운데 성도는 한 명도 없다.” 이렇게 단정 지을 사람이 있어요? 850명이나 되는데요, 850명이나 돼요. 만약에 850명이나 되는 사람이 두 주 지나고 보니까 딱 한 명 남았다고 칩시다. 그러면 ‘850명에서 한 명 되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나?’ 이런 이야기를 하겠죠?

이게 무슨 말이냐? 아까 제가 이야기한 걸 다시 해보겠습니다. 인간하고 상대하지 말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왜 자꾸 사람하고 상대를 하려고 해요? 사람하고 상대를 하려는 이유가 뭡니까? 든든히 믿을 수 있는 구석이 있기 때문에 상대하잖아요. 내가 기댈 수 있는 구석이 있기 때문에, 내가 어려울 때 도움을 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인간을 의지한다고요.

인간이 힘을 왜 의지합니까? 가족끼리 왜 의지해요? 말씀드릴까요? 지금 문제 출제했는데? 안 죽으려고. 안 죽으려고, 더 살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문제 또 나옵니다. 왜 살려고 하죠? ‘나’니까. 당신이 뭔데요? 여기서 나오는 정답은, 인간은 하나님을 의지한 적도 없고 남을 의지한 적도 없어요.

인간은 ‘자기 안에 있는 선과 악을 아는 자기 의를 의지하면서 나는 죽더라도 내 의는 고스란히 신에게 인정받는 것’, 이게 바로 인간 속에 있는 우상 ‘인간성’입니다. 인간성이에요. 엘리야는 지금 난처합니다. 엘리야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은 우르르 떼로 모여서 혼자서 하는 게 아니에요. 850명이 일치단결해서 그들은 뭘 합니다. 아침부터 낮까지 뭘 합니다. 뭘 하느냐? 제가 설교 처음에 말씀드렸던 그걸 해요. 그들은 이름을 불러요. 기도할 때 그렇게 하잖아요. “쭈여!” ‘주’가 아닙니다. “쭈여, 쭈여, 쭈여!” 세 번을 불러야 돼요, 삼위일체기 때문에.

그 이름을 부를 때 마음 자세가 이런 마음인지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주님 저를 속히 죽여주옵소서.’ 그 마음이 담겨 있습니까? 담겨 있어요? ‘주여, 이 더러운 지옥 같은 세상 빨리 끝내고 싶은데 왜 안 죽이십니까? 주여, 주께서 죽이려고 만들어 놓았잖아요, 태어나게 했잖아요. 그러니까 빨리 죽여주세요. 주와 함께 거하고 싶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주여” 부릅니까? 그것 때문에 기도를 열심히 합니까?

사람들이 그거 때문에 기도하는 게 아니에요. 살기 어려워서 기도하잖아요. 죽기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면 사람들 기도 안 합니다. 왜? ‘가만있어도 늙어 죽는데 굳이 그걸 앞당길 필요가 뭐가 있느냐?’ 이렇게 나온다니까요.

지금 사람들이 이해를 못 하는 것이, ‘신기한 능력을 원하는데 이 신기한 능력이라는 것은 뭐냐? 나는 내 식대로 살아왔는데 내 식대로 살아온 것 말고 인간은 모르는 다른 방식대로 신기한 요술 같은, 마술 같은 기적이 일어나서 하나님이 하나님 됨을 나타내 달라’라고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추가적인 기적을 요청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진짜 하나님의 기적은 뭐냐? 안 죽으려는 나를 죽이는 게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이에요. 더 살고 싶은 나를 두고 “거기서 좀 멈춰라. 살고 싶은 모습 좀 멈춰줘. 네가 사는 것 때문에 내 일이 방해받는다는 것을 네가 왜 몰라?” 이게 주님의 기적이거든요. 이게 주님의 기적이에요.

따라서 엘리야의 경우는 그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외치는 그 방식과 완전히 다른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열왕기상 18장 26절에 보면 “저희가 그 받은 송아지를 취하여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가로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저희가 그 쌓은 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이걸 두 자로 하면 행위에요. 인간은 뭔가 행위를 하는 거예요. 안 죽고 싶고 더 살고 싶어서, 그리고 그냥 사는 게 아니고 내가 이만큼 잘난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서 나오는 게 인간의 행위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행위를 해요.

그러니까 여기서 엘리야가 놀리죠. 열왕기상 18장 26절에 “오정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저희를 조롱하여 가로되 큰 소리로 부르라 저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 잠간 나갔는지 혹 길을 행하는지 혹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엘리야가 이렇게 놀리는 건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 너희들은 안 놀고 잠 안 자고 묵상 안 하고 열심히 지금 땀 흘리면서 죽을 판 살 판 막 뛰고 있잖아. 뛰고 있는데 너희가 부르는 신은 지금 졸고 있잖아. 안 맞잖아.’ 안 맞는다는 거예요. 열심히 뛰고 운동한다는 것, 뭔가 움직임을 보인다는 것은 본인이 살아있다는 거고, ‘살아있는 자가 살아있는 하나님을 깨울 수 있는 어떤 중간 통로도 성립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내가 이렇게 열심히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같이 호응해서…, 뭐 춤추고 북 치고 난리도 아니었을 거예요. 그렇게 하면서 ‘우리가 이렇게 하는데 같이 호응해 주시기 바랍니다.’ 쉽게 말해서 ‘내가 여기 살아있잖아요. 하나님! 내가 살아있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이 살아있는 것을 살아있는 나에게 보여주옵소서.’라고 요청하는 거예요, 그 바알과 아세라가!

열왕기상 18장 28절에 보면 난리도 아닙니다. “이에 저희가 큰 소리로 부르고 그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 몸을 상하게 하더라.” 이건 신명기 14장 1절에 보면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니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지 말며 눈썹 사이 이마 위의 털을 밀지 말라.”라고 해서 우상 섬기는 자들이 다 그런 식으로 해 왔어요.

이것은요, 신을 자극하는 동시에 바라보고 있는 관중들을 흥분시키는 작업인데 무당들이 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작두에 왜 올라갑니까? 그냥 푹신한 침대 매트리스에나 올라가지 작두에는 왜 올라가요. 보는 관중들을 흥분시켜서 그 흥분을 신이 강림하는 작용으로 그렇게 사기 치기 위해서 자기 몸 하나 희생하는 거예요.

교회나 기도원에 아래 강단이 왜 있습니까? 아래 강단은 흥분시키는 장소 아닙니까? 막 내려치면서. 엘리야가 하는 방식은 자기가 빠지는 겁니다. 자기는 빠지고 송아지와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버리죠. 그 원리가 어디 나오느냐?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죽이고, 이삭의 하나님은 이삭을 완전히 죽이고, 야곱의 하나님은 야곱을 죽였습니다. 그게 하나님 방식이에요.

이제 죽을 송아지가 제단에 놓여 있습니다. 엘리야는 거기서 빠져요. 엘리야는 빠져야 돼요. 송아지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언약의 하나님이 전통적으로 해왔던 것, 제물을 드리면 거기에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는 그 방식이 전통적으로 있었어요.

가인과 아벨에서도 있었지만 창세기 15장 17절에도 아브라함이 제물을 쪼개 놓을 때 중간에 불이 지나가죠.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그 뒤부터 이제는 불이 떨어지는 게 아닙니다.

창세기 2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불쏘시개를 점화하도록 하는 그 방식을 사용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아브라함의 이름을 하나님 이름 앞에서 제거하는 것을 조건으로 걸고 아브라함이 불쏘시개를 가져가게 하십니다.

창세기 22장 7절에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 아브라함의 제사에는 지금 양이 없어요. 불쏘시개는 있고, 불은 있는데 양은 없습니다. 번제할 양은 없어요.

이게 무슨 뜻이냐면요, 선악 체제 안에서 출제함으로써 엘리야를 비롯해서 어떤 인간도 선악 지식을 아는 것 가지고는 하나님이 출제하는 문제를 풀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다는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하나님이 내는 문제의 출제는 하나님 자신이 희생물이 되어서 하나님끼리 풀 수 있지 하나님 외에 어떤 인간도 하나님이 제시한 문제를 풀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구원한다? 이 문제는 어떤 인간도 여기서 배제됩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이룰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서 하나님에 의해서 구원받은 그 인간만이 새로운 인간성, 선악 지식이 아니고 거저 주시는 생명으로서 구원이 성사 되도록 하나님께서 이 땅에 문제를 던져온 거예요.

더 놀라운 사실은, 이 하나님의 문제를 스스로 풀어가는 그 출제에 가담했던 엘리야는 나중에 죽을 때 인간 세상에서 붕 뜹니다. 불 수레 타고 올라가니까요. ‘내가 너희들하고 같이 놀 군번이 아니다.’ 내가 이 땅의 사람이 아니라는 그 말이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죽임으로써 막벨라 굴에 집어넣고, 막벨라 굴에 들어감으로써 그동안 인간들이 예상했던 죽음 말고 ‘막벨라 굴에 찾아오시고 헤브론에 찾아오시는 주님의 죽음에 참여하는 자만 생명을 얻는다’라는, 선악 방식이 아니라 생명의 방식, 주님이 홀로 이루신 생명의 방식에 참여시키는 그 계기가 지금 엘리야에게 찾아온 거예요.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주지 않는 방식,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에게서 도저히 나올 수 없는 해결 방식을 동원합니다. 물통 네 개씩 세 번이니까 열두 통의 물을 제물 위에 부어버립니다. 불씨가 와서 점화되어야 될 그 제물은 불붙기가 더 난감하기 짝이 없어지죠.

그런데 그 이유 때문에 물을 부은 것이 아니고요, 아까 미리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열왕기상 18장 38절,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현재 이 가뭄과 관련해서 ‘하나님께서 이 가뭄을 주시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하나님께서 언약적으로 이스라엘을 죽임으로써 심판하고, 가뭄으로 죽임으로써 거기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들어내는 작업은 멈추지 않는다.’라는 것을 엘리야를 통해 보여주는 거예요. 아예 핥아버렸어요. 열두 통의 물이 넘쳤다고 하지요. 물을 얼마나 퍼부었기에… 열왕기상 18장 35절에 보면 “물이 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하게 되었더라.”

다시 말해서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그동안 내가 너희가 하는 짓거리와 관계없이 하늘에서 단비를 내렸잖아. 단비 내릴 때 너희들은, 자기가 죽을 죄인인 것도 모르고 마땅히 단비를 먹고 마실 만한 정당한 자격이 있다고 하면서 이 땅에서 살았다. 하나님이 주신 단비 먹고 너희는 뭘 했느냐? 인간적인 자기의 잘남, 내가 살아야겠다는 것과 부합되는 바알과 아세라 신을 너희는 하나님이라고 그렇게 왜곡되게 섬겼잖아.”

그러니 네가 살고자 하는 그 자체가, 너희가 진짜 하나님의 일 하심을 훼방하고 방해하는 요소라는 거예요. 그럴 때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 사건을 반복해서 일으키고, 그 십자가 사건은 말씀 안에 들어있고, 말씀으로 우리에게 찾아와서 지적함으로써 ‘죽어 마땅한 우리, 날 살리는 게 아니고 주님이 하신 일, 십자가의 생명에 어떻게 구원의 능력이 있는 가를 알리기 위해서 우리를 계속해서 살려주고 있었다.’라는 사실을 우리가 매 순간 발견하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문제를 출제한 이유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하나님을 상상해서 만들어내지 말게 하옵소서. 성경에 나오는 지식들을 조합해서 ‘나 그 하나님 믿는다’라고 우기지 말게 하옵소서. 문젯거리가 우리 자신에게 있음을 깨닫게 해주시고, 마땅히 저주받아야 되고, 심판 받아야 되고, 굶어 죽어야 마땅함을 한시도 우리가 잊지 말게 하옵소서. 그래서 일용할 양식만으로도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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